2022-07-22

가부장에 도전하는 며느리들 - 이하천

한겨레 21

“길들여지고 싶지 않아!”
‘누구’와 ‘무엇’ 때문에 결혼했나… 가부장에 도전하는 며느리들

(사진/<나는 제사가 싫다>의 지은이 이하천씨. 그는 며느리는 시부모의 자식이 아니므로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어, 할아버지 제가 왜 당신 자식이죠?”

시아버지는 까무러칠 듯 놀라 말문이 막혔다. 며느리가 자식이라는 말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어디 있으며 그만큼 ‘아름다운 문화’가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이 맏며느리는 두눈을 똑바로 뜨고 말꼬리를 자르며 “당신 자식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식된 도리’는 무엇인가

지난 1월 말에 출판된 <나는 제사가 싫다>(이프 펴냄)라는 자전적 체험서는 작가 이하천(51)씨가 30년간 벌인 ‘시댁과의 전쟁’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며느리와 시부모는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하는 사이”라는 뜻을 전편에 역설한 지은이는 새로운 고부관계를 만들기 위한 전술을 제안한다. “가가호호 처지와 형편에 맞게, 며느리들이 앞장서서 가부장이라는 귀신과 싸우라!”는 것. 그의 이야기를 좀더 들어보자.

“결혼 직후 남편의 유학 길에 동행했다. 남편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시댁 식구들은 나를 몹시 환대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건 ‘나’를 환대한 게 아니었다. 아들을 뒷바라지했고 앞으로도 뒷바라지할 ‘어떤 여자’를, 동시에 시부모를 위해 봉사할 ‘젊은 여자’를 환영한 것이다. 20, 30대 젊은 며느리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시어머니와 사이좋게 지내려 애쓰기 전에 자기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확인하라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싸우라고 말이다. 그래야 진정 시어머니와 ‘친구’가 될 수 있다.”

제사문화로 대표되는 가부장적 부계질서에 대한 문제의식은 날로 다양해지고 있으나 현실은 아주 더디게 움직인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전히 명절노동은 며느리 몫이고, 평소 시댁 식구들에 대한 처신은 며느리의 품성과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충격요법이 아니고서는 대화를 통해 관계를 개선해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이하천씨가 ‘목적의식적’으로 싸워왔다면 다음의 사례는 ‘순리대로’ 싸운 경우다. 길음시장에서 국밥집을 하는 한영애(47)씨. 그는 다섯 자매 중 넷째딸이다. 결혼한 지 10년째 되던 해, 한씨는 명절 때는 친정으로 가서 홀로 사는 친정아버지와 함께 제사를 지내겠다는 결심을 한다. 한씨는 남편에게 의논하고 시댁 식구들에게는 통보만 했다. ‘평지풍파’였다. 한씨는 시아버지 제삿날 큰댁에서 시아주버니들, 시삼촌들의 술자리에 합석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친정아버지가 아내와 사별한 뒤 딸들을 어떻게 길러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자식된 도리’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말했다. 시댁 어른들은 결국 한씨에게 손을 들었다. 한씨의 선택은 십수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상당히 파격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대한 문제제기가 최초로 활자화한 것은 88년이다. 한국여성노동자회의 회보에 명절날 며느리의 고충을 그린 글이 실린 것이다. 가사노동자이거나 직장노동자인 며느리들이 명절 때면 이중의 노동에 시달린다는, 지금 시각으로 볼 때는 지극히 ‘소극적인 어조’의 내용이었다. 어쨌거나 ‘명절노동’의 실상을 공론화했던 그 ‘최초의 시도’는 해가 바뀔수록 차츰 몸을 불려나갔다. 덕분에 지금은 ‘남녀가 함께 일한다’ ‘딸도 조상 모실 수 있다’ ‘시집과 친정을 번갈아 방문하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온다. 의식의 변화는 교육과 훈련에 달려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함인희(41) 교수는 “사회는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으나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는 그 흐름을 타지 못하고 갈팡질팡한 모습, 과도기적 혼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한다. 가족 안에서 여성들의 대화가 단절되고, 가족 밖에서는 여성들을 보호할 장치가 없기 때문에 혼란은 더 복잡하게 얽힌다는 것이다. 결국 가족은 제도적 관계다. 변화할 수 있는 실체인 것이다.

“내 죽거든 네 맘대로 해라”

(사진/명절 때 며느리들끼리 힘을 합쳐 음식을 나눠 만들어 오는 포트럭이 확산 추세다. 영화 <안토니오스 라인>의 축제모습)

수원에 사는 이아무개(32·번역가)씨는 올 설날에 어떻게 시어머니를 대할지 맘이 편치 않다. 지난해 한가위 때 ‘돌발 사고’를 친 탓이다. 시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명절 때 시댁과 친정을 번갈아 가며 찾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시어머니는 “내 죽거든 네 맘대로 해라”고 한 뒤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씨는 시어머니의 완강한 의식에 질리기도 했으나 ‘전술’이 부족했다는 반성도 든다. 아예 정면승부할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까지 해봤다.

“시어머니를 좋아한다. 하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다. 서로의 역할과 임무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시댁과 며느리의 관계는 가부장적 질서에 따른 철저한 권력 관계다. 예를 들어 명절 때 쌩쌩한 시동생들은 자거나 놀고 나이든 형수들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도대체 며느리들은 ‘누구’와 ‘무엇’ 때문에 결혼했을까? 집안의 며느리를 피해자로 만드는 이런 관습은 ‘가짜’다. 여기에 길들여지지 않고 싶다. 다른 방법을 시도할 생각이다. 여러 생각이 있지만 우선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고부간의 갈등이 두드러지지 않는 경우는 대체로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대등한 ‘권력’을 가졌을 경우다. 예를 들어 며느리는 직장에 다니고 시어머니는 손주를 키워준다고 치자. 시어머니가 아이 양육비를 포함해 넉넉한 생활비를 며느리로부터 받을 경우, 주고받는 것이 분명할 때에는 갈등이 훨씬 줄어들기도 한다. 이런 ‘관계’에 비춰보면 우리가 성역처럼 받드는 가족은 결국 ‘허구적 이데올로기’라 여기는 이들도 있다.

이런 생각을 현실로 옮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갈등을 만드는 구조, 즉 혈연 중심의 가족공동체를 넘어선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만든다. 개개인이 ‘핵’화해 필요에 따라 가족이 되는 ‘셀프-헬프공동체’(스스로 서고 서로 돕는 공동체)가 대표적인 경우다. 우리 사회에서는 매매춘여성 쉼터나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 모자가정 등이 모여 사는 자립자조공동체(일명 자조공동체), 혹은 귀농공동체 등에서 새로운 가족유형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

우리 사회 ‘며느리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우리 사회 ‘가족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서울 쌍문동 ‘자립지지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공동육아연구원 김미령(44) 부소장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계 중심의 혈연공동체가 유일한 가족양식은 아니다. 뜻이나 조건이 맞는 이들이 한집에 살 수도 있다. 몸에 익은 습속이 절대적인 방식이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졌으면 한다. 어쩌면 지금의 가족 구조 안에서 대안이 찾아질 수도 있고 가족 구조 밖에서 찾아질 수도 있다. 무엇이 가장 좋은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제도라는 건 사람들의 필요와 상상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한겨레21 2000년 02월 17일 제2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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