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국가의 대위법 —‘대칭국가’와 ‘식민국가’
—The Counterpoint of Nation and State ―‘Symmetrical State’ and ‘Colonial State’―
개념과 소통
2020, vol., no.26, pp. 211-254 (44 pages)
DOI : 10.15797/concom.2020..26.007
발행기관 :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연구분야 :
인문학 >
역사학
윤해동 /Hae Dong Yun 1
1한양대학교
초록
반주권을 보유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 민족주의의 주권적 도구가 되었다. 민족이 주체가 된 국민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원리 위에 구축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장은 강한 현실적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반주권을 가진 상상 속의 저항국가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종의 반국가였다. 게다가 식민국가와의 대칭성을 통해자신의 상상을 구현하려 했던 측면에서 대칭국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주권없는 근대국가로서 상당한 국가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국가의 자율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심각한 제약을 갖고 있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하여 총독에게 강력한권한을 부여하였고, 자문기구인 중추원에 대의권과 입법보조 권한을 주었다. 이를 통해 취약한 국가자율성을 보완함으로써 상당한 정도로 ‘국가의 효과’를 제고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제국과의 분리와 통합이라는 딜레마를 안고 있던 식민국가였다. 식민지기 한국인은 대칭국가와 식민국가라는 두 개의 ‘정치체’에 소속된 ‘시민’이었다. 일반 한국인들은 대칭국가의 ‘국민’이었고 식민국가의 ‘주민’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전자는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로부터, 후자는 제국 본국의 ‘제국신민’으로부터 연원하는 소속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를 두고 가위 ‘민족’과 ‘국가’의 대위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의 관계에서는 하나가 다른 하나의 위에 군림하거나혹은 아래에 예속하지 않았다. 대칭국가와 식민국가는 서로 민족과 국가라는 정치적주체의 운명적인 대위법을 연주하고 있었다.
The limited sovereignty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llowed a nationalistic struggle for sovereignty to persist. Having been established upon the principle that building a new state must be at the hands of the Korean nationals, the Provisional Government had considerable authority. Being imagined as a state founded upon resistance, and only having semi-sovereignty, the Provisional Government was essentially a semi-state. It was also a symmetrical state, insofar as it attempted to realize its aspirations based on a model of symmetry which referred back to the colonial state. As a non-sovereign modern state, the polity administered by the Japanese Governor-General of Korea had great state capacity, but very limited state autonomy. To resolve this problem, considerable power was given to the Governor-General, while proportional representation and authority to assist in legislation were granted to the Central Council (中樞院), which was a consultative body to the Governor- General. State autonomy was thus reinforced and the “state effect” was significantly enhanced. Colonial Korea had an inbuilt dilemma, contrasting separation from and unity with the Empire. Koreans of the colonial period were citizens of two distinct political entities: the symmetrical state and the colonial state. The Korean public in general were both “nationals” of the symmetrical state and “residents” of the colonial state. The former had to do with the imagined community of “nation” and the latter with a sense of belonging to the “imperial subjects” of the Japanese Empire. Here, the counterpoint of “nation” and “state” becomes clear. Neither the nation nor the state was dominated by or subjugated to the other. The symmetrical state and the colonial state were effectively a fateful counterpoint as the political subjects of nation and state.
키워드열기/닫기 버튼
민족,
국가,
대위법,
대칭국가,
식민국가,
건국절,
국가론,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선총독부,
반주권,
반국가
Nation, State, Counterpoint, Symmetrical State, Colonial State, National Foundation Day, Theory of the Stat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Japanese Governor-General of Korea, semi-sovereignty, semi-state.
개념과 소통
2020, vol., no.26, pp. 211-254 (44 pages)
DOI : 10.15797/concom.2020..26.007
발행기관 :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연구분야 :
인문학 >
역사학
윤해동 /Hae Dong Yun 1
1한양대학교
초록
반주권을 보유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 민족주의의 주권적 도구가 되었다. 민족이 주체가 된 국민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원리 위에 구축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장은 강한 현실적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반주권을 가진 상상 속의 저항국가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종의 반국가였다. 게다가 식민국가와의 대칭성을 통해자신의 상상을 구현하려 했던 측면에서 대칭국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주권없는 근대국가로서 상당한 국가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국가의 자율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심각한 제약을 갖고 있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하여 총독에게 강력한권한을 부여하였고, 자문기구인 중추원에 대의권과 입법보조 권한을 주었다. 이를 통해 취약한 국가자율성을 보완함으로써 상당한 정도로 ‘국가의 효과’를 제고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제국과의 분리와 통합이라는 딜레마를 안고 있던 식민국가였다. 식민지기 한국인은 대칭국가와 식민국가라는 두 개의 ‘정치체’에 소속된 ‘시민’이었다. 일반 한국인들은 대칭국가의 ‘국민’이었고 식민국가의 ‘주민’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전자는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로부터, 후자는 제국 본국의 ‘제국신민’으로부터 연원하는 소속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를 두고 가위 ‘민족’과 ‘국가’의 대위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의 관계에서는 하나가 다른 하나의 위에 군림하거나혹은 아래에 예속하지 않았다. 대칭국가와 식민국가는 서로 민족과 국가라는 정치적주체의 운명적인 대위법을 연주하고 있었다.
The limited sovereignty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llowed a nationalistic struggle for sovereignty to persist. Having been established upon the principle that building a new state must be at the hands of the Korean nationals, the Provisional Government had considerable authority. Being imagined as a state founded upon resistance, and only having semi-sovereignty, the Provisional Government was essentially a semi-state. It was also a symmetrical state, insofar as it attempted to realize its aspirations based on a model of symmetry which referred back to the colonial state. As a non-sovereign modern state, the polity administered by the Japanese Governor-General of Korea had great state capacity, but very limited state autonomy. To resolve this problem, considerable power was given to the Governor-General, while proportional representation and authority to assist in legislation were granted to the Central Council (中樞院), which was a consultative body to the Governor- General. State autonomy was thus reinforced and the “state effect” was significantly enhanced. Colonial Korea had an inbuilt dilemma, contrasting separation from and unity with the Empire. Koreans of the colonial period were citizens of two distinct political entities: the symmetrical state and the colonial state. The Korean public in general were both “nationals” of the symmetrical state and “residents” of the colonial state. The former had to do with the imagined community of “nation” and the latter with a sense of belonging to the “imperial subjects” of the Japanese Empire. Here, the counterpoint of “nation” and “state” becomes clear. Neither the nation nor the state was dominated by or subjugated to the other. The symmetrical state and the colonial state were effectively a fateful counterpoint as the political subjects of nation and state.
키워드열기/닫기 버튼
민족,
국가,
대위법,
대칭국가,
식민국가,
건국절,
국가론,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선총독부,
반주권,
반국가
Nation, State, Counterpoint, Symmetrical State, Colonial State, National Foundation Day, Theory of the Stat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Japanese Governor-General of Korea, semi-sovereignty, semi-state.
===
연구 논문 10.15797/concom.2020..25.002
민족과 국가의 대위법 —‘대칭국가’와 ‘식민국가’ —
윤해동*
목차
1. 머리말
2. 한국 근대의 두 ‘국가’
3. ‘대칭국가’
4. ‘식민국가’
5. 맺음말– 민족과 국가의 대위법
반주권을 보유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 민족주의의 주권적 도구가 되었다. 민족 이 주체가 된 국민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원리 위에 구축된 대한민국임시 정부의 주장은 강한 현실적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반주권을 가진 상상 속의 저항국가 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종의 반국가였다. 게다가 식민국가와의 대칭성을 통해 자신의 상상을 구현하려 했던 측면에서 대칭국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는 주권없는 근대국가로서 상당한 국가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국가의 자율성이 라는 측면에서는 심각한 제약을 갖고 있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하여 총독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였고, 자문기구인 중추원에 대의권과 입법보조 권한을 주었다. 이를 통 해 취약한 국가자율성을 보완함으로써 상당한 정도로 ‘국가의 효과’를 제고할 수 있 었다. 조선총독부는 제국과의 분리와 통합이라는 딜레마를 안고 있던 식민국가였다. 식민지기 한국인은 대칭국가와 식민국가라는 두 개의 ‘정치체’에 소속된 ‘시민’이었 다. 일반 한국인들은 대칭국가의 ‘국민’이었고 식민국가의 ‘주민’으로 간주될 수 있
다. 전자는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로부터, 후자는 제국 본국의 ‘제국신민’으로부 터 연원하는 소속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를 두고 가위 ‘민족’과 ‘국가’의 대위법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의 관계에서는 하나가 다른 하나의 위에 군림하거나 혹은 아래에 예속하지 않았다. 대칭국가와 식민국가는 서로 민족과 국가라는 정치적 주체의 운명적인 대위법을 연주하고 있었다.
논문분야 한국사, 근대사, 정치사
주 제 어 민족, 국가, 대위법, 대칭국가, 식민국가, 건국절, 국가론, 대한민국임시정 부, 조선총독부, 반주권, 반국가
*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 geobookz@gmail.com
1. 머리말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와의 ‘전쟁’이 점점 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
다. 이 와중에 미국과 중국의 패권을 둘러싼 경쟁 역시 전도를 헤아리기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팬데믹이 전지구적인 일상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한 국가의 자기결정권이 커다란 의미를 갖기는 어렵다. 가히 ‘궐위의 시대’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국민국가 단위에서 통일되어 있던 정치와 권력이 ‘이혼’한 상태, 곧 정치는 국민국가 안에 서 작동하지만 권력은 전지구적인 단위에서 움직이는 상황을 일컬어 궐위의 시
대라고 불렀다. ) 이 궐위의 시대 혹은 혼돈의 상황에서, 국가의 위상과 역할이란 도대체 무엇 인가? 한국의 이른바 ‘건국절 논쟁’ )은 이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는 듯 하다. 2017년 집권한 문재인 정권은 이른바 ‘건국절 논쟁’에 호기롭게 다시 불 을 붙였다. 2017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내년 8.15는 정부 수립 70주년이기도 합니다.” )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인식하고,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을 ‘정부 수립’으로 ‘격 하’하였다.
이를 계기로 ‘건국절 논쟁’은 가히 백가쟁명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대표적으 로 대한민국 건국의 명분은 1919년에 있지만 역사적 사실은 1948년에 확인할 수 있다는 주장, ) 혹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 립한 1919년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1948년이 모두 건국의 과정이었 다는 논의 ) 등을 들 수 있겠다. 전자는 건국과 관련해서 명분과 사실을 분리해 서 해석하자는 것이고 후자는 건국에 단계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는 것으로서, 모 두 일정한 타당성을 지닌 논의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막상 건국 백주년이 되는 2019년이 되자 건국절 논의는 공론의 장에 서 조용히 실종되고 말았다. 정부의 정책과 논의과정에서 ‘건국 100주년’이라는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대해 정부는 공 식적으로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다. 여러 차원의 현실적인 혹은 논리적인 궁지 (窮地)가 뒤따랐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고육지책 이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 그리고 건국절 논쟁 역시 또다시 정돈 상태에 빠지 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2005년 이전에는 어떤 정치인도 정부수립과 건국을 엄격히 구분 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예컨대 김대중 정부 역시 ‘제2의 건국’이라는 슬로건과 관련해서 특히 1948년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간주하고 그 의의를 강조한 바 있
다. 요컨대 정부수립과 건국을 혼용하는 이런 인식에는, 하나의 민족이 ‘분단’된 상태임을 강조하고 통일을 지상과제로 상정하는 한 1948년 두 개의 정부 수립 이 두 개의 건국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혹은 그것이 갖는 딜레마가 반영되어 있다.
잘 알다시피 건국절을 둘러싼 논쟁은 2006년 경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국가주의’를 내세우는 ‘보수우파’ 진영과 ‘민족주의’에 침잠해있는 ‘진보좌파’ 진영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이 논쟁에서는 보수우파 진영이 공격의 선편을 쥐었
다. 2007년에는 광복절을 ‘건국절’로 개칭하는 법안이 제출되었고, 2008년에는
‘건국 60주년 기념행사’가 거행되었다. 상당 기간 숨을 고른 뒤, 앞서 본 바와 같이 2017년 문재인정권이 들어서면서 논란은 다시 가열되었던 것이다. ) 이른바 뉴라이트 논쟁이 시작된 이후 단속적으로 진행되었던 건국절 논쟁은 2019년 이후 다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이는 아마도 이 논쟁이 가진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요컨대 건국절 논쟁은 주로 기억 혹은 기념의 대상을 둘러 싸고 진행되었고, 이것은 정파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논쟁을 건국 여부를 둘러싼 사실 논쟁으로 끌고 가서는 안 된다는 비판도 이런 측면을 지적한 것이 겠다. ‘1919년 건국론’은 단지 이승만이 주도했던 ‘임정법통론’과 한국정부의 중앙정부로서의 위상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의 전통을 강조하기 위한 특별한 기 억방식이었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 또 건국절 주장만이 아니라 임정법통론에 입각한 1919년 건국설은 모두 승리의 서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역사를 왜곡 할 우려가 있는 논의라는 비판도 있다. ) 건국절 논쟁은 정파적 논리가 앞선 것 으로서, 엄밀한 학문적 차원의 논쟁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느 편이든 정치적 의도를 배경으로 한 주장이었으므로, 지속성을 가지기 어려운 측면이 있
었다.
건국절 논쟁이 기억과 기념을 둘러싼 것이라는 비판은, 그럼에도 건국절 논쟁 의 한쪽 측면만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건국절 논쟁이 국가의 건 국 곧 nation-building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국가의 성격을 둘러 싼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제 건국절 논쟁이 가진 국가론적 성격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 논쟁은 건국과 관련한 근대사의 공간과 시간을 확장하는 효과를 동반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공간의 확장 효과란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건국절 논쟁이 남한 내부의 좌우파 논쟁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내용적으로는 북한 정부의 성격을 둘러싼 해석이 이 논쟁에 깊숙이 개 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건국절 창설을 주장하는 뉴라이트운동 진영은 1948년 남쪽에서 수립된 정부 혹은 국가가 북쪽에서 수립된 정부 혹은 국가보다 훨씬 강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새삼스레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가진 건국으로서의 계기가 부각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인식에는 1948년 두 개의 정부수 립이 가진 등가성을 부정하는 인식 곧 ‘대한민국중심주의’가 바탕에 깔려있었 다. 이리하여 북한은 ‘야만’이며, 한국사의 정통성에서 제외해야 할 대상이 되었 던 것이다. ) 역설적이게도 건국절 주장을 통하여 북한 정권 수립의 성격을 둘 러싼 논의가 이 논쟁 속으로 끌려들어왔다.
그러면 시간의 확장 효과란 어떤 과정을 거쳐 드러나게 되었던 것일까? 건국 절 창설 주장에 대한 반대진영의 대응에는 복잡한 망설임이 존재하였다. 앞서 본 바와 같이, 1948년 건국설을 부정하는 진영에서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 부 수립으로 건국의 기원을 소급함으로써 이에 대응하려 하였다. 하지만 대한민 국임시정부의 유일 정통성은 그동안 한국 역사학계에서 그다지 널리 인정되는 학설이 아니었다. 식민지에는 독립과 건국을 향한 다양한 운동의 흐름이 존재했 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라는 해석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건국의 기원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소급하자 이런 ‘주류적인’ 해석은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였다. 게다가 1919년 건국론은 또 하나의 커다란 장애물을 마주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북한의 신정론적(神政論的) 역사해석 역 시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 김일성 탄생년인 1912년을 ‘주체 원년’으로 삼는 북한 역사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따위’의 건국론에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 었다. 그럼에도 건국절 창설 주장에 맞서기 위해서 그리고 북한과 공동으로 3ㆍ 1운동 백주년 기념행사를 기획하기 위해서, 1919년 건국설을 도입해야 했을 것 이다.
국가론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까지의 건국절 논쟁은 그 실체가 지극히 빈약 하였고 또 지독히 씁쓸한 뒷맛만 남긴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건국 절 논쟁이 던진 이런 착잡한 공간과 시간의 확장 효과로 말미암아 많은 해결 과제가 던져졌다고 할 수도 있다. 이제 학계로 ‘넘어온 공’에 대해 대답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건국절 논쟁 특히 1919년 건국론이 국가론적 차원에서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1948년에서 1919년으로 소급하여 확장된 시간 속에 존재하 는 두 개의 정치체(political polity) 곧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역사
적ㆍ정치적 성격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한국 근대 국가론 논의에 새로 운 불을 지필 때가 되었다.
이 글은 이처럼 건국절 논쟁을 계기로 새삼스레 제기된 논제인 근대 이후 국 가 논의의 실마리를 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를 위하여 우선 2장에서는 ‘근 대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논의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식민지기에 존재했던 두 개의 정치체 곧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선총독부에 관한 국가론적 차원의 논의 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를 위해 두 개의 국가 개념을 제시할 것인데, ‘대칭국가’라는 개념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그리고 ‘식민국가’라는 개념은 조선 총독부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아울러 근대 이후 식민지를 둘러싼 국가 논의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2장의 논의에 미루기로 한다. 이어 3장과 4장에서는 각기 대칭국가와 식민국가 개념을 사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선총독부의 국가 론적 성격을 따져보기로 한다.
2. 한국 근대의 두 ‘국가’
한국인들에게 ‘국가’란 무엇일까? 지난 백여 년의 역사 속에서 ‘국가’가 기능 해온 방식은 한국인들이 국가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 였다. 식민지 지배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국가 부재’ 상태로 인식되었고, 이 어지는 분단 상황 아래서 현실의 국가는 ‘정상적인 국가’가 아닌 ‘국가의 결여 태’로 수용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인들의 국가상(國家像)은 이원적으로 구성되어 버렸다. 국가가 있느냐 없느냐 혹은 그 국가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하는 방식 으로, 국가를 둘러싼 양 극단의 상태를 중심으로 국가의 모델이 단순화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국가론’은 그다지 가치가 없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건국절 논쟁은 역설적이게도 국가 논의의 빈곤을 드러내
는 바로미터에 지나지 않았다. 찬찬히 돌아보면 한국사회 국가론의 빈곤은 다음 네 가지 차원에서 잘 드러난다. 첫째, 임시정부 시기 ‘대한민국’의 국가로서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영토와 인민에 바탕을 둔 국가를 갖추지 못했으므로 전혀 국가로 볼 수 없는 것인가, 혹은 그럼에도 이 시기의 대한민국은 국가로 분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체제인가? 국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민족과 국가의 범주가 일 치하는 ‘일민족일국가론’에 국한되어버리면,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은 오히 려 국가로서는 미달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임시정부 출범 시기로 건국을 소급할 수 있을 것인가? 1919년 건국론자들만이 아니라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런 물음에 답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을 것이다.
둘째, 일본 제국주의 지배 시기에 식민지 통기기구 곧 조선총독부의 국가 성 격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시기는 그저 국가 부재의 시기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조선총독부는 어떤 국가로도 볼 수 없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제한된 범위에서는 국가의 성격을 가진 정치체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가론적 성격과 깊이 얽혀있는, 근대 한국의 국가론 논의 에서 중심적인 측면을 구성하고 있다.
셋째, 북쪽의 국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는 어떤 국가이고, 그 국가와 대한
민국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와 관련한 논의이다. 남북 두 개의 국가는 둘 모두 국민국가인가, 아니면 그에 이르지 못한 결손국가인가? 혹은 그것도 아니 고 어느 한 쪽만 국민국가인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분단국가 )라는 개념을 떠 올릴 수 있다. 분단된 상황 아래의 국가라는 점에서 분단국가라는 개념은 대체 로 엄밀한 개념규정 없이 사용되기도 한다. ) 하지만 이런 국가개념에는, 다음 에 거론하는 결손국가 개념과 마찬가지로 일민족일국가론이 전제되어 있는 경 우가 많고,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적 지향이 강한 개념규정이라 할 수 있다. 넷째, 대한민국은 어떤 국가인가에 대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온전한 국민국가 (혹은 민족국가) )인가, 아니면 거기에 이르지 못한 혹은 뭔가 결여된 국가인가? 대표적으로 ‘결손국가’(a broken nationㆍstate)라는 개념 )을 들 수 있는데, 이 는 한반도의 남쪽을 차지한 한국은 ‘온전한 국민국가’가 아니라는 인식을 논의 의 밑자락에 깔고 있다.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근대 민족주의 혹은 국민국가의 원칙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 처럼 원초주의적(primordial)이고 낭만적인 민족 이론을 원용하고 있다는 점에 서, 엄밀한 의미의 과학적 논의에는 미달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국가론의 빈곤 혹은 국가 논의가 처한 곤경은 역으로 근대사를 기술 하는 과정에서 ‘국가 중심의 논의’가 득세하는 상황을 낳았다. 근대 국민국가 수립의 실패를 한국사의 근대이행에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설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근대사를 기술하는 방식이 확산되었던 것이다. ) 더 나아가 근 대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민족운동’ 혹은 ‘민족국가건설운동(혹 은 국민국가수립운동)’이라고 정의하고, 국민국가 수립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근 대사의 가장 중요한 흐름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 이는 역사교육의 현장에서 도 동일하게 드러나는바, 중등학교 세계사교과서의 구성이 비서구의 경우에 ‘제 국주의 침략과 민족운동’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이는 국민국가 수립이 근대화의 핵심적 과제가 된다는 점에서 정당화되었다. )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설정함으로써 정작 국가 자체에 대한 심도 깊은 논 의는 실종되는 ‘기묘한’ 사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어쩌면 서구적 국민국가가 이 상적인 모델로 설정됨으로써 드러나게 될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구미의 국민 국가라는 표준에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현실의 정치체에 대한 관심은 스스로 억 압해버렸던 것이리라! 국가중심적 사고가 초래한 국가론의 빈곤이라는 기묘한 역설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건국논쟁을 통해 부각된 한국사회 국 가론의 빈곤 현상은, 근대 이후 한국에서 나타난 ‘여러 국가’가 지닌 복합적인 성격에서 파생한 측면이 크다. 거꾸로 이런 다양하고 복합적인 국가의 모습을 가졌다는 점에서 풍성한 국가론을 전개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갖추게 되었다 고 할 수도 있다. 단, 새로운 국가 논의를 위해서는 서구에서 기원한 그리고 민 족주의에 주박된 국가 논의의 도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절실하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하는 국가 개념에 대해 우선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 국가를 둘러싼 학문적 논의 역시 복잡하고 까다롭기로 악명높은 주제가 아닌가?
우선 국민국가(혹은 민족국가, nationㆍstate)와 근대국가(modern state)의 차이를
살펴보자. 국민국가 혹은 민족국가란 서구의 nationㆍstate에 대응하는 국가개 념으로서, 국가의 구성요소로서 nation을 전제하고 있다. 단 nation의 번역어
로서 무엇을 대응시키느냐에 따라 국민국가 혹은 민족국가로 용어가 달라지게 된다. 대체로 nation의 구성적 측면을 강조할 경우에는 국민이라는 개념을 사 용하게 되고, 종족적 혹은 인종적 요소 즉 ethnic group이 근대국가 구성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높게 설정할 때는 민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다. 한국에서 는 nation의 국민적 요소보다는 종족적 또는 인종적 요소를 강조하는 민족국가 라는 용법이 성행하였다.
다음으로 근대국가란 무엇인가? 오늘날 국가라는 용어는 근대국가와 동일한
것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근대국가는 15세기 전후 서구에서 처음으로 등 장하여, ) 전지구적으로 전파ㆍ확산되었다. 근대국가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상비군, 관료제, 조세제도 등의 수단을 통해 일정한 지역 내에서 중앙집중화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대내적으로는 사회질서 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대외적으로는 다른 국가들과 경쟁하면서 이들로부터 배타적인 독립성을 주장하는 정치조직 또는 정치제도이다.”20) 요컨대 안으로는 중앙집중화된 제도적 권력을 사용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밖으로는 다른 국
가들과 경쟁하면서 배타적인 독립성을 주장하는, 곧 주권(sovereignty)을 가진 정치체가 바로 근대국가인 것이다. 이처럼 근대국가의 국가성(stateness)을 드러 내는 가장 중요한 지표는 주권이다. 다른 한편 근대국가의 실제적 능력을 드러 내는 지표로서 국가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주권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근대국가가 국제적 제약을 받지 않고 행동하면서 목적을 성 취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 여기서는 우선 근대국가를 상 징하는 지표로서 주권과 국가의 자율성과 국가능력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거론 해두려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국민국가 혹은 민족국가는 근대국가의 한 유형에 해당하 는 것으로서, 근대국가의 하위범주를 구성하는 국가모델이라 할 수 있다. 일반 적으로 근대국가를 국민국가와 거의 동일한 내용을 가진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 지만, 그 차이는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사용하는 두 개의 국가 개념 즉 대칭국가와 식민국가는 각기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 것인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서는 대칭국가를, 조선총독부에 대해서는 식민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할 것인데, 두 개의 국가개념 은 모두 근대국가의 하위개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근대국가의 두 가지 지표 즉 주권과 국가의 자율성과 국가능력에 비추어 보면, 대칭국가와 식민국가는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가? 대칭국가는 불완전하나마 주권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 겠으나, 식민국가는 대내외적 주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자율성과 국가능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처지가 달라진다. 대칭국 가에는 물적 기반이 거의 부재하고 통치대상인 인민이 실제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식민국가에는 ‘영토’와 함께 통치대상인 ‘주민’ 그리고 상당한 물적 기반이 주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대칭국가로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실제적인 영토와 인민이 부재하
는 일종의 ‘상상 속에서 재현된 국가’ 혹은 ‘저항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식민국가라 부를 수 있는 조선총독부는 주권은 없지만 국가를 구성하는 물적 요소는 실재하는 국가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이 두 개의 근 대국가를 각기 다른 장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state and the global system”, Economy and Society, May 1991, Vol. 20, No 2.
3. ‘대칭국가’
1) 주권의 두 얼굴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격을 살펴보기 위해, 우선 주권을 가진 근대국가란 무엇인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근대국 가는 세계의 다른 국가 전체가 합의한 땅과 정치적 경계를 통해 지구상의 나머 지 땅과 분리된 땅을 의미한다. 그 내부의 정치적 상황이 어떻든, 분리된 영토는 모두 국가로 인정받는다. 이처럼 근대국가를 정의하는 두 가지 요소는 분리와 인정을 통한 국가의 장소성이다. ) 근대국가는 분리와 인정을 통해서 곧 주권 을 가진 국가로 간주되었다. 근대국가가 수립된 이후 이제 “지구상의 모든 땅은 국가의 점령 아래로” 서서히 들어가게 되었다. 지구상에는 어떤 무주지도 인정 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세계지도에는 어떤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 국가주권 에 기반을 둔 세계는 상호배타적인 영토 관할의 세계 즉 ‘중복 관할이 없는 세계’ 이다. ) 이를 두고 국가간체제(inter-state system)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근대국가로 인정받게 하는 것은 주권의 존재 여부이다. 주권은 우선은 대외적으로 독립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독립성은 대내적인 최고성으 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간주된다. 대외적으로 인정되는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권 위와 대내적으로 인정되는 최고의 절대적 권위가 합쳐져 근대국가의 주권이 된
다. 일반적으로 주권은 다른 모든 권위들보다 우월한 그리고 그 위에 존재하는 최상급의 권위로 인정된다. 국가가 주권을 갖고 있다면 최고성과 독립성이라는 기본성격을 가지게 된다. 주권은 근대의 정치와 법률에서 기본적으로 가정되는 권위 또는 그 기반이 되는 전제이다. ) 하지만 주권의 최고성과 독립성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는 주권이 가진 하
나의 동일한 특성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주권국가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주권은 자국의 인구를 향한 내향적 모습과 다른 나라를 향한 외향적 모습을 동 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전자를 대중주권, 후자를 영토주권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도 있다. ) 혹은 이를 인민주권과 국가주권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 주권이 가진 두 개의 얼굴을 두고, 주권의 ‘부정적 자기동일성’이라고 지칭하기 도 한다. 근대국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주권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두 얼굴을 가진 주권은 다시 그 모습을 다원화시키기도 한다. 혹자는 대외적 주권 즉 베스
트팔렌 주권(Westphalia sovereignty)과 국내적 주권(domestic sovereignty)에 더하여, 국제법적 주권(international law sovereignty)과 상호의존 주권(interdependence sovereignty)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 하지만 추가된 두 가지의 주권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변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국가로 인정받아야 비로소 주권이 존재하게 된다고 할 수 도 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주권의 존재 여부가 근대국가로 인정되는 조건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요컨대 17세기 서구에서 이른바 베스트팔렌체제가 성 립하였고 이는 주권이 발생하는 근거가 되었다. 반드시 주권이 근대국가와 국가 간체제 발전의 전제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주권은 언제나 구성적 산물
(social construct)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곧 인류는 평등하고 독립적인 주권 을 가진 근대국가로 구성된 국제체제 속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30) 그것은 단 지 ‘베스트팔렌 신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 정치의 장에서 주권이 분할불가능하고 절대적인 권위로 작동하 지 않는 경우를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주권은 분할가능하고 다원적이며 따라 서 매우 취약한 상상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31)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권적 성 격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주권이 가진 두 개의 얼굴 즉 대내적 측면과 대외적 측면을 나누어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실정치의 장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주권의 맨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주권의 두 얼굴을 따로 나누어서 각기 다 른 방식으로 접근해보아야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신생국 가 ‘대한민국’을 통치하는 조직으로 결성되었다.32) 이 조직은 말 그대로 임시정
부(provisional government)로서 선포되었는데, 이는 과도정부(interim gover-
nment)와 유사하거나 그 일부를 구성한다. 일반적으로 임시정부란 ‘정치적 이 행기에 수립되는 비상정부’를 의미하며, 새로운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권력을 유지한다. 또 역사상 임시정부는 혁명적 임시정부, 권력공유 임시정부, 관리인 (caretaker) 정부, 국제적 과도정부 등 4가지로 분류되기도 하는데,33)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가운데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또 임시정부는 망명정부(government in exile)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망명정
International Society and the Establishment of New States Since 1776, Oxford University Press; Richard Joyce, 2013, Competing Sovereignty, Routledge.
30) 얀 지엘론카, 신해경 역, 2015, 『유럽연합의 종말』, 아마존의 나비, 121-125쪽.
31) 김성주, 2006, 「주권개념의 역사적 변천과 국제사회로의 투영」,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
27집 2호.
32) 「대한민국임시헌장」,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 - 헌법ㆍ공보』, 국사편 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3) Y, Shine and Juan Linz, 1995, Between States: Interim Governments in Democratic Transiti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p.5; 이해영, 2019, 『임정, 거절당한 정부』, 글항아리, 18-22쪽 재인용.
부란, 정당성을 갖춘 적법정부가 외부 침략이나 내부 혁명 등의 사태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해외로 권력 행사의 장소를 이전하여 정주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망명정부는 대개 법적 계속성이 담보되는 것으로 인정되며, 본국으로 귀환하여 이전의 권력을 회복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임시정부는 약 50건, 망명정부는 80건에 이르는 사례가 보고되어 있다고 한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런던에는 공식적으로 8개의 망명정부 가 체류하고 있었으며, 망명정부는 아니지만 드골의 자유 프랑스(Free French) 까지 포함하면 모두 9개의 국가 혹은 정부가 머물고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연 합국 정부는 8개국 망명정부를 모두 승인하고 외교특권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조처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자유 프랑스 정부는 결국 국제법적 승인을 받지는 못했다. ) 망명정부와 임시정부의 차이는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겠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획득하는 것은 국가로서의 대외적 독립성 즉 대외적 주권을 확보하는 데에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진 일로 인식되었다. 이는 주권이 가진 두 개의 얼굴 가운데 하나를 확보하는 것으로서, 특히 해외에 서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로서는 존망이 걸린 문제로 간주되었다. 1919년 4 월 11일 공포한 ‘대한민국임시헌장’에는 국제연맹 가입이 규정되어 있었고, ) 이를 기초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임시정부가 승인받을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 고 있었다. 단 초기에는 국제적 승인이 초미의 과제로 인식되지는 못했다. 단지 1919년 7월 대한적십자회가 상해에서 조직되었는데, 이는 임시정부에 대한 국 제적 관심과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활동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었다. )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이 초미의 과제로 떠오르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 발발한 이후였다. 1942년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교 전단체(belligerent)로 승인하려 하였다. 1차 세계대전기 파리의 체코 인민위원
회를 미국이 ‘공동작전단체’로 승인한 사례를 들어, 임시정부를 교전단체로 승 인하고 ‘국제법적 교전권’을 부여하자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었다. 임시정부 역 시 국제적 승인을 획득하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지만, 미국의 정책 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정부의 관할지역에서 그 지원을 받아 주권적 활동을 허가받았는데 이를 ‘사실상의 승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940년 9월 임시정부는 ‘군사조직법’에 근거하여 국민당정부의 허락을 받아 한 국광복군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광복군의 작전권과 지휘권은 ‘광복군 행동준승
(行動準繩)’에 의해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 귀속되었다. 행동준승은 1944년 9월에 취소되었지만, 마지막까지 국제적 승인은 보류되었다. 결국 ‘법률상의 승 인’은 허락받지 못한 것이었다. 요컨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를 수용한 국가 즉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부분적으로’ 주권 행위를 허가받았으나, 전면적인 국제적 승인은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임시정부는 ‘대일선전’을 포고하였다. 1910년의 병합조약과 일체의 불평등조약은 무효이고, ‘한국의 전체 인민’은 반 침략전선에 참가하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軸心國)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고 선언하였다. ) 1944년 7월에는 국제적 승인이 타당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반침략전쟁에서의 한국의 임무」라는 비망록을 발표하였 다. ) 임시정부는 26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 독립군과 독립운 동을 영도하는 유일한 기구이므로,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에도 미국은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결국 보류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 부는 한국 내 어디서도 행정적 권한을 행사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현재 한국의 대표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망명상태에 있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제 한이 많다는 점, 따라서 나중에 한국인들이 가진 정부와 임원의 선택권을 손상 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 등이 불승인의 이유로 거론되었다. ) 이는 대한민국임 시정부가 유엔 창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정부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에 대한 태도는 이 처럼 대단히 미온적인 것이었다. 이를 두고 일종의 ‘베스트팔렌’ 강박이라고 부
를 수 있을 것이다. )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망명정부가 아니었던 탓에 국제적 승인을 획득할
수 없었으며, 임시정부를 수용한 국가인 국민당 정부하의 중국에서조차 아주 부 분적인 주권활동만을 보장받은 상태였다. 요컨대 임시정부는 대외적인 주권의 아주 미약한 부분만이 승인되었을 따름이다. 수용국 정부의 ‘사실상의 승인’을 부분적으로 획득한 정부 다시 말하면 대외적으로 ‘부분적인 주권’을 획득한 상 태에 놓여있던 정부가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반주권’
앞서 본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전혀 영토를 점유하고 있지 못했고, 또 대외적 인 주권을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이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분할된 주권 가운데 하나 즉 대내적 주권의 존재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임시정부는 인민주권 혹 은 대중주권의 차원에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앞서 본 「대한민국임시헌장」에는 임시정부의 주권의 권원을 밝히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포함되어 있다. “本政府가 全國民의 委任을 受하여 組織되었나니 本政府가 全國民으로 더불어 傳心코 戮力하여 臨時憲法과 國際道德의 命하는 바를 遵守하여 國土光復과 邦基確國의 大使命을 果하기를 玆에 宣誓하노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전국민의 위임을 받아서 조직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전 국민과 더불어 국토의 광복과 국가의 수립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우리의 人道가 마침내 日本의 野蠻을 敎化할지오 우리의 正義 가 마침내 日本의 暴力을 勝할지니” )라고 하여, 국가 수립의 보편성을 내세우 고 있다. 임시정부가 ‘상징정부 중심주의’를 채택하고 있지만, ‘국민의 위임’ 즉 ‘국민주권’에 토대를 둔 정부이고 따라서 보편적인 국민국가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는 임시헌장 제1조에서 천명하고 있는 ‘민주공화제’의 토대가 되 었다. 잘 알다시피 임시정부는 이른바 ‘전단정부(傳單政府)’ 혹은 ‘지상정부(紙上政
府)’를 포함하여 모두 7개의 정부를 합친 것이었다. 국내외 각지에 흩어져 있던 7개의 정부가 해외에서 모여 하나의 임시정부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 통합정 부에서는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하였는데, 여기에는 주 권의 권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제1조에서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대한 인민’임을 밝히고, 2조에서는 주권이 대한인민 전체에 있다고 공포하였다. 이어 3조에서 강토는 구한제국(舊韓帝國)의 판도로 정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국민 과 주권과 영토의 범위가 확정되었던 것인데, 이는 대한민국이 헌법적 차원에서 국민국가로 출발했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
임시정부가 인민주권론에 입각한 민주공화제 정부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점에 서,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의회와 정부의 성격을 특히 주권론의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먼저 의회격인 임시의정원은 1919년 4월 25 일 열린 3차회의에서 ‘임시의정원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로써 임시의정원의 법 적인 근거가 마련되었다. 의정원은 각 지방 인민의 대표로 조직하기로 하고, 인 구비례로 30만명 당 1인이라는 원칙에 따라 모두 51명의 의원을 선출하였다. 국내선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상하이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의원을 선거하였다. 1919년 4월 30일의 임시의정원 4차회의부터는 선출된 정식 의원 들이 중심이 되어 회의를 개최하였다. ) 이처럼 임시의정원은 출신지역을 안배하여 대표를 선정하기는 했으나, 실제 로는 해외로 망명한 사람들의 대표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대내적 주권의 존재 를 주장하는 데에 어려움을 갖게 하였다. 임시정부 내부에서는 이를 돌파하는 논리로 임시의정원이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단지 독립운동자 혹은 광복운동자 가 주권을 ‘대행’하고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 임시의정원이 가진 이 런 취약한 대표성은 이후 임시정부의 위상이 흔들리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
가 되었다. )
임시정부는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를 구 성하였으며, 본국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내정통일책’을 추진하였다. 임시정 부는 1919년 11월 5일 「대한민국임시관제」를 공포하였는데, 여기에는 임시정 부 조직의 대강이 들어있다. 통합 임시정부는 대통령제와 내각제를 절충한 권력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임시대통령 직속기구로는 대본영, 참모부, 군사참의회, 회계검사원 등의 독립기구를 설치하였으며,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국무원 산하 에는 내무부, 외무부, 군무부, 법무부, 학무부, 재무부, 교통부, 노동국 등의 각 부와 서무국, 법제국, 전계국(銓稽局) 등 독립조직을 두었다. ) 그러나 이는 현 실과 유리된 지나치게 방대한 조직이었으며, 국가주의적 이상에 치우친 비현실 적인 조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는 직원도 채우지 못하고 사업도 없는 조직이 많았다. 애국금을 모집하고 독립공채를 발행하여 임시정부의 재정을 마 련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개혁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하였고 이는 곧이어 내분 으로 폭발하였다. 특히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주도하던 ‘구미위원부’의 외교활동 지원비를 둘러싼 갈등이 초기의 핵심적인 사안이었다. )
‘내정통일책’은 본국과의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통치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서, 임시교통국을 설치하고 연통제를 실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연 락기관인 교통국은 실제로는 서울을 제외한 한강 이남지역에서는 설치되지 못 했다. 또 1919년 7월에는 ‘연통제령’을 발포하여 국내에서 지방자치제를 그리 고 해외의 교민을 대상으로는 거류민단제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이 되면 임시교통국과 연통제 조직은 거의 대부분 붕괴되고 말았다. ) 임시정부는 식민지배가 종결될 때까지 5번이나 헌법을 개정하였지만, 인민주 권의 원칙은 강고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 게다가 임시정부는 이른바 ‘고유주 권’이라고 일컬어지는 새로운 주권 개념을 추가로 공포하였다. 1941년 11월 발 포된 ‘건국강령’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 민족의 반만년래로 공동한 말과 글과 국토와 주권과 경제와 문화를 가지고 공동 민족정 기를 길러온 우리끼리로서 형성하고 단결한 고정적 집단의 최고조직”이라고 하 여, ) 민족 형성 이래 주권은 고유하게 주어진 것이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고유주권 선언은 ‘민족주의에 입각한 주권’의 상상적 선언이었던바, 대내적 주 권의 역사성과 고유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1939년 이후 좌우 연립정부가 구성되고 광복군이 결성됨으로써 임시정부 의 정치력이 강화되자, ‘복국’과 ‘건국’을 위한 구체적인 방책을 수립하는 데에 노력을 경주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대내적 주권을 확보하는 데서 구 체적인 진전을 보이지는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임시정부가 가진 대내 적 주권은 단지 선언적 수준에 그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비록 현실에서 지배력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선언적 수준의 대내적 주권조차도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허사(虛辭)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임시 정부의 인민주권 선언은 상상 속에서 실현된 대내적 주권이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주권은 구성적인 것이다. 게다가 역사적 경험 속에서 ‘중 첩된 주권’을 발견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편적인 것은 아니지만, 영토주권이 영국-이집트의 공동통치국이었던 수단(1899-1956)의 사례처럼 공 동으로 존재한 사례도 있다. 단지 그 변화의 성향과 방향은 관할의 배타성에 기 초한다. 또 미국 헌법 아래에는 세 종류의 주권을 가진 정부 곧 연방정부와 주정 부 그리고 아메리칸 인디언 정부가 있다. 그 가운데 아메리카 인디언 정부는 중 첩된 주권 혹은 반주권 국가로 간주되는바, 여기에서 사는 사람들은 세 가지 종 류의 주권에 귀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53) 게다가 주권은 공유되거나 통합될 수도 있는데, 유럽연합의 정치적 법률적 권위가 갖는 성격에서 이를 잘 확인할
수 있다.54)
이 렇게 본다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인민주권 선언은 현실과 상상이 ‘중첩된 주권’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 절에서 살펴본 대외적으로 확보한 ‘부분적인 주권’과 인민주권 선언으로 확보한 상상 속의 ‘중첩된 주권’을 합쳐 일단 ‘반주권(半主權)’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3) ‘대칭국가’라는 상징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한용운은 조선의 독립은 기존의 국가를 복구하는 것 이라는 점을 자신의 선언문에서 강조한 바 있다. 즉 조선 자체에 국가 독립의 요소인 토지와 국민 그리고 정치가 구비되어 있고, 각국의 승인도 이전에 조선 에서 행했던 국제 교류의 전통 속에서 상호 호감을 가진 바 있으므로 전혀 문제 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정의와 인도 그리고 민족자결이 지배하는 시대로 진입했으므로, 각국은 당연히 조선의 독립을 바라고 도와줄 것이라고 확 신하고 있다고 했다. ) 이어서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국가의 흥망은 일조일석 에 되는 것이 아니오, 어떠한 나라든지 제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금번의 독립운 동 즉 3ㆍ1운동은 ‘총독정치의 압박’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 조선인들의 복국 을 위한 운동이라고 강변했다.
한용운으로 대표되듯이, 조선인들에게 국가는 원래부터 주어져 있었던 것으 로 인식되었다.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병합 직후 내세웠던 ‘무형국가’ 수립 주장 은 이런 인식에서 나온 것이었던바, 이는 이후 ‘망명정부’ 및 ‘임시정부’ 결성 추진으로 이어졌던 것은 잘 아는 바와 같다. ) ‘왕조국가’이긴 하지만 기실 조 선인들에게 국가란 거의 단절된 적이 없는 역사적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게다가 병합 이전 십수년 동안 존재했던 대한제국은, ‘극장국가’로 표현되듯 그 정치적 효과가 강렬한 경험으로 잔존해있었다. )
1880년대 이후 일본을 통하여 조선에도 근대국가로서의 국가 개념이 도입되 어 차츰 정착해갔다. ) 이에 따라 국민주권에 입각한 것인가 아닌가에 차이가 있었지만, 여러 갈래의 근대국가 수립운동이 진행되었다. 대한제국 역시 이 운 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근대국가의 성격과 관련해 서는 이 시기에 부상한 애국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90년대 후반부터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서 애국론이 부상하고 있었는데, 근대국가의 국민 형성을 위한 토대로서 애국심 혹은 애국정신이 강조되었다. 이어 통감부가 설치되고 대한제 국 주권의 일부가 잠식되자, 다시 애국론이 주목되었다. 이 시기 애국심은 근대 국가 형성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었지만, 차츰 국민의 정치참여 가능성이 희박 해지면서 ‘가족국가론’과 결부된 ‘자연적 애국심’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현실의 국가가 존재하지 않게 되면서 애국심의 대상은 사라지고, 애국론은 자연스레
‘민족주의’로 변용되어 갔다.6 )
근대국가의 기억은 민족주의와 결합하게 되었고, 이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는 이전부터 오랫동안 존재했던 국가의 자연스런 연장으로 이해되었다. 조동걸 은 이를 두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주권적 의지의 표상으로서 한국 인의 ‘이념상의 정부’로 존재해왔다”고 썼다. )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갖는 주권 적 측면은 명분과 실질의 양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곧 독립을 준비하는 기구 즉 국가주의적 이상을 표현하는 명분적 측면과, 독립운동 의 최고기관이라는 실질적 측면에서 임시정부는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요 컨대 존재가치라는 명분과 역할가치라는 실질의 양면에서 임시정부가 갖는 의 미가 가볍지 않았다. )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념상의 정부’로서, 저항성을 담 보한 ‘상상 속의 국가’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어떤 국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민족이 국가를 정복하였다는 말로 ‘국민국가의 역설’을 설명한 다. 아렌트의 말을 구체적으로 들어보자. “국민국가의 비극은......국민의 의사라 는 명목으로 국가는 단지 ‘국민’들에게만 시민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출생 이나 혈통의 권리로 인해 국가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만 온존한 시민권과 정치권리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국가가 부분적으로 법의 도구로부터 국 민의 도구로 전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요컨대 민족주의로 말미암아 국민 국가는 민족의 도구로 전도되고, 시민이 민족의 구성원과 동일시되는 현상이 나 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제국주의적 국민국가’는 시민 즉 민족으로부 터 소외된 식민지로 하여금 그들이 새로운 국민국가를 상상하게 하는 매개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아렌트가 말하는 ‘국민국가의 역설’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자신이 주권을 담지한 정치적 주체임을 주장하였고, 이 는 자신이 새로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한 민족주의의 도구가 되었다는 선언이기 도 했다. 새로 등장한 임시정부는 기꺼이 한국 민족주의의 주권적 도구가 되고 자 했던 것이다.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윌슨이 조선인들의 ‘메시아’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민족이 주체가 된 국민’이 새로운 국가를 건 설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강력한 현실적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제국주의 국민국가 즉 식민 본국뿐만 아니라, 식민지에 존재하는 ‘식민국가’ 역시 국민국가를 상상하고 학습하는 중요한 매개가 되어주 었다. 식민지는 식민지 본국뿐만 아니라 식민국가를 통해서도 새로운 국민국가 를 상상하고 학습하고 있었다. 주로 상상 속에서는 식민지 본국의 모습을 통해 서,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조선총독부 즉 식민국가의 대응을 통해서 근대적 국민 국가를 상상하고 또 학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런 측면에 서 ‘대칭국가’로서의 면모를 갖고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민국가의 역 설’에 의해 재현된 국가 그것이 곧 대한민국임시정부였고, 그런 의미에서 대칭 국가였던 것이다.
앞서 본바 부분적이고 중첩적이지만 ‘반주권’을 보유하고 있던 대한민국임시 정부는, 대칭국가로서 일종의 반국가(半國家)로 규정할 수 있다. 몰타기사단은 120개 국가에서 의료봉사를 지원하는 가톨릭단체이지만, 국제법적 주권을 유지 하는 조직이다. 영토도 없고 항구적인 국민도 없지만, 유엔의 세 번째 회원자격 즉 ‘유엔에 옵서버로 참가하라는 초대를 받은 독립체’로서의 자격을 가진 유엔 의 회원국이다. 몰타기사단을 반국가로 규정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반국가로서의 자격을 가진 정치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
4. ‘식민국가’
1) 주권 없는 ‘근대국가’
1910년 대한제국은 제국주의 국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annexation)’되 었다. 이는 외국 세력에 의해 자국 영역이 강제로 이양당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제국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의 국제법적인 병합은 타국 영역에 대한 군사적 점령 혹은 정복에 머물지 않고, 그 영역에 대한 법률적 권한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즉 제국주의 국가는 병합한 타국의 영역에 대해 일반적으로 주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또 조약을 통해 자국 영역을 증여 혹은 매각하는 할양(cession)과는 달 리, 병합은 그 영역을 실질적으로 소유함으로써 실효적인 힘을 발휘하고 이에 대해 일반적인 승인을 얻음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 이 것이 국제법적 차원의 병합이 의미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획득을 위한 모험은, 이처럼 새로운 주민 과 영토가 국민국가에 통합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보호국’으로 지배되어야 하는 지 혹은 다른 방식으로 지배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매우 중요한 ‘헌법적 쟁점’ 을 제기하고 있었다. 이는 일정한 영토를 갖고 공통의 국민이 거주하는 정치적 실체로서의 국민국가 개념 곧 국민국가의 전통적 토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기 도 했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는 이런 제국주의적 팽창이 국민국가의 설립근거 인 ‘동의의 원칙’을 주변으로 밀어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 이는 인민주권의 원 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식민지에서의 인민주권의 부정은 제국주의 국가의 ‘폭력 독점’에 의해 가능하 게 된 것이었다. 물리적 폭력의 독점은 근대국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 으로 간주되어 왔다. 막스 베버의 근대국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의가 가장 널 리 인정되고 있다. 근대국가란 “주어진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 사용의 독점을 실효적으로 행사하는 인간공동체”라는 규정이다. ) 요컨대 근대국가는 ‘정당한 물리적 폭력의 사용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인데, 폭력의 독점이 용인되 는 근거는 폭력의 정당성에서 주어진다. 따라서 근대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이 정 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합법성과 아울러 시민의 동의에 토대를 두어 야만 한다. ) 그럴 때 즉 국가가 독점한 폭력이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때, 국가는 대내외적으로 주권을 확보하고 그를 행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에서 독점하고 있는 폭력은 정당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정당한 물리적 폭력이란 시민의 동의 즉 인민주권적 근원을 갖는 폭력 이어야 한다. 식민지에서는 인민의 동의에 의해 폭력의 독점이 가능한 것이 아 니라, 역으로 폭력의 독점에 의해 비로소 인민주권이 부정되었던 것이다. 따라 서 식민지에서의 권력은 인민의 동의가 없는 즉 주권이 없는, 그럼에도 물리적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그런 권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식민지 권력은 대개 ‘주권’ 없는 ‘근대국가’인 경우가 많다. 조선총독부 권력은 그런 점에서 전형적인 식민 지 권력이다.
주권없는 근대국가로서의 식민지 권력을 특징짓는 가장 근대적인 면모는 바 로 ‘국가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국가능력은 한편에서 국가의 자율 성과는 다른 개념이다. 국가 자율성 개념은 근대국가가 국내적, 국제적 정책목 표를 형성하고 추구하는 데 있어 독립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국가의 실제적 능 력과는 구분하여야 한다. 사실상 국가 자율성은 국민국가가 국제적이고 초국가 적인 제약에 관계 없이 행동하고, 목적이 일단 제기되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지칭하는 것이다. ) 따라서 식민지 권력은 대개 물리적 폭력을 독점하 고서 상당한 국가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국가자율성의 측면에서는 심각한 제 약을 갖는다. 이런 식민지 권력의 국가로서의 능력과 아울러 그 제약성을 함께 잘 보여주는 요소가 바로 ‘식민지 관료제도’이다. 한나 아렌트는 식민지에서 관료제도가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국민에 의한 다른 국민의 즉 영국국민에 의한 인도국민의’ 통치가 불가능하 기 때문에 관료제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관료제도는 언제나 전문가 즉 ‘숙련된 소수’의 통치였다. 이 소수는 ‘비숙련 다수’로부터의 끊임없는 압력에 저항해야 만 했으며, 또 어떻게 하면 그것에서 벗어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영국의 이집 트 통치를 담당하고 있던 크로머는 관료를 ‘제국주의 정책의 집행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지닌 도구’라고 묘사했다. ) 인민의 동의에 기반하지 않는 식민지 통치 즉 ‘주권 없는 근대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효율적인 식민지 관료제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효과적인 관 료제도를 통하여 국가능력을 자의(恣意)함으로써 국가자율성이 가진 제약을 돌 파해야 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잘 발달된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중앙집권 적 관료제도를 큰 마찰 없이 효과적으로 흡수하였고, 이를 토대로 매우 효율적 이고 근대적인 관료제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잘 작동하는 관료제도를 기반으로 조선총독부의 통치는 폭력적이고 ‘무단’적인 방식으로부터 차츰 비폭력적이고 ‘문화’적인 방식으로 이행해갔다. 강력한 총독 권력에 기반을 둔 근대적인 관료 제도는 지방통치에까지 잘 이어져 있었다. ) 식민지배 말기 총력전체제적 ‘전 시 총동원’도 이미 구축되어 잘 작동하고 있던 관료제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 다. 효율적인 관료제도가 기반이 되지 않는 전시 총동원이란 상상할 수 없는 것
이다. 이런 점에서 강력한 중앙집중적 관료제도에 기반을 둔 식민지 근대국가가 ‘과 대성장국가’로 개념화된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해방 후 군사독재 시기 의 국민국가를 ‘관료적 권위주의’ 국가로 묘사했던 일군의 연구자들은, 그 기원 을 식민지기의 과대성장한 근대국가에서 찾았다. ) 시민사회에 비하여 지나치 게 크게 성장한 식민지 근대국가는 포스트 식민시기의 관료적 권위주의 국가 형성에 역사적 토대로 작용한 것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식민지의 ‘주권 없는 근 대국가’가 ‘과대성장국가’의 기원으로 간주되는 데에 관료제도는 가장 중요한 매개가 되었다. 2) 조선총독부와 ‘국가의 효과’
인민주권의 부재로 인한 심각한 국가자율성의 손상은 단지 식민지의 내부로 부터만 오는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 근대국가는 안팎에서 오는 ‘주권의 역설’에 도 적극적으로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주권의 역설이란 무엇인가? 주권이 형성 되는 과정에서는 항상 주권자의 ‘자의(恣意)’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바, 대개 이를 두고 주권의 역설이라고 지칭한다. 주권자는 항상 법질서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 에 존재하며, 따라서 법의 효력을 발생시키거나 정지시킬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가진 주권자는 법적으로는 법의 외부에 위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근대국가의 주 권은 법치의 통일성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주권 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 식민지 근대국가의 주권은 밖으로는 천황제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 본국으로 부터의 통제에 의해, 그리고 안으로는 식민지에서 형성되고 있던 ‘국민화과정’ 의 힘에 의해 견제되고 제한되고 있었다. 전자를 주권적 자의의 제국주의적 기 원, 후자를 주권적 자의의 식민지적 토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양쪽으로부 터의 주권적 자의가 식민지 근대국가의 불완전함을 구성하고 있었던바, 이를 두 고 식민지 근대국가의 주권적 역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조선총독부는 주권의 역설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천황제 국가로 운영되고 있던 본국에 조선인들을 처음부터 완벽하게 동화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밖으로 부터 오는 주권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요컨대 본국의 개입과 견제를 운명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식민지의 운명이라면, 대내적인 주 권의 역설을 보완함으로써 국가자율성의 손상을 방지해야 했던 것이다.
식민지 근대국가는 대외적 주권을 갖지 않고 대내적 주권을 보유한다고 설명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국민국가와 식민국가를 구별하는 매우 중요한 정치 적이고 법률적인 사실 즉 대내적 권위가 독립적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국가의 대내적 권위는 제국 정부에 의해 위임된 것 으로, 제국 정부는 최종명령을 내림으로써 식민지에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식민국가는 세계정치의 대양을 독립적으로 항해하는 권위를 실질적으로 갖고
있지 않았다. )
요컨대 조선총독부는 인민주권의 부재라는 대내주권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적 극적인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그 장치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되었는 데, 하나는 총독의 권력을 강화하여 법의 안정성을 약화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 나는 식민지 인민들로 하여금 입법권과 대의권을 ‘보완’하게 하여 인민주권의 의장(儀裝)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즉 전자는 총독에게 제령권(制令權)이라는 일종 의 입법권을 부여하는 것이었고, 후자는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대 의권과 입법보조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양자는 매우 모순적인 조치로 보이 지만, 모순을 통해 서로를 보완하고 있었다. 먼저 전자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식민지에서 법의 안정성을 지나치게 강화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제국주의자들을 잘 알고 있었다. 크로 머가 통치하던 이집트의 사례가 조선에서도 도움이 되었다. 크로머는 이집트 통 치과정에서 ‘합병선언’을 포함하여 ‘쓰여진 도구 또는 실체가 있는 모든 것’을 피했는데, 이는 이집트와 맺은 조약에 대한 의무를 지지 않고 오로지 ‘팽창의 법’에만 복종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집트에서 근무하는 영국의 관료는 모든 상황을 따로따로 법령으로 처리하면서, 보편적인 법을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회피하였다. 보편적인 법을 제정하면 즉 법적인 안정성이 확보되면, 누구나가 법에 복종해야만 했다. 다시 말하면 법적인 안정성이 주어진다는 것은 영구적인 공동체를 확립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안정적이고 영구적인 공동 체에서는 누구도 신이 될 수 없었다. 이는 식민지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상황이 었다. 크로머는 이집트에서 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의 총독에게 신에 준하는 위상을 부여하려 했다. 행정, 입법, 사법에 걸치는 조선에서의 모든 권력을 총독에게 집중시켰다. 제령은 총 독이 발령하는 ‘위임명령’이었지만, 이는 조선에서 새로 만들어진 입법권이었 다. 인민의 동의는 완벽하게 무시되었고, 법령을 제정하는 권한은 총독 혹은 천 황에게 위임되었다. ‘신이 된 총독’ 혹은 ‘신이 되려 했던 총독’은 조선에서 법의 안정성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상징이 되었다. 이는 제국 본국의 주권의
자의를 표상하고 있었다. )
대한제국의 자문기구로 만들어진 중추원은 식민지에서도 총독의 자문기관으
로 생명을 연장하였다. 1910년대에 중추원은 관습조사 기능을 위임받았는데, 관습의 조사와 확정과정은 입법행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역능을 부여하였다. 중추원회의에서는 조선의 구관(舊慣)과 관련한 자문사항을 주로 논 의하였으며, 이후 조선의 민사관습 관련 사항에 대한 중추원의 답신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또 1921년부터 지방참의를 임명하여 지역의 대표성을 강화한 이후, 중추원 내외에서는 중추원의 역할을 ‘조선의회’로까지 상승시키려는 논의 가 단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부작위적’으로 ‘유사 입법기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식민지기 이래 친일ㆍ협력을 상징하는 기 관이었던 중추원이 가진 이런 아이러니는, 조선인들의 유사 대의권과 입법권을 보완함으로써 인민주권의 의장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인민주권의 부재로부터 오는 국가자율성의 약화라는 사태를 보
완해야만 했다. 안팎으로부터 오는 주권적 자의가 가진 역설을 극복함으로써, 근대국가로서의 위상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국가의 효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조선 총독에게 위임명령권 즉 제령권을 부여함으로써 신으로 만들려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추원에 유사 입법기구로서의 위상을 부 여하여 인민주권의 의장을 강화하려 하였다. 이런 모순적인 조치를 통해 조선총 독부는 국가의 효과를 강화할 수 있었고, 주권의 부재를 어느 정도 은폐할 수 있었다.
3) 식민국가라는 모델
강력한 국가적 능력을 가졌으나 국자자율성에서는 상당한 제약을 가진 조선 총독부는, 국가의 효과를 어느 정도 발휘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강화할 수 있 었다. 그러나 국가로서의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민의 ‘국민화 과정’을 진전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인의 국민화과 정은 어떤 방식으로 진전되고 있었을까?
일본의 조선 식민정책의 기저에 놓여 있던 것이 동화정책 혹은 내지연장주의 였다는 데에는 별로 이견이 없다. 그리고 동화정책이 식민지에서의 ‘국민형성 프로그램’이었다는 데 대해서도 마찬가지 합의가 있다. ) 식민지 조선에서도 공간과 시간 그리고 습속과 신체라는 4가지 차원에서 제국주의적 국민화과정이 진전되고 있었다. 1937년 이후 총동원정책이 시행되면서 ‘황국신민화’라는 이 름의 국민화과정이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 문제는 식민지에서의 국민화과정은 식민지의 민족주의를 촉발한다는 점이다. 이는 저항적인 국민화과정이 이면에서 진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 하여 식민국가의 대내적 국가자율성 역시 약화되고 있었다. 제국과의 통합과 분 리의 딜레마를 근원적으로 안고 있던 체제가 바로 식민지의 근대국가였다. 이를 두고 ‘식민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조선총독부 권력 즉 식민지의 국가 모델에 대한 논의 가 거의 진행되지 않은 상태이다. ‘식민독재’라는 개념이 제출되어 있기는 하지 만, ) 독립국가와 식민지라는 이분법적 유형론이 권력 혹은 국가 논의를 압도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해외 학계에서는 다양한 식민지 유형론을 모두 가로 질러, 식민국가라는 용어가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 여기에 필리핀이나 인도 혹은 식민지 경험을 한 대부분의 사례에서 예외가 없다.
다음 그림은 구글 엔그램 뷰어(ngram viewer)에 나타나는 식민국가의 사용례 이다. 2000년을 전후하여 식민국가라는 용어는 거의 일반화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엔그램의 그래프가 식민지 혹은 조선총독부에 국가라는 개념을 ‘선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진 거리낌 혹은 반감을 억제하는 데에 도 움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이제 식민지는 더 이상 한국만이 겪어야 했던 예외적 인 야만이 아니다!
(비고) 구글 books ngram viewer. 1500년부터 2019년 사이 구글의 text copora(영문) 에 나타난 사용례를 나타낸 것이다
.
5. 맺음말 - 국가와 민족의 대위법
이 글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서는 대칭국가, 조선총독부에 대해서는 식민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그 국가로서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았다. 대칭국 가로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확보한 ‘부분적인 주권’을 갖고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선언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상상 속의 ‘중첩된 주권’ 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를 합쳐 ‘반주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반주권을 보유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 민족주의의 주권적 도구가 되었다. 국제정치 속에서의 주권이란 구성적인 성격이 강한 권리이다. 민족이 주체가 된 국민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원리 위에 구축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장은 강한 현실적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반주권을 가진 상상 속의 저항국가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종의 반국가였다. 게다가 식민국가와의 대 칭성을 통해 자신의 상상을 구현하려 했던 측면에서 대칭국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반면 조선총독부 권력은 인민의 동의에 기반하지 않은 식민지 통치라는 측면 에서 주권 없는 근대국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 근대국가는 물리적 폭력을 독점하고서 상당한 국가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국가의 자율성이라는 측면 에서는 심각한 제약을 가진 국가였다. 전형적인 식민국가로서의 조선총독부는 주권자의 자의 즉 주권의 역설에 적극적으로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밖으로는 총독에게 입법권을 부여하여 법의 안정성을 약화시키는 것, 안으로는 자문기구 인 중추원에 대의권과 입법보조 권한을 부여하는 등의 대비책을 동원하고 있었
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통해 취약한 국가자율성을 보완함으로써 상당한 정도로 ‘국가의 효과’를 제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제국과의 분리와 통합이라는 근본 적인 딜레마를 떨칠 수는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런 딜레마를 안고 있던 식민 지의 주권 없는 근대국가, 바로 식민국가였다.
식민지기 한국인은 대칭국가와 식민국가라는 두 개의 ‘정치체’에 소속된 ‘시 민’이었다. 일반 한국인들은 대칭국가의 ‘국민’이었고 식민국가의 ‘주민’으로 간 주될 수 있다. 전자는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로부터, 후자는 제국 본국의 ‘제국신민’으로부터 연원하는 소속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를 두고 가위 ‘민 족’과 ‘국가’의 대위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의 관계에서는 하나가 다 른 하나의 위에 군림하거나 혹은 아래에 예속하지 않았다. 이들은 그들이 존재 하는 동안에는 각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그들은 서로를 의식하며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는 대위법이 된다. ) 대칭국가와 식 민국가는 서로 민족과 국가라는 정치적 주체의 운명적인 대위법을 연주하고 있 었던 것이다.
국민국가 혹은 민족국가는 근대 이후 서구에서 새로 발명된 정치체로서, 근대 의 국가를 보는 방법을 상징한다. 마침 정치의 주체는 인민 혹은 국민으로 확장 되었고, 국민국가는 주체의 외연을 제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설정된 외연 바깥의 정치 주체는 지배 대상이 되었고 이들에게 국민국가는 민족이라는 집단 을 통해 새로 수립해야 할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리하여 국민국가라는 역사 적 정치체는 보편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국민국가는 누구에게는 위안이 되고 다른 누구에게는 우울이 되었다.
19세기 후반 한국에서 국가가 민족과의 관련 아래서 강렬하게 의식되기 시작 한 이후, 국가는 민족과의 관련을 배제하고서는 사유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와 민족이 하나의 개념으로 결합되었다는 점에서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는 중요 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민족과 국가가 상대적으로 강한 자율성을 가지 고 작동하므로, 민족국가를 사유하거나 상상하기 위해서는 대위법적인 방식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대위법이 언제나 잘 조율된 화음만을 내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억압받던 정치적 주체로부터 억압하는 주체로 전환한 민족과 근 대국가의 조화는 더 이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민족과 국가의 대위법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 것도 이미 오래된 일이 아니던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궐위의 시대 곧 정치와 권력이 서로 어긋나 있는 시대, 국민국가가 더 이상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런 시대는 ‘지구화된 주권’이라는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전지구적 정의 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구화된 주권이라는 이상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자유로운 세계의 만민은 지구적 정의라는 이상과 더불어 주권적 자유 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 ) 민족과 국가는 그런 세계를 위해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성찰할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건국절 논쟁에 개입하기 위한 것이 이 글의 목표가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해두려 한다. 다만 건국절 논쟁으로 제기된 식민지기 정치체의 성격을 국가론적 차원에서 논의해보려 했을 따름이다. 이런 논의가 건국절 논쟁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건국절 논의가 대부분 기념 논의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던 것처럼,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직 정치적 태도에 의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접수일(2020. 10. 10), 심사 및 수정일(1차 2020. 11. 20, 2차 2020. 12. 06), 게재확정일(2020. 12. 06)
1. 단행본
강만길, 1998, 『고쳐쓴 한국현대사』, 서울: 창비. 김경희, 2018, 『근대국가 개념의 탄생』, 서울: 까치.
김광재, 2017,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과 기원』, 서울: 윌비스. 김기란, 2020, 『극장국가 대한제국』, 서울: 현실문화.
김석준, 1996, 『미군정 시대의 국가와 행정』, 서울: 이화여대 출판문화원.
김희곤, 2004,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서울: 지식산업사. 김희곤, 2015,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 서울: 지식산업사. 김준석, 2011, 『근대국가』, 서울: 책세상. 도면회 외 공저, 2003, 『북한의 역사만들기 : 북한 역사학 50년』, 서울: 푸른역사. 로버트 잭슨, 옥동석 역, 2016, 『주권이란 무엇인가』, 서울: 21세기북스. 막스 베버, 박상훈 역, 2013, 『소명으로서의 정치』, 서울: 후마니타스. 백낙청, 1998, 『흔들리는 분단체제』, 서울: 창비.
사이먼 스위프트(Simon Swift), 이부순 역, 2010, 『스토리텔링 한나 아렌트』, 서울:
앨피.
서중석, 1997,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서울: 역사비평사.
신규환, 2019, 『세브란스,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서울: 역사공간. 신상준, 2006, 『개정 한국행정사』, 서울: 한국복지행정연구소. 아쿠다가와 야스시(芥川也寸志), 김수희 역, 2019, 『음악의 기초』, 서울: AK. 얀 지엘론카, 신해경 역, 2015, 『유럽연합의 종말』, 서울: 아마존의 나비. 윤대원, 2006, 『상해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윤해동, 2006, 『지배와 자치』, 서울: 역사비평사. 이해영, 2019, 『임정, 거절당한 정부』, 서울: 글항아리.
임현진ㆍ정영철, 2005, 『21세기 통일한국을 위한 모색』, 서울: 서울대출판부.
조동걸, 1989, 『한국 근대사의 시련과 반성』, 서울: 지식산업사. 조르조 아감벤, 박진우 역, 2008, 『호모 사케르』, 서울: 새물결.
조슈아 키팅(Joshua Keating), 오수원 역, 2019, 『보이지 않는 국가들 – 누가 세계 의 지도와 국경을 결정하는가』, 서울: 예문 아카이브.
지그문트 바우만, 조형준 역, 2014,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서울: 새물결. 최장집, 1998,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 서울: 나남.
한나 아렌트, 박미애역, 2013, 『전체주의의 기원 1』, 파주: 한길사. 한영우 외, 2006,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인가』, 서울: 푸른역사.
Ewout Frankema and Anne Booth eds., 2020, Fiscal Capacity and the Colonial State in Asia and Africa, c. 1850-1960, Cambridge University Press.
James Hevia, 2012, The Imperial Security State, Cambridge University Press.
Julian Go and Anne L. Foster eds., 2003, The American Colonial State in the Philippines, Duke University Press.
Mikulas Fabry, 2010, Recognizing States – International Society and the Establishment of New States Since 1776, Oxford University Press.
Richard Joyce, 2013, Competing Sovereignty, Routledge.
Stephen D, Krasner, 1999, Sovereignty: Organized Hypocrisy, Princeton University Press.
Thomas J. Biersteker and Cynthia Weber, 1996, State Sovereignty as Social Construc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논문
강선주, 2016, 「‘근대전환기’ 어떻게 탐구할 것인가? - 국민국가건설운동을 중심으 로」, 『역사교육』 140집. 김광식, 2011, 「한용운의 조선독립의 서 연구」,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 출판부, 279-307쪽. 김동택, 2010, 「대한제국기 근대국가 형성의 세 가지 구상」, 『21세기정치학회보』 제 20집 1호.
김성배, 2012, 「한국의 근대국가 개념 형성사 연구」, 『국제정치논총』 제52집 2호. 김성주, 2006, 「주권개념의 역사적 변천과 국제사회로의 투영」, 『한국정치외교사논 총』 제27집 2호.
김소영, 2011, 「재일조선유학생들의 ‘국민론’과 ‘애국론’」,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6
호.
김소영, 2015, 「한말 지식인들의 ‘애국론’과 민족주의」, 『개념과 소통』 16호. 김영호, 2014, 「미국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 정책에 관한 연구」, 『군사』 92호. 김은지, 2019,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의 지방자치제 시행과 지방행정관청 운영」, 『역사와 담론』 91호. 나용우, 2016, 「근대 주권의 진화와 유럽연합의 형성: 새로운 ‘공유주권’을 중심으 로」, 『평화학연구』 제17권 5호.
데이비드 헬드, 1991, 「민주주의, 민족국가, 그리고 지구촌」, 한상진 편저, 마르크 스와 민주주의, 사회문화연구소, 352-361쪽.
도진순, 2019, 「역사와 기억 – 건국연도와 연호, 그 정치적 함의」, 『역사비평』 126 호, 2019, 393-422쪽. 박명규, 2005, 「1910년대 식민통치기구의 형성과 성격」, 한국 근대사회와 문화 Ⅱ, 서울대출판부.
아사노 토요미(淺野豊美), 최석환 역, 2002, 「일본제국의 통치원리 ‘내지연장주의’와 제국법제의 구조적 전개」, 『법사학연구』 33호.
양영석, 1988,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연구(1919-1925)」,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집. 유병호, 2010,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안동교통국과 怡隆洋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2집.
윤대원, 2009, 「임시정부법통론의 역사적 연원과 의미」, 『역사교육』 110호.
윤덕영, 2010, 「일제하 해방직후 동아일보 계열의 민족운동과 국가건설노선」,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윤해동, 2014, 「뉴라이트운동과 역사인식」, 『탈식민주의 상상의 역사학으로』, 푸른역 사, 110-143쪽.
이기훈, 2019, 「건국절 논쟁의 역사적 함의」, 역사3단체 공동주최 학술대회 <국가정 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 발표문.
이승렬, 2005, 「일제하 중추원 개혁문제와 총독정치」, 『동방학지』 132집.
정병준, 2009, 「1940년대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건국 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집.
정욱재, 2018, 「대한제국기 유림의 국가인식」, 『역사와 담론』 86집. 조동걸, 1981,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 『한국사론』 10집.
尹海東, 2015, 「韓国における植民地国家と植民地の「グレーゾーン」」, 『史潮』 78号.
3. 기타 김태훈, 2019, 「김정은 만난 뒤, 대통령 입에서 ‘건국 100년’이 사라졌다」, 『조선일 보』 2019. 4. 11.
「대한민국건국강령」, 『대한민국임시정보공보』 72호,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 정부자료집 1 - 헌법ㆍ공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 건국논쟁 이것이 궁금하다 5」, 『조선일보』 2017. 8. 30.
「대한민국 임시관제」,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號外』,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 정부자료집 1 - 헌법ㆍ공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임시헌법」,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 - 헌법ㆍ공보』, 국 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임시헌장」,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 - 헌법ㆍ공보』, 국 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문재인, 2017,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 『위키문헌』(https://ko.wikisource. org/wiki).
「임시정부의 대일선전성명서」,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6 - 외무부』, 국사편찬위 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진영에 갇힌 건국논쟁 1-3」, 『중앙일보』 2017. 9. 13-15. 賀其治,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표한 비망록 요점」,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5 – 중국의 인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용운, 1919, 「조선독립의 서」(「朝鮮獨立에 對한 感想의 大要」, 『독립신문』 1919.
11. 4). 한용운, 「독립은 민족의 자존심」, 『동아일보』 1920. 9. 25.
Abstract
The Counterpoint of Nation and State
―‘Symmetrical State’ and ‘Colonial State’ ―
Haedong Yun*
■ Keywords:Nation, State, Counterpoint, Symmetrical State, Colonial State, Na-
tional Foundation Day, Theory of the Stat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Japanese Governor-General of Korea, semi-sovereignty, semi-state.
The limited sovereignty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llowed a nationalistic struggle for sovereignty to persist. Having been established upon the principle that building a new state must be at the hands of the Korean nationals, the Provisional Government had considerable authority. Being imagined as a state founded upon resistance, and only having semi-sovereignty, the Provisional Government was essentially a semi-state. It was also a symmetrical state, insofar as it attempted to realize its aspirations based on a model of symmetry which referred back to the colonial state. As a non-sovereign modern state, the polity administered by the Japanese Governor-General of Korea had great state capacity, but very limited state autonomy. To resolve this problem, considerable power was given to the Governor-General, while proportional representation and authority to assist in legislation were granted to the
* Research Institute of Comparative History and Culture, Hanyang University
Central Council (中樞院), which was a consultative body to the Governor-General. State autonomy was thus reinforced and the “state effect” was significantly enhanced. Colonial Korea had an inbuilt dilemma, contrasting separation from and unity with the Empire.
Koreans of the colonial period were citizens of two distinct political entities: the symmetrical state and the colonial state. The Korean public in general were both “nationals” of the symmetrical state and “residents” of the colonial state. The former had to do with the imagined community of “nation” and the latter with a sense of belonging to the “imperial subjects” of the Japanese Empire. Here, the counterpoint of “nation” and “state” becomes clear. Neither the nation nor the state was dominated by or subjugated to the other. The symmetrical state and the colonial state were effectively a fateful counterpoint as the political subjects of nation and state.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