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시대의 천황제: 약자 정치와 영성(spirituality)의 역학 - 모테기 겐노스케
1. 들어가며
이 글의 목적은 소셜미디어(이하 SNS)가 사회적으로 침투한 2010년대를 중 심으로 한 현대 일본사회에서 천황과 황실을 둘러싼 미디어 표상 분석에서 ‘표상의 집합체(集積体)’로서의 천황(제)1의 현재를 생각하는 데 있다.2
20세기 초 대중소비사회가 성립된 이후로 사람들은 천황・황족을 미디 어 표상을 통해 인지, 수용했다. 이러한 상황은 황실에서도 오랫동안 인식 하고 있었지만, 특별히 2010년대 이후에는 그 경향이 점점 심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배경에는 2000년대 이후의 황위 계승을 둘러싼 논의와 여성 황족 관련 보도 이외에, 2016년 8월 아키히토 천황(明仁天皇, 현 상황)이 ‘상징 으로서의 직무에 대한 천황 폐하의 오코토바(お言葉)’(이후 오코토바로 표기)를 제시한 이후의 생전퇴위를 둘러싼 논의, 2019년 헤이세이(平成)에서 레이와 (令和)로의 개원과 같은 황실 관련된 사건이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 덧붙여 풍요로운 웹(Web) 환경에 따른 담론 공간의 변화, 그에 따라 양방향에서 표상을 생산하게 된 미디어 상황은 더욱 간과하기 어렵다. 이처 럼 황실과 미디어 환경이 맞물린 결과, 2010년대는 이전에 없던 천황과 황 실 표상이 축적되는 시기가 되었다.
일본에서 천황상에 관한 연구는 1980년대 이후 심화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다키 고지와 사사키 스구루는 천황 도상(특히 ‘어진영’(御真影))과 천 황이 외출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행행(行幸)과 순행(巡幸)의 의미를 검토하여 국가적 전략과 함께 민중의 수용을 분석했다.3
후지타니 다카시는
1 일반적으로 천황을 군주로 추앙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총체를 가리키는 말로 ‘천황제’가 있지만, 주 지하다시피 그 단어는 당파적인 용어로 성립된 배경을 가진 경우도 있어, 자칫하면 하나의 견고한 제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살펴보듯이 ‘천황제’는 천황을 둘러싼 다양한 표상의 집합체이며, 동시에 시대 상황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운동체이기도 하다. 그 점을 고려했을 때 ‘천황 제’라는 표기로는 그 측면이 간과될 수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천황(제)’이라는 표기를 채택하기 로 한다.
2 이 글은 茂木謙之介, 『SNS天皇論: ポップカルチャー=スピリチュアリティと現代日本』, 講談社, 2022의 제1장과 제2장을 근거로 가필했다.
3 多木浩二, 『天皇の肖像』, 岩波書店, 1988; 佐々木克, 『幕末の天皇・明治の天皇』, 講談社, 2005.
국민 국가론을 배경으로 한 천황제 의례를 포괄적으로 검토하여, 기억의 장 (場)이 생성되고 시간이 공유되어 가는 과정을 서술했다.4 그러한 후지타니 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하라 다케시는 메이지 이후의 천황과 황태자의 행행 과 행계(行啓)에 주목하고, 그들의 신체를 사람들 이목에 드러냄으로써 제국 의 형성과 유지를 언급하였다.5 황후의 표상을 고찰한 와카쿠와 미도리는 황후의 도상이 근대의 성 규범 생성에 미친 역할을 분석했고,6 기타하라 메 구미의 연구들은 ‘천황 일가’의 이미지와 미술작품에서 천황 표상의 해석을 심화했으며 나아가 젠더 연구 관점의 연구도 심화시키고 있다.7 또 아오키 준코는 황실 여성의 복장과 근대 일본의 유럽화와의 관련성을 분석했다.8 필자 역시 전전과 전후를 연결하는 형태로서 지역사회에 있어서 황족 표상 이 있다는 것을 분석하는 등 황족의 표상 연구도 전개하고 있다.9
전후에 있어서 천황 표상 연구는 야스다 쓰네오와 가와니시 히데야의 논의가 중요하다. 야스다는 전후 천황(제)이 휘두르는 권력의 존재 방식을 ‘이미지 권력’으로 규정하여 천황 표상의 변화를 논의할 필요성을 제시했으 며,10 이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가와니시 히데야는 전후 쇼와 천황(昭和天皇) 과 아키히토 황태자(明仁皇太子), 아키히토 천황, 미치코 황후(美智子皇后)의 이 미지를 분석해 그것들이 ‘문화 평화 국가’의 상징으로 수렴한다는 점을 지 적했다.11
그중에서도 이 글의 문제의식과 관련된 천황과 미디어를 연계시킨 논 의에서 선구자 역할을 한 연구로는 마쓰시타 게이이치의 『대중천황제론』 이 있다. 마쓰시타는 이 책에서 다양한 표변(豹変)을 둘러싼 규제가 해제된
4 タカシ ・フジタニ, 『天皇のページェント: 近代日本の歴史的民俗誌から』, 日本放送協会, 1994.
5 原武史, 『可視化された帝国: 近代日本の行幸啓』, みすず書房, 2001.
6 若桑みどり, 『皇后の肖像: 昭憲皇太后の表象と女性の国民化』, 筑摩書房, 2001.
7 北原恵, 「表象の政治学: 正月新聞にみる〈天皇ご一家〉像の形成と表象」, 『現代思想』 29卷 6號, 2001,
230~254쪽.
8 青木淳子, 『近代皇族妃のファッション』, 中央公論新社, 2017.
9 茂木謙之介 , 『表象としての皇族メディアにみる地域社会の皇室像』, 吉川弘文館, 2017.
10 安田常雄 , 「象徴天皇制の五年」, 歴史学研究会 編, 『戦後五年をどう見るか(歴研アカデミー)』, 青木書店, 1995.
11 河西秀哉 , 『「象徴天皇」の戦後史』, 講談社, 2010.
전후의 미디어 상황에서 ‘미치 붐’(ミッチー・ブーム)이 형성되었다고 서술했 다.12 이 논지를 바탕으로 야스다는 전후 천황 표상을 천황과 민중이 협력 한 결과의 산물이라고 규정하고,13 요시미 슌야도 점령이 끝난 이후의 대중 소비사회에서 천황 표상이 가벼운 규격품처럼 조합되어 소비되는 상황을 분석했다. 전후를 특권화하는 이와 같은 연구 경향에 대해 미기타 히로키 는 전후에 그치지 않고 전쟁 전 황실 표상에서 이미 소비적인 측면이 있음 을 지적했고,15 모리 요헤이도 전전부터 전후에 걸친 황실과 미디어의 관계 를 가족 이미지 중심으로 분석했다.16 가와니시 및 필자의 연구도 전전부터 의 대중소비사회의 영향 속에서 미디어 표상으로서의 천황과 황족을 논하 고 있다. 또 모리는 헤이세이의 황실 보도에 대해 그 ‘이야기’성을 지적하 며, 보도를 접하는 청중의 욕망을 반영하는 측면에서 시대적 배경과 연계하 여 논의할 필요성을 설파했다.18 모리의 이 시각은 중요하므로 이 글에서도 채택하고자 한다.
앞에서 이미 논의된 바와 같이 일본에서 대중소비사회가 성립된 이후의 천황(제)은 미디어 표상을 통해 성립하는 존재이며, 그때 제시되는 편향된
정보[홀(Stuart Hall)의 용어를 따르자면 ‘인코딩’된 정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똑 같이 홀을 따른다면 어떻게 ‘디코딩’할 것인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세바타 하지메가 말했듯이 아키히토 천황은 적어도 스스로를 미디어 속 존 재로 인지하고 있었으며,19 그 이후의 황실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상정된다. 따라서 천황・황족・황실 발 미디어 표상이 전략적으로 생성되었
12 松下圭一 , 「大衆天皇制論」, 『中央公論』 74(5), 中央公論新社, 1959. 4., 30~47쪽.
13 安田常雄 , 「象徴天皇制と民衆意識: その思想的連関を中心に」, 『歴史学研究』 621号, 1991, 31~41쪽.
을 가능성을 충분히 사고하여 반영할 필요가 있고, 그렇게 깊이 생각한 끝 에 생성된 표상들을 미묘한 차이와 함축된 의미를 포함하여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표상 수용자에게 부과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시점에서 이 글은 현대 일본에서의 천황(제)에 관한 미디어 표상에 대해 해석 가능성의 중심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라는 맥락을 고려했을 때, SNS로 대표되는 양방향
적 표상 생성의 상황이 존재하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가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미디어로서의 SNS는 예컨대 레이와 개원(改元) 당시 큰 존재감을 드러냈다. 거기에서 전개된 이야기 내용은 후술하겠
지만, 사람들이 양방향 언어 활동을 통해 A. D. 스미스(Anthony David Stephen Smith)가 말하는 ‘역사적 기억의 공유’를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2010년대 이후의 천황・황족・황실의 표상은 매스미디어뿐만 아니라 소셜 미디어를 이용할 수 있는 일본사회의 다양한 사람들도 만들어 낸다는 점에 서 ‘협동’(協働)적인 표상일 수도 있다.
SNS상의 발언은 때때로 매스미디어에서 ‘거리의 목소리’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쓰다 쇼타로가 지적하듯이, “인터넷이 보급된 오늘날에도 그곳에 서 흘러나오는 정보 대부분은 매스미디어에서 시작된 것으로, 국민공동체 를 기본 단위로 하는 정보공유 방식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것 역시 사실이며, 현재 상황에서 매스미디어는 여전히 강력한 존재감을 드 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이 결정적인 미디어인지를 확 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에 동시에 사소한 목소리가 계속 들 릴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생각했을 때, 그 사 소한 목소리들은 끊임없이 지워지고 잊히는 것과 이웃하고 있다는 것에 주 목할 필요가 있다. 예전에 구리하라 아키라 등은 황궁 앞 광장에서 기장(記帳)하러 온 사람들 대상으로 청취 조사와 기록을 했지만,21 2010년대 이후 의 그와 같은 기록은 SNS와 같은 양방향 미디어로 사람들의 목소리를 남 길 수 있을 것이다.
이하, 이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2016년 8월부터 2019년 5월까지의 개원 을 둘러싼 미디어 표상 중 정부와 황실 및 매스미디어 표상과 함께 사람들
이 반응한 트위터(Twitter, 현 X, 이하 개원 전후의 명칭인 트위터로 표기)를 중심으로 한 웹상의 다양한 담론에 주목하고 그 속에 드러난 화자(話者)의 욕망을 분 석하고자 한다.
2. 정부의 ‘정치적 이용’ 성공
제2차 아베 정권(安倍政権, 2012. 12. 26.~2014. 12. 24.) 출범 이후, 일본정부와 자
민당은 매스미디어에 대한 견제 강화와 함께, 웹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미 디어에 적극적인 개입을 해 왔다. 먼저 매스미디어에 대해서는 2016년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무상 (이하 직책 표기는 해당 시기 기준)의 “방송국이 정치적 공정성을 결여한 방송을 반복했을 경우, 전파 차단을 명령할 수 있다.”라는 취지의 발언, 2018년 스 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의 헤노코(辺野古) 이전 공사에 관한 도쿄신문 기자의 질문에 대해 “사실오인(事実誤認)이 있
다.”라고 하면서, 내각 기자회견(관저 기자클럽)에서 “해당 기자에 의한 문제 행위”로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는 뜻을 전달한 사실 등이 잘 알려져 있 다. 총리가 교체된 2023년 10월 현재에도 매스미디어가 내각 총사퇴를 직 접적으로 요구하거나 관저의 기자회견에서 엄중하게 추궁하지 않는 것은 정부와 자민당의 매스미디어에 대한 ‘압력’이 효과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22
22 『朝日新聞デジタル』, 「「報道の自由度ランキング」日本の順位」, https;//www.asahi.com/articles/
ASM4L26GMM4LUHBI00L.HTML(최종 검색일: 2023. 10. 11.). 국경없는기자단 조사에 따르면, 2019년 일본의 미디어 자유도는 전년과 다름없는 67위로, 민주당 정권 시대의 11위에서 크게 낮아
내각이 웹 미디어에 적극적으로 진출한 사례는 아베 정권 이후 총리 관 저가 인스타그램(Instagram), 라인(LINE),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 유튜브
(YouTube)와 같은 SNS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특히 SNS 담당 직원의 운영 실력이 뛰어나 동 시간대의 사용자 경향을 분석하 고 이를 응용적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타 미디어’적인 전개를 펼 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23 총리 관저 웹페이지에 있는 2018년 9월자 SNS 운영 정책은 “총리 관저의 활동에 관한 이해와 이용자의 편의를 높이는 것” 이 공통의 목적이며 모든 사항에 대해서 “오직 정보를 발신만 하고, 원칙적 으로 회신은 하지 않는다.”라는 방침이라고 밝히고 있다.24 결국 SNS가 가 진 강점인 양방향성을 부정하고 일방적인 정보제공이 되었다.
아베 신조 총리도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적극적으로 발신하면서 많은 팔로워를 확보한 것 이외에,25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SNS와 같은 새로운 툴을 능숙하게 사용하면서 점점 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라고 언급하는 등26 SNS의 영향력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6년 8월의 이른바 ‘오코토바’ 이후, 총리 관저 및 총리 주변에서 개 원의 다양한 ‘정치적 이용’을 확인할 수 있다.27 지면 관계상 그에 관한 모 든 내용을 다루기는 어렵지만, 개원을 둘러싸고 정부가 제시한 미디어 표상 으로서, 2019년 4월의 원호 발표와 5월의 개원 전후의 의례에 관한 것을 검 토하고자 한다(이하 이 글에서 날짜만 표기되는 경우는 2019년임).
새 원호 발표에 앞서 언론에서는 원호 예측에 관한 이야기들이 분분했
다. 3월 1일 NHK는 아침・저녁의 보도 프로그램에서 새 원호를 특집으로
졌다.
23 『ITMediaNews』, 「JKより上手い」 「お役所感がない」 首相官邸インスタが話題 “中の人”の正体に迫
る」, https://www.itmedia.co.jp/news/articles/1904/22/news126.html(최종 검색일: 2023. 10. 11.).
24 「「首相官邸」Facebookページ運用ポリシー」, https://www.kantei.go.jp/jp/pages/fb_policy.html(최종
검색일: 2023. 10. 11.).
25 여기에 여당 자민당도 ‘자민당 2019’ 캠페인으로 젊은이 대상 패션잡지 『ViVi』, 만화가 이노우에 가즈히코(井上和彦)와 협업을 진행하여 비판받았지만, 그것을 포함하여 주목받은 것은 틀림없다.
26 「安倍内閣総理大臣記者会見」 2019年4月1日, https://www.kantei.go.jp/jp/98_abe/statement/
2019/0401singengou.html(최종 검색일: 2023. 10. 11.). 27 伊藤智永 , 『「平成の天皇」論』, 講談社, 2019.
다루며, 항간에서 ‘안큐’(安久)를 비롯해 ‘安’자가 들어간 원호를 예측하고 있 다는 내용과 누마즈시(沼津市) 수족관에 있는 바다사자가 붓으로 비슷한 원 호를 예측했다는 내용 등을 보도했다. 이 ‘安’자가 총리의 성씨(姓氏)와 겹 쳐서 위정자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냐는 일종의 음모론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상황까지 이르렀으나,28 새 원호 예측을 이벤트화한 사례로 SNS에서 벌어진 농담 섞인 예측전 등을 보면, 분명 새 원호에 대한 기대감 이 조성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원호 발표 직전에는 관방장관이 원호를 발표하는 동시에 총리가 담화를
직접 발표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29 보도에서 “국민에게 새 원호의 의 미를 직접 전달하려는 목적”이라고 설명한 것에 대해 SNS에서는, 헤이세이 개원 당시에는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관방장관이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총리의 담화를 대독한 것에 반해, 이번에는 총리가 직접 담화를 발표하면서 원호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위화감이 제시되기도 했다.30 원호 선정에는 일본 문학 연구자들이 참여할 것으로 밝혀져,31 한적(漢籍)이 아닌 ‘국서’(国書)를 근거로 삼는 원호 선정이 유력한 것 아니냐는 소문이 나 돌았다. 그것은 그 이후 현실화했지만, 총리의 지지기반인 보수층에 대한 배려가 그 배경이 아니냐는 억측도 나왔다.32 그 후 맞이한 4월 1일 원호 발 표는 TV 매체뿐 아니라 동영상 사이트에서도 생중계되었고, SNS에서도 실시간 중계가 이뤄지는 등 미디어 행사로 변모했다. 총리 담화에서는 “일 본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내일에 대한 희망과 함께 각각의 꽃을 활짝 피울 수
28 『日刊ゲンダイ』, 「NHK新元号『安』めちゃ推しの怪 残り1カ月のタイミングで……」.
29 『共同通信』, 「新元号, 11時半公表で調整 首相, 自ら談話を発表へ」, https://this.kiji.is/483930901061
829729?c=39550187727945729(최종 검색일: 2023. 10. 11.).
30 예를 들면 저널리스트 쓰다 다이스케(津田大介)는 ‘생각에 빠져 버렸나’라고 비판하여 1,000건 가까
운 리트윗을 받았다. https://twitter.com/tsuda/status/1111292651976822784?s=20(최종 검색일:
2023. 10. 11.).
31 『毎日新聞』, 「新元号 国文学者らに委嘱 政府選定の候補」.
32 『日刊ゲンダイDIGITAL』, 「安倍首相が口出し「新元号は日本の古典から」の無知と不遜」, 보수층으로 부터 ‘국서를 전거로 삼는 요청은 예를 들면 사사카와 요헤이(笹川陽平) 일본재단 회장의 담화(『産
経新聞』, 「新元号は中国の古典からの引用を止め, わが国独自の自由な発想で定めてほしく思う」)가
있다. https://www.nikkan-gendai.com/articles/view/news/248652(최종 검색일: 2023. 10. 11.).
있는 그러한 일본이 되고 싶은 바람을 담아 ‘레이와’로 결정했다.”라는 선정 결과가 발표되었으며, 총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새로운 시대의 소망을 나 타내는 데 가장 적합한 연호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 이었다.”라고 밝혔다. 이 문장 표현이 아주 평범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결정 주체가 총리에게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특별히 제시하는 담론 구조로 되 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979년에 이미 제정된 원호법(元号法) 단 계에서 원호는 정령(政令)으로 결정하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앞서 언급한 바 와 같이 헤이세이 개원 때에는 총리가 굳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배려’ 속에서 천황의 ‘시간 지배’ 장치로서의 원호 본연의 존재를 은밀하게 온존 시킨 것에 비해, 레이와 개원은 총리가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영유(領有)한 듯한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사전에 예측한 대로 원호는 일본 고전 『만요슈』(万葉集)에서 채택되었는
데, 그 이유는 ‘귀족뿐만 아니라 사키모리(防人),33 농민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지은 노래가 담겨 있어 일본의 풍부한 민족문화와 오랜 전통을 상 징하는 국서’라는 점이 주장되었다. 이 부정확한 언급에 대해서는 이미 일 본 문학 연구 영역에서 지적했기 때문에 자세한 검토는 하지 않지만,34 일 본의 자연환경과 연결하는 형태로 그 정당성이 거론되고 있었다는 것만큼 은 확인해 두고자 한다.35
그렇다면 이러한 미디어 이벤트로서의 원호 발표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를 보여 주는 사례로 ‘레이와 아저씨’(令和おじさん) 담론과 지지 율 상승이라는 현상을 지적하고 싶다. 과거 헤이세이 개원 때에는 새 연호 를 TV 매체에서 발표한 오부치 관방장관이 ‘헤이세이 아저씨’(平成おじさん) 로 불린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번 개원에서도 스가 관방장관이 SNS를 중
33 역자주: 나라・헤이안 시대 쓰쿠시(筑紫, 옛 규슈), 이키(壱岐), 쓰시마(対馬)와 같은 북규슈의 변경 방위를 맡은 병사.
34 「권력자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읽는 기사가 트위터를 통해 확산되었다. https://gendai.ismedia. jp/articles/-/ 64241?page=5(최종 검색일: 2023. 10. 11.).
35 현재의 ‘일본 대단해’ 담론의 한 전형으로 ‘일본에는 사계절이 있다.’는 것이 일본을 칭송하는 틀에 박힌 문구가 되었다는 점을 참고하고자 한다.
심으로 ‘레이와 아저씨’로 불리며 그 현상이 매스미디어에도 소개되었다.36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SNS에서 ‘모두 스가 관방장관을 귀엽다고 하니 기 쁘다.’라는 글에서 보이듯이37 정치인인 관방장관을 두고 ‘귀엽다’고 지칭하 는 담론이 등장했다. 기자회견에서 웃는 노년의 남성을 ‘귀엽다’고 표현하 는 것은 이른바 ‘갭모에’(ギャップ萌え)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동 시에 개원이라는 사건과 겹쳐 보면 과거 쇼와 천황 서거 전후에 ‘귀엽다’라 고 거론되었던 것을 상기해도 좋을지 모른다.38 이러한 분위기가 2020년 자 민당 총재 선거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스가 총리의 탄생에 일조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원호가 한 정치인의 ‘인기’의 원천으로 이용되었다는 전개는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번 원호 발표와 관련하여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은 내각 지지율의 상
승이다. 교도통신(共同通信)이 4월 1일과 2일 양일간 실시한 전국 긴급 전화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은 52.8%로 이는 지난 3월 조사 대비 9.5%p 대 폭 상승했고,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율은 8.5%p 하락한 32.4%를 기록했다. 또 새 원호는 ‘호감’ 73%로 ‘새 원호 공표를 둘러싼 고평가가 내각 지지율 상승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지적되었다.39 주로 매스미디어의 구체적 인 보도와 그에 의존하는 형태로 전개된 SNS에서의 충만(充満)작용이 작동 한 결과, 새 원호 발표에 따라 내각에 대한 평가가 상승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40 그동안 지적되었던 천황의 ‘시간 지배’ 표상으로서의 원호를 내각 이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발표했다는, 일종의 찬탈(簒奪)이 사회적으로 승인
36 『毎日新聞』デジタル版, 「「令和おじさん」の菅官房長官「自分でもびっくり」 イベントで笑顔」 등이 있 다. 또 이 보도는 새로운 미디어 중 하나인 니코니코 동영상(ニコニコ動画) 이벤트에 장관이 출연했 을 때 이루어진 것으로, 미디어를 의식한 것이었다는 점은 확인해 두고자 한다. https://www.sankei. com/politics/news/190408/plt1904080080-n1.html(최종 검색일: 2020. 6. 19.).
37 https://twitter.com/kyonkun_sos/status/1112636822524321793(최종 검색일: 2023. 10. 11.).
38 大塚英志 , 『少女たちの「かわいい」天皇: サブカルチャー天皇論』, 角川書店, 2003.
39 『共同通信』, 「新元号「令和」を好感73%」, https://this.kiji.is/485706045695116385(최종 검색일: 2020.
6. 19.).
40 津田正太郎, 『ナショナリズムとマスメディア: 連帯と排除の相剋』, 勁草書房, 2016. 이 점에서도 매스
미디어가 거대한 집단에 포섭되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 즉 소극적인 보수층에 대한 작용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받으면서 수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말하자면 내각의 지지율 상승이라는 정 치적 목적을 위해 황실의 황위 계승(代替わり)을 ‘이용’했다는 프레임이다.
이러한 정치적 이용과 관련된 담론으로는 개원 후인 5월 14일 아베 총 리가 나루히토 천황(徳仁天皇)에게 했던 일종의 국정보고, 즉 ‘나이소’(内奏) 를 둘러싼 보도를 들 수 있다. 나이소는 궁내청(宮内庁)이 당일 영상을 공개 했고, 각 방송국도 그대로 방영했다. 이에 대해 일본공산당 고쿠타 게이지 (穀田恵二) 국가대책위원회 위원장과 국민민주당 다마키 유이치로(玉木雄一郎) 대표가 다음 날 정부가 천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41 나 이소의 사진 공개라는 행위 자체는 2013년에 이미 있었지만, 이번에는 나 이소 영상을 공개한 것에 대해 비판이 쏟아진 것이다. 야마모토 신이치로(山本信一郎) 궁내청 장관이 아베 총리와 가까운 관계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당시 정권의 동향이 — 억측 섞인 말이라고는 하지만 — 그러한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비판적 담론이 개원 전후의 정부 의례에서도 등장했다. 예를 들 어 4월 30일 퇴위례 정전 의식(退位礼正殿の儀) 당시 아베 총리의 ‘국민 대표 의 말씀’(国民代表の辞)에서 ‘천황과 황후 양 폐하께서 오래오래 건강하시기 를 기원합니다(願ってやみません)’라는 문장을 총리가 고쳐 읽으면서 ‘기원하 지 않습니다’(願っていません)로 들렸고, 이후 관저 웹페이지에서 이 장면의 동영상을 볼 수 없게 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보수단체인 잇스이카이(一水会)는 공식 트위터를 통해 “이러면 의미가 반대가 된다. 문제는 관저 홈페이지에서 영상을 삭제한 것이다. 잘못 읽은 것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불찰을 사과하라.”라는 비판을 전개했고, 매스미 디어도 이를 보도했다. 그 이후 총리 관저 트위터 계정은 ‘일부 보도’에 관 한 견해라고 하면서 트윗 4건을 연속으로 올렸는데,43 거기에서는 “‘국민 대
41 『しんぶん赤旗』, 「首相の内奏映像, 宮内庁公開」, https://www.jcp.or.jp/akahata/aik19/2019-05-
16/2019051602_06_1.html(최종 검색일: 2023. 10. 11.).
표의 말씀’은 “내각회의에서 결정된 것””이며 “해당 부분은 [읽기 어려운 한자가 아니라] ‘~“や”みません’이라는 히라가나”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보도에 있 는 한자의 오독(誤読) 같은 것은 없다.”라고 하면서 일련의 비판을 부인했다.
이처럼 총리 발언을 사후에 SNS상에서 변명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지만, 이 ‘국민 대표의 말씀’을 둘러싼 일련의 전개에 대해 이 글에서는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하나는 그 사과 문구가 어떻게 결정되고 어떻 게 쓰였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는 화자의 무의식이 문제라는 점, 다른 하나는 그 이후의 언론 보도나 SNS의 반응에서 볼 수 있듯이 총리 가 아키히토 천황과 미치코 황후의 건강을 기원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공공 연하게 발언했다고 해도 사회적으로도 이상하지 않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었 다는 점이다. 전자의 경우, 아베 정권이 지금까지 전개해 온 내각회의 결정 에 따른 사건의 정당화 패턴의 재연이며, 오히려 판에 박힌 반복으로서 ‘국 민 대표의 말씀’에 삽입된 ‘무의식’으로 표출되었다는 이야기를 생성할 수 있다. 또 후자는 그동안 종종 지적되었던 총리의 천황 경시(軽視) 경향이라 는 담론과 일치하는 것으로, 그것은 사건 내막이 어떤 것이었는가와는 다른 차원이다. 즉 정부가 천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한편, 일본사회 일각에서는 정부의 천황에 대한 경시가 현재화(顕在化)하고 있음을 인식하 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황위 계승과 관련된 정부의 담론 비판은 동시에 이러한 ‘정치적
이용’의 ‘성공’을 역설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19년 6월 당 시 아베 내각의 지지율은 49%로,44 지금까지 봐 온 비판이 충분하게 기능 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 배경에는 이번 개원을 계기로 사회적 축제 상황이 부각되면서 그것에 대한 비판적이며 자기성찰적 관점의 움직임이 거의 없 었던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황의 죽음을 수반하지 않는 레이와 개원으로, 헤이세이를 되돌아보는
회고적 사고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가 조성되었다. M. 에델
44 『時事通信』 世論調査, 6月7日~10日.
만(Gerald Maurice Edelman)은 국민공동체에 대해 “과거의 기억과 영광, 혹은 약속된 미래에 대한 기대 등, 다양한 의미가 응축되어 실제로 그것을 구성 하고 있는 구성원 개개인에게서 유리(遊離)된 이타성(無私性)의 상징으로 ‘물 상화’(物象化)된다.”라고 지적했는데,45 이번 개원에서는 특히 그 ‘미래에 대 한 기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정권에 있어 황실과 황위 계승이 수많은 정치적 이용 대상 중 하 나에 불과했다는 점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아베 총리는 개원 전후로 SNS 에 연예인과의 식사 장면을 자주 올려 많은 계정으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다. 예컨대 5월 12일에는 아이돌 그룹 ‘도키오’(TOKIO),46 5월 23일에 는 배우 오이즈미 요(大泉洋)와 다카하타 미쓰키(高畑充希)와 식사하는 사진 을 올려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매스컴에도 보도되었다.47 이에 대해 비판적 인 담론도 있었지만,48 동시에 ‘좋아요’가 3만 건 이상으로 SNS 이용자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정치인이 같은 시기에 인기 를 얻고 있는 존재와의 친밀한 관계를 홍보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는 일 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인기를 얻는’ 존재 중 하나가 현재의 황실이라는 점 은 분명한 사실이다.
2018년도 단계에서 NHK가 실시한 ‘일본인의 의식’ 조사에서는 1973년 조사 시작 이후 처음으로 천황에 대한 ‘반감’이 0%가 되었고, ‘존경’이 41% 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는 등 황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일본 내에서 데이터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사라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천 황제 비판의 대명사였던 일본공산당의 시이 가즈오(志位和夫)조차도 새 천황 즉위에 즈음해 “새 천황의 즉위를 축하합니다. 상징 천황으로서 새 천황이
45 M. エーデルマン, 法貴良一 訳, 『政治の象徴作用』, 中央大学出版部, 1998.
46 https://twitter.com/AbeShinzo/status/1127484372456599555(최종 검색일: 2023. 10. 11.).
47 https://twitter.com/AbeShinzo/status/1131850535470895104(최종 검색일: 2023. 10. 11.).
48 『日刊ゲンダイDIGITAL』, 「安倍政権が露骨スリ寄り 吉本興業と“ズブズブ”三文芝居」, https://www.
nikkan-gendai.com/articles/view/news/256316(최종 검색일: 2023. 10. 11.). 『リテラ(LITETA)』,
「TOKIO安倍の会食で露呈したジャニーズ情報番組進出の危険性!ジャニーズタブーに守られ政権と
癒着し放題」, https://lite-ra.com/2019/05/post-4709.html(최종 검색일: 2023. 10. 11.).
일본 헌법 정신을 존중하고 옹호할 것을 기대합니다.”라는 담화를 발표하 는 등 이번 개원에 즈음해서 천황의 즉위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회로가 충 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의 황실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 진, 실용적인 사고에 기반한 ‘정치적 이용’이 전개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3. 황실의 이의제기와 그 욕망, 그리고 실질적 공범
개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부 여당에 비해, 황실은 기본적으로 이에 대항하는 존재로 조정(措定)되기 쉬운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미 호헌 주의자(護憲主義者)로서 천황상이 자주 지적되고 있지만,49 와타나베 오사무 는 생전퇴위를 둘러싼 언론 상황 속에서 좌파가 아키히토 천황에게 헌법 수 호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아내어 옹호하는 반면, 지금까지 천황의 권위 와 권력 확대를 노려 온 이른바 우파가 아키히토 천황의 언행을 헌법 위반 으로 규정하고 상징 행위의 축소를 주장하는 ‘뒤틀림’(ねじれ)이 일어나고 있 다고 정리했다.
실제로 2013년의 이른바 주권 회복 기념식(主権回復式典) 당시 천황의 오 키나와(沖縄)에 대한 배려가 보도된 것 외에, 기념식 중 천황에게 만세삼창 한 것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등 개원을 기치로 내건 아베 정권과 헌법 수호를 지향하는 황실과의 현격한 차이가 종종 언급되었
다. 특히 2016년 8월의 ‘오코토바’ 전후로 천황의 퇴위 의사에 관한 보도가 정부 의도와 역행하는 형태로 전개된 점, ‘오코토바’ 문구에 대한 아베 총리 의 의중을 이어받은 일본회의계(日本会議系) 에토 세이이치(衛藤晟一) 자민당 의원의 개입이 있었던 점, 퇴위 방식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황실과 정부
49 河西秀哉 , 『明仁天皇と戦後日本』, 洋泉社, 2016.
사이에 알력이 있었던 점들이 알려졌다.51 이러한 동향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오코토바’를 중심으로, 2010년 후반
이후의 아키히토 천황의 담론을 간단히 분석해 둘 필요가 있다.
2010년 7월 22일 개최된 참여회의(参与会議)에서 아키히토 천황이 생전 퇴위 의사를 밝혔으나, 당초 측근들의 반대 의견이 있어 한동안 그 이야기 는 묻히게 되었다. 그런데 2012년 2월 18일 아키히토 천황이 심장 관상동맥 우회 수술을 받으면서 궁내청은 천황의 부담 경감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졌 다. 이후 생전퇴위에 반대하는 총리 관저와 찬성하는 궁내청의 공방이 시작 되고 교착 상태가 이어지던 중 2016년 7월 13일 NHK가 천황의 생전퇴위 의향을 보도했고 같은 해 8월 8일 15시 ‘오코토바’를 방영하기에 이르렀다.
‘오코토바’에서 표현한 문장 자체는 천황 본인이 직접 집필하고 이를 바 탕으로 정부와 절충하는 과정에서 일본회의계 의원들의 개입이 있었던 것 으로 알려졌다.52 그렇지만 한편으로, 언론에서는 그 글이 천황이라는 개인 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기에, 여기에 표상 분석의 필요성이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추가적으로 ‘오코토바’가 방영되었을 때 연구자 및 우파 논단에서는 ‘헌
법 위반’이라는 목소리가 나온 반면, 여론은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신문사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각 신문사 모두 생전퇴위에 대한 찬성이 80% 이상을 차지했다. 이러한 동향 속에서 같은 해 9월 23일 전문가회의(有識者会議)가 발족하고, 이듬해인 2017년 6월 9일에는 생전퇴위를 규정한 황 실전범특례법(皇室典範特例法)이 성립했다. 그리고 2019년 4월 1일 새 연호
‘레이와’가 발표되고 같은 해 5월 1일 개원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키히토 천황은 해당 텍스트의 ‘오코토바’에서 매우 흥미로운 자기 표
상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약자로서의 천황’ 이야기다. 아키히토 천황은 서두에서 “저도 팔십이 넘어 체력 면에서 여러 가지 제
51 伊藤智永 , 『「平成の天皇」論』, 講談社, 2019. 52 伊藤智永, 『「平成の天皇」論』, 講談社, 2019.
약을 느낀다.”라는 자신의 노화를 고백하며 스스로가 고령화 사회 속에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운 ‘약자’임을 표명했다. 게다가 “그러한 가운데 몇 년 전이지만 외과 수술을 두 번 받았고 고령으로 인한 체력 저하를 느끼기 시 작했을 무렵부터, 앞으로는 예전처럼 무거운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워질 경 우”, 또 “천황이 건강을 해쳐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을 경우”와 같이 천황 자 신의 가사적(可死的)인 신체에 대한 언급은 ‘약자’성을 강조하는 발언이 되었 다. 이는 이미 시마조노 스스무(島薗進)가 인간으로서의 약점으로 평가한 것 과 일맥상통한다.53
하지만 그에 덧붙여서 간과하기 어려운 것은 ‘입장상 현 황실 제도를 구
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삼가면서 나 개인으로서’라고 말한다고 하는, 일본 헌법상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비정치적인 이야기를 전개할 수밖에 없는 자 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그러한 시도가 작동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노인으로 서, 그리고 제도적 억압을 받는 무력한 ‘약자로서의 천황’의 서사가 전개되 고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텍스트 전체를 통해 아키히토 천황이 항상 무표 정에 가까운 생경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 가는 모습과도 잘 맞아떨어진 다. 즉 자신의 심정을 간단하게 고백하면서 드러내기 어려운 존재로서의 자 기 표상을 ‘수행적’(遂行的)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정부와 궁내청과의 절충 결과로 만들어진 이 텍스트의 이야기 내용에 대해 화자가 완전히 만 족하지도 승복하지도 않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억압된 입장에 놓여 있다는 표현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천황을 비추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덧붙이고
자 한다. 천황이라는 “입장상, 현행 황실 제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삼가면서, 나 개인으로서” 이야기한다고 표명하고 “국사 행위”(国事行為)라는 천황의 공적 직무를 언급할 때 카메라가 줌인하며, 텍스트의 마지막 부분 이 가까워졌을 때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라고 말한 후 줌아웃이 시작되어
“천황은 헌법하에서 국정에 관한 권한을 갖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통해 헌
53 片山 社秀・島薗進, 『近代天皇論: 「神聖」か, 「象徵」か』, 集英社新書, 2017.
법하에서의 제약 아래 있는 약자로서의 자기 표상을 하고 있다. 동시에 이것 은 줌인했을 때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황에게 ‘개인으로서’의 친밀한 관계성을 읽어 내게 하는 것에 비해, 줌아웃했을 때에는 공인이라는 소원한 존재임을 느끼게 해, 결과적으로 일대일의 관계성처럼 보였던 것이 제도 적 억압 아래 소외되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치가 되었다.
여기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천황을 노화와 제도적 제약이라는 이중
억압을 받는 ‘약자’로 자리매김하는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 했듯이 소위 좌파는 천황제를 비판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었다. 일본 언론계에 특정 발언이나 행위가 차별적 의미나 혹은 그러한 오해의 가능성 을 내포하지 않도록 정치적으로 적절한 용어 및 정책을 선택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원칙이 정착되어 있는 상 황에서, 아키히토 천황이 바로 그러한 정치적 올바름의 강도를 잘 인지하고 내면화한 화자로 부상한 것이다.
이처럼 ‘약한 천황’의 표상은 2018년 12월, 천황의 생일 ‘궁내청 기자단
대표 질문’에서 ‘눈물을 참으며’, ‘목소리를 떨며’ 미치코 황후에게 오랜 세 월의 고마움을 전할 때도 드러났다. 이러한 ‘약한’ 당사자의 이야기로 인해 역설적으로 2010년대 후반의 아키히토 천황의 자기 표상은 담론적으로 쉽 게 비판하기 어려운 헤게모니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따르고 헌법을 옹호하는 ‘약자로서의 천황’이 이끄는 이러 한 담론의 강도는 ‘비디오 메시지’에 대한 동정적인 ‘국민의 이해’ 차원에 서도 증명되었다. 이는 현재 천황의 일상에 대해 의례와 제사, 공무로 ‘바 쁘다’는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담론이 유포되고,54 국민이 폭넓게 수용하여 천황에 관한 동정심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쓰다 쇼타로는 “국민적 연대의 재구축에 있어서 … ‘공감’, 혹은 그와 유
54 森暢平 , 「メディア天皇制論: 「物語」としての皇室報道」, 吉田裕 外 編, 『平成の天皇制とは何か: 制度と個人のはざまで』, 岩波書店, 2017.
사한 ‘동정’이나 ‘자비’와 같은 감정의 역할”이 중요해진다고 했는데, 마찬 가지로 ‘오코토바’ 이후 억압받는 주체로서의 천황을 이야기하는 담론이 세 간에 넘쳐났고, 오쓰카 에이지는 그것을 ‘감정 천황제’라며 비판의 대상으 로 삼았다.56 오쓰카의 논의에는 주목할 만한 것이 있지만, 동시에 화자인 천황의 악의(悪意)를 고찰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기에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 다. 즉 여기에서의 아키히토 천황은 자신의 담론 전략의 효과를 잘 알고 있 는 매우 전략적인 화자로 부상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 전략의 문제점은 약자의 이야기라는 담론 구조를 운용한 다는 것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명시했지 만, 그것을 자의적(字義的)으로 다수자에게서 소수자에게로 향하는 편견, 억 압, 차별에 저항하고 소수자에게 힘을 실어 주는 이념이라고 본다면, 애초 에 천황을 비롯한 황실 사람들은 결코 소수자일 수는 없으며, 단적으로 소 수자에로의 접근과 빙의(憑依)를 위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57 그렇다면 이렇게 국민과 가깝고 ‘약자’인 천황을 수행적(遂行的)으로 묘
사한 이 텍스트에서 화자의 욕망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을 검토할 때, 바로 이 ‘상징으로서의 직무에 대한 천황 폐하의 오
코토바’로서의 ‘오코토바’가 이야기 내용에서 무엇을 중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이야기 행위와 어떻게 어긋나 있는지를 생각해 보 고자 한다.
이야기 내용과 이야기 행위의 명백한 차이는 ‘기도’를 둘러싼 맥락과 혈
족을 둘러싼 맥락에서 각각 발생한 것을 들 수 있다. 먼저 ‘기도’를 둘러싼 맥락으로는 다음 두 가지를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천황의 직무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을 중요하 게 생각해 왔지만, 동시에 직무에서는 때로는 국민의 곁에 서서 국민의 목소리 에 귀를 기울이고 국민의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 해 왔습니다.
천황으로서 국민을 생각하고 국민을 위해 기도하는 직무를 국민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심을 가지고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먼저 전반 인용 부분에서는 천황의 ‘직무’로서 이야기 내용상 가장 중 요한 과제가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동 시에’로 연결한 뒤에 ‘국민의 곁에 서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라며 일부러 두 번이나 카메라를, 즉 시청자를 거듭 응시하는 행동을 했다. 이야 기 담론상으로는 후반부의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존재 방식을 강조하 고 있다. 후반 인용 부분에서는 그것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내용의 중요도 순서까지 바꿔 쓰는 형태로 국민을 ‘생각’하는 것이 중시되는 한편 ‘국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한 단계 내려간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상으로는 천황의 직무로서 ‘기도’를 중요시하는 것처럼 제시하면서, 사실은 이야기 행위를 통해 행위 수행적으로 국민에 대한 친밀감을 더 상위 가치로 제시했다.
이는 ‘오코토바’를 듣는 형식으로 2017년에 걸쳐 진행된 전문가회의에
관한 아키히토 천황의 반응에서도 엿볼 수 있다. 2017년 5월 21일자 『마이 니치신문』은 2016년 11월의 지식인 간담회 때 “보수파 전문가들이 ‘천황은 기도만 하면 된다.’는 식의 의견을 표현한 것에 대해, 천황이 ‘청문회에서 비판받은 것은 충격이었다.’는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라고 보도했다.58 우 파 논단에서는, 예를 들어 생전퇴위에 관한 지식인회의에 초빙받은 사쿠라
58 『毎日新聞』, 「有識者会議での「祈るだけでよい」 陛下, 公務否定に衝撃 「一代限り」に不満」, https:// mainichi.jp/articles/20170521/k00/00m/010/097000c(최종 검색일: 2023. 10. 11.).
이 요시코(櫻井よしこ)가 “천황의 역할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제사를 집전하 는 것”이라고 발언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듯이, 궁중 제사(宮中祭祀)라는 의식이 황실 존속의 의의로 거론되고 있으며, 이는 근대에 성립한 ‘국가 신 도’와 밀접한 ‘아라미카미’(現御神) 천황에 대한 욕망을 반영한 것으로 파악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키히토 천황의 ‘오코토바’의 이야기 행위에서 생각하면 메시지가 잘못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오코토바’의 화자에 게 ‘기도’는 언급되는 대상이기는 하지만 부차적인 위치에 있을 뿐이며, 그 것을 상위에 위치시키려는 견해와의 사이에서 어긋남이 발생한 것이다.
또 야마구치 데루오미는 ‘오코토바’의 ‘기도’를 궁중 제사로 규정하여 ‘상징적 행위’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명시하고, 삭감의 어려움을 표출하는 담론으로서 ‘오코토바’를 자리매김했다.59 다만 아키히토 천황의 이야기 내 용에 있는 ‘기도’는 위상이 약간 어긋난 것으로도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 주 의해야 한다. 즉 ‘오코토바’에서 ‘기도’라는 단어로 표현된 것이 궁중 제사 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지의 여부는 미지수이며, 그것은 오히려 매스미디 어에서 천황의 위령(慰霊)에 대해 ‘기도의 여행’과 같은 정형화된 문구를 사 용하고 있는 것을 일부러 전용(転用)한 표상의 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 질적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천황은 국민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라는 일본사회 속에서 서서히 확산되고 있는 이미지를 반복한 것으로 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 ‘오코토바’에는 야마구치가 지적한 바와 같은 ‘궁중 제사’에 관 한 명확한 언급이 한 군데 존재한다. 그것은 ‘천황의 종언(終焉)’이라는 생소 한 단어와 함께 제시된 “무거운 모가리(殯)60 행사가 연일 거의 2개월에 걸 쳐 계속되고, 그 후 장례식(喪儀) 관련된 행사가 1년 동안 계속됩니다.”라는 언급이다.
59 山口輝臣 , 「宮中祭祀と「平成流」: 「おことば」とそれに映る天皇像」, 吉田裕 外 編, 『平成の天皇制とは何か: 制度と個人のはざまで』, 岩波書店, 2017.
60 역자주: 모가리는 시신을 매장하기 전 일정 기간, 관에 시신을 넣는 빈소 안치 의식으로 옛날부터 귀 족의 애도 방법이었다.
여기서 참고하고 싶은 것은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의 2018년 11월 생일 에 즈음한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이다. 아키시노노미야는 황실의 황위 계승 의식인 다이조사이(大嘗祭)에 대해 ‘종교적 색채가 강한 것을 국비로 충당하 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궁내청이 수용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불 만을 토로했다. 제도적 억압 속에서 자신의 의지가 통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앞에서 언급한 ‘약자로서의’ 천황상과 겹치지만, 동시에 천황을 계승하는 종교의식인 다이조사이를 황실 내 사적 의식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분명 하다. 여기에서는 황족이 천황으로 바뀌는 것은 종교적 의식으로 뒷받침되 고 있어서, 천황에게 종교적 초월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설 정되어 있다.
이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아키히토 천황의 ‘오코토바’에 내재되어 있던 문제를 다시 한 번 조명한다. 말하자면 천황의 혈통적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해 종교적 서사를 도입한 것이다. 이는 다음에 지적하고자 하는, 이야기 내용과 이야기 행위의 명확한 차이를 드러내는 혈족 문제를 둘러싼 맥락으 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아키히토 천황은 ‘오코토바’에서 자기 혈족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기존처럼 무거운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힘들어졌을 때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국가와 국민, 그리고 내 뒤를 따를 황족을 위해 좋은 일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 니다. 행사에 관련된 사람들, 특히 남겨진 가족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밑줄은 인용자).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앞의 인용 부분에서는 천황의 고령화에 따른 불
완전한 ‘직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으냐는 문제를 언급하면서 ‘국가’, ‘국민’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카메라를 응시하는 이야기 행위를 수행 하는 반면, 그 ‘뒤를 따를 황족’들에 대해서는 눈을 내리깔고 있다는 점이
다. 이로써 ‘국가’와 ‘국민’은 중시하는 반면, ‘뒤를 따를 황족’들은 전자의 ‘국가’와 ‘국민’보다 더 하위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어, 이 텍스트에서 ‘국가에 있어서’와 ‘국민에게 있어서’ 유익한 것이 더 우선시된다는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앞에서의 ‘기도’의 문맥과 비교해 생각해 보면, 공적 존재 로서 국민의 인정을 받고자 희구(希求)하는 ‘약한’ 천황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반 인용 부분에서 그 독해는 예상에서 벗어난다. 천황 사후의
사회 정체를 언어화한 후 거기서 강조되는 것은 ‘행사에 관련된 사람들’, 특 히 남겨진 가족의 ‘약한’ 입장이다. 앞부분에서 제시했던 ‘뒤를 잇는’ 존재, 황위를 계승하고 천황(제)을 유지하는 ‘황족’들은 텍스트에서 가볍게 언급 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뒷부분의 ‘가족’이라는 말 바꾸기 속에서 국가 와 국민의 희생이 되는 주체=피해자로서 자신과 자기 혈족이 있음을 표명 함으로써 그에 관한 공감과 동정을 요청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여기에서 사 람들에게 호소하기 위한 키워드로서 시청자에게 친숙하다고 상정(想定)되는 ‘가족’이 선택되고, 알리바이로서 종교적 의례가 개입되었다.
그것까지를 넣어서 생각해 본다면, 국민과의 관계성을 가지고 지속하는
존재라 여겨질 수 있었던 “일본의 황실이 전통을 현대에 어떻게 살리고 생 동감 있게 사회에서 내재하면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 나갈 것인가.”라는 언명(言明)과 텍스트 마지막 부분의 독해는 아무래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먼저 전자의 “일본의 황실이 전통을 현대에 어떻게 살리고 생동감 있게
사회에서 내재하면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 나갈 것인가”의 내실(内実)로 서 이전 논의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것은 “나는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 각지, 특히 멀리 떨어진 지역과 섬으로 가는 여행도 천황의 상징적 행위로서 중요 하다고 느껴 왔다.”라는 언명으로 표현하고 있는, ‘거의 전국에 걸친 여행’= 행행계(行幸啓)이다. 여기서 ‘상징 행위’로 거론되는 ‘멀리 떨어진 지역과 섬 으로의 여행’에서 대상으로 삼고 있는 ‘변방’의 땅은 근대화의 결과로 마지 못해 ‘벽지’(僻地)가 된 곳이며, 그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민국가의 성립 과 맞닿아 있다. 화자로서의 천황은 그 맥락을 인지한 후, 일부러 변방에 대 한 시선을 이야기함으로써 근대화로 인해 소외된 지역을 스스로 국민국가 에 포용하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여기서는 일본국 통합의 상징으로서 국민 국가 유지의 욕망을 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계속해서 텍스트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상징천황의 직무가 늘 중단없이 안정적으로 지속되기를 한결 같이 바라는 제 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기에서 드러난 것은 단적으로 자기 혈족으로 황통(皇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상징의 담당자로서 가진 황실 지속에 대한 욕망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전쟁 책임 문제 및 불규칙한 발언으로 인한 쇼와 천황의 불안 정성과 비교했을 때 한층 더 두드러지는 ‘헌법 수호 주체’로서의 아키히토 천황의 자기 표상은, 사실상 현행 헌법이 유지되고 현재의 국민국가가 지속 적으로 운영됨으로써 자기 혈통으로 구성된 황실이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예컨대 2018년 12월 20일 마지막 생일 기자회견에서 한 다
음과 같은 발언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올해 우리나라에서 해외 이주가 시작된 지 150년을 맞이했습니다. 이 기간에 많은 일본인은 현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노력을 거듭하여 그 사회의 일원 으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본계 사람들의 노력을 생각하며, 각 나라 를 방문했을 때에는 가능한 한 그들을 만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최근 많 은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필리핀과 베트남을 방문 했을 때에도 미래 우리나라에서 취업할 목적으로 준비에 힘쓰고 있는 사람들 과 만났습니다. 일본계 사람들이 각 나라에서 도움을 받으면서 그 사회의 일원 으로 활약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각국에서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는 사람 들을 우리 모두가 사회 일원으로서 따뜻하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또 외국에서 오는 방문객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방문객들이 우리나라를 직접 눈으로 보고 깊이 이해하여 각국과의 친선 우호 관계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제시한 ‘우리’는 ‘일본 국민’으로 설정한 것임을 알 수 있지만, 다 나베 슌스케가 지적하듯이, 일본은 “90% 정도의 국민이 실제로 시민・정치 적 기준과 민족・문화적 기준 모두 충족하고 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일본 인이 두 기준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일본 국민=일본 민족이라고 생각 하게 되는” 상황이다. 그 부분에서는 타자로서의 ‘외국인’이 부상하게 되 어 행위 수행적으로 민족주의적 담론이 전면으로 밀려나게 된다. 국민국가 로서의 ‘일본’이 다시 전경화(前景化)되는 동시에 ‘상징’으로서의 천황이 부 상하고 동시에 ‘국민이 아닌’ 존재가 다시 공동체의 외부로서 철저하게 타 자화된다.62 이 구조는 이미 ‘오코토바’에 내재되어 있던 것으로, 이 텍스트 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 체계의 한 단면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부의 개원 이용과 황실 경시, 이에 대한 황실의 반발과 거기에 내재된 욕망의 존재에 주목하는 것은 언뜻 보면 둘 사이의 거리감만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실제로 레이와로의 황위 계승 과정에서 그러한 일은 표면적으로 드 러나지 않았다.
레이와 개원에 관련된 정부 주도 이벤트가 기본적으로 성공한 배경은
개원이 정치와는 다른 차원의 프레임으로서 일본사회의 많은 사람에게 호 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원래 천황의 담론 전략에 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오코토바’에서 생전퇴위를 요청하는 이유로는 “천황의 건강 이 악화되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을 경우, 지금까지도 볼 수 있었듯이 사 회가 정체되고 국민의 생활에도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친다.”라는 점을 들었 다. 또 재위 30주년 ‘오코토바’에서는 헤이세이의 시작을 “쇼와 천황의 서 거와 함께 깊은 슬픔에 잠긴 부친 상중에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근대 특히 쇼와에서는 천황의 죽음이 개원을 야기한다는 제도 상, 개원 시점에 사자(死者)로서의 다이코 천황(大行天皇)63 애도를 요청받아 결과적으로 자숙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을 상기했다.64 여기에서부터는 천황 의 죽음에 의존하는 황위 계승 자체가 가져오는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 을 언급하고 이를 회피하기를 기대하는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배 경에는 앞에서 언급한 황실의 안정적 존속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 셈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담론들은 헤이세이 개원을 참조하면서 반전을 기대하게 되 었다. ‘레이와 열풍’으로도 불리는 축제 상황은 사실상 아키히토 천황이 기 획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천황 담론은 정부가 주도한,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이어지는 이벤트
생성으로 구체화된다. 예컨대 천황의 ‘오코토바’에 대해 조언과 승인을 하 거나, 퇴위와 즉위식을 주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그에 대한 정치적 정통성 을 부여해 왔다. 게다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 정부는 미디어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이번의 ‘레이와 열풍’ 이 미디어 개입으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정통성을 인지(認知)한다는 정 부 개입은 황실의 의도대로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황실은 황실의 안정적 지속을 위해, 정부는 정권 유지를 위해 목적은 다르지만 실질적인 공범 관 계를 맺은 것이다. 황실과 정부의 공범 관계는 축제 상황의 출현이라는 차원에 그치지 않
63 역자주: 천황이 죽은 직후 시호를 아직 정하지 못한 동안의 칭호.
64 쇼와에서 헤이세이로의 개원에 즈음하여 생긴 자숙 상황(自粛状況)에 관해서는 中島三千男, 『天皇の代替わりと国民』, 青木書店, 1990 참조.
을 것으로 보인다. H. 아렌트(Hannah Arendt)는 사회적 약자와의 일체화를 요구하고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방하도록 강요하는 정치를 ‘연민의 정치’라 고 부른다. 그것은 애국심과 서로 공통성을 가지며, 정치에 애국심을 도입 하는 것은 위선자의 사냥이나 위선에 따른 지배로 귀결되는 ‘피해자의 정 치’로 성립한다는 것이다.65 전자는 천황의 담론에 그대로 적용되고, 후자는 아베 정권의 담론과 직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마자키 노조무는 세계 화와 신자유주의를 거친 현재 새로운 민족주의의 특징으로, 계속 융해(融解) 되고 있는 ‘민족적인 것’을 기준점으로 한 국민의 재정식화(再定式化)와 ‘피 해자’로서의 ‘다수파’의 민족주의를 지적했는데,66 그런 측면에서 황실과 정 부의 정치적 행태는 같은 지평에서 마주치게 된다.
4. 매스미디어의 광란과 불안, sns의 충만과 잡음
정부와 황실과의 공범 관계를 감안할 때 중요해진 것은 그들의 공범 관계가 사회 전체를 뒤덮는 ‘레이와 열풍’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그 배경에는 지금까지 반복해 왔듯이 TV 미디어를 비롯한 매스미디어의 선전과 그것을 가득 채운 SNS를 비롯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우선 매스미디어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TV 미디어에서는 개원 전후 7일간, 천황과 개원을 둘러싼 특집 프로그 램이 170시간 이상 방송되었고, 특히 4월 30일과 5월 1일은 뉴스, 와이 드 쇼, 다큐멘터리가 집중되었다. 개원일인 5월 1일 오전 0시 전후에는 니 혼TV(日本TV), TBS, TV아사히(TV朝日)의 각 보도국에서 보도 프로그램 특 집을 편성했고, NHK는 ‘가는 시대 오는 시대’, 후지TV는 ‘헤이세이의 “그
65 H. アーレント, 志水速雄 訳, 『革命について』, 筑摩書房, 1995. 66 山崎望 編, 『奇妙なナショナリズムの時代』, 岩波書店, 2015.
믐”(大晦日)’으로 개원의 순간을 보도했다. 일본 전국에서 릴레이식 생중계로 히토모지(人文字),68 불꽃놀이, 카운트다운, 새해 첫 목욕, 해돋이, 새해 첫 참 배, 새해 첫 판매, 기념우표 발매와 같은 축제 상황이 중계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사회가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동시에 개원을 축하 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연말연시를 참고하고 모방한 다양한 이벤트가 열렸 고, 이를 언론 보도 방침에 부합하는 것으로 방영하면서 축제 상황을 전국 적으로 전파했다고 할 수 있다. TV 미디어는 5월 1일의 계승의식에서 ‘3종 의 신기’에 관해 해설하거나 천황이 행행하는 날 잠시 비가 내렸다가 그친 것을 이른바 ‘덴노바레’(天皇晴れ)라고 언급하는 것 등을 통해, 앞에서 살펴 본 황실에 의한 종교적 초월성의 서사를 재생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 도 영적 상상력이 발동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기에, 우선 흥미로운 사례 로서 일부 신사(神社)를 중심으로 ‘고슈인’(御朱印: 도장)을 받기 위해 길게 늘 어선 행렬에 대한 보도를 언급하고자 한다.
2010년대 중반부터 사찰을 참배하고 고슈인을 수집하는 유행 현상이 생겼는데, 이번 개원에 즈음해서는 원호의 근원이 된 『만요슈』의 ‘매화의 연회’(梅花の宴) 일화에 나오는 후쿠오카(福岡)의 사카모토하치만궁(坂本八幡宮)과 천황과 관련 있는 메이지신궁(明治神宮)의 고슈인을 수집하기 위해 줄 을 선 사람들 모습이 미디어에 비쳤다. 특히 사카모토하치만궁에서는 5월
1일 오전 10시 기준으로 고슈인이 4,000장 이상 배포될 정도로 성황이었
다.69 이는 단순한 ‘초하루 신앙’(朔日信仰)에 그치지 않고, 영적인 것에 대한 상상력과 천황의 종교적 초월성에 관한 묵시적 인정이 느슨하게 결합되었 다고 할 수 있다.
또 주요 신문은 4월 30일과 5월 1일 양일간 천황의 황위 계승을 머리기
사로 다루며, 기본적으로 대형 기사와 사설, 칼럼으로 헤이세이의 총평과
68 역자주: 위에서 보면 어떤 글자처럼 보이도록 광장에 많은 사람이 열을 지어 늘어서는 것, 또는 그렇 게 만들어진 글자나 그림 무늬.
69 『朝日新聞デジタル』, 「「令和元日にお参りを」 坂本八幡宮, 参拝客でにぎわう」, https://www.asahi.
com/articles/ASM4Z64FFM4ZTIPE018.html(최종 검색일: 2023. 10. 11.).
레이와에 대한 기대감을 이야기했다. 또 5월 1일에는 각종 사설에서 황실의 미래에 관한 담론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들은 직계 남성이 적다는 점을 언급하는 성격상, 향후 황위 계승에 대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70 그러나 이것도 황위 계승을 언급한 ‘오코토바’ 이후의 황실 담론 전략의 범 위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것들은 황실과 정부 여당이 준비한 방향성에 동조하는 것 으로, 매스미디어가 제 권력을 감시하는 ‘감시견’(watchdog) 기능을 상실했음 을 증명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들을 상대화하기 위해서는 개원 후 2주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71
그러한 상황은 매스미디어의 영향을 받은 SNS에서도 다수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새 연호 발표 시기와 개원에 즈음하여 방대한 양의 트윗이 확인되었으며, 각각 새 연호, 새 시대에 관한 호의적인 트윗이 많은 공감을 받았다. 거기에는 ‘고마워, 헤이세이’, ‘반가워 레이와’와 같은 문장형 표현이 반복되면서 별 의심 없이 수용되는 분위기였다.
그중에서도 새 원호 공식 발표 직후 사례로 ‘#레이와 18년(2036)’이라 는 해시태그와 ‘레이와짱’(令和ちゃん)의 유통을 참고하고자 한다. 먼저 새 원 호 공식 발표 직후 트윗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해시태그는 ’#새 원호’, ‘#레 이와, ‘#새 원호 발표’, ‘#레이와 18년’, ‘#레이와 출생’이었다고 한다. 이 중 주목해야 할 것은 ‘#레이와 18년’이다. 예를 들면 ‘H31’처럼 원호의 머 리글자를 따서 연도를 부여하여 임의의 연도를 표현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시행하고 있지만, 새로운 원호의 머리글자가 ‘R’이 됨으로써 레이와 18년은 ‘R18’로 표기하게 되므로, 같은 표기를 사용하는 ‘18세 미만 출입 금지(一八歳未満禁止), R18+’와 연결되면서 화제가 되었다. 특히 성적인 콘텐츠와 친화
70 개원에 즈음하여 황위 계승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경향은 茂木謙之介, 「改元の暴くもの: 大正末~昭和初期における女性皇族の表象をめぐって」, 『足利大学研究集録』 第54號, 2019, 84~104쪽 참조.
71 한 사례로 『毎日新聞』은 5월 14일 이후의 ‘레이와 열풍 고’(令和フィーバー考)로서 식자의 견해를 여러 차례 걸쳐 게재했다.
력을 가진 이 단어의 유통은 원호가 가진 의미 내용을 빼앗는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73 그러나 한편으로는 천황의 죽음을 수반하지 않는, 경사스럽고 축복해야 할 이벤트로서 개원을 준비했다는 점 에서 실질적인 공범 관계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레이와짱’ 일러스트의 유통이다. 사람이 아닌 것을 캐릭터화 하여 소비하는 의인화 문화가 웹 공간에서 특히 더 발달했지만,74 새 원호 가 발표되자 곧바로 새 원호를 캐릭터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웹상 에서는 수많은 일러스트가 등장했다(〈그림 1〉). 새 원호, 즉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맥락에서 풋내기로 그려지는 동시에 소녀 비주얼을 겸비한 캐릭터 조형은 다양한 작가들의 공통점이며 이른바 ‘모에 캐릭터’(萌えキャ
ラ)로서 소비되는 유행과도 관계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 진행 중인 민족주의와의 사이에서 느슨한 결합을
낳기도 한다. 예를 들면 탤런트 나카가와 쇼코(中川翔子)가 4월 29일 신사 를 참배했을 때 ‘황기’(皇紀)라고 적힌 현수막을 가리키는 자신의 사진을 게 재하면서 “서기로는 2019년이지만, 일본의 기원으로 따지면 2679년이라 고!” 하는 것에서 스스로 신화적 지식을 ‘발견’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나카가와 씨의 트윗 외에도 개원 직전 단계에서 다가올 순간을 어 떻게 하면 축하할 수 있겠느냐는 주제에 관해 “스메라기 이야사카에(天皇彌榮)라는 딱 맞는 말이 있어요. 천황 폐하의 치세가 언제까지나 오래오래 평 화롭게 번영하길 기원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이번 정도밖에 쓸 기회가 없 을 것 같으니 괜찮으시다면”76이라는 트윗이 3만 건이 넘는 리트윗을 받았 고, 실제로 5월 1일을 중심으로 같은 말로 개원을 축하하는 분위기를 확인
73 SNS에서는 문맥을 이렇게 끊고 웃음을 얼마나 유발할 수 있는지 ‘오기리’(大喜利: 흥행에서 그날 마 지막에 나오는 상연 목록) 문화가 있는데 그 단적인 표현을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개원과 관련된 웹상의 ‘오기리’는 ‘#新元号大喜利’라는 해시태그로 대표되는 새 원호 예측도 빼놓을 수 없
다. https://news.nicovideo.jp/watch/nw2590555(최종 검색일: 2023. 10. 11.).
74 伊藤慎吾 編, 『妖怪・憑依・擬人化の文化史』, 笠間書院, 2016.
<그림 1> 레이와짱 출처: Goole에서 “레이와짱”(令和ちゃん)을 검색한 결과의 일부.
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퇴위 이후의 천황 호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트 윗도 확인되었다.
레이와를 맞이하기 전에 쇼와 아저씨의 충고다!
당대 천황을 ‘긴조’(今上)라고 부르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겠지만, 무슨 일 이 있어도 양위 이후의 폐하를 ‘헤이세이 천황’이라고 부르면 안 돼! 원호로 부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붕어(崩御) 이후야! 정확하게 ‘조코’(上皇)라는 단어가 있으니, 그것을 사용하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말들이 시대착오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맥락 이 완전히 탈색되어 간단한 축하의 표현으로 유통되면서 그 시기의 축제 분 위기에 영향을 미쳤다는 현상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트윗의 주체가 의식적 이었는지 무의식적이었는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로서 지극히 정치적인 맥락 을 탈색하여 사회에 점진적으로 충만시키는 경향으로 실질적으로 정부나 황실의 전략과 맞물리는 형태로 민족주의 고양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의 한편에서 축제 상황을 준비한 아키히토 천황을 칭송 하는 움직임이 SNS에서 있었던 점은 간과하기 어렵다. 4월 30일 아베 신조 는 개인 계정에서 “천황 폐하께서는 오늘을 끝으로 퇴위하십니다. 헤이세이 30년, 항상 국민과 함께해 주신 천황과 황후 양 폐하의 발자취를 생각하며, 이 기회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라고 말해 2.4만 건의 리트 윗, 11.7만 건의 ‘좋아요’를 받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치인으로서 황실 활용을 지속해 온 동향을 전제했을 때, 단순한 칭송이라기보다는 인기몰이 의 일단으로 파악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한편, 이 트윗과 유사한 트윗이 레이와 원호 발표 이후에도 산발적으로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원호 발표 직후인 4월 1일 2.8만 건의 리트윗과 7.4만 건의 ‘좋아요’를 얻은 “천황 서 거 이후의 원호 발표는 고인을 추모하는 의식 같았는데, 생전퇴위가 이렇게 즐거운 이벤트가 된다는 것을 후세에 전할 필요가 있겠다.” 라는 트윗이나 같은 날 6만 건의 리트윗과 12만 건의 ‘좋아요’를 받은 “무슨 말이 하고 싶 냐면, ‘원호 변경’이라는 일본 전체가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사를 큰 기 쁨을 누릴 수 있는 밝은 행사(大喜利)로 바꾼 긴조 천황은 대단해.” 라는 트 윗, 그리고 개원 직전에 4.1만 건의 리트윗과 11.2만 건의 ‘좋아요’를 얻은 “쇼와 천황의 컨디션이 나빠진 후/체온, 맥박, 혈압, 호흡수가/매일 보도되 고/각지의 축제, 연회, 광고 표현/버라이어티 프로그램도 자제하고/그러한 분위기를 우려한 이는/당시 황태자 전하/30년 후 스스로 퇴위를 결정한 것 은/폐하의 국민에 대한 마지막 배려/그 배려에 감사드리며/마지막 헤이세 이의 날을 보내자.” 라는 각 트윗은 천황의 ‘배려’에 응답하는 동시에 그 태도를 높이 평가하고 칭송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 외에도 4월 말에 12.6만 건의 리트윗과 46.4만 건의 ‘좋아요’를 얻은 트윗으로서 “편의점 앞에서 남자 고등학생들이 ‘천황 폐하, 5월부터 정말로 푹 쉬셨으면 좋겠어’, ‘우리 할아버지는 매일 크레페를 사러 가시는데, 그처 럼 천황 폐하도 좋아하는 걸 드셨으면 좋겠어’, ‘천황 폐하는 뭘 드실까?’, ‘닭튀김 같은 거 드실까?’, ‘튀김이 맛있으니까 드셨으면 좋겠어’라며 수다 를 떨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는 3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약자’ 로서의 천황에 대한 이미지가 공유되고 재생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트윗들을 묶어 아키히토 천황과 정부의 공범 관계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경향이라고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경향에 국한되지 않는 것들도 등장했다는 것을 기록해야만 한다. 예를 들면 4월 30일자 NHK ‘News Watch 9’에서 이른바
‘거리의 소리’로서, 다가오는 레이와 시대에 기대하는 것으로 ‘차별 없는 세 상’, ‘블랙 기업 근절’ 등이 언급되었지만, 이것들은 실질적으로 헤이세이 시 대의 종언에 즈음하여 그때 해결되지 못한 사회문제가 부감적 시점에서 재 조명되면서 표면화된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바뀌 면서 오사카에서는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도톤보리(道頓堀)에 뛰어드는 이 벤트를 했는데, 때마침 다리 밑을 지나가던 배에 떨어져 골절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도톤보리에 뛰어드는 것은 프로야구 한신타이거즈(阪神タイガース)가 우승했을 때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러한 상황을 재현함으로 써 개원을 축제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세였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골절 사 고라는 화(禍)를 불러일으켜 의도치 않게 축제 상황에 찬물을 끼얹는 것으 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 밖에도 트위터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퇴위와 즉위식에 관한 트윗 세 건을 들어보고자 한다. 5월 1일에 1.9만 건의 리트윗과 3.8만 건의 ‘좋아요’를 얻은 트윗에서는 “Q. 이번 레이와 치세에는 왜 3종의 신기를 사용하는 의식 같은 것을 하는 거죠? / A. 그 옛날 ‘이놈은 3종의 신기를 사용한 의식 없이 즉위했기 때문에 정식 천황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강변하며 고토바 천황(後鳥羽天皇)을 유배시킨 가마쿠라(鎌倉) 무
<그림 2> 요괴 헌터 출처: 「諸星大二郎, 『妖怪ハンタ- 地の巻』, 集英
社, 2005年(初出1974年)」
사들이 있었기 때문” 이라는 시대착오 적인 맥락을 도입해 황실 의식을 ‘이야 깃거리’로 소비했다.
또 4월 30일에는 “천황 폐하 퇴위식 인데, 방금, 긴 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 고 자신을 고고학 교수라고 밝힌 남자 가 황궁 문 앞에서 ‘의식 순서가 잘못됐 어, 천황의 부재 시간이 아주 조금이라 도 있으면 그 틈을 노려 스사노오노미 코토(須佐之男命)가 되살아나는 거야.’라 고 외치며 안으로 들어가려다 수위에 게 붙잡혔다고 합니다.” 라는, 모로호 시 다이지로(諸星大二郎)의 괴기만화 『요
괴 헌터』(妖怪ハンター, 〈그림 2〉)를 오마주한 트윗이 2.1만 건의 리트윗과 4.1만
건의 ‘좋아요’를 얻었다. 마찬가지로 짧은 퇴위 의식 시간을 언급한 “역시 천황 폐하 정도의 카리스마가 되니 의식이 매끄러우면서 짧고 멋있다. ‘퇴 위례 정전 의식도 15분으로 끝났는데 이 회의는 몇 분이나 할 생각인가요?’ 라는 부추김이 생겼다.”85라는 트윗이 4.6만 건의 리트윗과 11.5만 건의 ‘좋 아요’를 얻었다. 이들은 궁중의 ‘전통’으로서의 의례를 계속 인용하면서 역 사성, 종교성, 합리성과 같은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깃거리’로 다루면서, 천 황의 권위성을 벗겨 내는 ‘그와 같은’ 담론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는 점은 주 의하고자 한다.86 지금까지의 사례는 예시된 획기적인 설정을 전제로, 그리고 담론의 생
성자가 다수화된 상황에서 발생한 ‘축제로서의 개원’의 잡음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축하의 말과 혼동될 듯하면서도 그것들이 제기하는 작은 불협화음이 기록되고 남겨질 가능성을 갖는 것, 그것 또한 레이와 개원이 가져온 것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87
5. 나가며
이상으로 이 글에서는 일본정부의 황위 계승 ‘이용’과 황실의 ‘경시’가 황실 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상 황실의 ‘욕망’과 결합 하여 공범 관계를 맺으며 축제 상황을 연출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여기 에서 중요한 것은 이 축제 상황이 미디어를 통해 광범위하게 생성되었다는 점, 그중에서도 특히 매스미디어의 존재가 컸다는 점, 또한 매스미디어에 주도되는 형태로 SNS 중심으로 사람들 사이에 축제 상황의 공유와 충족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야말로 국민 공통의 ‘큰 이야기’로서 ‘레 이와 열풍’이 등장한 셈인데, 거기에서 생성된 획기적 사고의 문제성을 다 시 한번 지적하고자 한다. 2019년 5월 1일 오전 0시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시간 의식의 원점에서 시대의 절단면을 만들어 지나온 과거를 총괄하고 다 음 세대를 축복하는 방식은, 천황의 죽음으로 탄생한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의 개원과는 이질적인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 방식은 잡지, TV 특집, 서적 출판처럼 미디어 행사 같은 측면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런 축제 상황을 만들어 천황(제)을 탈정치화하고 안정적으로 계승하고 운 영하려는 황실과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는 정부의 욕망, 그리고 그것을 비판
87 이러한 동향은 그 이후에도 확인할 수 있음을 덧붙이고 싶다. 예를 들면 2019년의 이바라키현(茨城県)에서 개최한 국민체육대회에서 귀경하는 천황을 담은 영상이 틱톡(Ticktok)에 업로드되고 트위 터(Twitter)에 전재(転載)되어, 원래 동영상을 투고한 여고생으로 보이는 촬영자의 “진짜 천황인데” 라는 함성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사건이 그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https://twitter.com/Tsukiyamma/status/1186602931967053825(최종 검색일: 2023. 10. 11.).
없이 받아들인 사람들의 공범 관계로 이루어졌다.
2010년대 이후 미디어 상황에서 사람들의 감정을 적절히 자극하여 여 론을 움직이게 하는 매우 전략적인 담론을 계속 제시한 아키히토 천황은 자신에 관한 미디어 표상을 순차적으로 확인한 것으로 알려진, 그야말로 ‘메타 미디어적 주체’였다. 그것은 뒤이은 나루히토 천황을 비롯한 황실 사 람들에게서도 의도적으로 수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이상, 황실 밖에서 만 들어진 천황, 황족, 황실 표상도 황실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전달’될 가능성 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천황(제) 표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황실에 의한 천황(제) 표상의 재생산에 가담할 가능성에도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약 천황(제)에 대한 비판적 의도를 담은 표상을 만들어 낸 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표상의 집합체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일 뿐이라는 의심마저 든다.
특히 2010년대 후반 이후, 생전퇴위 여부를 둘러싸고 천황(제)에 대한 표상 투쟁이 대두되는 가운데, 대량 생산된 천황(제) 표상은 의식적이든 무 의식적이든 간에 표상의 집합체로서 천황(제)을 실질적으로 보완하는 역할 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라는 말의 의미는 작지 않다. 천황(제) 표상은 그 의도가 선의인지 악의인지, 옹호인지 비판인지, 그것들 의 이항 대립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지 생성되고 유통되 는 것만으로 그 기능을 충분히 수행한다. 오히려 화자의 ‘진의’ 따위는 누구 도 이해할 수 없고, 그저 거기에 던져져 쌓여만 간다. 그것을 분석하기 위해 서는 표출된 표상 자체를 편견 없이 분석하여 거기에 내재된 화자의 욕망 혹은 화자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각인된 무의식을 밝혀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천황의 담론에서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존재는 배제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황실의 담론이 황위 계승의 지속에 달린 한 국민국가의 지속을 욕망해야 한다면 국민국가의 유지를 위해 필요 한 ‘국민’의 구분은 불가피하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 외의’ 사람들을 상 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황실의 담론 전략에서 ‘약자’가 반복되는 가운 데 그것들도 그 논리 속에 ‘느슨하게’ 포섭될 수 있지만, 오히려 침묵 주변 의 공백에 폭력적인 것이 내재해 있을 터이다. 이처럼 배제가 쉽게 포섭되 어 버릴 수 있는, 그러한 것으로도 천황(제)의 표상은 존재한다. 그것을 눈앞 에 두고 해석 게임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틈새’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가 문제다.
양방향적인 미디어로서의 SNS에서의 담론은 천황의 특권성을 재가시 화하는 것으로 기능하여 레이와 개원 전후로 ‘국민 공통의 이야기’를 부각 시켰다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말 모리 요헤이는 황족 여인이 ‘모에’로 그 려지는 것을 전체성이 상실된 이후의 ‘섬우주’(島宇宙)적 장소에서 중심이 창 조되는 것으로 파악했지만,89 오히려 2010년대 후반에 천황(제)은 다시 ‘큰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 사례 중 하나로, 레이와 개원 전후로 광란 상황과 공범 관계를 맺은 ‘사람들’ 속에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레이와 개원 전후에 다시 한번 분명해진 것은 역사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 연구 자들에게 논평을 요청한 언론의 존재였다. 연구자들은 언론의 논평을 요청 받고 이에 응하는 형태로 담론을 제시했다(해설을 통한 정통성 부여라고 할 수 있 을까?). 이는 천황(제)의 수명 연장에 기여하는 동시에, 담론을 생산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해 온 인문학이라는 장르의 취약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할 것 이다. 이러한 배경은 — 전쟁 책임을 스스로 떠맡지 않았던 쇼와 천황의 죽 음으로 발생한 헤이세이 개원과 비교했을 때 — 그 문제를 떠맡은 ‘그러한’ 행동을 지속한 아키히토 천황의 전략적 승리라고 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의 혈통이 황위를 계승하는 황실 제도 자체의 존재를 묻는 논의가 애초
89 森暢平 , 「島宇宙を漂流する「象徴」: 〈眞子様萌え〉,そして「ドス子」と」, 『世界』 第792号, 2009,
167~175쪽.
에 적었거나 평범했다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예를 들면 개원의 광란 상태를 비판한 하라 다케시는 SNS에서 “[자신은] 국내 시각 매체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국내 청각 매체와 활자 미디어(중략), 그리고 해외 매체에는 적극적으로 나오려 했다.”라고 밝히면서, 신문 지 면을 통해 “대일본제국으로 돌아갈 생각인가?”라는 비판을 전개했다.91 이 러한 식견은 현재 상황에 대한 이의제기로서 의미 있는 측면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고전적 비판의 방식으로는 — 이번 개원이 가지고 있던 ‘느슨한’ 천황(제) 수용을 고려했을 때 — 그 비판이 유효하게 작용할 수 있을지에 대 한 판단을 유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이 글에서 지적했듯이, 대중사회 탄생 이후의 천황(제)은 미디어를
통해 내실을 충족해 왔으며, 이는 현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다. 또 이 글에서 도 밝힌 바와 같이 미디어에서 레이와로의 개원과 관련된 광란 상황이 발생 한 것을 생각했을 때, 이것들에 대한 담론을 제시하고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도 현재의 천황(제)을 둘러싼 상황에 가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글도 그 비판에 해당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지역적 영역에서의 미묘 한 변화를 과대하게 포장하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하 스미 시게히코의 견해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92
한편 이러한 언명은 단순한 ‘표상 금지’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에 대한 대응은 다음의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표상 주체가 표상의 집적에 이바지한다는 문제성을 인지하고 거기에 대한 상대 화의 시점을 지향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번 개원과 같은 광란 상황에 서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발생한 잡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 뒤에 높은 문해력을 갖춘 표상의 해석자로서, 또 표상의 재/생산자로서, 그리고 표상의 투쟁가로서의 천황을 인지한 후, 천황・황족‘에 따른’ 표상뿐만 아니 라 천황・황족‘에 관한’ 표상에 대해 화자의 의사를 과도하게 파악하는 것도 굳이 오독하는 것도 아니라, 잡음을 적극적으로 읽어 내고 미묘한 차이와 함축에 멈춰 서서 욕망과 무의식을 읽어 내는, 그러한 해석 게임을 쌓아 갈 필요가 있다. 그것 또한 알기 쉽고 편안한 이야기로 포장된 천황(제)에 잡음 을 끼워 넣을 우려를 낳는 동시에, 천황(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라는 이분법 적 논의가 일본 내에서 거의 성립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다시 질문을 던지 기 위한 시작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일본어로 작성되었으며 김경리(건국대학교 아시아콘텐츠연구소/일본문화 전공)가 번역하였다.
투고일자: 2023. 11. 13. | 심사완료일자: 2023. 11. 30. | 게재확정일자: 202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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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을 볼 때도, 전전의 대일본제국헌법에서 천황을 규정하는 방식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 서 전후의 상징천황제하에서 천황의 직무 역시 단순히 비정치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 본 연구는 천황 아키히토의 오코토바를 분석하면서 그가 스스로를 재현하는 신체성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그가 그 의, 그리고 국민들의 어떤 욕망을 재현/대표하고자 하는지를 분석한다. 그 결과로서 본 연구는 천황 이 고령화하는 사회 속에서 고령화하는 신체를 넘어 제도로서 재생하는 신체를, 말하고 듣는 신체성 을 통해 정동의 공동체를, 기도하고 움직이는 신체를 통해 일본국민의 통합과 일본국이라는 상징성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다. 이처럼 천황 아키히토는 과거와 미래, 권위와 권력, 일본국의 상징과 국민통합 의 상징, 국체와 데모크라시라는 이중성을 재현하는데, 이는 헤이세이 시대 천황과 국민들이 함께 만 들어 낸 ‘상징’으로서의 천황제를 구성한다. 주제어: 아키히토, 천황, 오코토바, 헤이세이, 상징, 대표
SNS 시대의 천황제: 약자 정치와 영성(spirituality)의 역학 | 모테기 겐노스케 본 논문의 목적은 소셜 미디어가 사회적으로 침투한 2010년대 일본사회에서 천황과 황실을 둘러싼 미디어 표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2019년 레이와 개원 전후로 일본정부는 황실의 인기를 이용했고, 그 에 비해 황실은 정부와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아키히토 천황의 담화는 개 원의 원활한 실시를 기대한 것이며, 그러한 측면에서 정부의 의도와 공범 관계를 맺었다. 또 아키히 토 천황의 담화에 약자 정치와 영성에 관한 서사가 제시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여기에 헤이세 이에서 레이와로 넘어갈 때 소셜 미디어 담론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대부분은 매스미디어에서 시작된 것으로 개원이라는 축제와 같은 분위기가 넘쳐났지만, 일부에서는 이를 벗어난 잡음도 관찰할 수 있 었다. 이와 같은 사소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천황제를 둘러싼 이야기 해석의 가능성을 지적 했다. 주제어: 천황(제), 미디어 표상, 소셜미디어(SNS), 개원, 내셔널리즘, 아키히토 천황, 약자 정치, 영성
천황제와 성차별·이성애주의의 재생산: 일본의 국가 이데올로기 장치의 종언을 향해
| 호리에 유리
근대천황제는 일본사회의 성차별이라는 규범을 재생산하는 장치다. 그러나 일본에서 생활하는 사람 들 대부분은 상징천황제라는 국가체제에 길들여져 있는 상태이고, 이러한 국가체제를 문제 삼는 것조 차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이 글에서는 두 번의 황위계승을 통해 일본사회의 상황을 그려 낸 후에, 황위계승에서 나타나는
성차별과 이성애주의 문제를 밝혔다. 이미 일본 페미니즘에서는 천황제라는 시스템 자체의 문제 제기 는 물론, 사람들의 의식과 관습에도 젠더 역할이라는 점에서 사회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그 러나 이성애주의라는 관점에서는 논의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남성중심주의와 이성애주의 양쪽에서 타자화된 ‘레즈비언’이라는 위치성(positionality) 개념을 통한 잠정적인 분석도 제시해 둔다. 주제어: 상징천황제, 황위계승, 황실전범, 여성·여계천황, 반천황제운동, 가족국가관
‘지속 가능한’ 천황가 서사와 시선의 권력: ‘마사코 황후’에 대한 대중의 판타지와 관음적 시선 | 박이진 이 글은 상징천황제 이후 천황가를 바라보는 대중의 인식 변화를 ‘마사코’라는 기표를 통해 살펴보았
350 일본비평 30호
lifelong reign and the one-era-one-name system. In addition, the possibility of the National Diet’s involvement in the issue of posthumous titles was excluded. When the first succession to the throne after the war occurred, the prewar systems of one-era-one-name and one-name-onetitle were reaffirmed. And the recent revival of abdication before the emperor’s death and the title of emperor emeritus were also regarded as exceptional events. In this way, the status of era names and posthumous titles as symbols of the times continues throughout prewar and postwar periods and to this day, which in turn contributes to the survival of Japanese emperor system.
•Keywords: Era Name, Posthumous Title, One-Era-One-Name System, One-Name-OneTitle System, Imperial House Law, Ascension Ordinance, Imperial House Funeral Ordinance, Era Name Act, Emperor Meiji, Ito Hirobumi
The meaning of ‘symbols’ revisited through okotoba: The Duality of emperors in the heisei period | KIM Taejin
This study aims to deal with Emperor Akihito’s Okotoba as a literary, ideological, and political text. “Message from His Majesty: The Emperor (August 8, 2016)” is a text where the Emperor himself defines the role of the emperor as the symbol of the state. Here, it is worth recalling that the concept of a symbol itself is an ambiguous and politically charged term from the beginning. In this vein, under the symbolic emperor system in postwar Japan, the emperor’s duties cannot be regarded simply as non-political. This study focuses on the body politic through which the Emperor represents himself by analyzing Emperor Akihito’s Okotoba. Through this, I reveal how the Emperor intends to represent Japan and the Japanese people. As a result, this study suggests that the Emperor Akihito is planning the body politic regenerated in an aging society as an institution, creating a community of affect through physicality that speaks and listens to the people, and functioning as the symbol of the state and the unity of the people through the body that prays and travels. As such, Emperor Akihito represents the duality of the past and the future, authority and power, a symbol of the Japanese state and unity of the people, and the kokutai and democracy.
•Keywords: Akihito, Emperor, Okotoba, Heisei, Symbol, Representation
Japanese emperor system in the era of social media: The Dynamics of underdog politics and spirituality | MOTEGI Kennosuke
The aim of this paper is to analyze media representations of the Emperor and the Imperial Family in Japanese society during the 2010s, a period marked by a widespread adoption of social media.
It has been suggested that in the period preceding and following the transition from the Heisei to the Reiwa era, the Japanese government exploited the popularity of the Imperial Family, despite the Family’s expression of their will to maintain a certain distance from the government. However, Emperor Akihito’s speech anticipated a smooth transition to the new era,
355 영문초록
in that regard making him an accomplice to the government’s intentions. It is also noteworthy how Emperor Akihito’s address included references to underdog politics and spirituality.
Social media discourse played a role in the transition from the Heisei to the Reiwa era. Most of the discussions originated from mass media and contributed to the celebratory atmosphere, but it was also possible to observe some noise that strayed from such mood. This paper pays attention to these subtle voices in order to explore the potential for understanding the narrative of the Japanese emperor system.
•Keywords: Emperor (System), Media Representation, Social Media(SNS), Change of the Era (改
元), Nationalism, Emperor Akihito, Underdog Politics, Spirituality
The emperor system and the reproduction of sexual Discrimination and heterosexism: Toward the end of the ideological institution of the Japanese state | HORIE Yuri
The modern emperor system in Japan is an institution that reproduces the norms of sexism and heterosexism in Japanese society. However, most people living in Japan are so accustomed to the state system of the “symbolic emperor system” that it is difficult for them to even problematize it. This paper will first describe the situation in Japanese society during the two replacements of the emperor, and clarify the issues of sexism and heterosexism with regard to the imperial succession. In addition to the problem of the emperor system itself, Japanese feminists have also pointed out the system’s significant social impact on people’s consciousness and resulting customs of gender roles. However, such discussions had failed to include the perspective of heterosexism. For this reason, this paper will hypothetically present an analysis from the positionality of “lesbian,” which has been othered by both male-centeredness and heterosexism.
•Keywords: Symbolic Emperor System, Imperial Succession, Imperial Household Law, Matrilineal/Woman Emperor, Anti-Emperorship Movement, Family-State Ideology
The power of the sustainable emperor’s ‘narrative’ and ‘gaze’: The public’s fantasy and voyeuristic gaze on empress masako | PARK Yi-Jin
This paper examines changes in the public’s perception of the Imperial Family after the symbolic emperor system through the ‘Masako’ label. The media system, which has made the Emperors an object of commercialization and consumption, has amplified public interest in and scrutiny of the Emperors. This public interest may be meaningful as a method of communication with the Imperial Family, despite the change in information preferences. However, the tendency of the public to judge the character and personality of the Empress based on her ‘created’ historicity and ‘contradictory’ moralistic narrative is the result of their consuming of her personal identity in fragments.
The ‘Empress Masako narrative’ is characterized as a popular fantasy with a playful character in which the public ‘gazing’ at her continually creates a fantasy world. In this fantasy
356 일본비평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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