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2

송필경 -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1937년 무렵 미국인 부부 작가가 동시에 중국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찾아... | Facebook

송필경 -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1937년 무렵 미국인 부부 작가가 동시에 중국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찾아... | Facebook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1937년 무렵 미국인 부부 작가가 동시에 중국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찾아 귀중한 글을 남겼다.
남편 에드거 스노(Edgar Snow; 1905〜1972)는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이란 작품을 통해 앞으로 중국을 지배할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과 홍군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부인 님 웨일스(Nym Wales; 1907〜1997)는 ‘아리랑(Song of Arirang)’을 통해 외로운 조선인 혁명가 김산(1905〜1938)의 소중한 육성을 글로 보관했다.
에드거 스노는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혁명가였던 마오쩌둥을 비롯해 중국이란 큰 무대에서 많은 인물을 다뤘다.
님 웨일스는 당시 중국 붉은 군대의 수도였던 옌안(延安)의 루쉰(魯迅)도서관에서 영문 책들을 많이 읽는 예사롭지 않은 조선인 김산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했다.
작품 ‘아리랑’은 작품 ‘중국의 붉은 별’이 묘사한 인물들과 인류 초유의 대행군(이른바 ‘大長征’)이란 무대 배경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고 작다.
하지만 비운의 한 인간 심성을 깊고 절절하게 기록한 점에서는 세계 최고의 르포 문학(보고기사 문학)이라 일컫는 ‘중국의 붉은 별’과 어깨를 겨누어도 조금도 꿀리지 않는다.
님 웨일스는 김산과 인터뷰하기 전에 물었다.
“우선 당신의 개략적인 경력을 말씀해 주시고, 그 다음 당신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해 주세요.”
“내 젊음이요?” 하며 익살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이제 겨우 서른두 살밖에 안되었지요. 하지만 나는 내 젊음을 어느 곳에선가 잃어버렸답니다.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고 나서 강철보다 단단한 의지를 밝힌 주옥같은 인터뷰를 이어갔다.
『틀림없이 나도 한때 아주 젊은 시절이 있었다. 겨우 11살에 집 나와 계속 혼자 힘으로 살았다.
주린 배 옆구리에 3개 국어사전을 끌어안고 일본, 만주, 중국으로 떠돌아다닌 초라하고 열정적인 학창시절이 있었다.
16살에서 22살까지는 순수하고 헌신적인 열정에 불타오르던 낭만적인 혁명시절이었다. 그때 젊었지만 당시에는 젊음을 몰랐다. 감옥살이 하고 나서 내 자신이 폭삭 늙었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첫 사랑을 하던 시절도 매우 젊게 보였겠지만 그 연인과 헤어지기 전에 나는 늙어버렸다.
내 젊음이 없었던 이유는 조선이란 나라가 자신의 어려움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조선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 구체제의 속박으로 흐느끼던 나라였다. 국제과부인 조선은 아직도 압록강 너머로 망명한 자기 자식에게 구슬픈 손길을 내밀고 서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조선으로 돌아가리다. 그러나 울며 돌아가지는 않겠다.
1919년 가을에 조국을 빠져 나오면서 나는 조국을 원망했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투쟁의 함성으로 바뀔 때까지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조선은 평화를 원했으며, 그래서 평화를 얻었다. -저 “평화적 시위”가 피를 뿌리며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난 이후에 ….
조선은 멍청하게도 세계열강을 향하여 ‘국제정의’의 실현과 ‘민족자결주의’의 약속 이행을 애원하고 있는 바보 같은 늙은이였다. 결국 우리는 그 어리석음에 배반당하고 말았다.』
『‘정의’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름다운 몸부림들이 실패했을 때, 나는 조직적인 국제주의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억압받고 있는 모든 민족을 해방시킬 것이다. 중국도, 조선도, 또한 후에는 일본까지도 모두 힘을 합하여 극동 하늘 위에 휘황찬란한 자유의 성화를 높이 올리리라.』
『조선에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 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 심금을 울려주는 미(美)는 모든 슬픔을 담고 있듯이, 이것도 슬픈 노래다. 한국인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도 비극적이다. 아름답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이 노래는 삼백 년 동안이나 모든 한국인들에게 애창되어 왔다.
서울 근처에 아리랑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 꼭대기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우뚝 솟아 있었다. 그런데 조선 왕조의 압정 하에서 이 소나무가 수백 년 동안이나 사형대로 사용되었다. 수만 명의 죄수가 이 노송의 옹이진 가지에 목이 메여 죽었다. 시체는 옆에 있는 벼랑으로 던져졌다. 그 중에는 산적도 있었고 일반 죄수도 있었다. 정부를 비판한 학자도 있었다. 왕실 일족의 적들도 있었고 정적(政敵)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들이었다.
이런 젊은이 중의 한 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 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민중들한테 알려지자, 그 뒤부터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노래를 부름으로써 자신의 즐거움과 슬픔에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이 애끓는 노래가 한국의 모든 감옥에 메아리 쳤다. 이윽고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리랑”은 이 나라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이 노래의 내용은 끊임없이 어려움을 뛰어넘고 또 뛰어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죽음만이 남게 될 뿐이라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노래는 죽음의 노래이지 삶의 노래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은 패배하지 않는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서 승리가 태어날 수도 있다. 이 오래된 “아리랑”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구절은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더욱 많은 사람이 “압록강 건너” 유랑하고 있다. 그렇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는 돌아가리라.』
『내가 체험한 인생살이의 큰 윤곽을 개관해 볼 때, 거기에 보이는 것은 다만 뼈를 깎는 아픔 속에서 얻어낸 패배의 연속일 뿐이며, 앞길에는 험준한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하나도 없다. 나는 세상을 역사에 밀착해서 살아왔다. 역사는 목동의 피리소리에 맞춰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부상자의 신음소리와 싸움하는 소리뿐이다. 투쟁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다. 그 밖의 것은 모두 내 세계에서는 하나도 의미가 없다. 바로 그 투쟁의 대립물 속에 나와 인간 생활의 일치가, 나와 인간 역사의 통일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리랑 노래의 주인공 김산 본명은 장지락으로 1905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1916년 11살에 집을 나와 1919년 14세 나이로 아나키트 활동을 하다가 1921년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갔다.
김산은 1930년 11월 광저우 봉기 3주년 기념행사 준비회의에 참가하러 가는 길에 베이징에서 국민당 경찰에 검거된 뒤, 일본 경찰에 넘겨져 40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이듬해 4월 무죄 석방됐다. 이 사건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족쇄였다.
1937년에 항일 군정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 했다.
1938년 무죄로 석방됐다는 이유로, 김산은 ‘변절자’라는 오해를 받았다. “변절하지 않고 일제와 국민당의 고문을 이겨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1938년에 처형당했다.
1983년 중국공산당은 김산을 복권하여 명예를 되돌려 주었다.
우리는 우리 땅 한반도에서 아직도 정의와 평등은 고사하고 민족의 독립도 엄밀히 말하면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아직까지 좌절의 연속이다. 미국 대통령들의 의도에 가슴을 졸여야 하고, 일본 총리들의 적반하장에 몸서리치고 있다.
2018년 쿠바 산타클라라 방문에서 쿠바의 경제력에 비해 웅장한 체 게바라 혁명광장과 기념관을 둘러봤다. 그 기념관을 나서면서 나는 1930년대 우리 혁명가 김산의 비운이 떠올랐다. 체게바라와 달리 스스로 손으로 기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님 웨일즈가 대신 알린 드넓은 붉은 대륙 한 귀퉁이에서 홀로 애절한 아리랑을 부른 김산 육성 말이다.
님 웨일즈가 기록한 김산의 생애를 보면 우리 스스로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지 못했지만 우리에게도 체 게바라 못지않게 꿈을 꾼 위대한 기개를 지닌 혁명가 김산이 있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다음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있는 김산의 육성이다.
『나의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또한 실패의 역사였을 뿐이다. 나는 오로지 하나의 승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 자신에 대한 승리만을.
그러나 이 작은 하나의 승리는 나의 삶을 계속 지탱해갈 수 있는 신념을 나에게 주기에 족하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삶이 경험한 패배와 비극은 나를 절망시키지 않고 나에게 힘을 주었다.
이제 나에게는 청운의 환상이 모두 깨져버렸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인간에 대한 신념은 버리고 있지 않다. 아직도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념은 버리지 않고 있다.
나는 살면서 늘 실패만 했을 뿐이다. 우리나라 역사도 그러하다. 내 승리는 단 하나다. 나 자신에게 승리했다. 이 작은 승리 하나는 나에게 삶을 이어갈 신념을 주기에 충분했다. 살면서 경험한 패배와 비극에도 다행스럽게 나는 절망 않고 오히려 힘을 얻었다. 내 환상은 거의 남지 않았지만, 인간에 대한 믿음과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버리지 않고 있다.』
김산은 중국 공산당의 오해로 33살에 처형당했다. 체 게바라는 미국 CIA 앞잡이에게 39살에 처형당했다.
체 게바라가 콩고와 볼리비아에서 경험한 실패는 우리 김산의 실패와 다르지 않다. 체 게바라 역시 자신에게는 승리했다.
체 게바라가 꿈꾼 세상과 김산이 꿈꾼 세상의 바탕에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김산의 ‘인간에 대한 믿음’이 우리 역사의 소중한 가치가 될 때 우리 미래는 천박한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건설하리라.
사람 1명 및 문구: '1 MT Song of Arirang'의 이미지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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