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때리기
2024.02.26
권혁범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서울의 봄’과 5·18 민주화운동이 비극적으로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종로에 있는 TOEFL 학원에 등록했다. 어느 날 거기서 서클(동아리) 후배와 마주쳤다. 나와 그는 눈인사만 한 후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계엄령하 살벌한 상황에서 서울 뚝섬 근처에서 20여명의 선후배가 시위하다가 무자비하게 폭행당한 후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게 1980년이다.
지난 2월 초부터 갑자기 ‘운동권’을 둘러싸고 여야 간에 설전이 벌어졌다. 여당과 극보수 언론이 이 기회에 ‘운동권 특권정치’를 청산해야 한다고 연일 운동가 출신 야당 정치인을 공격한다. 노리는 것은 ‘운동권’ 전체에 대한 폄하인 듯하다. 사실 따져보면 ‘운동권’이라는 단어는 묘한 의미를 내포한다. 뭔가 특수한 부류의 무리를 지칭하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전문시위꾼’으로 매도하기 딱 좋다. 운동가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을 갈라치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물론 민주화 운동 출신 정치인 중 비판을 받아도 마땅한 인사들이 있다. 정당정치 영역으로 진입한 후 지지자들을 실망하게 한 명망가들도 적지 않다. 그들이 과거에 이념적 선명성 추구, 과도한 진영론, 정책적 사고 부재, 낮은 젠더 의식 등으로 과오를 범한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법을 명백히 위반한 일부 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이 자신에 대한 검찰의 조사나 기소를 ‘야당 탄압’으로 규정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곤혹스럽다.
하지만 여당의 어떤 정치인은 야당의 운동가 출신 정치인에게 “자기 손으로 땀 흘려 돈 번 적 없고 오직 운동권 경력 하나로 수십 년간 기득권을 차지”한 사람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이제 그들은 게으른 특권층으로 매도된다. 어떤 극보수 신문은 ‘반민주·반인권 일삼는 무소불위의 집단’이라고 이들에게 맹폭을 가했다(그런 특성은 되레 그 신문에 해당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운동가들은 당시 학교에서, 공장 등의 일터에서 쫓겨나고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투옥된 사람이 부지기수다. 이들은 민주화 이후에도 학교나 일터로 돌아가서 세속적 성공을 하기는 힘들었다. 시위, 농성, 투옥으로 점철된 이들에게는 정치 말고는 열려 있는 공간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운동 경력은 정치권과 시민운동에서만 대체로 긍정적인 경험으로 인정받았다. 운동가들은 회사에서, 학교에서 혹은 공공성 관련 영역에서도 우대를 받기는커녕 냉대를 받았다.
대다수 민주화 운동가들이 “생업으로 돌아갔다”라고 얘기하는 극보수 신문은 사설까지 동원해 이런 특수한 사정을 외면한다. 마치 ‘생업’에 묵묵히 종사한 운동가는 순수하고 도덕적인데 정치권으로 간 운동가는 타락한 사람처럼 암시한다. 정치무대로 가지 않았던 운동가들과 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을 대립시키는 전술이다.
물론 극소수는 변호사, 대기업 임원, 교수도 되었지만 아주 예외적 경우다.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을 잃어 요절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엄중한 시대에 별다른 고뇌 없이 세속적 이익을 맘껏 누린 사람들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운동권’을 비난하고 조롱하며 공론의 장에 진입해 있다. 나는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처럼 한동훈 비대위원장에게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겠다. 왜냐하면 그런 감정은 타인이 강요할 수도, 강요해서도 안 되는 깊은 내면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다른 학자 지망생들과 마찬가지로 부채 의식이 강했다. 그때는 대부분이 그랬다. 주변에 자신의 행복, 미래, 때로는 목숨까지 걸고 독재정권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민주화가 이름 없는 ‘수많은 일반 시민의 노력’으로 이뤄졌다고 하지만 과연 희생하고 헌신한 운동가들 없이 일반 시민들만의 힘으로 그게 가능했을까?
여권에서는 ‘특권’이라는 말을 강조했지만 내게는 ‘청산’이 민주화 및 통일 운동에 매진했던 사람들을 내치고 이 기회에 민주주의도 걷어차자는 의미로 다가온다. ‘독재부역자 청산’ ‘친일파 청산’이라는 구호는 위험하고 낡았지만 모순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운동권 청산’이라니!
지금 정치권에서는, 특히 야권에서도 총선 공천에 관련하여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매일 터져 나온다. 전직 운동가들에게 결코 유리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 와중에 하고 싶은 얘기는 그들이 치열하게 민주화에 이바지한 점을 늘 기억하고 존중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자는 말이다.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외치던 시절은 흘러간 과거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권혁범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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