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06

(34) Simon Bae - '친북좌파' 경희대 신은희 교수의 전향 (기가 막혀... 북한을 보는 눈이 그렇게도...



(34) Simon Bae - '친북좌파' 경희대 신은희 교수의 전향 (기가 막혀... 북한을 보는 눈이 그렇게도...




Simon Bae‎ to Chosun Monthly
2 August 2013 ·



'친북좌파' 경희대 신은희 교수의 전향 (기가 막혀... 북한을 보는 눈이 그렇게도 색맹이었나 ?


2013.08.01 07:41 입력 / 2013.08.01 07:4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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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로 평양을 방문한 2006년 독특한 경험을 했다. 연락처와 주요 메모가 담긴 다이어리를 잃어버려 분주소(우리의 파출소)를 찾았는데 보안원들은 나를 스파이 취급했다. 지하 취조실에서 공포에 질려있는 주민들을 봤다. 이런 통제체제에서 무슨 다원적 가치와 문화적 다양성이 가능하겠냐는 생각에 심적 충격이 컸다.”

* "평양 팔출소에서 만난 공포 질린 주민들 … 내겐 쇼크"

아래 기사. 다행이다. 그러나, 이 사람도 전향했다니 다행이다. 그러나 북한을 3회 방문했을 때 북한실체에 눈을 떴다는 것이 안타깝다. 김일성을 예수로 비유했다는 오늘의 여자교수.

결론이다.

미주통일신문 기자는, 1973년 장충동 지역에 있는 반공연맹 지하실에서 북한신문... 로동신문들을 읽고 북한이 무서운 곳으로 알게 되었고,

1983년 4월 당시 남북경제 회담을 취재한다고 미국서 판문점으로 달려 가 2차례 취재하던 현장에서 만난 북한 기자들의

깡 마른 얼굴, 영양부실로 치아(이빨)가 고르지 못하고
담배꽁초도 맛있게 피우는 모습들,
입고 있는 남루한 옷,

특히 매시간 긴장하는 얼굴 표정, 옆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거나
자유롭게 행동을 못하고.... 얼굴에 미소가 없고 모두가 찬얼음처럼 딱딱한 표정,

뭔가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태도, 서울 명동을 방문한 북한 기자 및 수행원, 대표들(대표들은 상가 쇼 윈도우를 쳐다보고 아이스 쇼핑을 했으나)이 상가나 사람들을 구경하지 않고 거의가 앞만 보고 걸어가는 행동,

특히 겁怯에 질린 얼굴, 눈빛에서

[안되겠구나.. 통일이.... 북한의 경제가 최소한 남한경제 성장의 절반이 될 때 대화가 가능하다] 판단하고 계속 미주통일신문에 보도를 했었다.그러니까, 판문점 취재 1회에서 북한실체를 인지 했다는 것.

서울대, 고대, 연세대에서 공부도 못한 당시 미주통일신문 기자였지만, 기자는 판문점 취재 2회, 워커힐에서의 남북대화 1회 총 3회 취재에서 [북한의 실체, 남북대화의 기대난]을 분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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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래 여기자는 ...... 1950년 6.25 경험을 못한 사람들일지라도 그 북한의 살인독제, 공포정치가 어느 수준이라는 것도 모르고 강철서신이니 했던 서울대 학생들, 고려대 연세대 등등 까지 김일성 찬양을 했다는 사실에 다시한번 실망,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미주통일신문은 그것을 몰라 30년간 북한 관리들의 직 간접의 평양 방문을 거절했던 것으로 알았나 ? 또 당시 안기부가 1988년 기자에게 직접 "북한 접근전략"을 요청했던 것을 거절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았나 ?

1986년 당시 김대중 총재가 미국 LA 강대인 치과의사를 통해 기자가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협력하면 사후 큰 신문사를 만들어 주겠다"는 빅딜도 거절한 이유,

노무현 정부 때도 기자를 지원한다는 메시지를 제끼고 노무현의 전자개표기 조작 당선 등 좌파적 행동을 비판했던 기자의 정신,

지금도 친북한 세력들의 방북요청을 유도하는 것을 거절하면서 국군포로 2, 3명 서울귀환 조건을 내 걸고 있는 이유를 아는가 말이다.

그로 인해 기자는 지금 거지꼴로 살고 있다. 내일 TV방송 녹화 다. 오늘은 방송국에 한달치 사용 전파비를 보내는 날이다. 기자의 수중엔 현재 80 달러가 남아있다. 어제 차민영 내과병원에서 500달러 광고비를 받았다가 순식간에 다 날아갔다.

LA재벌들은 조선일보 TV에 거액을 투자했다고 어제 알려졌다. 중요한 미국 교민사회에 필요한 미주통일신문,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장세동 부장 밖에 없었다.

그 다음의 대통령들은.....그 잘못은 본인 미주통일신문에 실책(?)이 있었으나.

끝.

피곤하다. 오늘도 돈을 빌릴, 얻을 궁리를 한다. 평양을 오가며 잘 먹고 즐긴 인간들아, 축하한다. 만수무강 해라. 미주통일신문은 이대로 살다가 죽으리라. <배부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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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2013.08.01 00:59 / 수정 2013.08.01 00:59
'친북좌파' 신은희 교수의 전향
한때 김일성을 예수에 비유
10년 희망이 절망으로
북한은 특권 상위 1% 사회

‘북한이 종교 탄압국이면 미국은 종교 테러국’이라고 주장했던 신은희 경희대 교수는 자신의 과거 대북관이 지엽적·감성적이었다고 했다. [구윤성 인턴기자]

신은희(44)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교양학부의 별칭) 교수는 ‘주체사상의 전도사’로 불려왔다. 서울 태생으로 캐나다 국적을 취득한 종교 철학자인 신 교수는 숱한 친북성 발언으로 화제를 뿌렸다. 김일성 시신 앞에서 눈물을 보인 주민들을 “예수의 주검 앞에서 우는 여성들처럼 보인다”고 하고, 2004년 용천 폭발사고 때 김일성 초상화를 꺼내오려다 숨진 교사를 순교자로 묘사해 논란을 빚었다. 그에게 친북 좌파란 꼬리표가 붙어다니는 이유다.

 그랬던 그가 김정은 체제의 북한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다. 신 교수는 지난 31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특권을 가진 상위 1%중심의 사회”라며 “북한사회의 계급주의는 참으로 거부감이 드는 힘든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에 대한 희망이 10년 만에 절망으로 바뀌었다”며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 북한 김정은 체제의 종착역은 중동 민주화를 가져온 자스민 혁명과 같은 것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을 보는 시각의 변화, 즉 ‘전향(轉向)하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신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미국 아이오와주 심슨대(종교철학부) 교수로 있던 2003년 3월 학문적 관심과 봉사활동 목적으로 처음 방북했다. 이후 2006년까지 4차례 방북하며 김일성대학과 평양외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했다. 어머니 고향이 함경남도 북청이라는 것 외에는 북한과 인연이 없다.”

 신 교수는 대학 졸업 후인 90년대 초 캐나다로 이민해 토론토대에서 신학과 종교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방북 경험을 토대로 저서, 인터넷 등을 통해 북한 관련 글을 써왔고 2008년부터 경희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 방북기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북한을 ‘북조국’이라고 호칭하는 것부터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2005년 12월 한 인터넷 매체에 올린 글에서 ‘북한에 미국식 종교자유를 들이대는 것은 문화적 차원의 종교 테러리즘이다. 북이 종교탄압국이라면 미국은 종교테러국’이라고 말했는데 반발이 컸다. 방북 경험을 토대로 남북한을 연인관계를 표현한 책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없을까』도 마찬가지였다.”

 - 주체사상을 기독교와 같은 종교로 묘사해왔는데.

 “이젠 생각이 달라졌다. 노동당은 어머니, 수령은 아버지, 인민은 자녀라고 주민들을 세뇌하면서 ‘어느 부모가 자녀에게 나쁜 것을 주겠느냐’고 북한은 주장한다. 인민이 왜 어린아이냐. 충분히 수령이나 체제를 비판하고 언론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

 - 왜 생각이 바뀌었나.

 “세 번째로 평양을 방문한 2006년 독특한 경험을 했다. 연락처와 주요 메모가 담긴 다이어리를 잃어버려 분주소(우리의 파출소)를 찾았는데 보안원들은 나를 스파이 취급했다. 지하 취조실에서 공포에 질려있는 주민들을 봤다. 이런 통제체제에서 무슨 다원적 가치와 문화적 다양성이 가능하겠냐는 생각에 심적 충격이 컸다.”

 - 전향인가.

 “내가 과거 북한 사회를 이해한 것이 굉장히 지엽적이고 감성적이었다는 점에서 전향이라 할 수 있다. 이념적 좌파에서 우파로의 전향이 아니라 종교학적 성찰에 의한 우주적 전향이라 말하고 싶다.”

 - 어떻게 한국 대학강단에 설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노무현정부 때는 통일부가 대학 특강 등에 초청해 ‘북한 바로알기’라며 우호적으로 얘기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2008년 종교철학을 영어로 강의할 교수를 공모하는 데 뽑혔다.”

 - 보혁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사실 답이 없어 보인다. 정권변화에 따라 통일문화 패턴이 달리지고 한때 격려받던 일이 어느 시기엔 악마화하고 죄인 취급을 받는다. 비극의 문명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념의 잣대는 이 세대에서 끝났으면 한다.”

 - 향후 계획은.

 “기회가 된다면 남북과 해외를 오가며 가르치고 봉사 하고 싶다. 북한 학생들에게 해외유학 기회가 주어져 국제화에 공헌할 인재가 됐으면 한다. 10~20년 내에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글=이영종 기자,

정영교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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