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진의 광주전남 문학지도 그리기 문학은 사랑이다 ① : 龍兒의 정희, 정희의 龍兒 ...
입력 2016.02.01. 00:00
- 임정희의 헌신적 사랑 위에 용아 문학 꽃 피워
- 용아에게 임정희는 아내이자 동무이자 동지
- 박용철 30년대 순수문학 대표주자 자리매김
- 계급문학 임화, 모더니즘 김기림과 논쟁도
- 박용철, 시문학으로 30년대 문 연 뒤
- 문학과 문화예술 극예술로 영역 확장
- 38년 5월 '청색지' 창간 한달 앞두고 영면
인생만남 하나
1929년 가을, 용아 박용철은 두 번의 ‘인생 만남’을 갖는다. 10월 말경 일기의 한 대목이다.
"1929년 10월 25일에는 축구대회를 하루종일 보고나서 저녁에 임성빈, 이승만, 영랑과 같이 정지용을 찾았다. 생각든 바 노숙(老熟)보다는 학생풍이 앞서고 날랜 재화(才華)에 속류공격(俗流功擊)이 비오듯 하였다."
박용철과 정지용의 만남을 주선한 이는 김영랑이다. 나이로 하면 정지용(02년생), 김영랑(03년생), 박용철(04년생) 순이다. 휘문의숙(고보) 입학 년도로 따지면 박용철(1916), 김영랑(1917), 정지용(1918) 순이다. 박용철이 1학년 때 배재고보로 입학하는 바람에 셋이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10여 년 뒤로 밀쳐진 셈이다.
인생만남 둘
1929년 9월, 용아는 한 통의 편지를 철원으로 보낸다.
"이렇게 내가 먼저 붓을 들어 길을 열기로 합시다. 정희라는 이름을 귀로 안 지는 꽤 오래 되었고 또 내게 글을 쓰고 싶다는 글을 구경한 지도 얼마 되어서 편리(便利)함으로만 보아서라도 내가 먼저 쓰는 것이 마땅하였으나(이하 생략)
첫 편지는 ‘임정희씨’로 시작한다. 한 달여 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의 첫 머리는 ‘정희에게’로 되어 있다.
"푸른 하늘에 가을 햇빛이 우렷하고 은비늘구름이 손짓하여 부르듯(반듯 반듯하며) <중간 생략> 날더러 형주(兄主)라는 일흠을 감당할런지는 모르겠소마는 정희를 사랑하는 누이로 여기는 데는 주저하지 않겠소. 누구에게도 건강이 앞서기를 바라오. 1929년 10월 17일 용아"
두 번째 편지를 보내고 20여 일 후, 용아는 철원으로 가서 임정희를 만난다. 임정희는 그곳에서 아버지를 도와 의숙을 열고 교육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 의숙에서 용아의 동생인 봉자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돕고 있었다.
지용, 영랑과의 인생만남은 1930년 3월 '시문학'지 창간으로 이어진다. 임정희와의 인생만남은 1931년 결혼으로 결실을 맺는다.
순백의 서정에서 청색의 문화로
1930년대는 한국문화예술의 르네상스기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천재지식인들 대부분은 ‘문화예술계’에 복무했다. 박용철이 견지동에 새로 마련한 집은 신혼집이자, 시문학출판사이자, 진영을 초월한 문학예술인들의 토론장이며 사랑방이었다. 신혼집을 한국문화예술계에 개방하고, 유지하면서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것은 박용철이 아니라 임정희였다. 임정희의 내조에 힘입어 박용철은 모더니스트, 순수문학파, 해외문학파, 계급문학 등을 아우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화·예술인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박용철은 '시문학'에 이어 '문학예술', '문학', '극예술'을 발간한다. ‘시문학파’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1935년에 발간한 '지용시집'과 '영랑시집' 덕분이다. 두 권의 시집에 쏟아진 대중의 관심과 문인들이 보인 자긍심은 대단했다. 이렇게 박용철은 순수문학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그 해 12월에서 1936년 3월에 계급 문학의 임화, 모더니즘 문학의 김기림과 ‘순수-기교주의 논쟁’을 펼치기도 했다.
희곡 번역, 출간 등 무리한 일정으로 그는 건강을 잃었고 지병이 악화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잡지 출간을 추진하였다. '청색지'가 바로 그것이다. '시문학' 출간으로 1930년대의 문을 연 박용철은 문학, 문화예술, 극예술로 영역을 확장했다. 1930년대 말에 이르러서 그의 관심은 문학을 넘어 문화에 이르렀다. 그가 발간하고 싶어했던 '청색지'는 문학잡지가 아니라 문화잡지를 표방했다. 안타깝게도 1938년 5월 '청색지' 창간호 발행을 한 달여 앞두고 용아는 눈을 감는다. 1930년 박용철의 '시문학'으로 문을 연 한국 문화예술의 르네상스는 1940년 2월 '청색지'의 폐간과 함께 서서히 막을 내리며, 우리 글로 글쓰기가 불가능한 암흑기로 접어든다.
등대 그리고 오아시스
용아에게 임정희는 아내이자, 동무이자, 동지였다. 목숨을 위협해 오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는 출간, 번역, 시창작, 연극 활동 등 문화예술 전반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그것은 등대와 같이 항상 그를 비추던 아내의 사랑과 헌신 덕분이었다. 편지로 시작한 사랑은 편지로 이어지고 있었다. 1936년에 용아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우리 정희 보소 날마다 편지 한 장씩 쓰기도 문사(文辭)가 고갈해서 힘이 드니 그럴 지경이면은 글 쓰는 러버(labor)가 대체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의논이 생기겠소. 어제는 또 좀 마음을 놓아서 하로 걸렀지 본시 날마다 쓰기로 한 약속이라는 것이 하로 걸러큼씩 쓰면 이행되는 무언중의 약속이 아니겠소."(이하 생략·1935년 10년 3월 6일)
임정희에게 보내는 용아의 편지는 안부를 묻거나 소식을 전하는 것에 그치는 일이 없었다. 문학에 대해,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작품에 대해 소소하고, 세심하게 평을 풀어놓기도 한다. 마치 거울 앞에서 속엣 이야기를 자신에게 풀어 놓듯 편지에 담았다.
한 권의 책을 내는 것도 만만치 않던 시대에 작가의 일생을 담은 전집을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용아가 작고하고 꼭 두 해 만에 '박용철전집'이 간행되었다. 1940년 6월 26일자 동아일보에는 박용철 전집 발간 기념회와 추도회를 안내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박용철 전집' 간행을 주도한 이는 임정희였다. '박용철 전집'이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처음 시도된 전집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이광수의 춘원전집 간행이 시도된 것은 1935년이다. 온전한 전집은 1962년에도 발간되었다. '박용철전집'은 그 발행만으로도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용아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아내로서 병간호를 하며, 동무로서 글을 받아낸 이가 임정희다. 여기 저기 잡지, 신문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용아의 흔적을 꼼꼼하게 찾고, 고스란히 정리한 이도 임정희다. '박용철 전집'은 임정희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용아전집'이 발간되고 10여 년이 지나 한국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전쟁의 화마가 휩쓸고 있는 와중에 한 권의 문학지가 나온다. 1951년 6월 1일에 발간한 '신문학'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잡지의 발행인이 바로 임정희씨다. '신문학' 4집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작품은 다름 아닌 황순원의 '소나기'이다. 언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꽝꽝 마른 전쟁통에 문인들 앞에 펼쳐진 '신문학'은 실로 ‘오아시스’가 아닐 수 없었다. 임정희는 그때에도 여전히 용아의 유지를 받들어, 용아와 함께 최대치의 사랑을 최선을 다해 이 땅의 문화예술에 바쳤던 것이다.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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