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1

20 덩야핑 - '따오기' 구독자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 오마이뉴스

'따오기' 구독자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 오마이뉴스

활동가 인터뷰 | 8화

'따오기' 구독자가 많았으면 좋겠어요[활동가 인터뷰 ⑧] 진보네트워크 기술팀 뎡야핑 활동가
20.10.05
문세경(mskchan)



▲ 진보네트워크센터 회의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뎡야핑.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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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네트워크센터(아래 진보넷)에 들어올 때는 5년 정도 일할 생각으로 왔어요. 5년 정도 일하면 내가 원하는 포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막상 일해보니 5년 가지고는 택도 없더라고요(웃음)."

거짓말 안 보태고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의 5할은 진보넷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다. 진보넷은 2004년에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했다. 블로그는 웹(web)과 로그(log)의 줄임말이다. 로그는 dialogue에서 파생된 말이고 '독백'의 뜻과 상통한다. 나는 웹에 일기를 쓴 셈이다. 물론 공개된 글이니 누구나 볼 수 있다. 사회문제를 고민하고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진보넷 서버를 이용해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블로그를 쓰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우리는 각자의 방에 쓴 일기를 보고 '소통'하고 (댓글로)'공감'했다. 대부분 별명을 썼다. 내 이름은 '스머프'였고, 지금도 온라인에서는 그렇게 부른다.

뎡야핑은 2004년에 진보넷 블로그를 시작했다. 많은 블로그 이용자 중 가장 왕성하게 글을 썼다. 나는 가끔 '내 방'에 들어가 본다. 그때 쓴 글을 보며 유치했던 지난 날이 떠올라 웃음이 터진다. 벌써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추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9월 20일 퇴근 후, 서대문의 진보네트워크센터 기술팀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뎡야핑을 만났다.

"사회 많이 달라진 걸 느껴... 2014년이 가장 힘들었던 해"


"11년째 활동하면서 사회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어요.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관련 작업을 많이 했어요. 진보넷 기술팀은 개별적인 이슈를 지원하기보다는 사회운동 전체를 지원하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 있어요. 몇 개 이슈가 비중이 커지면서 저의 관심사가 바뀌었어요. 미디어 환경이 변하니까 기존 방법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유튜브 쪽으로 관심을 돌렸어요. 새로운 세대, 10대부터 20대들이 유튜브에 소비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많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거든요. 그래서 사회운동을 영상으로 만들어 전달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5년만 활동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무기한'으로 바뀌었어요(웃음)."

'뎡야핑'은 친구들과 탁구를 치다가 중국의 탁구 선수와 닮았다고 친구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실제로 뎡야핑은 중국의 탁구 선수 '덩 야핑'과 닮았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거의 매일 만났고, 온라인에서 다 풀지 못한 회포는 오프라인으로 이어갔다. 온라인에서 소통한 후라 오프라인 만남에서는 더 풍성한 대화가 이어졌다. 세월이 흐르고 페이스북이라는 지구적 소셜 미디어가 출몰했다. 많은 이들이 버스를 갈아탔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11년 동안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2014년도였어요. 왜냐하면 제가 '팔레스타인 평화연대'라는 단체에서도 활동하고 있거든요. 그곳은 상근 활동가가 없어요. 비상근으로 활동해요. 2014년에 세월호 사건 때문에 자료 만드느라 힘들었는데 그해 7, 8월에 팔레스타인이 대규모 공습을 받아서 2500명이 넘는 사람이 학살당했어요.

팔레스타인인의 사망 숫자를 집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쓰고 그 사람들의 삶이 어땠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매일 팔레스타인에서 내보냈어요. 그걸 읽고 한국 사람들한테 전달해야 하는데 세월호 사건이랑 기간이 겹쳐서 많이 힘들었어요. 매일 밤에 팔레스타인 사망자 현황 뉴스 보고 내보내고, 밤새 울고 잠 못 자고. 다음 날 출근해서 세월호 자료 정리하면서 또 울고.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한꺼번에 안 좋은 일이 터져서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까. 더구나 뎡야핑은 두 단체에 몸담고 일하는 처지였으니 슬픔도 두 배였을 게다. 상근이냐, 비상근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맡은 일을 얼마나 책임있게 하느냐가 뎡야핑에게는 더 중요했다. 오늘따라 뎡야핑이 꽤 멋있어 보였다.

"활동한지 십 년이 넘었으니까 많은 일들이 있었죠. 저는 이 일이 재미있어요. 월요일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해요. 보람이나 성과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따오기(따져보는 오늘의 기술이야기)'사업은 유튜브라서 조회수가 보이니까 신경이 쓰여요.

진보넷은 내부 분위기가 좋아요. 저는 가족같은 분위기를 싫어하는데 여기는 웬만큼 '거리감'이 있고,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잘 맞아요. 일과 사생활을 잘 분리해요.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고. 그래서 오래 일하는 것 같아요(웃음). 저는 20대 중반까지만해도 '사회성'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어요. 이제라도 사회성이 생겨서 다행이죠(웃음)."

뎡야핑은 법대를 다녔다. 학생운동이 전멸하다시피한 때 학교를 다니느라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대안을 찾지 못해 꾸역꾸역 학교를 다녔다. 결국 사회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졸업 전에 여러 단체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마음 맞는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팔레스타인 평화연대'라는 곳을 만났다. 그곳은 본인의 활동을 스스로 기획해서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활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뎡야핑은 진보넷 활동 중 안식월이 되면 무조건 팔레스타인에 간다.

안식월 때마다 찾는 팔레스타인


▲ 2020년 2월 예루살렘 인근, "리프타" 마을에서. 이스라엘은 1948년을 전후해 팔레스타인 마을을 부수고 원주민을 인종청소하며 건국됐다. 이스라엘은 난민들의 귀환을 금지한 채 이 마을을 자연공원으로 쓰고 있다.
ⓒ 뎡야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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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평화연대 활동은 2004년부터 했어요. 진보넷은 2년마다 갖는 안식월이 있어요. 안식월에는 팔레스타인에 가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의 현장을 한국에 알리고 한국에 잘못 전달되는 팔레스타인 뉴스를 제대로 알리는 일을 해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군사점령 속에 삶이 체계적으로 파괴되고 있어요. 그것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있어요."

오래 알고 지냈다고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뎡야핑과 내가 그랬다. 온라인으로 소소한 일상은 공유했지만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어떤 과정으로 운동사회에 발 딛게 됐는지, 앞으로 어떤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지, 전망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나눠볼 기회가 없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뎡야핑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개성이 뚜렷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확고한 목적의식이 있는 활동가였다.

뎡야핑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2~3년의 백수생활을 했다. 그때 우연히 진보네트워크센터 블로그를 알게 되었고 블로그를 썼다. 어느 날 진보넷의 공채 공고를 보고 지원해 상근활동가가 되었다. 활동하는 사람이든 안 하는 사람이든 인간은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으며 산다. 뎡야핑은 스트레스 관리를 꽤 철저히 하고 있었다.


"저는 죽을 때까지 활동하는 게 목표예요. 그때까지 활동하려면 멘탈관리와 건강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황 자체가 스트레스일 때가 많아요. 내가 개입해도 바뀌는 게 거의 없을 때는 무기력감을 느끼죠. 특별히 무기력함을 많이 느낄 때는 팔레스타인 뉴스를 안 봐요. 뉴스를 안 보면 한국 사회에 팔레스타인 소식을 전해야 하는 책임을 방기하는거죠. 하지만 그렇게 하고 마음을 진정시키면 다시 그 일을 하게 하는 동력이 생겨요. 저는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좀 많아요. 아무도 없는 데서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 부르기, 피아노 치기, 만화책 보기가 저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에요."

죽을 때까지 활동할 거라니 놀랍다. 생각해보면 활동은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내고 할 일은 아니다. 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활동가가 있어야 조금이라도 변하니까. 뎡야핑도 그런 믿음으로 일하는 것이리라. 그렇다 해도 이렇게 결기 있고 의지가 굳은 말은 내뱉기 힘든 말이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요즘 저는 위에서 말한 '따오기' 유튜브 만드는 데 꽂혀 있어요. 따오기는 3년 전 진보넷에서 개발한 타임라인 플랫폼(날짜 중심으로 구성된 프리젠테이션 툴)의 이름이 따오기였는데 거기서 가져왔어요. 그 따오기는 망했고, 그 이름으로 유튜브를 만들고 있어요.

지금은 4차 산업혁명 시대죠. IT가 전 영역에 들어왔기 때문에 다룰 수 있는 영역이 무궁무진해요.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우리만 도태되면 안 되니까. 기술에 대해서 사람들이 편하게 이해할 수 있고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도로 만든 거예요. 예를 들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다 가져간다고 걱정하잖아요. 하지만 모든 문제는 현재 마주하고 있는 문제의 연장선이에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닌데 새로운 일인 양 호들갑을 떨죠. 마치 영어 신조어 그대로 가져와서 앞으로는 직업을 두세 개 가져야 하는 것처럼. 사실은 불안정노동이 일반화되는 것 뿐인데. 그래서 기술이 어떤 건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제대로 알자는 취지로 만든 거예요.

코로나 시대에는 원격으로 일하고 재택근무하면서 노동자들을 감시할 수 있는 기술이 더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어요. 이런 걸 사람들한테 알리고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요. 교육도 준비하고 있고요. 사람들이 따오기를 많이 봐야 하는데 구독자가 아직 이천 명밖에 안돼요. 저는 어떤 일을 할 때 성과나 실적 이런 것에 특별히 신경을 안 썼어요. 따오기 만들고부터 신경 쓰게 됐어요(웃음)."

결국 진보넷 활동가 다운 얘기가 나왔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빠르게 대응하는 운동기술(?)을 습득하면 좋은 일이다. 이제는 텍스트 시대가 아니다. 나는 아직 텍스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책보다는 유튜브를 더 많이 보는 시대가 됐으니 유튜브에서 좋은 콘텐츠를 많이 보여주는 것도 정보통신 활동가의 역할이다. 뎡야핑이 고생한 보람을 찾으면 좋으련만.

"활동은 재미있어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중견활동가랑 대화하면서 '계속 활동할 수 있는 동력이 뭐냐'고 서로 물었어요. 그분은 '활동이랑 재미를 연결해서 생각한 적이 없다. 필요한 일이니까 한다'고 했어요. 너무 멋있고 충격적이었어요. 나랑 달라서(웃음).

어렸을 때 꿈은 변호사였어요. 변호사가 되면 사회정의를 구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법대에 갔는데 법이 저하고 잘 맞지 않았어요.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대안이 없어서 포기 못 했고 결국 졸업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양한 직업세계에 대해서 잘 몰랐고, 직업에 대한 탐구도 안 했어요. 생각해보니까 법은 너무 답답해요(웃음)."

뎡야핑은 전공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졸업하기 전부터 학교 밖으로 나가 활동할 곳을 찾았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다. 이제 뎡야핑은 방황하며 보낸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자신에게 잘 맞는 일을 하고 있다. 요즘 뎡야핑의 관심은 오로지 '따오기'다.

"활동하면서 한 번도 보람이나 성과에 신경쓰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따오기 유튜브 구독자수가 100만 명이 된다면 엄청 보람을 느낄 것 같아요(웃음)."

원고를 고치고 있는데 따오기 유튜브 알림이 떴다.

"구글어스로 가는 팔레스타인 여행!"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활동가이야기주간 홈페이지(actvisitweek.net)에도 실립니다. 서울 청각장애인 문자통역지원 서비스를 이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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