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식 ‘평화에 미치다’ 한겨례 기고 다시 읽기 – 박한식 사랑방
한겨례 기고 다시 읽기 – 박한식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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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45회 한민족 통일 실천방안-마지막회
길을 찾아서-44회 나의 통일론 (하)
길을 찾아서-43회 나의 통일론(상)
길을 찾아서-42회 ‘트랙2 회담’ 성사시키다
길을 찾아서-41회 국제문제연구소(GLOBIS
길을 찾아서 (40회) 내가 학문하는 목적은
길을 찾아서 (39회) 조지아주 애선스 입성기
길을 찾아서-38회 조지아대학 교수가 되다
“1960년대 ‘반전운동 기지’ 미네소타에서 ‘평화학’ 초석 다졌다”
“모두 이산의 민족이니 ‘750만 재외동포’는 통일 자산이다”
“마틴 루서 킹의 모교에서 준 ‘예비 노벨평화상’…과분할 뿐이다”
“북한 농학자들 ‘미국 농축산업 견학’ 제안에 뛸듯 반겼다”
“두 기자 석방 위해 평양행…북은 ‘빌 클린턴 특사’ 고집했다”
“한국전쟁 70년…미국의 ‘북한 악마화’ 넘어서야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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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0년…미국의 ‘북한 악마화’ 넘어서야 끝난다”
“개성에 이산가족 상봉지구 만들어 ‘민족의 한’ 풀어주길”
“미국 첫 방문한 덩샤오핑 배려로 하얼빈 가서 고모 상봉했다”
“세상 부럼 없다는 북한 사람들 ‘행복지수’ 잣대부터 다르다”
“주체사상-마오쩌둥사상 ‘뿌리’ 같아 유사하지만 ‘표절’ 아니다”
“김일성 없는 북한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주체사상 때문이다”
“북한은 어버이수령이 지배하는 거대한 가족국가다”
“북한에서 가장 완벽한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김일성이다”
“북한은 주체사상의 나라…‘역지사지’ 눈으로 봐야 보인다”
“허정숙 초청으로 첫 방북…머리에 뿔 달린 악마들 없었다”
“북한 실세는 누구인가…집단의사결정 모르는 우문일 뿐”
“사회주의 국가 ‘북한’ 이해하려면 ‘선’ 넘어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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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0년…미국의 ‘북한 악마화’ 넘어서야 끝난다”
등록 :2020-06-09 19:12수정 :2021-01-04 15:45
김경애 기자 사진
김경애 기자
남북·북미 정상회담에도 ‘정전’ 상태
미국 기독교적 선민의식과 이분법 탓
‘악마는 대화 대상 아닌 제거의 대상’
‘북한 전문가’로 유명해져 종종 ‘협박’
“악마인 북한 편들고 미 이익 반한다”
조지아대학 총장에게 ‘파면 압박’까지
유력 로펌 대표 ‘대학 기부 중단’ 위협도
미국 정치적 경제적 ‘목적’ 세가지 동기
첫째 중국의 군사력 증대·팽창 ‘견제’
둘째 주한미군 주둔의 정당성 ‘강화’
셋째 남한 대상 무기구매 종용·강요
한국전쟁 때부터 양민들까지도 ‘악마화’
3만5천여명 학살당한 황해도 신천 사건
진두지휘한 육군 소장 해리슨 디 매든
‘ABC’ 방송 통해 신원파악 요청했으나
미군 쪽 ‘그런 인물 기록 없다’ 존재 부인
‘6·15’ ‘10·4’ ‘4·27’ 세차례 선언에 답
“민족 자주의 원칙”
박한식 교수는 한국전쟁 70년이 되도록 ‘정전’ 상태인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미국 패권주의 세력의 ‘북한 악마화 프레임’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정전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7월22일 미군들이 휴전선에서 비무장지대 표지판을 세우고 있다. 사진 남북회담본부
작금의 한반도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70년 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남북한 대치 상황도 여전하고 북한은 이미 실질적인 핵국가가 되었으며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북-미 간에는 여전히 험악한 말들이 오간다. 문재인 대통령의 노력과 두번의 북-미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정전협정은 여전히 유효하고 평화협정은 고사하고 종전선언조차도 요원한 게 현실이다. 왜 지난 70년 동안 남북 관계 그리고 북-미 관계는 제자리걸음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인가?
문제는 미국에 있다. 미국이 집요하게 추진해온 북한에 대한 악마화가 그 근원이다. 기독교 이념에 바탕을 둔 선민사상과 미국의 가치로 선과 악을 재단하는 이분법적인 행동양식은 북한을 악마로 규정하고 따라서 악마는 이 지구상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정당화한다. 악마는 없애버려야 하는 대상이지 대화와 타협을 위해 같은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게 미국의 사고방식이다. 악마를 죽이는 일에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될 수 있으며 전쟁 윤리나 도덕적 규범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북한을 악마로 인식하는 풍조는 실제로 미국 사회 저변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북한에 대한 혐오감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데는 별반 차이가 없다. 나는 북한을 오가며 북-미 대화와 관계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로 인해 미국 언론의 조명을 받는 일도 많았다. 미국 전역에 송출되는 <에이비시>(ABC)와 <시엔엔>(CNN) 등은 물론 지역 언론들과도 수많은 인터뷰를 해왔다. 그러나 방송으로 유명해지면서 뜻하지 않은 고통도 감내해야 했다. 해마다 몇차례씩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협박에 시달렸다. 내가 악마인 북한을 편들고 찬양하며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활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밤길을 조심하라는 협박이 많았는데 그런 협박을 받는 날이면 우리 가족은 며칠 동안 저녁 외출을 극도로 삼가야 했다. 누구나 총을 지닐 수 있는 미국 사회를 생각하면 나와 가족의 안위가 늘 걱정이었다.
조지아대학(UGA)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한번은 총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애틀랜타에서 제일 큰 로펌의 대표 변호사에게 정식 항의 서한을 받았는데 그 내용인즉, 박한식 교수를 즉각 파면하고 다시는 강단에 서지 못하도록 하라는 압력이었다. 그 변호사는 편지에서 내가 악마 정권인 북한을 대변하고 옹호하는 사람이기에 자기 아이들을 그런 사람 밑에서 공부하도록 놔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그 로펌에서 조지아대학에 매년 해오던 기부를 중단하겠다는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다행히 총장은 학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람이었고 나의 학문적 노력과 평화를 위한 열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내 신상에 큰 악영향은 없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평생을 일해왔지만, 미국에서도 남한에서도 늘 빨갱이 또는 친북 종북이라는 딱지가 붙어다녔던 내 삶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착잡하다.
미국은 무력을 통한 북한 붕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경제 제재와 정치적 고립을 이용한 북한 붕괴 전략으로 선회했다. 물론 이 전략도 북한을 붕괴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은 북한에 대한 악마화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했고 북한을 군사적 위협을 넘어서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악마로 규정했다. 미국의 잣대에서 보면 북한은 악마가 되기 위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미국과 다른 정치체제, 비민주주의 국가, 종교의 자유가 없는 인권 유린의 사회, 국민 탄압과 정치범 수용이 일상인 나라, 그리고 미국의 젊은이 오토 웜비어를 죽인 나라까지…. 북한, 중국, 이란, 이라크 등 미국이 악마화한 국가들을 보면 악마화는 다분히 인종적인 우월감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북한 악마화는 또한 미국의 현실적인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세가지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중국의 팽창과 관련이 있다. 중국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데 주한미군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미국은 북한을 악마화함으로써 주한미군 주둔의 명분을 강화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중국의 군사력 증대와 팽창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 배치 논란을 보면 이 점은 명백하다. 미국은 사드가 대북 억제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대중국 견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둘째는, 남한에 주둔하는 미군의 정당성 강화이다. 북한이라는 악으로부터 남한의 안위를 지켜준다는 명분은 미군의 존재를 신성하게 만들어놓았다. 셋째는, 경제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악마로 규정된 북한은 남한의 주적이 되기에 충분했고 미국이 남한에 무기 구매를 종용하고 강요하는 수단이 되었다. 매년 실행되는 한-미 연합훈련은 미국의 첨단무기를 선보이는 무기 박람회장으로 변질되었다.
무기 판매를 위해서 군산복합체는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군사적 갈등과 긴장을 부추기며 종종 의도적으로 악마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정보가 없으면 어디서 군사적 갈등을 조장할지 누구를 악마로 만들지 결정하는 게 쉽지 않다. 즉, 정보는 군산복합체의 활동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한다. 이런 이유에서 보면, 북한과 관련해 쏟아져 나오는 정보는 대부분 거짓이거나 아니면 조작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답잖은 사실을 침소봉대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있다. 군산복합체의 입맛에 맞는 가짜정보를 정보기관이 생성해내고 언론은 그것을 검증 없이 선전해대는 나팔수 노릇을 수행한다. 북한이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든다는 미국 언론의 보도를 보면 참으로 답답함을 느낀다. 내가 아는 한 북한은 미국을 공격할 생각도 없고 계획도 없다. 북한도 미국을 공격하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북한은 ‘한국전쟁 때 미군이 황해남도 신천 일대에서 양민 3만5천383명을 학살했다’며 신천박물관을 지어 반미교육을 하고 있다. 2009년 북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박물관을 방문한 모습이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은 북한 정권뿐만 아니라 선량한 주민들까지도 악마로 여겨왔다. 한국전쟁 때 황해도 신천 양민학살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신천에는 이들의 혼을 달래고 반미 성토장으로 활용되는 신천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나는 1990년대 북한을 자주 오갈 때면 여러차례 신천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악마로 둔갑해 희생당한 순박하고 무고한 사람들의 명복을 빌었다. 나는 추모관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북한은 이 박물관을 미국의 야수성과 잔인성을 선전하고 교육하는 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1950년 10월17일부터 52일 동안 어린아이, 부녀자, 노인을 포함하여 3만5383명의 선량한 사람들이 미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었다. 무고한 주민들을 악마로 보지 않았다면 과연 이런 학살이 가능했을까?
나는 매번 박물관 안내원의 해설과 설명을 한자도 빠짐없이 받아 적었다. 북한의 설명을 보면, 학살은 미제 침략군 장교인 육군 소장 해리슨 디 매든의 진두지휘하에 자행되었다. 박물관은 또한 해리슨의 사진과 함께 그의 신분을 확증하는 여러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나중에 미국으로 돌아와서 내게 북한 관련 자문을 하고 있던 <에이비시> 방송국에 의뢰하여 해리슨 디 매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했으나 미 국방부는 그런 사람의 군 복무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간단한 답변만을 보내왔다. 추측하건대 미국으로서는 해리슨 디 매든의 존재를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박물관은 1950년 학살 현장의 사진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그려진 걸개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걸개그림들이 하도 생생하고 끔찍하여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또한 희생당한 양민들이 사용하던 가재도구며 신발, 안경 등의 개인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한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희생자들의 유골과 머리카락을 그대로 전시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2015년 7월27일 정전협정일(전승일) 62돌을 맞아 신천박물관을 새로 지어 개관식을 했다. 사진 연합뉴스
나는 신천박물관을 방문할 때마다 독일 뮌헨에 위치한 다하우 강제 수용소 추모 사이트를 떠올리곤 했다. 유대인들을 학살한 나치의 만행과 신천 양민학살이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북에서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1950년 7월 충청도 노근리에서도 미군에 의한 끔찍한 양민학살의 만행이 자행되었다. 피난민 행렬에 북한군이 한두명 섞여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범죄였다. 우리 민족을 하찮고 열등한 존재로 보고 아무 죄도 없는 양민들을 악마로 보지 않았다면, 과연 이런 만행이 가능했을까?
북한 관련 가짜뉴스는 악의적으로 만들어진 시나리오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우리의 북한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북한을 수박 겉핥기만큼도 모른다. 북한의 행동과 정책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동력과 요인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 미국과 한국을 통틀어 과연 몇명이나 있겠는가?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북한에 부과된 무지막지한 경제 제재는 한가지 가설에서 비롯되었다. 북한 주민들이 경제 제재로 고통을 받아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상황이 되면 그 불만이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하여 아랍혁명 같은 바람이 불 것이라는 가설이다. 북한에서 그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믿고 있다면 그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민주주의 국가든 공산주의 국가든 체제를 유지하는 근본은 국가의 정통성이다. 정통성의 원천은 단 한가지, 즉 인민의 동의와 지지이다. 다시 말해 정치체제가 인민의 지지를 잃으면 정통성을 상실하게 되고 그 체제는 붕괴하는 것이다. 북한 체제는 인민들의 호주머니에 돈을 채워줌으로써 인민들의 경제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서 정통성을 찾는 체제가 아니다. ‘길을 찾아서’ 27회에서 언급했듯이 북한 체제의 정통성은 주체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북한의 통치 이념인 주체사상을 바로 보지 않고서는 북한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북한 인민의 삶을 옥죄는 경제 제재는 오히려 북한을 똘똘 뭉치게 만들고 단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북한을 더 민족주의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1968년 초 북한 원산 앞바다에서 나포된 미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는 ‘북-미 군사 대치’의 상징이다. 그해 말 미해군 승조원 82명은 사과문을 쓰고 석방됐다. 사진 연합뉴스
북한은 나포한 미해군의 푸에블로호 선체를 지금도 평양 보통강변에 전시해두고 ‘항미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는 수십차례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한 관리들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대미 승리의 상징이자 전리품으로 여겨지는 푸에블로호가 보통강에 전시되어 있다. 1968년 동해상에서 비밀 정찰 중 북한에 나포된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는 원산에서 대동강으로 옮겨져 전시되다가 김정은 집권 이후 지금의 전시 장소인 보통강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왔다.
북한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은 방문하는 장소이며 특히 학생들의 견학이 빈번한 곳이다. 나도 평양을 방문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찾는 곳이기도 하다. 내부에 들어서면 미군 승조원 82명을 조사했던 전 과정과 그들이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장면들이 비디오로 상영되고 있다. 내가 푸에블로호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북한 주민들 대부분은 푸에블로호를 미국과 싸워 이겨서 항복을 받아낸 영광의 상징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푸에블로호는 항미 교육의 장이자 북한의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역사적 장소이다. 특히 미국과 외교 설전이 오가는 때면 푸에블로호는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무력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북한이라는 악마를 제거하는 것이 미국의 도덕적 책무이며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을 이루는 신성한 미션이라는 환상은 미국의 북한 정책을 지배해온 지침이다. 또한 북한이라는 악마를 제거하는 것은 인류의 공공선을 추구하는 일이므로 다른 나라들도 미국에 협력하고 공조해야 한다는 논리도 더해졌다. 한국 또한 남북 관계를 북-미 관계에 맹목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미국의 대북한 악마화에 동조해온 것이 현실이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명한 ‘4·27 판문점 선언문’. 박한식 교수는 그동안 남북정상회담 때마다 나온 공동 선언문의 첫 문장에 한반도 평화의 해법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연합뉴스
악마화를 통한 북한 붕괴는 절대 가능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북한에 대한 악마화를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금의 한반도 상황을 변화시킬 돌파구는 없는 것인가? 해답은 지난 세차례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 선언문에 잘 나와 있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2007년 10·4 남북 정상회담 합의서, 그리고 2018년 4·27 판문점선언을 보면 세 선언문 모두 1조에 공통된 표현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민족 자주의 원칙’이다. 한국이 좀 더 유연한 자주성을 가지고 독자적인 주권국가로서 국익에 부합하는 정책을 만들고 추진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미국과 국제사회에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설명하고 남북 교류와 협력 그리고 통일이 미국의 국익에 해가 아니라 득이 될 것이라는 외교적 설득이 절실히 필요하다.
구술집필 권준택 미국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48637.html#csidx228eb292ca8d900943ee4e393e709f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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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 이산가족 상봉지구 만들어 ‘민족의 한’ 풀어주길”
“개성에 이산가족 상봉지구 만들어 ‘민족의 한’ 풀어주길”
등록 :2020-06-01 15:52수정 :2020-06-15 09:53
김경애 기자 사진
김경애 기자
[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한’ 가슴에 묻고 사는 유일한 민족
사람의 기본 권리 ‘사랑권’ 빼앗겨
구한말 만주·연해주 ‘자발적 유민’
일제·분단·전쟁으로 ‘강제 이산’
죽의 장막·철의 장막 ‘냉전’에 막혀
“영문도 모른 채 기약 없는 생이별”
1980년부터 해마다 방학때 중국으로
흑룡강성·장춘·연변 일대 동포들
이산가족 사연 취재·동영상 촬영
“눈물 쏟아져 제정신으로 찍지 못해”
고령 어르신 ‘부친 찾아달라’ 오기도
“돌아가셨다는 소식이라도 알고파서”
유복자 딸 키우며 남편 기다린 할머니
‘남쪽 남편 새가정’ 충격에 세상 뜨기도
“가족 만나는데 추첨 경쟁 웬말인가”
남북한은 1971년 8월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 실무요원 접촉을 했다. 남쪽 요원 이창렬(왼쪽 둘째)·윤여훈(왼쪽 넷째 모자), 북쪽 요원 서성철·염종련이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김천길 전 AP통신 기자
길을 찾아서 31회-이산가족의 한과 설움(2)
박한식 교수는 1980년부터 비수교국 ‘중공’을 방문할 기회를 활용해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던 이산가족 상봉을 주선하기 위해 애썼다. 흑룡강성 하얼빈을 비롯해 심양, 연변 일대를 돌며 직접 동영상으로 찍은 재중동포들의 사연을 1983년 9월25일 <한국방송>(KBS)의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 소개하기도 했다. 사진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이산가족의 아픔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우리 민족만큼 이산가족의 사무친 한을 가슴에 묻고 사는 민족이 이 지구상에 또 어디 있을까? 우리 민족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한이 많다 또는 한의 정서가 내재되어 있다고 흔히 말한다. 한의 정확한 의미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산가족의 애달픈 삶을 보면 한이 무엇인지 조금은 헤아릴 수 있다. 내가 55년을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영어에는 우리말의 ‘한’이라고 하는 정서를 표현하는 단어는 없는 것 같다.
조선 망국과 미소 냉전 그리고 분단으로 점철된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는 셀 수 없이 많은 가족을 이산의 고통으로 내몰았다. 물보다 진한 핏줄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한은 인간 존엄과 인권의 문제다. 인간이 단지 생물학적인 존재를 넘어서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사랑권’이라 말하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과 따뜻한 밥 한끼 하면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으며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는 사소한 권리와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긴 이산가족들의 한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1983년 9월25일 <한국방송>(KBS)의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 소개된 박한식 교수의 동영상. 사진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이산가족의 내력은 크게 두 가지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한다. 하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있었던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유민)이고 다른 하나는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강제 이산이다. 나라 잃은 설움에다 생존을 위해 많은 조선인들이 간도를 비롯한 지금의 중국 동북 3성과 러시아의 연해주 지방으로 이주했다. 먹고살기 위해 이주했던 농민들도 많았고 항일운동에 투신했던 독립투사들도 상당수였다. 또한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던 많은 조선인들도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할린에 버려졌던 우리 동포들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일제의 패망과 해방 소식은 국경 넘어 살던 조선인들에게는 기쁨과 환희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도 힘겨웠던 그들의 삶만큼이나 녹록지 않았다. 귀향을 결심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가족 전체가 한꺼번에 돌아오기보다는 주로 가장이 먼저 귀국해서 호구지책을 마련한 뒤에 가족들을 데려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에서 가족의 생계와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어영부영하는 사이 38선이 그어지고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죽의 장막’(중국)과 ‘철의 장막’(소련)이 드리워졌다. 조선 땅에 돌아와 있던 사람들도 국경 밖에 있던 가족들도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오랜 시간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는 이산가족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우리 집안도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친지들을 모두 중국에 남겨두고 나의 가족만 조선 땅으로 나왔다. 그렇게 오래 이산가족의 삶을 살게 될 걸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온 가족이 다 조선 땅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지난 ‘길을 찾아서’ 30회에서 얘기했듯이, 나는 1980년부터 거의 해마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중국 흑룡강성, 장춘, 그리고 연변 일대를 방문해 이산가족 동포들의 삶과 사연을 듣고 기록하고 촬영했다. 한여름에 그 무거운 ‘베타맥스’ 카메라를 메고 산 넘고 물 건너 오지까지 우리 동포들이 거주하는 전역을 누비면서 이산가족을 인터뷰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그분들 가슴에 사무쳐 있는 이산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고 싶었다. 한은 맺히기도 하지만 당연히 풀리기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산가족의 한은 그저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절대 풀어지지 않는다. 오직 서로 만날 때에만 풀어질 수 있다. 여담이지만 이산가족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는 내내 나는 한 번도 제정신으로 촬영해본 적이 없다. 동병상련의 처지를 느끼며 항상 눈물을 줄줄 흘렸기 때문이다.
1983년 9월25일 <한국방송>(KBS)의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 소개된 박한식 교수의 동영상. 사진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40년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이산가족의 사례를 두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첫번째는 하얼빈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홀로 거주하던 어르신의 이야기이다. 다른 가족들은 다 돌아가시고 남쪽에 흩어져 있는 가족을 찾고 싶다는 사연이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메고 찾아갔더니 연세가 아흔이 넘은 백발의 노인이 오두막집 지하실 같은 컴컴한 방에 거동도 잘 하지 못하는 상태로 누워 계셨다.
부축을 받아 일어나 벽에 기대어 앉은 어르신에게 나는 ‘누구를 찾습니까?’라고 여쭈었다. 영감님이 하시는 말씀이, “저의 아버지를 찾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냥 입에서 나오는 말로 “어르신께서 아버지를 찾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바로 들었으면 아버님께서 연로하셔서 지금 돌아가시고 생존해 계시지 않을 텐데…”라고 대꾸하였다. 그랬더니 이 어르신은 “생사에 관계없이 돌아가셨으면 무덤이라도 가서 보고 싶고 돌아가신 거라도 확인을 해야 내 맺힌 한을 풀 수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르신의 말씀에 큰 감동과 울림을 받았다. 나는 촬영한 영상을 사연과 함께 <한국방송>(KBS)에 보냈다. 그 뒤에 어르신이 아버님의 생사를 알게 됐는지 또는 만나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어르신이 아버님 무덤 앞에 술 한잔 부어드리고 절을 올리고 목 놓아 울면서 조금이나마 한을 풀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번째는 내가 이산가족을 위해 사진과 비디오를 촬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머물고 있던 고모님 댁으로 직접 찾아오신 할머니의 사연이다. 할머니는 40년 넘게 헤어진 남편을 찾고 있다고 했다. 마흔이 넘어선 딸과 사위가 같이 왔는데 딸이 태중에 있을 때 남한으로 떠났던 남편은 38선이 생기면서 서로의 생사를 궁금해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남편의 건강과 가족의 재회를 빌고 있었다. 할머니의 사연이 하도 기구하여 나는 더욱 정성껏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한국방송>에 제공하였다. 할머니의 사연이 방영된 뒤, 나는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캐나다에서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할머니가 그렇게 애타게 찾고 계시던 바로 그 남편이었다. 한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는 얘기와 함께 그동안의 사정을 들려주었다. 얘기인즉, 20대 시절 남한에 와서 분단과 냉전으로 오도 가도 못하고 흑룡강성에 두고 온 부인과 뱃속의 아이도 만날 기약도 없고 해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지내다가 뒤늦게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됐다는 것이었다. 두어 번의 전화 통화에서 남편은 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조언을 구했고 나는 “선생님께서 결정을 하십시오”라고 답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할머니의 주소와 연락처를 그에게 보내주었다.
그 이듬해 내가 다시 흑룡강성을 방문했을 때, 할머니와 딸 그리고 사위가 나를 만나러 찾아왔다. 남편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한 듯 보였다. 차마 할머니와 딸에게는 남편 소식을 직접 전하지 못하고 사위를 밖으로 따로 불러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사실대로 전해주었다. 사위는 어떻게 할지 고민해보겠다고 하였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다음해에 내가 다시 고모님 댁을 방문했을 때 딸과 사위가 나를 보러 왔는데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사위로부터 남편 소식을 전해 듣고 상심하여 두문불출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워 지내다가 돌아가셨던 것이었다. 평생 남편을 그리워하며 다시 상봉할 날만을 손꼽아 학수고대하다 한 맺힌 생을 마감한 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산가족의 삶에 관해 한 가지 더 보태고 싶은 것은, 헤어져서 사는 것도 한스럽고 슬픈데 남쪽에 정착한 이산가족들은 엄청난 정치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는 점이다. 공산권 국가에서 왔다는 이유로 또는 공산권 국가나 북한에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평생 이들에게 새겨져 있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남한에 정착한 내 아버지 역시 빨갱이라는 족쇄로 인해 늘 신원조회에 걸려 평생 변변한 직장 한 번 가지지 못한 채 살다가 돌아가셨다. 이 문제에 있어서 북한도 남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출신 성분을 특히 중시하는 북한에서 남한에서 왔다거나 남한에 가족이 살고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큰 걸림돌이다. 이렇듯 이산가족들은 남북한 모두에서 이산의 고통과 정치적 박해를 동시에 안고 살아왔다.
1990년 한-소 수교 그리고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로, 한국과 옛 공산권(1930년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을 포함하여)에 흩어져 살던 이산가족들의 상황은 많이 좋아졌다. 왕래도 비교적 자유로워졌고 예전과 달리 마음만 먹으면 그리운 가족들을 상봉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이 당면한 최대 과제는 남북한 사이의 이산가족이다. 지금 남북한 정부 모두에게 최우선시되어야 하는 지상과제는 분단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자의로 또는 타의로 헤어지고 뿔뿔이 흩어졌던 남북 이산가족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다.
이산가족의 인간적 아픔을 공감하고 해소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1년 남북 적십자 회담에서 남과 북 모두 “남북 이산가족들의 비극은 금세기 인류의 상징적 비극”이라는 데 공감하고 빠른 시일 안에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키자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 9월이 되어서야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이라는 이름으로 성사되었다. 한동안 뜸했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8월에야 재개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총 21차례의 이산가족 상봉과 7차례의 화상 상봉이 진행되었다.
내 눈에는 지금까지 진행됐던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정치적인 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남북한 위정자들이 이산가족에 대한 진정 어린 공감과 배려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작금의 이산가족 만남 제도는 이산가족의 한을 더 키우는 제도다. 나는 이산가족 상봉에 관해 3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 가지 정책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가장 최근에 있었던 2018년 8월 이산가족 상봉의 예를 보자. 약 5만7천명의 상봉 신청자 가운데 100명을 컴퓨터 추첨을 통해서 선정했다. 자그마치 570 대 1의 경쟁률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로또도 아니고 대학입시도 아니다. 70년 넘게 그리워해온 가족을 만나는데 경쟁률이 웬말인가. 언론 기사를 통해 접한 한 어르신의 이야기는 슬픔을 넘어 분노를 자아낸다. 95살의 할아버지는 “북에 형과 동생을 두고 왔다”며 “살아 있다면 93살이 됐을 여동생에게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 듣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할아버지는 추첨에서 탈락했고 “저는 이제 끝났어요”라는 말과 함께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남북한은 1972년 8월29일 평양에서 첫 적십자회담을 열었으나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 9월20일에야 성사됐다. 이날 광복 40돌 고향방문단 50명씩이 동시에 판문점을 통과해 서울과 평양을 교차방문했다. 사진은 서울 워커힐호텔의 모자 상봉 장면이다. 사진 국가기록원
둘째, 2000년 이후 가뭄에 콩 나듯 진행됐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모두 그 기간이 짧게는 3일, 길어야 5일이었다. 특정 장소에서 가족이 만나 그것도 남북 당국자들의 감시(?)하에 하루에 서너 시간 같이 보내는 게 고작이었다. 꿈같던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느껴졌을까? 고작 사나흘의 만남으로 70년 넘게 떨어져 살아온 이산의 아픔과 한이 달래질 수 있을까?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아니,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 없는 또 한 번의 생이별을 해야 하는 이산가족의 한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셋째, 이산가족의 상봉은 절대 정치적인 이슈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남북 간 또는 북-미 간에 정치적 현안이 있을 때마다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적이 심심찮게 있었다. 이산가족 문제는 인도주의적 사안이며 인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의 영역이다. 더욱이 일회성 정치적 행사로 이용되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이산가족 상봉은 구걸의 대상도 아니고 남북한 정부가 이산가족들에게 선심 쓰듯 적선하듯 베푸는 정책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6·15 첫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본격화해 지금까지 21차례 진행됐으나 여전히 남쪽에만 5만7천여명이 상봉 대기 중이다. 2018년 8월 상봉을 앞두고 570 대 1 경쟁률의 추첨에서 탈락한 95살 박성은 옹이 낙담한 모습이다. 사진 YTN 갈무리
보다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선택적, 일회성, 그리고 정치적으로 일관됐던 지금까지의 상봉 방식을 지양하고 언제나 아무 조건 없이 자유로이 이산가족들이 만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이산가족 1세대는 모두가 80살 이상의 고령이다. 나는 이산가족 정책은 통일 정책의 하나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성에 이산가족 상봉 지구를 설립할 것을 제안한다. 개성에 아파트 수백채를 지어 이산가족이 상시적으로 만나 생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일주일도 좋고 한달도 좋고 원한다면 거기서 이산가족이 평생 같이 살면서 한을 풀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 개성 이산가족 상봉 지구는 통일 문화를 조성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할 것이며 우리가 꿈꾸는 통일의 첩경이자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구술집필 권준택 미국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47366.html#csidxa6475037fe6e607a3dbd7fca32b2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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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월 미-중 국교 정상화 ‘낭보’
중국 최고 실권자 ‘덩’ 애틀랜타에도
“미국 배우러 왔다” 연설에 ‘거인’ 풍모
카터에게 부탁해 환영회 초청장 얻어
통역 지차오주에게 ‘가족 사연’ 전달
‘덩’ “중국 사는 친인척 명단 적어달라”
2주 뒤쯤 “모두 찾았으니 만나러 오라”
1980년 여름 35년만에 하얼빈 ‘환향’
군악대·펼침막·친인척들 ‘대환영’
‘38선 첫 획정’ 딘 러스크 적극 지원
‘이산가족협회’ 꾸려 해마다 중국에
동포들 가족 사연 동영상으로 찍어와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으로
길을 찾아서-30회 이산가족의 한과 설움 (I)
박한식 교수는 1979년 1월 미-중 국교정상화에 이은 덩샤오핑 부주석의 미국 첫 방문 덕분에 부친의 유언대로 흑룡강성 친인척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맨 오른쪽)이 1979년 1월29일 백악관에서 열린 환영연회에서 카터 대통령(맨 왼쪽), ‘핑퐁외교’로 중국을 맨 처음 방문했던 닉슨 전 대통령(왼쪽 둘째)과 지차오주(오른쪽 둘째)의 통역으로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 위키미디어나는 이산가족이다. 우리 집안이 이산가족의 삶을 살게 된 배경을 되짚어 보면 19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해 조선 망국의 설움을 안고 북만주의 흑룡강성(헤이룽장성)으로 이민을 갔다. 흑룡강성에 정착한 이민자의 약 90%가 경상도 사람이었다. 압록강 주변에는 평안도 사람이 먼저 정착하고, 두만강과 연변 주변은 함경도 사람이 먼저 차지했다. 따라서 경상도 사람은 더욱 북쪽으로 올라가 흑룡강성에 정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흑룡강성에서 1912년에 태어났고, 나 역시 그곳에서 1939년 태어났다.
만주에 이민을 간 조선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쌀농사를 지었다. 전통적인 방식의 논농사를 했다. 만주에서는 논을 ‘수전’(水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시절 중국 사람들은 수전에서 거둔 쌀을 먹지 않았다. 그래서 만주에는 조선 사람들이 수전에서 거둔 쌀이 대단히 풍부했다. 조선 사람들은 대부분 그 쌀을 고향으로 보냈다.
흑룡강성에 정착한 할아버지는 논농사를 지으면서 정미소를 개업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 정미소를 물려받았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항상 쌀이 비축되어 있었다. 1945년 해방 직후 어느 날 장제스(장개석)의 국민군이 우리 정미소를 습격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국공내전의 와중에서 쌀이 비축된 정미소가 약탈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우리 가족은 급히 야반도주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물론 수많은 친인척을 흑룡강성에 남겨두고서 탈출했다. 이산가족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알다시피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냉전이 시작되자 중국은 ‘죽의 장막’에 가려졌다. 이제 흑룡강성에서 헤어진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을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서울대에 입학한 1959년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의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1975년 조지아대학에서 강의에 열중하고 있던 어느 날 한국에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나는 급히 귀국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상에 누운 아버지는 내 손을 잡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병상 옆에 앉아서 아버지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 마음이 편해졌는지 아버지의 병세가 일시 호전되기도 했다. 대화가 한참 무르익던 어느 순간 아버지는 내 눈을 바라보면서 두 가지 당부의 말씀을 해주었다. “귀국하지 마라. 미국에 남아서 통일운동에 전념하라. 한국에서는 통일운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 “흑룡강성에서 헤어진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친인척분들을 꼭 찾아라.” 나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내 인생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실존적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약속을 지킬 길은 막막했다. 장막에 가려진 중국의 그 넓고도 넓은 땅 어디에서 30년 전에 헤어진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그랬던가? 1976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앞으로 미국인은 세계 어느 곳이나 갈 수 있다!”고 천명했다. 그동안 미국인이 갈 수 없었던 쿠바, 베트남, 북한, 알바니아를 방문해도 좋다고 발표한 것이다. 또한 카터는 1979년 1월 중국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미국인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길까지 열었다.
1979년 1월29일 중국 지도자로는 처음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앞줄 맨오른쪽) 부주석이 백악관에 도착해 지미 카터(앞줄 맨왼쪽)의 안내를 받으며 미 의장대의 환영 사열을 받고 있다. 박한식 교수에게 미중 수교와 덩샤오핑의 방미는 천우신조의 기회가 됐다. 사진 지미카터도서관 제공나 역시 미국 시민권자였기에 가슴이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워싱턴에 있는 중국대사관을 찾아가서 부대사 지차오주에게 흑룡강성의 조부모와 친척들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업무 분야가 외교 쪽이라서 중국 국내 문제는 잘 모른다고 답변했다. 그래도 한번 알아는 보겠다고 그랬다. 나는 그의 말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지차오주로부터 연락이 오질 않았다.
실망의 나날을 보내던 나에게 또다시 천금 같은 낭보가 들려왔다. 덩샤오핑이 1979년 1월28일부터 2월6일까지 미국을 방문해서 카터 대통령과 회담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더욱이 조지아주 출신인 카터는 덩샤오핑이 조지아주의 주도인 애틀랜타를 방문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까지 했다. 애틀랜타는 내가 재직 중이던 조지아대학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어떻게든 이 기회를 잡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먼저 카터 쪽에 사정사정 부탁을 해서 덩샤오핑의 애틀랜타 방문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초청장을 얻어 냈다.
박한식 교수는 1979년 2월1일 덩샤오핑이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들렀을 때 카터 대통령의 도움으로 환영회에 참석해 덩샤오핑에게 직접 흑룡강성 친인척의 명단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때 애틀랜타를 방문한 덩샤오핑이 중국계미국인협회(NACA) 회원들과 찍은 단체 기념사진 모습이다. 사진 NACA 누리집 갈무리나는 지금도 덩샤오핑을 처음 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카터의 소개를 받은 덩이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덩샤오핑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왔습니다. 중국은 너무 가난합니다.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경제, 과학, 기술 등을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을 방문한 목적도 미국에서 많이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 많이 도와주십시오. ….” 나는 놀랐다! 그의 발언을 듣는 순간 그처럼 작은 체구의 덩샤오핑이 갑자기 거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덩샤오핑의 그 연설은 오늘의 중국 경제발전을 잉태하고 있었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밖으로의 대약진 운동’(Great Leap Outward)을 구호로 개혁과 개방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중국 22개 성과 5개 자치구 등의 경제적 자율권을 대폭 허용하는 지방분권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중국 경제발전의 탄탄한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1979년 1월 워싱턴을 방문한 덩샤오핑(맨왼쪽) 중국 부주석과 카터(맨오른쪽) 미 대통령이 통역관인 지차오주를 사이에 두고 이동을 하고 있다. 앞서 주미 중국 부대사를 지낸 외교관인 지차오주는 지난 4월29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 사진 지미카터도서관 제공덩샤오핑 연설이 끝나자마자 나는 그의 통역을 담당했던 지차오주에게 다가갔다. 나를 본 지차오주는 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친인척을 좀 찾아봐달라는 예전의 내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차오주에게 내 사정을 덩샤오핑에게 좀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옆에서 우리의 대화 소리를 들은 덩샤오핑이 고개를 돌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지차오주가 곧바로 내 얘기를 덩샤오핑에게 전했다. 덩샤오핑은 나에게 친인척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흑룡강성에 있을 거라고 답하자 그들의 이름을 아느냐고 재차 물었다. 나는 테이블의 냅킨에다 내가 평소 기억해 두었던 친인척 7명의 이름을 한자로 썼다. 사실 찾고 싶은 우리 친인척은 30여명에 이르렀지만 시간 탓에 다 적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덩샤오핑은 내가 한자를 아주 잘 쓴다면서 깜짝 반가워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덩샤오핑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단히 정중하게 내 손을 잡아주었다.
덩샤오핑을 만나고 2주쯤 뒤에 지차오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의 친인척을 모두 찾았으니 가서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가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의 배려로 1979년부터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박한식(왼쪽) 교수는 1980년 여름 하얼빈을 방문해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35년 만에 금의환향했다. 사진은 1981년 7월 방문 때 고모(오른쪽)와 고향마을 인근 송화강변에서 함께한 모습이다. 박한식 교수 제공1980년 여름방학 때 나는 큰 가방 두 개를 메고서 베이징행 비행기에 올랐다. 베이징에 도착하자 덩샤오핑의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나와 나를 환영해주고 또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주기까지 했다. 나는 기차를 타고 약 20시간을 달려서 흑룡강성의 성도인 하얼빈의 기차역에 도착했다. 군인 둘이 기차에 올라와 내 짐가방 두 개를 들어주었다. 기차에서 내리자 군악대가 팡파르를 우렁차게 울리면서 환영해 주었다. 바로 그 옆에서 약 30명의 우리 친인척이 손을 흔들며 열렬히 반기고 있었다. 친인척들 뒤에는 ‘박한식 교수 고향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펼침막까지 내걸려 있었다. ‘금의환향’이란 이런 순간을 두고서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정말 꿈만 같았다.
나는 마중 나온 고모님의 댁을 숙소로 정했다. 그래서 막 이동을 하려고 하자 중국 관리가 다가왔다. 그냥 가지 말고 하얼빈의 국제호텔에서 쉬었다 가라는 것이었다. 며칠간 묵어도 좋다고 그랬다. 지차오주도 국제전화로 친인척들을 잘 찾았느냐고 확인했다. 나는 그들의 배려를 쉽게 물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호텔에서 하룻밤 만 묵기로 했다. 친인척 30여명도 함께 호텔로 향했다. 그들 모두가 호텔방에 들어서자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중국에서 가난한 삶을 살던 그들에게 호텔방은 처음 보는 구경거리였다.
이튿날 우리는 곧바로 고모님 댁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나는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텔에서 고모님 댁으로 가는 장거리 도로가 최근에 깔끔하게 정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덩샤오핑이 다시 떠올랐다. 이 모든 일이 그의 배려로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덩샤오핑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흑룡강성에 살고 있던 친인척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마침내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나는 친인척들과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면서 한 많은 사연을 수없이 들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사셨다는 사실도 알았다. 할머니는 1976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1959년부터 두 분의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으니 무려 17년 동안이나 살아 계신 할머니의 제사를 지낸 셈이었다.
1979년부터 미 시민권자로 ‘공산주의 국가’ 중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던 박한식 교수는 1981년 8·15 특집으로 <동아일보>에 ‘죽의 장막에 가린 재만 200만 동포의 생활상’을 기고하기도 했다.나는 이산가족의 한은 오직 직접 만나야만 풀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그런데 흑룡강성에 거주하는 조선족을 만나보니 거의 모두가 나와 같은 이산가족이었다. 그들은 모두 피맺힌 한과 처참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동료 교수로 친하게 지내던 딘 러스크를 찾아갔다. 그는 존 에프(F) 케네디 행정부와 린든 존슨 행정부에서 무려 9년 동안 국무장관을 지낸 뒤 조지아대학 법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1945년 8월 미국 전쟁부 작전국 산하 전략정책단 실무자로서 한반도의 38선을 맨 처음 획정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그때 한반도 분단선을 원산을 기준으로 정했더라도 김일성이 수용했을 거라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자신이 획정한 38선이 이처럼 오래 지속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도 말했다.
1970년부터 조지아대학 법학과 교수로 있던 딘 러스크(가운데)는 동료 박한식(맨왼쪽) 교수가 1980년 중국을 다녀와 동포들의 이산가족 찾기운동에 나설 수 있도록 ‘이산가족협회’(UFI) 결성을 도와주었다. 그는 1945년 8월 정보장교 시절 ‘한반도 38선’을 가장 먼저 제안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러스크는 나로부터 이산가족의 현실을 전해 들으면서 말할 수 없는 자책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한반도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산가족협회 같은 것을 만들면 좋겠다고 답변했다. 내가 만들고 싶은데 조교수의 박봉으로는 쉽지 않다고도 덧붙였다. 그러자 러스크는 곧장 발 벗고 나서서 미국 연방정부로부터 면세 혜택을 받는 비정부기구(NGO)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산가족협회’(UFI: Uniting Families Inc.)라는 이름도 손수 지어주었다. 미국에서 면세 혜택을 받는 단체를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러스크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도와주었다.
박한식 교수는 1980년부터 거의 해마다 중국 흑룡강성 일대를 방문해 이산가족 동포들의 사연을 기록하고 촬영했다. 사진은 1989년 박 교수가 <한국방송>의 대담 프로그램 ‘11시에 만납시다’에 출연했을 때 소개된 장면으로 1987년 9월 중국 방문 때 찍어온 영상이다. 사진 <한국방송> 누리집 갈무리
나는 그 뒤 방학 때마다 유에프아이의 도움을 받아 흑룡강성을 방문할 수 있었다. 내가 가면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일일이 인터뷰를 했다. 찾고자 하는 가족의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고향이 어디입니까? 어떻게 헤어졌습니까? … 그들은 찾는 사람의 성함, 고향 주소 등을 기록한 큰 종이를 보여주면서 인터뷰에 응했다. 인터뷰 장면은 모두 비디오카메라(VTR)로 녹화했다.
고령이어서 직접 나를 찾아오기 힘든 어르신들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어디든 찾아갔다. 흑룡강성 전역을 누볐을 것이다. 키가 작은 내가 무거운 장비를 메고서 비포장도로를 멀리 걸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떤 때는 ‘똥구루마’(분뇨수거 수레) 뒤에 타고 똥냄새를 맡으면서 시골길을 이동하기도 했다.
어느 날 인터뷰를 하다가 내 눈에 쏙 들어오는 똑똑한 청년을 발견했다. 나는 내 작업의 어려움을 얘기하면서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두말 않고 도와주겠다고 그랬다. 나는 그와 함께 먼 길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동포들을 만났다. 나중에 들으니 그 청년은 일본으로 유학을 해서 교수가 되었다고 했다.
박한식 교수가 직접 찍어온 중국 동포들의 영상은 1983년 9월 <한국방송>의 ‘연속특별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통해 방영됐다. 사진 <한국방송> 누리집 갈무리
1983년 9월 <한국방송>의 ‘연속특별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서 박한식 교수가 찍어온 중국 하르빈·심양 지역의 이산가족을 소개하는 화면이다. 한국과 수교 이전이어서 ‘중공’으로 표기했다. 사진 <한국방송> 누리집 갈무리
1983년 9월 <한국방송>의 ‘연속특별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서 박한식 교수가 찍어온 하얼빈 동포의 이산가족 이야기가 방영되고 있다. 사진 <한국방송> 누리집 갈무리나는 그때 비디오로 녹화한 영상을 <한국방송>(KBS)에 보냈다. 한국방송에서는 내가 보낸 영상을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 <중공서 만납시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등에서 방영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약 200여명의 이산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1989년 6월19일에는 김동건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는 <11시에 만납시다>에 출연해서 중국 이산가족의 아픈 사연을 전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방송 이기홍 사장은 나의 이산가족 찾기 노력을 평가해서 감사패를 주기도 했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44524.html#csidx157cc5a23c55732b3cfc49f6e6e0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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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부럼 없다는 북한 사람들 ‘행복지수’ 잣대부터 다르다”
“세상 부럼 없다는 북한 사람들 ‘행복지수’ 잣대부터 다르다”
등록 :2020-04-27 20:57수정 :2020-06-02 16:53
[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사과-오렌지처럼 단순비교 땐 오류’
2012년 국내총생산 남한의 30분의 1
‘삶의 질 지수’ 따지면 평가 달라져
대내경제-대외경제 다른 방식 운영
내부는 ‘사회주의 분배의 정의’ 초점
‘필요’ ‘사회적 공헌도’ 맞춰 생활비
대외론 자본주의 질서 따라 자원 수출
2000년대초 서해·동해 ‘원유’ 확인
미 부통령 체니도 변호사 통해 연락
“북한 원유개발사업 참여 주선해달라”
2013년 개성공단 일시중단 때 관여
남북간 협의 주선하며 ‘특이점’ 실감
중국 경제특구 부작용 반면교사 삼아
“사업주 아닌 공단에서 ‘임금’ 배급”
박한식 교수는 ‘지상락원’ 같은 북한 사회의 구호가 처음엔 당혹스럽게 느껴지지만 실제 사람들의 생활현장을 들여다보면 그들만의 ‘삶의 질 지수’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2018년 2월 평양 시민들이 ‘세상에 부럼 없어라’ 구호를 내걸고 설맞이 놀이를 하고 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길을 찾아서-29회 북한식 사회주의 생활경제
영어에 ‘사과와 오렌지’라는 숙어가 있다. 사과와 오렌지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일대일로 비교하지 말라는 뜻이다. 예컨대 “데이 아 애플스 앤 오렌지스”(They are apples and oranges)라고 말하면 “그들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는 뜻이다.
나는 북한 경제를 말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때면 늘 ‘사과와 오렌지’ 숙어를 떠올리곤 한다. 예컨대 그들은 남한의 경제를 크고 싱싱한 사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 사과를 기준으로 북한 경제를 비교하고 평가한다. 그러면 북한 경제는 언제나 작고 벌레먹은 사과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상식에 자리잡은 북한 경제의 모습은 대체로 그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한 사회주의 경제를 운영하는 나라다. 따라서 북한 밖의 나라에서 운영하는 경제와 북한에서 운영하는 경제를 일대일로 비교하게 되면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내가 처음 북한을 방문했을 때 당혹감을 느낀 적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세상에 부럼 없어라” “내 나라 제일로 좋아” “인민의 지상락원” 등과 같은 구호를 반복적으로 들을 때였다. 내가 북한을 한창 방문하던 때인 2012년 현재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은 남한의 30분의 1 수준에 머물렀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저런 구호를 역설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의문은 북한을 차츰 이해하면서 점차 해소되었다. 북한에서 추구하는 행복의 기준은 우리가 이해하는 기준과 전혀 달랐다. 북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상은 이밥(쌀밥) 먹고, 기와집에서 살며, 자식 교육을 잘 시키면 행복하다고 그랬습니다. 현재 우리는 그런 목표를 다 이루었습니다.” 이런 기준을 놓고서 북한에서 표방하는 구호를 다시 살펴보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2016년 기준 한국은행 자료로 비교한 남북한 경제력 비교 그래프. 북한은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IMF)에 보고하는 자료가 없어 추정치일 뿐이다. 박한식 교수는 전혀 다른 경제체제를 수치만으로 단순 비교하면 오류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한겨레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북한 경제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다. 국내총생산처럼 양적인 평가 기준이 있는가 하면, ‘삶의 질 지수’(PQLI)처럼 질적인 평가 기준도 있다. 국내총생산을 따져보면 북한 경제는 낮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대수명, 경제적 분배의 평등, 교육환경 등 삶의 질 지수를 기준으로 분석해보면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온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기대수명이 비교적 높은 나라였다. 경제적 분배는 상층과 하층의 소득 차이가 2배 이상 나지 않을 정도로 평등하게 실행된다. 교육은 12년간 무상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북한에는 문맹자가 없다. 학교에서 폭력이나 ‘왕따’ 같은 것도 없다. 또한 북한은 집단으로 운영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자살률이 제로에 가깝다.
언젠가 북한 고위층 인사가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그런 나라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홀로 존재합니다. 마치 독도와 같은 나라라고 할까요?” 북한을 방문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북한을 이해하는 수준이 점차 깊어지면서 나는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북한이 지구상에서 대단히 독특한 나라라고 할 때, 세상에서 널리 유통되는 경제학 이론을 잣대로 북한 경제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는 직접 경제 현장을 관찰하고, 그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그런 경험을 내가 사전에 준비한 사회과학적 개념에 비추어 정리하면서 북한 경제를 이해하고자 했다. 한번은 어느 경제학 박사교수의 집을 방문해서 북한 경제에 관한 이론적 토론을 하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박사학위가 없더라도 학문적 능력과 업적이 최고 수준에 이른 학자를 박사교수로 임명한다.
북한 경제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북한의 대내경제와 대외경제가 질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이다. 대내경제는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분배의 정의에 초점을 맞춰 운영된다. 자유 대신 평등을, 소비경제 대신 생활경제를, 사유재산 대신 공유재산 등을 중심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1998년 1월 재일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지도로 표시한 북한의 원유탐사 지역. 사진 연합뉴스
반면 대외경제는 세계의 자본주의 질서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예컨대 북한은 풍부한 지하자원을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수출한다. 북한의 아연(징크), 마그네슘, 우라늄 등은 국제시장에서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북한에서 풍부하게 보유한 석탄도 중요한 수출 품목이다. 또한 북한은 서해와 동해에 매장된 풍부한 원유를 개발해서 경제를 발전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다. 북한은 현재 원유를 한방울도 생산하지 않고 있지만, 정부 부서에 ‘원유(공업)부’를 두고 있다. 북한은 이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5개국의 석유회사를 통해 서해와 동해 8곳을 시추해서 원유 샘플을 검사한 적이 있다. 검사 결과 서해에는 품질이 보통 수준인 원유가 매장되어 있고, 동해에는 품질이 대단히 좋은 원유가 대량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 결과가 세상에 발표되자 아들 부시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으로 재직하던 딕 체니가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서 나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주지하듯 딕 체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석유채굴기업 중 하나인 핼리버튼에서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최고경영자를 지낸 인물이다. 그 변호사는 나에게 북한의 원유 개발 사업에 참여하고 싶은데 방법에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 기업을 환영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북한의 뜻을 그대로 전달했다. 이처럼 북한은 풍부한 경제적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현재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 유엔이 가혹한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미국 부통령 딕 체니는 자신이 대표이사로 일했던 에너지·군수업체 핼리버튼을 통해 박한식 교수에게 북한 유전 개발사업 진출 주선을 요청했다. 체니는 재임시절 이라크전쟁으로 핼리버튼이 막대한 수익을 얻은 사실이 드러나 정경유착 의혹으로 조사받기도 했다. 올햇노캐틀닷컴
북한에서는 개인의 노동의 대가에 따라 지급되는 월급 개념이 없는 대신 ‘생활비’가 존재한다. 생활비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분배되는데, 하나는 인민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필요’에 따른 분배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공헌도’에 따른 분배이다. 생활비는 필요에 따른 분배를 하다 보니 집집마다 큰 차이가 없다. 또한 대학교수의 생활비보다 유치원 교사의 생활비가 더 많을 수도 있다. 대학교수보다 유치원 교사의 사회적 공헌도가 더욱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미국과 준전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군인의 사회적 공헌도를 높게 평가한다. 따라서 군인은 경제적으로 우대한다. 특히 군 복무 중 부상당한 사람은 사회적 영웅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그 사람의 후대까지 우대한다. 또한 젊은 여성들이 군에서 부상당한 남성과 결혼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정도이다.
2013년 4월3일 김관진(오른쪽 둘째) 국방부 장관이 새누리당사에서 열린 북핵안보전략특위 회의에서 ‘비상사태 대비 인질 구출 작전’을 언급했고 북한이 이에 반발하면서 ‘개성공단 중단 사태’가 벌어졌다. 연합뉴스
2013년 8월14일 개성공단 내 종합지원센터에서 남북 7차 실무회담이 열려 김기웅(왼쪽) 남쪽 수석대표와 박철수(오른쪽) 북쪽 단장이 재발방지 및 신변안전 보장, 개성공단 공동위원회 설치, 국제화 방안 등 5개항에 서명한 재가동 합의서를 교환하고 있다. 개성/사진공동취재단
나는 개성공단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북한은 2013년 5월부터 9월까지 개성공단을 폐쇄한 적이 있다. 당시 국방부 장관으로 있던 김관진의 ‘과격 발언’ 때문이었다. 나는 리종혁, 원동연 등 북한의 고위 정책결정자를 여러 차례 만나서 개성공단을 재개할 수 있는 방안을 다각도로 논의했다. 다행히 논의는 결실을 거두어 북한은 개성공단 재개를 결정했다.
나는 개성공단 재개를 위해 남북의 책임자들과 만나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남한과 북한의 경제질서가 많이 다르다는 사실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예컨대 한국 사람들은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의 임금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 한국의 경제질서를 생각하면 그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개성공단에 진출한 한국의 기업주는 자신의 기업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에게 개별적으로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한국의 기업주는 임금 총액을 북한의 정부에서 파견한 개성공단 책임자에게 지급한다. 그러면 그 책임자가 자체 기준에 따라 북한 노동자에게 분배한다.
박한식 교수는 2013년 4월 ‘개성공단 중단 사태’ 때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리종혁·원동연 등 북한의 대남사업 책임자들과 만나 재가동 협상을 주선했다. 사진은 2004년 6·15공동선언 4돌 기념 국제토론회 때 리종혁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오른쪽)이 원동연(가운데) 통일전선부 부부장 등과 함께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SK텔레콤 홍보관을 방문해 화상전화를 시연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공동취재단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는 자신을 고용한 한국 기업주가 아니라 북한 정부의 지시를 따른다. 그들은 북한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산성은 대단히 높고 상품의 품질도 아주 좋다. 그래서 한국 기업주는 대부분 크게 만족해했다.
개성공단의 독특한 임금지급 방식의 중요한 의미는 중국의 경제특구를 참조하면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경제특구에서 일하는 현지 노동자는 입주한 외국 기업주한테서 직접 임금을 받는다. 그들은 경제특구 밖에서 일하는 노동자보다 훨씬 많은 임금을 받는다. 그러자 경제특구 안과 밖에서 커다란 임금격차가 발생하게 되었다. 경제특구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빈부격차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경제특구의 노동자들은 중국 정부보다 직접 임금을 주는 외국 기업주에게 더욱 충성하게 되었다. 이는 중국 정부에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은 그런 중국의 경제특구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개성공단의 임금지급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그래서 북한 사회에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의 충성심이 북한 정부에서 남한 기업주로 이전하는 것 또한 방지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는 직장도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배정해준다. 따라서 개인이 회사에 입사지원서를 제출하고, 면접 보고, 채용하는 일련의 절차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에서 최고 명문대로 꼽히는 김일성대학 졸업생도 국가에서 직장을 배정해준다. 따라서 취업률이 100%에 이른다. 나는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서 일하는 한 청년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니 좀 서운하지 않은가? 그러자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국가에서 지금까지 자신을 먹여주고, 키워주고, 교육까지 시켜주었으니 자신이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일하는 것이 영광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의 답변을 들으면서 ‘하나는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하나를 위한다’는 주체사상의 원칙이 개인의 직장 선택에서도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돈 없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곳일지도 모른다. 북한에는 사유재산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동산은 사유재산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부동산 투기 같은 것도 있을 수 없다. 또한 은행에 저축해서 이자 수익으로 사유재산을 축적하는 일도 없다. 그 대신 생활비를 벌면 생활하는 데 대부분 사용한다.
북한의 군대는 독립채산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다. 북한 군대의 가장 큰 외화벌이 수단은 무기 수출이다. 무기는 현금을 받고 판다. 북한의 단거리 유도탄, 총, 탱크 등은 국제무기시장에서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란은 이란-이라크 전쟁 때 사용했던 스커드 미사일의 40%를 북한으로부터 수입했다.
국제사회에는 북한에 식량지원을 하면 군대에서 모두 갈취해 간다고 의심하는 이들이 많다. 인공위성으로 모니터링을 해보면 북한 군대의 트럭이 국제사회에서 지원한 식량을 싣고서 어디론가 이동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대형화물은 주로 군용 트럭으로 운반한다. 개인 소유 자동차가 없는 북한에서 군용 트럭은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운반수단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군대에서 인민의 식량을 갈취한다면 ‘선군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된다. 북한은 핵개발 이후 군사력에서 여유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런 여력을 인민에게 봉사하는 것이 선군사상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북한에서 장마당이 늘고 있지만 개인이 아니라 소속 집단에서 이익을 공유하므로 사유재산제 도입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사진은 평양 시내의 한 장마당으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구호가 눈에 띈다. 연합뉴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장마당이 활성화되는 것을 보고서 북한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로 이행한다고 판단한다. 주지하듯 자본주의는 개인의 소유권에 기초해서 운영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단위’(work unit)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마당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도 모두 단위에 소속된 존재다. 더욱이 장마당에서 판매하는 품목은 주로 생필품이며 사치품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장마당을 사례로 북한 경제의 자본주의화를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자본주의 시각을 북한에 강제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42263.html#csidx01c77f8474b796aa550c2262f1585c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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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마오쩌둥사상 ‘뿌리’ 같아 유사하지만 ‘표절’ 아니다”
“주체사상-마오쩌둥사상 ‘뿌리’ 같아 유사하지만 ‘표절’ 아니다”
등록 :2020-04-13
미국 학계 ‘표절 주장’ 논문들 유통
“마오 존경하지만 수용 불가한 주장”
김일성-마오 실존적 삶의 조건 ‘비슷’
“모두 외세와 싸우며 독립국가 건설”
‘마오’ 리다자오의 마르크스이론 계승
‘중국 현실 맞게 농민 주도 인민혁명’
‘대내외 모순 극복 위해 2단계 혁명론’
매국노 ‘척결’-토지개혁 등 인민 ‘우대’
‘김일성’ 외세·빈부격차 이중의 과제
‘주체교육으로 혁명주체 인민 양성’
‘평등 분배 사회주의 대안으로 채택’
항일 유격대 활동 ‘건국의 정신’ 공통
길을 찾아서-28회 북한과 중국의 특수관계
박한식 교수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학계에서 주장하는 ‘주체사상의 마오쩌둥사상 표절론’에 대해 유사성과 차이점을 들어 비판한다. 무엇보다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모두 외세에 맞선 유격투쟁을 통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한 까닭에 ‘혁명 동지’라는 특수한 관계를 유지했다. 김일성(왼쪽)과 마오쩌둥(오른쪽)이 1954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5돌에 베이징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을 나란히 참관하고 있다. 사진 경화시보 제공
“주체사상은 마오쩌둥사상을 표절한 것이다.” 미국에서 유통되는 주체사상 연구 문헌을 검토하다 보면 종종 보이는 ‘주장’이다. 심지어 저 주장을 주제로 쓴 박사학위 논문도 있다. 나는 그때마다 당혹감을 느끼면서 깊은 상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마오쩌둥(모택동)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평가한다. 마오쩌둥은 굶주림에서 허덕이는 약 6천만명의 중국 인민을 먹여 살렸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큰 문제가 세가지 있다. 첫째 문제는 인민을 먹여 살리는 것이고, 둘째 문제도 인민을 먹여 살리는 것이며, 셋째 문제도 인민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또한 마오쩌둥은 아편에 중독된 약 2천만명의 중국 인민을 치유했다.
내가 볼 때 마오쩌둥은 네개의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혁명 지도자의 모자, 정치가의 모자, 학자의 모자, 유격대장의 모자가 각각 그것이다. 마오쩌둥은 그처럼 다양한 모자를 쓰고서 중국 인민의 물질적 조건과 정신적 자유를 보장하는 독립국가를 건설했다. 그래서 조지아대의 내 연구실에는 항시 마오쩌둥 사진이 걸려 있었다. 또한 대학원에서 수년 동안 마오쩌둥사상을 연구하는 세미나를 개설해서 운영했다.
나로서는 강단에서 내내 연구한 마오쩌둥사상과 직접 북한을 오가며 확인한 주체사상을 비교할 때, 후자가 전자를 표절했다는 주장은 결코 수용할 수 없다. 물론 나 역시 두 사상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유사성은 대부분 마오쩌둥과 김일성 각자의 실존적 삶의 조건이 상당 부분 유사한 데서 파생된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외세와 싸우면서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삶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의 정치사회적 현실은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따라서 주체사상이 마오쩌둥사상을 표절했다면 중국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북한의 정치사회적 현실에서 성공적으로 실행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오쩌둥사상은 중국의 정치사회적 현실에서 검증된 사상이고, 주체사상은 북한의 정치사회적 현실에서 검증된 사상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주체사상을 체제이념으로 선택한 북한이 70년 넘게 생존했다는 사실은 주체사상이 북한 특유의 정치사회적 현실에서 성공적으로 검증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 주역인 리다자오의 탄생 100돌 기념 우표. 마오쩌둥은 리다자오(왼쪽)의 마르크시즘을 바탕으로 ‘인민혁명’을 전개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주지하듯 마오쩌둥은 마르크스 혁명 이론을 중국 현실에 맞게 수정한 리다자오(이대소)의 사상을 계승해서 인민혁명을 전개했다. 마르크스는 산업사회에서 파생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계급투쟁에 기초를 둔 혁명이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리다자오가 볼 때 마르크스 혁명 이론은 중국의 현실에 액면 그대로 적용할 수 없었다. 아직 농촌사회에 머물러 있는 중국에서는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분화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다자오가 볼 때 중국의 현실에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받는 중국의 농민이 마르크스가 주목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리다자오는 중국의 농민이 주역이 되는 인민혁명의 노선을 역설했다. 그리고 그 노선은 마오쩌둥을 통해서 실현되면서 현대 중국을 탄생시켰다. 1982년 베이징대 졸업생들이 성금을 모아 교정에 리다자오의 동상을 세운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마오쩌둥은 1918~20년 베이징대 문과대 교수였던 리자다오의 첫 조교로 인연을 맺었다. 지난 2017년 베이징대를 방문해 리다자오의 동상을 찾아본 집필자 이현휘 박사.
김일성 역시 리다자오나 마오쩌둥처럼 현실과 유리된 사상의 위험성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그런 사고방식은 주체사상 전체를 일관하는 정신으로 구현되었다. 예컨대 김정일의 노작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는 이렇게 강조한다. “혁명과 건설에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다 들어맞는 처방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문제를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마오쩌둥과 김일성, 각자가 처한 삶의 조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사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본 다음, 마오쩌둥사상과 주체사상 간의 차이점을 고찰해보기로 한다. 1893년에 태어난 마오쩌둥은 1840년 아편전쟁 이래 시작된 이른바 ‘백년국치’(Century of Humiliation)의 와중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도 중국 군부는 각종 군벌이 난립하는 상태에 있었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처한 중국의 현실에서 두개의 모순을 간파했다. 하나는 외세의 침략이 야기하는 대외모순이고, 다른 하나는 빈부격차 문제, 지역감정 문제, 소수민족 문제 등이 야기하는 대내모순이었다. 마오쩌둥은 두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2단계 혁명론을 채택했다. 마오쩌둥이 볼 때 대외모순은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었다. 아울러 외세에 영합하는 중국의 친미파나 친일파 등과 같은 매국노를 철저히 척결했다. 반면 대내모순은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마오쩌둥은 혁명의 전위대가 인민을 교육해서 이끌어나가는 정책, 토지개혁 정책,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정책 등을 채택했다.
김일성 역시 외세를 물리치고 빈부격차 문제 등을 해결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에 직면했다. 김일성은 사대주의와 당파주의를 뿌리 뽑을 수 있는 주체교육을 통해서 혁명의 주체인 인민을 양성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만주항일전쟁, 한국전쟁(조국해방전쟁) 등을 전개했으며, 국내의 친일파 및 친미파를 철저히 척결했다. 또한 토지개혁 등을 실시해서 빈부격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943년 10월 5일 제88독립저격여단(국제여단) 대원 시절의 김일성은 조선군 제1영장으로 활동했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바탈린(소련),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중국), 왕일지(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중국), 김일성. 사진 중국 길림성 도서관 소장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주역들은 1930~40년대 항일 투쟁 과정에서 연대했던 인연으로 북한과 특별한 혈맹관계를 유지했다. 사진은 1936년 대장정을 이끌고 시안의 옌안에 정착한 이듬해 여름 중국 공산당의 3대 지도자, 저우언라이(왼쪽부터), 마오쩌둥, 보구가 함께 한 모습이다. 사진 북폴리오 제공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유사한 체험은 특히 유격대 활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장비와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유격전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의 국공내전, 대장정 등과 김일성의 만주 유격대 활동 등이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유격대 활동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마오쩌둥이나 김일성과 함께 유격대 활동을 전개한 동료들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가운데 끈끈한 전우애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들의 유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배반을 하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것이었다. 그렇게 형성된 유격대 정신은 추후 마오쩌둥의 중국과 김일성의 북한을 건설하는 건국정신이 되었다. 주지하듯 스탈린 사후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등극한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81년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된 덩샤오핑(등소평)은 마오쩌둥 격하 운동을 전개한 적이 없다. 덩샤오핑 역시 마오쩌둥과 함께 대장정에 참여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 이후에도 천안문광장에 걸려 있는 마오쩌둥 사진은 지금까지 내려진 적이 없다.
북한과 중국의 특수한 동맹 관계는 1976년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 시대에도 이어졌다. 1981년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왼쪽)이 이듬해 4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오른쪽)과 함께 환영행사를 참관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북한에서도 김일성과 함께 유격대 활동을 전개한 동료들이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북한을 ‘유격대 국가’로 부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2012년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된 김일성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관람한 적이 있다. 대규모 군인들이 행진을 하는데, 맨 앞줄에서 유격대 복장을 차려입은 군인들이 걷고 있었다. 나는 북한에서 유격대 정신이 여전히 건국정신으로 살아 있다고 느꼈다.
2012년 4월15일 평양의 김일성광장에서 ‘김일성 탄생 100주년 기념 열병식’이 열렸다. 국내외 언론은 이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첫 대중 연설을 한 것에 주목했다. 박한식 교수는 김일성의 항일 유격대를 재현한 부대가 열병식 선두에 등장해 인상적이었다. 사진 인민망 제공
2012년 4월15일 박한식(네째줄 오른쪽 세째) 교수는 부인과 함께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탄생 100주년 기념 열병식’을 현장에서 관람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북한은 2012년 4월15일 태양절 열병식 이래 국가 기념행사 때마다 항일 유격대를 재연한 부대를 등장시켜 건국 정신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2017년 태양절 열병식 때 유격대 모습. 사진 텅쉰망 제공
마오쩌둥은 중국의 극심한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식량을 골고루 나눠 먹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을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자본주의 대신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필요’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채택했다. 김일성이 사회주의를 채택한 것도 마오쩌둥이 사회주의를 채택한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다. 현재 북한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채택한 중국보다 사회주의의 평등의 원칙을 훨씬 철저하게 구현하고 있다. 내가 볼 때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다.
물론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의 평등의 원칙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관찰한 북한의 임금체계는 최상위직과 최하위직 간에 2배 이상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또한 북한에서는 경제적 평등뿐만 아니라 사회적 평등도 실현되었다. 북한사회를 지배하는 중요한 규범 중 하나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하나를 위한다”는 집단주의 정신이다. 따라서 ‘왕따’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생산수단의 공유를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채택했기 때문에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계급 자체가 존재할 수 없고, 계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계급의식이 생겨날 수 없다. 따라서 ‘갑질’ 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북한에서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에 사회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굶었다. 오히려 당 간부 등과 같은 지도층 인사들이 더욱 많이 희생되었다.
마오쩌둥사상과 주체사상 간의 차이점을 확인하고자 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주목할 수 있는 개념은 ‘인민’이다. 중국의 정식 국호는 ‘중화인민공화국’이고, 북한의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인민은 두 나라의 국호에서 키워드로 사용할 정도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 인민이 의미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큰 차이점이 드러난다. 중국에서 인민은 한족과 54개 소수민족을 모두 포괄하는 ‘국민’ 개념이다. 반면 북한에서 인민은 동일한 혈연에 기초를 둔 ‘민족’ 개념이다. 따라서 중국의 민족주의는 포용적 성격(inclusive nationalism)을 지닌 반면, 북한의 민족주의는 배타적 성격(exclusive nationalism)을 지니는 차이가 있다. 또한 마오쩌둥사상은 철저히 정치적 성격을 지녔지만, 주체사상은 정치적 성격뿐만 아니라 종교적 성격까지 지녔다는 점에서 양자는 큰 차이가 있다.
마오쩌둥사상과 주체사상 간의 유사성과 차이성은 중국과 북한 간의 ‘특수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국제정치학에서 ‘특수한 관계’란 영국과 미국 간의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경제적, 역사적, 문화적 차원 등에서 유지되는 특별한 유대를 의미한다. 우리는 중국과 북한의 관계 역시 영국과 미국의 관계 못지않은 ‘특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36년 2월 만주 영안현 남호두에서 열린 회의에서 김일성이 조선인 부대와 중국인부대의 항일연합군 결성을 제안하는 모습을 재현한 그림. 사진 <우리민족끼리>
마오쩌둥과 김일성이 만주에서 공유한 항일유격대 경험을 살펴보면 중국과 북한 간의 ‘특수한 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김일성은 1936년 2월27일 ‘남호두회의’(南湖頭會議)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다 알다시피 현재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중항일무장부대 내에서 주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중국인 부대 내에서도 적지 않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정치군사 간부로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편에서 조중항일무장부대를 조선인부대와 중국인부대로 갈라 편성한다면 형제적 중국인민의 항일무장역량을 약화시키게 되며 결국 조중인민의 항일무장투쟁 발전에 손실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을 닦을 때까지는 계속 동남만의 대산림지대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군사정치활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조선인민부대와 중국인민부대를 따로 편성하여 제각기 활동할 것이 아니라 항일연합군의 이름으로 반일무장투쟁을 공동으로 조직전개해야 합니다.”
마오쩌둥은 만주에서 거둔 군사적 승리를 발판으로 중국 전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중항일무장부대는 마오쩌둥에게 그 발판을 제공한 주역이었다. 하얼빈의 동북열사기념관에 가면 만주 지역의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과 이름이 전시되어 있다. 나는 그곳을 방문해서 조선인의 수를 일일이 헤아려 수첩에 기록한 적이 있다. 기념관에는 230여명 정도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조선인은 무려 100여명에 이르렀다.
1962년 10월 평양에서 맺은 ‘북-중 국경조약’ 때 중국은 북한 쪽에 유리한 조건으로 합의해줬다. 이에 앞서 1961년 7월 중국 베이징에서 김일성(왼쪽) 주석과 저우언라이(오른쪽) 총리가 ‘북-중 우호조약’을 맺고 있다. 저우언라이 오른쪽 바로 뒤로 덩샤오핑도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저우언라이(주은래)와 김일성은 1962년 10월12일 평양에서 ‘조중변계조약’을 체결했다. 백두산 일대 ‘북-중 국경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저우언라이는 북한에 대단히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해주었다. 예컨대 북한은 백두산 천지의 54.5%, 압록강과 두만강의 섬과 모래톱 중 264개를 차지하고, 중국은 천지의 45.5%, 187개의 섬과 모래톱만을 차지했다.
저우언라이는 1976년 사망했다. 1975년 4월 중국을 공식 방문한 김일성은 저우언라이가 입원한 병원을 방문했다. 그러자 저우언라이는 병석에서 일어나 정장을 하고서 김일성을 맞이했다. 그 자리에 덩샤오핑도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앞으로 북한에 무슨 일이 있으면 덩샤오핑을 찾으시오”라고 말해주었다. 1979년 5월, 김일성은 흥남비료공장 안에 저우언라이의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제막식에 직접 참여했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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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없는 북한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주체사상 때문이다”
등록 :2020-03-30
[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북한 티브이·라디오·달력에까지
어버이수령 찬양·김일성 유훈 가득
무심코 듣다 보면 찬송가·설교 느낌
“종교성 있지만 기독교와 성격 달라”
기독교는 현세 부정하고 내세 지향
주체사상은 현세 긍정 내세관 없어
‘김일성의 영혼과 함께 영원히 산다’
영생론은 정치적 리더십 유지 목적
‘김일성 우상화 도구’ 해석도 오류
1994년 클린턴 ‘북한붕괴론’ 착각
“김일성 사망 이후 석 달 못 버틸 것”
‘주체사관’ 역사의 주역 ‘인민’ 강조
“김일성 공화국 아닌 인민 공화국”
길을 찾아서 27회-주체사상 (4)
박한식 교수는 학계나 기독교계에서 북한의 영생탑, 태양상, 동상 등을 들어 주체사상을 ‘김일성 우상화 수단’으로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지적한다. 북한은 1997년 김일성 생일인 4월15일(4·15절)을 ‘태양절’로, 2012년 김정일 위원장의 생일인 2월16일을 ‘광명성절’로 정하고, 전국 각지에 부자 동상과 영생탑, 초상화인 ‘태양상’을 세웠다. 사진은 2012년 10월30일 평양의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열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 제막식 모습. 사진 연합뉴스
나는 1990년부터 북한을 본격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 해 평균 2회꼴로 방문했고 그 이상을 다녀온 해도 있었다. 내가 주로 묵는 평양의 호텔 방에 들어서면 익숙한 티브이, 라디오, 달력 등이 여느 때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국에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도착한 나에게 밀려오는 피로감도 익숙했다. 침대에 누우면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티브이 방송은 저녁 6시부터 방영했기 때문에 그때까지 고요한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면 일력이 있다. 일력을 넘겨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적혀 있는 김일성 유훈이 눈에 띈다. 예컨대 농번기 때는 농사일을 지도하는 구절이 적혀 있다. 북한에서 일력은 일종의 경전과 같은 것이었다.
저녁 6시가 되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티브이를 켰다. 그러면 역시나 익숙한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버이수령을 찬송하고 김일성 유훈을 설명하고 주체사상을 강조하는 노랫말, 애절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선율, 그 노랫말과 선율을 화려하게 형상화한 티브이 화면 등이 펼쳐졌다. 라디오를 틀어도 유사한 노래가 들렸다.
박한식 교수는 북한에 머물 때마다 김일성의 유훈과 찬양을 새긴 일력을 보며 ‘주체사상의 종교성’을 실감하곤 했다. 사진은 평양 옥류관의 대표 음식 사진을 소개한 2020년 북한 달력. 사진 아태평화교류협회 제공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나는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무심코 듣다 보면 마치 교회에 와서 찬송가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티브이, 라디오, 일력 등에서 김일성 유훈을 반복적으로 만나다 보면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 같았다. 북한을 간간이 방문하는 내가 이런 느낌을 받을 정도라면 일상적으로 듣는 북한 인민에게는 어떨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가 내가 도달한 결론은 ‘주체사상이 종교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이해하는 주체사상의 종교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주체사상의 종교성은 1994년 김일성 사후 등장한 ‘영생론’에서 분명하게 확인해볼 수 있다. 북한에 가면 “위대한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표어가 적힌 영생탑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2011년 김정일 사후에는 표어에 김정일도 추가되었다. 또한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해서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듯, 김일성이 탄생한 1912년을 주체 원년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주체사상의 종교성을 관찰한 학자들이 그 성격을 기독교와 비교해 해석하는 논문이나 책자를 쓰는 사례가 종종 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지만 주체사상의 종교성은 기독교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녔다. 예컨대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현세를 부정하고 내세를 지향하는 종교다. 따라서 기독교 특유의 내세관이 존재한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기독교와 달리 현세를 종교적으로 긍정하기 때문에 내세관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사상에서 강조하는 영생이란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민이 김일성의 영혼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뜻이었다.
앞서 ‘길을 찾아서 25회-주체사상(2)’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주체사상이 종교성을 담고 있는 궁극적 이유는 김일성 사후에도 김일성 생전의 카리스마를 보존해서 북한의 정치적 리더십을 변함없이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야만 북한의 정치적 생존과 번영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사회학적 시각에서 볼 때 기독교는 현세를 정치적으로 거부하면서(the anti-political rejection of the world) 끊임없이 내세를 지향하는 종교다. 만일 주체사상을 기독교와 비교할 수 있다면 미국과 한국의 군사적 위협에 항시적으로 노출된 북한이 정치적 생존을 포기하고 내세에서 영생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인데,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주체사상의 종교성과 관련해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쟁점이 또 하나 있다. 현재 많은 학자, 언론인, 정치인 등은 주체사상의 종교성의 요체를 김일성 우상화로 해석하고, 그런 해석에 따라 북한을 ‘김일성 공화국’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서 주체사상이 동원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런 견해는 북한을 바라보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내면화된 확고한 신념이다. 바로 그런 신념으로부터 김일성만 제거하면 북한은 곧 붕괴할 것이라는 믿음이 파생되었다.
북한은 김일성 탄생 100돌을 기념해 2012년 4월 평양 장대재언덕에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태양상 모자이크 벽화를 세웠다. 사진 연합뉴스
주지하듯, 김일성은 1994년 7월8일 사망했다. 뒤이어 1994년 10월21일 1차 북핵위기를 종식시킨 북-미 기본합의서(제네바 합의)가 작성되었다. 합의서에는 북한에 100㎿ 용량의 경수로 2기와 산업용 중유 50만t을 제공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이 김일성 사후 약 3개월 보름 만에 합의서에 전격적으로 서명한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그때 협상에 참여했던 미국 쪽 인사로부터 직접 확인하기로,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김일성이 없는 북한은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것이라 확신했다고 한다. 북한은 어차피 붕괴할 테니까 미국으로서는 어떤 내용이 담긴 합의서에 서명을 해도 추후 책임질 일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붕괴하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확신한 ‘북한붕괴론’이 오류였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검증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검증이 있었음에도 북한붕괴론은 여전히 폐기되지 않았다. 2015년 10월 오바마와 박근혜는 전시에 북한 김정은과 수뇌부 참수를 골자로 하는 ‘작전계획 5015’를 작성했다. 이것 역시 북한은 김정은 1인이 독단으로 지배하는 체제라는 신념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라크의 후세인을 제거했지만 이라크가 붕괴하였는가? 북한에 대한 환상이 한반도의 파멸을 초래할 정책을 끊임없이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을 김일성 공화국으로 이해하는 통념은 정치학 교과서에서 맨 먼저 소개되는 정치의 기본 원리와 정면으로 상충한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지배관계를 의미한다. 지배자는 권력을 수단으로 지배한다. 국가가 존속하려면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 반드시 복종해주어야 한다. 그러면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 복종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피지배자의 마음속에서 지배자의 권력 행사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정치학에서는 그런 인정을 ‘정당성’(legitimacy)이라고 한다. 지배자의 권력 행사가 피지배자의 마음속에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는 ‘정당성 위기’(legitimacy crisis)가 벌어진다. 국가는 정당성이 흔들리게 되면 곧바로 붕괴의 길을 걷는다. 북한이 1948년 건국 이후 2020년 현재까지 무려 70년이 넘도록 존속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지배자가 피지배자로부터 정당성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정치학의 기본적 이론은 북한이 김일성 공화국이 아니라 인민의 지지를 받는 ‘인민 공화국’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930년대 후반 김일성은 만주지역에서 한인과 중국인의 연합부대인 동북항일연군으로 활동했다. 사진은 1949년 북한 최초 개발 기관단총 생산 기념식 때 군 수뇌부들로, 동북항일연군교도려 출신들이다. 왼쪽부터 최용건 김책 김일 김일성 강건. <한겨레> 자료사진
북한이 인민 공화국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단초는 많다.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시기 나는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내 아버지는 1912년생으로 김일성과 동갑이다. 물론 부친과 김일성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지만, 아버지의 친구들 중에는 김일성과 알고 지내는 분이 적지 않았다. 나는 그분들에게 김일성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 그분들은 김일성이 “100명의 군인보다 1명의 인민을 친구로 두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답해 주었다.
1930년대 김일성은 김책, 최용건, 최현 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해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그런데 동북항일연군에서 펼친 게릴라전은 마오쩌둥의 독특한 ‘인민’ 개념에 기초를 둔 전략이었다. 마오쩌둥은 ‘인민을 물에 비유할 수 있다면 게릴라는 그 물에서 사는 물고기에 비유할 수 있다’, ‘인민이 바다라면 혁명가는 그 바다에서 헤엄치는 존재다’ 등등의 얘기를 하곤 했다. 마오쩌둥은 바로 그 인민 개념에 기초해 계급투쟁이 아닌 인민전쟁(People’s War)을 전개함으로써 장제스(장개석)를 물리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박한식 교수는 김일성이 마오쩌둥의 ‘인민’ 개념을 수용해 주체사상에 반영했다고 설명한다. 사진은 중국 인민지원군 화보사가 펴낸 <영광스러운 중국 인민지원군>(1959년)에 실린 것으로, 한국전쟁 말기 중국군들이 북한 주민의 농사를 돕는 모습이다.
김일성은 모택동의 인민 개념을 창조적으로 수용했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는 김일성의 인민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192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민족해방운동을 한다고 하던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화하며 혁명투쟁에 불러일으킬 생각은 하지 않고 대중과 리탈되어 령도권 싸움과 말공부만 하고 있었으며 대중을 단결시킨 것이 아니라 파벌싸움으로 분렬시켰습니다. 수령님께서는 혁명투쟁에 나서신 첫 시기부터 이들의 잘못을 꿰뚫어보시고 이들과는 다른 길,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대중에게 의거하여 투쟁하는 참다운 혁명의 길을 걸으시였으며 혁명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동원하여야 혁명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밝히시였습니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출발점의 하나입니다.”
북한에서 인민을 중시하는 정신은 역사의 주역을 인민으로 파악하는 주체사관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예컨대 <조선통사>의 머리말을 보면, 김일성의 다음과 같은 교시에 따라 역사를 서술했다고 밝혔다. “우리가 력사를 학습하자는 것은 왕이나 봉건통치배들의 력사를 알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의 투쟁의 력사, 창조의 력사를 알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민의 투쟁과 창조의 력사를 잘 알아야만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소유할 수 있으며 민족적 긍지와 혁명적 자존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조선통사> 목차를 보면 모든 전쟁의 주역을 인민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수, 당 침략자들을 반대한 고구려 인민들의 투쟁” “거란 침략군을 물리친 고려 인민들의 투쟁” “13세기 몽골 침략군을 물리친 인민들의 투쟁” 등등. 을지문덕이 수나라 침략을 물리친 부분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료하류역과 료동성을 방어하던 고구려의 애국적인 군인들과 인민들은 을지문덕의 지휘 밑에 수십배에 달하는 침략군을 상대하여 결사적인 방어전과 유인 및 기습전을 벌려 큰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이 전쟁의 최후승리를 앞당기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내가 볼 때 북한에서 주체사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북한의 정치적 생존은 불가능했다. 북한이 건국 이후 온갖 형태의 국제정치적 도전과 경제적 난관 등을 극복하면서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주체사상 때문이었다. 주지하듯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 논리로 얘기한다면,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체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사진)는 기독교와 헤겔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유물론적인 인간 중심의 철학을 주창해 마르크시즘의 형성에 큰영향을 줬다. 박한식 교수는 북한 시절 황장엽과 포이어바흐의 사상을 두고 토론했다. 사진 위키백과
황장엽은 1999년 펴낸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서 1948년 북한 중앙당학교 재학시절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오른쪽)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사진 한울 제공
끝으로 내가 북한에서 황장엽과 보낸 시간을 잠시 회고해보고 싶다. 나는 북한에서 황장엽과 약 8년 동안 여러 차례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때마다 황장엽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얘기를 많이 했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유물론자였다. 포이어바흐가 볼 때 기독교에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교리가 적지 않은데, 대표적 사례로 부활·구원·성령 등을 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에서 그런 교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기독교 그 자체의 존속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자신이 합리적 설명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황장엽은 포이어바흐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주체사상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황장엽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와 장시간 토론했다. 그러나 황장엽과 나는 서로 간의 생각의 간격을 끝내 좁히지 못했다. 내가 볼 때 황장엽은 포이어바흐처럼 이성으로 무장한 합리주의자였다. 그러나 나는 종교적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사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황장엽은 1997년 남한으로 건너온 이래 여러 책을 펴냈다. 나는 그중에서 1999년 그의 첫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 주목했다. 그 제목을 보는 순간 포이어바흐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황장엽이 해결한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펴보니 전혀 다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34745.html#csidxe23b955dad209fb97f731f7667c95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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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버이수령이 지배하는 거대한 가족국가다”
“북한은 어버이수령이 지배하는 거대한 가족국가다”
등록 :2020-03-16
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1965년 아메리칸대학 석사과정 입학
미 상무부 ‘비밀정보 사용허가’ 받아
2년간 ‘로동신문’ 사설 번역 아르바이트
‘주체’ ‘주체사상’ 용어 끊임없이 등장
“사설 읽을수록 의미 명료하지 않아”
미국 사회 ‘북한 전문가’로 점차 인정
1974년 국무부 ‘학자 외교관’으로 임명
“북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 당혹”
북한 밖에서만 이뤄진 ‘북한 연구’ 오류
“악마 나라 이미지 벗어나야 학자 자격”
북한 갔으나 서점·도서관에도 자료 없어
방북 앞서 질문 준비해 직접 토론·수집
“선군사상은 주체사상 대체 아닌 심화”
“주체사상과 조선 주자학 충효론은 달라”
길을 찾아서 26회-주체사상(3)
박한식 교수는 1965년 미국 아메리칸대학 석사과정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북한의 당 공식 기관지 <로동신문>의 사설 번역 작업을 하면서 ‘주체사상’과 ‘어버이 수령’ 등 특유의 용어에 관심을 갖게 됐다. 북한은 1998년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으로 ‘주체년호(연호)’를 제정하고 생일인 4월15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 태양절’로 제정했다. 2012년 4월15일 김일성 탄생 100돌 때 <로동신문>은 1면에 ‘위대한 주체의 태양의 력사는 천만년 흐를 것이다’ 제목으로 사설을 실었다. 사진 <연합뉴스>
내가 주체사상에 주목한 계기는 아메리칸대학 정치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시기에 마련되었다. 1965년 입학한 나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로동신문>의 ‘사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미국 상무부에서 주관하는 번역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상무부는 나에게 ‘비밀정보 사용허가’(Security Clearance)를 내주었다. 물론 아주 낮은 등급의 비밀정보만 열람할 수 있는 허가였다. 나는 국회 도서관 등에 가서 <로동신문>을 열람하고, 때로는 관련 부분을 복사해서 번역을 하곤 했다. 석사과정 내내 했으니 약 2년 동안 <로동신문>을 자세히 읽은 셈이다.
2012년 3월25일 북한은 김일성 탄생 100돌을 앞두고 평양시 중구역 로동신문사 청사 앞에 새로운 영생탑을 세웠다. 기존의 ‘위대한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문구를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로 바꿨다. 사진 <연합뉴스>
그때 내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부지불식간 깨닫게 되었다. 하나는 북한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주체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로동신문>과 같은 문헌자료만으로는 북한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적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무엇보다 <로동신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주체’, ‘주체사상’ 등과 같은 용어를 끊임없이 만나야만 했다. 북한 노동당의 기관지에서 유독 주체와 주체사상이란 용어를 그토록 많이 사용한다면 필경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처럼 중요해 보이는 주체와 주체사상의 의미를 명료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1959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해서 정치사상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공부했고, 아메리칸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해서도 정치사상을 전공했으며, 석사학위 논문도 그 분야에 대해 썼다. 그런 나였기에 주체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열망이 갈수록 타올랐다. 그래서 1971년 조지아대학에 교수로 부임한 뒤 북한에서 주체사상 연구를 대표한다고 알려진 황장엽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또 한가지 <로동신문>을 번역하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미국 사회에서 내가 점차 북한 전문가로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나에게 북한 관련 질문을 하는 빈도가 차츰 늘어났다. 심지어 1974년에는 미국 국무부에서 나를 ‘학자 외교관’으로 임명해주었다. 그런 다음 수시로 북한에 관해서 물어봤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미국에서 북한을 이해하는 수준이 얼마나 일천하면 나에게 자꾸만 질문을 한단 말인가? 내가 미국 사람의 눈에는 북한 전문가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정작 나 자신은 <로동신문>의 내용에 익숙해질수록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확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박한식 교수는 <로동신문> 번역을 계기로 1970년대부터 미국 학계와 언론에서 ‘북한 전문가’로 알려져 관련 이슈가 생길 때마다 다양한 매체에 나가 의견을 밝히고 있다. 사진 <시엔엔> 화면 갈무리
그 시절을 회상하니 재미난 에피소드가 하나 떠오른다. 하루는 상무부가 요청한 <로동신문> 사설을 번역해서 담당자에게 제출했다. 그러자 그 담당자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왜 어제 번역한 사설과 내용이 동일하죠?’ 내가 땡땡이를 친 것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내가 번역한 두 사설의 내용이 대단히 유사했을 뿐이다. 물론 상무부 담당자뿐만 아니라 누구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북한은 언제나 우리의 상식 밖에서 존재하는 나라다. <로동신문>의 사설은 항시 주체사상의 원칙에 따라 작성된다. 그 원칙에 따라 작성하다 보니 유사한 내용이 반복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더러 발간된 북한 관련 책자들도 북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방해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접한 북한 관련 책자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북한을 이해할 목적으로 저술된 것이 아니라 비난할 목적으로 저술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은 외부에 거의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 밖에서 진행되는 북한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아무리 많은 오류를 범하더라도 현실적 검증이 무한히 유예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풍토는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현재 미국의 지배적 여론에서는 북한을 ‘악마의 나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아들 부시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낙인을 찍지 않았던가? 물론 우리가 북한을 싫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을 상대하려면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이해의 지평은 오직 북한을 ‘탈악마화’(de-demonization)할 때에만 가까스로 열릴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을 탈악마화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학문적 정신을 갖춰야 북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학자의 자격을 갖는다.
박한식 교수는 1981년 방북 이래 주체사상을 명확히 이해하고자 수많은 북한 사람들을 상대로 질문과 토론을 통해 스스로 연구방법론을 찾았다. 1993년께 평양 방문 때 대동강변 주체탑을 배경으로 찍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나는 북한 밖에서 북한을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절감했다. 그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직접 방문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북한에 가보면 북한 연구를 방해했던 각종 장해 요소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북한 방문의 길을 열고자 수년 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그 길이 열렸을 때 나의 기대는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북한 땅을 밟는 순간 그 기대는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다. 북한의 학문 세계가 작동하는 시스템은 한국이나 미국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시내 곳곳의 서점에서 책을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서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서울의 교보문고와 같은 대형 서점은 아예 상상할 수도 없다. 한국에서 예컨대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는 미국 의회 도서관 등을 방문해서 수많은 자료를 열람하고 복사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는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없다. 한국이나 미국 대학의 도서관에 가면 전세계에서 유통되는 서적과 논문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대학 도서관에서는 주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발간한 서적들을 비치한다.
북한을 방문해도 북한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자연스럽게 열리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서야 내가 생각한 북한 방문이 북한 관광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의사 면허증이 없는 사이비 의사가 청진기만 덜렁 들고서 환자를 방문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는 허탈했다.
북한 연구의 여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나는 마침내 최종 결론에 도달했다. 나 홀로 북한 연구의 처녀지를 개척할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것이었다. 우선 내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각종 질문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따라 다양한 가설을 구성했다. 그때부터 북한 방문은 준비한 질문을 제기하고 가설을 검증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나는 북한에서 알게 된 정치인들과 정치적 대화를 나누고, 학자들과 학문적 대화를 나누고, 인민들과 일상의 삶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준비한 질문의 안내에 따라 북한의 각종 기관, 유적지, 마을, 장터 등을 돌아다니면서 가설을 검증했다. 또 알음알음으로 알게 된 북한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내가 원하는 책들을 입수했다.
이처럼 북한 연구의 어려움을 고려할 때 북한에 대한 오해가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현실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오해가 계속해서 방치되거나 조장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북한을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적 삶의 조건이 북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평화적 공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박한식 교수는 특히 오해가 많은 선군사상에 대해서 2010년 영문으로는 최초로 2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사진은 2007년 북한 평양출판사에서 펴낸 책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 장군>.
김일성 사후 김정일 체제에서 강조한 선군사상, 선군정치에 대해 대내외의 오해를 바로잡고자 북한은 2012년 영문판으로 책을 내기도 했다. <선군 폴리틱스 인 코리아>. <한겨레> 자료사진
지금까지 내가 축적한 북한 연구에 따라 주체사상 관련 통념 몇 가지를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의 관계에 대해서 적지 않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주체사상은 이미 낡은 사상이라는 것, 그래서 선군사상이라는 새로운 사상으로 낡은 주체사상을 대체했다는 것, 선군사상은 그 용어가 함축하는 것처럼 군이 인민의 삶을 선도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것 등등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선군사상은 북한 밖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북한에서 선군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자나 논문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정치인, 군인, 학자 등에게 선군사상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 선군사상을 학술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얘기는 어디까지나 선군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미가공 데이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그 미가공 데이터를 학문적으로 가공해야만 했다. 나는 그런 과정을 거쳐 선군사상 관련 논문 두 편을 작성했다. ‘선군정치: 김정일의 북한 이해하기’(Military-First Politics ‘Songun’: Understanding Kim Jong-il’s North Korea, 2007), ‘선군정치: 북한 대외정책에 대한 함의’(Military-First ‘Songun’ Politics: Implications for External Policies, 2010)가 각각 그것이다. 이 두 논문은 선군사상을 영문으로 소개한 최초의 논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국제사회에서 적지 않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박한식 교수는 폐쇄사회인 북한에 대한 서방권의 연구에는 상당한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선군사상은 주체사상과 별개의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심화시킨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 <연합뉴스> 제공
먼저 선군사상은 주체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선군사상은 주체사상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사상을 확대시키고 심화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선군사상은 김일성 시기에도 존재했다. 김일성 시기의 선군사상은 ‘국방에서 자위’라는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을 의미했다. 국방에서 자위는 인민이 군에 충실하게 복무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김정일 시기에 선군사상의 의미가 확대되었다. 김정일은 2006년 핵무기 개발 실험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 덕분에 북한은 군사력에서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김정일은 그 군사적 여력을 ‘경제에서 자립’이라는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을 실천하는 쪽으로 전용했다. 국방에서 자위의 원칙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인민이 군에 충실하게 복무해야 한다. 그런데 경제에서 자립의 원칙은 군이 인민에게 봉사함으로써 실천될 수 있는 것이었다. 농번기에 수많은 군 장병이 농촌에서 농민의 일손을 돕는 장면은 바로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하나 잘못된 통념은 주체사상을 조선 주자학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주체사상에서 중시하는 ‘어버이 수령’ 개념을 주자학에서 역설하는 효와 충의 맥락해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해는 주체사상에서 수용할 수 없다. 주체사상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당쟁과 사대주의 유산을 혁파할 수 있는 대안의 사상으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조선 당쟁의 궁극적 원천은 주자학이었다. 조선은 한마디로 주자의 나라였다. 주자를 신봉한 조선의 역사가 당쟁과 사대주의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주자는 효를 충보다 우선시했다. 다시 말해서 ‘수신제가’의 논리를 ‘치국평천하’의 논리보다 우선시했다. 예컨대 명·청 교체기의 와중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도 효를 충보다 우선시하는 주자학적 신념 때문이었다. 인조반정 세력에게는 광해군이 외교를 잘해서 전쟁의 참화를 방지하는 것보다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폐모살제’가 더욱 심각한 죄목이었다. 그러나 주체사상에서는 효와 충이 동등한 자격으로 ‘어비이 수령’에게 수렴된다. 따라서 주체사상에서는 효의 논리로 충을 폐기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주체사상의 ‘어버이 수령’을 이해할 수 있는 레퍼런스를 동양의 전통사상에서 찾아보고자 한다면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시행된 ‘효치’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무제는 효를 제국의 통치술로 활용할 것을 역설한 <효경>(孝經)을 참조하면서 효치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효경>에서는 “부자간의 도는 천성이며, 군신의 의리이다”라는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효와 충의 수렴을 강조한다. 따라서 <효경>은 효를 강조한 유가적 경전이지만, <충경>(忠經)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법가적 성격을 지닌 경전이었다.
북한은 효와 충이 수렴되는 어버이 수령이 지배하는 국가라고 할 때, 2500만 식구를 가진 하나의 거대한 가족국가가 곧 북한이라고 할 수 있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32754.html#csidxe1f6df554c8c155ae18720388d3bfc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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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가장 완벽한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김일성이다”
북한에서 가장 완벽한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김일성이다”
등록 :2020-03-03
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김일성 1920년대부터 주체사상 ‘착상’
독립운동의 사대주의·파벌싸움 ‘비판’
주체적 역량·정신만이 독립국가 ‘쟁취’
대안 인간형 ‘사회정치적 생명체’ 제시
“자주·창의·의식성 지닌 사회적 존재”
‘옳은 지도로 사회력사발전 주체화’ 교육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령도’ 강조
“기독교 삼위일체와 완전히 다른 존재
남쪽 학계 ‘령도의 핵심 삼위일체’ 오해”
‘당과 수령의 령도=정치적 리더십’ 의미
김일성 사후에도 유훈정치로 카리스마
“북한의 실세는 여전히 김일성인 이유”
주체사상은 모든 일상생활·예술 ‘근간’
“윤이상 작품 ‘주체음악’으로 높이 평가”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나온 북 미장원
‘주체 헤어스타일 포스터’ 매우 사실적
[길을 찾아서] 주체사상 (2)
박한식 교수는 북한에서 주체사상은 모든 일상생활과 예술 활동의 근간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지난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 때 삼지연관현악단의 강릉 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삼지연관현악관은 대표적인 주체음악 단체로 꼽힌다.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앞서 여러차례 강조했듯, 내가 주체사상 연구를 결심한 까닭은 북한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북한을 합리적으로 이해해야만 남북이 서로 평화적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판단했다. 기존의 북한 연구는 대부분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과 같이 북한 외부에서 동원된 개념을 북한에 강제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런 방식으로 북한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북한의 생각을 지배하는 사상을 연구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주체사상이란 사실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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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한 나의 주체사상 연구는 약 10여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북한을 방문해서 주체과학원의 수많은 학자들에게 질문하고, 토론하고, 때로는 그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 방식으로 꾸준히 연구를 해왔다. 그러한 연구의 역정은 2002년 영문판으로 출간된 <통념을 벗어난 지혜로 본 북한 정치>(North Korea: The Politics of Unconventional Wisdom)에 집약되었다.
박한식 교수는 ‘김일성이 1994년 사후에도 여전히 북한의 실세인 이유는 주체사상에서 제시한 가장 완벽한 사회정치적 생명체가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진은 김일성에 대한 영원한 추앙을 선전하는 북한 포스터. 사진 연합뉴스
‘주체사상 (1)’ 편에서 이미 설명했듯, 김일성은 1920년대 전개된 반일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주체사상을 착상했다. 반일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은 한마디로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일성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의 행태를 목격하면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행태가 전반적으로 사대주의와 파벌싸움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생각했다. 조선이 망한 것도 사대주의와 파벌싸움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또다시 사대주의와 파벌싸움에 매몰되어 있단 말인가? 김일성은 무엇보다도 사대주의와 파벌싸움을 혁파한 새로운 인간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인간형은 자기 문제를 자기 스스로 해결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존재여야만 했다. 그처럼 주체적 역량과 정신을 가진 존재만이 독립국가를 쟁취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김일성은 독립국가를 쟁취할 수 있는 주체적 인간의 요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에 이른다. 김일성은 주체사상이 사람 중심 사상이란 점을 강조하고, 그 사람이란 구체적으로 자주성, 창의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로 정의했다. 자주성은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자주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을 말한다. 창조성은 목적의식적으로 세계를 개조하고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사회적 존재의 속성을 말한다. 의식성은 세계와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개변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을 말한다.
특히 김일성은 사람의 ‘자주성’에 주목해서 이른바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사람에게 있어서 자주성은 생명입니다. 사람이 사회적으로 자주성을 잃어버리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동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회적 존재인 사람에게 있어서 육체적 생명보다도 사회정치적 생명이 더 귀중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목숨이 붙어 있어도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정치적 자주성을 잃어버린다면 사회적 인간으로서는 죽은 몸이나 다름없습니다.”(1972년 9월17일 일본 <마이니치신문> 기자와 대담 중에서)
김일성은 1972년 9월17일 평양에서 일본 <마이니치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주체사상과 연방제 통일 등에 대해 설명했다. 인터뷰 기사는 이틀 뒤 9월19일치 1면에 실렸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란 한마디로 사대주의와 파벌싸움을 혁파한 대안의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대주의와 파벌싸움에 매몰된 인간이 개인의 욕망과 자유와 이익 등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자라면,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단체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헌신하는 공적 존재를 의미한다. 북한에서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주체교육을 통해서 육성된다. 사회정치적 생명체가 지배하는 북한에서는 개인주의가 설 땅이 없다. 그래서 개인이 소속된 단체 간의 경쟁은 있을 수 있지만, 개인 간의 경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에서 가장 완벽한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김일성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당원도 사회정치적 생명체에게만 자격이 주어진다.
김일성의 구상에서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주역이 된다. 아울러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통해서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방법으로는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령도(영도)’로 제시되었다.
김정일의 노작(勞作),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령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민대중이 력사(역사)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역할을 다하자면 반드시 지도와 대중이 결합되어야 합니다. 인민대중은 력사의 창조자이지만 옳은 지도에 의하여서만 사회력사발전에서 주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역할을 다할 수 있습니다. …혁명운동, 공산주의운동에서 지도문제는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령도문제입니다. 로동(노동)계급의 당은 혁명의 참모부이며 로동계급의 수령은 혁명의 최고령도자입니다.”
북한에서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령도’는 종종 ‘삼위일체’라는 용어로 설명되기도 한다. 내가 북한에서 만난 황장엽뿐만 아니라 여러 학자들도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령도’를 설명하곤 했다. 그러나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령도’는 김정일의 노작 등에서 명시한 ‘전문용어’(technical term)인 반면, ‘삼위일체’는 일반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채용한 ‘비전문용어’(non-technical term)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북한 학자들의 일상적 대화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이긴 하지만, 주체사상의 핵심을 서술하는 책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주체사상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령도’라는 명제의 핵심을 삼위일체로 파악하고, 그것을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유비해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유비를 통해서 이뤄지는 해석은 모두 주체사상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초래할 뿐이었다. 주체사상의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인민대중-당-수령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성부-성자-성령과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다른 지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독교의 성부는 세상의 밖에서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다. 그러나 주체사상의 수령은 세상 안에서 존재하는 세속적 존재다. 따라서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종교사상에 해당하는 반면, 주체사상의 삼위일체는 정치사상에 해당하는 차이가 있다.
당과 수령의 ‘령도’는 일종의 정치적 리더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미국과 한국의 군사적 위협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준전시상태에서 살아왔다. 바로 그러한 준전시상태가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영도라는 정치적 리더십을 요구했다고도 할 수 있다. 손자, 마오쩌둥(모택동), 클라우제비츠, 마키아벨리 등과 같은 정치사상가는 전시상태에서 정치적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주체사상에서 역설하는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영도는 북한에 특유한 명제가 아니라 인류의 정치사상에서 보편적으로 요구하는 명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1994년 김일성 사후 국제사회의 여러 언론 매체들과 인터뷰를 할 때 “북한의 실세가 누구냐?”라는 질문을 종종 받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김일성이다”라고 답변했다. 그러면 질문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다시 물었다. “북한의 실세가 누구냐고요!” 그들은 김일성이 이미 사망했는데 여전히 김일성이 실세라는 나의 답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 나는 북한 특유의 ‘유훈정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준전시상태 내지 전시상태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영도라는 정치적 리더십이 유지되어야 한다. 김일성 생전에는 김일성의 카리스마를 통해서 그러한 정치적 리더십이 비교적 쉽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 사후에도 북한이 정치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이 생전에 발휘했던 정치적 리더십이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한다. 북한에서는 그 문제를 유훈정치를 통해서 해결했다. 유훈정치는 김일성 사후에도 김일성이 생전에 발휘했던 카리스마를 보존함으로써 정치적 리더십이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주체사상은 단순히 추상적 수준에서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주체교육을 통해서 북한 사회 전체의 삶의 양식을 지배하는 실천윤리로 자리를 잡았다. 북한에서는 그런 실천윤리를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주체사상의 자주성은 4가지 지도적 원칙을 통해서 구현되는데,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가 각각 그것이다. 사상에서 주체는 정치, 경제, 국방 각 분야의 주체를 선도하는 구실을 한다.
사상에서 주체는 무엇보다도 정치에서 자주로 실현된다. 아울러 정치에서 자주가 실현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경제에서 자립과 국방에서 자위도 보장된다. 특히 정치에서 자주는 대외관계에서 완전한 자주권과 평등권을 행사함으로써 실현된다. 20세기 초반의 항일운동, 중-소 분쟁 시기의 자주외교, 미국에 대한 반제국주의 운동 등은 모두 정치에서 자주라는 지도적 원칙을 실천한 것이었다.
경제에서 자립은 자립적 민족경제를 추구하는 지도적 원칙이다. 자립경제에서는 이익 그 자체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경제와 달리 나라와 인민의 수요 충족을 목표로 삼는다. 특히 자립경제는 다른 나라의 경제적 지배와 예속을 반대한다.
국방에서 자위는 자기 힘으로 자기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지도적 원칙이다. 아울러 국방에서 자위의 원칙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자위적 무장력을 갖춰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래야만 나라의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의 군사적 담보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북한이 전세계의 비난을 무릅쓰면서 핵무기를 개발한 것도 국방에서의 자위라는 지도적 원칙을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2018년 2월16일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일을 기념해 평양 만수대예술극장 안에 ‘주체음악예술발전관’을 개관했다. 사진 연합뉴스
주체사상은 북한의 일상생활에서도 광범위하게 구현된다. 예컨대 주체음악이 있다. 서양 악기와 우리의 전통 악기를 뒤섞어 연주하는 음악을 주체음악이라고 부른다. 2018년 2월 평창겨울올림픽 때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이 강릉과 서울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공연 실황을 유심히 보면 서양 악기와 우리의 전통 악기를 함께 사용해서 연주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주체음악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윤이상의 음악을 주체음악으로 높이 평가해 1984년부터 ‘윤이상음악연구소’를 만들어 지금껏 해마다 연주회를 열고 있다. 2014년 음이상교향악단이 연구소 창립 30돌 기념 음악회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박한식 교수는 1994년 11월 북미주기독자회의 회장으로서 95년 1월 미국 뉴욕에서 남북한·해외동포가 함께하는 ‘윤이상음악제’를 추진했으나 무산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북한에서 윤이상의 음악은 주체음악으로 간주해서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윤이상의 음악은 서양 근대음악에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녹아 있는 형태로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윤이상교향악단을 창단하고, 윤이상음악당을 설립해서 주체음악을 꾸준히 연주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는 윤이상과 오랜 교분이 있어 그의 음악을 미국에 널리 소개하고자 했다. 나는 1994년 북미주기독자회의 회장 시절 남북한에 제안해 ‘윤이상 음악제’를 이듬해 1월 뉴욕에서 열기로 합의하고 발표까지 했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방해세력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윤이상이 작고한 뒤인 1996년 11월에야 독일 베를린의 국제윤이상협회와 뉴욕 한국인 교향악단을 연결시켜 뉴욕 링컨센터에서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윤이상 현대음악 연주회’를 열게 되었다. 그때 미국에서 음대 교수이자 피아니스트로 활동 중인 나의 큰딸 박주영이 윤이상의 곡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와 피아노 3중주를 연주하기도 했다.
박한식 교수는 윤이상 음악을 미국에 알리고자 1996년 11월 뉴욕 링컨센터에서 ‘윤이상 현대음악 연주회’를 주선하기도 했다.
1996년 11월 뉴욕 링컨센터에서 열린 ‘윤이상 현대음악 연주회’의 프로그램.
주체 헤어스타일도 있다. 최근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티브이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보면 여자 주인공이 북한의 미장원을 방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미장원에 들어서면 벽면 포스터에 전시된 몇 가지 헤어스타일의 유형이 눈에 띄는데, 바로 그것이 주체 헤어스타일이다. 미장원의 손님은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
북한에서는 평양의 창광원 등 미용실에서 ‘주체 헤어스타일’ 포스터를 제시해 선택하게 한다. 사진은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한 장면. 티브이엔(tvN) 갈무리
최근 화제를 끈 케이블 채널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남쪽 출신 여자 주인공(손예진)이 평양식 헤어스타일로 변신하기도 했다. 티브이엔(tvN) 갈무리
물론 주체 헤어스타일의 유형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한다. 주체 춤도 있다. 주체 춤의 특징은 하체의 율동을 자제하고 상체의 율동을 중심으로 춤을 추는 것이다. 하체의 과도한 율동은 상스럽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주체 건축도 있다. 예컨대 북한 인민대학습당은 지붕을 기와로 장식한 반면, 내부는 현대식 시설로 꾸몄는데, 그런 식의 건축양식을 주제 건축이라고 부른다. 요컨대 주체사상은 북한의 사회적 삶을 끊임없이 견인하는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30792.html#csidxb86baa6a49298c3a10065716708ce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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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주체사상의 나라…‘역지사지’ 눈으로 봐야 보인다”
[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이해하는 것과 동의하는 것’ 별개
“북의 행동 동기 알아야 이해 가능”
동기 들여다볼수록 ‘주체사상’ 또렷
“모든 삶의 규율·사회관습에 녹아”
‘국방에서 자위’ 원칙…핵포기 ‘불가’
‘경제에서 자립’ 원칙…개방 ‘경계’
‘정치에서 자주’ 원칙…통일정책 ‘고수’
‘창시자는 김일성·구현자는 김정일’
82년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발표
85년 ‘위대한 주체사상 총서’ 10권으로
주체과학원 300여 학자와 토론·발표
리지수·박승덕·정기풍 등 기억 남아
황장엽과 90년부터 망명 뒤에도 ‘교유’
“평양과 서울에서 완전히 다른 인물”
‘주체사상 이론화·창조설’ 사실과 달라
‘김일성 회고록 위작’ 주장도 동의 못해
길을 찾아서-24회 주체사상 (1)
박한식(왼쪽) 교수는 북한의 주체사상 이론가였던 황장엽(오른쪽) 전 노동당 비서와 1990년부터 97년 남한 망명 이후까지 오랫동안 교유했다. 사진은 1993년 방북 때 평양 주체과학원의 원장 접견실에서 황장엽 원장과 함께한 모습이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많은 사람들이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그들의 온갖 요구와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자 그들은 북한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온갖 종류의 비난을 퍼부어 대고 각종 제재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한은 그처럼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도 핵무기를 포기하려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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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려면 자본주의적 개혁과 개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북한은 그들이 동원한 온갖 종류의 화려한 설득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개혁과 개방에 나서질 않는다. 그러자 그들은 북한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북한 인민의 경제적 복지를 도외시하는 북한 정권을 강력하게 규탄한다. 그러나 북한은 그들의 설득과 규탄에도 자본주의적 개혁과 개방에 나서려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사람들처럼 자신에게 친숙한 이론과 개념과 언어로 북한을 연구하거나 재단하는 행위를 ‘인식론적 제국주의’(epistemic imperialism)라고 부른다. 아울러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통해서는 북한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폐기하고 북한이 고수하는 생각 그 자체에 접근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북한의 시각에서 북한의 행위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역지사지’(empathy)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역지사지를 역설하는 나를 친북주의자 내지 종북주의자 등으로 지칭하면서 비난한다. 하지만 우리는 북한을 이해하는 것이 곧 북한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동안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입안된 모든 대북정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실패에 따른 부담과 비용은 고스란히 우리들 자신의 몫 아니었던가?
역지사지의 시각에서 북한을 바라보면, 북한의 행동을 지배하는 동기를 서서히 가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동기에 주목하면 할수록 ‘주체사상’이 점차 선명하게 부각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세상의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 까닭은 ‘국방에서 자위’라는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 때문이다.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에도 자본주의적 개혁과 개방을 꺼리는 까닭 역시 주체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때 중국이 북한에 경제특구를 건설해서 북한 경제를 부양하려는 방안이 논의된 적이 있다. 북한에 경제특구를 건설해서 북-중 간의 경제적 교류가 활성화된다면 북한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만난 북한의 지도층 인사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북한이 중국의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할 가능성을 크게 우려했다. ‘경제에서 자립’이라는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을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통일정책에도 주체사상이 녹아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 북측 발표문 제1조는 다음과 같다. “북과 남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 문장은 ‘정치에서 자주’라는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을 전형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위에서 예시한 몇몇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주체사상은 북한의 삶의 양식을 전반적으로 규율하는 살아 있는 이념이다. 북한은 한마디로 ‘주체사상의 나라’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주체사상을 모르면 북한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국한된 시각으로 북한에 접근하면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 역시 거듭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도 주체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주체사상의 생명이 냉전 종식과 함께 종식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북한에서 주체사상에 대한 논의가 예전처럼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체사상이 북한 사회의 관습에 온전히 녹아 들어간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는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간다. 추석이나 설날 아침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귀성이나 제사는 유교에서 중시하는 효사상과 조상숭배사상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귀성길에 오르거나 제사를 지내는 누구도 유교 경전에 수록된 효사상과 조상숭배사상을 공부하고서 그런 행위를 취하지는 않는다. 귀성과 제사가 우리 사회에서 관습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주체사상이 예전처럼 활발하게 논의되지 않는 까닭은 주체사상의 생명이 종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체사상이 북한 사회의 관습으로 확고하게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이란 김일성의 생애의 의미를 후대의 연구자가 개념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념화 작업은 김정일의 주도로 이뤄졌다. 따라서 주체사상의 창시자는 김일성이고, 주체사상의 구현자는 김정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황장엽이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구성했고, 심지어 황장엽이 주체사상의 새로운 버전을 창조했다는 견해가 유통된다. 나는 북한에서 약 8년 동안 황장엽과 만나서 주로 주체사상을 주제로 토론을 했다. 주지하듯 황장엽은 1997년에 서울에 왔다. 나는 서울에서도 황장엽과 몇차례 만나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황장엽이 한국에서 출판한 여러 책의 내용과 강연 내용도 대부분 섭렵했다. 이 시점에서 황장엽과의 만남을 회고하며, 결론적인 얘기를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황장엽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내가 북한에서 만난 황장엽은 서울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북한에서 만난 황장엽과 서울에서 만난 황장엽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1930년 6월30일 김일성이 중국 지린성 창춘 카륜회의에서 발표한 ‘조선혁명의 진로’ 연설을 통해 주체사상을 창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9년 6월 열린 카륜회의 89돌 기념행사 모습. 연합뉴스
김일성의 생애의 의미는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총 8권)에 정리되어 있다. 따라서 <세기와 더불어>에 주체사상이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황장엽은 김일성이 자신의 회고록을 직접 집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기와 더불어>가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황장엽의 논리에 따른다면 현재 <한겨레>에 연재하고 있는 나의 회고록 ‘평화에 미치다’도 위작이란 말인가? 이 회고록도 내가 직접 쓰는 것이 아니라 집필자가 대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회고록은 주로 집필자가 대필하는 것이 상식이다. 미국에도 회고록을 전문으로 대필하는 집필자가 수없이 많다. <세기와 더불어>가 위작이라는 황장엽의 주장은 내가 북한에서 만난 황장엽의 주장이 아니라 서울에서 만난 황장엽의 주장일 뿐이었다.
김일성의 회고록 전체를 관철하는 문제의식은 조선의 망국과 독립국가 건설이다. 김일성은 조선 망국의 궁극적 원인을 당쟁과 사대주의로 파악했다. 그런데 김일성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 역시 당쟁과 사대주의 유산을 탈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통찰했다. 김일성은 그런 실상을 자신의 아버지 말씀을 빌려서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는 이조 시기부터 내려오는 당파싸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데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어 파쟁을 일삼고 있으니 야단이라고 개탄하였다. 파쟁을 근절하기 전에는 나라의 독립도 이룩할 수 없고 문명개화도 이룩할 수 없다. 파쟁은 국력을 쇠잔케 하는 근원이고 외세를 끌어들이는 매개자이다. 외세가 들어오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다. 너희들 대에는 반드시 파쟁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단결을 이룩해야 하고 민중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하였다.”(<세기와 더불어> 1권)
김일성은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와중에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독립국가를 건설할 능력과 자격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런 인재는 일차적으로 조선의 당쟁과 사대주의의 유산을 완전히 탈각한 존재여야만 했다. 그래서 독립국가 건설 과제를 주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존재여야만 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신의 주변에서 그런 존재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독립국가 건설을 주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착상을 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주체사상을 착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일성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해방 후) “쏘미 양군의 주둔으로 하여 우리나라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장으로 될 수 있었으며 그 배경 밑에서 우리의 민족 역량은 좌익과 우익으로, 애국과 매국으로 분열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당쟁이 성행하고 당파와 외세가 결탁하면 그 종착점은 망국으로 되는 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고 새 조국 건설을 다그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백방으로 강화해야 했습니다. 우리 혁명의 주체는 우리 인민 자신을 말합니다. 우리는 혁명의 길에 나선 첫날부터 항일혁명의 직접적인 담당자인 인민을 교양하고 동원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왔습니다.”(<세기와 더불어> 8권)
북한은 1982년 3월31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김정일이 김일성 탄생 70돌을 기념해 발표한 ‘주체사상에 대하여’(조선로동당출판사)를 주체사상의 첫 체계화 시기로 밝히고 있다. 사진 조선향토대백과
김일성이 항일운동 때 착상했던 주체사상은 1950년대에 행한 연설의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예컨대 김일성은 1955년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주체를 세울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문건으로 정리되었다.
북한은 1985년 10월 노동당 창당 40돌을 기념해 주체사상을 집대성한 <위대한 주체사상 총서>(사회과학출판사) 10권을 출간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주체사상 총서>는 1989년 서울의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 백산서당에서 영인본으로 펴내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정일은 1982년 김일성의 주체사상 구상을 계승하면서 전면적으로 체계화한 논문을 발간했는데, ‘주체사상에 대하여’가 바로 그것이다. 리상걸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론문 ‘주체사상에 대하여’의 해설>을 1983년에 펴냈다. 1985년에는 주체사상을 집성한 <위대한 주체사상 총서> 10권이 발간되었다. ‘주체사상에 대하여’는 주체사상의 총론에 해당하고 <위대한 주체사상 총서>는 주체사상의 각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주체사상 총서> 각 권 주제는 다음과 같다. 1권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 2권 주체사상의 사회역사 원리, 3권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리, 4권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 리론, 5권 사회주의·공산주의 건설 리론, 6권 인간개조 리론, 7권 사회주의 경제건설 리론, 8권 사회주의 문화건설 리론, 9권 령도체제, 10권 령도예술.
박한식 교수는 1990년부터 2015년까지 매해 평균 두차례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대표 학자들과 주체사상에 대한 토론과 발표 등 연구를 해왔다. 왼쪽부터 1990년 당시 주체과학원 원장 리지수와 주체과학원 주체사상연구소 실장 박승덕, 전 조국통일연구원 실장이자 현 김철주사범대 교수 정기풍. 사진 조선향토대백과 제공
1987년에는 황장엽의 주도로 용악산 근처에 ㄷ자형 건물의 주체과학원이 설립되었다. 황장엽은 주체사상을 세계에 확산시키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주체과학원은 약 300명의 주체사상 전문가가 상주하는 대규모 연구기관이었다. 300명 전문가의 전공 분야는 학문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었다. 주체과학원에서 추구한 목적은 주체사상의 보편적 응용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체과학원 창립 3년 뒤인 1990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평균 2회 북한을 방문했다. 주체과학원에서 주체사상 연구가 활기를 띠는 상황에서 방문했기 때문에 나의 주체사상 연구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나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만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토론을 하면서 수많은 질문을 제기했다. 주체사상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밝혀보라는 요청을 받아서 여러 차례 발표하기도 하고 그곳의 전문가들 앞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특별히 가까이 지낸 학자들인 리지수, 박승덕, 정기풍 등이 떠오른다. 이제는 나의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28598.html#csidxe126036a8b27329840d8fab8b35b3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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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숙 초청으로 첫 방북…머리에 뿔 달린 악마들 없었다”
[길을 찾아서] 23회 북한에 대한 첫인상
1981년 7월 북한 해외동포원호회의 초청으로 처음 북한을 방문한 재미 한국인 학자 6명 일행이 평양시 대성구역 용남동에 있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해 교수들과 토론을 하고 도서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뒷줄 오른쪽 둘째 양성철, 다섯째 박한식, 여섯째 김종익, 아홉째 길영환, 앞줄 가운데 고병철, 맨 오른쪽 이채진 교수 등이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1981년 북 해외동포원호회 ‘문호 개방’
그해 7월 재미동포 학자 6명과 평양에
물류를 클릭하다 첼로 스퀘어
결혼 잔치·대동강변 연인들 데이트…
“똑같은 사람들 보고 ‘반공 세뇌’ 와르르”
브루스 커밍스보다 좋은 승용차 제공
“우리 민족은 우수하니까 달리 대우”
서울 호텔 ‘외국 손님 우대’와 대조적
김일성대 방문해 교수들 만나 토론도
“도서관 마르크스 ‘자본론’ 없어 의아”
‘주체사상’ 저술은 빈약 ‘어록’만 다양
미국서 83년 일행과 ‘북한 방문기’ 펴내
86년 9명 공저 한국어판 ‘북한기행’으로
중국 지인 통해 황장엽에 편지 ‘무답’
1987년 주체과학원 건립에 더 ‘궁금’
1990년 조선아태평화위에서 초청장
2015년까지 매해 2회꼴로 ‘방북 토론’
나는 자가진단한 나의 ‘평화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남북한 평화와 통일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행태주의가 지배하는 미국의 사회과학이론으로는 북한의 현실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간주하면서 온갖 편견을 끝없이 양산하는 여론의 풍토(climate of opinion)에서 북한을 공정하게 이해하는 것 또한 대단히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북한에 가서 그곳의 현실을 직접 관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북한을 방문해서 기행문이나 여행기를 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북한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서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학술적인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북한을 방문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길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북한은 국교를 수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감했다. 그런데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북한은 1981년 문호를 개방해서 국외 학자들을 초빙하는 사업을 벌였다. 북한의 해외동포원호회 허정숙 위원장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포 학자 6명이 그해 7월 방북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나도 그곳에 낄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우리 일행은 고병철(일리노이대)·길영환(아이오와주립대)·김종익(웨스트미시간대)·양성철(켄터키대)·이채진(캘리포니아주립대) 그리고 나(조지아대)였다.
1981년 박한식 교수 일행의 방북을 초청한 해외동포원호회 허정숙(맨오른쪽) 부위원장이 1985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적십자회담 때 조국평화통일위 부위원장 자격으로 이영덕(가운데) 남쪽 수석대표, 여연구(맨왼쪽)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서기국장 등과 건배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오랫동안 갈망했던 북한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아하! 여기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구나! 우리처럼 자녀의 학교 성적이 좋으면 마을 사람들을 초빙해서 한턱내고, 결혼식 때는 집에서 잔치를 열고, 밤이 되면 대동강변에서 젊은 남녀 쌍쌍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한국과 미국에서 살면서 수십년 동안 북한은 악마들이 사는 곳으로 배웠다. 머리에 뿔이 달린 그 악마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로 주입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일상 현실을 목격하는 순간 나를 세뇌시킨 허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박한식 교수는 1981년 여름 방문한 북한의 첫 인상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표현했다. 사진은 81년 주체탑이 건너다 보이는 대동강변에서 일상을 즐기고 있는 평양 시민들의 모습을 일본 사진작가 구보다 히로지가 찍은 것이다.
해외동포원호회는 우리 일행을 대단히 융숭하게 대접해 주었다. 예컨대 우리 일행에게는 개인별로 벤츠 승용차가 지급되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와 다른 경로로 북한을 방문한 브루스 커밍스에게는 볼보 승용차가 지급되었다. 나는 허정숙에게 그 까닭을 물어봤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민족은 특별히 우수한 민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 대우를 달리해야 합니다!”
허정숙의 답변은 내가 한국에서 접한 답변과 극히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때 북한 방문 일정을 마치고 나는 서울로 건너와 시청 앞 플라자호텔에서 묵게 되었다. 그런데 호텔 안내원은 나에게 시내 경치가 보이지 않는 방을 안내했다. 그래서 이왕이면 시내 경치가 보이는 방을 사용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내원은 이렇게 답변했다. “시내 경치가 보이는 방은 외국 손님들 몫으로 남겨둡니다. 그냥 이 방을 쓰시지요.”
북한은 1981년 해외동포원호회를 통해 재미 동포 한인 학자들만이 아니라 브루스 커밍스 교수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도 초청했다. 사진은 80년대 여러차례 북한을 방문한 커밍스(맨왼쪽) 교수가 평양시 중구역의 인민문화궁전이 건너다 보이는 대동강변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다.
북한의 보통강 호텔에서 체험했던 추억도 잊을 수가 없다. 호텔 식당에서는 24시간 전에 요리 주문을 받았다. 무슨 메뉴가 있느냐고 물으니 뭐든지 주문하라고 그랬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어려운 메뉴를 주문하고 싶었다. “혹시 회가 있습니까?” 그러자 곧장 답변했다. “물론 있습니다!”
이튿날 내 식탁에는 대동강에서 잡은 커다란 잉어가 통째로 접시에 놓여 있었다. 잉어는 입을 뻐끔뻐끔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를 놀려주려는 속셈일까? 그러나 다시 보니 회를 정교하게 뜬 다음 잉어 껍질을 살짝 덮어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세계 여러 나라의 어떤 식당에서도 그런 식으로 회를 뜬 사례를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싱싱한 회를 먹는 내내 감탄이 절로 나왔다.
198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박한식 교수 일행은 평양시 평천구역의 1급 호텔인 보통강여관에서 묵었다. 사진은 <조선향토대백과>에 실린 1983년 보통강여관의 무도장 모습. 평화문제연구소 제공
그때 북한 방문 일정을 마치고 서울에 와서 통일원 장관 홍성철의 주선으로 이북5도 도민회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약 300여명의 청중 앞에서 북한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다양하게 소개했다. 나는 강연 끝에 이렇게 제안했다. “북한의 나쁜 것만 보려고 하지 말고 좋은 부분도 보시면서 칭찬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갑시다.” 그러자 청중 중 한 사람이 곧장 손을 들고서 질문을 했다. “북한의 좋은 점이 있다고요? 그런 것이 있다면 단 하나라도 꼽아보세요!” 나는 곧장 이렇게 답변했다. “왜 없겠습니까? 대동강에서는 물고기를 잡아 그 자리에서 회를 떠 먹을 수 있습니다. 저렇게 오염된 한강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까?”
북한은 나에게 ‘구호의 나라’라는 첫인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북한의 거리를 거닐면 ‘세상에 부럼 없어라’, ‘지상낙원’, ‘일심단결’, ‘일당백’ 등등의 구호를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 방문을 마치고 찾은 서울에서도 곳곳에 수많은 구호가 걸려 있는 모습을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왜 그럴까? 이 질문은 지금도 나에게 계속되고 있다.
북한을 방문했던 우리 일행은 미국에 돌아와서 <북한 방문기>(Journey to North Korea: Personal Perceptions, 1983)를 펴냈다. 이 책은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북한기행>(한울, 1986)으로 펴냈다. 책 제목이 암시하듯 우리 일행의 북한 방문 경험을 살려서 각자 논문을 한편씩 작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행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관심이 있었던 주체사상을 주제로 논문을 작성해서 수록했다.
박한식 교수는 1983년 방북 일행 6명과 함께 미국 펴낸 <저니 투 노스코리아>(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에 ‘주체사상’ 논문을 썼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1986년 박한식·양성철 교수 편저로 나온 한국어판 <북한기행>(한울)의 표지.
사실 나는 1981년 북한 방문을 학술여행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우리를 초청한 해외동포원호회의 ‘안배’에 따라 행동해야만 했다. 북한에서 ‘안배’란 초청기관에서 작성한 방문 일정을 말한다. 따라서 내가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었던 학자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다만 그 ‘안배’에 따라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했던 것이 나에겐 큰 위안이 되었다. 그곳의 교수들과 학술적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나는 특히 김일성대 도서관에 가보고 싶었다. 도서관에 소장된 책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 중 하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체사상 관련 책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북한을 방문한 1981년은 1948년 건국 이후 30여년이 지난 때이다. 그런데도 김일성대에서 마르크스의 주저인 <자본론>을 발견할 수 없다면 북한의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서 ‘길을 찾아서’ 22회에서 북한 사회주의를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는데, 하나는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에 따른 분석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로 포착할 수 없는 북한 특유의 역사적 맥락에서 분석한 것이었다. 더 이상 <자본론>을 읽지 않는다면, 북한 특유의 역사적 맥락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교는 북한 정부 수립보다 2년 앞선 1946년 설립된 최초이자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사진은 김일성대 누리집에 나와 있는 본관이자 전자도서관의 최근 전경.
또한 1981년 현재 김일성대 도서관에 주체사상 관련 책들이 많이 소장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나에겐 많은 것을 암시해 주었다. 물론 도서관에 주체사상의 연구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로작’(김일성 어록)은 아주 많았다. 그러나 그런 자료를 활용해서 주체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서적들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주체사상 연구서가 많지 않다는 것이 곧 주체의 현실이 빈약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때 이미 북한은 주체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북한 사회를 전반적으로 규율하는 이념이 주체사상이었다. 예컨대 북한 정치는 자주를 요체로 삼는 ‘주체정치’로 운영되고, 북한 경제는 자립을 요체로 삼는 ‘주체경제’로 운영되었다. 옥류관이나 인민대학습당 등에서 전형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주체건축도 있다. 주체건축은 기와지붕에 서양식 내부 시설을 갖춘 특징을 보인다. 외국악기와 전통악기의 조화로 연주되는 주체음악, 몇 가지 유형으로 한정된 주체헤어스타일, 하체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상체를 주로 움직이는 주체춤 등도 있다. 주체사상에서 하체를 많이 움직이는 춤은 상스럽게 보인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1981년 현재 주체사상의 연구 수준은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주체사상은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 등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정치적 이념의 요건을 갖추려면 분배의 정의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 있어야 하고, 종교적 신념의 요건을 갖추려면 내세관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 있어야 하는데, 주체사상에서는 그런 요건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주체사상의 이론적 연구와 주체적 현실 간의 커다란 간극을 목격하면서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한 주체사상 연구가 북한에서 꾸준히 진행되리라고 전망했다.
미국에 돌아온 나 역시 주체사상을 계속 연구하고 싶었다. 북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을 개념적으로 포착해야만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당시 내가 아는 주체사상의 대표적 연구자는 황장엽(주체사상연구소 소장)이었다. 그래서 황장엽에게 연락을 취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황장엽에게 직접 연락을 할 방법은 없었다. 난감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갑자기 나의 머릿속에서 중국이 떠올랐다. 만주에서 태어난 덕분에 중국에 거주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지금도 만주에는 친척들이 살고 있다. 아하! 중국에 있는 친구들을 통하면 북한에 편지를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중국은 북한과 국교를 수립했기 때문에 서신 왕래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나는 편지를 써서 중국에 있는 친구에게 부쳤다. 그러면 그 친구는 내 편지를 새 봉투에 담아서 다시 황장엽에게 부쳤다. 어렵게 편지를 부친 나는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오질 않았다. 나는 다시 편지를 써서 부쳤다. 그래도 답장이 오질 않았다. 그처럼 메아리 없는 편지를 쓰면서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박한식 교수는 1970~80년대 김일성(왼쪽) 주석의 최측근이자 실세였던 황장엽(오른쪽) 주체사상연구소장에게 계속 편지를 보낸 끝에 1990년부터 조선아태평화위 초청을 받아 정기적으로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은 내게 특별한 해로 기억된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북한에서 주체사상연구소 산하에 주체과학원이 건립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핵 위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체과학원 건립 소식을 듣고서 마침내 주체사상의 체계적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북핵 위기가 조성되는 분위기를 관찰하면서 나의 관심은 주체사상 연구로부터 한반도 전쟁 방지 쪽으로 급격하게 전환되었다. 내가 그토록 처절하게 체험한 한국전쟁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북한을 더욱 방문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1987년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건립된 주체사상연구소 산하 주체과학원의 전경. 건립자인 황장엽이 97년 망명한 이후 폐쇄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평화문제연구소 제공
1990년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 마침내 도착했다.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에서 나를 초청한 것이다. 아태평화위는 북한에서 한국, 미국, 일본 등과 같이 국교를 맺지 않은 나라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설립한 비정부기구(NGO)이다. 그때부터 나는 북한을 적극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1990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2회꼴로 북한을 방문했다. 나는 아태의 고위 관계자들과 꾸준히 만나면서 주로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런 노력의 결실 중 하나가 ‘트랙(TRACK) Ⅱ’의 탄생이었다. 나는 북한, 미국 그리고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내가 재직 중인 조지아대학에 초빙해서 한반도 평화 방안을 논의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협의체를 결성해서 운영했다. 또한 주체과학원을 방문해서 그곳의 주체사상 연구에 참여하거나 관찰하면서 나의 주체사상 연구를 심화시켰다. 북한을 방문해서 활동한 내용에 관해서는 앞으로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박 교수는 81년 방북 때 평양 시내 곳곳에서 ‘주체사상’을 강조하는 선전 구호와 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오른쪽 맨 위 사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26627.html#csidxd9d6d1e80da1ab9ba60b187afc620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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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23회 북한에 대한 첫인상
1981년 7월 북한 해외동포원호회의 초청으로 처음 북한을 방문한 재미 한국인 학자 6명 일행이 평양시 대성구역 용남동에 있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해 교수들과 토론을 하고 도서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뒷줄 오른쪽 둘째 양성철, 다섯째 박한식, 여섯째 김종익, 아홉째 길영환, 앞줄 가운데 고병철, 맨 오른쪽 이채진 교수 등이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1981년 북 해외동포원호회 ‘문호 개방’
그해 7월 재미동포 학자 6명과 평양에
물류를 클릭하다 첼로 스퀘어
결혼 잔치·대동강변 연인들 데이트…
“똑같은 사람들 보고 ‘반공 세뇌’ 와르르”
브루스 커밍스보다 좋은 승용차 제공
“우리 민족은 우수하니까 달리 대우”
서울 호텔 ‘외국 손님 우대’와 대조적
김일성대 방문해 교수들 만나 토론도
“도서관 마르크스 ‘자본론’ 없어 의아”
‘주체사상’ 저술은 빈약 ‘어록’만 다양
미국서 83년 일행과 ‘북한 방문기’ 펴내
86년 9명 공저 한국어판 ‘북한기행’으로
중국 지인 통해 황장엽에 편지 ‘무답’
1987년 주체과학원 건립에 더 ‘궁금’
1990년 조선아태평화위에서 초청장
2015년까지 매해 2회꼴로 ‘방북 토론’
나는 자가진단한 나의 ‘평화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남북한 평화와 통일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행태주의가 지배하는 미국의 사회과학이론으로는 북한의 현실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간주하면서 온갖 편견을 끝없이 양산하는 여론의 풍토(climate of opinion)에서 북한을 공정하게 이해하는 것 또한 대단히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북한에 가서 그곳의 현실을 직접 관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북한을 방문해서 기행문이나 여행기를 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북한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서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학술적인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북한을 방문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길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북한은 국교를 수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감했다. 그런데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북한은 1981년 문호를 개방해서 국외 학자들을 초빙하는 사업을 벌였다. 북한의 해외동포원호회 허정숙 위원장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포 학자 6명이 그해 7월 방북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나도 그곳에 낄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우리 일행은 고병철(일리노이대)·길영환(아이오와주립대)·김종익(웨스트미시간대)·양성철(켄터키대)·이채진(캘리포니아주립대) 그리고 나(조지아대)였다.
1981년 박한식 교수 일행의 방북을 초청한 해외동포원호회 허정숙(맨오른쪽) 부위원장이 1985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적십자회담 때 조국평화통일위 부위원장 자격으로 이영덕(가운데) 남쪽 수석대표, 여연구(맨왼쪽)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서기국장 등과 건배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오랫동안 갈망했던 북한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아하! 여기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구나! 우리처럼 자녀의 학교 성적이 좋으면 마을 사람들을 초빙해서 한턱내고, 결혼식 때는 집에서 잔치를 열고, 밤이 되면 대동강변에서 젊은 남녀 쌍쌍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한국과 미국에서 살면서 수십년 동안 북한은 악마들이 사는 곳으로 배웠다. 머리에 뿔이 달린 그 악마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로 주입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일상 현실을 목격하는 순간 나를 세뇌시킨 허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박한식 교수는 1981년 여름 방문한 북한의 첫 인상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표현했다. 사진은 81년 주체탑이 건너다 보이는 대동강변에서 일상을 즐기고 있는 평양 시민들의 모습을 일본 사진작가 구보다 히로지가 찍은 것이다.
해외동포원호회는 우리 일행을 대단히 융숭하게 대접해 주었다. 예컨대 우리 일행에게는 개인별로 벤츠 승용차가 지급되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와 다른 경로로 북한을 방문한 브루스 커밍스에게는 볼보 승용차가 지급되었다. 나는 허정숙에게 그 까닭을 물어봤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민족은 특별히 우수한 민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 대우를 달리해야 합니다!”
허정숙의 답변은 내가 한국에서 접한 답변과 극히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때 북한 방문 일정을 마치고 나는 서울로 건너와 시청 앞 플라자호텔에서 묵게 되었다. 그런데 호텔 안내원은 나에게 시내 경치가 보이지 않는 방을 안내했다. 그래서 이왕이면 시내 경치가 보이는 방을 사용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내원은 이렇게 답변했다. “시내 경치가 보이는 방은 외국 손님들 몫으로 남겨둡니다. 그냥 이 방을 쓰시지요.”
북한은 1981년 해외동포원호회를 통해 재미 동포 한인 학자들만이 아니라 브루스 커밍스 교수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도 초청했다. 사진은 80년대 여러차례 북한을 방문한 커밍스(맨왼쪽) 교수가 평양시 중구역의 인민문화궁전이 건너다 보이는 대동강변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다.
북한의 보통강 호텔에서 체험했던 추억도 잊을 수가 없다. 호텔 식당에서는 24시간 전에 요리 주문을 받았다. 무슨 메뉴가 있느냐고 물으니 뭐든지 주문하라고 그랬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어려운 메뉴를 주문하고 싶었다. “혹시 회가 있습니까?” 그러자 곧장 답변했다. “물론 있습니다!”
이튿날 내 식탁에는 대동강에서 잡은 커다란 잉어가 통째로 접시에 놓여 있었다. 잉어는 입을 뻐끔뻐끔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를 놀려주려는 속셈일까? 그러나 다시 보니 회를 정교하게 뜬 다음 잉어 껍질을 살짝 덮어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세계 여러 나라의 어떤 식당에서도 그런 식으로 회를 뜬 사례를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싱싱한 회를 먹는 내내 감탄이 절로 나왔다.
198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박한식 교수 일행은 평양시 평천구역의 1급 호텔인 보통강여관에서 묵었다. 사진은 <조선향토대백과>에 실린 1983년 보통강여관의 무도장 모습. 평화문제연구소 제공
그때 북한 방문 일정을 마치고 서울에 와서 통일원 장관 홍성철의 주선으로 이북5도 도민회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약 300여명의 청중 앞에서 북한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다양하게 소개했다. 나는 강연 끝에 이렇게 제안했다. “북한의 나쁜 것만 보려고 하지 말고 좋은 부분도 보시면서 칭찬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갑시다.” 그러자 청중 중 한 사람이 곧장 손을 들고서 질문을 했다. “북한의 좋은 점이 있다고요? 그런 것이 있다면 단 하나라도 꼽아보세요!” 나는 곧장 이렇게 답변했다. “왜 없겠습니까? 대동강에서는 물고기를 잡아 그 자리에서 회를 떠 먹을 수 있습니다. 저렇게 오염된 한강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까?”
북한은 나에게 ‘구호의 나라’라는 첫인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북한의 거리를 거닐면 ‘세상에 부럼 없어라’, ‘지상낙원’, ‘일심단결’, ‘일당백’ 등등의 구호를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 방문을 마치고 찾은 서울에서도 곳곳에 수많은 구호가 걸려 있는 모습을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왜 그럴까? 이 질문은 지금도 나에게 계속되고 있다.
북한을 방문했던 우리 일행은 미국에 돌아와서 <북한 방문기>(Journey to North Korea: Personal Perceptions, 1983)를 펴냈다. 이 책은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북한기행>(한울, 1986)으로 펴냈다. 책 제목이 암시하듯 우리 일행의 북한 방문 경험을 살려서 각자 논문을 한편씩 작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행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관심이 있었던 주체사상을 주제로 논문을 작성해서 수록했다.
박한식 교수는 1983년 방북 일행 6명과 함께 미국 펴낸 <저니 투 노스코리아>(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에 ‘주체사상’ 논문을 썼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1986년 박한식·양성철 교수 편저로 나온 한국어판 <북한기행>(한울)의 표지.
사실 나는 1981년 북한 방문을 학술여행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우리를 초청한 해외동포원호회의 ‘안배’에 따라 행동해야만 했다. 북한에서 ‘안배’란 초청기관에서 작성한 방문 일정을 말한다. 따라서 내가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었던 학자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다만 그 ‘안배’에 따라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했던 것이 나에겐 큰 위안이 되었다. 그곳의 교수들과 학술적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나는 특히 김일성대 도서관에 가보고 싶었다. 도서관에 소장된 책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 중 하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체사상 관련 책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북한을 방문한 1981년은 1948년 건국 이후 30여년이 지난 때이다. 그런데도 김일성대에서 마르크스의 주저인 <자본론>을 발견할 수 없다면 북한의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서 ‘길을 찾아서’ 22회에서 북한 사회주의를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는데, 하나는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에 따른 분석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로 포착할 수 없는 북한 특유의 역사적 맥락에서 분석한 것이었다. 더 이상 <자본론>을 읽지 않는다면, 북한 특유의 역사적 맥락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교는 북한 정부 수립보다 2년 앞선 1946년 설립된 최초이자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사진은 김일성대 누리집에 나와 있는 본관이자 전자도서관의 최근 전경.
또한 1981년 현재 김일성대 도서관에 주체사상 관련 책들이 많이 소장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나에겐 많은 것을 암시해 주었다. 물론 도서관에 주체사상의 연구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로작’(김일성 어록)은 아주 많았다. 그러나 그런 자료를 활용해서 주체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서적들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주체사상 연구서가 많지 않다는 것이 곧 주체의 현실이 빈약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때 이미 북한은 주체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북한 사회를 전반적으로 규율하는 이념이 주체사상이었다. 예컨대 북한 정치는 자주를 요체로 삼는 ‘주체정치’로 운영되고, 북한 경제는 자립을 요체로 삼는 ‘주체경제’로 운영되었다. 옥류관이나 인민대학습당 등에서 전형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주체건축도 있다. 주체건축은 기와지붕에 서양식 내부 시설을 갖춘 특징을 보인다. 외국악기와 전통악기의 조화로 연주되는 주체음악, 몇 가지 유형으로 한정된 주체헤어스타일, 하체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상체를 주로 움직이는 주체춤 등도 있다. 주체사상에서 하체를 많이 움직이는 춤은 상스럽게 보인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1981년 현재 주체사상의 연구 수준은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주체사상은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 등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정치적 이념의 요건을 갖추려면 분배의 정의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 있어야 하고, 종교적 신념의 요건을 갖추려면 내세관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 있어야 하는데, 주체사상에서는 그런 요건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주체사상의 이론적 연구와 주체적 현실 간의 커다란 간극을 목격하면서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한 주체사상 연구가 북한에서 꾸준히 진행되리라고 전망했다.
미국에 돌아온 나 역시 주체사상을 계속 연구하고 싶었다. 북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을 개념적으로 포착해야만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당시 내가 아는 주체사상의 대표적 연구자는 황장엽(주체사상연구소 소장)이었다. 그래서 황장엽에게 연락을 취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황장엽에게 직접 연락을 할 방법은 없었다. 난감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갑자기 나의 머릿속에서 중국이 떠올랐다. 만주에서 태어난 덕분에 중국에 거주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지금도 만주에는 친척들이 살고 있다. 아하! 중국에 있는 친구들을 통하면 북한에 편지를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중국은 북한과 국교를 수립했기 때문에 서신 왕래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나는 편지를 써서 중국에 있는 친구에게 부쳤다. 그러면 그 친구는 내 편지를 새 봉투에 담아서 다시 황장엽에게 부쳤다. 어렵게 편지를 부친 나는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오질 않았다. 나는 다시 편지를 써서 부쳤다. 그래도 답장이 오질 않았다. 그처럼 메아리 없는 편지를 쓰면서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박한식 교수는 1970~80년대 김일성(왼쪽) 주석의 최측근이자 실세였던 황장엽(오른쪽) 주체사상연구소장에게 계속 편지를 보낸 끝에 1990년부터 조선아태평화위 초청을 받아 정기적으로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은 내게 특별한 해로 기억된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북한에서 주체사상연구소 산하에 주체과학원이 건립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핵 위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체과학원 건립 소식을 듣고서 마침내 주체사상의 체계적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북핵 위기가 조성되는 분위기를 관찰하면서 나의 관심은 주체사상 연구로부터 한반도 전쟁 방지 쪽으로 급격하게 전환되었다. 내가 그토록 처절하게 체험한 한국전쟁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북한을 더욱 방문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1987년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건립된 주체사상연구소 산하 주체과학원의 전경. 건립자인 황장엽이 97년 망명한 이후 폐쇄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평화문제연구소 제공
1990년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 마침내 도착했다.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에서 나를 초청한 것이다. 아태평화위는 북한에서 한국, 미국, 일본 등과 같이 국교를 맺지 않은 나라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설립한 비정부기구(NGO)이다. 그때부터 나는 북한을 적극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1990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2회꼴로 북한을 방문했다. 나는 아태의 고위 관계자들과 꾸준히 만나면서 주로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런 노력의 결실 중 하나가 ‘트랙(TRACK) Ⅱ’의 탄생이었다. 나는 북한, 미국 그리고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내가 재직 중인 조지아대학에 초빙해서 한반도 평화 방안을 논의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협의체를 결성해서 운영했다. 또한 주체과학원을 방문해서 그곳의 주체사상 연구에 참여하거나 관찰하면서 나의 주체사상 연구를 심화시켰다. 북한을 방문해서 활동한 내용에 관해서는 앞으로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박 교수는 81년 방북 때 평양 시내 곳곳에서 ‘주체사상’을 강조하는 선전 구호와 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오른쪽 맨 위 사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26627.html#csidxd9d6d1e80da1ab9ba60b187afc620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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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왕정·일제식민·분단·전쟁·냉전…
역사적 유산은 남북 모두 마찬가지
중소분쟁·안보위협·체제경쟁 등
도전 맞서 북한 특유 사회주의 건설
‘주체사상·수령론·북핵·통일론’
생존 투쟁 속 강력한 민족주의 탄생
고려 ‘대 몽골’ 외교 닮은 ‘벼랑끝전술’
‘반일감정 지나쳐 손해 우려’ 묻자
1980년대 ‘2인자’ 오진우 강한 반론
“내 누이도 위안부 피해…용서 못해”
“고구려·고려 상무정신 계승하고
조선의 사대주의·당쟁 유산 타파”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교본
라디오에서 매일 낭독해 ‘인민교육’
박한식 교수는 북한의 사회주의에 대해 한반도의 역사적 유산과 한국전쟁 이래 처한 특수한 여건 속에서 탄생한 독특한 체제라고 설명한다. 특히 주체사상과 강력한 민족주의를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는다. 북한은 1990년대 들어 단군조선, 고구려, 고려 등의 계승을 강조하며 역사 유적들을 대대적으로 단장했다. 북한은 1993년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외곽의 대박산 동남쪽에서 5천년 전 단군 유골을 발견했다며 단군릉을 개건하고 기념우표를 발간하는 등 대내외에 선전해왔다. 사진 <연합뉴스>
박한식 교수는 북한의 사회주의에 대해 한반도의 역사적 유산과 한국전쟁 이래 처한 특수한 여건 속에서 탄생한 독특한 체제라고 설명한다. 특히 주체사상과 강력한 민족주의를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는다. 북한은 1990년대 들어 단군조선, 고구려, 고려 등의 계승을 강조하며 역사 유적들을 대대적으로 단장했다. 북한은 1993년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외곽의 대박산 동남쪽에서 5천년 전 단군 유골을 발견했다며 단군릉을 개건하고 기념우표를 발간하는 등 대내외에 선전해왔다. 사진 <연합뉴스>
길을 찾아서-22회 북한 사회주의의 이상과 현실
길을 찾아서-22회 북한 사회주의의 이상과 현실
나는 북한의 사회주의 역시 한국의 민주주의를 고찰했던 방식(‘길을 찾아서’ 20회 참조)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먼저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참조하면서 북한의 사회주의에서 실현된 사회주의의 보편성을 고찰할 것이다. 이어서 북한이 그 자체에 부과된 역사적 유산을 사회주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모습에 주목하면서 오직 북한에서만 성취된 사회주의의 특수성을 살펴볼 것이다. 요컨대 북한의 사회주의에서 실현된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고찰함으로써 북한의 사회주의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안목을 마련해 보고자 한다.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에 비춰볼 때, 북한에서 떠안은 역사적 유산은 한국이 떠안은 역사적 유산과 동일한 것이었다. 북한 역시 한국처럼 왕정, 일제 식민지, 분단, 한국전쟁, 냉전 등의 유산을 극복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은 한국과 달리 중소(중국-소련)분쟁이 야기하는 국제정치적 긴장, 주한미군과 한-미 동맹이 강제하는 안보위협, 남북한 체제경쟁 등을 추가로 해결해야만 했다. 북한은 이러한 일련의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북한 특유의 사회주의를 건설했다.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의 보편적 이념이 북한이 처한 특수한 여건이라는 ‘매개변수’(intervening variables)를 경과하는 가운데 오직 북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사회주의를 탄생시켰다.
북한은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라 사유재산을 철폐하고 집단소유제를 채택함으로써 평등을 실현하고자 한다. 북한의 집단소유제는 중국의 인민공사를 참조하면서 창조한 협동농장으로 실천된다.
북한은 소유권이 없기 때문의 부의 축적이 불가능하고, 소득도 비교적 평등하게 분포되어 있다. 예컨대 나는 북한의 대학, 병원, 정부기관 등을 방문해서 구성원의 소득 차이를 관찰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최상위층과 최하위층 사이의 소득 차이는 두 배를 넘지 않았다. 나는 사회주의 국가를 적지 않게 방문했지만 북한처럼 소득이 평등하게 분포된 사례는 접하지 못했다.
북한에서는 아파트를 분양할 때도 철저하게 ‘필요에 따라’(by needs) 분양하게 되어 있다. 식구가 많은 가족에게는 방이 많은 아파트를 분양하고, 식구가 적은 가족에게는 방이 적은 아파트를 분양한다. 사회적 신분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큰 아파트를 분양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작은 아파트를 분양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을 철폐하면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투쟁이 종식되고, 계급투쟁이 끝나면 평화로운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으로 예측했다. 마르크스의 유토피아 사상은 북한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북한의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 역시 계급투쟁이 종식된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중국의 사회주의로부터 인민 개념을 도입했다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모택동)은 ‘100년 국치’를 청산하고 중국의 정치혁명을 완수함으로써 인민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고자 했다. 김일성 역시 일제 식민지, 미국 제국주의 등으로부터 해방된 인민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고자 했다. 김일성의 그러한 의지는 예컨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라는 북한의 정식 국호에서 뚜렷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북한은 특히 중국의 공산당을 참조하면서 노동당을 만들었다. 노동당기를 보면 망치·붓·낫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인민의 구성원인 노동자·지식인·농민을 각각 상징한다. 노동당기는 북한 정치의 메카인 노동당이 당원의 것이 아니라 인민의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 올 때면 종종 듣는 질문이 있다. “북한의 실세가 누구입니까?” 그럴 때마다 좀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볼 때, 북한에서는 실세로 간주할 수 있는 특정 개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은 노동당에서 집단적 토론을 거쳐 이뤄진다. 많은 사람들은 김정은이 독단적으로 결정한다고 얘기하지만 노동당의 성격을 전혀 모르고서 하는 얘기일 뿐이다.
북한의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격 또한 지녔는데, 주체사상, 수령론, 강력한 민족주의, 북핵, 통일론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요소들은 모두 북한이 처한 특수한 여건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주체사상’은 북한 사람들의 사회적 행위를 전반적으로 규율하는 ‘삶의 운영원리’(Lebensführung)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방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었고, 북한이 처한 여건에 따라 꾸준히 진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주체사상과 그곳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수령론’은 앞으로 ‘길을 찾아서’에서 상세하게 논의할 예정이다.
북한의 역사는 한마디로 국제정치적 도전에 응전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일제 식민지, 분단, 한국전쟁, 냉전, 중소분쟁, 미국 패권, 남북한 체제경쟁 등이 야기하는 생존 위협에 응전하는 역사를 살아야만 했다. 따라서 북한은 가혹한 국제정치적 투쟁의 역사를 걷는 가운데 강력한 민족주의를 탄생시켰다.
북한의 민족주의는 특히 고구려, 고려 등의 상무정신을 계승하고 조선의 사대주의와 당쟁 등의 유산을 철저하게 타파하는 특징을 보인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역대로 사대주의를 일삼아오던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때에조차 큰 나라들의 조종 밑에 당파싸움만 하였다. 그러다 보니 오늘 친일파가 득세하면 일본 군대가 왕궁을 지키고 내일 친로파가 득세하면 러시아 군대가 임금을 호위하고 모레 친청파가 득세하면 청나라 군대가 대궐의 파수를 서는 판이었다. … 왕궁을 지키는 것도 남의 나라 군대에 맡겼으니 이 나라는 누가 지켜주고 돌보겠는가.”
북한은 1992년 김일성 주석의 팔순 때부터 98년까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전 8권·조선로동당출판사)를 발간했다. 박한식 교수는 북한 방문 때 매일 라디오에서 회고록을 낭송하는 방송을 들었다고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북한은 1992년 김일성 주석의 팔순 때부터 98년까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전 8권·조선로동당출판사)를 발간했다. 박한식 교수는 북한 방문 때 매일 라디오에서 회고록을 낭송하는 방송을 들었다고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나는 1990년대 중반 평양을 방문했을 때 라디오에서 <세기와 더불어>를 읽어주는 소리를 항시 들을 수 있었다. 그때는 북한에서 티브이가 집집마다 널리 보급되지 않았을 때였다. 라디오에서는 8권으로 구성된 <세기와 더불어> 전권을 1년 내내 읽어주었다. 북한은 그런 방송교육을 통해 북한 인민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북한의 민족주의는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운동의 와중에서 반일사상의 형태로 잉태되었다. 북한의 영화 <피바다>를 보면 북한이 절감하는 반일사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진우와 만나서 북한 사회의 현안 문제를 주제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였던 오진우는 김일성보다 2살 연상으로 5성 장군이었다. 그는 인민무력부장, 당 군사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낸 김일성의 ‘오른팔’이었다.
박한식 교수는 1976년부터 1995년까지 19년간 최장수 인민무력부장이자 김일성(오른쪽)·김정일 승계 공신인 오진우(왼쪽)와 대화를 통해 북한 지도부의 강한 반일감정과 민족주의를 확인했다. 사진은 2015년 오진우 20주기를 맞아 그의 충성심을 부각하는 북한의 소식을 전한 티브이 뉴스 화면 캡쳐. 연합뉴스
박한식 교수는 1976년부터 1995년까지 19년간 최장수 인민무력부장이자 김일성(오른쪽)·김정일 승계 공신인 오진우(왼쪽)와 대화를 통해 북한 지도부의 강한 반일감정과 민족주의를 확인했다. 사진은 2015년 오진우 20주기를 맞아 그의 충성심을 부각하는 북한의 소식을 전한 티브이 뉴스 화면 캡쳐. 연합뉴스
나는 이렇게 질문했다. “제가 북한에 와 보니 반일감정이 굉장히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나친 반일감정은 북한의 실리를 챙기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자 오진우는 이렇게 답변했다. “박 교수님은 직접 체험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의 누이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저의 누이들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고통을 체험한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저는 일본놈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는 훗날 오진우의 얘기가 노동당의 지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한식 교수는 북한의 대미 핵협상 전술인 ‘벼랑끝 외교’가 당대 최강국이었던 원나라(몽골)에 맞섰던 고려의 전통을 닮았다고 지적한다. 사진은 북한의 선전 포스터. 사진 <연합뉴스>
박한식 교수는 북한의 대미 핵협상 전술인 ‘벼랑끝 외교’가 당대 최강국이었던 원나라(몽골)에 맞섰던 고려의 전통을 닮았다고 지적한다. 사진은 북한의 선전 포스터. 사진 <연합뉴스>
고구려, 고려 등의 민족정신을 계승한 북한 민족주의는 대외정책 분야에서도 그대로 실천되었다. 북한은 중소분쟁의 와중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면서 국가이익을 최대한 챙겼다. 그런데 북한이 능란하게 구사한 등거리 외교는 고려의 양단외교(兩端外交) 전통, 즉 고려가 송과 거란 사이에서, 그리고 거란과 여진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면서 국가이익을 최대한 챙겼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뿐 아니다. 많은 학자들은 북한의 대미협상 방식을 ‘벼랑 끝 외교’(brinkmanship diplomacy)라고 부른다. 그런데 북한의 벼랑 끝 외교 역시 고려가 그 시대 세계 최강대국 원나라를 상대로 펼쳤던 벼랑 끝 외교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려는 팔만대장경을 조성해서 국력을 결집시키는 한편, 원나라를 상대로 협상과 항전을 반복하면서 국가를 끝까지 지켜냈다. 고구려가 역시 최강대국 수나라와 당나라를 상대로 결사항전을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이 강력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벼랑 끝 외교를 펼치는 모습에서 어떤 데자뷔가 느껴지지 않는가?
북한은 1993년 평양 인근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개건한 뒤 해마다 개천철 기념행사를 통해 대내외에 정통성을 선전해왔다. 사진은 2006년 10월3일 개천절 기념행사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북한은 1993년 평양 인근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개건한 뒤 해마다 개천철 기념행사를 통해 대내외에 정통성을 선전해왔다. 사진은 2006년 10월3일 개천절 기념행사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나는 북한의 다양한 유적지에서도 고구려와 고려에서 앙양한 민족정신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예컨대 북한의 역사박물관에 가면 주로 고구려와 고려에서 성취한 민족적 긍지를 실증적으로 예증하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에 가서는 태조 왕건의 거대한 왕릉을 목격할 수 있었다. 평양 근처에 위치한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왕릉은 더욱 거대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북한의 민족주의를 이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 또 하나 있다. 북한은 자국의 정통성의 기원을 ‘단군조선’(檀君朝鮮)에 둔다. 단군조선은 주나라 무왕이 제후국으로 봉했던 ‘기자조선’(箕子朝鮮)과 달리 주나라의 봉건질서 밖에서 독자적으로 성립한 국가다. 북한에서 거대하게 조성한 단군릉은 북한의 자주적 민족정신을 상징한다. 나는 단군릉을 조성하기 이전과 이후 두 차례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북한을 방문할 때 머물던 초대소의 창문에서 단군릉의 거대한 모습을 조망하기도 했다. 북한은 단군릉을 조성한 뒤 대규모 학술회의를 개최하면서 나를 초대해 주었다. 나는 학술회의 현장에서 북한의 뜨거운 민족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2015년 10월15일 개성에서 열린 ‘만월대 출토유물 남북공동 전시회’ 개막식 겸 학술회의 때 북한의 안내원이 남쪽 참가자들에게 왕건릉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2015년 10월15일 개성에서 열린 ‘만월대 출토유물 남북공동 전시회’ 개막식 겸 학술회의 때 북한의 안내원이 남쪽 참가자들에게 왕건릉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 기슭에 있는 고려 태조 왕건릉은 북한의 국보이자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017년 11월께 진천규 통일TV 대표가 찍은 사진이다.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 기슭에 있는 고려 태조 왕건릉은 북한의 국보이자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017년 11월께 진천규 통일TV 대표가 찍은 사진이다.
북한 핵무기 개발 역시 북한의 민족주의를 빼놓고서 설명할 수 없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약 70년 동안 미국의 핵 폭격 위협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지구상의 유일한 국가다. 그런데 북한의 강력한 민족주의는 외세의 위협이 강할수록 더욱 강하게 반발하는 특성을 보인다. 이런 특성 역시 북한의 민족주의가 계승한 고구려의 상무정신 등을 상기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자신이 결사적으로 항전했던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미국의 핵 폭격을 받으면서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서 핵무기 개발을 결심했다. 그때 히로시마에서 군수산업에 종사하다가 희생된 노동자의 약 40%가 조선인 강제징용자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그런 결심을 더욱 굳혔다. 김일성이 준비한 핵무기 개발은 선군사상을 표방한 김정일이 거의 완성시켰고, 선대의 유업을 이어받은 김정은이 최종적으로 완성시켰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목적은 한마디로 미국의 핵 폭격 위협을 ‘억지’(deterrence)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북한에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하라고 요구하지만 미국의 그런 요구는 국제정치적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국제정치의 세계에서 핵무기의 존재 이유는 ‘상호억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김정은의 핵무기 포기 의지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북한이 김정은 1인 독재체제가 아니라 노동당의 집단적 의사결정 체제라는 점을 고려할 때 트럼프의 얘기는 어불성설일 뿐이다. 물론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다고 얘기했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무조건’ 포기하겠다는 얘기를 한 적은 없다.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해소, 평화조약 체결, 북-미 수교 등과 같은 조처를 통해서 북한의 안전보장이 확립되지 않는 한 북핵의 부분적 포기조차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북한의 강력한 민족주의는 통일을 선택이 아니라 당위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다’, ‘통일 대신 평화를 우선시해야 한다’ 등등의 주장을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학교나 정부 등에서 주요 행사를 할 때 남한에서 작사하고 작곡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부른다. 북한에서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또한 북한의 공식적 통일방안은 6·15 선언에서 천명했던 연방제 통일이다. 연방은 평화를 전제한 개념이다. 따라서 북한에서 추구하는 연방제 통일은 무력통일을 거부한 개념이다.
그러나 북한은 앞에서 검토한 북한식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만 했는데, 국제적 고립과 경제적 궁핍이 그것이다. 북한은 지난해 12월28일부터 31일까지 개최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5차 전원회의’에서 그 두 가지 난관을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나 역시 현재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다고 본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24191.html#csidxddb0679d2afc4219004cfc8c7b77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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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지난해 구술 인터뷰 방식 책 출간
‘남-북 갈라놓는 12가지 편견’ 정리
6개월만에 1만5천부 판매 ‘예상밖’
“북한에 대한 ‘편견 극복’ 갈증 확인”
‘사회주의 이데알튀푸스’ 이해부터
마르크스 ‘19세기 유럽 자본주의’ 전제
“빈부격차·계급 갈등·불평등 사회…
부르주아 맞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박한식 교수는 북한 사회주의의 독특한 성격을 이해하려면 먼저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으로 이어진 사회주의이론의 기본 이념형(이데알튀푸스)을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위탁을 받아 1848년 엥겔스와 함께 출간한 <공산당 선언>에서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주장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박한식 교수는 북한 사회주의의 독특한 성격을 이해하려면 먼저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으로 이어진 사회주의이론의 기본 이념형(이데알튀푸스)을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위탁을 받아 1848년 엥겔스와 함께 출간한 <공산당 선언>에서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주장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길을 찾아서-21회 사회주의 이데알튀프스
길을 찾아서-21회 사회주의 이데알튀프스
나는 지난해 4월 <선을 넘어 생각한다: 남과 북을 갈라놓는 12가지 편견에 관하여>(부키)를 펴냈다. 우리의 생각을 옥죄는 갖가지 선을 넘어서서 북한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자는 제안을 담은 책이다. 그런데 약 6개월 만에 1만5천부가량 팔렸다는 출판사의 얘기를 전해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안타깝게 생각했던 문제를 인터뷰 형식으로 구술해 정리한 글인데 그토록 큰 호응을 받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만큼 독자들 사이에 북한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싶은 갈증이 높다는 사실을 예증하는 증표가 아닐까? 그런 갈증이 내가 평생 갈구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을 여는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독자들의 과분한 관심에 답례하는 의미도 담아서, 이 기회에 <선을 넘어 생각한다>를 쓰게 된 이론적 배경을 소개하고자 한다.
박한식(맨 왼쪽) 교수는 한국에서는 처음 나온 저술인 <선을 넘어 생각한다>(강국진 집필·오른쪽 둘째)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구술했다. 출간 한달 뒤인 2018년 5월 국회의원회관에서 ‘평화통일연대포럼’에 이어 출판기념회와 대담을 하고 있다. 사진 유코리아뉴스 제공
박한식(맨 왼쪽) 교수는 한국에서는 처음 나온 저술인 <선을 넘어 생각한다>(강국진 집필·오른쪽 둘째)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구술했다. 출간 한달 뒤인 2018년 5월 국회의원회관에서 ‘평화통일연대포럼’에 이어 출판기념회와 대담을 하고 있다. 사진 유코리아뉴스 제공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다. 따라서 북한을 이해하려면 먼저 사회주의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사회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을 액면 그대로 실현한 국가가 아니다. 북한의 사회주의는 북한의 역사에서 제기된 도전에 응전하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해했던 방식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 레닌의 소련 사회주의, 마오쩌둥의 중국 사회주의 등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구성할 수 있다. 북한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각자가 창출한 사회주의를 선별적으로 수용하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1818년 태어나서 1883년에 사망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계몽주의를 배경으로 탄생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유럽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자본주의는 개인의 소유권을 요체로 삼는다. 그러다 보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빈부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개인은 부르주아 계급에 편입되고,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개인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편입되면서 계급갈등이 심화되는 불평등 사회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생래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가 볼 때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원천은 개인의 소유권이었다. 따라서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사유재산을 철폐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개인의 소유권을 집단소유권으로 대체하자는 것이다. 또한 그는 집단소유가 이뤄지면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분배가 이뤄짐으로써 이른바 ‘분배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는 필요에 의한 분배가 곧 정의로운 분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린 현실에서 사유재산 철폐를 통한 평등사회 실현은 자연스럽게 성취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었다. 그런 현실을 직시한 마르크스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파생된 부르주아 계급과의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승리해서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수적으로 우세한 프롤레타리아가 상대적으로 소수인 부르주아를 반드시 물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프롤레타리아의 필연적 승리를 확신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서 사유재산을 철폐할 수 있고, 사유재산을 철폐함으로써 계급이 부재한 사회를 만들 수 있으며, 계급이 부재하기 때문에 계급투쟁이 부재한 사회,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이 평등한 유토피아 또한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대안인 사회주의가 세계적 차원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가 엥겔스와 함께 저술한 <공산당선언>의 말미에서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역설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구상한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주의적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 그가 볼 때 종교란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인간은 이 세상 밖에서 존재하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었다. 이처럼 현세를 중시하는 마르크스가 볼 때 종교란 현세를 전도시킨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종교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가 된다고 역설했다.
마르크스가 특히 종교 비판에 역점을 두었던 까닭은 그의 유물사관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유물사관이란 한마디로 경제결정론이다. 그는 사회의 하부구조를 구성하는 경제가 사회의 상부구조를 구성하는 정치, 법률, 인간의 의식 등을 결정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하부구조의 경제적 소유관계를 변혁시키면 상부구조 전체의 변혁 또한 가능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런데 종교는 인간의 의식을 마비시킴으로써 상부구조의 변혁을 가장 강력하게 저지시키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게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회발전의 저해요소로 기능하는 종교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은 대부분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애초에 유럽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격렬한 투쟁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사회 계급투쟁 발생하지 않아
“중산층 등장…상호공생 관계 발전”
“기관총 출현 ‘다수민중 저항’ 제압”
레닌 ‘러시아혁명’ 전체주의로 변질
마오쩌둥 ‘인민·민족 사회주의’ 표방
유럽 사회에서 계급투쟁이 발생하지 않은 까닭은 한마디로 ‘중산층’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는 기술을 습득함으로써 이른바 산업역군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부르주아는 그런 프롤레타리아를 쉽게 해고할 수 없었다. 더욱이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부르주아에 집단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갖추기도 했다. 그러자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의 임금을 올려주면서 공장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전략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임금이 향상되자 중산층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소득의 여유가 생긴 중산층은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소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중산층이 시장에서 소비하는 상품은 부르주아가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이었다. 요컨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계급투쟁 대신 상호 공생하는 관계로 진화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기관총’의 등장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수적으로 우세한 프롤레타리아가 연대해서 부르주아와 싸운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으로 예견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보급된 기관총은 마르크스의 예견을 빗나가게 했다. 기관총을 소유한 소수의 부르주아가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쉽게 제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한식 교수는 유럽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의 하나로 다중살상무기인 ‘기관총의 출현’을 꼽는다. 사진은 1911년 미국인 아이작 루이스가 개발한 최초의 완전자동식 기관총. 사진 위키피디아 제공
박한식 교수는 유럽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의 하나로 다중살상무기인 ‘기관총의 출현’을 꼽는다. 사진은 1911년 미국인 아이작 루이스가 개발한 최초의 완전자동식 기관총. 사진 위키피디아 제공
마르크스의 이론은 유럽에서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러시아의 레닌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레닌은 먼저 마르크스의 이론을 러시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유럽에서 심화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가난한 농민이 다수인 농촌 사회였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파생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투쟁이 있을 수 없었고, 그처럼 계급투쟁이 없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자 레닌은 국가가 사회주의 혁명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권을 국가의 소유권(스테이트 오너십)으로 대체하는 혁신을 감행했다. 마르크스가 사적 소유권의 대안으로 제시한 집단소유권이 러시아의 농촌 현실에서 국가소유권으로 변용되었던 것이다. 레닌 자신은 국가의 수반으로 취임하면서 러시아 전체를 지배했다. 레닌이 문을 연 러시아의 전체주의는 스탈린에게 계승되면서 더욱 확대되고 심화되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대신 국가소유권을 혁명의 주체로 내걸고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의 수반이 되어 러시아 전체주의를 만들어냈다. 1919년 5월 레닌이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혁명에 가담한 군인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대신 국가소유권을 혁명의 주체로 내걸고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의 수반이 되어 러시아 전체주의를 만들어냈다. 1919년 5월 레닌이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혁명에 가담한 군인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중국의 사회주의는 마오쩌둥이 정착시켰다. 마오는 러시아에서 수입한 사회주의를 중국의 현실에 곧이곧대로 이식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러시아에서 수입한 사회주의와 중국의 지배적 현실 사이에서 드러난 커다란 간극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중국의 가난한 농촌의 현실에 주목했다. 그 시절 중국의 찢어지게 가난한 현실은 예컨대 펄 벅의 소설 <대지>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또한 마오는 이른바 ‘100년 국치’, 즉 아편전쟁 이후 무려 100여년에 걸쳐 서구 열강에 유린된 중국의 역사 현실에 주목했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국민군에 맞선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1949년 10월1일 베이징 천안문(톈안먼)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공산당의 최고 권력자가 된 그는 ‘인민·민족’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제공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국민군에 맞선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1949년 10월1일 베이징 천안문(톈안먼)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공산당의 최고 권력자가 된 그는 ‘인민·민족’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제공
마오쩌둥은 중국의 역사적 유산에서 제기된 도전에 슬기롭게 응전하기 위해서 중국적 사회주의를 창안했다. 그는 ‘100년 국치’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해서 ‘2단계 혁명론’을 제시했다. 첫번째 단계는 외세를 축출하는 것이고, 두번째 단계는 중국 내부의 혁명을 단행하는 것이다. ‘2단계 혁명론’을 통해 실현되는 마오의 사회주의는 대단히 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민족주의적 성격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인민’이라는 개념도 창안했다. 그는 중국 국적을 지닌 모든 사람들을 인민으로 정의했다. 따라서 자본가, 하층민, 농민, 소수민족 등등이 모두 인민에 속했다. 그가 중국의 국호를 ‘중화인민공화국’(PRC)으로 설정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에는 ‘100년 국치’의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고, 중국 내부의 정치혁명을 완수함으로써 인민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려는 마오의 강한 의지가 담겼다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 시대 중국에는 가난한 농민들만 존재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마르크스가 예견한 계급투쟁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기대할 수 없었다. 계급투쟁의 주역인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모두 성숙한 자본주의에서 파생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오는 소수의 지주들이 지배하는 농촌의 불평등 구조를 평등한 구조로 재편하고자 했다. 그래야만 빈곤에 허덕이는 대다수 농민의 삶을 구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마오에게 사유재산 철폐를 통해서 평등의 이념을 실현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마오는 국가소유제를 선택한 레닌과 달리 인민이 주역이 되는 집단소유제를 선택했다. 중국 사회주의가 다양한 규모의 인민공사를 매개로 실현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인민공사는 두 단계를 거쳐 발전했다. 처음에는 약 250여 농가로 구성된 집단농장으로 출발했다. 이후 인민공사는 1958년 시작된 ‘대약진운동’을 계기로 도시지역까지 망라하는 대규모 공사(코뮌)로 확대되었다. 개별 공사는 보통 수천 가구로 구성되었다. 도시 노동자까지 가세한 공사는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실천하는 주역이 되었다.
공사는 양두체제로 운영되었다. 두 지도자 중 한 명은 공사에서 선출했다. 그는 전문성을 갖춘 실력자였다. 또 한 명은 공산당에서 파견했다. 그는 확고한 당성(黨性)을 갖춘 인물이었다. 두 지도자 중 정치적 실권은 공산당에서 파견한 인물이 장악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산당에서 파견한 인물이 모든 일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었다. 만일 그가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한다면 공사의 구성원은 자신들의 불만을 자신들이 선출한 리더를 매개로 공산당에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중국 사회주의는 인민 사회주의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공산당에서 파견한 지도자만 있었을 뿐, 인민이 선출한 지도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 사회주의는 이런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참조하면서 자신들이 직면한 역사적 도전을 독자적으로 해결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정착되었다. 그 과정은 ‘길을 찾아서’ 다음 회에서 자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22550.html#csidx744beefac3b7017bf9a2cdca2f4bf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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