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싸움 자주 일어나는 중국
중앙일보
입력 2009.05.13
중국 사회에는 집단으로 벌이는 패싸움 전통이 뿌리 깊다. 맨 몸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무기까지 동원한다. 그래서 중국의 패싸움을 ‘계투(械鬪)’라고 부르기도 한다. 계(械)는 무기를 뜻한다.
계투는 이주민과 먼저 정착한 사람들 사이에 토지와 물 등 자원을 둘러싸고 수많은 갈등이 벌어졌던 동남부 지방에서 특히 많이 발생했다. 청(淸)대에 본지인과 이주민 집단인 객가(客家) 사이에 벌어진 어떤 계투는 12년간 이어져 10만 여명이 죽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지난 8일 허난(河南)성에서 발행되는 하남상보(河南商報)는 무술학교 학생들과 노점상 단속원 사이에 벌어진 집단 패싸움 사건을 보도했다. 계투의 전통이 만연한 중국이지만 공무원과 무술학교 학생들이 서로 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중국 언론이 전하는 이 특별한 싸움의 전말이다.
안후이(安徽)성 난양(南陽)시 탕허(唐河)현 노점상 단속원 10여 명이 5월 5일 오전 7시 단속에 나섰다가 무술학교 학생 30여명에게 집단구타를 당했다. 이 사건으로 단속 차량이 파손되고 단속원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날 단속에 나선 인원은 10여 명. 마구잡이로 들어선 노점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탕허현이 만든 노점상 관련 규정은 이렇다.
▶반드시 지정된 장소에서만 영업할 수 있으며
▶주변 위생관리는 노점주가 책임지며
▶아침을 파는 노점상은 오전 7시 이후 실내에서만 영업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규정을 어긴 노점상들에 대해 단속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여자 노점상 한 명이 욕을 하며 단속원들의 옷깃을 잡아 끄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전화 한 통으로 무술학교 학생 30여명 몰려와=결국 물건이 몰수당하는 것을 바라보던 이 여인은 오빠인 탕허현 사오린(少林)무술학교 교장 펑젠쥔(彭建軍)에게 전화로 도움을 요청했다.
전화 내용을 들은 단속원들 역시 사태가 악화할 것을 우려해 관리국에 즉시 지원을 요청했다. 잠시 뒤 지원요청을 받은 단속원들과 30여명의 무술학교 학생들이 현장으로 몰려왔다. 무술학교 학생 가운데는 긴 칼을 들고 온 학생도 있었다. 무술 사범 두 명과 30여 명의 학생들이 단속반을 에워쌌다. 펑젠쥔 교장이 학생들을 향해 “손 좀 봐줘라”고 외치자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학생들은 단속원들을 구타하는 한편 단속원들이 타고 온 차량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자를 칼로 찔렀다. 십 여분간 계속된 집단구타로 단속원들은 머리를 다쳐 피를 흘리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어떤 단속원은 머리카락을 잡아 뜯기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난동은 경찰이 출동한 뒤에 비로소 수습됐다. 이 폭행 사건으로 단속원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카메라 한 대가 부서지고 휴대폰 한 대를 갈취 당하는 등의 피해도 발생했다.
사건 발생 당일 저녁 경찰은 무술학교교장 펑젠쥔과 현장에 있던 무술 사범 2명을 체포했다.
탕허현 위원회와 현정부는 난동자들을 엄중 처리키로 방침을 정했다. 현지의 남양일보(南陽日報)는 사건 발생 직후 현정부가 4개 특별팀을 꾸려 즉시 사건 수습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탕허현 공안국 역시 전담조를 편성해 앞으로 이러한 집단 구타 사건에 엄중 대처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현재 펑젠쥔 무술학교교장과 폭행에 가담한 이들은 모두 구속 수감돼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피해를 입은 단속원들은 현재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번 사건을 맡은 차이톈양(蔡天陽) 탕허현 공안국 치안대대장은 “이번 집단폭행에 가담한 10여명의 학생은 대부분 어린 학생들”이라고 말했다.
선우경선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kysun.sw@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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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8/17 12:14:10
Name 신불해
Subject 전근대 중국 시골의 대혈전, 계투(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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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니, 법이라는게 국가의 수장으로부터 길바닥의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칼처럼 적용이 되는 현대 이전 전근대 사회에서는 법에까지 갈 필요도 없이 두 주먹으로 해결되는 일들이 종종 많았다. 물론 주먹이 안되는 수준이면 칼, 창을 들기도 해야 할 터이다.
법에 의해 해결을 못 볼 정도의 상황이라면 상당히 심각한 일이고, 이 상황에서 등을 맡기고 믿을만한 존재는 달리 많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집단이 있다면, 바로 가족일 것이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중국의 계투(械鬪)는 이러한 가족, 종족(宗族) 패싸움이 절정에 달한 사례다.
말하자면 계투란 종족이나 촌락 등 - 전근대 이전 중국의 농촌이란 대단히 배타적인 곳이므로, 종족과 거의 유사할 것이다 - 집단간에 다툼에 대해 무기를 들고 해결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이와 같은 행위가 더 전에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심화된것은 명 - 청 시대였으며, 특히 청나라 중기를 넘어 옹정 연간 무렵에는 굉장히 격렬해져 제국의 황제마저도 관심을 나타내는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게 되었다.
일반적인 계투는 우선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우선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다툼이 발생하여, "주먹" 으로 손을 봐줘야 할만한 일이 생겼다고 치자. 그렇다면 족내에서는 선봉이 되는 사람이 나서, 다방면의 방법을 통해 족원이라는 '전력' 을 소집해온다. 그리고 어느 시기에 다른 종족 - 촌락과 맞짱을 뜨리고 정하는 것이다.
물론 2,000년 전에 한 인물이 "이제 좀 서로 머리 식히고 다 좋게좋게 살면 좋잖아." 라고 말한 탓에 십자가에 매달리는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시끄러운 분쟁을 원하는 사람보다는 좀 조용조용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 지구상에는 더 많을 것이다. 따라서 족내에서 "저 놈들 하고 한판 뜨자!" 라고 말한다고 해도, "난 좀 그런데……" 영 껄끄러운 사람도 있기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투를 치루는데 있어 이러한 '개인의 의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중국의 농촌은 대단히 배타적이고, 또한 이러한 '공동체' 의 수장인 유력자나 연장자의 의사는 대단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감히 공동체를 거스르려 했다가는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벌금을 매기는 정도에서 끝나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고, 끌려가서 신나게 두들겨 맞는다던지 장형을 얻어맞는다던지, 심하면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학술적인 이야기보다 경험담 쪽을 듣는 편이 더 와닿을 것이다.
"……나의 할머니는 우리들 모두를 자신의 노예로 생각했다. 할머니는 심한 아편 중독자였고, 나는 아편 냄새를 혐오했다. 어느날 밤 더 이상 그 냄새를 참을 수 없어진 나는 벌떡 일어나 난로에 얹어 놓은 아편 그릇을 발로 차버렸다. 할머니는 격노했고, 친족회의를 소집하여 '불효자식' 인 나를 '물에 빠뜨려 죽여야' 한다고 정식으로 요구했다. 할머니는 나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했다. 친족들은 할머니의 요구를 받아들여 실행할 작정이었다. 계모는 나를 죽여야 한다는데 동의했고, 아버지는 그것이 일단 친족의 뜻인 이상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때 마침 외삼촌이 나를 변호하고 나섰다." ─ 에드가 스노우, 중국의 붉은 별 pp. 302
여기서 말하는 '나' 란 다름아닌 그 유명한 펑더화이(彭德懷)다. 하나의 사례로 전체를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1900년전 농촌 공동체의 모습이 이러한 정도라면 그 2백년 전에는 어떠한 모습이었을지는 짐작 할 순 있다.
여하긴 이러한 요소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족원은 빠짐없이 계투에 나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인원이 전부 싸움을 벌이는것은 아니다. 제비를 뽑거나, 혹은 유력자의 결정에 따라 족원들은 계투에 나서 적들을 두들겨 팰 '전투원' 과, 계투가 끝난 후 벌어질 관의 책임 추궁에 대해 '독박' 을 쓸 인물을 구분하였다. 경우에 따라 계투 전에 거창하게 제사를 치루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계투를 치루기로 했다손 쳐도 이쪽의 전력이 아무리 생각해도 견적이 안 날 경우가 있다. 저쪽에는 덩치들이 우글우글한데 이쪽은 비리비리 하거나, 혹은 숫자 자체가 부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력의 열세' 에서 실제 전쟁이라면 병력을 보급하거나 해서 처리하겠지만, 계투의 경우는 어떠할까?
이 경우 실제 전투와 유사하다. 병력을 '보급' 하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외부인을 '용병' 으로 데려와서 내세우는 차이점이 있다. 이런 사람들 대부분은 무시무시한 흉악범이라기 보다는, 이런 일에라도 불려오지 않으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다가다 불러모은 사람들을 내세우면, 그 사람들이 실제 족원인지 아닌지 저쪽에서 구별할 수 있을 방법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러한 '대타' 작전은 '전투원' 의 공급 뿐만 아니라 '독박' 요원에도 적용되었다. 외부인을 독박용의 대타로 내세우면, 거의 대부분의 관리들은 누가 진짜이며 가짜인지 구별을 하지 않고 처리를 했다. 가끔 성가시게 조사를 하는 관리가 있다면, 그것은 돈 좀 내놓으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뇌물을 적당히 찔러주면 관리들은 알아서 뒷처리를 깔끔하게 해주었다.
문제는 이렇게 계투가 체계성을 보이면서 성행하다보니,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폭력성이 강화되어 끝장으로 치닫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지방관이 "싸우지 마라" 라고 하면 지방관을 공격하는 충격과 공포스러운 일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하는 지방관의 경우는 어차피 '대타' 를 통해 자신의 체면은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딱히 나서서 막을 필요성도 그리 느끼지 못했다.
그리하여 문제의 계투가 벌어질 무렵이 되면, 이 배틀로얄에 참가하는 족원들은 몽둥이, 칼, 창은 기본에 심지어 활이나 총까지 쏘아댈 지경이었다. 따라서 피해는 대단히 컸다. 사건이 해결된 뒤 지방관이 당도해봐야 범인은 잡혀가느니 저항을 하고, 군대를 끌고 올 정도가 되면 이미 달아나는 무렵이라 처벌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차라리 지방관들은 앞서 말한대로 '대타' 를 내세워서 자신의 체면을 살리고, 이 일로 은근히 압박을 주어 돈을 챙기는 쪽을 택했다.
그렇다면 한번의 전투후에 계투는 완전히 종료가 되었는가?
그렇지도 않다. 계투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고, 많은 자금에는 무조건적인 확률도 파리떼가 꼬이게 된다. 종족 유력자의 경우는 계투를 치루면서 많은 "떡고물" 을 챙길 수 있음으로 계투를 그만둘 이유가 없었다. 또한 종족 내 양아치 청년들의 경우는 땅도 없고 여자도 없는데, 하잘 것 없이 농사나 짓느니 롸끈하게 한판 붙으면 챙길 수 있는것도 있어서 오히려 계투가 일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이런 경우 때문에 계투는 일부러 빨리 종료가 되지 않고 질질 늘어지기도 하였으며, 양측의 전력이 엇비슷할 경우 수십년에서 심하면 백여년간 계투를 치루는 경우도 있었다.
한 계투가 수십년에서 백여년에 이를 정도가 되면 이제 당사자들은 단순히 양쪽 세력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더해진 "동맹 세력" 들이 추가되어 엄청난 규모로 확대되었다. 기껏 한판 승부에서 이겼다쳐도, 패배 쪽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면서 관에 소송을 제기하거나 하면 다시 이것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많은 돈이 오가고 또 계투가 벌어지기도 했으니, 완전히 손을 털고 화해를 하던지 아니면 완전히 재기의 여지도 없을 만큼 다른 세력이 끝장나던지 간에 시간은 많이 걸릴 수 밖에 없어써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떡고물" 을 챙기거나 할 처지가 못 되는 대다수 일반 족원들은 피폐해져갔다. 무기를 구입하고 무뢰배 집단을 전투용 대타로 고용하기 위해 돈을 내야 했던건 이들이었으며, 전투 이후 다치고 죽는 문제도 컸다. 계투에 집중하느라 농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종족원들은 그러면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계투에 나서야 했다. 심지어 농촌이 아닌 도시에 살고 있는 족원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는데, 현실적으로 족원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줄 장치가 같은 족원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종족을 떠난 족원은 그 후부터는 누구에게도 보호받기 힘들었다.
이렇게 계투의 폐단이 뿌리가 깊어졌기 때문에 이제 지방관들도 계투가 벌어지면 오히려 좋아라 하면서 양측으로부터 돈을 뜯어낸 일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설사 강직한 지방관이 오더라도 사태는 비슷했는데, 지방관은 그렇다쳐도 그 밑에 있는 서리나 아역들은 유력 종족에 포함되어 있거나 유력자의 수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계투의 폐단을 막으려면 그 원인이 되는 부분까지 지속적으로 관리가 되어야 했지만, 대다수 지방관들은 이제 좀 현지 사정에 익숙해진다 싶으면 다른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계투가 지속되면서 적응이 된 것은 지방관 뿐만 아니라 계투에 투입되는 대타용 전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그저 할게 없어서 모인 사람들이었지만, 점차 익숙해진 집단들은 계투를 직업처럼 삼는 무뢰배 집단이 되어갔고, 평소에는 다른곳에서 불법을 자행하고 살다가도 계투가 치뤄진다 하면 모여들었다. 이러한 집단은 건륭 연간을 넘어 가경 시대가 될 무렵에는 확연한 "용병" 집단이 되어 전문적으로 계투를 청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계투가 갑자기 청나라 중기에 이르러 규모가 확대되었을까? 물론 '중국인의 본성은 대체로 험악 - 잔혹하여 피와 분쟁을 즐긴다' 고 하면 아주 간단하겠지만 그런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서야 그 사람의 수준을 아주 잘 보여주는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계투 역시 경제적 - 사회적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명말 - 청초에 이어진 전란으로 인해 대혼란이 벌어지고 농촌의 자율적인 질서가 파괴되었다. 이에 집단무장과 폭력적인 자율구제가 더욱 일상화 되었다.
2. 둘째. 청나라는 대만의 정씨 정권을 제압하기 위해 해금령을 실시했는데, 이는 첫번째 요소와 함께 기존 질서를 완전히 붕괴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해금령은 단순히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수준을 넘어, 백성을 내지로 옮기는 천계령(遷界令)과 더불어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터전을 잃은 주민들이 있고 밑도 끝도 없이 의심스런 이웃이 생긴 주민들이 있으니, 분쟁이 나지 않기가 더 힘들었다.
3. 여러 혼란, 그리고 그 와중의 기회를 틈타 작았던 소성(姓 작은 성씨)들은 본래 지방에서 강력하던 대성들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소성들은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합을 했고, 이 와중에 계투는 더욱더 커져만 갔다.
4. 해금령, 천계령등으로 인해 기존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청나라 시대에 이르러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어업이나 무역같은 경제적 요건은 완전히 다르게 변하다 보니, 점차 곤궁해진 주민들은 한정된 자원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살기 위해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밀었다.
5. 이렇게 일상화된 계투를 주민들이 토지, 수리, 분묘, 시장 등 온갖 문제에 적응시키면서 커져만 가고 있었는데, 국가의 행정력은 비대해져 가는 나라를 맞춰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청나라의 인구는 경이적일 정도로 엄청난 숫자로 증가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사회문제도 더욱 복잡해져갔다. 하지만 행정력의 발전은 더뎠다. 되려 지방관의 이동만 더 늘어나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떠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소송이나 사건이 쌓여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질질 끄는 경우가 많아졌다.
게다가 송사, 서리, 아역, 그리고 지방관 역시 뇌물을 탐냈으므로, 그 긴 재판 기간을 계속 버티다 보면 이것 역시 경제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국가 행정력에 대한 불신은 커져만 갔다.
계투는 이러한 요소 등이 겹쳐서 발생했고, 여기서 더 복잡해지면 복잡해졌지 그 원인이 간략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실제 계투가 가장 성행하고 문제가 되었던 곳이 해금령 - 천계령의 여파를 직접적으로 받는 민남 지역이라는 것은 그 원인을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참초 :
淸 中期 민남의 械鬪 盛行과 그 背景 - 원정식
淸代 福建社會 연구 : 淸 전·중기 민남사회의 변화와 宗族活動 - 원정식
淸前期 天地會 硏究 - 고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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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사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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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해시 아이콘13/08/17 12:29
잘 읽었습니다. 할머니가 일종의 가부장으로서의 권리를 행할 수 있었다는 건 또 의외네요.
인간사회에서 윤리와 도덕이(어떤형태로든) 필요한건 저런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겠지요.
Pretzel해시 아이콘13/08/17 13:12
얼마전에 중국 한국 교포 배 과수원을 중국주민 800명이 몰려가서 배나무를 다 뽑아버리고 베어버린 사건이 있었는데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900139
공안이 와서도 지켜만보고 있었다는게 이해가 안됬는데
이런 계투라는 문화적인 배경이 있었군요.
Neuschwanstein해시 아이콘13/08/17 13:49
우리도 석전이라는 전통이 있어서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거칠었다고 하는데... 역시 대륙 스케일은 다르군요 이건 뭐 말 그대로 전쟁;
미스터H해시 아이콘13/08/17 19:30
딱 보면서 드는 생각이 무림이네요. 역시 무협소설이 쓰일 대륙 답다는 생각이...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마에해시 아이콘13/08/18 00:26
읽으면서 소설 '아리랑'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비슷하겠죠...?
오단기아해시 아이콘13/08/18 07:49
현재에도 계투가 남아있는 곳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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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대만의 사회적 폭력, 계투(械鬪)]
[前近代臺灣的社會暴力,械鬪]
(* 2011년에 작성한 학부 논문의 앞부분을 간략히 정리하여 올립니다)
계투(械鬪)는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持械相鬪)."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다. 이 명칭은 단순히 집단적 폭력만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나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폭력성이 부각된다고 하기 보다는 사회의 한 현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분류계투(分類械鬪)의 명칭은 18세기 중엽의 상주문에서 처음 보이며, 도광연간에 그 명칭이 대만으로 파견된 관원의 보고에 자주 언급되면서 의해 고유명사로 사용되었다.
특별히 대만의 계투를 분류계투로 따로 구분하여 지칭하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이 '분류(分類)'라는 단어는 "분문별류(分門別類)"의 약자로, 계투에 참가하는 무장집단 간의 대립양상이 명확히 드러나며, 그 피아가 분명한 집단간의 충돌이라는 특징을 표현하고자 이 분류라는 명칭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계투의 발생 원인이 가지고 있는 특징뿐만 아니라 이러한 분류계투를 통해 집단내부의 결속력을 다지고 타 집단에 대한 배척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청대 대만의 계투가 언제부터 발생되었는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다. 다만 지방지나 관련 문서 및 개인의 문집을 통해 크고 작은 계투의 사례가 대만사회에 지속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현재 참고할 수 있는 문헌 중에서 계투에 관한 기록은 地方志, 檔案, 古文書, 族譜 등이 있으며, 대표적으로 『主修臺灣府志』를 비롯하여 高拱乾의 『臺灣部志』, 陳夢林의 『諸羅縣志』, 陳文達의『鳳山縣志』, 『臺灣縣志』, 如周璽의『彰化縣志』, 陳倍桂의 『淡水廳志』의 「雜記志」나 「雜識志」 등에 記載되어 있다.
대만의 분류계투의 발생원인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국내에 대만의 청대 중국남부지방의 사회 변동과 대만지역의 토지소유 문제, 그리고 천지회의 활동에 대한 관련 연구는 있으나 계투만을 주제로 하는 연구는 복건지방의 계투 사례를 다룬 연구가 유일하다(2011년 기준).
우선 분류계투의 원인은 다양하고 할 수 있다. 종족 간의 갈등이나 토지 문제에 기인한 사례가 대다수를 이루나 도박이나 사소한 언쟁을 도화선으로 촉발된 경우도 다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사례만을 두고 계투의 범위와 개념을 규정하려고 한다면 자칫 일개 향촌 사회의 이권 다툼 수준으로 속단해버리는 착오를 범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계투의 원인과 맥락은 먼저 청대 대만의 인구증가와 사회 변동이라는 큰 틀에서 나온 사회 현상으로 보는 시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계투는 종족, 이권집단 등과 깊은 관계이 있다. 漳泉械鬪, 閩吳械鬪, 縣里械鬪、異姓械鬪, 同姓宗族械鬪, 職業團體械鬪 등 발생원인과 관련된 집단에 따라 지칭하는 명칭 또한 다양하다. 기존연구에서는 청대 중엽의 인구증가와 해금의 폐지으로 인해 대륙에서 대만으로의 한인 이주를 주원인으로 들고 있다.
기존 학설(2011년 기준)을 정리해보자면, 건륭연간 이후, 많은 수의 이주 한인이 대만에 들어서 臺灣에 먼저 온 한인들과 뒤늦게 온 한인들 간에 土地 所有를 두고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수로, 토지 소유, 촌락의 영역 문제가 가장 주된 원인이었다. 또한 건륭연간 당시 대만에서 청의 행정력과 통제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여 계투의 발생이 야기 또는 방관하였다는 점이다.
淸의 官員이 械鬪를 야기했다는 사실은 邊疆을 統治해야하는 官員의 責務와 상반되는 사실이지만, 당시 정성공 세력의 잔존세력이 아직 대만일대에 산재해 있다는 우려와 이 세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일부러 패를 나누게 하여 서로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계투를 이용했다는 설이 있다.
다음으로는 복건의 천주와 장주 지역에서 이주해온 집단이 서로 가까운 곳에 촌락을 이루고 지내다가 각자의 생활 및 생산 반경이 점점 넓혀짐에 따라 토지 등 이권이 상충하게 되고 이로 인해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종교와 배맹(拜盟)의 신앙 차이로 인한 원인도 있다.
가장 특이한 사례로 나한각(羅漢脚)으로 인해 일어나는 경우도 있으며, 원주민과 한인 간 토지와 생산물을 두고 충돌이 일어난 경우도 있다. 즉, 출신와 종교, 종족 그리고 나한각, 한인과 원주민과의 충돌은 그 종류는 다양하지만, 본질은 청대 대만의 인구 유입과 그로 인해 발생한 개척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던 충돌이었다. 당시 『臺灣省通志』에 따르면 "三年마다 小反이 있고 五年마다 大反이 있다" 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사회가 안정되지 못한 상태라는 기록이 이를 반증한다.
개척 초기에는 대륙의 閩, 粵 혹은 漳, 泉 등의 지역에서 이주해온 사람 가운데 漳人이 粵人과 연합하여 泉人을 쫓아내거나 泉人이 粵人과 함께 漳人을 공격하는 사례가 있었다. 이후 개척이 점차 진행됨에 따라 계투의 주체 또한 변화가 있었다. 토지의 소유가 점차 진행됨에 따라 地主와 佃戶로 構成된 이른바 "地主集團"이 생겨났다. 이들은 처음에는 地主(墾首)가 佃戶를 받아들이면서 同鄕, 同籍, 血緣을 기준으로 하였으나 이후 地緣性이 점차 강해지고 血緣性이 희박해짐에 따라 地域에서 利益을 共有하게 되면 굳이 血緣을 따지지 않더라도 같은 構成員으로 認定해주었다. 이 地主集團은 地主(墾首)를 求心點모여 外部로부터 土地를 占有하려는 자들을 막고 同屬의 分爭을 돕고 내부적으로 거두어들인 租穀을 바탕으로 勢力을 擴張시키기도 하였다.
참고로, 『噶瑪蘭廳志』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각지의 漳人이 가장 많고 泉人과 粵人이 그 다음입니다. 漳州의 18개 성씨 중에 오직 林, 吳, 張 성의 사람이 가장 많고 집단의 규모가 큽니다".
초기 械鬪 事例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유형은 閩粵械鬪, 漳泉械鬪, 이른바 지역과 종족을 위주로한 械鬪이다. 건륭연간부터 광서연간에까지 계투의 주종을 이루는 것은 위의 유형이다. 이 중, 각 集團이 점차 조직구성을 갖추고,배타적 성질을 갖춘 조직 정체성을 가지게 됨에 따라 후대로 갈수록 械鬪가 집단화되는 양상이 생겨난다.
정치적인 관점에서도 계투의 원인을 찾아본다면, 대만 통치에 대한 시랑(施琅)의 끈질긴 주장이 있기 전후로 청조의 대만점령 이후 청 조정에서 대만통치의 중요성을 절감하지 못해 기류(棄留)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에서도 그 원인을 들 수 있다. 또한, 이주자들이 향촌 내외의 문제를 다투면서도 청의 행정 및 공권력에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자연히 자신의 종족 및 씨족 등 이권을 함께하는 집단을 통해 해결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발생 지역의 변천과정에도 특징이 있다. 械鬪 發生地를 살펴보면, 康熙, 雍正, 乾隆年間에는 臺灣縣과 鳳山縣(11次), 諸羅縣(4次)과 같이 주로 대만 南部地方에 集中되었다. 그러다 臺灣의 開發의 점차 中部와 北部로 옮겨짐에 따라 中, 西部 平野地帶의 彭化縣(14次), 淡水廳(26次) 等地에서도 일어난다. 그리고 嘉慶年間에 噶瑪蘭 開拓이 進行됨에 따라 嘉慶以後에는 噶瑪蘭 地域도 械鬪發生地域(11次)에 包含되었다.
각 사례의 종족구분을 살펴보자면, 처음 계투가 발생한 南部地方의 경우, 閩粵械鬪가 주를 이루었고, 이 두 종족집단의 세력도 南部에서는 균등한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중부지방의 경우, 漳泉械鬪의 사례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북부지방의 경우에는 타이베이 분지 일대는 漳泉械鬪가, 현 신죽(新竹) 이남 지역은 閩粵械鬪를 위주로 각각 발생의 편차를 보인다. 東部 갈마란(噶瑪蘭) 지역 같은 경우, 이주자의 대부분이 漳人으로 구성되어 있어 종족간의 계투보다는 같은 동적인끼리의 토지 소유 분쟁이나 이권 다툼의 사례가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淸 初中期의 福建地方의 械鬪 역시 臺灣의 分類械鬪와 동일한 유형을 보인다고 할 수 있으며, 대만의 경우에도 표면적으로는 宗族과 지역 출신의 갈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에 대만의 黃秀政과 같은 학자는 청대 대만의 무력 갈등을 정치적 폭력과 사회적 폭력으로 구분하여 반청복명反淸服明과 같이 정치적인 동기를 가진 민변(民變)을 정치적 폭력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계투는 정치적 목적이나 동기를 두지 않는 사회적 폭력에 속한다고 설명하였다.
때론 이 사회적 폭력인 계투가 정치적 폭력인 민변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이 계투는 사회적 폭력에 해당하며, 거주민들 간의 다양한 이권 다툼(예를 들어 거마꾼 간의 영역 다툼, 심지어 악단樂團 내부의 음계音系 다툼 등도 있지만 주로 토지와 도박의 시비가 주를 이룬다)도 포함되기에 다른 인터넷이나 블로그에서와 같이 계투를 단순히 이주민과 원주민의 유혈 충돌로 해석하는 것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 이후 계투의 특징과 다른 학설에 대해서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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