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8

2102 피카소의 비둘기 한겨레: 박춘근 기자 [신천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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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비둘기

기자명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입력 2021.02.24 


분단의 벽을 넘지 못하고, 반공법의 포로가 되다

인류를 창조하고 보니 인간이 나날이 포악해지는 것이 아닌가. 이를 속속들이 꿰뚫어 보던 ‘하느님’은 인류 창조를 크게 후회하면서,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지구를 물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다만 자신에게 순종하는 욕심 없는 인간, 6백 살의 ‘노아’에게만 대홍수를 귀띔한다. 그가 ‘방주(方舟)’를 만들어 가족과 짐승들을 태우고 홍수를 피하도록 배려하기 위함이다. ‘하느님’이 40일 동안 큰비를 쏟아부으니, 지상의 가장 높은 산까지 물에 잠기고 세상의 뭇 생명체는 남김없이 숨이 끊어진다. 물이 빠지기만을 기다리던 노아는 비둘기를 정탐꾼으로 내보낸다. 바깥세상에 나갔다 온 비둘기는 올리브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온다. 즉, 물이 빠진 육지를 발견함으로써 대재앙이 끝났음을 인지한다. 여기에서 비둘기와 올리브 가지는 성령과 구원의 소망, 궁극적으로 평화를 의미한다. 올리브 가지는 오늘날에도 세속적이고 종교적인 평화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를 중심으로 비둘기는 희망을 전달하는 평화의 상징이 된다. 이상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따지고 보면 노아의 홍수와 유사한 홍수 설화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 전 세계에 등장한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대홍수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홍수는 심판이나 죄의 결과로 활용될 뿐, 노아의 방주가 역사적으로 실존한다는 주장은 그 증거가 존재하지 않기에 관련 학계로부터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설화는 설화일 뿐, 과학과 신학 양측 모두 노아의 방주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한다(위키백과).


노아의 방주 비둘기 (출처 : Pixabay)



돈 호세(Don José Ruiz y Blasco,1838–1913)는 미술 교사였다. 무명 화가인 그는 유난히 비둘기 그림을 좋아했다. 어린 아들에게 비둘기를 어떻게 그리는지 가르치면서, 데생을 위해 내장을 꺼내서 박제하는 일과, 비둘기 발을 못으로 고정시키는 일을 많이 시켰다. 광장에서 뛰놀며 그렸던 친근한 비둘기는 그렇게 아들에게 트라우마로 자리잡아, 사지가 절단되어 부유하는 악몽을 자주 꾸었다(비안카‘Bianca’ : Art Collection, 2016.4.19.).


돈호세의 비둘기 그림 중 하나



1949년 4월, 공산당이 주최한 제1회 세계평화회의가 파리에서 열린다. 그때 공산당은 ‘그’에게 평화를 상징하는 포스터 제작을 의뢰한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인생에서 첫 번째 모델이요, 친구였던 한 마리의 흰색 비둘기를 그린다. 어쩌면 그는 그림 속의 흰 비둘기를 향해 참회의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지만, 그가 그린 포스터는 ‘평화’라는 이름으로 유럽 전역으로 퍼진다. 그가 곧 돈 호세의 아들, 파블로 피카소이다. 피카소가 그린 흰 비둘기는 그때부터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그 즈음해서 태어난 딸에게, 모국인 스페인어로 비둘기를 뜻하는 ‘팔로마(Paloma)’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비둘기, 곧 평화는 그가 추구하는 신념처럼 굳어진다.


파블로 피카소 작품. 왼쪽은 제1회 세계평화회의 포스터, 파리, 1949년. / 오른쪽은 제2회 세계평화회의 포스터, 런던, 1959년.



피카소는 나치의 블랙리스트 첫머리에 올라간 화가로, 파시즘과 나치즘에 대항한 레지스탕스의 간판 인물이었다. 그는 1937년 독재자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 비행기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맹폭하여 1천5백여 명을 몰살시킨 비극적 사건을 그림으로 남긴다. ‘게르니카(Guernica)’로 이름 붙여진 이 그림은 전쟁의 참상을 만천하에 드러냄으로써 역설적으로 평화를 희구하는 세기적 작품으로 숭앙받는다.

이 작품과 쌍벽을 이루는 그림이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이다. 이는 1950년, ‘신천 학살’을 묘사한 것으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전 세계에 고발한 것이다. 신천군 사건(信川郡 事件)은 한국 전쟁이 벌어진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3만 5383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사건을 말한다. 과거에는 신천 10·13 반공 의거, 북한에서는 미군에 의한 신천 대학살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한겨레신문(2003.08.06.)에서는 
1] 문화방송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망각의 전쟁 편(2002년 4월 방영)’과 
2] 이북5도민회 산하 신천군민회 ‘10·13 동지회’의 증언, 그리고
3] ‘신천’을 소설화한 황석영의 ‘손님’을 근거로 

미군의 묵인 아래 반공청년단이 주도한 보복 학살로 규정한다.

그러나 ‘손님’의 실제 주인공인 유태영 목사는 “‘손님’이라는 작품에서 함부로 써 갈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 그것이 야기한 혼돈, 그리고 ‘손님’을 읽은 많은 독자들의 그 왜곡에 대한 비판에 대해 황석영 선생은 그 책임을 져야한다(중앙뉴스, 2009.05.19.).”고 경고했다.

그리고 

“당시 교회 간부들이 치안대를 조직하고 인민군의 총을 빼앗아 학살했다. 그들을 새끼줄로 묶고 우물 판 데 넣고 석유를 부어 불을 질렀다. 거기서 뛰쳐나오면 찔러 죽이고 그랬다. 그 사람들이 남쪽으로 와서 90~100% 목사가 됐다. 과거에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 양심의 거리낌을 가지는 사람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큰일이나 한 듯이 생각하더라. 빨갱이를 죽인 건 당연한 거라며 이들이 헤게모니를 잡았다. 그래서 60년대 교단이 전부 반공주의였다.”

고 말했다(민중의 소리, 2007.09.21.).

한편, 김관후는 김관후의 4·3칼럼(프레시안, 2014.09.29.)에서 “미군정·이승만 등 집권 세력은 '제주도학살'의 최선봉에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약칭: 서청)을 세웠다. 그들은 소련 군정에 의해 박해를 받아 월남한 지주 세력으로, 그 트라우마에 의해 반공주의자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정부 대신 손에 피를 묻혀주는 우파 민병대였다. 군과 정부 고위직을 장악하였고 대구노동자파업, 보도연맹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제주 4.3사건에 개입하여 20~40만 명 이상의 좌파로 의심되는 민간인과 비기독교인들을 학살하였다. 
백색테러단 서청은 '반공을 전매특허로 하는 극우'였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김도훈(2014)은 “ 서북청년단은 보수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다. 나치즘과 파시즘이다.” 라고 규정한다.

정리하면,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인민군은 신천에서 후퇴하면서 지주계급과 기독교도 등의 이른바 ‘반동분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이어서 신천에 입성한 미군 치하에서 10월 13일, 반공청년단은 북한 당국 관계자들, 심지어 그 가족을 선제적으로 학살하거나 구금했다. 그 당시 미 육군에서는 접근하는 모든 민간인 난민들에게 폭격을 가할 것을 요청하고, 흰옷을 입은 민간인들을 쏴도 좋다는 명령이 하달된다. 미군에게 한국인은 언제든 적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었다. 신원이 불분명한 한국인이 접근하면 발표해도 무방했고, 북쪽 지역 난민 모두 수렵 금지가 해제된 사냥감(fair game)이었다. 미군의 관점에서 그만큼 한국의 민간인은 피아 구별이 어려웠음을 의미한다.

이제 다시 중공군이 물밀 듯이 내려오던 12월, 퇴각을 앞둔 치안대와 우익 세력은 거듭하여 ‘빨갱이’ 학살 광풍을 일으킨다. 그런데 희생자는 대부분 여성과 어린아이였다. 다시 인민군 치하에 들어간 황해도에서는 잔인무도한 ‘반동분자’ 학살이 대량으로 되풀이된다. 그로부터 72년이 지난 지금 ‘신천’은 속시원하게 밝혀진 게 없다. 

북한은 미군을 히틀러보다 더 잔학한 인간백정살인마로 유엔에 고발하고, 
미국은 한 마디로 근거가 없다고 일축하고, 
남한은 민감한 문제라면서 방북 신청 자체를 불허한다. 

신천의 피란민들은 두고 온 고향 산천이 사무치도록 그리워도, 
이산가족 방북 신청조차 하지 못하고 피붙이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빨갱이를 모르는 자들은 입다물라고 다그치면서.


캔버스 왼쪽에는 벌거벗은 여인들과 아이들이, 오른쪽에는 이들에게 총과 칼을 겨누고 있는 철갑 투구의 병사들이 있다. 이다음 장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확신할 수 없으나, 그것이 비극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아무런 저항의 무기를 소유하지 못한 여인들은 공포에 질려 얼굴이 일그러져 있거나 체념한 듯 무표정하게 앉아 있고, 우는 아이를 꼭 안고 있기도 하다. 어린이들은 여인의 품속으로 달려들거나,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조차 파악되지 않는 듯 흙장난을 하고 있다(네이버) 사진출처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709).

“인간이 짐승으로 변한 그때 적색도 백색도 아닌 무색의 양민들까지 사라졌다. 피난을 떠나지 않는 자는 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기총 사격은 피난민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더 이상 편가르기는 무의미했다. 좌익과 우익 그리고 점령군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나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섬광과 포성과 폭격, 그리고 눈물마저 말라붙은 난민들의 절규를 배경으로 수없이 이어지는 내레이션(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전쟁의 망각 편)은 다분히 감상적이다. 

한겨레21(2018.12.14.)은 김태우의 ‘폭격’을 인용, 아래와 같이 좀더 실증적으로 밝히고 있다.

「1950년 11월 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모든 도시와 농촌 마을을 군사 목표로 간주하는 ‘초토화 정책’을 지시했다. 극동공군 제5공군 소속 경폭기와 전폭기는 “은신처를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건물을 포함한 여타 목표물들을 파괴”하기 위해 소이탄과 네이팜탄을 지상으로 쏟아부었다. 인화성이 강한 소이탄을 쏟아부은 뒤 불을 끄기 위해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저공비행 기총소사로 조직적으로 사살했다.”」

그렇다! 그림 속의 학살자가 누구인지 명시적으로 규명된 적은 없다. 누가, 누구를,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무량겁(無量劫)이 지난들 제복을 입은 자들이 저지른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천 학살이 북한의 주장을 배척하고 반공청년단이 주도한 보복 학살임을 인정하더라도, 
미군의 묵인과 방조 아래 이루어진 학살이라는 사실이 거짓으로 둔갑하진 않는다. 
아울러, 공산주의자인 피카소가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평화를 상징하고 인권을 수호하는 세기의 명작, ‘한국에서의 학살’을 폄훼하거나 그림 속의 진실마저 호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리 절실하고 숭고하며 쟁취해서 마땅하다 여기는 그 어떤 이념도, 학살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아무것도 모르고 흙장난질을 하는 아이를 보라. 그 어린 것을 안고 품고 감추려는, 발가벗겨진 저 여인들을 보라.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저 기계 인간들, 그리고 숨어서 저들을 부추긴 자들! 피의 장막에 둘러싸인 빨갱이들과 해방군으로 위장한 소련과 중국, 그리고 반기독교적인 광신적 기독교도와 미 제국주의자들이 싸잡아 잉태시킨 저주의 씨앗이 세기를 달리하면서 한반도를 갈구고 있다. 착즙기처럼 이 땅의 민중을 쥐어짜고 있다.

밑천이 짧아서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보다 더 잔인하게 남의 심장을 에고 도릴 수 있는가? 아리고 저리고 쑤시는 아픔과 슬픔은 왜 늘 죽지 못해 살아남은 자들만의 굴레인가? 살인귀들 앞에서 속절없이 스러져간 민중, 그리고 그 살인귀들을 처단하는 또 다른 살인마들! 아, 죽은 자는 마땅히 죽어야 했고, 죽인 자는 기필코 살아야 했다. 빨갱이든 반공 투사든, 기독교적이든 비기독교적이든, 죽이고 살리는 저주의 혀끝은 모두 자유와 민주와 평화와 휴머니즘을 표방했다.

1950년 말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전쟁 초기 3개월 동안 서울시민의 사망·부상 현황을 보면, 전체 사망자 1만 7127명 가운데 4분의 1이 공습으로 사망했다. 특히, 용산 폭격의 직접 피해 지역인 용산구는 전체 사망자 2709명 가운데 58.6%인 1587명이 피폭 사망자인 것으로 확인됐다. 김태우 서울대규장각 연구교수는 “용산 폭격에 대한 미군의 작전명령서 등을 보면 당시 미 공군은 군사시설인 철도 조차장을 조준해 폭격을 한다고는 했지만, B-29의 오폭률이 높아 군사시설이 아닌 민가와 관공서, 학교 등도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군 오폭 민간희생 영영 묻히나 : 한겨레신문, 2010-07-15, 길윤형 기자, 손준현 선임기자)

세상을 돌아다니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던 피카소의 비둘기가 휴전 협정 막바지에 판문점으로 날아온다. 지금의 판문점이 지어지기 전, 북한이 협정 조인 사무실로 지은 새 막사 정면에 그 비둘기가 조각되어 있다. 기존의 판문점 건물은 현재 북한이 평화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프랑스 공산당원으로서 평화운동과 핵무기금지 투쟁에도 적극 참여했던 피카소는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였다(동아일보, 1959.07.22.). 하지만 그가 그린 평화의 비둘기는 결국 분단의 벽을 넘지 못하고 여전히 북한 박물관의 정면에 박제되어 있다.

위 : 판문점 비둘기(출처 : 통일부, 한국을 바라본 피카소의 시선 / 2012)아래 : 평화박물관(출처 : 김재한, 월간 SPACE(공간) 2018년 6월호)

‘피카소’라는 글자만 보고도 기겁하고, ‘피카소’라는 말만 들어도 그 배후를 캔다고 기염을 내뿜던 때가 있었다. 하물며 피카소의 화첩을 압수하여 불온성 여부를 검토하는 것은 검찰의 의무였다. 1969년 6월 9일, 각 일간지에 ‘피카소·크레파스’, ‘피카소 수채화 물감’ 등을 제작, 판매한 업자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는 기사가 실린다. 제품과는 무관하게, 순전히 ‘피카소’라는 상표를 문제삼은 것이다.

김형민은 시사인(피카소도 벌벌 떤 대한민국 검사님, 2019.11.30.)에서 이를 주도한 김종건 검사가 이른바 ‘송아지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장본인이라고 밝혔다. 「대전방송국에서 방송한 ‘송아지’라는 프로그램의 대본이 빈부 격차 문제를 다뤘다고 해서 작가를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했다. 김 검사는 “유산계급에 대한 증오심을 북돋워서 모순된 사회 구조의 타파를 위한 무산 계급의 봉기를 선동한 내용으로서, 공산주의의 기본적인 이론을 자연스럽게 전개, 선전하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자극시켜 북괴 및 공산계열의 상투적인 선전에 동조하고 북괴의 활동을 찬양, 고무한 것(박원순, 국가보안법 연구 2, 1992)”이라고 준엄하게 논고한 것이다.」 박원순에 따르면 65년 2월 베트남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개봉된 이만희 감독의 반공 영화 ‘7인의 여포로’가 북한군을 넘 멋있게 그렸다고 해서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다. “감상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군을 무기력한 군대로 그린 반면에, 북괴 인민군을 찬양하고 미군에게 학대받는 양공주들의 비참상을 가장 묘사, 미군 철수 등 외세 배격 풍조를 고취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뿐이랴?

납북되었던 어부는 북한에 가서 “짜장면은 맛이 있는데 조금 짜다.”고 한 말 때문에 국가기밀 누설죄에 걸렸고, 한 회사의 몸집 좋은 중견 간부는 술자리에서 부하 여직원의 “이사님, 풍채 참 좋으십디다.”란 아부성 발언에 고무되어 “내가 이래도 김일성보다는 못하지만, 박정희보다는 훨씬 낫지.”라고 으스댔다가 밀고당했고...(H2O 블러그, 2015. 1. 7.)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는 말한다. “대한민국의 ‘최우방’인 미국의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의 논리상 ‘반국가 단체의 괴수’로 간주해야 할 김정은 위원장을 “좋은 친구”라고 공개적으로 부르고, 한국 대통령이 바로 그 ‘반국가 단체의 괴수’와 함께 백두산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는 시대다. 박원순의 옛 책에 나오는 ‘막걸리 보안법’보다 더한 광경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약자를 억눌러 그 반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이용되어온 악법은, 도대체 언제까지 한국 사회의 목을 조르고 있을까?”(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한겨레신문, 2020.5.26.)



안타깝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만든 법에 따라 입건하고, 이를 단죄하기 위한 준엄한 검사의 논고,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는 차가운 판사들의 판결문까지도 각종 유머 코너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6•25전쟁과 5•16 군사 쿠데타가 낳은, 광기 어린 레드 콤플렉스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피카소반공법 1969년 6월9일 〈경향신문〉 기사(출처 :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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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모르겠다. 법을 만들고 고치고 없애고 집행하고 심판하는 짱짱한 사람들, 그리고 여기에 주먹세계의 대부나 쿠데타도 서슴지 않는 반란의 수괴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 거의 모두 선량하다. 법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법이 보호하지 않으면 하루도 버틸 수 없다. 나라가 지켜주지 않으면 끽소리 한마디 못하고 무릎을 꿇는 피지배민이다. 높은 단상에 앉아 끼리끼리 잔머리 굴려가며 법을 농락하고 합법을 가장한 법의 파괴자들이 바로 범법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을 위한 감옥은 없다.

1도 2부 3빽 - 도망가라, 부인하라, 빽을 써라! 수사망을 피하는 방법으로 검사들만의 은어란다. 때로는 피의자들에게도 내밀하게 전수한다는데 이참에는 본인들이 본때를 보인다. 전형적인 위계와 공갈이 난무한다. 그게 또 통한다. 피의자로부터 걸판지게 얻어먹은 검사나 변호사 모두 거의 같은 시기에 전화기를 망실하고 하나같이 오리발이다. 김봉현 자신은 술 한 모금 안 하고, 검사 3명에게만 접대부를 붙였다는데 술은 5명이 나눠 먹고 검사들은 접대부랑 놀지 않은 걸로 짜맞췄다. 그나마 기소한 지 80일이 돼 가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적폐 언론과 국민의힘에서는 사기꾼 말에 놀아난다고 닦아세우더니, 막상 일이 터지고 나니 최고책임자인 윤석열 총장은 암말이 없다. 딴세상이다. 그래도 우리는 무슨 일 생기면 그들을 찾아가서 하소연한다. 대한민국 검찰이기 때문이다. 법 없이 홀로 설 수 없는 대한민국 국민의 운명이다.

“나는 이 순간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검사의 직에 나섭니다... (중략)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누가 뭐랬나? 저런 것까지 만들었구나. 불의의 어둠을 걷어낸다? 따뜻한 검사? 진실? 공평?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긴다? 국가에 봉사한다? 온갖 미사려구 차용해서 화사하게 치장했구나. 저렇게 선서하고 보니 더 부끄럽겠다.

공공장소 음란 행위나 폭행 치사 공모 방조는 축에도 끼질 못해. 스폰서 검사는 기본이요, 여검사의 벤츠는 사랑의 정표란다. 공짜 주식 강탈해서 시세 차익 챙기고, 조폭 자금 편취해서 돈세탁하고, 후배 검사 조져서 극단으로 내몰고, 피의자는 물론 후배 검사까지 불러 성폭행하고... 별천지가 따로 없다. 달라질 게 없으니 더 그렇다. 버젓이 ‘사회지도층’이란 간판을 달고 대대손손 떵떵거린다. 언감생심, 찌라시에 까발려진 것들을 늘어놨지만 왠지 후들거린다. 하지만 흑막에 가려진 저 웃대가리(쌍껏 :上•常•傷•商)들의 작태는 손대지 말자. 어차피 나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서 아직 똥오줌 가리지 못하는 우리 손주를 재우면서 이런 노래(공룡 자장가, 주니토니 by 키즈캐슬)를 즐겨부르고 있다.

“잘 자렴, 좋은 꿈꾸렴, 우리 아기!

뜨거운 태양이 바다 밑으로 숨고, 밤하늘엔 별들이 윙크해.

잘자라 내 아가, 두 눈 꼭 감고 행복한 꿈꾸며 잠들렴.

위험한 사냥꾼 세상에 많아서, 항상 도망다녀야 하지만

힘세고 덩치 큰 공룡들 많아서 항상 조심해야 하지만

걱정 말고 별과 바람을 느끼렴. 내가 옆에 있을 테니“


지난해 10월 22일 국감에서 윤석열 총장은 “검찰은 검찰 구성원들의 비리에 대해서는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 조직에서 무관용이고 이게 대가성이 있든 또는 수사 착수 전에 그냥 우연히 얻어먹었든 간에 이런 김영란법 위반 하나도 저희 검찰이 지금 어떤 입장인데 이런 걸 봐주고 하겠습니까?”라고 천명했다. 
그런데 지난해 7월 18일, 밤 9시 반부터 이튿날 새벽 1시까지 서울 청담동 고급 룸살롱에서 이른바 '윤석열 사단'으로 불린 특수부 검사 3명을 상대로 술접대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공교롭게도 그 즈음해서 검사 3명과 변호사 1명은 모두 휴대폰을 망실했다고 했다. 피디수첩이 밝힌 이유는 다음과 같다. 관련 자료를 은폐하려고 할 의도는 없었고 그냥 짜증나서 버렸다(나의열 검사), 전화가 많이 오고 옆에 집사람도 있고 당연히 부부싸움도 하고 난리가 났다. 다투면서 그 과정에서 분실하게 되었다(이주형 변호사), 토요일에 일산 킨텍스 ‘베이비페어’ 박람회에 갔다가 잃어버렸다(유효제검사), 액정 모서리가 훼손되는 등 기기도 오래된 상황이었고 보안 문제도 있어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렸다(ooo 검사). 사진 출처 : MBC 뉴스데스크(2020.12.08.), 피디수첩(2021.1.20.) 화면 캡처

(계속)



편집 :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박춘근 객원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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