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8

손민석 백낙청의 분단체제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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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이 비평하기 당혹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그 자신이 의식적으로 분단체제론이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 규정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흔들리는 분단체제>의 서문에서 그는 "그러나 가령 '분단체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체계적으로 대답해주는 ‘총정리’식 설명은 제1장에건 다른 어디에건 없다는 점도 미리 밝혀야겠다.

 역량이 있고 없음을 떠나, 그런 식의 ‘정답찾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분단체제론을 펼치는 의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단체제 문제에 국한된 일도 아니지만, 분단극복의 정답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의식 자체가 이미 분단체제에 의해 적잖이 왜곡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자기탐구와 자기쇄신의 수행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사업의 관건이라 믿는다"이라고 말한다. 
이론을 습득하거나 비판하려는 이들 모두에게 당혹스러운 주장이다.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자신의 이론의 정립을 위한 개념규정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것을 비판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습득하려는 사람조차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그는 "정연한 이론체계를 만들어낼 자신은 아직도 없"다면서도 분단체제의 개념에 대해 나름대로 요약적 설명을 하기는 한다.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에 나온 그의 설명을 요약해보면 

한반도는 복수의 모순이 중첩적으로 작동하는 지역으로, 그런 복수의 모순이 중첩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분단체제론을 제기했다. 
여기서 논하는 복수의 모순이란 
  1. 북조선의 사회주의 체제에 내재한 모순과 한국의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한 모순, 
  2. 북의 사회주의 및 남의 자본주의를 동시에 포섭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모순, 
  3.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순들을 엮어내며 작동하게 하는 분단모순이 그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계급모순, 민족모순, 분단모순 등의 여러 모순들이 동시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로 묶어줄 매개적 개념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분단체제론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북의 사회주의와 남의 자본주의 모두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그러했듯이 세계체제 속에 포섭되어 존재하고 있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자체가 자본주의적 세계체제라는 하부구조 위에 복수의 근대국가가 열국列國적 형태로 존재하는 상부구조가 들어서 있는 모양을 취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세계적 전개와 근대국가의 지역적 전개라는 모순이 지역 간의 위계적 질서를 만들고, 그러한 질서가 중심부 - (반半)주변부 간의 모순을 배태시켜 자본주의의 세계적 전개를 가능케 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월러스틴의 인식을 한반도적 상황에 가져와서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압력이 분단체제라는 중간항을 매개로 남북의 각각의 체제에 작동한다는 게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이 주장하는 바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백낙청은 곳곳에서 반복해서 '정상적인 근대국가'와 '분단국가' 간의 차이를 강조하며 분단체제는 오직 한반도에서만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분단체제가 세계체제의 지역적 전개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해마지 않는다. 그의 주장처럼 민족문제 - 계급문제 - 자유주의 문제(개혁주의, 개량주의)를 모두 통합해 분단체제의 극복 속에서 3개의 문제를 동시적으로 해결할 것을 기획하고 있는 것인데, 여러모로 이론적인 난점이 돋보인다.

 대충 백낙청이 왜 분단체제론을 굳이 이론화하지 않으려는지는 이해가 간다. 
이것은 그의 문학비평론에 대한 이해가 어느정도 있어야 가능한데, 내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백낙청의 민족문학론 테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 발전의 후발주자들, 그러니까 후진 지역에서의 문학활동이라는 게 과연 자본주의적 시대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의 최선진을 달리고 있는 영미지역에서의 문학활동만큼의 시대적 보편성을 구현해낼 수 있는가? 

백낙청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가능한가? 
한국과 같은 후진 지역에서 자신의 후진성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와중에서 선진성의 계기가 나타난다. 그러니까 후진성 속에서의 선진성의 계기를 이끌어내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후진상태의 정확한 인식은 필연적으로 세계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을 파악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한 정확한 인식이라는 게 중요한데, 이는 문학방법론적으로는 리얼리즘을 택할 수밖에 없게 하기도 하지만 공평무사한 인식이라는 것 자체가 불교적 의미의 중도적 지식인, 중용적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주체"를 탄생시킨다. 그가 계속해서 '변혁적 중도주의'를 주장하는 것에는 문학 비평의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주체 형성의 과정은 세계사적 차원에서 볼 때 자본주의의 전개를 뒷받침하는 서구적 인식론, 서구 사상의 전개를 후진 지역에서의 "민중"의 출현과 그 민중이 수용하는 과정과 맞물려 들어간다. 서구적 근대가 후진 지역의 민중과 상호작용하며 그 후진지역에 내재한 자본주의를 극복할 사상적, 문화적 기반을 이용해 새로운 영역으로 넘어갈 수만 있다면 자본주의적 근대를 넘어설 선진의 계기가 구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낙청은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존의 서구의 정신사가 본질과 현상의 이분법적 구별에 기반하여 비서구, 비주체, 비남성 등을 대상화하고 그에 대한 폭력행사가 정당화되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고 본다. 그는 서구의 정신사가 이것을 자체적으로 극복하기란 불가능하고 비서구 지역의 민중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그들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역사적 사건, 계기 속에서만 극복의 계기가 나타날 것이라고 본다. 이 연장에서 백낙청의 문학론은 시민문학론을 거쳐 민중문학론, 리얼리즘론 등으로 진화해나갔다.

 이런 그의 문학비평론을 전제로 했을 때 분단체제"론"을 하나의 이론적 틀로 체계화하는 것은 남북한의 민중들의 창조적 역량을 무시하는 오만한 행위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입을 다무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분단체제론을 통해 분단극복이 비서구 지역에서 이뤄지는 근대극복의 한 과정이라는 인식 속에서 그는 자신의 분단체제론을 변화하는 현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점검하고 체계를 넓혀가고 있을뿐, 그것을 온전히 체계화된 하나의 어떤 프로그램으로 만들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어떤 이론적 관점을 제기하는 입장이기에 아주 설명이 없지는 않아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본주의적 세계체제론이 가하는 압력이 분단체제를 매개로 북의 사회주의 체제와 남의 자본주의 체제 모두에 작용하고 있다는 인식 하에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내가 가장 의문이 드는 것은 왜 중국은 분단체제가 아니라고 보는가 하는 부분이다. 백영서 등의 동아시아론을 살펴보아도 중국이 분단체제가 아닌 이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분단체제, 그것이 있다고 한다면, 의 형성에 있어서 그 기원을 찾자면 중국국민당 - 대한민국임시정부 대 중국공산당 - 동북항일연군 간의 대립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보기에 한반도의 분단은 중국의 분단과 연결되어 '동아시아 내전'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국민당(과 임정) 및 공산당(과 항일연군)이 좌우합작을 통해 나름대로 수렴하는 과정을 보여줬지만 일본제국 붕괴 속에서 주권의 부재적 상황을 메우려는 두 집단의 대립이 한국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긴 내전 과정으로 귀결되었다고 본다면 중국의 분단 또한 일종의 분단체제로 보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또한 보다 이론적으로 분단체제가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와 남북한 각각의 체제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때 그 매개가 어떤 식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각각의 모순들이 분단모순과 어떻게 접합하게 되는지에 대해 백낙청은 별다른 설명이 없다. 그는 되려 이런 비판을 가하는 학자들에게 자신은 그것을 해낼 자신이 없으니 관심이 있으면 도전하라는 식으로 비판(?)을 하는데 독자로서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다. 

 내가 보기에 만약 백낙청이 말하는 분단모순, 그러니까 남한의 민주화 혹은 체제개량의 추진 속에서 남북간의 대립으로 인해 개혁의 추진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체제의 '내적 원리'가 아니라 반대로 백낙청이 분단모순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는 남북한의 체제의 모순 속에서 그 계기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하자면 남북 간의 대립이 각 체제 내부의 개혁을 가로막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단체제라는, 독자적인 체제 혹은 모순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애당초 근대국가 자체가 "적"을 설정하는, 적을 설정하지 않고는 정치를 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남의 자본주의와 북의 사회주의에 공통되는 것으로부터 분단모순을 정립하는 방법론이다.

 이것은 분단체제론을 보다 본격적으로 이론화하는데도 필요한 것인데 근대 사회 내에서의 '정치'라는 것은 카를 슈미트가 이미 오래 전에 언명했듯이 "적과 아군의 구별"을 그 핵심으로 한다. 이것은 국가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국가의 적이 없이는 국가의 정체성 자체가 형해화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독일 나치즘이 소련을 '적'으로 설정했기에 기능할 수 있었듯이, 미국이 소련 혹은 중국 등의 전체주의 국가들을 '적'으로 상정했기에 기능할 수 있었듯이 한국의 근대국가 또한 북조선이라는 적이 없이는 기능할 수가 없다. 이것을 증명하려면 사실 슈미트처럼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관한 긴 글을 쓰든지 아니면 근대국가론을 써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중첩되는 여러 모순들을 분단모순으로 묶을 계기가 생겨난다.

 한반도의 북조선과 한국 모두 근대국가 시스템을 갖고 있고 그것의 작동과정 속에서 민중의 의사를 국가가 억압하는 지점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그런 분단모순이 작동하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분명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모순이 근대국가의 이러한 기능을 매개로 각 체제에 압력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단체제론이 정교화되는 측면이 생긴다. 앞서 말했던 민족모순, 계급모순 등의 다양한 모순들이 모두 동등한 지반 위에서 묶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백낙청이 말하는 다원방정식(다원방정식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어쨌든 각각의 모순=변수들이 방정식의 형태로 환원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였을 때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은 정교화되는 것이 아니라 형해화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만약 근대의 정치라는 게, 근대국가라는 게 적이 없이는 기능할 수 없는 체제라면, 그래서 국내의 개혁정치를 어느정도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비단 한반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근대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분단체제의 특수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을 정교하게 할 수가 없다. 그의 입론을 정교화하기 위해서는 분단모순 그 자체를 특정해서 남북한의 각각의 체제가 어떻게 분단체제에 종속되는지가 좀더 명료해져야 하는데 아쉽게도 그의 언명으로는 위에서 말한 방법 외에 달리 사용할 방법이 없다. 그 자신이 보다 정교하게 논의를 펼치지 않는 이상 분단모순으로 다른 모순들을 묶어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지금까지의 내 이해이다.

 사실 백낙청의 분단체제 극복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남북한의 민중이 서로 연대하게 되는 필연성이 제대로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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