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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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지향은 중립화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민주당 쪽의 목표 자체가 남북통합을 이루면서 경제적으로는 세계시장에 포섭되어 있지만 어느정도 중립적 지대로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게 아닌가, 내 개인적인 이해로는 그렇다.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본다. 나름대로 대한제국 시절부터 한국이 끈질지게 추구해오던 전략이 중립화였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이 방면에서 가장 종합적인 한국적 이론서라고 해야 할까? 그걸 꼽으라고 하면 유길준의 <중립론>이지만
그것이 역사적 전망과 결합돼 하나의 문명론으로 전개된 건 역시나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비롯한 일련의 저작들이다. <청일전기>, <한국교회의 핍박> 등을 통해 전개되는 이승만의 이론적 입장을 꼼꼼하게 독해해보면 이승만은 대한제국기부터 이어진 중립화론 담론을 일종의 역사관으로 종합해 전개하고 있다.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 서술해보자면 이승만이 보기에 세계종교는 구종교와 신종교로 나눌 수 있는데 신종교를 택한 지역은 여지없이 근대화에 성공하며 세력을 떨치는데 반해 구종교를 택한 나라들은 모두 쇠락하거나 패권주의적인 악행을 저지르는 국가가 되었다.
대표적인 게 바로 '러시아'이다. 유교, 이슬람교, 카톨릭교, 그리스정교 등의 구종교들을 택한 나라는 근대를 체현하지 못했다는 게 이승만의 이해이다. 그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이 가야 할 길에 대해 고민한다.
이승만은 한국인을 근대인으로 주조해내는 기구로 교회를 택한다.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한국 곳곳에 교회를 세우교 개신교화를 하면서 구종교적 습속을 제거하고 근대인의 품성을 익히게 하면 근대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개신교화된 한국이 중립지대로서 서구문명과 완전 개방 형태의 통상을 이어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단한 부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특히 한국의 중립화는 일본의 대외확장을 억제하고 중국 및 러시아의 해양진출을 막을 수 있는 이중의 방파제로써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 개신교화는 일종의 인종주의적 편견이 깔려 있는 주장이다. 그가 보기에 상급의 인간인 구미 지역의 백인종들에 가장 가까운 것이 한국인이다. 한국인은 조선왕조의 유교화로 인해 반半야만 상태에 놓여 있지만 '원래' 상급 인간이기 때문에 아프리카 흑인종과 같은 하급 인종, 일본인 및 중국인과 같은 황인종 중급인간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개신교화를 통해 상급 인간으로 온전히 편입되고자 하는 이승만의 인종주의적 편견이 이 주장의 근간에 있다.
이것이 주변의 일본, 러시아, 중국 등에 대한 이승만의 적대감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이 보기에 세계문명의 기축은 역시나 영미권이 잡고 있다. 서둘러 개신교 문명으로 거듭나 영미의 상급 인간들 틈에 한국인이 들어가야 하는데 하등한 종족인 러시아에서 나타난 반反종교적인 공산주의자들도 용납할 수가 없고, 천황제를 종교로 숭배하는 일본제국주의자들과도 함께 할 수가 없다. 개신교 문명을 거부하는 공산주의, 천황제 제국주의 모두 이승만에게는 적대의 대상이었다. 그는 미국이 한국을 동아시아 자유민주주의의 파트너로 선정하지 않는 것에 대단한 불만을 갖고 있었는데 이런 맥락 속에 있다고 본다. 이것이 더 나아가서 한국전쟁 당시 그가 인민들을 학살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을 못 느꼈던 것과도 연결된다고 본다. 개화되고 개신교화된 국민과 달리 공산주의와 연루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가 별로 없다.
한국의 중립지대화와 중간지대로서의 무역활성화를 지향하던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변하여 소련 공산주의를 비롯한 반反개신교적 문명과의 사활을 건 투쟁론으로 변모한다. 앞서 말한 인종주의적 편견이 깔린 상황에서 문명사적 대결이라는 내용이 더해지자 이승만은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아예 세계 자유민주주의의 선봉, 전위기지로 활용하고 자신이 그 지휘자 역할을 하려고 한다.
나는 이런 이승만의 투쟁론적 입장은 그의 퇴진에도 불구하고 냉전 시기동안 한국 지도부의 정신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도 나름대로 한국의 군사기지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것이 민주화를 거치면서 많이 형해화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승만으로부터 아주 벗어난 것이라기보다는 전기 이승만, 그러니까 한반도의 중립지대화와 중간지대로서의 무역활성화를 축으로 하는 외교적 지향으로 선회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승만의 통찰이 대단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한반도의 지정학적 입장에서는 중립지대화를 하든지 분단을 시키든지 특정 가치의 선봉, 전진기지 역할을 하든지 이것들 중 하나밖에 될 수 없지 않나. 그런 맥락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민주당은 중립지대화를 꾸준히 추구해왔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도 이 맥락 위에서 움직인다고 본다. 일본이 아닌 한국이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의 주요 파트너국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부터 이승만의 사유와 비슷한 지점이 많다고 본다. 어쨌든 한국은 주변국들을 별로 믿지 않고 있고 그런 맥락에서 미국을 어떻게든 끌고 와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문재인 정부도 그런 맥락 위에서 있고 과도할 정도로 북조선에 호의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도 이 맥락 위에 있다고 본다. 문제는 실패했다는건데..
유길준 - 이승만의 중립지대론 테제를 넘어설 새로운 저작은 어디서 나올까? 좀 그런 맥락에서 고민을 해보고 싶다. 다른 저작들도 더 많이 보려고 하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한국은 참 여러모로 고전 혹은 경전이 될 텍스트가 없는 조잡한 사회 같다..
4 comments
Taehwan Shin
개인적으로 중립론은 현실성이 전혀 없는 wishful thinking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되는 걸 계속 된다고 우기는 느낌이랄까요.
· Reply · 18 h
손민석
예, 특히나 미중대립의 시대에는 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어쨌든 민족주의와 연결돼 꾸준히 추구하는 흐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ㅎㅎ
· Reply · 18 h
배강훈
이렇게 말씀 들으니 이승만이 반도의 총통이 되다 만 사내같은 느낌이군요ㅋㅋ
· Reply · 11 h
손민석
ㅋㅋㅋㅋ 그래도 장제스보다는 약간 사상가적인 풍모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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