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식 ‘평화에 미치다’ 한겨례 기고 다시 읽기 – 박한식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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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45회 한민족 통일 실천방안-마지막회
길을 찾아서-44회 나의 통일론 (하)
길을 찾아서-43회 나의 통일론(상)
길을 찾아서-42회 ‘트랙2 회담’ 성사시키다
길을 찾아서-41회 국제문제연구소(GLOBIS
길을 찾아서 (40회) 내가 학문하는 목적은
길을 찾아서 (39회) 조지아주 애선스 입성기
길을 찾아서-38회 조지아대학 교수가 되다
“1960년대 ‘반전운동 기지’ 미네소타에서 ‘평화학’ 초석 다졌다”
“모두 이산의 민족이니 ‘750만 재외동포’는 통일 자산이다”
“마틴 루서 킹의 모교에서 준 ‘예비 노벨평화상’…과분할 뿐이다”
“북한 농학자들 ‘미국 농축산업 견학’ 제안에 뛸듯 반겼다”
“두 기자 석방 위해 평양행…북은 ‘빌 클린턴 특사’ 고집했다”
“한국전쟁 70년…미국의 ‘북한 악마화’ 넘어서야 끝난다”
“개성에 이산가족 상봉지구 만들어 ‘민족의 한’ 풀어주길”
“미국 첫 방문한 덩샤오핑 배려로 하얼빈 가서 고모 상봉했다”
“세상 부럼 없다는 북한 사람들 ‘행복지수’ 잣대부터 다르다”
“주체사상-마오쩌둥사상 ‘뿌리’ 같아 유사하지만 ‘표절’ 아니다”
“김일성 없는 북한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주체사상 때문이다”
“북한은 어버이수령이 지배하는 거대한 가족국가다”
“북한에서 가장 완벽한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김일성이다”
“북한은 주체사상의 나라…‘역지사지’ 눈으로 봐야 보인다”
“허정숙 초청으로 첫 방북…머리에 뿔 달린 악마들 없었다”
“북한 실세는 누구인가…집단의사결정 모르는 우문일 뿐”
“사회주의 국가 ‘북한’ 이해하려면 ‘선’ 넘어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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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족 통일 추진위’ 꾸리고 개성에 ‘평화·통일대학’ 세우자”
등록 :2020-12-08 22:57수정 :2021-01-04 13:37
김경애 기자 사진
김경애 기자
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6·15 선언’ 가장 대표적 통일 합의
정권 바뀌자 다시 군사적 긴장 고조
남 진보보수·북 정권·재외동포까지
‘추진위’에서 모두 공유할 통일관부터
‘한 민족·두 국가·세 정부’ 모델 제안
제3정부는 낮은 단계의 연방정부 형태
‘분단사 자산’ DMZ 통일 영토로 삼아
제3정부 도안·설계할 ‘통일대학’ 시급
1636년 청교도 ‘하버드대학’ 설립처럼
‘분단문화 해체·통일문화 창출’ 중요
건강·예술·정치·인문·환경대학 등
5개 단과대 제안…‘세계 평화 기지’로
길을 찾아서-45회 한민족 통일 실천방안-마지막회
박한식 교수는 분단 75년 동안 남북한의 정치적 변동 때마다 통일정책이 뒤집히는 ‘관성’을 지적하며, 한민족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통일관을 도출해낼 기구로 ‘범민족 통일 추진위원회’ 구성을 제안한다. 실제로 ‘6·15 남북공동선언’ 20돌을 맞은 올해 남과 북, 그리고 재외동포는 제각각 다른 행보를 보였다. 남쪽에서는 6월15일 강원도 철원 노동당사 앞에 2000년 6월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동선언’을 발표하던 순간의 사진을 새긴 대형 펼침막을 걸어 20돌을 기념했다. 사진 연합뉴스
통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남북 간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늘 제자리걸음인 현재의 한반도 상황과 요원한 남북통일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때로 좌절감마저 들게 한다. 지금까지 남북한이 함께 마련한 가장 대표적인 통일의 길은 ‘6·15 공동선언’이었다. 6·15 선언에서는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고,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결의했다.
‘6·15 선언’의 정신에 따라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에서는 남북 간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는 성과가 있었으나,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 교류는 막히고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또다시 최고조로 치달았다. 이런 역사적 패턴을 염두에 둘 때, 문재인 정부에서 남북 간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긴 하지만, 남한에 이른바 ‘보수정권’이 다시 들어서게 된다면, 다시 경색 국면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요컨대 ‘6·15 선언’은 남한의 보수진영과 공유되지 못하는 명백한 한계를 보여주었고, 이런 역사적 패턴이 되풀이되면 한반도의 통일은 무한히 지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21대 국회와 협력해 ‘4·27 판문점 선언’의 비준을 추진하려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통일 전의 동·서독 관계와 남북한 관계는 역사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측면 등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독일식 ‘흡수통일’이 한민족의 통일 모델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전 연재에서 이미 지적했다. 무엇보다 통일정책을 살펴보면, 서독과 남한이 보여주는 차이점이 분명하다. 서독에서는 진보적 사회민주당에 속했던 빌리 브란트가 1970년대 초반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던 ‘동방정책’(Ostpolitik)이 보수적 기독교민주당이 집권한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시행되었다.
서독의 진보-보수 양당은 서로 다른 정치적 신념에도 독일 통일에 대한 비전과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동방정책을 20년간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른바 진보정권과 보수정권은 통일에 대한 비전과 가치를 공유하지 못할뿐더러, 그들의 통일관은 극심하게 상충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보수정권이 집권했을 때, 진보정권의 산물인 ‘6·15 선언’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이유도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6·15 남북 공동선언 20돌 바로 다음날인 지난 6월16일 북한은 ‘6·15 선언’의 상징적인 산물인 개성공단의 장기 폐쇄에 항의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전격 폭파하고 17일 폭파 장면 동영상을 공개했다. 사진 조선중앙통신 제공
민주평통 유럽·중동·아프리카 지역회의는 ‘6·15’ 20돌을 맞아 지난 5월13일(독일 현지시각) 온라인 화상으로 운영회의를 열어 남북 당국에 ‘6·15 선언’의 이행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기로 결의했다. 사진 재외동포신문 제공
한국의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한반도 통일정책을 안정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진보·보수, 북한 정권, 그리고 재외동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통일관을 정립해야만 한다. 현재 재외동포는 약 800만명에 이르지만, 통일 논의에서는 대체로 배제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재외동포가 축적한 풍부한 경험은 민족의 자산이 아닐 수 없으며, 그들 역시 통일의 주역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민족 모두가 공유하는 통일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남한의 진보·보수 대표자, 북한의 대표자 그리고 재외동포 대표자가 모두 참여하는 ‘범민족 통일 추진위원회’(가칭) 구성이 시급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범민족 통일 추진위원회’는 남북한의 정치적 변동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한민족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통일관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범민족 통일 추진위원회’에서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논의하고 발전시키기를 희망하는 의제로 ‘한 민족, 두 국가, 그리고 세 정부’(One nation, Two states, and three governments) 통일 모델과 ‘평화·통일대학 설립’ 두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박한식 교수는 지난 40여년 동안 미국과 남북한을 오가면서 정립한 자신만의 ‘한반도 평화통일 방안’을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8년 미국 애틀랜타한인회에서 연 강연회 모습이다. 사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애틀란타협의회 제공
이는 통일은 절체절명의 민족 과제라는 사명을 가지고 남과 북 두 국가의 현존 체제가 상호존중 아래 존속하면서, 제3의 정부, 즉 통일정부를 구성하고 수립하자는 방안이다. 남과 북이 각자 자기모순(남은 빈부격차와 불평등한 분배, 북은 가난과 국제적 고립)을 성실하게 극복하면서, 제3정부는 남과 북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동질성을 진작시켜 합을 만드는 통일 이상촌을 건설하는 구실을 하는 새로운 실험 형태의 정부가 되는 것이다. 제3정부는 외교와 국방 같은 강력한 권한을 소유하지는 않지만 남북연락사무소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독자적인 영토를 가지고 입법·사법·행정의 기능과 권한을 행사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정부 형태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는 또한 전쟁의 상흔이자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가 오히려 한민족 통일 역사에 있어 값진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3정부는 비무장지대를 고유 영토로 관장하면서 이산가족, 재외동포, 그리고 누구든지 와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공민권을 부여함으로써 주체적인 ‘독자 정부’, 다시 말해 통일을 실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통일정부의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정부가 설계하고 건설하는 통일 이상촌은 남과 북의 이질성을 물리적 결합이 아닌 화학적 결합을 통해 극복해 인권이 보장되고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며 친환경적인 주거환경에서 쾌적하고 윤택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한민족 공동체가 될 것이다.
지금 비무장지대는 정전협정상 유엔사 군사통제 아래 있는 게 현실이지만, 남과 북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고 제3정부 수립을 합의한다면 남북한이 비무장지대에서 유엔사의 철수를 요구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도 마련되는 것이다. 물론 비무장지대에 남북한이 합의하여 제3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라는 지레짐작으로 시도조차 않고 포기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제3정부 수립에 관한 논의는 많은 노력과 지혜 그리고 철저한 공부가 필수적인 거대한 프로젝트이다. 이상적인 제3정부의 모습을 제시하고 도안, 설계하는 일이 시급한 통일 과제라고 생각하면서 그 일을 위해서 우선 평화·통일대학 설립이 필요하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박한식 교수는 ‘범민족 통일 추진위’ 주도의 통일방안 연구기구인 ‘평화·통일대학’을 개성에 설립하자고 제안한다. 사진은 2004년 6월30일 개성공단 시범단지 준공식 장면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평화·통일대학이 비무장지대에 설립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미군이 관장하는 유엔사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사안이기 때문에 우선은 남북한 합의만으로도 가능한 개성에 설립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개성은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의미 있는 지역이다. 개성공단은 경제 분야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남과 북이 합의하여 실질적으로 15년 이상 통일의 과정을 실험한 경험이 있고, 통일 고려의 수도였으며, 현재도 성균관이 존재하는 교육도시로서 개성 평화·통일대학이 들어서기에는 최적의 입지이다. 개성 평화·통일대학은 한민족 통일국가에 부응하는 정치 체제와 통일문화를 창출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개성 평화·통일대학이라는 생소한 기구를 제안하는 까닭은 분단 70년의 역사에 대한 이론적 반성 때문이다. 주지하듯, 지난 75년은 남북 간의 격렬한 갈등과 대립의 역사였고 남북갈등과 남남갈등은 그 역사 속에서 축적된 분단문화의 파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그리고 현재의 문재인 정부까지 대북 화해정책이 남한 내부의 남남갈등을 반복적으로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단의 역사에서 축적된 분단문화가 강력한 ‘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처럼 강고한 분단문화가 건재한 상태에서는 문재인 정부와 김정은 정부가 각고의 노력 끝에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정치적 합의에 도달한다손 치더라도 이후 안정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대단히 희박하다. 남북 사이에 추진되는 통일정책과 통일제도가 한반도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정책과 제도를 안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통일문화가 먼저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만 한다고 판단된다.
개성 평화·통일대학은 분단문화를 철학적으로 해체하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통일문화를 창출하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통일문화를 한반도에 확산시키고 정착시키는 임무를 선구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한민족의 통일정책과 통일제도가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더 나아가 개성 평화·통일대학에서 창출된 통일문화를 전쟁 상태에 처한 세계에 전파함으로써 세계 평화를 선도하는 구실도 수행할 것이라고 믿는다.
개성 평화·통일대학 설립을 제안하면서, 나는 영국의 퓨리턴(청교도)이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와 약 16년에 걸쳐 최소한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자마자(1636년) 미국 최초의 대학인 하버드대학을 설립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당시 퓨리턴은 하버드대학을 설립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가호로 뉴잉글랜드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우리는 우리의 거처를 마련했고, 우리의 생필품을 준비했고, 하느님에게 예배드릴 수 있는 편리한 공간을 마련했고, 시민정부까지 설립했습니다. 우리가 그다음으로 열망하고 기대한 것 중 하나는 배움을 증진시키고, 그것을 영속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현재 활동하시는 우리의 목사님들께서 돌아가셨을 때, 우리 교회에 무지몽매한 목사님들만 남게 되는 상황을 매우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박한식 교수는 ‘개성 평화·통일대학’의 본보기로 1636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청교도들이 세운 최초의 교육기관인 하버드대학을 제시한다. 하버드대학의 투어 프로그램은 입구인 존슨 게이트에서 설립 이념을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사진 위키피디아
지금 이 구절은 하버드대학 정문 옆 벽면에 새겨져 있으며, 퓨리턴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 즉 기독교적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학을 통해서 기독교적 이상국가에 부응하는 ‘삶의 양식’(Lebensführung, way of life)을 지속적으로 교육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판단했었다. 현재 하버드대학이 미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할 때, 384년 전에 퓨리턴이 내린 판단은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버드대학의 입구인 존슨 게이트에는 뉴잉글랜드에 최초로 정착한 청교도들이 ‘기독교적 이상 국가 건설’을 내걸고 1636년 대학을 설립했던 이념을 새긴 명판이 붙어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제공
우리가 한민족 통일국가라는 전인미답의 세계로 진입하고자 할 때, 개성 평화·통일대학을 통해서 분단문화에서 육성된 남북한의 강고한 분단 지향적 삶의 양식을 철학적으로 해체하고, 통일국가에 부응하는 통일 지향적 삶의 양식을 새롭게 정착시키는 것은 통일국가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새로운 국가 건설만큼이나 어렵고 복잡한 한반도 통일을 모색하는 데에는 하버드대학에 버금가는 교육기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개성 평화·통일대학을 구성하는 5개의 단과대학을 아래와 같이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건강대학은 남에서 발달한 서양의학과 북에서 발달한 고려의학을 창의적으로 아우르는 대학으로, 치료 중심의 서양의학과 예방 중심의 고려의학을 조화시켜, 그 성과를 국제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단과대학은 예술대학이다. 예술의 본질은 이질성의 조화로 정의될 수 있다. 남과 북이 협력해서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고, 또 그것을 세계로 확산시키는 노력을 꾸준히 경주할 때, 남과 북의 조화로운 통일문화 또한 배양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셋째는, 정치대학이다.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분배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남의 자본주의와 북의 사회주의를 창의적으로 조화시킴으로써 분배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이론과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정치대학의 주요 과제다. 넷째, 인문대학은 남과 북의 문화적 통일을 준비하는 대학이다. 물질 중심의 남한 문화와 북한의 이념 중심 문화를 창의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 이론과 방법을 확립하는 연구를 수행할 대학이다. 또한 세계 평화를 위한 평화이론을 개발하고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토대를 확립하여 인간 존엄에 기반한 다양한 인권 신장을 추구하는 연구도 병행하는 대학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생태 환경대학이다. 무분별한 환경 파괴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단계에 다다랐고,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전염병의 창궐로 인류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했다. 인간과 환경이 유기적 상호 공생을 할 수 있는 연구와 지혜가 이 대학의 주요한 연구가 될 것이다. <끝>
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73369.html#csidxd8c323c7d465a8e91623ebffb197e4c
길을 찾아서-44회 나의 통일론 (하)
“한민족 관습 깃든 ‘동질성’ 맞춰 통일문화부터 가꿔야 한다”
등록 :2020-11-23 22:24수정 :2021-01-04 13:41
김경애 기자 사진
김경애 기자
1980년대 방북 초기 10차례 느낌은
‘여기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 충격
한때는 ‘이북 사람이 살고 있구나’
마침내 ‘우리 민족이 살고 있구나’
‘같은 언어’ 통일 초석이자 자산
4·27 정상회담 때 ‘도보다리’ 산책
“두 정상 통역 없이 직접 소통 가능”
‘역사적 경험’ 통일 당위성 정당화
‘단군신화’ 민족의 기원으로 공유
2014년까지 개천절 남북공동 기념
‘같은 음식’ 생활방식·정서 비슷
‘양심’ 사람다운 절대가치로 중시
길을 찾아서-44회 나의 통일론 (하)
박한식 교수는 평생 탐구해온 ‘평화학’의 시각에서 도출해낸 ‘변증법적 통일론’의 근거로 남북한의 동질성에 주목한다. 남북은 오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으며 같은 언어, 관습, 생활방식, 가치관 등을 지닌 한민족으로서 ‘통일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은 2018년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통역없이 판문점 도보다리 산책을 하는 모습이다. 사진 판문점공동취재단 제공
지난 40여년간 북한을 50여 차례 방문했다. 한번 방문에 짧게는 3박4일 길게는 일주일 이상 머물렀다. 나의 ‘평화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북한을 알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옳게 알고 싶었다.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북한에 가서 그곳의 현실을 직접 관찰하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래야만 남북한 통일과 평화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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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이 거듭되면서 북한 체제와 사회, 그리고 북한 인민들에 대한 나의 감상과 소회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 10차례 정도 방문했을 때는 ‘여기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참 많이 들었다. 우리처럼 매일 저녁 찬거리 걱정도 하고 자녀의 학교 성적에 기대와 걱정도 하고 일요일이면 ‘가족 나들이 한번 가볼까’ 하는 계획도 한다. 여름밤 대동강변은 젊은 남녀들의 거대한 데이트 장소로 변한다. 머리에 뿔이 달린 악마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철저한 반공 교육과 미국의 북한 악마화로 인해 세뇌되었던 나의 무지와 편견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북한을 20차례 정도 방문했을 무렵에는, 북한에는 ‘이북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북한 체제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남한과의 현저한 이질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상세히 소개했듯이,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한 철저한 조선식 사회주의에 입각해서 인민들의 생활이 영위되고 있었다. 사유재산을 철폐하고 집단소유제를 채택함으로써, 그리고 필요에 따른 분배를 실천함으로써 평등이라는 목적 아래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또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체주의 의식 속에 철저히 세뇌되어 살고 있었다. 개인의 이익이나 욕구를 초월해서 당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민족 같은 집체의 이익이 우선되며, 개인이 집체의 이익에 공헌할 때 비로소 바람직한 생명체가 된다는 인식이 철저히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배격과 반미주의를 내세운 철저한 민족주의 아래 모든 일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생존 위협에 응전하는 역사를 살아야만 했던 북한은 가혹한 국제정치적 투쟁의 역사를 걷는 가운데 강력한 민족주의를 탄생시켰고, 국제적 고립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북한의 민족주의는 극단적인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과 기름처럼 전혀 융화될 수 없을 것 같은 남과 북의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북한 방문이 거듭될수록 북한에도 조선 민족, 즉 ‘우리 민족이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오랜 갈등과 반목, 그리고 분단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이 공유하고 있는 상당한 동질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하고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지난 연재에서, 남과 북이 서로의 이질성을 이해하고, 그렇게 이해한 이질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며, 그 이질성을 평화적으로 조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이 통일의 길이라고 역설했다.
아울러 남북한이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동질성을 발견해서 꾸준히 진작시키는 노력도 이질성의 조화만큼이나 통일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다. 서로의 동질성을 학교 교육, 사회 교육, 언론을 통해서 알리고 국민(인민)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통일 교육이고 이것이 바로 통일문화 조성의 핵심이다. 통일문화는 통일 뒤에 만들거나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통일 과정에서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자리잡은 통일문화는 남북한의 정치적 합의를 통해서 마련한 통일제도가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버팀목이며, 더 나아가서 통일 뒤에 진정하고 완전한 민족 통합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다.
75년 동안 헤어져 살았어도 누가 뭐래도 남과 북은 같은 민족이고 정체성을 공유하는 단일 민족이다. 남북의 동질성은 민족의 깊은 관습(Ethos) 속에 내재되어 있고, 이것은 자본주의-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처럼 교육이나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서 단시간 안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민족의 관습은 가치와 규범에 대한 믿음 체계이며 수백년 또는 수천년의 세월을 통해 집단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한 개인이나 정부가 변화시키거나 없애버릴 수 없는 영속성을 지닌 민족의 기풍 또는 정신이다.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은 통역없이 단독 대화를 수십분간 나눠 국제사회에 남북한이 같은 언어를 쓰는 한민족임을 각인시켰다. 사진 판문점공동취재단 제공
내가 느낀 남북의 동질성은 크게 세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는 언어가 같다. 과학철학적 인식론의 시각에서 볼 때, 남북한의 언어가 같다는 것은 사고방식, 의식 구조, 가치관 등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을 방문하면서 사실 걱정했던 것 중의 하나가 혹시 말이 통하지 않아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남한에서 중·고교 시절 받았던 반공 교육을 통해 북한의 언어가 많이 이질화되어서 남한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어렵다고 배웠고, 특히 내가 미국에 오래 거주한 터라 나의 우리말 구사 능력이 조금은 걱정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북한에 가서 북한 관리들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과 대화하면서 단어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없었다. 또한 북한 사람들 중에 나의 억센 경상도 억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물론 남과 북 사이에 단어나 표현들이 조금씩 변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남한에서는 화장실이라고 표현하지만 북한에서는 위생실이라고 부르고 남한에서 상호관계는 북에서는 호상관계다. 한가지 생소했던 것은 북한 사람들이 ‘인차 돌아오겠습니다’라는 말을 종종 하는데 남한에서 ‘곧 돌아오겠습니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문맥에서 이해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2018년 도보다리에서 배석자나 통역 없이 30분 동안 이루어졌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둘만의 대화는 75년간의 분단과 세대 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같은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통일을 위해서는 소통과 조화, 그리고 상호이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데 언어가 같다는 것은 통일의 초석이자 자산이다.
단군신화를 민족의 기원으로 모두 인정하는 남북한은 2014년 10월3일 평양의 단군릉에서 ‘단기 4347년 개천절 남북 공동 행사’를 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둘째는 남과 북이 유구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민족이 공통으로 겪은 역사적 경험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민족에 대한 소속감과 자부심을 느끼게 하고 구성원들을 통합하는 순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동일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통일의 당위성을 정당화시켜줄 뿐만 아니라 남북이 같은 민족이란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동질성의 대표적 예다. 북한에서도 모두가 고조선, 고구려, 삼국시대, 고려, 조선 등의 역사적 사실을 교육받고 분단 이후에도 남과 북이 분단 상황으로써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우리 민족이 동일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단일 민족이라는 의식은 남과 북이 함께 기념하고 있는 10월3일 개천절 행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남과 북 모두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공유하고 있고 개천절을 우리 민족의 태동과 한반도 최초의 민족국가 건국을 경축하는 민족 고유의 명절로 기념하고 있다. 특히 북한에서는 1993년 발굴된 단군릉을 이듬해 70m 높이의 아홉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로 거대하게 조성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있다. 나는 단군릉을 조성하기 이전과 이후 두 차례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남과 북은 과거 몇 차례 단군릉에서 공동으로 개천절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지만 2014년을 마지막으로 남과 북이 함께 하는 공동 개천절 기념행사는 열리지 못하고 있다.
언어, 역사와 더불어 뿌리 깊게 보존되고 있는 남북한의 동질성은 ‘관습’과 습속 차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선, 인간에 대한 견해를 보면 남북한 모두가 ‘인간’과 ‘사람’을 구분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다. 한번은 평양 외곽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한 어린아이가 대문을 박차고 엄마의 꾸지람을 피해 달아나는 모습을 목격했다. 곧이어 뒤따라 나오던 엄마가 아이의 등 뒤에 대고 “저 인간 언제 사람 되느냐?”라고 소리치는 광경을 보았다. 인간이 도덕적, 사회적, 질적으로 완성된 단계에 도달해야만 ‘사람’으로 간주하는 ‘사람관’이 남북한 모두에 깊이 존재하고 있다.
‘양심’ 또한 남북한 모두에서 ‘객관적 절대가치’를 의미하는 공통된 관습이다. 북에서도 “저 사람은 양심도 없나?”라는 얘기를 자주 듣곤 했다. 남북한 모두에서 가장 강력한 도덕적 질타는 ‘양심의 가책’을 묻는 것이고 양심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도리’라는 관습적 가치다. 양심은 주체사상이나 민주주의보다 더 높은 가치이며 북한에서는 아무리 주체사상으로 중무장했더라도 양심이 없는 인간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
김치와 겨울철 김장 풍습은 남북한의 대표적인 공통 문화로 꼽힌다. 2017년 12월 평양의 한 호텔에서 ‘김치경연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 우리민족끼리 제공
북한에서는 김치를 가장 중요한 월동 식량으로 여겨 ‘김장 전투’라고 부른다. 늦가을이면 김장용 배추를 가득 실은 트럭을 평양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진 연합뉴스 제공
북한은 2015년 ‘김치 담그기 풍습’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했다. 사진 유네스코 제공
생활 습성의 무수히 많은 동질성 가운데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남과 북의 음식이 꼭 같다. 북한에서도 김치와 된장 같은 우리 음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 물론이고 입맛도 남과 북이 거의 비슷하다. 같은 음식을 먹고 산다는 것은 같은 생활 방식을 꾸려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만나는 자리에는 늘 음식이 차려지고 같은 음식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 자리가 그만큼 편하게 느껴진다는 의미다. 미국에 살고 있는 많은 한국 사람이 음식을 매개체로 교류하고 심지어는 음식을 같이 만들어 먹고자 모일 때도 종종 있다. 그만큼 음식은 우리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고 남과 북의 동질성을 느끼게 해주는 큰 요인이다.
남과 북의 이질성만을 주목하면 통일의 길이 없는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통일의 길은 이질성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하고 남과 북의 동질성을 발견하고 진작시키는 심오한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발굴한 동질성은 한민족을 한 덩어리로 만드는 직접적 촉매제가 될 것이며, 동질성의 지평을 꾸준히 확대시키는 노력이 통일문화를 조성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자리잡은 통일문화는 남북한의 합의를 통해서 마련된 통일제도와 통일헌법을 안정적으로 완성할 수 있는 기둥이 될 것이다.
인류 역사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모든 제도는 그것의 이면에 탄탄한 문화적 지지층이 존재할 때에만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다. 예컨대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혁명은 서양에서 수입한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을 통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전통적 농촌문화에 자각적으로 의존한 마오 사상을 통해서 성공한 것이었다. 북한의 사회주의 역시 순수한 마르크스나 레닌 사상을 통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북한의 관습적, 문화적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주체사상을 통해서 성공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프랑스의 정치이론가 알렉시 드 토크빌은 1830년대 초 교도소 조사를 위해 수년간 미국 답사를 한 뒤 <미국의 민주주의>를 펴냈다. 사진 위키피디아
알렉시 드 토크빌 역시 그의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에서 “국가의 관습(문화)에 뿌리를 두지 못한 법률은 항시 불완전하다. 관습만이 국민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통찰했다. 그러면서 “오직 미국 국민만이 민주주의 제도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까닭은 미국인의 관습이 그 제도를 탄탄하게 지지하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막스 베버 또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자본주의의 발생과 그것의 정신은 당시 서구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 윤리와 관습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남북한의 동질성에 기초한 통일문화는 한반도의 통일을 우리 고유의 방식으로 성취할 수 있게 해주는 초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한반도의 통일문화를 선도적으로 창출하고 조성하는 막중한 역할을 담당할 것인가? 나는 영국의 신교도(퓨리턴)가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와 약 16년에 걸쳐 최소한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자마자(1636년) 미국 최초의 대학인 하버드대학을 설립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남과 북이 함께 참여하는 개성평화대학의 설립을 제안한다.
신교도들이 하버드대학을 통해서 기독교적 이상국가에 부응하는 ‘삶의 양식’(Lebensführung, way of life)을 발견하고 연구하고 지속적으로 교육했던 것처럼, 개성평화대학이 한민족 통일국가에 부응하는 통일문화를 창출하는 선도적 구실을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다음 연재에서 개성평화대학에 관한 구체적인 나의 생각을 소개하고자 한다.
구술집필 권준택 뉴욕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71170.html#csidx3632f7ed473e7ffa44edd6c0d7d75bc
길을 찾아서-43회 나의 통일론(상)
“독일식 흡수통일 아닌 한민족 특유 ‘변증법적 통일론’ 제안한다”
등록 :2020-11-09 15:20수정 :2021-01-04 13:51
김경애 기자 사진
김경애 기자
통일 여론조사 첫 설문부터 바꿔야
‘통일 필요한가’ ‘통일 이유는’ 대신
‘바람직한 통일의 길’부터 전제해야
‘무력통일론’ 전쟁 불러 비현실적
‘독일통일’ 오랜 동방정책의 산물
‘통일포기론’ 강제된 분단에 굴복
‘변증법적 통일론’ 3단계 과정 필요
남북한 이질성 이해~인정~조화
“더 높은 차원의 동질성 ‘합’ 도달”
남-자본주의·사유재산·개인주의
북-사회주의·집체주의·가족국가
“자체모순 해결하고 동질성 찾아야”
길을 찾아서-43회 나의 통일론(상)
박한식 교수는 정치학자로서 반세기 연구해온 ‘평화학’의 관점에서 한반도 통일의 방안으로 ‘변증법적 통일론’을 제안한다. 남북한이 서로 다른 이질성과 자체모순을 극복하고 한민족으로서 동질성을 찾아내 맞춰감으로써 마침내 ‘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북한을 철저한 집단주의로 통제하는 독특한 가족국가로 규정한다. 1950년대 천리마운동 때부터 퍼진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는 집단주의를 상징하는 구호다. 사진 연합뉴스
종종 언론 기관이나 학교 연구기관 등에서 실시한 통일 관련 여론조사를 접하곤 한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늘 설문지의 첫번째 질문이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또는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하지만 바람직한 ‘통일의 길’이 무엇이고 통일 한반도의 이상적인 정치사회 체제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전제 없이 이런 질문들을 묻고 대답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기존의 다양한 통일론은 모두가 심각한 내재적 결함을 안고 있다. 남한에서 북한을 극단적으로 증오하는 사람들은 전쟁을 통해서 한반도 통일을 달성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무력통일론은 압도적 파괴력을 지닌 전쟁 수단을 통해서 통일이라는 목적 그 자체까지 파괴해 버리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방안이다. 따라서 무력통일론은 북한에 대한 극단적 증오심을 끊임없이 충족시켜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는 자기 파괴적, 자기 부정적, 자기 최면적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 통일을 얘기할 때는 늘 독일 통일을 떠올리는 듯하다. 이는 한국의 통일관이 암암리에 독일 통일의 사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독일의 ‘흡수통일’은 한민족의 통일 모델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할 필요가 있다. 통일 전의 동·서독 관계와 작금의 남북한 관계는 역사적·경제적·문화적·정치적 측면 등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 통일은 1990년 10월 동독의 각 주가 서독에 가입하는 흡수통일 방식으로 이뤄졌다. 사진은 그해 11월9일 동독 대변인의 서독 여행 자유화 발표 직후 시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장면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제공
예컨대 통일 전 동서독 관계는 장기간의 동방정책(Ostpolitik) 덕분에 이질성보다 동질성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태에 있었지만 작금의 남북 관계는 동질성보다 이질성이 현격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독일의 흡수통일을 한민족 통일의 모델로 강제하게 되면 한반도는 ‘해방정국’ 때처럼 격렬한 혼란의 도가니로 빠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한민족의 통일방안은 외부의 통일 사례를 손쉽게 답습해서 마련해서는 아니되며, 반드시 남북 간의 특수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런 이해를 세심하게 반영해서 마련해야만 한다. 한민족 ‘특유의’ 통일방안만이 한반도에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젊은 세대와 적지 않은 규모의 기성세대들 사이에서 통일을 하지 않고 남남처럼 사는 것이 좋다는 이른바 ‘통일포기론’의 인식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즉 경제·체육·문화 등과 같은 분야에서만 교류하고, 정치적 통일은 포기하자는 것이다. 통일포기론은 분단 75년의 역사가 낳은 인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민족은 수천년간 통일국가에서 살아왔으며, 한반도 분단은 외세에 의해 강제된 것인데 그처럼 타율적인 분단을 우리 스스로 존속시키고자 한다는 것은 민족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기존의 다양한 통일론이 지닌 결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변증법적 통일론’을 제안한다. ‘변증법적 통일론’은 가장 우선적으로 남북 간의 현격한 ‘이질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그럼에도, 더 나아가서는 동질성이 있기 때문에,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한민족 특유의 통일방안’(Korean Style of Reunification Blueprint)이다. 남과 북이 서로의 이질성을 이해하고, 현실적으로 인정하며, 이를 평화적으로 조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더 높은 차원의 동질성, 즉 새로운 합에 도달할 때 비로소 통일의 지평이 자연스럽게 열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1980년 이후로 남과 북 모두를 50여 차례 방문하면서, 내가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객관적이고 균형있는 시각으로 남북의 이질성을 관찰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75년간의 분단에서 비롯된 이질성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내가 느낀 남북의 이질성은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대표되는 체제의 이질성이다. 우선 사회주의는 사유재산이 없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반면에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북한은 소비경제 대신 생활경제를, 사유재산 대신 공유재산을 원칙으로 하는 사회이고,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분배의 정의에 중점을 두고 운영되는 체제이다.
북한에서 노동은 상품도 아니고 부의 축적 수단도 아니다. 노동을 보장받는 것은 인민의 신성한 권리이며 국가는 안정되고 착취가 없는 일자리를 인민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개인 노동의 대가에 따라 지급되는 임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받는 월급이나 봉급과는 확연히 다른 개념이다. 북한에서는 한 달 동안 일하고 받는 이 돈을 생활비라고 부르는데 ‘필요’에 따른 분배로 지급된다. 생활비는 필요에 따른 분배를 하다 보니 집집마다 별 차이가 없다.
한번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 박사교수와 북한 경제에 관한 이론적 토론을 하던 중, 넌지시 생활비에 대해 물어보았다. 북한에서 박사교수는 박사학위를 지닌 교수를 일컫는 용어가 아니고 한국으로 치자면 학문적 업적으로 존경받고 명망있는 석좌교수 수준의 원로교수를 부르는 직함이다. 그 석좌교수는 자신과 신입 전임강사의 생활비 차이가 2배 이상 나지 않을 정도로 평등하게 지급된다고 전해 주었다. 사실 반신반의하는 생각에 내가 자주 묵었던 고려호텔 내 기념품 상점에 들러, 여직원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봤다. 진열대에 물건을 정리하는 여성 점원과 상점 관리를 총괄하는 매니저 사이의 임금 차이도 거의 없다는 말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북한은 평등이라는 목적 아래 분배의 정의를 실천하고 있고 분배가 평등하게 되어 있다.
박한식 교수는 자본주의 제체인 한국의 대표적인 모순으로 부동산 투기 등 사유재산과 물질 추구로 인한 빈부 격차와 불평등을 꼽는다. 사진은 서울 강남의 아파트단지 밀집지역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 사진 한국관광공사 제공
북한이 형이상학적인 가치관을 중시하는 이상주의 사회인 반면에 남한은 사유재산 원칙에 근거한 물질주의 자본주의 사회이다. 남한은 사유재산 때문에 부정부패도 많고 모든 것이 사유재산에 따라 움직인다. 재산 축적이 최고의 가치이자 미덕이고 부의 척도로 인간과 사회를 재단한다. 분배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고 자유라는 미명으로 빈부의 격차가 형성되고 정당화되었다. 노동의 가치는 퇴락되었고 빈부 간의 간극은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고 있고 계층 간 이동은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현실이 되었다. 한탕주의와 부동산 투기 그리고 주식 광풍 등으로 나라 전체가 들썩들썩하는 것은 이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부동산 투자를 해보고 싶다고, 나에게 북한 관리들과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하는 남한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이는 북한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한국에서는 돈이 권력이고 지위이지만 북에서는 오히려 개인 재산의 축적은 경계의 대상이다. 부의 축적은 곧바로 당국의 조사로 이어지고 조사에 따라 감당하기 힘든 고초를 겪는 일도 다반사다. 2013년 처형된 장성택도 개인 재산 축적 등 상당한 부패 혐의가 주된 죄목이었다.
박한식 교수는 국내총생산 같은 경제지표의 우위를 들어 ‘남북한 체제 경쟁이 끝났다’는 주장은 북쪽의 반발을 불러 남북 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6·25 70돌 기념사 장면. 사진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또한 남북한 경제력 비교로 북한을 판단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각을 북한에 강제하는 오류를 범하는 일이다.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은 6·25전쟁 70돌 기념사에서 “우리의 국내총생산(GDP)은 북한의 50배가 넘고, 무역액은 북한의 400배를 넘는다. 남북 간 체제 경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우리의 체제를 북한에 강요할 생각도 없다”고 선언하였다. 남북 상생과 공동 번영 그리고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다짐과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북한의 시각에서 보면 북한식 사회주의는 이미 체제 경쟁에서 낙오되고 패배한 정치체제라는 말로 들릴 수 있으며 이에 북은 말할 수 없는 반발 의식을 지니게 될지 모른다. 이런 식의 주장은 남북 대화와 통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빈부 격차와 불평등 분배가 남한이 안고 있는 내재적인 모순이라면 북한이 처한 가장 큰 모순은 인민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남한에 비해 평등한 사회지만 모두가 가난하다. 인류의 경험적 검증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나 역사의 발전은 자기모순(self-contradiction)의 극복에서 시작한다. 내가 제시하는 변증법적 통일론에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남과 북이 자기모순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게 발견한 모순을 인정하며, 그런 인정을 통해서 자기모순을 성실하게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므로 자연스럽게 ‘합’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내가 느낀 두번째 남과 북의 이질성은 개인주의와 집체주의이다. 한국 사회가 개인주의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반면에 북은 철저한 집체주의 사회이다. 집단주의 원칙은 북한 사회를 작동시키는 원리이다. 북한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체주의 원칙에 따라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철저히 배격하는 거대한 가족국가이다. 개인의 이익이나 욕구를 초월해서 당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이익이 우선되며, 개인이 집체의 이익에 공헌할 때 비로소 생물학적인 인간을 넘어서 진정한 사회 정치적 생명체가 된다는 인식이 철저히 지배하는 사회이다.
북한 최고지도자 배지(초상휘장)는 1970년 처음 등장한 이래 인민의 신분을 나타내는 집체주의 사회의 표지가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북한 사회는 ‘필요’에 따른 분배가 원칙이지만 또 다른 방식은 ‘사회적 공헌도’에 따른 분배이다. 직장이나 노동당 또는 국가에 공헌한 사람들에게는 상을 준다. 작게는 김일성·김정일 배지부터 크게는 냉장고·텔레비전 등 가전제품과 주택도 국가에서 선물로 준다. 언젠가 지인의 살림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갔더니 김일성·김정일 배지가 새겨진 큰 냉장고가 부엌 한편에 놓여 있었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당에서 하사받은 냉장고라는 설명과 함께 가족의 자부심이라고 우쭐해했다.
북한의 모든 사람들은 김일성 배지(초상휘장)를 왼쪽 가슴에 달고 다니는데 배지의 종류에 따라 인민들의 신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번은 길거리에서 김일성 배지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고 궁금해서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직장이나 사회에서 잘못한 일이 있으면 배지를 근신 차원에서 일정 기간 압수한다는 설명이었다. 배지가 없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창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2014년 아시안게임 참가를 위해 인천공항에 도착한 북한 선수단이 단복의 왼쪽 가슴에 일제히 인공기와 더불어 김일성·김정일 ‘쌍상’을 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남과 북 사이에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또 하나의 이질성은 인권이다. 유엔 인권이사회가 2003년 이후 18년 연속 북한 인권 결의안을 채택하고 있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북한의 끔찍한 인권 탄압과 유린 상황은 국제적인 비난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이 북한 인권 결의안에 동의하는 문제가 남북 갈등과 남남 갈등의 주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듣기에 다소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북한도 북 나름대로 인권에 관한 정의와 개념을 보유하고 있고, 한국과는 상당한 시각차가 존재한다.
앞서 ‘길을 찾아서’ 3회에서 상세하게 서술했듯이, 나는 천부권, 양도 불가능성, 공동 책임성에 기초를 둔 인권은 크게 6가지 차원으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생존권(life right), 귀속권(belonging right), 평등권(equality right), 선택권(choice-making right), 사랑권(love right), 그리고 해방권(liberation right)이 그것들이다. 정치적 자유인 선택권은 자본주의 체제인 한국에서 인권의 요체이고, 평등권은 북한 사회주의 제도의 핵심이다. 특히 사회주의 체제인 북한은 국가의 주권을 개인의 인권보다 우선시하고 가치있게 여긴다. 국가의 주권이 보장되어야만 개인의 인권 또한 보장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북한에서는 한국의 인권 개념에서 강조하는 ‘선택권’이 상대적으로 경시되는 반면에 내가 분류한 인권의 6가지 차원에서 ‘생존권’ ‘귀속권’ ‘평등권’을 대단히 중시하고, 이 3가지 권리는 모두 한국의 인권 개념에서는 취약한 양상을 보인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개인주의와 집체주의의 조화가 가능하겠는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는 이들이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고 조화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어떻게 어느 정도로 그리고 어떤 모양으로 조화를 시켜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통일 국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통일 헌법을 초안하는 과정에서 논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우리의 과제이다. 아울러 남북한이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동질성을 발견해서 꾸준히 진작시키는 노력도 이질성의 조화만큼이나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일이다.
나는 지난 수십년간 정치학자로서 남북 간 이질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실천 방안을 연구해왔다. 다음 연재에서는 내가 연구한 구체적 실천 방안과 함께 남북의 동질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할 예정이다.
통일은 민족의 소명이자 과제이다. 하지만 통일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한 논란과 논쟁에 앞서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통일 모델의 제시가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모두도 통일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 열띤 논의를 통하여 제대로 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술집필 권준택 뉴욕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69166.html#csidx5a321167cc201c9bc57406a67b7fe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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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42회 ‘트랙2 회담’ 성사시키다
“남·북·미 대표들 우리 집 초대 ‘통일 합창’…가슴 벅찼다”
등록 :2020-10-27 01:35수정 :2021-01-04 14:10
김경애 기자 사진
2009년 북 핵실험 이듬해 천안함 사건
암울한 한반도 정세 해법 찾아 ‘고심’
2011년 조지아대학 글로비스 주최로
2003년 이어 ‘남·북·미 트랙2 회담’
3개국 민간전문가 10명씩 30명 초청
비공식·비공개·비책임성 ‘3원칙’
“진솔하고 기탄없는 대화 통해 이해”
‘ABC’ 방송·조지아대학도 경비 지원
존 메릴 국무부 국장 ‘비자 발급’ 해결
미 FBI 헬기 띄워 북한 참가단 ‘주시’
3박4일간 매일 저녁 함께하며 ‘친목’
마지막날 애선스 집에서 6개 항 합의
바이올리니스트 안용구 특별연주도
길을 찾아서-42회 ‘트랙2 회담’ 성사시키다
박한식 교수는 1995년 조지아대학 내 국제문제연구소(글로비스)를 설립한 이래 여러 차례 남북, 북·미, 남·북·미 사이의 직간접 대화를 주선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물꼬를 트고자 노력했다. 2011년 10월에는 남북한과 미국의 민간 전문가 30명을 처음으로 한 데 모아 조지아대학에서 ‘남·북·미 3자 트랙2 회담’을 열었다. 개회식 연단 맨 왼쪽부터 사회자 박 교수, 리종혁 조선아태평화위 부위원장·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박주선 민주당 의원·커트 웰던 미 하원의원·한성렬 조선아태평화위 국장 등이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2011년 한반도 정세는 암울하고 엄혹했다.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 사건과 그에 따른 ‘5·24 대북 제재 조처’로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또한 2009년 북한의 제2차 핵실험 실시 이후 북-미 간의 회담도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공전에 공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정부 간 소통의 창구는 답답하리만큼 굳게 닫혀 있었고 대화의 돌파구가 마련될 기미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당국 간 대화가 중단된 상황에서 북-미 또는 남북 간 현안 해결의 실마리 제공을 위해 민간 창구가 꼭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1년이 넘는 준비 과정 끝에 나는 소장을 맡고 있던 조지아대학 부설 국제문제연구소(글로비스)를 통해 2011년 10월17일부터 20일까지 나흘간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의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3자 간 트랙2 회담’을 주최했다. 앞서 2003년 11월 6자회담 돌파구를 열고자 내가 처음 성사시켰던 ‘북핵위기 해소와 미-북 관계 개선을 위한 미국-조선 포럼'(워싱턴-평양 트랙2 포럼)에 이은 2차 트랙2 회담인 셈이었다.
박한식 교수는 2003년 12월에도 조지아대학에서 ‘북-미 트랙2 회담’을 주최했다. 왼쪽부터 신성철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참사, 한성렬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 박 교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 커트 웰던 미 하원의원, 조성구 북한 단장(군축·평화연구소), 프랭크 자누지 미 상원 민주당 보좌관, 키스 루스 미 상원 공화당 보좌관, 김명길 조선아태평화위 국장, 심일관 통역 등이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트랙1이 정부 대 정부의 회담이라면 트랙2는 정부와 정책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대화의 장이다. 나는 트랙2 회담을 통해 남·북·미 3자 간의 긴밀하고 진솔한 대화를 도모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정부 당국자 간 회담, 즉 트랙1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자국의 견해와 방침이 상대방보다 더 설득력 있고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국의 정책을 관철시켜 유리한 협상 결과를 도출하는 데만 목적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아 나라 간의 회담은 종종 쉽게 결렬되기도 한다.
하지만 트랙2는 회담 목적 자체가 트랙1과는 다르다. 트랙1이 잘 되지 않아서 트랙2를 하는 것이 아니다. 트랙2는 트랙1의 대용물도 아니고 트랙1을 보완하거나 보조하는 구실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트랙2는 진솔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해하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는 ‘언더스탠드’(understand)다. 이 단어의 어원을 보면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의 말을 버리고 상대방의 아래에 서서 그의 얘기에 귀 기울인다는 뜻이다. 나는 남·북·미 3국의 민간 전문가들이 오해를 풀고 솔직한 서로의 견해를 경청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편견과 평가 없이,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것이 대화이고, 그런 대화만이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면 서로의 차이점과 이질성을 포용할 수 있고, 이질과 이질이 만나서 서로를 포용하면 더 높은 차원의 동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조화이고 평화다. 남과 북이 지난 75년 동안 자신의 견해만 고수하고 각자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체제 경쟁에 갇혀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없이 안타깝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진솔한 대화 없이는 통일과 평화는 절대 오지 않는다.
박한식 교수는 ‘트랙2 회담’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위해 비공개 원칙을 고수해 개회식 때만 언론 취재를 허용했다. 2003년 12월 ‘북-미 트랙2 회담’ 때 현지 언론들이 열띤 취재를 하고 있다. 사진 조지아대학 글로비스 제공
2011년 남·북·미 3자 간 트랙2 대화를 진행하면서, 트랙2 본연의 취지를 살리고자 나 나름대로 세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는 회담의 비공식 원칙이다. 회의 참가자를 선정하는 데 있어서 공식적으로 국가를 대표하거나 정부의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되도록 배제했다. 공직에 있는 정부 관료라면 정부의 견해를 대변할 수밖에 없을 테고 소신껏 그리고 자유롭게 발언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둘째는, 비공개의 원칙이다. 이런 행사들은 언론의 관심과 조명을 받게 마련이니, 언론을 초청하고 광고하고 이름을 내고 싶어 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트랙2는 오히려 언론에 알리지 않는 비공개 회담이 훨씬 더 바람직하고 효율적이다. 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함으로써 회의 참가자들의 토론 발언이 언론에 공개되지 않아야만 자유로운 대화가 보장되고 신선한 아이디어도 제시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회담의 개·폐회식만 언론에 공개했고 나흘 동안의 본회의는 비공개 원칙을 지켰다. 마지막으로, 비책임성의 원칙이다. 참가자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하고 자유자재로 토론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회의에서 진행된 어떤 발언, 또한 주장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했다. 이러한 원칙들은 트랙2 대화 내내 철저하게 지켜졌고, 결과적으로 진솔하고 기탄없는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는 회의와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회의 참가자들의 면면도 트랙2 대화의 성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회의 참가자로 누구를, 어떤 선정 기준으로 초청할 것인가, 여간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에서 모든 참석자의 이름과 직함을 다 공개하지는 못하지만, 위에 언급했던 회의 진행 3원칙처럼 참가자 초청 기준에도 세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참석 인사들이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열정과 집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화와 이해를 통해서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대전제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인사들만을 초청했다. 둘째는 전문성이다. 학계·예술계·시민단체 등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는 인사들을 초빙했다. 전문성이 있어야 사회에 영향력이 있고, 통일 과정에서 그리고 통일 이후에도 사회 각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선정 기준은 인품이다.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기준이기도 했다. 남북이든 미국이든 체제와 이념을 초월해서 인품이 있는, 다시 말해 신뢰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지고 있는 인사들을 초청했다. 인품 있는 인사들이 와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체제와 삶의 경험을 진솔하게 이야기할 때 서로를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남과 북을 수십 차례 방문하면서 교류했던 모든 사람들의 인품과 사람 됨됨이를 면밀히 관찰해왔다. 남들이 들으면 고약하다고 할 만한 버릇이기는 하지만 나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인품에 점수를 매기곤 했다. 트랙2 회담에 초청된 인사들은 내 기준에서 볼 때 인품 점수가 10점 만점에 적어도 8점 이상 되는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2011년 12월 조지아대학 국제문제연구소에서 ‘남북미 3자 트랙2 회담’을 주최한 박한식 교수는 참가자 선정 때 신뢰할 만한 인품까지 고려해 초청했다. 오른쪽부터 박 교수, 리종혁 조선아태평화위 부위원장, 박주선 민주당 의원,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특히 리 부위원장은 월북작가이자 문예총 위원장을 지낸 리기영의 3남으로 박 교수와 가장 오랫동안 소통해온 대남 전문가이다. 사진 <연합뉴스>
물론 회담 준비는 녹록지 않은 과정이었다. 각 나라에서 10여명씩 30명가량의 참석자를 일일이 연락해서 참석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확답을 듣는 과정은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다른 사람을 대신 시킬 수도 없는, 내가 직접 나서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특히 북쪽 참석자들은 남쪽이나 미국처럼 실시간 연락이 여의치 않았고 일정 조정과 참석 확답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정 조정과 더불어 또 한가지 큰 난관은 회담 경비였다. 대다수의 미국과 남쪽 인사들은 흔쾌히 자비로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왔다. 하지만 교통비에 더해 3박4일간의 숙박과 식사비 같은 체류 비용까지 참석자들에게 부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북한 참석자들은 나라 전체가 굶고 있는 상황에서 적지 않은 인원이 미국까지 오는 경비를 직접 감당하기란 매우 버거운 일이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회의 개최에 필요한 재원 마련에 나섰다. 우선 조지아대학에 ‘트랙2 회담 기획안’을 제출하고 공식적으로 예산을 신청했다. 총장과 개인적인 면담을 통해 회의의 취지와 의의를 설명하고 예산 확보의 필요성도 설득했다. 고맙게도 조지아대학에서 국제문제연구소를 통해 적지 않은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다.
데이비드 웨스틴(오른쪽) <에이비시>(ABC) 사장은 경비를 후원해줬다.
이와 더불어 미국의 <에이비시>(ABC) 방송에서도 상당한 경비를 후원받았다. 사실 에이비시는 나와는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1994년부터 2008년까지 나는 북한 문제와 관련해 에이비시의 뉴스 컨설턴트로 많은 자문을 해주었고, 2000년대에는 에이비시의 사장인 데이비드 웨스틴을 포함한 뉴스 방문단의 북한 현지 취재를 주선하고 그들을 인솔하여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한 이력도 있었다. 트랙2가 끝나고 재정 후원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나는 에이비시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회담의 의의와 성과를 상세히 전해주었다.
또 다른 문제는 비자였다. 외교 관계도 없고 적성국인 북한의 대표단이 미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감한 시기에 미국 정부가 과연 그들에게 방문 비자를 내줄 것인지가 큰 복병이었다. ‘길을 찾아서 34회’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국무부 동아시아 국장인 존 메릴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존처럼 인품 있는 사람들과 깊이 사귀고 교류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내 삶의 큰 행운이었다. 존 본인도 회의 참석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지만 막판에 국무부의 만류로 애틀랜타공항에서 결국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2011년 ‘남·북·미 트랙2 회담’ 때 존 메릴 미 국무부 동아시아 국장은 북한 참가단의 비자 발급을 도와줬다. 사진은 2016년 제주 4·3 국제심포지엄 때 발표자로 참석한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북한 참석자들의 여정은 애틀랜타공항에서부터 언론뿐만 아니라 미 연방수사국(FBI)의 집중 관심과 조명의 대상이었다. 에프비아이는 북한 참석자들의 동선과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 헬리콥터까지 띄워가며 주시했다. 나는 에프비아이 쪽에 자유로운 토론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회의장 주변에는 접근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고 매일 저녁 직접 회의의 내용과 분위기를 그들에게 간략히 브리핑해주었다. 사실 에프비아이의 존재는 북한 방문단에게는 기분 나쁜 감시로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나로서는 그들의 근접 감시가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혹시 일어날 수도 있는 불상사에 대비해 북한 방문단에 대한 철저한 경호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했다.
나흘간의 회의 내내 다양한 현안과 의제에 관해 진지하고 진솔한 토론과 대화가 이루어졌다. 단순히 민간 전문가들이 모여 입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확인하고, 이질성은 어떻게 조화시키고, 동질성은 어떻게 권장할 것인가에 관한 구체적 방안들을 논의했다. 또한 각 나라의 현재 정책에 어떤 자문을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폭넓은 토의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과가 있었던 것은 일과 뒤에 남·북·미 참석자들이 함께한 저녁 시간이었다. 식사도 같이 하고 약주도 한 잔씩 하면서 모두가 격의 없이 친근한 대화로, 서로가 서로를 더 알아가고 이해해가는 모습에 참 흐뭇했고 가슴 벅찼다. 남쪽의 한 참석자는 나에게 “북쪽 인사들과 이렇게 장시간 이야기한 것은 처음입니다. 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이해의 폭을 넓힐 좋은 기회였습니다”라고 소감을 전해주었다.
회의 마지막 날 저녁에 나는 모든 참석자를 우리 집으로 초대해 만찬을 함께 했다. 음식과 주류도 한식과 양식으로 넉넉히 준비했고 내가 손수 요리 방법을 개발한 치킨 바비큐도 선보였다. 나흘 동안 급격히 친근해진 참석자들 사이에선 이야기꽃이 피어났고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안용구 선생의 ‘트로이메라이’(꿈) 연주로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2011년 12월 ‘남·북·미 트랙2 회담’ 마지막 날 박한식 교수의 자택에서 열린 만찬에서 재미 바이올린 연주가 안용구(왼쪽) 선생과 박 교수의 딸인 피아니스트 클라라 박(오른쪽)이 ‘아리랑’을 협연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1년 12월 ‘트랙2 회담’ 마지막 날 만찬에서 안용구 선생의 부인 김정현(맨 왼쪽)씨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만찬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나는 지하실 서재에서 각 나라의 대표들과 회담 합의문을 우리말과 영어로 작성하였다. 합의문이 완성된 뒤, 나는 모든 참석자 앞에서 6개 항의 합의 사항을 낭독했다. 합의문 낭독이 끝나자마자, 참석자 중 한분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다 같이 합창하자는 즉석 제안을 하였다. 우리 모두는 손에 손을 맞잡고 빙 둘러서서 커다란 원을 만들어 안용구 선생의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며 평화가 이런 것이구나 또 통일은 이렇게 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2011년 12월 트랙2 회담 마지막 날 박한식(앞줄 왼쪽 네째) 교수의 자택에서 남·북·미 참가자들이 6개항의 합의문을 발표한 뒤 다같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1년 이후 남·북·미 트랙2 대화의 상설화 또는 정례화를 추진했지만, 지금껏 다시 열리지 못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트랙2는 남·북·미 상호 대화를 증진시키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민간 교류의 모델이다. 특히 정부 간 대화 창구가 막혀 있을 때,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진행하는 ‘트랙2’ 대화는 남·북·미 간 상호 대화와 이해를 통해 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모색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마중물이다. 또한 2000년의 ‘6·15’, 2007년의 ‘10·4’, 2018년의 ‘4·27’ 선언에서 남북이 합의한 평화 통일 방안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도 트랙2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특히 지난 6월 개성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표류하고 있는 작금의 남북관계를 고려해볼 때, 트랙2 대화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구술집필 권준택 뉴욕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67339.html#csidxaa4e51dd4493a46ae6eb645a81b9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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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41회 국제문제연구소(GLOBIS
“혼자로는 힘들어 ‘한반도 통일 설계도’ 그릴 연구소 세웠다”
등록 :2020-10-13
김경애 기자 사진
김경애 기자
‘평화가 통일 가져다주는 게 아냐
통일이 평화를 이루게 하는 길이다’
학자적 소명으로 남북 오가며 연구
‘남·북·미’ 정부 차원 대화 막히자
민간 차원 비공식 ‘트랙Ⅱ 회담’ 주선
인력·재정·행정 등 물적지원 절실
1995년 조지아대학 ‘글로비스’ 설립
“세계화 추세 반영해 ‘글로벌’ 명칭”
대학쪽 전폭 지지·물심양면 지원도
국외 단기연수 통해 매해 100명 견학
나치 수용소·히로시마 원폭 현장 등
“10년간 소장 맡아 열정과 혼신 쏟아”
2015년 76살 때 은퇴…집필 몰두중
‘박한식’ 이름 딴 ‘기금석좌직’ 신설
길을 찾아서-41회 국제문제연구소(GLOBIS)
박한식 교수는 1970년부터 재직했던 미국 조지아대학에서 2015년 공식 은퇴했다. 도미 유학 50년 만이자 교수 재직 45년 만이었다. 2015년 12월 조지아대학(UGA) 국제행정학부는 교내 딘러스크홀에서 박 교수의 은퇴 기념식을 열어주었다. 뒤이어 ‘평화학’을 주제로 한 박 교수의 고별 강연에는 예정된 인원의 두배인 200여명의 수강생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사진 조지아대학 누리집 갈무리
지난 40회 연재에서 잠시 언급했 듯이, 학문의 목적은 문제 해결(Problem Solving)에 있고,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발견해 내고(identify) 원인을 찾아서 처방을 제시하는 것이 학자의 소명이라는 생각은 내 평생의 지론이다.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남북 분단과 군사적 대치 그리고 한반도 통일이었다. 1965년 미국 유학길에 오를 때부터 통일에 기여해야겠다는 결심으로 학자의 삶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 분단과 군사적 긴장을 해결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제시하고 그 사회를 도안하고 설계하는 것이 학자인 나의 책무라고 믿으며 평생을 애면글면 해왔다. 통일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 없이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 조성 노력만을 강조하는 시각은 근시안적이며 분명 한계가 있다. 내가 늘 강조했듯이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전쟁이 없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도 아니다.
해방 이래 지난 75년의 세월 동안 정통성 경쟁과 체제 경쟁으로 점철되어온 남북관계를 볼 때, 통일 없이 진정한 평화가 도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평화가 통일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통일이 평화를 이루는 길이다. 남북 상호 대화와 협력을 통해 꾸준히 통일을 모색하는 일련의 과정만이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1965년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박 교수(뒷줄 왼쪽)는 당시 청소년적십자 부장이던 서영훈(뒷줄 오른쪽) 선생의 남산 대한적십자사 사택을 찾아가 유학 인사를 하고, 서 선생의 가족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서유석 교수 제공
통일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어릴 때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며 자랐지만 아직까지 통일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통일에 대한 열망만으로는 통일을 성취할 수 없다는 교훈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통일의 열망을 통일의 결실로 안내할 수 있는 현실적인 ‘통일의 길’, 즉 ‘통일의 설계도’를 마련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 일은 학자들과 이론가들의 몫이다.
통일의 설계도를 고민하고 도안하는 학자의 연구는 마치 작곡가가 아름다운 멜로디의 곡을 완성하는 창작 작업에 견줄 수 있다. 작곡가가 음악에 대한 소양과 영감을 가지고 한 곡조의 아름다운 선율을 완성해 가는 과정은 수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서 악보를 썼다 고치기를 반복하는 힘겨운 작업이다. 통일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노력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산고를 이겨내고 탄생한 곡은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연주에 의해 세상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전까지는 그 가치가 드러나지 않는 먼지 쌓인 한 장의 종이 악보에 불과하다.
훌륭한 연주를 위해서는 작곡가의 의도와 취지를 이해할 수 있는 혜안과 지혜를 가진 지휘자가 필요하고 그 지휘자는 각각의 연주자와 악기가 제소리를 내면서도 불협화음이 생기지 않도록 조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통일을 위해 정부가 할 일은 바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구실이다. 오케스트라는 조화이고 음악이 조화의 예술인 것처럼 사회 각 분야의 역량을 모아 협업과 조화를 통해 학자들이 설계한 통일의 길을 실천하고 이행하는 것이 정부의 소임이다.
박한식 교수는 2009년 북한 억류 미국 기자 석방 주선, 2010년 ‘간디·킹·이케다 평화상’ 수상 등의 활약상이 알려지면서 2011년 <조지아 매거진> 표지에 ‘피스메이커’로 소개되기도 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나는 한민족 통일의 청사진으로 ‘변증법적 통일론’을 제안한다. 앞으로 남은 연재에서 더 소상하게 서술할 계획이지만, ‘변증법적 통일론’은 남북 간의 특수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남북 간의 현격한 ‘이질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남과 북의 이질성을 찾아서 조화시키고 또한 동질성을 발견해서 꾸준히 진작시키는 노력만이 통일의 바람직한 길이다. 이러한 노력을 위해서 남과 북 모두를, 특히 북한을 관찰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었고 1980년 이후로 북한을 50여 차례 방문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내가 관찰한 남과 북의 이질성과 동질성에 관해서는 앞으로 상세하게 설명할 예정이다.
1980년부터 북한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부닥친 가장 큰 난관은 인프라스트럭처, 즉 기반시설의 부재였다. 한 개인 학자가 북한을 관찰하고 북한과 소통하고 통일 연구를 위해 매해 여름 북과 남을 방문하는 것은 재정적으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또한 미국과 북한 사이에 준정부 차원 또는 학술 차원에서 다양한 교류를 주선하고 성사시키는 것도 교수 개인의 역량으로는 여간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남·북·미 간의 정부 차원 대화가 수월하지 않던 상황에서 ‘트랙Ⅱ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인적·재정적·행정적 등 물리적인 지원을 해줄 수 있는 든든한 뒷배경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1995년 조지아대학 내에 ‘국제문제연구소’(GLOBIS: The Center for the Study of Global Issues)를 설립했다.
국제문제연구소 설립은 의외로 쉽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조지아대학 관계자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고 제안서를 제출하자마자 설립 허가가 승인되었다. 학교의 지원도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2층짜리 단독 건물도 배정받았고 학교에서 직접 고용한 정규직 직원 2명과 박사과정 학생들을 여럿 연구조교로 고용할 수 있는 넉넉한 예산도 지원받았다. 특히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던 많은 한국 박사과정 유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국제문제연구소를 거쳐 갔다. 또한 각종 학술회의와 유명 연사 초청 토론회 그리고 북한 방문단 초청과 트랙Ⅱ 같은 국제 행사도 국제문제연구소가 있었기에 큰 어려움과 부족함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더욱이 연구소 설립 이전에 내가 개인적으로 주선하고 추진했던 여러 행사들과 달리 국제문제연구소의 이름으로 들어오는 후원금과 기부금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나의 주된 연구영역이 북한과 남북통일 문제이긴 했지만, 나는 연구소의 명칭을 북한연구소 또는 통일연구소라고 이름 짓고 싶지는 않았다. ‘글로벌’이라는 단어를 꼭 포함시키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던 시기였다. 내가 ‘글로벌’을 특별히 좋아했던 연유는 인류 전체가 공동숙명체 또는 공동운명체라는 의미가 담긴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90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냉전이 종식되고 냉전 기간 내내 막혀 있던 동서 간 교류의 물꼬가 터지면서 소위 세계화(globalization)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더불어 소련의 붕괴로 인해 군사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미국에 대적할 만한 강대국이 사라짐으로써 미국의 헤게모니가 절정으로 치닫는 국제정치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1990년대 이후의 세계화는 세계의 ‘미국화’(Americanization)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의 일방적 독주 체제 아래 속도가 붙기 시작한 세계화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롭고 다양한 세계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테러리즘이다. 북한과 미국의 군사적 긴장과 북한의 핵무기도 미국 주도의 세계화라는 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한반도 통일 문제도 우리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엄연한 세계 이슈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했다.
국제문제연구소를 설립하면서 내가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또 하나의 업무는 글로벌 교육이었다. 미국 학생들에게 세계화 또는 세계의 미국화로 인해 생겨난 글로벌 문제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자각을 심어주고 싶었다. 사실 미국 학생들 대부분은 우물 안 개구리이다. 외국 여행도 영국과 캐나다 그리고 프랑스 정도가 고작이고 다른 나라와 문화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다. 사실 나는 미국이 잘되어야 세계가 잘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미국이 붕괴되면 세계가 제대로 지탱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잘되기 위해서는 미국 사람들이 글로벌 양심을 가지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며 무지와 우월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시작이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1995년 이후 국제문제연구소의 국외 단기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여름마다 100명이 넘는 미국 학생들을 이끌고 외국 현장학습을 실천했다. 특히 현장을 직접 보고 체험함으로써 미국 학생들이 평화와 세계 문제에 대해 스스로 느끼고 깨닫고 배우길 바랐다.
현장 견학 학습을 위해 선정한 장소는 전 세계에서 모두 네 곳이었다. 독일 뮌헨에 위치한 다하우 강제수용소 추모 사이트(Dachau Concentration Camp Memorial Site)에서는 유대인들을 학살한 나치의 만행을 학생들에게 견학시켰고, 일본 히로시마 박물관의 원폭돔을 방문해서 전쟁과 핵무기의 야수성과 잔인성에 대한 교훈을 일깨워 주고자 했다. 히로시마에서 미국 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치를 떨며 눈물을 흘리던 어린 학생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전쟁의 참상을 학생들에게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함으로써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장학습에서는 넬슨 만델라 박물관에 들러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가르쳤고, 한국의 판문점 견학을 통해서는 한반도 평화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학생들에게 각인시켜 주려고 노력했다.
박한식 교수는 1995년 조지아대학 내 국제문제연구소(글로비스)를 개설해 20년간 소장으로서 한반도 통일 문제를 국제적 시각에서 통찰하는 연구와 교육 활동에 매진했다. 조지아대학은 2015년 ‘1만6570일, 총 2300만분’의 헌신을 기려 박한식 교수의 이름을 새긴 의자를 학교 내에 설치했다. 또 기금을 모아 ‘박한식 평화연구 석좌교수직’을 두기로 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국제문제연구소에 대한 나의 애착은 마치 자식과 같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국제문제연구소를 ‘박한식(Han S. Park)연구소’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내가 만들었고 2015년 은퇴할 때까지 소장으로서 열정과 혼신을 쏟아부은 곳이기도 하다. 20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연구소 사무실로 출근을 했고 책상에 앉아 연구하고 집필했다. 5년 전 은퇴하면서 사무실을 정리하고 이삿짐을 옮기면서 참 많이 서운하기도 했다. 지금은 다른 소장이 그 자리에 앉아 있지만 국제문제연구소 설립 취지인 글로벌 교육과 글로벌 문제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성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2015년 12월 조촐한 은퇴식을 끝으로 나는 더 이상 연구소에 나가지 않고 있다. 1970년 조지아대학에 왔으니 45년 동안 가르치고 연구했다. 76살에 은퇴를 했으니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오래 현역에 있었던 셈이다. 마음 같아서는 현역에 좀 더 있고도 싶었다. 주위에서 은퇴 직후 갑자기 늙거나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아온 터라, 은퇴를 좀 더 늦출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의사의 은퇴 권유도 있었다. 사실 은퇴 이후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마무리하고 싶은 집필 작업도 있었기에 서운하지만 은퇴를 결정했다.
세계화에 관한 저서를 집필하고 싶은 욕심이 상당했지만, 사실 은퇴 전에는 강의와 연구소 일로 인해 심적·물리적 여유가 없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책을 쓰는 작업은 원래 책상에 진득하게 앉아서 많은 시간의 사색과 고민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은퇴 후 상당한 시간적 여유가 허락되었고, 2년 남짓 작업 끝에 2017년 방대한 저서인 <세계화: 축복인가 저주인가?>(Globalization: Blessing or Curse?)를 출간할 수 있었다.
박한식 교수는 은퇴 이후 2017년 저서 <세계화: 축복인가 저주인가?>(사진)를 출간했다. 조지아주의 주요 대학 출신들이 모인 연구재단 ‘평화와 지속가능성을 위한 글로벌센터’도 운영 중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은퇴식에서 조지아대학은 국제문제연구소를 통한 나의 평화 노력과 글로벌 교육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해 주었다. 또한 과분한 은퇴 선물도 함께 전해 주었다. 지난 45년간 나의 평화에 대한 열정과 헌신 그리고 공헌에 대한 보답으로 조지아대학에서 내 이름으로 기금석좌교수직(endowed chair professor)을 만들어 주었다. 영어로는 ‘박한식 프로페서십 오브 피스 스터디스’(Han S. Park Professorship of Peace studies)이다. 일반적으로 기금을 기부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짓는데, 조지아대학에서 은퇴한 교수의 이름을 따서 기금석좌교수직을 만든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나에게는 고맙고 영광스러운 은퇴 선물이었다.
구술집필 권준택 뉴욕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65658.html#csidxf1f185f959aa277be3b4cf89ccd9644
길을 찾아서 (40회) 내가 학문하는 목적은
정치학자로서 반세기 ‘북한 연구’ 아닌 ‘북한 관찰’ 고수해왔다”
등록 :2020-09-21 15:32수정 :2021-01-04 14:26
김경애 기자 사진
김경애 기자
1970년 조지아대학 교수 부임 이래
‘정년 보장 종신 교수’ 새로운 큰 산
1950년대 ‘행태주의’ 데이비드 이스턴
1969년 ‘정치학의 새로운 혁명’ 충격
“가치중립·계량화 ‘정치학’ 위기” 경고
첫걸음 학자에게 등대 같은 방향타
“사회문제 찾아내고 처방 제시” 결심
한반도 평화 해법·다양한 시각 제공
1976년 종신 교수 심사 무난히 ‘통과’
‘친북인사’ 낙인·해임 압력 ‘방어막’
2002년 최고 영예 ‘대석좌교수’ 승격
길을 찾아서 (40회) 내가 학문하는 목적은
박한식 교수는 1976년 조지아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임용된 지 6년 만에 연구와 강의 성과를 인정받아 ‘테뉴어’(종신 교수)가 됐고, 2002년에는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대학 자체에서 주는 최고 영예인 ‘대석좌교수’ 직함도 수여받았다. 2009년 9월 박교수가 조지아대학 주최로 ‘북한에 억류됐던 미국 여성 기자 2명의 석방 협상을 막후에서 조율해낸 후일담’에 대해 특강하고 있다. 사진 조지아대학 누리집
한 고개 넘으면 또 한 고개가 기다리고 있고 이제 다 왔나 싶으면 더 높은 고개와 마주하는 것이 인생인 듯싶다. 처음 도미하여 유학길에 오를 때는 박사학위만 받으면 다 될 것 같았는데 학위를 마치니 직장을 구하는 것이 걱정이었고, 들뜬 마음에 시작한 조지아대학의 교수 생활은 테뉴어라는 넘어야 할 또 하나의 큰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테뉴어(Tenure) 제도는 미국 대학에서 교수의 직장을 평생 동안 보장해주는 정년 보장 또는 종신 교수직이다. 테뉴어 제도의 목적은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주위의 부당한 압력이나 해고 또는 보복의 두려움 없이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도록 교수에게 고용 안정의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이다. 테뉴어는 보통 임용된 지 5년 또는 6년 후에 학과 또는 단과대학 단위로 테뉴어 심사위원회에서 결정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학문과 연구 그리고 표현의 자유 보장이라는 본래의 취지와는 무관하게 근무 업적과 실적으로 평가와 심사가 이루어지는 게 현실이다.
더욱 개탄스러운 작금의 현실은 테뉴어 제도의 본래 취지에 맞게 보호를 받을 만한 대상의 학자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학교수들이 테뉴어 제도의 혜택을 받을 만한 연구나 강의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학문적으로 주류에서 벗어난 이론을 주창하거나 정부 정책에 신랄한 쓴소리를 쏟아내는 교수들이 없다는 현실은 참 슬픈 일이다. 나는 조지아대학 재직 내내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친북인사로 낙인찍혀 외부로부터 수차례 파면과 해고의 압력을 받았지만 테뉴어 제도 덕분에 연구와 강의를 지속할 수 있었다.
테뉴어는 주로 연구 실적(Research), 강의 평가(Teaching), 그리고 봉사 활동(Service) 등 세 가지 분야의 실적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거쳐 결정되는데, 행여나 통과하지 못하면 짐을 싸서 이직하거나(현실적으로 이직도 쉽지 않지만) 또는 고용 안정 없이 평생을 소위 말하는 ‘비정규직’으로 지내야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세 가지 분야 모두에서 좋은 실적을 내기는 참 쉽지 않다. 연구에 중점을 두면 강의가 조금 소홀해지는 측면이 있고 강의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면 연구 실적이 미흡할 수가 있다. 또한 봉사는 주로 연구나 강의와 관련된 학교 내외의 행사 활동들을 심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조금은 번거로운 일이다. 나는 첫해부터 철저히 준비하고 싶은 생각에 몸과 마음이 바빴다.
사실 연구 실적에 대한 걱정은 별로 없었다. 무엇을 연구하고 싶고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고한 관점과 철학이 있었다. 또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은 내가 창의적으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운전면허를 취득한 것과 같다는 생각에 제대로 운전을 해보고 싶은 자신감도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연구와 학문의 목적은 단 한 가지, 바로 문제 해결(Problem Solving)이다. 1950~60년대 미국 정치학계를 지배하던 행태주의 풍조는 정치현상에 대한 설명과 예측이라는 측면에만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이에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한 처방을 제시하는 일은 등한시하고 있었다.
캐나다 출신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1917~2014년)은 시카고대학 교수이자 미국정치학회 회장이던 1969년 발표한 ‘정치학의 새로운 혁명’ 논문을 통해 1950년대 자신이 주창했던 행태주의 이론을 비판해 학계에 큰 충격을 줬다. 사진 위키피디아
1969년 12월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을 무렵, 미국 정치학회보에 논문이 한 편 발표되었다. 상당히 짧은 논문이었지만 정치학계에 던져준 파장은 상당했다. ‘정치학의 새로운 혁명’(The New Revolution in Political Science)이란 제목의 글이었는데 요지는 행태주의 풍조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학문으로서 정치학이 존립 위기에 처해 있다는 섬뜩한 경고였다. 이런 경고를 들고나온 학자가 다름 아닌 1950년대 행태주의의 부흥을 주도했던 데이비드 이스턴이라는 사실에 정치학계는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이스턴은 정치학이 나가야 할 새로운 길로 후기 행태주의라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스턴의 주장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행태주의 풍토에서 학문은 무조건 가치중립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과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규범과 가치가 절대 소홀히 다루어지거나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또한 행태주의 연구가 관찰 가능하고 계량화가 쉬운 문제들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데이터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지엽적이고 사소한 문제들에만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정치학이 우리 사회가 직면한 좀 더 크고 중요한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정치학 연구가 현실 사회와 너무 동떨어져 있으며 정치학자들이 현실 문제 연구와 해결에 더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데이비스 이스턴이 1969년 <미국정치학회보>에 발표한 ‘정치학의 새로운 혁명’ 논문. 박한식 교수는 1970년 조지아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이 논문을 학문의 등대로 삼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행태주의 학풍에서도 문제 해결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후기 행태주의의 등장에는 주목할 만한 시대적 배경이 존재한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후기산업사회로의 전환을 맞이하고 있었고 산업과 시장의 팽창으로 인해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식량 부족, 전쟁, 전염병, 그리고 환경 파괴 같은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치는 보편적이면서 회피할 수 없는 문제들이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에 정치학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졌고 데이비드 이스턴이 경종을 울리게 된 것이다. 시블리 교수의 플라톤에 관한 한 편의 논문이 나를 미네소타대학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이스턴의 후기 행태주의를 주창한 이 논문은 학자로서 첫걸음을 내딛는 나에게 등대와 같은 구실을 해주었다.
학문에 대한 나의 평생 신조는 문제 해결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크고 작은 사회문제들을 발견해 내고(identify) 원인을 찾아서 처방을 제시하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자 학자의 소명이라고 믿는다. 문제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없는 이상적인 사회가 어떤 모습인가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는 일은 그 자체가 규범적이고 철학적인 연구이며 이는 행태주의에서는 철저히 배척되어 오던 연구 행위였다.
흡사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 어디가 아픈지, 어떤 병이 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건강한 신체의 기준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정상적인 체온과 혈압이 얼마인지에 대한 개념 없이는 환자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학문의 목적은 문제가 없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며 그 사회를 도안하고 설계하는 것이 학자의 역할이자 책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사회는 우리가 품고 있는 문제들이 해결된 사회이며 그러한 사회가 ‘발전된(developed) 사회’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상적인 사회의 설계를 위해서는 정치발전론을 중점적으로 공부하고 가르치고 연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만의 정치 발전 이론을 정립하고 발전시켜 1984년 <인간의 필요와 정치 발전>(Human Needs and Political Development) 제목으로 책을 낼 수 있었다.
박한식 교수가 1984년 나름의 정치학 이론을 정리해 펴낸 저서 <인간의 필요와 정치 발전>의 표지. 아마존닷컴
대부분 나를 북한 전문가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는 평생 북한의 정치와 사회를 정치발전론의 개념으로 관찰하고 연구했지 북한 자체를 공부하지는 않았다. 정치 발전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미국도 중국도 한국도 그리고 북한도 이상적인 사회로 발전해 가는 과정의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많은 내재적인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발전 중인(developing) 사회’이다. 북한이 처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국가 안보와 인민을 먹이는 문제다. 사회주의나 주체와 같은 이데올로기도 그리고 핵무기도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즉 정치 발전의 과정에서 사용되는 하나의 도구라는 게 내 생각이다.
2009년 9월 박한식 교수가 조지아대학 주최로 ‘북한 억류 미국 여성 기자 2명의 석방 협상 후일담’ 특강을 마친 뒤 청중들과 뒷풀이를 하고 있다. 박 교수는 정치학과 더불어 다양한 과목을 강의하고 공익 봉사 활동도 활발하게 펼쳐 ‘전전후 내야수’로 불렸다. 사진 조지아대학 누리집
교수에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연구만큼이나 중요하고 보람있는 일이다. 내가 가르치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학생들이 스스로 지혜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실이었다. 나는 첫 강의 시간에 항상 두 가지 질문을 학생들에게 하곤 했다. 첫째는, 30년 뒤 너희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되기를 바라느냐? 둘째 질문은, 30년 뒤 어떤 사회가 될 것 같으냐? 전자는 규범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이고 후자는 경험적인 질문이다. 학생들에게 이 두 가지 질문을 항상 생각하라고 가르쳤고 졸업 이후 어떤 직장을 갖든지 현실적으로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내가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라고 가르쳤다. 즉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는 게 나의 교육 철학이었다.
1970년 교수 임용 첫해부터 강의도 정말 열심히 했다. 강의 준비도 많이 했고 다양한 과목들을 가르쳤다. 기존에 개설되어 있던 과목들도 있었고 내가 새로 만든 과목들도 많았다. 총 7과목을 강의했다. 나의 중점 연구였던 정치발전론과 정치학 방법론은 학부와 대학원에서 강의했고 정치학과의 필요와 요청에 따라 미국 정치, 비교 정치, 국제 정치, 인권론, 동아시아 정치 등을 강의했다. 내가 이렇게 다양한 과목을 개설해서 강의하니 동료 교수들이 나에게 ‘전천후 내야수’(utility player) 별명을 붙여 주었다.
45년 동안 강단에 서 있었으니 나에게 배우고 졸업한 학생이 몇천명은 족히 될 듯싶다. 마치 나는 강물 한가운데 솟아 있는 바위 같고 학생들은 그 바위를 스쳐 지나가는 물결 같다는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학부생들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박사과정을 지도했던 학생들은 지금도 한 명 한 명 기억에 생생하다. 얼마 전 내가 지도했던 한 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성요셉대학(Saint Joseph’s University)에 재직하고 있는 카즈야 후쿠오카 교수였다. 그는 올 가을학기부터 정교수로 승진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이어서 무한한 보람을 느꼈다.
박한식 교수는 45년간 조지아대학에서만 재직하며 수천명의 제자를 양성했다. 최근 미국 필라델피아의 성요셉대학 정치학과 정교수로 승격된 카즈야 후쿠오카도 박 교수가 기억하는 제자 중 한명이다. 사진 성요셉대학 누리집
정년 때까지 박사과정을 지도한 학생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미국 학생도 상당수 있었고 특히 외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많았다. 조지아대학이 저렴한 학비에 비해서 질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명성이 난 덕분인지 외국 유학생들이 무척 선호하는 학교였다. 유럽과 인도 그리고 아프리카 학생도 여럿 있었고 특히 내가 동양인이다 보니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 유학생들이 나에게 지도교수를 많이 부탁해 왔다.
나는 특히 한국 학생들에게 유학 동안 한국을 옳게 보도록 지도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잘 안 보이던 것이 밖에서 보면 선명해질 수도 있고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봄으로써 한국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교육했다. 전쟁과 남북 분단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평화로운 사회는 어떻게 만들고 평화통일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양으로 되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를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고 고민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나는 한국 학생들에게 내가 연구하고 터득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문제 해결 방법을 강요하거나 주입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문제 해결 방법을 터득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길을 가면서 각자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선생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내가 강의하면서 조지아대학에 가장 공헌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시각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1990년대까지 미국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마르크스를 읽으라는 과제물을 내주는 교수는 한 명도 없었다. 냉전으로 인해 미-소 진영 간의 학문적 교류와 소통이 전혀 없었고 자유민주주의가 그 어떤 통치 이데올로기보다 더 훌륭하다는 견해가 미국 사회와 대학에 지배적이었다. 공산주의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생겨났는가 등에 대한 연구와 강의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단순히 나쁘다 또는 없애야 한다는 등의 선악 또는 흑백 논리만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미국 밖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치제도와 이데올로기를 소개하면서 ‘다름’을 포용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내가 정립한 정치발전론의 시각에서 보면 민주주의가 더 발전된 제도이고 공산주의는 낙후된 제도라는 인식은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더 효과적으로 성취시켜줄 수 있는 제도가 더 발전된 제도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생존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인 욕구다. 생존을 위해서 인간은 물과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 욕구이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 빵을 먹을지 아니면 밥을 먹을지 또는 젓가락을 사용할지 포크를 사용할지는 전적으로 그 사회의 역사와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는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어떤 한쪽이 더 발전되고 우월한 제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즐겨 사용하던 예를 잠시 언급하자면 정치 발전은 등산과 같은 것이다. 산의 정상은 하나인데 그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 결국 목표는 같지만 다양한 방법과 길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학문과 학자의 겸허한 자세이다. 구체적인 예로 미국 학생들이 보는 북한은 한마디로 악마다. 그러나 나는 미국 학생들이 북한도 하나의 정치체제이고 북한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균형있는 시각을 갖도록 가르쳤다. 나에게 배운 학생들 대부분은 북한을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박한식 교수가 2015년 정년 때까지 45년간 재직한 조지아대학 스쿨 오브 퍼블릭 앤 인터내셔널 어페어스(SPIA)는 80년 가까운 전통과 우수한 교수진으로 미국 대학 서열에서 최상위권에 올라 있다. 조지아대학 누리집
공익 봉사 활동(Public Service)도 테뉴어 심사에 중요한 평가 항목이다. 나는 정치 발전과 평화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북한을 방문하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구체적인 활동을 시작한 건 1980년부터이지만, 1970년 조지아대학에 임용된 때부터 준비를 했고 그것이 1980년대부터 조금씩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1976년에 무난히 테뉴어 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연구와 강의 그리고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조지아대학으로부터 교수로서는 최고 영예인 대석좌교수(University Professor)라는 영광스러운 직함도 수여받았다.
구술집필 권준택 미국 유타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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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62995.html#csidxf14f4fd5f3b9c9ab4a064b338fcc0f6
“1970년 조지아주 길목에서 ‘양키 박대’ ‘남부식 환대’ 모두 체험했다”
등록 :2020-09-07 15:04수정 :2021-01-04 14:30
김경애 기자 사진
김경애 기자
미네소타에서 차로 17시간 장거리
중고 승합차로 1박2일 꼬박 운전
만삭 아내·3살 맏딸 태우고 이주
첫날 저녁 남부 지역의 한 주유소
“위 돈 서브 양키스!” 주유 거부
북부 미네소타주 번호판 보고 오해
“내가 양키처럼 보입니까?” 항의에
돌연 태도 바꿔 숙소까지 친절 소개
이튿날 해질녘에야 애선스시 도착
경찰에 도움 청하자 순찰차로 안내
조지아대학 첫날 흑인은 노동자뿐
‘유일하게 양복 입은 흑인 청년’ 이채
법대 부임한 딘 러스크 교수의 사위
케네디·존슨 때 국무장관 지낸 거물
길을 찾아서 (39회) 조지아주 애선스 입성기
박한식 교수는 1970년 봄 조지아대학 교수로 임용받아 중북부 미네소타주에서 남동부 조지아주의 애선스시로 이주해 지금껏 살고 있다. 조지아주의 주도인 애틀랜타에서 북동부 쪽에 위치한 애선스시는 1801년부터 조지아대학과 함께 발달해온 대학도시이자 부유한 농업도시로 유명하다. 사진 조지아대학 아카이브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3년간의 박사 공부를 마치고 1970년 여름 나는 조지아대학으로 이사를 준비했다. 조지아대학이 위치한 조지아주 애선스시로 가는 길은 사실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직장을 구했다는 기쁨도 있었고, 이제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도감도 들었다. 또한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일종의 자격증을 갖게 됐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흥분되고 설레는 마음 이면에는 약간의 두려움 같은 것도 있었다. 내가 좋아서 택한 조지아대학이고, 고향 떠나면 어디든 타향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나와 우리 가족에게 미국 동남부는 여전히 낯선 곳이었다. 또한 노예제도의 잔재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으며, 인종차별과 불평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용인되는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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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대학의 북쪽 입구에 있는 상징 조형물인 ‘조지아 아치’ 앞쪽으로 애선스시의 중심가인 칼리지 애비뉴가 펼쳐져 있다. 1960년대~70년대 풍경이다. 사진 조지아대학 아카이브
조지아주 애선스시의 칼리지 애비뉴 쪽에서 바라본 조지아 아치 너머로 조지아대학의 북쪽 교정이 보인다. 사진 위키미디어
우선 애선스시에서 살림집을 구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인터넷이 보편화된 요즘 같으면 집의 위치와 사진 그리고 주변 정보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멀리 떨어진 다른 주의 주택 정보를 구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캠퍼스 인터뷰 때 고작 2박3일 머물렀던 게 전부였으니, 어느 곳에 어떤 집을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조지아대학 정치학과 교수들에게 전화를 걸어 어느 지역이 안전한지, 출퇴근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마트까지 거리는 어떤지 등등 대략의 정보를 얻고 서너 군데 월셋집을 소개받았다. 집주인들과 전화와 우편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끝에 그중 한 월셋집을 계약했는데 월 75달러를 내야 했다. 집을 보지도 못하고 깜깜이로 월셋집을 얻은 까닭에 실제 입주해서 보니 집이 허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자동차도 문제였다. 미네소타에서 몰던 자동차는 연식도 오래됐고 이곳저곳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학교만 왔다갔다하는 일종의 출퇴근용이었으니 그럭저럭 큰 불편은 없었다. 하지만 자그마치 서울~부산 거리의 6배나 되는 조지아대학까지 운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새 차를 구입하기는 어려워 발품을 팔아가며 좋은 가격에 튼튼한 승합차를 중고로 구매했다. 승합차를 장만한 이유는 이삿짐을 운반하려면 넉넉한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변변치 않은 세간살이였지만 바리바리 싸 들고 갔던 이유는 낯선 곳에 가서 적응하기도 힘든데 당장 살림살이를 장만하러 동분서주하는 일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자동차의 뒷좌석 시트를 모두 뒤로 눕혀 한가득 짐을 싣고 나는 운전석에, 집사람과 큰딸아이는 조수석에 앉아 조지아주를 향해 길을 나섰다. 집사람은 그때 둘째를 임신해 8개월째였다.
미네소타대학에서 조지아대학까지는 지금 달려도 자동차로 꼬박 17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다. 더욱이 고도 1천 미터가 넘는 애팔래치아산맥을 넘어야 하는 험한 길이었다. 그때는 도로 사정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으니 하루 만에 조지아에 입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만삭인 집사람과 세살배기 딸아이에게는 무리였다. 가는 도중 중간 지점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이틀 일정으로 길을 나섰다. 출발 전날 집사람과 나는 미국 지도를 구해 대략의 주와 주 사이의 고속도로 정보를 숙지했다. 그때만 해도 조수석의 동승자가 내비게이션 구실을 해야 했다. 집사람이 시종일관 지도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길안내를 해주었다. 자칫 길을 잘못 들어서기라도 하는 날에는 상당 시간을 허비해야 하기 때문에 가는 내내 한시도 지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밝은 낮에 조금이라도 더 달리자는 생각에 쉼 없이 운전했다. 어느덧 날도 어둑어둑해지고 마침 주유등에 노란불도 들어왔다. 기름도 넣고 하루 저녁 묵을 숙소에 대한 정보도 얻고자 주유소로 들어갔다. 지금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켄터키주 아니면 테네시주였던 것 같다. 주유기 가까이 차를 대고 있으니 주유원이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창문을 조금 내리고 가득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주유원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떡이면서 주유기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주유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에 힐끗 내 차의 번호판을 보더니 갑자기 기름을 안 판다는 것이었다. 황당해서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더욱 기가 막혔다. “위 돈 서브 양키스!” 양키들에게는 기름을 안 판다니 상상 초월이었다.
양키라는 말은 원래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통용되는 용어다. 미국 밖에서는 미국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하고, 미국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뉴잉글랜드 지역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도 통용된다. 특히 남북전쟁 때는 남부연합군이 북군을 경멸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했고 대체로 미국의 북부에 위치한 주들을 통칭했다. 내 자동차의 미네소타주 번호판이 주유원으로 하여금 내가 북부에 살고 있는 양키이고 남쪽을 여행하는 중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것 같았다. 나는 자동차 실내등을 켜고 창문을 좀 더 내리고 얼굴을 창문 밖으로 내밀면서 주유를 하지 않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주유원의 뒤통수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내가 양키처럼 보입니까?”(Do I look like a Yankee?)
박한식 교수는 1970년 조지아주로 향하면서 북부 출신 ‘양키’로 오해받아 박대를 당하기도 하고 외국인에 대한 ‘딥사우스’ 특유의 정서인 ‘남부식 환대’(사진)를 체험하기도 했다. 사진 리더스 다이제스트
그러자 내 차로 다시 다가온 주유원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태도가 급변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180도 바뀐 친절한 모습으로 기름을 넣어주었고 주변에 하룻밤 묵을 수 있는 깨끗한 숙소도 알려주었다. 양키에게는 까칠하고 흑인들을 차별하지만 외국인에게는 친절하다는 소위 ‘남부 환대’가 이런 것인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나는 100년 전 종결된 남북전쟁이 미국 사회에 남겨놓은 상처와 앙금을 새삼 떠올렸다. 사실 한국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남겨놓은 상처도 남북전쟁의 그것 못지않다. 한국전쟁은 남과 북의 적개심과 반목 그리고 앙금의 원천이다. 교류와 협력 그리고 평화통일을 지향해야 하는 남북한에게 한국전쟁의 상처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은 민족적 과제이다.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남북한의 동질성을 발견해서 꾸준히 진작시키는 노력뿐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1970년 봄 박한식 교수가 조지아주 애선스시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들어가 도움을 청했던 프린스 애비뉴의 맥도날드(사진) 매장은 지금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영업중이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우리 가족은 이튿날 해질녘에야 조지아대학이 있는 애선스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간 고속도로 지도는 가지고 있었지만 애선스시 지역 지도는 구하질 못했다. 달랑 주소 하나 들고 캄캄한 밤에 월셋집을 찾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침 애선스시에 들어서자마자 환히 빛나는 맥도날드의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맥도날드는 지금도 같은 장소에서 영업하고 있다. 출출하던 참에 요기도 하고 길도 물어볼 겸 해서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주위를 돌아보니 덩치 큰 경찰관 두 명이 제법 커다란 햄버거와 접시 가득한 감자튀김으로 늦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지역 경찰관이니 지리를 잘 알겠다 싶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길을 물었다. 사실 경찰관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경찰관 하면 일본 순사의 이미지가 떠올랐고 특히 4·19혁명에 직접 참여하면서 보고 경험했던 경찰의 횡포와 탄압 그리고 무자비한 공권력 남용으로 인해 공포심과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외국인에게는 친절하다는 남부 환대에 기대를 걸고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나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경찰관은 월셋집까지 친절하고 안전하게 순찰차로 에스코트해주었고 신호등도 무시하고 앞서가는 순찰차 덕분에 금세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랜 운전으로 피곤했지만 나는 바로 이튿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서 학교로 향했다. 정치학과에 들러 인사도 하고 인사과를 찾아서 입사 서류를 작성하는 등 행정 절차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싶어서였다. 청명한 날씨에 잘 다듬어진 초록빛 잔디밭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아름답게 조성된 캠퍼스의 오솔길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첫 출근길의 모습이다. 아직 개학을 하지 않았던 캠퍼스에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은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한 흑인 청년이었다. 흑인 학생도 교직원도 극소수였던 조지아대학에서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청년이라. 차림으로 봐서는 학생은 아닌 것 같고 흑인 교수도 없다고 알고 있었기에 궁금증이 들었다. 마침 그 청년은 정치학과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고 있었다.
1970년 조지아대학에 첫 출근 한 날 박한식 교수가 교정에서 만날 수 있었던 흑인들은 대부분 학교 잡무를 하는 노동자였고 학생과 교수들은 거의 백인이었다. 사진 조지아대학 아카이브
그 건물로 들어서니 그 청년은 보이질 않았고 한 무리의 흑인들이 맞아주었다. 다가가서 내 소개를 하고 인사를 나누고 나서 보니 청소 직원들이었다. 모두가 흑인이었고 허리춤에 커다란 열쇠 꾸러미를 차고 있는 한 사람만이 백인이었는데, 알고 보니 청소를 관장하는 책임자였다. 지난 연재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조지아대학에서 보이는 흑인들은 대다수가 건물이나 도로 청소를 하는 단순 육체노동자들이었다. 남부 흑인들은 순종적이고 복종적인 노예문화에 여전히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훗날 깨달은 사실이지만 똑똑하고 진취적이며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흑인들은 모두 남부를 떠나 다른 주로 이주해서 정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정치학과 사무실에 들러 직원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혹시나 해서 아까 보았던 양복 차림 흑인에 관해 물어보았다. 직원은 그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25살의 가이 깁슨 스미스인데 그해 조지아대학 법과대학에 부임해 온 딘 러스크 교수의 사위라고 했다. 딘 러스크는 이미 유명한 사람이었다. 1961년부터 69년까지 케네디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행정부에서 8년간이나 국무장관으로 재임한 저명인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퇴직하고 고향인 조지아주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법과대학 교수로 부임한 것이었다.
딘 러스크(맨 왼쪽)는 1961년 존 에프 케네디(가운데) 때부터 1968년 린든 존슨 대통령 때까지 2대에 걸쳐 국무장관을 지낸 미국 정가의 거물로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오른쪽)와 더불어 베트남전쟁 정책에 깊숙이 간여했다. 1961년 1월 백악관 회의 모습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1967년 국무장관 딘 러스크(왼쪽)은 딸과 흑인 청년의 결혼이 린든 존슨(가운데) 대통령의 내각에 부담을 줄 것을 우려해 스스로 사임을 요청하기도 했다. 1968년 2월 백악관에서 러스크·존슨·맥나마라(오른쪽)가 베트남전쟁 관련 회의를 하는 모습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뒤이어 나는 도서관으로 가서 딘 러스크 교수의 딸 마거릿과 가이 깁슨 스미스의 결혼식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았다. 미국 동남부 조지아주 출신 백인이면서 미국 정부의 최고위직인 국무장관으로 8년간이나 재직한 러스크 교수가 어떻게 흑인 사위를 허락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박사과정 공부 와중이어서 미처 챙겨보지 못했지만 이들의 결혼식은 미국에서 큰 화젯거리였고 신문마다 헤드라인으로 소개될 만큼 큰 뉴스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식이 행해졌던 1967년 9월은 미국 연방대법원이 16개 주에서 타 인종 간의 결혼, 특히 백인과 흑인 간의 결혼을 금지한 법률이 연방헌법에 위배된다는 위헌결정을 내린 지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흑백 차별과 불평등이 만연했던 1960년대 딸의 결혼식으로 인해 존슨 대통령 행정부에 부담을 주기 싫어서 사임까지 요청해 가면서 흑인 청년과 딸의 결혼을 허락했던 러스크 장관의 인품에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러스크 교수와 나는 그가 1984년 법과대학에서 은퇴할 때까지 두터운 친분과 우정을 쌓았고 한반도 정세에 관한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현직 국무장관 딘 러스크의 18살 딸 마거릿(왼쪽)과 22살 흑인 조종사 가이 깁슨 스미스(오른쪽)의 1967년 9월 결혼식은 <타임> 잡지 표지에 실릴 만큼 파격적인 뉴스였다. 박한식 교수는 1970년 같은 시기 조지아대학 법대 교수로 부임한 러스크와 각별한 교류를 나눴다.
1967년 9월 딘 러스크(오른쪽)가 부인 버지니아(왼쪽)와 함께 캘리포니아주 스탠포드의 한 채플에서 열린 딸의 결혼식장에 도착하고 있다. 사진 에이피통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잠시 은행에 들러 계좌도 계설했다. 나에게 한 가지 새로웠던 사실은 학교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그렇고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영어가 남부 특유의 악센트가 강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흑인들의 영어는 발음은 물론이고 단어와 표현 그리고 말하는 방식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영어의 사용 방식과는 확연히 달랐다.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조지아주에서 나고 자란 흑인 토박이들의 발음은 여전히 중간중간에 못 알아듣기도 한다. 집에 돌아오니 집사람이 분주하게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조지아주 애선스시에서의 첫날이 저물고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지금까지 애선스시 근교에서 반세기 넘는 세월을 살고 있다.
집필 권준택 미 유티카대학 교수, 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61073.html#csidxdc91fe18a5bf76fb9bb5a84cb207048
길을 찾아서-38회 조지아대학 교수가 되다
“1960년대 ‘반전운동 기지’ 미네소타에서 ‘평화학’ 초석 다졌다”
등록 :2020-08-10 21:57수정 :2021-01-04 15:19
김경애 기자 사진
김경애 기자
‘국가론’ 읽으며 플라톤 사상에 심취
‘플라톤 대가’ 시블리 교수에게 끌려
직접 편지 보내 토론한 끝에 입학 허가
1967년 미네소타대 ‘정치학’ 박사과정
반전운동 주도 시블리 ‘블랙리스트’에
베트남전 반대 전미교수협회장도 맡아
“박사 논문 지도교수 맡기 곤란” 비상
‘막스 베버’ 전문가 돈 마틴데일 교수
‘과학철학 석학’ 허버트 파이글 교수
그의 제자인 메이 브로드벡 교수 등
‘학문은 어떻게 연구해야 하나’ 배워
박한식 교수는 미국 유학 3년째인 1967년 북미 중서부의 북쪽에 자리한 미네소타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 3년 만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침 그 무렵 미네소타대는 베트남전 반대 운동의 열기가 뜨거웠고, 그 역시 열정적으로 ‘평화학’의 싹을 키울 수 있었다. 사진은 1955~75년에 걸친 2차 인도차이나반도 전쟁 동안 미네소타대의 학생들과 반전 활동가들이 미 전역의 시위대들과 연대해 거리로 뛰쳐나왔던 기록들이다. 미네소타대 아카이브 갈무리
1967년 가을 나는 박사 공부를 위해 미네소타대학에 입학했다. 워싱턴디시에 있는 아메리칸대학에서 2년간의 석사과정을 마치고 아내와 젖먹이 딸을 데리고 자동차로 17시간을 달려 미네소타대학에 도착했다. 미국 미네소타주의 날씨는 내가 나고 유년기를 보냈던 만주 하얼빈의 그것과 흡사하다. 여름 무더위는 없지만 겨울이 길고 춥다. 눈도 많이 오고 종종 어른 키만큼의 폭설이 내리기도 한다. 미네소타대학에는 항상 두 종류의 지도가 비치되어 있다. 하나는 건물과 도로를 표시한 지상 지도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 지도이다. 겨울이 워낙 길고 춥다 보니 주차장에서 건물들과 바로 연결되는 지하 통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지하 지도는 지하도 입구에서 빌딩과 강의실로 연결되는 통로를 표시하고 있는데 마치 중세 수도원의 카타콤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춥고 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박사 공부를 위해 내가 미네소타대학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석사 학위를 밟던 중에 읽었던 한 편의 논문이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되었다. 멀퍼드 시블리 교수가 저술한 ‘더 플레이스 오브 클래시컬 폴리티컬 시어리 인 더 스터디 오브 폴리틱스: 더 리지티메이트 스펠 오브 플라토’라는, 플라톤의 철학과 사상을 명료하면서도 심도있게 서술한 논문이었다. 논문을 읽는 순간 ‘바로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시블리 교수에게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시블리 교수가 바로 미네소타대학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시절부터 플라톤에 관심이 많았다. 플라톤에 대한 학문적 갈증도 있었지만 플라톤의 사상과 철학을 통해 평화를 모색하고자 하는 데 더 큰 관심이 있었다. 평화에 대한 갈망은 내가 몸소 겪어온 전쟁의 참상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연재에서도 언급했듯이 나의 조부모님은 망국의 한을 업고 만주로 이주했고 나는 만주사변이 한창이던 1939년 하얼빈에서 태어나 전쟁의 한가운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해방 이후 잠시 평양에서 소학교를 다녔지만 남북 분단으로 인해 다시 남쪽으로 이동해 왔고 한국전쟁이라는 끔찍한 동족상잔도 목격했다. 또한 전쟁 이후 ‘반공’을 국시로 하는 한국에서 평생을 빨갱이로 매도당하는 고초를 겪으며 변변한 일자리 하나 가지지 못했던 아버님을 보면서 평화에 대한 열망을 키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박한식 교수는 서울대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기원전 427~347)의 사상을 깊이 공부하고자 미네소타대 정치학과 대학원의 박사과정을 선택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대표 저서 ‘국가론’은 보통 ‘국가 혹은 정의에 대하여'라고도 한다. 플라톤이 교사 시절인 중년기에 쓴 것으로, 전체 10권이다. 책 표지의 사진은 1897년 이집트의 옥시린쿠스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사본에 적힌 ‘국가론’의 일부다. 이 사본에는 기원전 1세기 후반에서 기원후 7세기까지 그리스·라틴 문학 작품들과 그리스도교 관계 문서들이 부분적으로 담겨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서울대 시절 나는 플라톤의 명저인 <국가론>에 심취해 있었다. 2400년 전에 살았던 서양 철학자의 지혜에서 작금의 세상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은 마음에 국가론을 읽고 또 읽었다. 영어로 쓰인 원서로도 읽었고 우리말 번역본도 읽었다. 어려웠다. 플라톤의 사상을 영어로 읽고 이해하기에는 내 역량이 많이 부족했고, 우리말 번역본은 번역에 상당한 오류가 있어 이해가 더 어려웠다. 하지만 플라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는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었다.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지, 올바름의 정의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인지에 대한 논의가 풍성하고 심도있게 서술되어 있었다. 플라톤을 더 깊이있게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이 나를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했고, 플라톤의 대가인 시블리 교수를 찾아낸 것이다.
나는 시블리 교수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 소개도 하고 내가 플라톤과 평화에 관심을 갖게 된 연유도 자세히 전달했다. 시블리 교수와 같이 공부하고 싶다는 나의 열망을 전했고 플라톤에 대한 토론도 했다. 시블리 교수는 내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몇 번의 서신이 오가는 동안 입학 허가서는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장학금을 주겠다는 공식적인 확답이 없었다.
무일푼이었던 나로서는 장학금 없이 박사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원래 박사과정은 반학생·반직장인이다. 그리고 박사과정 학생은 논문을 쓰고 학위 공부를 하지만 교수들에게는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일종의 동료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박사과정 학생에게 장학금과 함께 매달 소정의 월급이 지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게다가 일리노이주립대학을 비롯한 몇몇 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안이 있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미네소타대학과 시블리 교수에게 장학금에 관해 재차 문의했고, ‘지금 확답을 줄 수는 없지만 입학하면 장학금과 수업 조교를 할 수 있도록 알아봐주겠다’는 비공식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고심 끝에 미네소타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운 좋게 첫 학기부터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네소타대학에 오자마자 박사 공부에 차질이 생겼다. 시블리 교수가 강의도 하지 않고 박사과정 지도교수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시블리 교수 하나만 보고 미네소타까지 왔는데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내가 박사과정을 시작하던 1967년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시블리 교수는 학계에서도 유명한 평화주의자였고 또 열성적인 반전운동가였다. 그는 ‘베트남전 반대 전미교수협회’ 회장을 맡고 있었고 미국 전역을 돌면서 반전운동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다. 시블리 교수는 원래부터 논란의 인물이었다.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1950년대 초에도 사회주의, 평화주의 같은 이념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발언 탓에 문제적 인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기도 했다. 그는 평화주의, 이상주의, 그리고 시민 불복종 같은 주제들에 관해 많은 논문과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반전운동으로 인해 심적·물리적 여유가 없어서 지도교수를 맡아줄 수 없다고 했다.
박한식 교수는 플라톤 연구의 대가인 멀퍼드 시블리 교수에게 지도를 받고자 미네소타대학 정치학과를 선택했다. 시블리는 베트남 전쟁 반대 전미교수협회의 회장으로 반전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전국를 돌며 순회 강연을 했다. 사진은 미네소타의 중심도시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150년 전통의 아우쿠스부르크대학에서 1965년 시블리 교수 초청 강연을 소개한 안내문이다. 아우쿠스부르크대학 누리집 갈무리
평화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선택한 배경에는 사실 미국에 대한 나의 믿음이 있었다. 미국은 누가 뭐래도 기독교에 근간을 두고 탄생한 국가이다. ‘미국 헌법 수정 1조’에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정교분리의 원칙’이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미국 사회는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여전히 성경책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한다. 기독교 정신을 건국 이념으로 세워진 나라라면 전쟁을 멀리하고 평화를 지향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순진한 믿음은 베트남 전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베트남 전쟁은 명문도 실리도 찾아볼 수 없는 미국의 속물적이고 저급한 패권 놀음일 뿐이었다. 나도 시블리 교수만큼이나 베트남 전쟁에 분노와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나를 더 화나게 만들었던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선민사상과 미국의 가치로 선과 악을 재단하는 이분법적인 행동양식으로 왜곡되고 변질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공산주의를 악마로 규정하고 무력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 악마를 제거하는 것이 미국의 도덕적 책무이며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을 이루는 신성한 미션이라는 환상이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전쟁을 승리와 패배라는 흑백논리로만 인식하는 미국 문화는 베트남 전쟁의 참상과 부당함에는 눈과 귀를 닫고 있었다. 미국 정부와 언론은 매일 저녁 미군의 사망자 수와 적군의 사망자 수를 차트까지 만들어 비교하며 마치 스포츠 경기 스코어를 중계하듯 보도하면서 미군 사망자 수가 더 적으니 미국이 전쟁에 승리하고 있다는 선전까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 베트남 전쟁은 나의 평화 연구에 대한 열정과 열망을 극대화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박한식 교수는 정치학과의 시블리 교수에게 박사 논문 지도를 받을 수 없게 되자 대신 철학과와 사회학과에서 흥미로운 과목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특히 ‘과학철학의 대가’인 허버트 파이글(왼쪽)과 그의 애제자인 메이 브로드벡(오른쪽) 교수에게 도움을 받았다. 1954년도 미네소타대 철학과 교수진 단체 사진. 사진 미네소타대학 누리집 갈무리
시블리 교수와 함께 연구할 수 없는 상황은 나에게는 절망이었다. 그러나 평화 연구에 대한 나의 열망과 고집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정치학과에 있는 모든 교수들을 둘러봐도 시블리 말고는 플라톤과 평화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교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그 시절 정치학계에서 유행하고 있던 ‘행태주의’ 접근 방법을 신봉하고 있었다. ‘길을 찾아서’ 13회에서 언급했듯이 행태주의를 통해서는 내가 염원하는 ‘평화병의 지적 처방’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나는 인접 학문을 하는 교수들의 면면을 살피기 시작했고 사회학과와 철학과에서 내 학문의 스승이 되어줄 2명의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한 분은 돈 마틴데일 교수였고 다른 한 분은 허버트 파이글 교수였다.
사회학 이론을 전공하는 돈 마틴데일 교수는 막스 베버 연구로 유명한 학자였다. 여러 편의 막스 베버 논문과 저서를 영어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막스 베버의 수제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베버 연구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었다. 마틴데일 교수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막스 베버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만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막스 베버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고 행태주의 풍조에 젖어 있던 당시의 학풍에서 인간 행동과 사회 현상을 문화적 접근 방법으로 조명했던 베버의 통찰력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했던 것은 과학철학이었다. 과학철학은 과학의 방법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추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아는 것이며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라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저명한 과학철학의 대가인 허버트 파이글이 철학과에 있었다. 파이글 교수는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1930년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였다. 논리 실증주의로 대표되는 빈(비엔나) 학파의 초창기 회원으로도 유명했다.
미네소타대 철학과의 허버트 파이글(왼쪽) 교수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논리 실증주의’를 주창한 비엔나 학파의 초창기 회원으로도 유명했다. 1930년대 비엔나 학파의 리더인 모리츠 슐리크(오른쪽)와 함께한 모습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지금 돌아보면 그를 만난 건 나에게 정말 큰 행운이었다. 파이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틈나는 대로 찾아가 토론하고 끝없는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던졌다. 파이글과 그의 제자였던 메이 브로드벡의 강의를 수강하면서 나는 학문이라는 것은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과학철학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3년간의 박사 공부를 마치고 나니 과학철학으로서 정치학 방법론을 나 나름대로 모색할 수 있는 학문적 지식과 관점을 갖출 수 있었다. 차후 연재에서 상세히 서술하겠지만, 학위를 마친 뒤 나는 조지아대학에 과학철학과 정치학 방법론 강의를 담당할 교수로 임용되었다.
미네소타대학에서 지낸 3년간의 박사과정은 내 삶 가운데 가장 열정적인 시간이었다. 정말 공부도 열심히 했고 책도 많이 읽고 다양한 시각도 두루 접했다. 과학철학, 사회학, 사회심리학, 그리고 정치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강의를 닥치는 대로 듣고 공부했다. 석사 학위 학점을 인정받아서 총 90학점만 이수하면 되는 박사과정에서 나는 3년 동안 자그마치 120학점을 이수했다. 박사 공부는 내 평생 학문의 토대가 되어주었고 연구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해주었다.
미국에서 50년 넘는 세월을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한국 유학생을 보았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안타까웠던 점은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이 목적의식 없이 유학을 나오고 단순히 학위 취득 목적만을 위해 20대의 황금 같은 시기를 허비한다는 것이다. 미국에 오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무엇을 공부하기를 원하고, 왜 공부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기를 당부하고 싶다.
나는 평화 연구를 정치학 테두리 안에서만 해야 한다는 짧은 소견에서도 탈피할 수 있었다. 정치학에서 전쟁학을 연구할 수는 있다. 전쟁의 원인을 고찰하고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들을 연구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늘 강조했듯이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전쟁이 없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도 아니다. 평화는 이질성의 조화이며, 평화 연구는 이질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학문이다. 남북한의 평화 통일도 이러한 견지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에 진정한 평화 연구를 위해서는 인접 학문과의 학제 간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시블리 교수와 함께 연구할 수 없었던 상황은 나에게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 시블리가 지도교수가 되었더라면 아마도 평생을 플라톤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학문의 은사이자 스승이었던 마틴데일 교수와 파이글 교수는 이미 오래전에 작고했다. 박사과정 내내 따뜻하게 나를 대해준 그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57266.html#csidx73bda79de3b586fa997e8d7174d96ef
“1960년대 ‘반전운동 기지’ 미네소타에서 ‘평화학’ 초석 다졌다”
“1960년대 ‘반전운동 기지’ 미네소타에서 ‘평화학’ 초석 다졌다”
등록 :2020-08-10 21:57수정 :2021-01-04 15:19
김경애 기자 사진
김경애 기자
‘국가론’ 읽으며 플라톤 사상에 심취
‘플라톤 대가’ 시블리 교수에게 끌려
직접 편지 보내 토론한 끝에 입학 허가
1967년 미네소타대 ‘정치학’ 박사과정
반전운동 주도 시블리 ‘블랙리스트’에
베트남전 반대 전미교수협회장도 맡아
“박사 논문 지도교수 맡기 곤란” 비상
‘막스 베버’ 전문가 돈 마틴데일 교수
‘과학철학 석학’ 허버트 파이글 교수
그의 제자인 메이 브로드벡 교수 등
‘학문은 어떻게 연구해야 하나’ 배워
박한식 교수는 미국 유학 3년째인 1967년 북미 중서부의 북쪽에 자리한 미네소타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 3년 만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침 그 무렵 미네소타대는 베트남전 반대 운동의 열기가 뜨거웠고, 그 역시 열정적으로 ‘평화학’의 싹을 키울 수 있었다. 사진은 1955~75년에 걸친 2차 인도차이나반도 전쟁 동안 미네소타대의 학생들과 반전 활동가들이 미 전역의 시위대들과 연대해 거리로 뛰쳐나왔던 기록들이다. 미네소타대 아카이브 갈무리
1967년 가을 나는 박사 공부를 위해 미네소타대학에 입학했다. 워싱턴디시에 있는 아메리칸대학에서 2년간의 석사과정을 마치고 아내와 젖먹이 딸을 데리고 자동차로 17시간을 달려 미네소타대학에 도착했다. 미국 미네소타주의 날씨는 내가 나고 유년기를 보냈던 만주 하얼빈의 그것과 흡사하다. 여름 무더위는 없지만 겨울이 길고 춥다. 눈도 많이 오고 종종 어른 키만큼의 폭설이 내리기도 한다. 미네소타대학에는 항상 두 종류의 지도가 비치되어 있다. 하나는 건물과 도로를 표시한 지상 지도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 지도이다. 겨울이 워낙 길고 춥다 보니 주차장에서 건물들과 바로 연결되는 지하 통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지하 지도는 지하도 입구에서 빌딩과 강의실로 연결되는 통로를 표시하고 있는데 마치 중세 수도원의 카타콤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춥고 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박사 공부를 위해 내가 미네소타대학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석사 학위를 밟던 중에 읽었던 한 편의 논문이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되었다. 멀퍼드 시블리 교수가 저술한 ‘더 플레이스 오브 클래시컬 폴리티컬 시어리 인 더 스터디 오브 폴리틱스: 더 리지티메이트 스펠 오브 플라토’라는, 플라톤의 철학과 사상을 명료하면서도 심도있게 서술한 논문이었다. 논문을 읽는 순간 ‘바로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시블리 교수에게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시블리 교수가 바로 미네소타대학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시절부터 플라톤에 관심이 많았다. 플라톤에 대한 학문적 갈증도 있었지만 플라톤의 사상과 철학을 통해 평화를 모색하고자 하는 데 더 큰 관심이 있었다. 평화에 대한 갈망은 내가 몸소 겪어온 전쟁의 참상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연재에서도 언급했듯이 나의 조부모님은 망국의 한을 업고 만주로 이주했고 나는 만주사변이 한창이던 1939년 하얼빈에서 태어나 전쟁의 한가운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해방 이후 잠시 평양에서 소학교를 다녔지만 남북 분단으로 인해 다시 남쪽으로 이동해 왔고 한국전쟁이라는 끔찍한 동족상잔도 목격했다. 또한 전쟁 이후 ‘반공’을 국시로 하는 한국에서 평생을 빨갱이로 매도당하는 고초를 겪으며 변변한 일자리 하나 가지지 못했던 아버님을 보면서 평화에 대한 열망을 키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박한식 교수는 서울대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기원전 427~347)의 사상을 깊이 공부하고자 미네소타대 정치학과 대학원의 박사과정을 선택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대표 저서 ‘국가론’은 보통 ‘국가 혹은 정의에 대하여'라고도 한다. 플라톤이 교사 시절인 중년기에 쓴 것으로, 전체 10권이다. 책 표지의 사진은 1897년 이집트의 옥시린쿠스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사본에 적힌 ‘국가론’의 일부다. 이 사본에는 기원전 1세기 후반에서 기원후 7세기까지 그리스·라틴 문학 작품들과 그리스도교 관계 문서들이 부분적으로 담겨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서울대 시절 나는 플라톤의 명저인 <국가론>에 심취해 있었다. 2400년 전에 살았던 서양 철학자의 지혜에서 작금의 세상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은 마음에 국가론을 읽고 또 읽었다. 영어로 쓰인 원서로도 읽었고 우리말 번역본도 읽었다. 어려웠다. 플라톤의 사상을 영어로 읽고 이해하기에는 내 역량이 많이 부족했고, 우리말 번역본은 번역에 상당한 오류가 있어 이해가 더 어려웠다. 하지만 플라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는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었다.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지, 올바름의 정의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인지에 대한 논의가 풍성하고 심도있게 서술되어 있었다. 플라톤을 더 깊이있게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이 나를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했고, 플라톤의 대가인 시블리 교수를 찾아낸 것이다.
나는 시블리 교수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 소개도 하고 내가 플라톤과 평화에 관심을 갖게 된 연유도 자세히 전달했다. 시블리 교수와 같이 공부하고 싶다는 나의 열망을 전했고 플라톤에 대한 토론도 했다. 시블리 교수는 내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몇 번의 서신이 오가는 동안 입학 허가서는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장학금을 주겠다는 공식적인 확답이 없었다.
무일푼이었던 나로서는 장학금 없이 박사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원래 박사과정은 반학생·반직장인이다. 그리고 박사과정 학생은 논문을 쓰고 학위 공부를 하지만 교수들에게는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일종의 동료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박사과정 학생에게 장학금과 함께 매달 소정의 월급이 지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게다가 일리노이주립대학을 비롯한 몇몇 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안이 있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미네소타대학과 시블리 교수에게 장학금에 관해 재차 문의했고, ‘지금 확답을 줄 수는 없지만 입학하면 장학금과 수업 조교를 할 수 있도록 알아봐주겠다’는 비공식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고심 끝에 미네소타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운 좋게 첫 학기부터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네소타대학에 오자마자 박사 공부에 차질이 생겼다. 시블리 교수가 강의도 하지 않고 박사과정 지도교수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시블리 교수 하나만 보고 미네소타까지 왔는데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내가 박사과정을 시작하던 1967년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시블리 교수는 학계에서도 유명한 평화주의자였고 또 열성적인 반전운동가였다. 그는 ‘베트남전 반대 전미교수협회’ 회장을 맡고 있었고 미국 전역을 돌면서 반전운동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다. 시블리 교수는 원래부터 논란의 인물이었다.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1950년대 초에도 사회주의, 평화주의 같은 이념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발언 탓에 문제적 인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기도 했다. 그는 평화주의, 이상주의, 그리고 시민 불복종 같은 주제들에 관해 많은 논문과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반전운동으로 인해 심적·물리적 여유가 없어서 지도교수를 맡아줄 수 없다고 했다.
박한식 교수는 플라톤 연구의 대가인 멀퍼드 시블리 교수에게 지도를 받고자 미네소타대학 정치학과를 선택했다. 시블리는 베트남 전쟁 반대 전미교수협회의 회장으로 반전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전국를 돌며 순회 강연을 했다. 사진은 미네소타의 중심도시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150년 전통의 아우쿠스부르크대학에서 1965년 시블리 교수 초청 강연을 소개한 안내문이다. 아우쿠스부르크대학 누리집 갈무리
평화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선택한 배경에는 사실 미국에 대한 나의 믿음이 있었다. 미국은 누가 뭐래도 기독교에 근간을 두고 탄생한 국가이다. ‘미국 헌법 수정 1조’에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정교분리의 원칙’이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미국 사회는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여전히 성경책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한다. 기독교 정신을 건국 이념으로 세워진 나라라면 전쟁을 멀리하고 평화를 지향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순진한 믿음은 베트남 전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베트남 전쟁은 명문도 실리도 찾아볼 수 없는 미국의 속물적이고 저급한 패권 놀음일 뿐이었다. 나도 시블리 교수만큼이나 베트남 전쟁에 분노와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나를 더 화나게 만들었던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선민사상과 미국의 가치로 선과 악을 재단하는 이분법적인 행동양식으로 왜곡되고 변질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공산주의를 악마로 규정하고 무력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 악마를 제거하는 것이 미국의 도덕적 책무이며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을 이루는 신성한 미션이라는 환상이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전쟁을 승리와 패배라는 흑백논리로만 인식하는 미국 문화는 베트남 전쟁의 참상과 부당함에는 눈과 귀를 닫고 있었다. 미국 정부와 언론은 매일 저녁 미군의 사망자 수와 적군의 사망자 수를 차트까지 만들어 비교하며 마치 스포츠 경기 스코어를 중계하듯 보도하면서 미군 사망자 수가 더 적으니 미국이 전쟁에 승리하고 있다는 선전까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 베트남 전쟁은 나의 평화 연구에 대한 열정과 열망을 극대화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박한식 교수는 정치학과의 시블리 교수에게 박사 논문 지도를 받을 수 없게 되자 대신 철학과와 사회학과에서 흥미로운 과목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특히 ‘과학철학의 대가’인 허버트 파이글(왼쪽)과 그의 애제자인 메이 브로드벡(오른쪽) 교수에게 도움을 받았다. 1954년도 미네소타대 철학과 교수진 단체 사진. 사진 미네소타대학 누리집 갈무리
시블리 교수와 함께 연구할 수 없는 상황은 나에게는 절망이었다. 그러나 평화 연구에 대한 나의 열망과 고집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정치학과에 있는 모든 교수들을 둘러봐도 시블리 말고는 플라톤과 평화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교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그 시절 정치학계에서 유행하고 있던 ‘행태주의’ 접근 방법을 신봉하고 있었다. ‘길을 찾아서’ 13회에서 언급했듯이 행태주의를 통해서는 내가 염원하는 ‘평화병의 지적 처방’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나는 인접 학문을 하는 교수들의 면면을 살피기 시작했고 사회학과와 철학과에서 내 학문의 스승이 되어줄 2명의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한 분은 돈 마틴데일 교수였고 다른 한 분은 허버트 파이글 교수였다.
사회학 이론을 전공하는 돈 마틴데일 교수는 막스 베버 연구로 유명한 학자였다. 여러 편의 막스 베버 논문과 저서를 영어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막스 베버의 수제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베버 연구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었다. 마틴데일 교수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막스 베버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만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막스 베버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고 행태주의 풍조에 젖어 있던 당시의 학풍에서 인간 행동과 사회 현상을 문화적 접근 방법으로 조명했던 베버의 통찰력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했던 것은 과학철학이었다. 과학철학은 과학의 방법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추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아는 것이며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라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저명한 과학철학의 대가인 허버트 파이글이 철학과에 있었다. 파이글 교수는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1930년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였다. 논리 실증주의로 대표되는 빈(비엔나) 학파의 초창기 회원으로도 유명했다.
미네소타대 철학과의 허버트 파이글(왼쪽) 교수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논리 실증주의’를 주창한 비엔나 학파의 초창기 회원으로도 유명했다. 1930년대 비엔나 학파의 리더인 모리츠 슐리크(오른쪽)와 함께한 모습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지금 돌아보면 그를 만난 건 나에게 정말 큰 행운이었다. 파이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틈나는 대로 찾아가 토론하고 끝없는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던졌다. 파이글과 그의 제자였던 메이 브로드벡의 강의를 수강하면서 나는 학문이라는 것은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과학철학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3년간의 박사 공부를 마치고 나니 과학철학으로서 정치학 방법론을 나 나름대로 모색할 수 있는 학문적 지식과 관점을 갖출 수 있었다. 차후 연재에서 상세히 서술하겠지만, 학위를 마친 뒤 나는 조지아대학에 과학철학과 정치학 방법론 강의를 담당할 교수로 임용되었다.
미네소타대학에서 지낸 3년간의 박사과정은 내 삶 가운데 가장 열정적인 시간이었다. 정말 공부도 열심히 했고 책도 많이 읽고 다양한 시각도 두루 접했다. 과학철학, 사회학, 사회심리학, 그리고 정치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강의를 닥치는 대로 듣고 공부했다. 석사 학위 학점을 인정받아서 총 90학점만 이수하면 되는 박사과정에서 나는 3년 동안 자그마치 120학점을 이수했다. 박사 공부는 내 평생 학문의 토대가 되어주었고 연구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해주었다.
미국에서 50년 넘는 세월을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한국 유학생을 보았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안타까웠던 점은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이 목적의식 없이 유학을 나오고 단순히 학위 취득 목적만을 위해 20대의 황금 같은 시기를 허비한다는 것이다. 미국에 오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무엇을 공부하기를 원하고, 왜 공부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기를 당부하고 싶다.
나는 평화 연구를 정치학 테두리 안에서만 해야 한다는 짧은 소견에서도 탈피할 수 있었다. 정치학에서 전쟁학을 연구할 수는 있다. 전쟁의 원인을 고찰하고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들을 연구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늘 강조했듯이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전쟁이 없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도 아니다. 평화는 이질성의 조화이며, 평화 연구는 이질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학문이다. 남북한의 평화 통일도 이러한 견지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에 진정한 평화 연구를 위해서는 인접 학문과의 학제 간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시블리 교수와 함께 연구할 수 없었던 상황은 나에게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 시블리가 지도교수가 되었더라면 아마도 평생을 플라톤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학문의 은사이자 스승이었던 마틴데일 교수와 파이글 교수는 이미 오래전에 작고했다. 박사과정 내내 따뜻하게 나를 대해준 그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57266.html#csidx73bda79de3b586fa997e8d7174d96ef
“모두 이산의 민족이니 ‘750만 재외동포’는 통일 자산이다”
“모두 이산의 민족이니 ‘750만 재외동포’는 통일 자산이다”
등록 :2020-07-27 15:35수정 :2021-01-0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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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핍박 이겨내며 ‘민족성’ 고수
남-북 한쪽에 치우침 없이 객관적
중재자·촉매자로서 남북 잇는 가교
수난의 근대사 한민족 10% ‘떠돌이’
만주 이주 거쳐 중국에 남은 ‘조선족’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
일제 징용에서 귀국 못한 ‘재일동포’
해방 이후 이민간 ‘코리안 아메리칸’
같은 말·김치·집단기억 ‘한민족’
반쪽 조국만 선택하도록 강요당해
2세 3세도 분단 현실에 정체성 고민
“내 조국은 하나·시대정신은 통일”
박한식 교수는 그 자신 이산가족이자 재미 한인으로서 전세계에 퍼져 있는 한민족 재외동포들을 통일의 촉매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9년 현재 재외동포는 180개국에 749만명을 헤아린다. 사진 재외동포재단 ‘코리안넷’ 제공
나는 재외동포다. 중국에서 재외동포로 태어나 거기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마치고 1965년에 도미하여 55년째 미국에 살고 있으니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재외동포로 살아온 셈이다. 아마도 재외동포로 생을 마치지 않을까 싶다. 평생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노력과 헌신이 가능했던 것은 나라 밖에서 남북 양쪽을 좀 더 객관적이고 균형있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쪽 북쪽 모두를 필요에 따라 방문할 수 있었고 한반도 문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통일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미국 주류 사회에 조언도 할 수 있었다.
나에게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살고 있는 미국 문제에나 신경 쓰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하지만 나는 재외동포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타국에서 인종차별과 핍박을 견디고 또 극복하면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으며 거주국 주류 사회와 어우러져 살아가는 지혜도 터득했다. 다양성을 경험하고 남과 북 모두를 편견이나 한쪽에 치우침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기도 하다. 재외동포는 남과 북 어느 한쪽을 선택하거나 또는 선택을 강요받는 차원을 넘어서 중재자로서 그리고 촉매자로서 남북 평화통일의 가교 구실을 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특별한 자산이다.
디아스포라의 어원은 원래 예루살렘을 떠나 전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의든 타의든 모국을 떠다 타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우리말로는 ‘이산’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대가족 중심의 우리 문화를 생각하면 우리 민족 전체가 이산가족이다. 재외 한인 이산의 역사는 우리 민족 수난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2019년 한국 외교부 발간 자료를 보면 한반도 밖에 거주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수는 750만명에 이른다. 남과 북을 합친 인구의 10분의 1이 국외에 살고 있는 셈이니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전세계 200여 나라 가운데 인구가 이에 못 미치는 나라가 셀 수 없이 많다.
미국과 중국에 각각 약 250만명이 거주하고 일본에도 약 80만명의 한민족이 살고 있다. 유럽에도 70만명에 가까운 우리 민족이 살고 있으며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멕시코, 브라질, 그리고 쿠바 등을 비롯한 중남미에도 10만명이 넘는 한인들이 살고 있다. 각기 상이한 이주 과정과 배경만큼이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간도 지방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중국 ‘조선족’ 동포가 되었고 연해주로 건너가 자리잡았던 이들은 스탈린 시절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면서 ‘고려인’이 되었다. 일제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던 조선인들은 ‘재일동포’로 불리고 해방 이후 한국에서 아메리칸드림을 안고 미국에 이주한 사람들은 ‘코리안 아메리칸’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같은 말을 사용하고 생김새도 꼭 닮았고 김치를 먹으며 집단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우리 민족이다.
중국 동북 3성에 살고 있는 250만의 우리 민족은 조선족으로 불린다. 이들 이주 과정과 배경은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배고픔과 굶주림 그리고 일제의 폭정에 못 이겨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월경했던 사람들도 많았고 항일운동에 투신했던 독립투사들도 상당수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1906년 조선 망국의 설움을 안고 북만주의 흑룡강성(헤이룽장성)으로 이주했다. 일제의 패망과 해방 소식은 국경 너머 살던 조선인들에게는 기쁨과 환희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모국의 분단과 전쟁의 참상 그리고 정치적 혼란은 귀향을 그토록 바라던 그들의 소망을 산산이 앗아가 버렸다. 그들이 그리워하던 조국은 더 이상 고향을 떠나올 때 그대로의 조국이 아니었다. 하나의 조국이 아니라 둘로 갈라진 반쪽의 조국이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조선족들은 자연히 한반도의 반쪽만을 조국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받았고 한국을 자본주의의 병폐 정도로만 여겼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많은 조선족이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와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만 한국 사람들이 조선족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선족들이 한국 사람들을 보는 시각도 우호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연해주에 정착한 고려인의 역사도 중국 조선족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근과 빈곤을 피해서 이주했고 경술국치 이후 더 많은 조선인들이 연해주로 넘어갔다. 그러나 1860년 이후 연해주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켜 관리하던 러시아는 1930년대에 17만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고향을 떠나 질곡의 삶을 견디던 연해주 동포들은 또 한번 그 뿌리가 뽑히는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연해주 고려인들도 조선족들과 마찬가지로 반쪽의 조국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받게 된다. 냉전 종식 이후 사회주의 가치에 대한 회의감이 생겨나고 한국의 경제적 풍요로움에 대한 동경도 있지만 여전히 두 개의 조국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에 묻혀 있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둘러싸고 남북한 당국은 대립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봉오동 전투 승리 100돌인 지난 6월7일 유해 봉환 계획을 재확인했다. 엠비시 뉴스 갈무리
지난 6월23일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홍범도 장군 유해는 고향인 평양에 묻혀야 한다’고 주장해, 문재인 정부의 카자흐스탄 유해 송환 계획에 반대하고 나섰다. 사진 엠비시 뉴스 갈무리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던 고려인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봉오동 전투의 영웅인 홍범도 장군도 있었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두고 남과 북 사이에 불거지고 있는 작금의 볼썽사나운 행태는 가히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평양이 고향인 홍 장군의 유해를 북측과 상의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서울로 봉환해 오겠다는 남쪽 정부와 평양으로 송환해 오는 것이 조상 전례 풍습이라고 주장하면서 남쪽 정부의 유해 봉환을 책동과 도발로 폄훼하는 북측을 홍 장군이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먼 이국땅에서 초라하고 쓸쓸한 말년을 보냈던 홍범도 장군이 묻히고 싶었던 조국은 반목과 갈등으로 으르렁대는 반쪽의 조국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국 독립의 소원을 안고 국경을 넘던 때 있던 그 조국은 사라지고 죽어서도 남인지 북인지 선택을 강요받는 것 같아 가슴이 저며온다.
안중근 의사는 지금껏 유해도 찾지 못한 채 남북 모두 가묘로 모셔둔 상태다. 지난 1946년 백범 김구 주석이 서울 용산 효창공원 안에 윤봉길·이봉창·백정기 ‘3의사 묘’ 옆에 마련해둔 안중근 의사 가묘해서 해마다 3월26일 순국일에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사진은 2015년 순국 105주기 때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참배하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0년 평양 애국열사릉의 안중근 의사 묘비에 북한에 있는 후손 20여명이 헌화를 하고 있다. 사진 춘천엠비시 제공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아직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는 못했지만,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안 의사의 유해 봉환도 홍범도 장군의 사례만큼이나 남북 간의 논쟁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은 내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어려서 마을 어른들로부터 안 의사에 관한 얘기를 듣고 자랐다. 1980년대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하얼빈역을 찾아 안 의사의 숭고한 뜻을 되새겼다. 안 의사는 북한에서도 애국열사로 존경을 받고 있다. 서울의 효창공원에 안 의사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는 것처럼 평양 애국열사릉에도 안중근 의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안 의사가 그리워하던 그리고 묻히고 싶었던 조국은 하나 된 조국이었을 것이다.
굴곡진 삶을 살았던 건 재일동포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수많은 조선인들은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조국은 둘로 갈라져 있었고 한국전쟁의 참상은 일본 동포들로 하여금 차라리 일본에 남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일본 사람들로부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차별과 핍박보다 그들을 더 힘들게 했던 것은 남이냐 북이냐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했던 정치적인 현실이었다. 재일동포 사회는 70년이 넘는 세월을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두 조직으로 갈라져 대립과 반목으로 맞서왔다. 재일동포 사회는 둘로 갈라진 조국의 축소판이었으며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선택 후에도 다른 한쪽으로부터 빨갱이니 간첩이니 하는 낙인이 찍혀 살아온 것이 재일동포들의 서글픈 현실이었다.
지난해 재미동포 2세 전후석 감독이 만든 다큐 영화 <헤로니모>는 쿠바 한인 임천택·임은조(헤로니모) 부자의 삶을 통해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환기시켜주고 있다. 사진 커넥트픽쳐스
얼마 전 전후석 감독이 연출한 <헤로니모>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았다. 모진 풍파를 견뎌온 쿠바 이민 1세대인 임천택씨와 자신의 정체성에 번민하는 쿠바 한인 2세대 헤로니모(임은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임천택씨는 1905년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계약 노동자로 이주했다가 1921년에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쿠바로 재이주하였다. 그리고 아들인 헤로니모는 1926년 쿠바에서 태어났다. 개인적으로는 전 감독이 처조카이기도 하지만 조국의 분단 앞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는 헤로니모의 인생 여정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어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라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고 싶어 했던 임 선생 부자의 눈물겨운 노력이 가슴에 와닿았다. 하지만 분단된 조국이라는 엄혹한 정치 현실 앞에 한인회의 설립이 무산되고 어느 한쪽으로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착잡했다.
재외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나라는 미국이다. 약 250만명의 한민족이 살고 있다. 1902~03년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한인 이주가 그 시작이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이민자는 1960년대 이후에 아메리칸드림을 좇아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미국에 정착한 동포들이 다른 동포사회와 구분되는 점은 대다수가 남한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투철한 반공 의식이 여전히 몸에 배어 있고 북한은 상종 못할 집단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재미동포전국연합회’같이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단체도 존재하지만 북한의 붕괴는 사필귀정이고 북한의 붕괴를 통한 독일식 흡수통일만이 유일한 통일의 방법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국 정부도 영사관과 각종 단체들을 통해 미국 동포들에게 반쪽의 조국만을 강요하는 정책들을 미국 내에서 꾸준히 행해오고 있다. 나도 북한을 50여 차례 방문하면서 친북인사니 종북이니 하는 비판을 받았고 한국 정부로부터 북쪽 방문을 여러번 만류당했고 연구기금 신청 제한 등 다양한 불이익을 당했었다. 이렇듯 나도 반쪽의 조국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살았다.
박한식 교수는 재외동포들은 분단된 조국 가운데 한쪽을 선택하라는 고통스러운 강요를 받아왔기에 누구보다 ‘하나 된 한반도’를 열망한다고 말한다. 2018년 10월 경기천년 기념 특별전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산을 넘어’ 출품작인 재일동포 작가 박일남의 <라인-사이-한 나라>. 사진 경기문화재단 제공
나에게 있어서 조국은 그때도 지금도 하나다. 남도 조국이고 북도 조국이다. 다만 지금은 분단되어 있을 뿐이지 언젠가는 통일의 길로 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통일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통일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 없이 평화만을 강조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철학은 안일해 보인다. 평화가 통일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통일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남북 상호 대화와 협력을 통해 꾸준히 통일을 모색하는 일련의 과정만이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다.
분단 이전의 고향을 떠난 이산 1세대는 모두가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그때의 시대정신이 그랬다. 적극적으로 독립활동에 참여한 독립투사들도 필부도 모두 조국의 독립을 소원하고 그 염원을 위해 노력했다. 일제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던 이들도 있었고 친일파가 득실득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시대정신은 대한독립이었고 이름 한 자 남기지 못하고 떠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헌신으로 해방은 찾아왔다. 작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대정신은 통일이다.
통일 준비 과정에서 남과 북 양쪽을 모두 접할 수 있는 재외동포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남과 북 사이에 양자택일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 된다. 한민족 그리고 하나의 조국이라는 공동체 의식으로 남과 북 모두를 편견이나 한쪽에 치우침 없이 바라보면서 남과 북 사이의 가교 구실을 해야 한다. 특히 전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750만명의 재외동포는 역사적, 정치적, 이념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다른 어떤 민족보다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재외동포들의 이러한 풍부하고 다양한 체험과 경험은 통일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통일 조국의 청사진을 설계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통일의 과정은 ‘민족 자주의 원칙’에 의거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주변국한테 한반도 통일이 그들의 국익에 해가 아니라 득이 될 것이라는 외교적 설득도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는 통일 외교의 최전선에 있는 것이다. 750만 재외동포 중 3분의 2인 500만명의 동포가 G2라고 불리는 미국과 중국에 거주하고 있다. 한반도 통일에 있어 이 두 강대국의 협조와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과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거주국에서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정치력 신장을 위한 노력도 해야 하고 조국과 거주국을 잇는 중요한 가교 구실도 꼭 필요하다.
구술 집필 권준택 미국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마틴 루서 킹의 모교에서 준 ‘예비 노벨평화상’…과분할 뿐이다”
등록 :2020-07-13 20:48수정 :2020-07-13 21:26
김경애 기자 사진
김경애 기자
조지아주 애틀랜타시 모어하우스대학
1960년 킹 목사 졸업한 흑인 남자대학
“킹 목사 평화철학·비폭력운동 감명”
1970년 조지아대학 근무 선택에 큰영향
2001년 ‘간디·킹·이케다 평화상’ 제정
세계평화·비폭력운동 공헌 인물 기려
만델라·고르바초프…노벨상 8명 배출
2010년 모어하우스대학 ‘평화학’ 출강
‘마틴루서킹국제채플’ 카터 학장 연락
“깜짝 선물 있으니 4월1일 비워달라” 정치인 아닌 학자·교육자로 첫 선정
기념 초상화·대학합창단 축가 감동
“합창처럼 이질성의 평화적 극복 기원”
박한식(오른쪽) 교수는 2010년 4월1일 ‘평화학 개척자’로 인정받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에 있는 모어하우스대학에서 주는 ‘간디·킹·이케다 평화상’을 받았다. 2001년부터 해마다 세계평화와 비폭력운동에 기여한 인물에게 주는 상이다. ‘마틴 루서 킹 국제채플’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로런스 카터(왼쪽) 학장이 박 교수에게 상패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길을 찾아서-35회 간디·킹·이케다 평화상 수상
2010년 봄 학기 나는 모어하우스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모어하우스대학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1867년 개교한 흑인 남자 대학이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던 조지아대학에서 자동차로 1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었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교로도 유명한 이 학교는 흑인 지도자 양성을 그 목표로 하고 있는 학교였다. 모든 학생들이 학교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킹 목사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겠다는 교육 이념을 모토로 공부하고 있었다. 2008년 11월 버락 오바마 후보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날 저녁에 가장 많은 언론 취재 차량이 찾은 곳이 바로 모어하우스대학이다.
미국 남부 명문으로 꼽히는 조지아주 모어하우스대학은 1960년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가운데) 목사가 졸업한 남부의 흑인 명문으로 유명하다. 사진 모어하우스대학 누리집 갈무리
나는 일주일에 한번 ‘평화학’이라는 과목을 강의했다. 학생들과 평화란 무엇이고, 평화가 왜 필요하며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등의 주제를 가지고 공부하고 토론했다. 한 학기 특별 강의를 개설해줄 수 있느냐는 모어하우스대학 정치학과 학과장 그레고리 홀 교수의 간곡한 청도 있었지만, 킹 목사의 모교라는 사실에 흔쾌히 강의를 수락하였다. 사실 내가 1970년 박사학위를 받고 조지아대학을 직장으로 선택한 데는 킹 목사의 영향이 컸다. 박사과정 공부를 하면서 평화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나는 킹 목사의 사상과 정신에 매료되었고 특히 평화에 대한 그의 철학과 비폭력 운동에 감명을 받았다. 그의 고향인 조지아에 가서 그의 삶과 생각을 좀 더 깊이있게 이해하고 싶었다.
하루는 강의를 마치고 막 문을 나서는데, 모어하우스대학 종교학 교수이자 킹 목사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마틴 루서 킹 목사 국제채플’의 학장인 로런스 카터 박사가 차 한잔하자는 연락을 해왔다. 평소 친분이 있던 사이가 아니라서 무슨 일인가 의아했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그의 첫마디는 “아이 해브 어 서프라이즈 포 유”였다. 깜짝 선물이라?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카터 학장은 ‘4월1일 꼭 시간을 비워줬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내게 확답을 종용했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되물었고 그제야 그는 모어하우스대학에서 제정한 상이 있는데 내가 그 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러면서도 어떤 상인지, 왜 내가 선정되었는지 등의 구체적 얘기는 나중에 차차 하자면서 나의 궁금증만 키웠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4월1일 시간을 비워놓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로부터 한달쯤 지났을 무렵, 카터 학장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뜬금없이 내 초상화를 그려야 하니 모어하우스대학으로 잠시 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유화로 근사하게 초상화를 그려야 하니 말끔하게 차려입고 오라는 반농담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유화 초상화 작업에 미화 2만달러의 경비가 든다고도 덧붙였다. 나는 초상화가 지난번 얘기했던 상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추측을 했지만 도대체 무슨 상이기에 2만달러씩이나 들여 초상화까지 그리는가, 더 의아해졌다.
2010년 4월1일 모어하우스대학에서 열린 ‘간디킹이케다 평화상’ 시상식에서 박한식(왼쪽 둘째)가 부상으로 유화로 된 초상화 액자를 받고 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초상화 작업이 다 마무리되어 갈 때쯤, 카터 학장과 모어하우스대학 관계자들이 작업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제야 그들은 내가 2010년 ‘간디·킹·이케다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간디·킹·이케다 평화상’은 모어하우스대학과 이 대학의 마틴 루서 킹 목사 국제채플이 공동으로 2001년에 제정한 상이었다. 해마다 세계 평화에 공헌하고 비폭력운동에 기여한 인물에게 주는, ‘예비 노벨평화상’으로 불릴 정도로 명예와 권위를 함께 지닌 상이었다.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만 봐도 내가 이 상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2007년 1월 ‘마틴 루서 킹 데이’ 때 미국 시애틀에서 20세기 비폭력 평화운동 주창자인 인도의 간디(맨 왼쪽), 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킹 목사(가운데), 일본의 불교 지도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이케다 다이사쿠 국제창가학회 회장(맨 오른쪽)의 얼굴 휘장을 든 채 시민들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사진 <크리스천투데이> 제공
모어하우스대학은 국제창가학회와 공동으로 전 세계를 순회하며 ‘간디·킹·이케다 평화 건설의 유산전’을 열어 역대 평화상 수상자들의 활동을 널리 알리고 있다. 사진은 2009년 제주대에서 열린 한국 첫 전시회 개막식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첫해에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이 공동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데즈먼드 투투 남아공 대주교,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 평화운동가인 베티 윌리엄스,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전 남아공 대통령,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의 설계자인 존 흄, 남아공 정치인 앨버트 루툴리 등 노벨 평화상 수상자 8명이 포함돼 있었다. 역대 수상자 대부분이 전직 국가 원수이거나 행정부 수반을 역임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 정치인사들이었고 인류 평화에 이정표가 될 만한 업적을 이룬 공로가 있는 분들이었다. 내가 평화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실천하려는 노력으로 살아온 건 맞지만 평생 시골에서 한낱 선생으로 살아온 내가 이렇게 큰 상을 받아도 되나 싶은 생각에 감격스러웠지만 숙연한 마음도 들었다. 간디·킹·이케다 평화상은 분명 나에게는 과분한 상이라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간디·킹·이케다 평화상’을 주최하는 모어하우스대학의 마틴루터킹 국제채플에서는 역대 수상자의 초상화를 전시해 미국 전역은 물론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첫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박한식 교수 등의 초상화를 학생들이 견학하고 있다. 사진 모어하우스대학 누리집 갈무리
하지만 내가 이 평화상을 뜻깊게 생각하는 이유는 기라성 같은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평화라는 이름을 포함한 상이 수천개는 존재한다. 그러나 평화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평화상은 그리 많지 않다. 평화란 무엇인가? 평화를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하는 것을 종종 본다. 그러나 그것은 남자를 여자가 아니다라고 정의하는 것과 같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평화를 이질성의 조화라고 정의하고 싶다. 이질과 이질이 만나서 대화와 이해를 통해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상태가 진정한 평화의 정의이며 의미이다. 진정한 평화는 종교적, 정치적, 이념적 그리고 문화적 차이를 초월하는 인류 공동의 신성한 가치이다.
간디·킹·이케다 평화상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계 평화와 비폭력운동을 위해 헌신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평화주의자이자 비폭력 민권운동가인 마틴 루서 킹 목사, 그리고 일본의 불교 사상가인 이케다 다이사쿠 국제창가학회 회장의 삶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각기 인종과 종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이질성을 넘어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평화를 구현하고자 했던 세 사람의 공통된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평화상이었다.
시상식은 2010년 4월1일 모어하우스대학의 마틴 루서 킹 목사 국제채플에서 1500여명의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평화상의 무게 때문이었는지 아침부터 조금 긴장되고 들뜬 기분이었다. 머리도 만지고 옷매무새도 가다듬었다. 수상 소감도 적어보고 수정하기를 여러번 반복했다. 시상식장에 도착해 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채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상식은 수상자인 나에 대한 헌사로 시작되었다. 모어하우스대학 총장인 마이클 프랭클린 박사가 헌사를 했는데 주로 나를 간디·킹·이케다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한 배경과 이유를 자세하게 낭독했다. 한반도에서 평화 조성과 정착을 위해 수십년간 헌신해온 점을 높이 평가한다는 찬사와 함께 그동안 내가 실천해 왔던 일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예를 들면, 1994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주선하고, 2003년 북한 핵위기 해소를 위해 북한과 미국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한 ‘워싱턴-평양 트랙 II 포럼’을 개최하고, 2009년 미국 기자들의 석방을 중재했던 일들을 열거하면서 상호 존중과 대화 그리고 포용을 몸소 실천해 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와 더불어 내가 그동안 실천해온 인도주의적인 노력들도 자세하게 언급되었다. 1980년대 수차례 중국의 동북3성을 방문해 조선족 동포들을 취재하여 한국의 이산가족들과 생사를 확인하고 상봉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던 일, 북한의 식량난 해소 노력과 구호 의약품을 북한에 보내는 일을 주선한 것 등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 이러한 나의 오랜 노력이 간디·킹·이케다 평화상의 취지와 의의를 구현해 왔다는 점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역대 수상자들과 구별된 점은 정치인이나 운동가가 아닌 학자이자 교육자라는 점이었다. 역대 수상자들 가운데 교육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간디·킹·이케다 평화상 선정위원회는 내가 수십년 동안 수천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평화학을 강의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위원회는 평화가 실천도 중요하지만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평화에 대한 이론 정립도 절실히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고 또한 젊은 학생들에게 평화에 대한 정의와 중요성을 일깨워주려는 나의 노력에 감사를 표해주었다.
박한식(뒷줄 맨왼쪽) 교수는 조지아대학에서 1995년 국제문제연구소(글로비스)를 열어 은퇴할 때까지 해마다 100명이 넘는 학생들을 이끌고 한국의 판문점(사진) 등 전 세계 평화 유적지를 견학했다.
위원회가 주목한 또 하나의 선정 이유는 현장 학습을 통한 평화 교육이었다. 나는 조지아대학에서 1995년 국제문제연구소(The Center for the Study of Global Issues·글로비스)를 설립하고 이후 매년 100명이 넘는 미국 학생들을 인솔하여 히로시마 평화기념 박물관과 독일 뮌헨에 위치한 다하우 강제수용소 추모 사이트 그리고 한국의 판문점 등을 견학 방문했다. 전쟁의 참상을 학생들에게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함으로써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히로시마 박물관의 원폭돔을 보며 전쟁과 핵무기의 야수성과 잔인성에 치를 떨며 눈물을 흘리던 젊은 학생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프랭클린 총장의 헌사가 끝나고 간단한 시상이 진행되었다. 간디, 킹 그리고 이케다 가족의 대표들로부터 상장과 트로피 그리고 메달을 수여받았다. 또 세 분의 저작과 출판물을 부상으로 받았는데 무엇보다도 값진 선물이었다. 그들의 생각과 철학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참 기뻤다. 뒤이어 나의 초상화 제막식이 진행되었다. 실물 크기로 그려진 내 초상화는 지금 역대 수상자들의 초상화와 함께 모어하우스대학의 마틴 루서 킹 목사 국제채플에 전시돼 있다.
박한식 교수는 2010년 4월1일 모어하우스대학에서 열린 ‘간디·킹·이케다 평화상’ 시상식에서 원고 없이 즉석 수상 연설을 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사실 나는 수상 소감을 많이 준비했었다. 그러나 시상식장을 둘러보니 날씨도 덥고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그런지 다들 지친 것처럼 보였다. 너무 긴 수상 소감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준비해 온 원고를 뒤로하고 간단한 즉흥 연설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2분40초의 짧은 수상 소감에서 나는 지난 수세기 우리를 지배해 왔던 안보 패러다임을 평화 패러다임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면 인류에게 22세기의 도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안보 패러다임은 필연적으로 갈등과 반목 그리고 불안을 초래하였고 군사적 경쟁만을 야기하였다. 아무리 안보에 힘과 노력을 들여도 안보를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안보가 안보를 지켜주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도 남북한도 다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많은 국방비를 쏟아붓고 있는데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졌는가? 과분한 상이지만 남은 인생을 평화 교육과 평화 실현에 더 정진하라는 자극과 격려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짧은 소감을 마쳤다.
수상 소감에 이어 모어하우스대학 합창단 글리클럽(Glee Club)이 축가를 불러줬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진행된 축가는 내 마음에 큰 감명을 주었다. 1911년에 창단된 이 합창단은 1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모어하우스대학의 자랑이며, 뛰어난 합창 실력에 공연을 잘하기로 미국에서 유명하다. 킹 목사의 장례식과 지미 카터 대통령의 취임식에서도 공연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내외 공연으로 그 명성을 쌓아온 합창단이었다. 그런 합창단이 나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호사를 누린 것이다.
박한식 교수는 2010년 4월 ‘간디·킹·이케다 평화상’ 시상식 때 모어하우스대학의 유서 깊은 남성합창단인 글리클럽의 축가에 큰 감명을 받았다.
나는 합창단의 공연을 감상하는 내내 평화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각기 다른 목소리를 지닌 단원들이 그 이질감을 넘어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합창이야말로 평화와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연주 또한 평화의 롤모델이라는 생각도 했다. 각기 다른 악기들이 악기 본연의 소리를 내려고 최선을 다하고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다른 소리들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어 환상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했다. 인종과 종교 그리고 이념들의 다름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수용하면서 대화와 상호 이해를 통해 조화와 상생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평화라는 것이 나의 일관된 생각이다.
남과 북도 서로의 이질성을 이해하고, 그렇게 이해한 이질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며, 그 이질성의 평화적 극복 방안을 꾸준히 모색하는 일련의 과정만이 진정한 평화와 통일에 이르는 길이다.
수상 이후 내 개인적인 삶에 큰 변화는 없었다. 대학에서 연구하고 강의했고 평화를 실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다만, 어디를 가든 간디·킹·이케다 평화상 수상자라는 사실이 나를 소개하는 머리말이 되었다. 간디, 킹, 그리고 이케다같이 인류애와 평화에 기여한 분들과 내 이름 석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구술집필 권준택 미국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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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53508.html#csidx1362b82e7227484945988c22deb852d
“북한 농학자들 ‘미국 농축산업 견학’ 제안에 뛸듯 반겼다”
북한 농학자들 ‘미국 농축산업 견학’ 제안에 뛸듯 반겼다”
등록 :2020-07-06 17:23수정 :2020-07-06 20:06
김경애 기자 사진
김경애 기자
1990년대 중후반 북한 ‘고난의 행군’
“굶주리는 수백만 동포들 안타까워…”
식량 증산·농업 생산성 향상 ‘고심’
세계적 명성 조지아대학 농대 ‘주선’
미 국무부 ‘미수교국 비자’ 전격 발급
북 농업성·농업과학원 대표단 허용
‘골드 키스트’ 브룩스 회장 ‘통큰 후원’
조지아대 출신·닭고기 가공업체 창업
1997년 9월 대표단 6명 사상 첫 방미
동물사료 ‘퓨리나’·양계산업 큰 관심
2000년 조지아대학 대표단 평양 답방
조지 부시 ‘악의 축 발언’ 교류 중단
2008년·2011년 서로 오가며 ‘협력’
길을 찾아서-(34회) 북한 농업대표단 미국 초청
박한식(앞줄 왼쪽 둘째) 교수는 1997년 9월 미국 정부 초청으로 처음 방문한 북한 농업과학원 대표단 6명을 이끌고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던 세계적인 동물사료 전문업체 랠스턴 퓨리나(2001년 네슬레로 합병)의 본사를 견학했다. 박 교수와 팔장을 끼고 있는 사람이 단장(최아무개)이다.내가 북한을 가장 빈번하게 방문했던 시기는 1990년대 중후반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중재로 성사됐던 1994년 ‘제네바 합의’가 합의문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미국의 약속 불이행으로 파국을 맞으면서 북-미 간에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김일성 주석 사후 북한 체제와 사회에 어떤 변화가 감지되는지, 김정일 위원장의 권력 공고화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러한 현안들에 대해 나 나름대로 관찰과 이해를 모색하고자 북한을 자주 왕래했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온 현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북한 주민들의 실상이었다.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 실컷 먹고 살게 해주겠다던 김일성 주석의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굶주림에 신음하는 인민들로 나라 전체가 아우성이었다. 김일성 사후 식량 사정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소련의 해체로 인한 공산권의 붕괴가 북한의 경제적 고립을 가속화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더해지면서 식량 생산에 갑작스러운 차질이 생겼다. 1990년대 중후반에 일어난 대기근을 일컫는 ‘고난의 행군’ 기간에 최소 2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북한 주민이 굶어 죽는 참상이 발생했다.
박한식 교수는 1990년대 중후반 이른바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를 목격하면서 식량난 해결과 농업 생산성 향상을 돕고자 북-미 농업 교류를 주선해 성사시켰다. 사진 연합뉴스<길을 찾아서> 3회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부모가 굶어 죽어 탁아소에 맡겨진 아이들이 역시나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다. 내가 소학교 1년을 보냈던 평양의 한 마을에 가봤더니 먹을 것이 없어 소나무 껍질을 벗겨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비통한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미안했고 분노했다. 그리고 나만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는 것 같은 생각에 죄책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비참한 광경은 나에게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나도 쌀밥 한번 구경해 봤으면 하는 소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적이 있었다. 1946~47년 평양 보통소학교 1학년 때 경마장에 가서 말의 사료로 쓰는 콩비지를 구해 먹고 살았다. 그 지독한 가난의 고통은 지금껏 생생히 남아 있어 북한 주민들에게 동병상련의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굶주리는 그들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옛말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를 못한다고들 했다. 내가 정부 관리도 아니고 빌 게이츠처럼 재산이 많아서 도와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나는 북한의 식량 증산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마침 내가 근무하고 있던 조지아대학은 미국에서 농업과 축산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조지아대 농대의 장점을 살려 북한의 식량난 개선과 농업 분야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다양한 사업들을 주선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북한 관리들에게 조지아대학에 와서 농업과 축산에 대한 선진 기술을 배우고 습득해서 북한 농업에 활용해 보면 어떻겠는가 하는 제안을 했다. 내 제안에 북한 농업과학원 관리들과 연구원들은 미칠 듯이 기뻐하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미국을 방문해 선진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화답했다. 비록 미국이 북한의 적대국이기는 하지만 북한 사람들도 미국의 과학과 선진 기술에 대한 부러움과 동경이 있었다. 정치적 부담이 있는 정부 간의 교류도 아니고 민간 차원인 대학과 대학 그리고 학자들 간의 교류 형식이어서 상당히 흡족해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나는 서둘러 북한 농업방문단의 조지아대학 방문을 추진했다. 하지만 두 가지 큰 난관에 부닥치고 말았다. 첫째는, 비용이었다. 나라 전체가 굶고 있는 북한 쪽에서 적지 않은 인원이 미국까지 오는 경비를 충당하기는 매우 버거워 보였다. 어떻게 그 많은 여행경비와 체재 비용을 마련할 것인가? 또 다른 문제는 비자였다. 비용이야 어떻게든 마련해본다 하더라도 과연 미국 정부가 외교 관계도 없는 적성국인 북한 관리들에게 방문 비자를 내줄지가 큰 복병이었다.
나는 우선 미 국무부에 요청해보기로 했다. 마침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다. 자초지종과 북한 방문단의 취지를 설명하고 그를 설득했다. 그는 부인도 한국인이었고 우리말도 곧잘 하는 편이었다. 늘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나와 생각이 비슷한 점도 많았다. 그는 처음 있는 일이라 선뜻 비자를 발급해주겠다고 장담을 하지는 않았지만 긍정적 검토를 해보겠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국무부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북한 방문단의 여행과 체재 경비 마련을 위한 기금 모금에 나섰다. 평소 나와 뜻을 같이하던 지인들은 물론 그들을 통해 조지아의 농업과 축산 관련 기업들한테 도움을 청한 결과 상당한 경비를 후원받을 수 있었다. 특히 조지아에 본부를 두고 있던 ‘골드 키스트’(Gold Kist)라는 닭고기 가공업체의 후원이 컸다. 회사의 창업자인 브룩스 회장은 조지아대 농대 동문이었고 북한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흔쾌히 재정적 후원을 해주었다.
1997년 북한 농업대표단의 미국 방문을 후원해준 닭고기 가공업체 골드 키스트의 회장 데이비드 브룩스는 역대 미국 대통령 7명의 자문을 했던 농업정책 전문가였다.
조지아대학 동문인 골드 키스트의 데이비드 브룩스(왼쪽) 회장은 같은 조지아대학 출신인 지미 카터(오른쪽) 대통령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조지아대학 누리집 갈무리후원금이 어느 정도 채워질 즈음, 반가운 연락이 왔다. 미국 정부가 북한 방문단의 입국을 허용하기로 결정했고 그들의 방문을 위해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드디어 북한 농업성과 농업과학원 관리들의 미국 방문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참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다. 내게 좋은 사람들을 깊이 사귀고 교류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 어찌 보면 사는 것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북한 농업과학원 대표단이 미국 조지아주를 방문한 것은 1997년 9월이었다. 6명으로 구성된 방문단이었다. 방문단의 목적은 식량난 개선을 위해 필요한 종자 개발과 개량을 비롯해 선진 농업기술의 습득과 이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특히, 이들의 관심은 닭에 있었다. 양계산업 육성이 최대 관심사였다. 조지아대학이 양계 분야 연구에 있어서 최고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조지아주가 미국에서 가금류를 가장 많이 생산·공급하는 지역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조지아주는 미국 전체 닭고기 소비량의 28퍼센트를 생산·공급하고 있었다.
1997년 학술 교류로는 미국을 최초로 방문한 북한 농업성과 농업과학원의 대표단은 특히 축산업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박한식(왼쪽 둘째) 교수는 미국의 대표적인 농축산업지역인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일대를 함께 견학했다. 사진 박한식 제공나는 과학과 축산은 잘 알지 못했지만 전해 듣기로는, 조지아대학의 농축산학과 교수인 닉 데일 박사는 갓 부화한 병아리를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식용이 가능한 닭으로 키워내는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북한 방문단은 데일 박사의 연구에 큰 관심을 보였고 속성으로 닭을 사육해서 인민의 먹거리로 공급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방문단은 조지아대 농대에서 주최하는 여러 차례의 양계 관련 세미나에 참석했고 특히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골드 키스트의 공장도 견학했다. 닭이 자동화된 컨베이어벨트를 지나 단 몇 분 만에 바로 요리할 수 있는 상태로 가공되어 나오는 현대식 공정을 보고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북한 방문단은 또한 데일 박사의 가금류 사료 연구에도 관심이 많았다. 북한에서는 동물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사료의 개발과 공급이 절실했다. 나는 북한 방문단을 인솔해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퓨리나(Purina)의 동물 사료 공장도 견학했다. 퓨리나 쪽에서는 방문단을 대대적으로 환영해 주었고 북한의 사료 생산과 가공을 도와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북한 농업과학원 방문단은 귀국길에 내게 특별한 부탁을 해왔다. 생닭을 몇 마리 북한으로 가져가 교배시키고 사육해서 인민들에게 먹거리를 공급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나드는 농축산물의 반입과 반출은 검역이 엄격해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북한 대표단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만큼 그들의 심정은 절박했다. 나는 조금의 꾀를 내어 살아 있는 닭 대신 달걀을 가져가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방문단도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나는 생계란 10개를 그들이 귀국행 비행기에 탑승할 때 기내로 가져갈 수 있도록 건넸다. 그 이듬해 북한을 방문해서 보니, 계란 다섯개는 귀국길 도중에 깨져 버렸고, 나머지 다섯개는 부화에 성공했지만 두 마리는 바로 죽었고 나머지 세 마리도 얼마 못 가서 죽었다고 했다.
조지아대학의 농축산학과 교수인 닉 데일 박사는 양계 전문가로서 북한 농업대표단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방북도 주저하지 않았다. 조지아대학 누리집 갈무리안타까운 마음에, 닉 데일 교수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왜 실패했는지’ 이유를 듣고자 했다. 하지만 데일 교수도 추측만 할 뿐 정확한 원인을 제시하는 데는 망설였다. 대신 그는 뜻밖의 부탁을 해왔다. 자신이 북한의 토양과 환경을 알지 못하니 닭들이 일찍 폐사한 원인을 규명하기 힘들고 따라서 북한의 성공적 양계를 위해서 북한을 직접 방문해 농업과학원 사람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연구 성과를 이전해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데일 교수의 진심에 감사했다.
2000년 10월 박한식 교수와 함께 평양에 간 게일 뷰캐넌 학장(사진), 농축산학과 닉 데일 교수 등 조지아대학 농대 대표단은 미국의 첫 북한 방문 학술단체였다. 사진 조지아대학 누리집 갈무리나는 서둘러 조지아대학 방문단의 방북을 추진했다. 2000년 10월 농대 학장인 게일 뷰캐넌 박사와 닉 데일 교수를 포함한 농대 방문단을 이끌고 평양에 도착했다. 학술 방문단으로는 미국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사례이며 앞서 1997년 북한 농업 방문단에 대한 답방 형식이기도 했다. 그들의 방문은 북한의 식량난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은 선의의 동기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장기적인 농업 분야 교류·협력 그리고 무역에 대한 희망도 품고 있었다.
조지아대학 방문단은 방북 내내 학술회의 참석은 물론 대학과 농업 현장을 둘러보며 북한 농업성 관리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데일 교수는 양계 관련 연구와 기술을 정성껏 북한에 전달해 주었다.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과 편견을 가지고 있던 미국 방문단은 조금씩 북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방문 내내 함께 시간을 보냈던 미국 방문단과 북한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국가 간의 적대적 감정은 사라지고 신뢰가 싹텄으며 앞으로 교류·협력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가득했다. 조지아대학 방문단이 북한을 방문하던 시기에 마침 올브라이트 국무부 장관도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조율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고 있어서 그 기대는 한층 더했다.
2001년 5월 두번째로 미국에 온 북한 농업과학원 대표단(단장 김삼룡 부원장·사진)이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코카콜라 본사를 방문했을 때 코카콜라 쪽에서는 인공기까지 내걸어 대대적인 환영을 해주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이듬해 2001년 5월에는 북한 농업과학원 방문단이 두번째로 조지아대학을 찾았다. 김삼룡 부원장이 인솔해 온 방문단은 이번에는 고구마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북한의 식량정책은 쌀농사보다는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에 덜 민감하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 생산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0년 조지아대 농대 방문단이 방북했을 때 북한의 토양과 기후가 조지아대학에서 개발한 고구마 재배에 매우 적합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고구마 생산 증대를 위한 조언을 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지아대 농대는 그때 감자맛이 나는 고구마를 연구·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재배와 보급에 힘쓰고 있던 시기였다. ‘감자와 고구마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라’는 김정일 위원장의 특별 지시가 있었던 터라 감자맛 나는 고구마에 대한 북한 방문단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비상했다. 북한 방문단은 지난번 계란처럼 품종개량된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가기를 원했다. 누구보다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하고 있던 터라 나는 농대에 부탁해 감자맛 나는 고구마의 종자를 건네주었다. 그 고구마가 잘 재배되고 있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북한의 식량난을 해소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기를 바란다. 조지아대 농대와 북한 농업과학원의 교류협력 양해각서가 체결되었고 두 기관의 교류를 활발히 해나가기로 약속하고 북한 방문단은 돌아갔다.
부캐넌에 이어 조지아대학 농대 학장을 맡은 스콧 앵글도 2008년 북-미 농업교류를 적극 추진했다. 조지아대학 누리집 갈무리그러나 두 기관의 교류는 2008년 7월에야 이어질 수 있었다. 7년간이나 끊겼던 이유는 2002년 1월 조지 부시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이었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대통령의 연설은 그간의 교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정치적 긴장이나 현안에 민간 교류가 휘둘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정부 간 대화 창구가 막혔을 때일수록 민간 교류가 더 필요한 시점이다. 민간 교류의 활성화가 정부 간 대화의 물꼬를 트는 마중물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미 학술교류는 2008년 조지아대학 농대 대표단의 방북에 이은 2011년 북한 과학자 대표단(단장 홍륜기 국가과학원 국장)의 조지아대학 방문을 끝으로 중단된 상태다. 사진 연합뉴스2008년 7월 나는 농대 학장 스콧 앵글의 요청을 받고 다시 조지아대학 방문단을 안내해 북한을 방문했다. 두 기관은 농업 분야 전반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교류하고 또 북한의 농대 교육을 지원하는 것을 뼈대로 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에 합의했다. 아울러 북한 농업 전문가들을 해마다 조지아대학에 초청해 연수시키고 북한 농대생들의 조지아대학 유학도 추진하기로 했다. 2011년 2월 북한 방문단이 다시 조지아대학을 찾아왔고 2008년 합의를 재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렇다 할 진전이 없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구술집필 권준택 미국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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