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3

손민석· 나연준 주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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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민족주의는 부족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자기 민족이 특별하다거나 자기 문화가 위대하다는 식으로요. 대표적으로 북한이 ‘조선민족제일주의’ 구호 아래 정신 승리하면서 살아가고 있죠. 진보진영에서 생산하는 민족주의 담론은 피해자성과 결핍을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소녀상이나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워 지금도 고통을 겪는 것처럼 추체험(追體驗)을 제공하는 방식으로요. 86세대는 20대 때 독재정권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1980년대에 느낀 피해자 의식을 역사 전체로 확장합니다. 피해자-가해자 인식으로만 사안을 들여다보는 것이지요. 피해자의 눈으로 역사를 보게끔 길들었거나 스스로 최면을 건다고 봐요.” 

 부족주의와 민족주의의 차이로 "자기 민족이 특별하다거나 자기 문화가 위대하다는 식"으로 하는 것을 들고 있는데 뒤에서는 "피해자성과 결핍을 끊임없이 자극"한다며 "피해자 - 가해자 인식으로 사안을 들여다보는" 게 문제라고 한다. 두 내용이 반대되는 것인데 둘 사이에 어떠한 논리적 연결고리가 없다. 그러면서 북조선과 연결시킨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걸까. 말이 되려면 피해자성이 역설적이게도 자민족우월주의로 연결되는 과정을 설명해야 하는데, 학술적으로 명료하게 입증하기 쉽지 않은 주장이다. 한 민족의, 사회의 정신세계를 그려내기란 쉽지가 않다. 집단적 의식체계를 그려낼 수 있는 자료와 방법론 자체가 없다. 지나치게 난폭하게 재단하고 있다. 박사학위에 그렇게 쓸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민족주의가 극화되면 부족주의가 된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주대환이 민족주의에는 "갈래가 없다"고 주장한다. 서로 모순될 수밖에 없는 주장이다. 민족주의 - 부족주의라는 경로를 인정한다면 민족주의 - 비非부족주의라는 경로도 설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그렇다. 바로 앞에서 자기 주장을 반박하는 얘기를 주대환이 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지적 없이 바로 민족주의는 부족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고 한다. 변질되지 않는 민족주의는 무엇이며, 변질되지 않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말하면 부족주의적 민족주의와 부족주의적이지 않은 민족주의를 논리적으로 구별하는 개념화를 해야 한다.

 게다가 나연준은 부족주의를 tribalism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내셔널리즘 연구사에서 사용하는 족류주의는 ethnic을 말한다. tribalism은 내가 이영훈을 비판하면서도 계속 지적했지만 민족주의에 대응되는 단어로 쓸 수가 없는 개념어다. 이영훈이 부족주의라는 표현을 쓴 것은 비하의 의미도 있겠지만 아마도 본인이 자주 언급하는 후쿠야마의 책에서 따온 것 같다. 후쿠야마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부족주의의 발흥을 들고 있기 때문인데, 후쿠야마가 말하는 부족주의는 한 국가공동체 내부에서 인종, 종교 등의 이유로 집단적 정체성이 형성되면서 국가공동체 전체의 정체성이 형해화되는 것을 비판적으로 독해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후쿠야마는 국가가 강해져서 국가공동체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집단들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철우 선생이 지적하였듯이 국가공동체 자체가 다른 한국과 일본 간의 갈등에 이 용어를 사용하는 건 그래서 상당히 어색하다. 개념의 혼동인지 아니면 유행을 좇는 건지 모르겠으나 학문적 맥락을 모르는 것 같다.

 그 뒤의 도덕주의 얘기는 술자리 잡담 수준의 주장들이다. 사실 이런 수준의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걸 공개적으로 언론에 내다니.. 한국인의 가장 큰 문제는 선택적 섬세함이다. 예전부터 계속해서 지적했지만 한국인은 전문가든 비전문가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영역에 대해서는 굉장히 섬세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다가도 타인의 분야에서는 아주 급진혁명파가 되어서 단칼에 정리를 해버린다. 386세대도 그렇고, 386을 비난하는 주대환과 나연준 또한 마찬가지이다. 

“대중을 움직이는 능력이 탁월한 기술자들이 있어요. 손짓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대중이 존재하고요. 기술자들은 선거의 도사들이기도 해요. 어릴 적 학생회를 장악하는 과정에서부터 훈련받은 거죠. 사회에 나와서 그 기술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하룻저녁에 수만 명을 움직여 문재인을 후보로 만들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세대가 다시는 등장하지 않을 겁니다. 아주 특이한 현상이에요.” 

“외교적으로 문제를 풀자고 말하면 ‘너는 친일’ ‘도쿄로 이사 가든가’라면서 낙인을 찍습니다. 앞서 조선으로의 후퇴라고 말했는데 중세 시대의 파문과 비슷합니다. 그 사람들이 속한 세력 안에서는 다른 말을 하기가 더 어렵죠. 그건 전체주의예요. 근대적 개인이 누락된 겁니다. 그 사람들은 순수의 상태를 지향합니다. 사회가 순수할 수 없는데 순수한 상태가 옳은 거라면서 사회 곳곳에 금기를 만듭니다. 스스로는 도덕적으로 살지도 않으면서 도덕적 사회를 세워야 한다며 만신전을 세웁니다. 만신전 제일 윗자리에 민족주의가 있습니다. 이순신의 12척, 죽창가, 의병, 국채보상, 제2독립운동…. 현실을 지적하면 토착왜구, 이물질로 규정해 도덕적 징벌을 내립니다. 민족주의와 접신한 제사장의 방언에 신심이 들끓고 이교도 사냥에 나섭니다. 노론의 중화사상이 조선을 망국으로 이끌었다면 악성으로 변종된 민족주의가 대한민국을 좀먹고 있습니다.”

 피식거릴 수밖에 없는 말들이다. 박사학위 논문에 한번 그렇게 써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기술자가 있으면 민주당이 10년이나 빼앗겼겠나. 탄핵 바로 직전까지도 보수장기집권시대라는 제목의 책이 나오고 그랬다. 

 그리고 여기서 사용되던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개념은 결국 민족주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는데, 뭐냐하면 나한테 뭐라 하는 인간들이 전체주의자라는 것이고 내가 아무 말이나 해도 받들어주는 게 개인주의라는 것이다. 피식거릴 수밖에 없지 않겠나. 나는 내 책의 서문에 "오늘날의 지성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잊어버렸다"고 해놨는데 여전히 맞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중간에 "나연준은 집권 86세대를 한국형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로 규정했다. 노멘클라투라는 소련의 공산당 관료를 뜻하는 말이다."라고 하는데 이 분은 소련 관료제가 어떤 식으로 재생산되고 어떤 식으로 당이 움직이는지 잘 모르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정말 러프하게 일반 사람들이 아는 수준에서만 생각해보아도 "집권 386" 지금 10년만에 정권 잡았다. 소련 공산당과 관료는 한번도 그 권력을 놓친 적이 없다. 어느 특권 계층이 10년이나.. 말을 말자.
 나도 조국 같잖다고 생각하고 민주당과 특히 문재인 대통령한테 굉장히 크게 실망하고 있는 중이지만 주대환의 "앞선 세대의 삶은 판정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하는 겁니다. 복잡한 우여곡절을 이해하는 게 먼저예요. 명성황후 시해에 참여한 조선인들을 일본의 앞잡이라고 말하는 건 쉽죠. 그 인간들이 왜 그랬는지 먼저 들여다봐야 해요"라는 말은 386세대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르지만 내가 계속해서 문재인과 민주당 비판에 소극적인 건 바로 저런 이유 때문이다. 한국사 70년을 놓고 보았을 때 한국은 이승만이 집권한 그 순간부터 다시는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밑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길길이 날뛰어왔다. 일본에게 돈도 받고, 기술 이전도 받고, 정보도 받고 뭐도 받고 받을 걸 다 받으면서도 우리가 일본을 대신해 안보를 책임지고 있다며 되려 큰소리를 쳤다. 그렇게 독자적인 경제권과 독자적인 지정학적 가치를 계속해서 추구해왔고 문재인 정부의 현재의 행위도 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 연장선에 있다. 김현종이 미국에 동아시아 전략의 중심에 한국이 있는지 일본이 있는지 대놓고 물어본 건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을 많이 연상시킨다. 

 그러한 한국의 시도가 장기적인 시각에서 동아시아 국제질서라든지 여러 상황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를 탐구하고 연구해야 할 사람이 술자리에서나 할 법한 소리를 이렇게 진지하게 하고 있다. 나는 노론 사관 얘기하는 건 이덕일이나 할 거라 생각했는데.. 전에 주대환 선생 친구 끊은 것도 이런 꼴이 보기 힘들어서였는데.. 다시 받아준 게 잘못인 것 같다. 386세대도 꼴볼견이지만 그걸 아무렇게나 비난하는 동년배들도 내가 보기에는 똑같다. 그냥 20대 30대들이 말할 수 있게 본인들은 자리만 만들어주시라. 그게 선배가 할 일이지.. 참 답답하다 답답해. 이 나라 50대 이상의 어른들은 왜 다 자기가 플레이어라 생각하는 걸까? 그 자신감이야말로 386세대와 가장 많이 공유하는 것인데 본인들 비판이 뒷세대에게 유효하게 보일거라 생각하는 게 참 어처구니가 없다. 
 20대인 나도 나가면 되도록 듣기만 하려고 하고 상대가 나랑 입장 달라고 반론 제기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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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생 나연준 “노론 적통 86세대가 나라 말아먹으려 해” 54년생 주대환 “민족주의는 지성 죽이는 독약”
1954년생 주대환은 “운현궁이나 독립문에서 만나자”고 했다. 1975년생인 기자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운현궁에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운현궁에서 보자”고 답했다. 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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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생 나연준 “노론 적통 86세대가 나라 말아먹으려 해” 54년생 주대환 “민족주의는 지성 죽이는 독약”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9-08-26 14:00:01

●60대, 30대가 본 ‘지금, 여기, 대한민국’
●집권 86세대는 한국형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소련 특권계급)
●네 새끼는 평준화, 내 새끼는 자율화, 부동산 규제하는 투기꾼, 도요타 타는 반일주의자, 도쿄에 아파트 소유한 독립군, ‘갑질’하는 을의 대변인, 부패한 도덕가
●위군자(僞君子), 거동을 거짓으로 꾸미고 세상을 속여 군자인 척하는 사람들
●입으로만 도덕을 떠드는 부유(腐儒)! 썩은 선비들
●제사장의 방언에 신심이 들끓고 이교도 사냥
●제2독립운동? 대한민국은 강대국 추구할 만큼 강한 나라
●유다의 길 아닌 예수의 길 걸어야
●대중을 움직이는 능력 탁월한 선거 기술자들


[조영철 기자]1954년생 주대환은 “운현궁이나 독립문에서 만나자”고 했다. 1975년생인 기자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운현궁에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운현궁에서 보자”고 답했다. 운현궁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사가(私家)다.

왜 운현궁에서 보자 했을까. 독립문은 또 왜? 운현궁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상징하는 곳이다. 흥선대원군이 경향(京鄕) 각지에 세운 척화비가 떠오른다. 독립문은 1897년 개화파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해 세웠다.

주대환은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장(1992),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2004)을 지낸 구(舊)좌파다. 1987년 노회찬(1956~2018)과 함께 인민노련을 결성했다. 1979년 부마항쟁을 비롯한 다수 사건으로 투옥됐다. 7월 1일 바른미래당 혁신위원장으로 취임했다가 계파 갈등을 넘지 못하고 7월 11일 사퇴했다.

1981년생 나연준은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하는 역사학도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역사의 후퇴


1세대가 차이 나는 친구 주대환(왼쪽), 나연준이 운현궁을 걷고 있다. [조영철 기자]54년생 주대환, 81년생 나연준과 ‘지금, 여기, 대한민국’을 논했다. 두 사람은 ‘친구’라고 했다. 27세, 그러니까 1세대 차이 나는 벗이다. “도대체 어떤 인연이에요?” 나연준에게 물었다.



“민주노동당 당원이었어요. 주대환 선생님은 좌파의 대장 중 한 분이었죠. 선생님께서 2017년 책으로 엮은 ‘시민을 위한 한국 현대사’ 강연을 광주광역시에서 했는데 제가 도움을 드렸죠.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1세대가 차이 나는 데도 문제의식이 똑같고, 생각이 통하더라고요. 자주 뵙고, 토론하고, 통화하는 사이예요.”

주대환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들이 81년생이에요. ‘서울의 봄’ 때 결혼해 이듬해 낳았어요.” 나연준은 “어머니가 54년생”이라면서 웃었다. 서울의 봄은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이전까지를 가리킨다.

왜 운현궁에서 보자 했느냐고 주대환에게 물었다.

“길 건너 천도교 수운회관으로 가는 길에 기미독립선언서가 새겨져 있습니다. 근방을 지날 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습니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한자가 아직도 있어요. 어려운 한자만 모아서 독립선언서를 써놓았습니다. 독립신문이 창간된 게 1896년입니다. 독립신문은 순 한글이었습니다. 1896년부터 1919년 3·1운동까지 햇수로 몇 년입니까? 23년이죠. 근대화가 오히려 후퇴한 겁니다.”

독립신문은 급진 개화파 서재필이 갑신정변(1884)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돌아와 창간한 순 한글 신문이다. 한글학자 주시경이 주필을 맡았다. 주시경은 민중이 신문을 쉽게 읽을 수 있게 하고자 쉬운 단어를 연구하기까지 했다.

“역사의 후퇴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왜 후퇴했을까요. 식민지화가 원인입니다. 외세와의 투쟁이 주된 노선이 되면서 근대화가 후퇴한 겁니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대외 조건이 어려워지면서 사고가 후퇴합니다. 반일하지 않으면 친일? 역사의 후퇴예요. 보수든, 진보든 하나같이 후퇴했습니다.”


부족주의로 변질되는 민족주의나연준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사상이라는 게 위기가 오면 더욱 교조적으로 변합니다. 병자호란 이후 노론 세력이 중화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소중화를 자처하며 ‘정신 승리’한 게 대표적이죠. 교조주의적 흐름이 대원군까지 온 것이고요. 위정척사의 흐름이 지금껏 이어집니다. 주자학의 특징 중 하나가 모든 문제를 선(善)·악(惡)으로 ‘도덕화’한다는 겁니다. 탈원전, 소득주도성장은 에너지와 경제의 문제인데 그것마저 도덕적 관점으로 들여다봐요. 주자학은 나와 남을 문명과 야만으로 나눕니다. ‘애국이냐, 이적이냐’ 선택하라는 게 노론적, 위정척사적 사고죠. 집권 세력과 노론, 위정척사파의 공통점은 자기들만이 역사적 사명을 가졌다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자신들만이 믿는 시대착오적 대의명분을 위해 헌신하는 무지한 선비들이죠. 민족이라는 가치로 깃발을 세우고 사람을 줄 세우는 것은 전근대로의 후퇴예요. 86세대 운동권이 국가의 주류가 되면서 나라가 조선으로 후퇴하고 있습니다.”

주대환은 “대외적 조건이 어려워지면 지성이 후퇴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민족주의는 지성을 마비시키는 독약”이라고 했다.

-민족주의에도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만.

“갈래가 없습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이 이상이라면 민족주의는 현실 아닐까요.

“그게 다 핑계예요. 민족주의에 발을 담그는 순간 후퇴합니다. 코스모폴리탄의 길과 민족주의의 길은, 예수와 길과 유다의 길처럼 완전히 나뉩니다.”

나연준은 부족주의(tribalism)라는 낱말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민족주의는 부족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자기 민족이 특별하다거나 자기 문화가 위대하다는 식으로요. 대표적으로 북한이 ‘조선민족제일주의’ 구호 아래 정신 승리하면서 살아가고 있죠. 진보진영에서 생산하는 민족주의 담론은 피해자성과 결핍을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소녀상이나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워 지금도 고통을 겪는 것처럼 추체험(追體驗)을 제공하는 방식으로요. 86세대는 20대 때 독재정권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1980년대에 느낀 피해자 의식을 역사 전체로 확장합니다. 피해자-가해자 인식으로만 사안을 들여다보는 것이지요. 피해자의 눈으로 역사를 보게끔 길들었거나 스스로 최면을 건다고 봐요.”



예수의 길, 유다의 길주대환은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민족을 예로 들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만 하나님의 자식이에요. 그것을 뒤집은 게 예수고요. 구약의 선민의식은 어떻게 보면 집단 정신병입니다. 구약 끄트머리에 정경(正經)으로 인정받지 못한 외경(外經)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대인들이 쓴 것인데,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중동 지역을 석권한 시점과 예수가 태어난 시점이 400년 차이가 납니다. 기원전 4세기 유대인들은 주변 강국들에 핍박받던 피해자들이 아니라 세계시민이 된 장사꾼들이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 다른 종족과 교류하며 살았죠. 그게 이스라엘의 한 흐름이었습니다. 나는 이 흐름이 예수와 연결된다고 봅니다. 유다는 돈 몇 푼에 스승을 팔아먹은 도덕적으로 나쁜 놈이 아닙니다. 유다는 이스라엘 민족주의의 열혈당원이었어요. 이스라엘의 또 다른 흐름을 대표했죠. 쉽게 말해 예수와 유다가 사상적으로 대립한 겁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요. 유다의 길이 아닌 예수의 길이 진보입니다.”

그가 덧붙여 말했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예요. 한류, K-팝이 동아시아, 서아시아, 중동, 남미의 청년들을 몸달게 합니다. 1970년대 대학 다닐 적 우리 세대가 프랑스 영화를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독일이나 프랑스 한번 가보는 게 꿈이었죠. 지금은 어떻습니까. 경제적으로 선진국이며 문화를 수출하는 나라예요. 제2의 독립운동? 도대체 왜 식민지적 사고로 후퇴합니까. 영국, 네덜란드도 영토가 넒은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진화하고 팽창해 제국을 추구해도 될 만큼 성장했는데 왜 피해자성을 강조합니까.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에요. 굉장히 성공했습니다. 고난을 겪고 그것을 이겨내 우뚝 선 게 우리나라예요.”

한국의 군사력은 세계 7위 안쪽이고 경제력은 세계 10위권이다. G20에 속해 있고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했다. 인구 5000만 명,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세계에 7개밖에 없다. 서구인들이 한국 하면 테크놀로지를 떠올릴 만큼 기술 수준과 인적 능력도 세계 최상위권이다.


수박 겉핥기 역사 인식화제를 ‘도덕주의(moralism)’로 바꿔 두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치와 외교를 도덕화하지 말라는 것은 정치철학의 기본 명제인데요. 특히 정치적 현상을 선악 이분법으로 보는 경향도 심화합니다. 정(正)·사(邪)의 프레임이 휘몰아치는 형국입니다.

“2014년 ‘좌파논어’라는 책을 썼습니다. 주자가 논어에 주석을 달았는데 뭐는 되고, 뭐는 안 되고, 이렇게 가르치는 식으로 해석했더군요. 논어라는 텍스트를 도덕주의로 해석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착한 어린이, 나쁜 어린이를 나눈 거죠. 성숙한 어른들의 삶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지 않습니다. 수박 겉핥기 역사 인식으로 누구는 친일파, 누구는 독립운동가라고 판정을 내립니다. 그것을 70년이 지난 현재에 대입해 너는 친일파, 나는 애국자 프레임을 만듭니다. 앞선 세대의 삶은 판정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하는 겁니다. 복잡한 우여곡절을 이해하는 게 먼저예요. 명성황후 시해에 참여한 조선인들을 일본의 앞잡이라고 말하는 건 쉽죠. 그 인간들이 왜 그랬는지 먼저 들여다봐야 해요.”(주대환)

“소중화 사상에 매몰된 노론이 자신들만의 도덕으로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19세기 위정척사파는 도덕으로 근대국가가 등장한 세계를 들여다봤고요. 21세기 한국의 집권 세력은 도덕이라는 애드벌룬을 띄워놓고는 정치공학 측면에서 활용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말로만 서희, 이순신을 거론합니다.”(나연준)

“그렇더라도 나라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요. 우리 젊었을 때 독일의 산업은 우리가 결코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어요. 결의를 다지고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냈습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반도체를 보세요. LG전자가 세계 가전 시장을 석권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말로만 떠들면서 그 어려운 일을 해낸 게 아닙니다. 앞선 세대와 뒷세대가 노력해 일궜습니다. 허투루 얻은 결과가 아닙니다. 나라 망하지 않아요.”(주대환)

“반도체가 이순신인 거죠.”(나연준)


악마와 싸우는 성자나연준은 집권 86세대를 한국형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로 규정했다. 노멘클라투라는 소련의 공산당 관료를 뜻하는 말이다.

“스탈린 집권 이후 왕년의 혁명가들이 공산당과 국가의 요직을 차지했습니다. 인민에게는 해방, 혁명, 평등을 외치면서 자기들끼리 호의호식했죠. 입은 공산주의자지만 몸은 봉건귀족이었습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돼지들이 그들입니다. 민노총, 학계, 언론, 시민단체의 86세대는 선거나 이슈가 있을 때마다 민주당에 혀와 입을 빌려줍니다. 언제라도 청와대나 국회 등으로 뛰어갈 준비가 돼 있죠.

그들은 자신들을 약자의 대변자이자 악마 같은 우파와 싸우는 성자로 규정합니다. 정의로운 가치로 본인을 치장하지만 언행 불일치를 넘어 언행 배치가 이들의 일상입니다. ‘네 새끼는 평준화, 내 새끼는 자율화’가 이들의 기본 태도예요. 한국형 노멘클라투라는 부동산 규제하는 투기꾼, 도요타 타는 반일주의자, 도쿄에 아파트 소유한 독립군, ‘갑질’하는 을의 대변인, 부패한 도덕가예요. 소련의 원조들도 코를 막고 고개를 돌렸을 겁니다.”

주대환이 부연했다.

“그 또래들, 그러니까 정치권의 62~66년생의 정신 세계가 특이하다고 봐요. 젊은 나이에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접했을 때 정신적으로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전두환이라는 친구가 굉장히 무서운 독재자로 묘사되지만 전두환 지배는 유신 때와 비교하면 굉장히 약했습니다. 수백 명을 죽이고 수천 명을 다치게 한 후 집권했잖아요. 정통성이라곤 일체 없는 통치자였죠. 경제가 엄청나게 팽창하던 시기여서 기성세대는 다들 돈벌이에 바빴습니다. 그런데 386들이 몰아내버린 겁니다. 전두환이라는 악마를 몰아내는 거대한 역사적 과업을 해낸 겁니다. 충만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러곤 일찍 출세해 승승장구했습니다. 간땡이가 부은 거죠. 이제는 정권까지 잡았습니다. 간이 그냥 부은 정도가 아니라 배 밖으로 나와버린 겁니다.”

나연준이 “이른 나이에 사회적 명망을 얻은 게 교조적 사고를 갖게 된 원인인 것 같다”고 하자, 주대환은 “정신적으로 자기가 레닌이고, 자기가 김일성이고, 자기가 혁명가라고 여긴다”고 했다.


사문난적(斯文亂賊)나연준이 또박또박 말했다.

“명문대 출신이 많기에 엘리트 의식도 있어요. 좋은 자리는 자기들이 차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죠. 승리의 위대한 경험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나르시시스트이기도 합니다. 말하고 발이 다른 곳에 있어요. 상반신은 아직도 혁명가인데 하반신은 극도로 자본주의적 삶을 살죠. 위선입니다. 현대판 위정척사파라는 인식이 회자되는데 위군자(僞君子)라는 표현이 더 적확합니다. 부유(腐儒)! 썩은 선비들이에요. 입으로는 도덕을 떠들지만 삶은 받쳐주지 못하는 부유들이죠.”

위군자는 거동을 거짓으로 꾸미고 세상을 속여 군자인 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부유는 생각이 낡고 완고해 쓸모없는 선비를 뜻한다.

“물론 입으로 말하는 도덕과 삶이 일치하긴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도덕을 다른 집단을 공격하는 무기로 삼습니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뭡니까. 다르게 해석하면 응징하는 겁니다. 한두 사람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면 우르르 몰려가 댓글을 답니다. 다른 여론을 막아버리는 거죠. 조국이건 김어준이건 김제동이건 툭 건드려주면 와~ 하고 몰려가 반응합니다. 한국형 노멘클라투라들을 따르며 악마들의 간악함에 몸서리치는 거죠.”

주대환은 그것은 지성의 후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중을 움직이는 능력이 탁월한 기술자들이 있어요. 손짓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대중이 존재하고요. 기술자들은 선거의 도사들이기도 해요. 어릴 적 학생회를 장악하는 과정에서부터 훈련받은 거죠. 사회에 나와서 그 기술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하룻저녁에 수만 명을 움직여 문재인을 후보로 만들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세대가 다시는 등장하지 않을 겁니다. 아주 특이한 현상이에요.”

나연준은 ‘만신전’ ‘금기’라는 낱말을 썼다.

“외교적으로 문제를 풀자고 말하면 ‘너는 친일’ ‘도쿄로 이사 가든가’라면서 낙인을 찍습니다. 앞서 조선으로의 후퇴라고 말했는데 중세 시대의 파문과 비슷합니다. 그 사람들이 속한 세력 안에서는 다른 말을 하기가 더 어렵죠. 그건 전체주의예요. 근대적 개인이 누락된 겁니다. 그 사람들은 순수의 상태를 지향합니다. 사회가 순수할 수 없는데 순수한 상태가 옳은 거라면서 사회 곳곳에 금기를 만듭니다. 스스로는 도덕적으로 살지도 않으면서 도덕적 사회를 세워야 한다며 만신전을 세웁니다. 만신전 제일 윗자리에 민족주의가 있습니다. 이순신의 12척, 죽창가, 의병, 국채보상, 제2독립운동…. 현실을 지적하면 토착왜구, 이물질로 규정해 도덕적 징벌을 내립니다. 민족주의와 접신한 제사장의 방언에 신심이 들끓고 이교도 사냥에 나섭니다. 노론의 중화사상이 조선을 망국으로 이끌었다면 악성으로 변종된 민족주의가 대한민국을 좀먹고 있습니다.”


수구와 진보


나연준(왼쪽)의 어머니가 54년생, 주대환의 아들이 81년생이다. [조영철 기자]주대환이 낮은 목소리로 나연준의 말허리를 잘랐다.

“많은 고난과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굉장히 운이 좋았다고 봅니다. 영미(英美)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것부터가 다행스러운 일이었죠. 영미가 주도한 유엔이 2차대전 이후 전후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공인한 나라가 대한민국인 것으로 압니다.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분단되지 않은 형태로 선진국이 됐으면 더 좋았겠으나 대한민국에서만이라도 이런 나라가 만들어졌다는 게 너무나도 고맙습니다. 그 과정이 우리 힘으로만 이뤄진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해요. 우리가 열심히 노력했고, 운 좋게 전후 국제 질서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두고 와~ 감탄하는데 정작 나라 안에서는 지성이 후퇴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강대국의 꿈을 키워도 될 만큼 성장했습니다. 뒤로 후퇴해 다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나연준이 주대환의 말을 받았다.

“어느 나라에 태어날지 제비뽑기로 정한다고 가정해볼게요. 딱 뽑았는데 대한민국이라고 써 있으면 굉장히 안도할 것 같아요. 식민지를 겪은 나라 중 이렇듯 성공한 나라가 없습니다. 앞선 세대가 이뤄낸 성취를 비하하면서 그것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강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산업화, 민주화를 이뤄낸 우리는 개인화는 이루지 못했습니다. 전체주의를 벗어던지고 개인화를 이뤄내는 게 근대의 완성이라고 봅니다. 우파 쪽에서 오히려 자유를 얘기하던데 주목할 만한 대목이라고 봐요.”

주대환에게 끝으로 물었다.

-독립문에서 보자는 건 무슨 의미였습니까.

“독립문이 1897년 세워졌습니다. 122년 전 선각자들이 고민해 찾아낸 길이 있습니다. 독립문이 표상하는 노선이 그것입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거치면서 잡힌 노선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기(想起)는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해보는 겁니다. 그분들은 왜 없는 돈을 모아 독립문을 세웠을까. 없는 돈을 모아 왜 그렇게 했을까. 왜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을까. 친미반중 노선이었다고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수구가 아닌 개화의 길 말입니다.”

모화관(慕華館)은 ‘중국을 사모하는 집’, 영은문(迎恩門)은 ‘(황제의) 은혜를 영접하는 문’이다. 구한말 위정척사파는 수구당, 급진개화파는 개화당으로 불렸다. 독립문의 ‘독립’은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 진보와 수구,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21세기적 의미는 무엇인가. 54년생 주대환, 81년생 나연준과 헤어져 광화문 방향으로 걸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신동아 201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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