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3

가가와 도요히코를 아시나요? < 김재일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연재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가가와 도요히코를 아시나요? < 김재일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연재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가가와 도요히코를 아시나요?
기독교 사회주의자이자 열정적 복음주의자인 가가와 도요히코를 만나자
기자명 김재일  승인 2008.09.23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988-1960) 목사는 우찌무라 간조와 더불어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기독교인으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젊은 날의 자전적 소설인 <사선을 넘어서>의 저자로서의 가가와 도요히코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거나,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나마 설교와 기독교 매체에 예화로 인용되고 인터넷으로 퍼진 가가와 도요히코에 대한 이야기는 그를 ‘일본의 성자’라고 부르면서 그의 삶을 극적으로 각색하여 그의 각혈과 회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이들이 인터넷에 쓴 다음과 같은 소설적인 이야기이다.

 “가가와 도요히코를 만들어낸 분이 일본의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였다. 그가 북쪽의 카나자와 지역에 텐트를 치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5년이 지나도 교인이 없었다. 5년 만에 한 폐병 환자가 찾아왔는데 그가 바로 가가와 도요히코였다. 처음엔 폐병 환자인지 몰랐고 같이 식사를 하는데 청년이 기침을 하다가 피를 밥상에 쏟아 놓았다. 순간 나가노 목사님이 이걸 쫓아내야 하나 아니면 씻겨주고 밥을 먹여야 하나 고민을 하다 그래도 5년 만에 제 발로 찾아온 사람인데 내가 내쫓을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세숫대야와 수건을 가져다 그것을 다 치우고 씻어주고 같이 밥을 먹었다. 그리고 폐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가 방황하다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주님께 자기 생애를 드렸으며 신학교에 다니다가 폐병 환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학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가노 목사님이 그 청년을 위해 기도해주었는데 그날 밤 성령이 임해서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고 주님을 만나면서 그의 생애를 그렇게 괴롭게 했던 폐병도 완전히 치유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평생 병들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역을 하며 일본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까지도 큰 존경을 받았다. 나가노 목사님에게는 그가 평생 사역하는 동안에 회심시킨 오직 한 사람이 가가와 도요히코였다. 그는 비록 한 사람을 회심시켰지만 그 한 사람은 너무나 큰 인물이었다. 일본 사회에 기독교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정한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인가를 온 몸으로 보여준 한 사람의 성자가 나가노 한 사람을 통해서 마침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었다.” 

물론 나가와 마끼 목사도 존재하고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이 특별한 관계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존재했던 두 인물을 토대로 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꾸며낸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설교와 기독교 매체에 많이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 회심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모른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이 일본어와 영어로 30권 가까이 됨에도 불구하고 <사선을 넘어서> 외에는 전혀 번역 출판되지도 않았다. 왜 그럴까? 아마 그것은 한국의 기독교가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보수화 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이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또한 진보적 기독교 진영에서도 기독교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맑시즘과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열정적인 복음주의자의 삶을 살았던 그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였다.

필자가 가가와 도요히코에 대해서 처음 이야기를 들은 것은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 운동을 막 시작했을 당시 생협 중앙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일본에 연수를 갔을 때였다. 일본 생협 운동의 역사에 대한 소개를 들으면서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이름을 그 때 처음 들었다. 그 후 생협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 분이 바로 <사선을 넘어서>의 저자라는 것을 알고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몇 년 뒤 다시 일본에 갔을 때 가가와 도요히코의 전기에 대한 작은 책을 구입하여 돌아 왔다.

그러다가 두 가지 이유로 장인 어른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책을 번역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내년이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고배의 슬럼가에 들어가 본격적인 사회 복음주의 운동을 전개한지 100주년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필자의 허영과 무능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하심에 따라 예장 생협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고배 생협을 비롯하여 일본에 무수한 생협을 만든 가가와 도요히코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일본 대부분 사회운동의 씨앗을 뿌린 기독교 사회주의자이자 열정적인 복음주의자인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의 역정을 보면서 진보적 실천과 복음적 영성의 결합을 보았고, 예수에 사로잡혀 변절하지 않고 초지일관 믿음의 삶을 실천한 그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의 근대 제국주의 시대에 일어난 모든 사회 운동에 씨를 뿌린 사람이다. 그는 일본 최초의 대규모 노동자 파업을 주도하면서 노동 운동을 일으켰고, 농촌 복음 학교를 만들어 농촌 전도는 물론 농민의 의식화를 통하여 전국적 농민 조직을 만들었다. 동경 대지진 때는 일본 최초로 볼런티어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또한 소비자 생협을 비롯하여 의료 생협, 농협 등은 물론 열악한 빈민들의 생활 속에서 어린이 보육 운동 등을 일으킨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사회적 실천만이 아니라, 전쟁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주창하여 3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동안 백만인 구령 운동을 전개 하였고, 전쟁 후에도 3년 동안 피폐한 농촌을 돌면서 전도 운동을 한 부흥사이기도 하다. 사회적 실천과 체험적 신앙에 기초한 기도, 이것이야말로 가가와 도요히코를 특징 짓는 두 단어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아버지인 가가와 준이치는 도쿠시마현의 명문 이소베 가문 출신으로서 그 지역의 명문가인 가가와 집안의 미찌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그러나 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했다. 준이치의 첩인 가메라는 1888년 7월 10일 고베에서 도요히코를 낳았다. 

도요히코는 양친이 모두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할머니와 양어머니인 미찌의 손에 양육 되었다.(설교 예화집에는 사생아인 가가와가 이복 형제들의 극심한 미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양모 미찌는 자녀를 낳지 못해서 이복 형제들이 없었다) 양모 미찌는 냉랭한 태도로 도요히코를 대했으나 할머니는 그를 가문의 후계자로 키우려고 엄하면서도 사랑으로 보살펴주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집안의 대표로서 마을의 축제나 장례식에서 상석에 앉아야만 했는데 이런 일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조숙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도요히코는 중학교 시절 귀한 만남을 갖게 되었는 데 그것은 로간과 마야스 선교사와의 만남이었다. 영어를 배우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그들의 헌신적이고도 진심어린 애정을 받은 끝에 도요히코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였지만 병에 짓눌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교회 생활과 공부를 해나갔다. 그는 이미 그때 평화주의자인 로간과 마야스의 영향과 톨스토이의 반전론에 심취하면서 일본 군국주의의 전쟁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고, 교련 훈련을 거부해 교련 선생에게 하루 종일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중학교 졸업 후 도요히코가 신세를 지고 있던 숙부는 그에게 동경대학에 들어가 엘리트 코스를 밟아 가가와 집안을 일으켜 줄 것을 기대하였으나 그는 메이지 신학교에 입학을 희망하여 갈등을 빚었고 경제적 지원도 끊기게 되었다.

대학 시절에는 영어도 잘하고 매우 조숙하여 학교 수업에 만족하지 못하였지만, 2학년 때부터는 잘 적응하였던 것 같다. 그는 일생을 거쳐 큰 도움을 주고받게 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대학 2학년 시절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했을 때 그의 출신학교이기도 한 도쿠시마 고등학교 교장이 그 지역 신문에 쓴 일본이 제국주의로 탈바꿈해야한다는 ‘제국주의에 대하여’라는 글을 반박하여 ‘세계평화론’을 투고하기도 했다. 

대학시절부터 가가와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하고 돕기를 자주 하였다. 빈민촌을 돌아다니며 허약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옷을 벗어주고, 집으로 데려와 재워주기도 자주 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의 몸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각혈까지 하게 되었다. 그 무렵 고베 신학교가 개교를 하고 로간과 마야스 선교사가 그 학교에서 교수직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도요히코에게 전학을 권하였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고베 신학교에 편입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9월에 개강 예정이라 그 전까지 기후현에 있는 토요바시 시의 교회로 전도 지원을 나가 나가오 마키라는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가가와는 매일 밤 후다끼라는 번화가에서 열심히 노방전도를 하다가 결국에는 과로로 쓰러져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그때 의사는 살 가망이 없다고 하였으나 그는 자신에게는 살아갈 힘이 있다고 믿었고 살아서 해야 할 이런저런 사명이 있다고 확신했기에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았다고 후에 고백했다. 나가오 목사와 그 가족의 애정 어린 돌봄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고베 신학교로 돌아온 이후에도 결핵성 축농증과 치질 수술을 받는 등 힘든 시간이 계속 되었지만 요한 웨슬레의 전기를 읽으면서, 신앙 생활이 바르고 청렴하였던 그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계속 되는 병고로 20대 초반은 자살을 자주 생각하며 지냈다. 그 깊은 절망은 어느 순간 절대 긍정으로 변화되었다. 그는 절망의 늪에서 놀라운 세계로 소생하였다. 실재의 세계에서 죽을 힘을 가지고 강하게 살아가려고 각오하고 모든 것을 긍정하기로 하였다. 

1909년 12월 24일 그는 기숙사를 나와 고배의 빈민지역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은 가난과 질병, 비참함과 범죄가 들끓는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살면서 아이들과 놀아주었고 그 마을 사람들의 어려운 형편을 돌봐 주었다. 그는 슬픈 운명에 놓인 어린이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였다. 그는 그곳에서도 ‘한벌 옷의 제자도’의 가르침을 받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빈민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천국옥’이라는 밥집을 열어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쌓여가는 외상으로 파산하였으나 그 대신 일생의 반려자인 ‘하루’라는 여성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녀는 그가 인도하는 예배와 빈민가 선교에 열심히 참석하며 큰 도움을 주었고, 가가와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지극한 섬김의 모습으로 빈민들을 위해 애쓰던 하루를 좋게 여겨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들은 비록 허름하기는 했으나 자신의 거처가 된 그곳으로 양모 미찌를 모셔와 진심으로 봉양하였다. 그러던 차에 그를 돕던 미국인 독지가로부터의 후원금이 중단되자 빈민촌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 기회에 지식과 경험을 좀 더 얻기 위해 학문의 길을 택하기로 하고 도요히코는 미국 프린스턴으로, 하루는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로 떠났다.

그는 프린스턴에서 신학과 생물학을 공부하였다. 또한 그는 뉴욕에서 유대인 마을에서 일어난 양재 노동조합에 속한 6만 여명 노동자의 대규모 시위행진을 목격하면서 새로운 눈을 뜨고 일본에 돌아가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또한 방학 동안에 아르바이트로 유타주에 있는 일본인회에서 서기직을 맡아 보기도 했었는데 그 때 그의 노력으로 백인 지주에게 저임금으로 혹사당하고 있던 일본 노동자들을 위해 소작인조합을 결성하여 임금 인상을 이루었다. 이 두 경험은 도요히코에게 큰 재산이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교회나 신학교가 아닌 고베의 빈민촌으로 다시 돌아간 그는 빈민촌 구제 사업이나 전도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 생각 끝에 가난을 없애기 위해서는 구제를 넘어서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노동자 자주관리 공장의 일환으로 칫솔공장을 열었다. 빈민촌에 일자리를 마련하여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주고 그 이익을 노동자들에게 환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가가와를 도와 회사를 설립하기는 하였으나 경험 부족과 소비자들의 외면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 후로 그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가 관여하던 우애회의 소식지인 ‘신고베’를 통해 간사이 지역 노동자 단체의 통일을 호소한 그는 드디어 ‘간사이 노동동맹 창립선언’을 하게 된다. 불황이 심각해지던 1921년에 오사카 전동주식회사에서 동맹 파업이 일어났다. 이 파업을 시작으로 인근 공장들도 연이어 파업에 들어갔고 7월 10일에는 일본 최초로 대규모 시위인 3만 5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중심에는 가가와가 있었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의 농업 종사자는 전 인구의 절반 정도로 공업 인구보다 두 배 정도가 많았다. 그러나 소작인들의 수입은 공장노동자들의 수입의 절반 이하였다. 가가와는 부채 때문에 노예 생활을 하던 농민들을 그냥 볼 수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소작쟁의가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조직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농민의 전국 통일조직을 결성하려 노력하였고, 그 노력의 결과로 1922년 4월에 고베에서 일본농민조합 창립대회가 열리고 15개 현 대표 150명이 가가와가 기초한 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농민운동은 노동운동과 마찬가지로, 경제투쟁보다 정치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래서 농민운동은 그의 한쪽 팔과 같은 스기야마 겐지로에게 맡기고, 그는 협동조합과 농민복음학교 설립에 정열을 쏟았다. 오사카 서구에 유한책임 구매조합, ‘공익사’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연대하여 자유의사로 조합을 만든 것이다. 쌀, 소금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취급하였으며 술은 취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 중에 도요히코의 출세작이 된  <사선을 넘어서> 1권이 출간되어 100만부가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인세를 거의 다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 그리고 생협 운동을 위해 사용하였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진도 7.9의 강진으로 400만 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하였고 도쿄의 시가지는 초토화되었다. 도요히코는 소식을 듣고 바로 행동을 개시하여, 예수단의 청년들에게 고베 시내의 각 교회를 방문해서 협력을 구하게 하고, 자신은 구호물자를 배에 싣고 동경으로 가서 가장 피해가 컸던 강동지구에 구조 활동의 거점을 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당시 가가와는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은 주민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하면서 생활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다. 곧 다가올 겨울을 이재민들과 가건물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고, 빈민촌의 고뇌를 나도 함께 맛보면서, 그것을 과학적으로 조사하여, 어려운 사정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 즉, 그들의 눈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주민을 전도와 구제의 대상화를 하는 것이 아닌 주민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과 함께 생활 향상과 신앙의 길로 가고자 하였다.

구제 사업이 마무리 되어가던 1924년 3월 이후에도 그는 동경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단순히 자선사업이나 구제 사업에 그치지 않고 주민들의 교육적 측면과 복음에 의한 마음의 회복을 중시하였다. 이런 생각으로 생협, 신협, 기독교 산업청년회, 의료 생협 등을 만드는데 열심을 다하는 한편 ‘예수의 친구회’라는 모임을 결성하였는데 이는 가가와의 메이지 학원 시절의 친구들이 중심이 된 조직으로 ‘예수에게 경건하라, 가난한 자의 벗이 되고 노동을 사랑하라,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라, 순결한 생활을 존중하라, 사회봉사에 뜻을 두어라’를 강령으로 하는 신앙 운동체였다. 

1922년에는 대만의 초대를 받아 전도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혼자 가려고 했으나 부인인 하루가 고베의 빈민촌에서 술에 취한 무뢰배로부터 칼에 찔리는 봉변을 당함에 따라 아내와 동행하게 됐다. 이 여행은 결혼 8년 만의 신혼여행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첫 아기를 얻게 되었다. 이후 육아문제와 계속되는 빈민들의 협박과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10여 년간의 빈민촌 생활을 정리하게 된다.

그 후에 '예수의 친구회‘에서 백만인 구령운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에는 16만 명 정도의 기독교 신자가 있었지만 증가비율이 너무 낮았다. 지금까지 교조적, 강단 중심적이어서 실천력이 부족했던 종래의 기독교 전도 방법을 변혁시켜서, 사랑과 협동을 바탕으로 정열적인 실천을 쌓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1927년에는 스기야마 겐지로가 이웃에 이사 온 것을 기회로 일본 농촌 전도단을 결성하고 자택에서 농민복음학교를 열었다. 

이 즈음 미국에도 ‘거룩한 1달러 클럽’이라는 가가와의 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는데,그들의 도움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일본 기독교연맹의 이름으로 실천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백만인 구령 운동’이 발전한 것이었다. 전국 각지를 돌며 ‘사회개량운동’, ‘사회봉사사업’. ‘매매춘 폐지, 금주 운동’ 등을 벌여 나갔으나 우경(右傾)화가 강해지던 시절이라 신자 증가에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러한 순회 전도 기간 중에도 군국주의로 기울어져가는 시대의 흐름에 항의하여, 도쿄에서 ‘전국 반전 동맹’이 결성하고 가가와는 집행위원장에 추대 되었다. 일본의 대륙침략이 이루어지자 가슴 아파하면서 일본과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를 계속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필리핀 전도, 호주 , 미국, 유럽 등을 돌아다니며 온 세계가 마음을 합쳐서 평화를 위한 우애의 정신을 가지자고 설파하였고 38년 12월에는 인도를 방문하여 간디와 네루를 만났다.

간디는 그에게 유명한 간디의 물레를 선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는 이전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당신 입장이라면 국가로부터 이단시 되는 이야기를 확실하게 공언하겠습니다. 그리고 기쁘게 죽음을 맞겠습니다. 저울의 한 쪽에는 생활협동조합과 당신의 사업 전부를 놓고, 다른 쪽에는 당신 나라의 명예를 놓고 생각해 봅시다. 만일 당신이 나라의 명예를 존중한다면 일본에 거역하여 당신의 견해를 공표하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일본을 살릴 것을 당신에게 요구하고 싶습니다.”

라는 말을 하면서 그 유명한 간디의 물레를 선물했다. 그는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점점 노골화되자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사죄하기도 하였다. “나의 모든 기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중국에서 행한 포학을 생각하면, 참기 힘든 부끄러움이 솟아오릅니다. 내가 백만 번 용서를 구한 들, 일본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는 충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가가와의 태도는 일본 군 당국과 우익 단체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매국노로 매도당하고 헌병대에 끌려가 구치소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패전 이후 그는 내각 참여에 대한 권고를 받았지만 거부하고, 오히려 ‘전국민 참회 운동’을 제창하면서 국제평화협회를 설립하여 협동조합의 정신에 의거하여 항구적인 평화의 수립과 인류의 상호부조와 우애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0월에는 사회당 창당 발기위원장을 맡는 등 쉴 사이도 없이 활동을 하면서도 3년간 전국을 순회하며 대중과 직접 만나 농촌 복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5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하지는 못했다. 또 같은 해 12월 8일 일본과 한국의 국교가 단절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라인으로 인한 어업 문제로 대립을 우려하여 프린스턴 대학 동창이기도 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죄와 우호관계 수립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사회악에 대해서, 과격한 직접 행동은 부정하였다.

그 때문에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에서도 소수파가 되어 차츰 이상의 실현을 협동조합에 맡기게 되었다. 증오나 투쟁을 초월하여, 서로 신뢰하고 도와주는 방법으로서 그가 찾은 것이 협동조합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인간애와 상호부조라는 큰 원리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는 1945년 11월에 처음으로 일본 협동조합동맹을 조직하고 민간의 협동조합 보급에 앞장섰다. 그 중에서도 그가 창립하고 지원한 코프 고베는 고베 생협과 나다 생협이 합병한 것으로 조합원이 130만 명이 넘는 일본 최대이자 세계 최대의 규모의 생협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 교육의 중요성 특히 유아교육과 사회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어린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교육은 어린이들에게 오염되지 않은 영혼의 한 조각을 심어주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빈민촌의 어려운 생활과 지진과 전쟁 등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늘 사랑으로 돌보았던 그였다. 그는 1924년에는 어린이 권리를 제창하고 학교가 지적인 면에만 편중되게 교육하지 말고 의지와 본능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1958년에는 <우주의 목적>이라는 과학책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화학, 물리학, 생물학, 진화론, 천문학 등 자연과학의 모든 분야가 망라되어 있어 그의 뛰어난 과학자다운 면모도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포함해 가가와는 일생 방대한 수의 저작을 남겼다. 종교에 관한 것 58권, 사회사상에 관한 것 35권, 문학에 관한 것 53권, 번역 23권 등 200권이 넘는다.

1958년부터 몸이 상당히 쇠약해졌으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병중에도 매년 그가 즐거운 마음으로 간 도쿠시마에 전도 여행을 갔다 몸져눕게 되었다가 여러 가지 병이 겹쳐 결국 1960년 4월 23일 72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치었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교회를 강하게 해주십시오. 일본을 구해주십시오. 세계에 평화가 오게 해주십시오”였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누구에게나 흠이 없는 사람은 없듯이 그도 마찬가지로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의 폭격에 고통을 당하는 일본의 민중의 입장에 입각해 미국에 대한 전쟁 중지를 촉구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일본 민중만을 염두에 둔 가가와의 일생일대의 실수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실수를 알기에 전후에 전국적인 회개 운동을 주창하였다.)

그는 체험적 신앙을 바탕으로, 평생 동안 잡기를 즐기지 아니하고, 독서와 집필 그리고 실천적 사회 활동과 전도 운동을 초지일관 전개한 사람이다. 교인은 많으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실천이 부족한 오늘날의 보수적인 한국 교회와, 사회적 비판은 많으나 기도와 치열한 자기관리가 부족한 진보적인 한국의 교회에서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과 그가 걸은 길은 시대와 나라를 초월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또 다른 도전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소개한다.

김재일 / 예장생협대표·연평도 연평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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