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 1910-1945, 나라를 떠나야 했던 조선인에 대한 최초 보고서
박경식 (지은이),박경옥 (옮긴이)고즈윈2008-03-05
책소개
일제시대 강제징용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라 할 수 있는 책. 1965년에 출간되었으며, 지은이 박경식은 쉬이 잊혀졌던 강제연행의 만행을 고발함으로써, 재일동포들이 ‘왜 일본에 갈 수밖에 없었으며, 차별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책은 부분적으로 시대적 상황에 반응해 나온 책이기도 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정이 맺어진 해, 재일사학자였던 지은이 박경식은 식민지 시절에 대한 명확한 사죄 없이, 강제연행 등에 대한 배상을 제대로 합의하지 않고 ‘한일조약’ 체결을 진행하는 한일 양국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이 책을 저술했다.
아직 식민 시대 조선인의 강제연행 사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때,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의 학살현장을 찾아다니고, 각종 문서와 조선인 징용자, 목격자를 인터뷰하여 정리해놓아 광산채굴과 산림벌목, 각종 빌딩 건설 및 군수산업에 혹사당한 조선인들이 식민지 노예로서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처했었는지, 어떻게 강제연행될 수밖에 없었는지, 또한 해방 후 어떤 차별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한 실상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다.
목차
서문ㆍ5
서장 _ 제국주의와 민족 문제 ㆍ 11
1장 _ 조국을 일본에 빼앗기다1910~1938ㆍ 21
고향에서 쫓겨나 일본으로 도항ㆍ 22
재일조선인의 생활 상태ㆍ 35
재일조선인에 대한 박해ㆍ 41
2장 _ 강제연행1939~1945ㆍ 45
강제연행 정책ㆍ 50
강제연행 상황과 노무관리ㆍ 70
강제적인 훈련 상황ㆍ 76
도망자 속출과 탄압 정책ㆍ 87
사상(死傷) 상황과 유골 문제ㆍ91
무책임한 일본 정부ㆍ 99
결론ㆍ 107
3장 _ 체험자의 이야기ㆍ 109
속아서 홋카이도의 노동자 합숙소로 가다ㆍ 110
인간사냥꾼에게 잡혀 히타치 광산으로 연행되다ㆍ 112
수갑에 채워져 규슈의 도요스 광산으로ㆍ 114
행선지도 모른 채 비행장 건설공사장으로ㆍ 117
‘관 알선’으로 니혼고칸(日本鋼管)에ㆍ119
군속으로 남방 설영대로 연행되다ㆍ 121
군속으로 징용되어 한 쪽 다리를 잃다ㆍ 123
4장 _ 아직도 남아 있는 할퀴고 간 자국ㆍ 127
심한 학대로 자살자까지 나온 히타치 광산ㆍ도키와 탄광ㆍ 128
굶주림과 혹한 속에서 자행된 학살 (후쿠시마, 미야기)ㆍ 137
빌딩 건설과 군수산업에 혹사당하다 (도쿄, 가나가와)ㆍ 146
지하공장 건설에 동원되어 생사불명 (도치기, 군마)ㆍ 156
군인ㆍ군속으로 동원되어 희생되고 추방당하다ㆍ 165
가장 학대 받고 가장 사망률이 높던 홋카이도 탄광ㆍ 176
가장 많은 조선인이 연행되고, 유골이 산재해 있는 규슈 탄광ㆍ 187
현재도 시체로 가득 찬 하나오카 광산 및 이와테 학살 사건ㆍ 197
시나노가와 발전소 학살 사건과 시체로 해저를 메운 우베 탄광ㆍ 206
5장 _ 자료ㆍ 215
시나노가와 수력발전소 학살사건ㆍ216
간토대지진 당시의 학살 견문기ㆍ 225
이와테현 오후나토 공사장 학살사건ㆍ237
조선인 징용노동자에 대한 노무관리ㆍ 248
조선에 대한 일제의 죄악행위에 대하여ㆍ 264
재일조선인에 관한 문헌 목록ㆍ 292
6장 _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ㆍ 345
후기ㆍ 351
접기
책속에서
1937년 7월 본격적인 중국 침략 개시 후 일제는 이미 '대륙병참기지'로 변한 조선에서 더욱 가혹하게 식량자원과 지하자원을 약탈했고, 군수산업 확대와 동시에 조선인 노동력의 대대적인 동원을 전쟁정책으로 계획했다.-p51 중에서
...'한국'정부는 '한일회담'타결 이전에 태평양 전쟁 당시 징병 또는 징용으로 동원되...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박경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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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조선에서 태어나,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9년 동양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고 조선 중ㆍ고급학교, 조선대학교 교원을 역임하면서 조선근대사를 연구하였다. 태평양전쟁 종전 후, 희생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전역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생존자의 증언을 모으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을 펴냈다.
최근작 :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박경옥 (옮긴이)
최근작 :
박경식(지은이)의 말
이 책은 이른바 한일유착의 시초가 된 '한일조약' 체결을 강행하려는 긴박한 정세 속에서 출판됐고, 나는 그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썼다. 지금은 당시와는 정치 상황이 크게 달라졌지만, 조선 민족에게나 일본국민에게나 일제의 조선 지배 정책에 대한 규명은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며 그 사상적 근원은 한층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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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1965년 첫 출간 이후 일본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준 상처의 기록,
밝혀지지 않았던 진실의 역사
“이 책은 이른바 한일유착의 시초가 된 ‘한일조약’체결(1965년)을 강행하려는 긴박한 정세 속에서 출판됐고, 나는 그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썼다. 지금은 당시와는 정치 상황이 크게 달라졌지만, 조선 민족에게나 일본 국민에게나 일제의 조선 지배 정책에 대한 규명은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며 그 사상적 근원은 한층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최근 조선인 강제연행에 대한 조사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고 그것에 관한 저서도 나와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 책에 대한 요청이 이어지고 있기에 증쇄하게 되었다.” -박경식(1978년 1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정이 맺어진 해, 재일사학자 박경식은 식민지 시절에 대한 명확한 사죄 없이, 강제연행 등에 대한 배상을 제대로 합의하지 않고 ‘한일조약’ 체결을 진행하는 한일 양국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또한 이런 어려운 정세 속에서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을 썼다. 당시 일본 미래사未來社에서 출간한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朝鮮人强制連行の記錄>은 아직 식민 시대 조선인의 강제연행 사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때,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의 학살현장을 찾아다니고, 각종 문서와 조선인 징용자, 목격자를 인터뷰하여 정리한 것으로 광산채굴과 산림벌목, 각종 빌딩 건설 및 군수산업에 혹사당한 조선인들이 식민지 노예로서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처했었는지, 어떻게 강제연행될 수밖에 없었는지, 또한 해방 후 어떤 차별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한 실상을 낱낱이 공개한다.
일제시대 강제징용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그동안 잊고 있던 강제연행의 만행을 고발함으로써, 재일동포들이 ‘왜 일본에 갈 수밖에 없었으며, 차별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식민 시대 만행을 저지른 일본과 재일조선인 문제의 심각성을 못 느끼는 일본인들에게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왜 반성해야 하는가?’하는 양심의 문제를 지적한다.
“나는 재일조선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어왔는지 알리기 위해, 특히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 강제 연행 문제를 통해 제국주의 침략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또 재일조선인의 민주주의적 민족 권리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자의 사상적 잔재를 청산하고 조선과 일본의 우호친선과 진정으로 평등한 국제 연대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박경식(1965년 5월)
재일조선인 사회의 정신적 거목 박경식, 그가 평생에 걸쳐 몰두한 일
일본에서 더 유명한 박경식은 강제연행에 대한 연구로 주목을 받았다. 1922년 경북 봉화군의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여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고학으로 42년 초등교원 자격을 취득한 후 대용교원(준교원)으로 전전하다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늑막염을 심하게 앓았던 탓에 귀국길에 오른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남게 됐다. 이듬해 12월 미점령군 총사령부가 재일조선인 귀국 수송사업 중지명령을 내리면서 결국 일본에 잔류하게 된다. 귀국이 좌절되자 동양대 사학과에 편입, 날품팔이 등으로 학업을 마치고 조총련이 설립한 조선중?고 교사생활을 거쳐 조선대 교원으로 부임했지만,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이 분파주의로 비난받으면서 70년 학교를 휴직한다. 이후 조총련과 결별한 박경식은 왜곡된 재일조선사연구의 방향을 바로잡는 데 앞장선다. 자신은 헌책방을 운영하고 부인은 삯바느질을 할 만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40여 년에 걸쳐 일본 전역에서 엄청난 사료를 수집했다.
1976년 재일조선인 운동사연구회(기관지‘재일조선인연구’)를 결성한 후, 꾸준히 일본 전역에서 재일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연구회를 가졌으며 그 결과 재일조선인 문제를 다루는 일본 시민단체도 생기는 등 일본에 재일조선인 문제를 인식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97년 일본에서 출간된 ‘근대일본사회운동사인물대사전’에 조선인 운동가 1,250명을 수록한 것도 그의 업적으로 꼽힌다. 평생 수집한 자료(1300박스 분량의 4만 점의 자료)는 일제시대 각종 사회통계와 운동상황, 지배정책 등을 망라한 것으로, 일본의 시가滋賀현립대학에 기증했다(시가현립대학에는 ‘박문고’라는 이름으로 박경식의 자료만을 모은 자료실이 따로 있다).
박경식은 해방 전후 일본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온몸으로 겪은 재일조선인 1세대로, 해방 후 눈뜬 민족적 자각을 계기로 평생 재일조선인의 민족 주체성 확립과 위상 정립에 혼신을 다했다. 재일동포 2, 3세를 위해 죽는 날까지 재일동포사를 기록한 역사자료관 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그는 그의 마지막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1998년 도쿄 자택 근처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많은 일본인은 일제의 죄악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것은 제국주의가 한 짓이지 자기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유태계 독일인 주부는 “많은 독일인이 이제 와서 ‘그 일은 나치가 한 일이다, 나는 나치가 싫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토록 나치를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또 설령 정말 나치를 반대했다고 하더라도, 독일인이라면 독일의 이름으로 한 행위에 대하여 잘못을 반성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본문 48p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일본서 출간한 지 43년 만에 정식 계약하여 한국에서 출간
‘철도의 침목 하나에 조선인 하나’라는 증언이 있을 정도로 혹사당하고서도, 종전 후에는 보상금은커녕 밀린 임금도 못 받았으며, 조국으로 귀국하지도 못한 채 아주 기본적인 생활도 보장 받지 못한 재일조선인들의 실상을 밝힌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은 출간 당시 일본지식인 사회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1965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이후 지금껏 쇄를 거듭하며 판매되고 있다. 또한 이 책의 출간은 많은 재일조선인사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고, 일제 재일조선인사의 학문적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의의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에선 출판되지 않고 있다가, 책이 나온 지 43년 만에 처음으로 정식 계약하여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일본에서 한류열풍이 불고 한국과 일본은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걷고 있는 듯하지만, 분명 양국 간엔 청산되지 않은 역사가 존재한다.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이 그 증거이며, 이는 일본과 한국 모두 간과해선 안 될 문제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으로 잊힌 역사와 재일동포를 기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길 바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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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동**빠 | 2013-01-15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7036379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 내용들은 태평양 전쟁 발발이후 일본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에 대한 현황에 대한 이야기다. 책이 쓰여진 시기는 1965년 저자는 그동안 잊고 있던 강제연행의 만행을 고발함으로써, 재일동포들이 ‘왜 일본에 갈 수밖에 없었으며, 차별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식민 시대 만행을 저지른 일본과 재일조선인 문제의 심각성을 못 느끼는 일본인들에게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왜 반성해야 하는가?’하는 양심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정이 맺어진 해, 저자는 식민지 시절에 대한 명확한 사죄 없이, 강제연행 등에 대한 배상을 제대로 합의하지 않고 ‘한일조약’ 체결을 진행하는 한일 양국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또한 이런 어려운 정세 속에서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이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조선인은 일본법률에 복종하거나 죽거나 둘중 하나다."
한일병탄이후 조선에 처음으로 부임했던 데라우치가 말했듯, 조선민중들은 일본법률 치하에서 개처럼 살아야만 했다, 헌병,경찰관에게 살상을 허용하는 87조항에 이르는 '즉결권'과 '강제집행권'은 조선인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수 있는 절대권한이었다. 익지 않은 감을 팔았다고 구타당하고, 벌금을 낼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이 휘두르는 일본도에 팔다리가 잘리고,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자는 사람들이 많이 통행하는 길 한복판에 팔다리가 묶인채 톱으로 죽음을 당한 채 방치되던 것이 조선에서의 일상의 모습이었다.
일제강점기하에서의 지속적인 토지침탈로 수많은 농민들이 자신들의 터전을 잃고 만주와 일본등지로 떠나야만 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는 농사지을 땅을 잃은 농민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유지시켜 나가기 위해 떠나야만 했던 거라면, 태평양 전쟁이후 전쟁이 길어지고 전선이 확대되면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전쟁터로 징용되었고, 그들이 비운 노동의 공백을 강제로 연행된 조선인들로 채우게 된다.
조선인이 일본인 노동자보다 훨씬 질이 떨어지는 음식을 배당받는 것은 결과적으로 일본 노동자의 처우를 끌어내리는 요인이 되었다. 일본인 상급자들은 "저들 좀 봐, 저래도 참잖아."라고 했다. 듣던 대로 직장에서 아주 고된 일은 모두 조선인들 차지였다. 조선인 중에는 배가 고파 잘 움직이지 못한 나머지 탄차 사이에 끼어 죽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상급자는 "멍청하게 굴면 이렇게 된다."라는 식으로 말할 뿐이었다. 조선인들은 언제나 민족적 차별을 받았고, 더 나쁜 노동 조건에서 더 적은 임금을 받았다. 조선인은 정말 싸구려였다. 그런데 조선인들을 이렇게 취급하고는 또 일본 노동자들에게는 "조선인들은 저런 조건에서도 일하고 있지 않느냐."하는 식으로 압력을 넣었다(일본 탄광노동조합운동사편찬위원회,18쪽,1958년)(p.84)
조선인들은 하루 8시간의 노동시간과 일급 3엔등을 약속받고 일본과 동남아, 중국등지로 끌려가 탄광지대 및 비행장 건설등에 동원되어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가혹한 작업장등에 배치되었지만, 약속과는 다른 하루 14시간 이상의 노동과 절반도 안되는 임금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도망치지만, 도망치다가 붙잡히 사람들은 반죽음 상태가 될때까지 구타당하고 벌거벗겨진 채 사람들 앞에 보였주었다고 한다. 또 밥을 제대로 주지 않아 생오이등으로 식사를 대신했다고 하니 그 당시의 참혹함이 이루 말할수 없을 것 같다.
반도인은 일본어 해독자가 적어 작업상 불편하고, 작업의 숙달이 늦고, 작업에 대한 자부심이 적고, 솜씨가 없고, 기술에 대한 향상심이 부족하고, 노력하지 않고, 사실 이상으로 본토인과 차별감을 느낀다.(조선인 징용 노동자에 대한 노무관리 회의 자료)
일본인 대다수가 조선인에 대해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때 조선인들에 멸시감은 더더욱 컸을 것 같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고 지속적인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해방된 사실을 알 경우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두려움때문에 그들이 자고 있는 틈을 타서 경찰등을 동원하여 몰래 살해하여 시체를 내다 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한일협정 이후 40년이 지났고 결과적으로 박정희정권은 무상3억달러, 유상2억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라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경제개발에 쓰면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경제발전이라는 화려함 뒤에는 전두환정권과 김영삼 정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는 일본에 대한 경제적 종속이 있었다.
패전이후 일본곳곳에서 조선인 징용과 관련된 자료를 모두 소각하라는 명령때문에 당시 징용된 조선인의 수나 피해보상액등을 측정하기도 어렵거니와 당시 징용되었던 사람들도 대다수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고 당시의 생존자는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아직도 일본정권을 상대로 피해소송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일본정부는 65년 체결된 한일협정을 내세우면 한국정부에게 손해보상을 청구하라며 모든 소송을 기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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