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5

김대호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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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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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라는 책을 보고, 언제 한번 읽어야지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 포스팅을 보고 그 책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무려 2004년에 출간된 번역서네요. 물론 절판이고.
1930년대 만주가, 1870~80년대 미국의 서부와 같아서, 일본과 조선의 온갖 사업가, 혁신가, 야심가, 사기꾼, 깡패, 엘리트들이 큰 꿈을 안고 몰려갔다는 것(이 인물들 중에는 박정희 정일권 등 한국 경제개발을 주도한 사람이 많았다), 만주국은 오족협화의 기치 아래 일본 주도 합중국을 건설하려고 했다는 것, 만주국 경제 건설 노선은 스탈린, 히틀러가 보여준 국가(계획)주도 경제개발 노선을 나름 창조적으로 수용한 노선이라는 것, 1960~70년대 한국,일본 정치엘리트의 만주국 경험과 인적 네트웍이 한국 경제발전에 큰 보탬이 됐다는 것 등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사회디자인연구소 간판 달고 강령(종합적 국가비전과 전략)을 연구 고민해 왔으니, 만철 조사부는 대선배였으니!!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책을 보려고 했는데, 아직도 못 봤습니다.
오늘 이 포스팅을 보니, 한국 정치의 거대한 단절이 느껴집니다. 1910~30년대 태어난 박정희, 박태준까지는 히틀러의 경제부흥, 만주국의 부흥, 2차대전후 아데나워와 서독의 부흥 등에서 상당한 영감을 받았습니다. 롤 모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국가의 흥망(힘없는 나라의 설움 등)과 빈곤/기아/국가주도 경제개발과 정치리더십 등을 온 몸으로 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의식과 정신문화는 평화와 풍요를 그저 얻은 40~50대들에게는 전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1910~30년대생(엘리트들)은 대일본제국 경내에서 놀았습니다. 중국, 만주, 연해주, 한반도, 일본을 어렵지 않게 넘나들었습니다. 하지만 1950~60년대생들은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과 분단 체제가 강고한 시절을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세계와 역사를 보는 안목이 가장 협소한 세대가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1960~80년대 북한도 제법 잘 나갔고, 또 민족경제론과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유력한 대안으로 존재했습니다.
1970년대생(엘리트)들은 좌파 사상이념의 해방구가 된 캠퍼스를 다녔기에, 사상이념적으로는 586의 아바타나 다름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1990년대 초 여행자유화로 유럽 국경 이동 야간 열차의 절반을 한국 대학생 베낭객이 채웠을 정도로 유럽에 많이 나갔지만, 거기서 배운 것은 의외로 없습니다. 외환위기와 거친 구조조정(감기환자에게 항암제 투입)을 겪으면서 한국은 왜 이리 후지냐 하면서, 건국과 산업화 주도 세력/정부에 대한 성토만 얻어 온 것 같습니다.
경세담론에 대한 고민 역시 거대한 단절이 있습니다.
2006년에 사회디자인연구소를 시작하게 된 것은 노무현 정부의 혼미, 좌절, 실패를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김영삼 정부와 운동권의 정치/정책적 지식, 지혜의 총화인 측면이 있었기에, 혼미, 좌절, 실패은 운동권의 중도실용파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2006년, 2008년 연구소 초기 주요 멤버들은 NL/주사파 운동권의 중심 인물들로 1990년대에 사상이념적 전환/전향을 한 사람들이었기에, 자연스레 NL과 PD와 민노당에 대한 성찰반성이 연구소에 모여 들었습니다. 또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대한 성찰반성도 모여들었고, 그 이후 유럽 제3의길, 뉴라이트, 박세일 등의 고민도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고민이 제가 쓴 책(한 386의 사상혁명, 진보와 보수를 넘어, 노무현 이후 등)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강령적 고민은 국힘당과도 민주당과도 끊어졌습니다.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의 중심인 586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고민과 전혀 무관한 존재들입니다. 그냥 사진만 걸어놓고 계승자입네 합니다.
저와 꽤 깊이 고민을 나누던 박세일 선생이 2017년 초에 돌아가시면서, 만철 조사부에서 시작되어 면면히 내려오던 경세담론, 즉 종합적 국가비전과 전략에 대한 고민은 현실 정치와 거의 끊어졌습니다. 이는 제 책 '7공화국이 온다'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또 제가 현실 정치 진입에 실패하면서 더 확실히 끊어진 듯 합니다. 국힘당과 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라는 자들이 쏟아내는 정책과 공약을 보니 거대한 단절이 뚜렷히 느껴져 아픕니다. 펜엔마이크에서 목요일 11시 '2022 대한민국의 길을 묻는다' 에서 이 고민을 약간씩 풀곤합니다.





Taehwan Shin
oS6td SpAounngliucdslt arstm i1fnm4:2ao3rhegd ·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야기]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줄여서 <만철>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말미암아 일본은 러시아가 남만주에 부설한 철도의 경영권을 획득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라는 기업을 설립했다. 정말 흥미로운 기업인데, 아마 동아시아 최초의 <슈퍼기업>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만철은 화물과 승객을 운송하는 철도 여객사업에 안주하지 않고 후쉰과 옌타이에서 광산을 직접 운영하였고 안동, 잉커우의 항만을 운영하는 등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이뿐만 아니라 화물을 보관하는 창고, 여행자를 위한 숙박사업, 그리고 학교와 병원도 운영했다. 그리고 정유, 유리생산, 설탕정제, 그리고 강철생산에도 개입하여 정말 (동아시아에 한정해서) 문어발식 사업확장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만철은 정말 이윤이 많이 남는(profitable) 기업이었다. 기업의 자산가치는 1908년에 1억 6천만 엔이었는데 1930년에는 10억 엔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윤율은 20~30%에 달했다고 한다. 규모로 따지면 일본의 가장 거대한 회사였으며 이윤측면에서도 가장 수익성 좋은 기업이었다.
1920년대 만철의 수익은 연간 2억180만 엔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정부 연간 세입의 1/4에 달하는 규모였다.
만철은 일본인들에게 도전과 모험의 상징이자 동시에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는 수단이었다. 1930년, 만철에 근무했던 일본인은 21,824명에 달했고 그들은 대부분 화이트 컬러 전문직, 관리자였다. 만철에서 그들은 괜찮은 보수를 받으며 만주 현지에서 귀족처럼 지낼 수 있었고 중국인 하인을 부릴 수 있었다. 일본 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삶의 질을 누렸다.
만철은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영국의 동인도회사처럼 하나의 거대한 국가 같은 기능(행정, 군사, 외교 등)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가장 큰 목적은 '이윤'인 그러한 존재로 거듭나길 원했다. 이런 맥락에서 만철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이면서 <제국일본>의 '창'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철이 운송, 철강, 숙식, 의료, 광산 등의 산업에 진출하면서도 굉장히 신경 썼던 것은 바로 <싱크탱크>이다. 민간기업이면서 독자적인 싱크탱크를 설립하여 '지배'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 힘썼다. 왜냐하면 만주는 본국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있었으며 러시아, 중국 등과 조우한 상태에 놓여있는 상당히 위험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싱크탱크의 이름은 <만철조사부>였다.
따라서 만철은 자원탐사, 산업개발, 경제, 안보 등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두뇌집단이 필요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만철은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연구자들을 대거 채용했는데, 만철은 중국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구자들은 중국의 사회경제적 상황으로 미루어봤을 때 중국 공산당의 발흥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했다.
일례로 오가미 스에히로 등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도 <만철조사부>에 일하게 되었고 만철은 괴뢰 만주국을 실험장으로 삼아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경제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 만주국에서 일했던 기시 노부스케 (후일 일본의 수상)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만주국 장교로 복무했던 박정희이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만철조사부>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야 하는데, 영어로 Manchuria Railway Company Research Department라고 불리는 이 조직은 정말 동아시아 싱크탱크로서는 정말 대단한 규모였기 때문이다.
이 싱크탱크는 일본의 수많은 신진 학자들을 끌어들였고 중국과 동아시아에 대한 연구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조사부의 본부는 만철의 본사가 있던 대련에 있었지만 나중에는 선양, 하얼빈, 상하이, 난징, 뉴욕 그리고 파리에도 지부를 두게 되었다. 그리고 6,200건에 달하는 분석 보고서를 생산했다.
만철의 영향 아래 만주국은 동아시아에서 최첨단, 최신의 정책과 건축기술 도시계획 등을 입안했다. 흰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쉽듯이 만철은 만주 자체를 자기들의 거대한 실험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철은 동아시아의 많은 젊은 학자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 좌파, 우파를 가리지 않고 젊고 다양한 시각을 모두 수용하는 유일한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창시한 동주 이용희 교수도 1940년부터 45년까지 만주에 있을 때 큰 지적 성장을 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는 1943년 중국 대련(만철의 본사가 있는 곳)에서 E.H. Carr의 Twenty Years’Crisis(1939) 와 W. Sharp and G. Kirk, Contemporary International Politics(1940)를 사서 읽고 구미의 국제정치에 대해 공부했다. 그는 원래 처음에는 만주국 어용 기구였던 협화회에서 근무했으나, 이내 그만두었고 만주 봉천/하얼빈과 원산(현재 북한)을 잇는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봉천에 있던 만철 도서관을 애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생활도 잠시, 이내 만철조사부에서 근무하면서 원 없이 많은 책을 읽고 식민지 치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인류학/사회과학/정치학 서적, 그리스-로마 고전 등을 탐독하면서 조선과 국제정치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해방 후 1948년 무렵 이용희는 미소대립과 냉전과 우발적 전쟁 가능성을 예측하면서, 극동지역에서 미국이 소련에 대한 포위전을 전개하고 소련은 이에 응수하는 방식으로 맞서고 있다고 진단했다. 또 1949년에 이용희는 미국 입장에서 3가지 선택지가 있는데 1안은 장개석에 대한 지원을 대폭 증가하는 것이요, 2안은 일본을 군사기지화하고 재무장시키는 것이요, 그리고 3안은 신중국(모택동)을 인정하고 이를 이용하여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용희 개인은 3안이 현실적이라고 보았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결국 2안이 현실화되었고, 그리고 3안은 1970년대에 현실화되었다.
만철,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탄생한 기업이지만,
그 영향은 동북아 전체에 아주 깊은 영향을 끼친, 보다 널리 알려져야 하는 기업이 아닌가 싶다.
PS. 동주 이용희에 대해서는 Chang Joon OK 님께서 훌륭한 연구를 진행하고 계신... (쿨럭)



48정승국, Paul Ma and 46 others

Joseph Lee

1930년대 만주는 조선땅에서 더 이상 살기 어려워 그나마 선진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 땅을 벗어나 새로운 땅으로 가 보자 하는 생각으로 많이 가지 않않을까요? 그 때는 80년대 보다는 출입국이 자유 스러웠을테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서울 올림픽이 끝난 후 1989년부터 해외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그런 심정이 아니었겠나 합니다.
뭐..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해외에서 생활 하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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