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6

알라딘: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 조선의 운명을 바꾼 김옥균 암살사건

알라딘: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 내가 만약 영화계에 일하거나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다면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는 전봉준과 함께 꼭 한번 다루지 않았을까 싶다.
"김옥균의 암살자로 유명한 홍종우는 한국의 여권을 소지하고 최초로 프랑스에 간 한국인이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권을 발급 받아서 1890년 12월 프랑스에 도착하여 1893년 7월 프랑스를 떠날 때까지 2년 반 동안 프랑스에 체류하였다. 프랑스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기메박물관의 직원으로 일하기도하고 ‘여행가들 모임’ 등 모임에 참가도 하면서 한국의 실정, 역사, 문화 등을 소개하였다.
한편 그는 한국의 고전을 번역하여 내놓음으로써 한국을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즉 그는 프랑스 소설가 로니 J. H. Rosny를 도와 처음으로 『춘향전』의 프랑스어 번역본이 출간될 수 있게 하였으며, 또한 스스로 번역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홍종우에 의해서 번역된 한국의 고전소설 『枯木生花』가 『기메박물관 연보-대중소설 총서』8권에 실려있다. 그리고 『기메박물관 연보』26호에는 한국인의 점성술을 다룬 『直星行年便覽』을 프랑스 친구인 동양학자 앙리 슈발리에 Henri Chevalier와 함께 번역한 것이 실려있다.
그와 교분이 있던 동양전문가 펠릭스 레가메 Félix Regamey는 홍종우가 파리를 떠난 뒤에 그의 파리에서의 생활 등을 ‘어떤 정치적 자객’이라는 제목으로 기술하여 동양학 학술지 『通報』에 발표하였다. "
- 박병선, 한국근대사자료집성 > 韓佛關係資料 > 해제, 2001
"남양홍씨 남양군파 32세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치섭(洪致燮)이고, 아버지는 의정부참찬에 추증된 홍재원(洪在源)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의 외아들로 경기도 안산군에서 태어났으며, 전국을 떠돌다 고금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홍종우는 어린시절에 고금도에서 불우하게 지내왔다.'라고 기록돼 있다. 한때 그는 '고금도에서 쑥물을 버리는것도 아까워했을만큼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왔다.'라고 대한제국 비서원일기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또, 제주도에서 화전민과 함께 살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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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우가 김옥균에게 접근한 방법은 간단했다. 먼저 청의 외교부 협조를 받아, 당시 이홍장 휘하의 조선 주재 청국 공사 원세개(위안 스카이)가 '동양 평화를 함께 논의하고 싶다'며 김옥균을 청으로 초청한다는 서한을 김옥균에게만 띄우게 한다. 그러면서 홍종우를 동반자로 추천했다. 홍종우는 김옥균의 호감을 미리 사두고 있었다...김옥균은 홍종우를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생각했다....왜 김옥균을 제거했는지 청국 측 경찰서에 변론하기를, 첫 번째 이유로 공무라고 밝혔다. 김옥균 암살은 첫째로, 공무다. 어명을 받든 것이다.두 번째 이유로는 김옥균이 동양 평화에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것이었다....곧 이어 청나라관원 경찰에 체포, 구금되는 형식적인 모양새를 취한 후, 미리 홍종우의 신상 처리를 청과 조율하고 있던 조선의 '석방 교섭'으로 풀려나,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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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은 김옥균 암살이 국가의 경사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홍종우가 돌아오자 고종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홍종우는 단번에 실력파 황실 관료로 부상한다. 그로서는 프랑스에서 외롭게 공부하며 조선을 근대 국가로 발돋움시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실행에 옮길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상하이에서 암살 사건이 일어난 것은 김옥균을 '친일'로 간주했던 청이 그의 암살을 도운 결과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김옥균은 일본인이나 다름없고, 일본 여관에서 사건이 일어난 만큼 사건 관할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 해가며, 암살을 '방치'한 청국 정부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사실상 김옥균 암살의 공모자나 다름 없던 청은 홍종우의 신원을 확인한 다음 조선 정부의 요구 대로 홍종우와 김옥균 시신을 조선에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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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우는 근왕파의 한사람으로 활동하며 황제권을 절대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고 하원의 설립을 통해 제한적 입헌군주제를 모색했으나 시대착오적이고 외세의존적 공화제 계획을 사전에 차단 분쇄하였으며 만민공동회와 친일적인 독립협회의 활동을 감시하였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주요 법규들을 모아 '법규류편 속일'을 편찬, 발간하였다. 이는 주요 법규에 대한 안내와 법규 해설집으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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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황국협회의 주요한 인물이었다는점 때문에 수구파인사로 평가받고 있지만, 실제로 그는 외세의존적인 개화파와는 달리 근황주의를 강조하는 자주적 개화파 인사였다. 그는 수차례 '외국군대 철수'와 '방곡령 실시', '상공업 육성책', '외국공사의 내정간섭 반대' 등을 주장하였고, 대한제국 황제 고종한테 이러한 주장의 내용인 상소를 11 차례 올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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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00년대 되면서 대한제국내에서는 일본제국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가자, 홍종우는 점차 한직으로 밀려나게 된다. 일본제국의 시각에서는 '홍종우는 김옥균을 암살한 자'라고 낙인찍혔기 때문에 결코 홍종우를 놔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03년(광무 8년)에 친일 관리세력들이 본격적으로 득세를 하면서 홍종우는 주요 관직에서 밀려나 제주도 목사로 좌천되었고, 이 마저도 얼마 못 가 결국 제주도 목사 관직마저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그가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한 장본인이라는 것이 조선 사회에 알려지면서 그는 살인자라는 비난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그는 태연히 자신의 거사를 정의와 애국심에 의한 것이라고 항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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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홍종우의 말년에 관한 기록은 알려진바가 없다. 일설에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어렵게 살아갔다고 하지만 자세한 행적이나 기록이 없다. 홍종우는 일본제국의 대한제국 병합 이후인 1913년에 죽었다. 이도 확인된 바는 없으며 1905년 이후의 행적은 제한적으로 일본 관헌의 기록에 남아 있느나 그도 믿을 바는 안된다. 오히려 1906년 이용익의 유럽행에 동행하여 1906년에 예정됐던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용익의 여권이 프랑스 영사관에서 발행한 프랑스 여권이었고 1907년 이용익의 사망 이후에 홍종우의 행적이 제한적이나마 파악된다. 1909년 블라디보스톡으로의 이주를 계획했으나 좌절된 것으로 보인다.
-조재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2005,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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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 조선의 운명을 바꾼 김옥균 암살사건
조재곤 (지은이)푸른역사200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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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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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쪽
책소개
사지가 잘린 채 양화진 백사장에 널부러져 있는 시체 사진. 사진 속 시체의 주인공은 바로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이다. 개화파의 주역 김옥균은 이렇게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역적질'을 두려워하지 않은 김옥균의 몸에 세 발의 탄환을 박은 장본인은, 우리에게 너무나 낯선 존재, 홍종우다.

홍종우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자 춘향전과 심청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문학인, 사람을 미혹시킬 만큼 프랑스 음식 솜씨가 뛰어난 요리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제국 선포를 외친 정치가, 그리고 김옥균 암살자이다. 그는 왜 김옥균을 쏘았는가? 그가 꿈꾼 대한제국의 미래는 무엇이었는가?

저자는 김옥균 암살 사건이 개인적 원한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암살의 배경에는 대한제국 시기를 전후한 국내 각 세력의 역학관계는 물론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 청국, 러시아 등 열강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음 세 가지를 밝힌다. 첫째, 베일에 싸인 인물, 암살자 홍종우를 재조명한다. 여기에는 홍종우가 김옥균을 죽인 이유도 포함된다. 둘째, 당시 조선, 일본, 중국(청)의 역학관계 속에서 김옥균 암살사건이 어떻게 이용되고, 그것이 삼국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한다. 셋째, 세계주의로 표상되는 김옥균의 사상과 국제주의로 대표되는 홍종우의 사싱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을 때, 그 역사적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진지하게 돌이켜본다.

책은 김옥균 암살사건의 전모와 내막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저자와 김옥균, 김옥균과 홍종우, 저자와 홍종우의 가상 대담을 실었다. 또한 부록으로 홍종우의 1차 상소문과 홍종우에 관한 자료를 수록했다. 사진과 그림 자료 또한 풍부하게 실려 있다.


목차


연보

1. 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
2. 숙명의 라이벌, 그 엇갈린 시작
3.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4. 홍종우, 프랑스를 배우다
5. 만남, 그리고 암살

저자와 김옥균의 가상 대담
김옥균과 홍종우의 가상 대담 1

6.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7. 대한제국과 '홍길동' 프로젝트
8. 열강의 상인은 돌아가라
9. 향기로운 봄날은 간다

저자와 홍종우의 가상 대담
김옥균과 홍종우의 가상 대담 2

부록
참고문헌
주석
찾아보기
접기


책속에서



홍종우의 말에 따르면 그가 김옥균을 살해한 것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체로 지금까지 알려진 암살 이유는 특별한 주관도 없는 '무뇌아' 혹은 '흉한' 홍종우가 개인의 입신영달을 위해 도모하던 중 조선 정부의 시주를 받아 김옥균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그 공으로 출세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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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실패는 예견되었다. 정변의 주역들과 일정 부분 이해를 같이 했던 윤웅렬은 갑신정변의 실패 요인을 다음의 여섯 가지로 꼽았다. 윤웅렬은 윤치호의 아버지로, 군부대신 등 고위 관료를 역임한 인물이다. 윤웅렬의 평가는 1과 5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객관적인 입장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1. 군주를 위협한 점
2. 외세를 믿고 의지한 점
3. 민심이 따르지 않은 점
4. 청국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한 점
5. 왕과 왕비의 의향을 어긴 점
6. 당붕黨朋의 도움 없이 일을 조급하게 처리한 점-.쪽 접기 - 보슬비

갑신정변의 행동대장으로 정권의 핵심 인사 살해에 앞장섰던 서재필은 후일의 회고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립당의 계획은 부실한 것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제일 큰 패인은 그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이었다." 그는 민중의 원동력과 잠재력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매도했다. 정변은 이들의 지지가 전혀 없이, 즉 국민적 동의 없이 진행된 것이다. 또 다른 핵심 행동대원이었던 이규완도 개화당 지도자들의 나이가 적었던 점, 민중이 무지하여 정변에 호응하지 않고 도리어 '사대당'의 세력을 따르는 사람이 많았던 점, '사대당'의 배후에 있는 청국군이 강했던 반면 일본군의 세력이 약했던 점 등을 들어 정변의 실패를 미리 짐작했다고 술회했다. 김옥균도 후일 "또 신들이 당시 외국의 힘을 빌렸다고 평하는 자가 있사오나 이것은 당시 안팎의 사정으로 보아 실로 만부득이한 데서 나왔다는 것을 폐하께서도 깊이 아시는 바가 아니옵니까"라고 하여 정변의 미숙성을 일부 시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정변을 합리화하기 위한 그의 변명에 불과했다.-.쪽 접기 - 보슬비
홍종우는 기메박물관에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直星行年便覽》 등 한국의 고전과 점성술 책, 일본과 중국의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했다. 그의 도움을 받은 보엑스Boax 형제 중 형이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1892년 파리의 발르와 광장 3번지 당뛰서점에서 《향기로운 봄 Printemps Parfume》이란 제목으로 간행한다. 삽화는 메롤드와 미티스가 그렸다. 삽화에는 춘향과 이도령, 방자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춘향은 전형적인 서양 여자풍, 이도령은 한국풍, 방자는 고깔모자를 쓰고 있어 상상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프랑스어로 번역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1999년에 재출간되었다.-.쪽 접기 - 보슬비
당시 대다수 유학생들은 국가나 세도가의 절대적 지원을 받으며 서구 사상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선진문화를 맹목적으로 경탄하고 추종한 나머지 그것을 조선의 현실과 제대로 접목시키지는 못했다. 조선의 재래 가치를 무시하고 선진문화를 수용하는 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 결과 일본으로 간 많은 유학생들이 러일전쟁 후 민중의 변혁과 반일운동을 폄하했다. 심지어는 그것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으며, 통감부와 총독부의 핵심 인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홍종우는 이들과 생각을 달리했다. 그는 고학으로 서양 문화를 배웠고, 이를 조선의 현실에 적용해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려는 혁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홍종우는 서구화를 일차적 과제로 삼았지만, 그것이 조선의 전통문화와 단순 대치될 순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문제 해결의 모티브를 조선 구래의, 즉 동양적 가치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노자, 공자의 사상에 대해 파리 시절 친구였던 야생트 르와종에게 보낸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속을 초월한 문제들을 평가한다면, 아마 당신은 지나치게 가톨릭적이고, 나는 또 지나치게 이교도적인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당신은 가톨릭보다 더 높은 것이나, 이에 비길 수 있을 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의 낮선 교리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공자에게서 당신들의 어떠한 교리에서보다 지혜를 더욱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거의 초인간적인 지혜를 가진 노자Lao-Tseu는 내가 어렴풋이 예감하거나 꿈꾼 사물들보다 더 높은 곳으로 나의 생각을 이끌어 주어, 마침내 나의 사고는 영원 속에 젖어듭니다.-.쪽 접기 - 보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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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조재곤 (지은이)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를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연구교수로 있다.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 근대 경제와 정치·사회 변화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저

『한국근대사회와 보부상』(혜안, 2001), 『보부상: 근대 격변기의 상인』(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푸른역사, 2005), 『해천추범: 1896년 민영환의 세계일주』(편역, 책과함께, 2007), 『민영환: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결』(역사공간, 2014), 『전쟁과 인간 그리고 ‘평화’: 러일전쟁과 한국사회』(일조각, 2017), 『일제 식민지기 경성상공회의소 월보기사해설』(공저, 온샘, 2018) 등이 있고, 「청일전쟁의 새로운 이해: 한국 내에서 전개된 상황을 중심으로」(2015), 「1894년 일본군의 조선왕궁(경복궁) 점령에 대한 재검토」(2016), 「동학농민전쟁과 전운영(轉運營)」(2018), 「갑오군정실기를 통해 본 새로운 동학농민군의 활동」(2019) 등 접기


최근작 : <고종과 대한제국>,<전쟁과 인간 그리고 '평화'>,<민영환> … 총 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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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Blog
동아일보 기획, 흥미진진한 역사 읽기 30선 l 2006-07-04

동아일보가 ‘흥미진진한 역사 읽기 30선’ 기획연재를 시작합니다. 독서평론가 역사학자 문인 등 각계 30명에게서 추천받은 100여 권의 책 가운데 30권을 선정해 소개합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 교양서 및 역사소설을 위주로 골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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