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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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농민전쟁의 시작과 함께 퍼진 전금준의 분문 | |
각종 표기 | |
한글 : | 동학농민운동 |
한자 : | 동학농민운동 |
발음 : | 통한논 미눈동 |
일본어 읽기: | 도쿠 쿠노 우민 돈도 |
로마자 : | 동학 농민 둥동 |
영어 표기: | 동해피아산 혁명 |
갑오 농민전쟁 은 1894 년 ( 갑오 )에 이씨 조선 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폭동, 내란이다(1894년 1월 11일 - 1895년 3월 29일). 관여자에게 동학 의 신자가 있었기 때문에 동학당 의 난 (도가쿠토노란)이라고도 불린다. 동학당은 곤궁한 조선농민을 주체로 하는 일파로, 정부에 대한 경제개혁 요구로부터 정치운동으로 발전해, 폭동은 전토에 파급했다 [1] . 또한 대한민국 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나 동학농민혁명이라 불리고 있다. 이 폭동의 처리를 둘러싸고 대일본 제국 과 청국 의 대립이 격화되어 닛신 전쟁 으로 발전한다. 또 대일본제국은 청조세력 강화를 두려워함과 동시에 조선에 출병했다. 이때 천진조약에 근거한 움직임도 닛신전쟁의 발단으로 이어진다.
제1차봉기 [ 편집 ]
1860년대 부터 조선은 변혁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에 1880년대 이후 국내의 동란기를 넘은 일본 과 미국 , 서구 의 열강 이 더해져 다음 시대를 향한 모색 속에서 혼란의 시기를 맞이했다.
민씨 정권의 중세 정책, 양반 들 사이의 뇌물 과 부정 수탈의 횡행, 그리고 1876년 의 일조 수호 조규 (강도 조약)를 비롯한 민씨 정권의 개국 정책에 의해 외국 자본이 진출해 오는 등 , 당시 조선 민중의 생활은 괴로운 상황이었다. 조선 정부의 폭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가 조선 국내에 널리 전창되고 있었다.
금통 미술 천인혈 금통에 들어간 미술은 천명의 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玉椀佳魚萬姓膏 玉椀에있는 맛있는 생선은 인민의 기름으로
가부키 타카나시 아야코
만든 촛물 낙락시 민 눈물 촛불에서 밀랍이 떨어질 때, 사람들의 눈물도 드립
조선의 개혁을 둘러보면 임오변 이나 갑신정변 과 같은 정변이 있었지만 모두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이런 가운데 정권을 갖고 있던 민씨는 스스로 손으로 개혁을 할 수 없었다 [2] . 이 붙임은 모두 민중에게 돌이켜져 민중의 불만은 높아져, 1883년 부터 각지에서 농민의 봉기(민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894년 에 전라도 고후군 에서, 군수의 조조갑 이 수세의 횡령을 일으켜, 그 횡령에 대해 전라도 관찰사에 애원을 실시한 농민이 반대로 체포되어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3] . 이 사건에 의해 같은 해 봄에 최제우 의 동생으로 동학당 의 2대째 교조가 된 최시형 이 무력봉기하여 갑오농민전쟁으로 발전했다. 반란군은 전금준 이라는 지장을 얻어 5월에는 전주 일대를 지배하에 두었다.
전라도 고후군의 민란도 당초는 다른 민란과 바뀌는 곳은 없고, 자신들의 생활을 지키려고 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민란의 지도자로 성장한 전금준 을 포함하여 농민의 대부분이 동학에 귀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동학의 신자를 통해 민란이 전국적인 내란으로 발전해 간다.
전호준은 하층의 장교였다. 그러나 17세기 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평민교육에서 전금준과 같은 비 양반 지식인이 형성되었다. 이 전금준이 발한 호소문이 동학신자의 손으로 전도에 뿌려져 호소에 응한 농민으로 수만의 군세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전라도에 배치되어 있던 지방군과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을 각지에서 깨고 5월 말에는 도도 전주를 점령하기까지 이르렀다.
이에 놀란 민씨 정권은 5월 30일 청국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6월 2일 조선 출병을 결정하고 같은 달 4일 청국에 즉각 철병을 요구했으나 거부된다 [1] . 천진조약 에 따라 닛신 서로 조선출병을 통고. 일본은 6월 6일 출병을 발동해 청국군의 조선철병을 다시 요구, 다음 7일 청주한국공사가 청국의 속령보호를 위한 파병이라고 그 정당성을 주장하며 8일에 청국군이 조선아산에 상륙, 12일 일본군이 재류방인 보호를 명목으로 인천 에 상륙, 7월 16일에는 한성 근교에 포진 하여 청국군과 대치하게 됐다 . 이 상황에 당황한 민씨 정권은 농민의 제안을 바탕으로 전주화약 을 작성하고 체결했다고 한다 [4] (단 화약을 맺은 1차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화약으로 기존 지방정부가 부활했지만 동시에 농민측의 주목역 ‘집강소’가 마련돼 전라도에 농민권력에 의한 자치가 확립되었다.
닛신 전쟁 [ 편집 ]
반란이 수렴하고 조선은 닛신 양군의 철병을 신청했지만 양국은 받아들이지 않고 대치를 계속했다. 일본은 청에 대해 조선의 독립원조와 내정개혁을 공동으로 행하는 것을 제안해, 영국도 조정안을 청에 내놓지만, 청은 「일본의 철병이 조건」으로서 거부 [5] [6] .
일본은 조선에 대해 ‘조선의 자주독립을 침해’하는 청군의 철수와 청·조간 조약폐기(종주·번속관계 해소)에 대해 3일 이내에 응답하도록 신청했다. 이 신청에는 조선이 청군을 물리칠 수 없다면 일본이 대신하여 구축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7] . 이에 조선정부는 “개혁은 자주적으로 한다” “난이 다스렸기 때문에 닛신 양군의 철병을 요청”이라고 응답했다.
7월 23일 오전 2시, 일본군 혼성 제9여단(보병 4개 대대 등)이 교외의 주둔지 용산 에서 한성 으로 향해, 「[민간] 사람 오시테」전신선을 절단해, 보병 1개 대대가 조선 왕궁을 공격하고 점령했다. 일본은 국왕 고종 을 손에 넣고 대원군 을 다시 맡아 신정권을 수립시켰다. 그리고 신정권에 아산의 청군소토를 일본에 의뢰시켰다. 그리고 25일에 토 시마 오키해전 , 29일에 성환의 싸움 이 행해져 교전 상태가 된다. 31일 청국정부가 주북경 일본공사 고무라 슈타 로에게 국교단절을 통고 [1] , 8월 1일 닛신 양국이 선전 포고 를 했고 닛신 전쟁 이 발발했다.
제2차 봉기 [ 편집 ]
전호준 (전호준, 정봉준)은 닛신 양국이 군을 파견해 곧 7월에는 이미 제2차 봉기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평화적인 해결을 바라는 동학의 상층부의 설득에 시간이 걸렸고, 봉기한 것은 10월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이번에는 이씨 조선의 신정권과 일본군 을 상을 일으켰을 때에는 일청전쟁은 이미 대세를 결코 하고 있었다. 1894년 11 월 말 충청도 공주 의 우금봉(우금치, 우금치) 때문에 농민군과 대일본 제국군 이 충돌하지만 근대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군에 전금준 등은 굳이 패배한다. 일본군 의 압도적 승리로 끝난 이 전투를 우금봉의 싸움 이라고 한다. 우금봉으로 일본 에 패배한 농민군 등은 전라도로 도망쳤다. 전금준과 동지들은 준창으로 재기의 기회를 보고 있었지만, 1895 년 초 에 잡혀 한성(칸죠, 현재 서울)에서 처형됐다. 이노우에 카오루 일본 공사는 전 금준의 인격에 공감하고, 이씨 조선 정부에 처형 하지 않도록 요청하고 있었지만, 이씨 조선 정부는 이노우에 카오루 (이노우에 카오루)가 귀국하고 있는 동안 에 처형을 집행했다. [ 요출전 ]
전금준이 처형돼 얼마 지나지 않아 전금준을 비밀리에 조롱하고 다음 노래가 전라도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 새, 새, 파란 새
- 녹두의 하타에 내려 가지 마라.
- 녹두꽃이 홀로홀로 흩어지면
- 청포 판매가 울고 간다
녹두는 전호준으로 청포는 녹두로 만든 과자, 청포 판매는 가난한 민중을 나타내고 있었다.
덧붙여 대원군은 민씨 정권에 의해 투옥되고 있던 동학의 간부 2명을 석방 해, 1명을 내무 衙門 주사에 1명을 의정부 주사로 채용해, 충청도에 있는 명사 호족에게 밀사를 보내 동 학의 선동을 명령했다. 또한 밀사는 충청도의 동학간부 미준, 서장옥에, 전라도의 동학간부 전호준, 송희옥을 각각 만나 동도의 소집을 촉구하고 경상도에서는 직접 동도의 규합 를 불렀다. 호소에 의해 10, 11월에 잇달아 봉기한다. 그리고 대원군은 동학에는 수십만으로 대거하여 한성에 오라고 명령하고 평양의 청군과 함께 남북에서 끼워 쏘아 일본인을 구축하는 책을 실행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평양 공략에 의해 얻은 다수의 서류로부터 발견되었다. (동학당 사건 니 부회 심노 顛末具報 메이지 28년 9월 20일의 별지 제2호)
그 후도 대원군과 이부진의 선동교사 편지를 발견하고, 또 나중에 체포 된 부하들의 진술에 의해 발각되었고, 일본 공사의 추궁에 의해 국왕, 대원군, 이부진이 사죄하고 인정했다. 조선국왕급제대신 니내정개혁 ㈲권고노건/28 1895〔메이지 28〕년 4월 8일부터 메이지 28년 6월 15일」p23). 이처럼 제2차봉기는 순수한 반란이 아니라 일본을 방어하지 않는 대원군의 의혹도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익명 지도자의 유골 [ 편집 ]
1906년 전라남도 진도군 에서 처형된 무명의 반란 지도자로 보이는 유골이 홋카이도 제국대학 에 반출. '한국동학당의 두령'으로 기록된 두개골은 오랫동안 대학에서 보존된 뒤 반환운동을 통해 1995년 한국으로 돌아와 전주역사박물관 에 수장됐다. 2019년 시점에서는 동학혁명기념 녹두관 부지 내에 매장할 계획이 세워지고 있다 [8] .
각주 [ 편집 ]
- ↑ a b c d 『대만의 역사:일본 통치 시대의 대만:1895-1945/46년:50년의 궤적』스에코기야, 치라 출판, 2007/11/01, p669
- ↑ 朴垠鳳『알기 쉬운 조선사회의 역사』
- ^ 시나 근대 백년사 카미 마키 사노 袈裟美 1939년
- ↑ 『신판 세계 각국사 2 조선사』야마가와 출판사 , 2000년, 242페이지. ISBN 978-4634413207 .
- ^ 리쿠오쿠 무네히카 『신정 깡패록 닛신 전쟁 외교 비록』 나카츠카 아키라 교주, 이와나미 서점 <신정 와이드판 이와나미 문고 255>, 1994년.
- ^ 사사키 타카시 『메이지인의 역량』 코단샤〈고단샤 학술 문고 1921:일본의 역사 21〉, 2010년
- ^ 오카모토 타카시 『세계 안의 일청한 관계사 교인과 속국, 자주와 독립』 코단샤〈고단샤 선서 메티에〉, 2008년. 152쪽.
- ^ “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의 유골을 둘러싼 소송의 이유란? ”. 한겨레 (2019년 5월 24일). 2019년 5월 24일 열람.
참고 문헌 [ 편집 ]
- “조선사 신서 동양사 10” 카지무라 히데키 저, 코단샤 현대 신서
- 「교양인의 일본사(4)
- 「크로닉 세계 전사」코단샤
- 「재팬·크로닉 일본 전사」코단샤
- 「조선 지역으로부터의 세계사 1」다케다 유키오・미야지마 히로시・마부치 사다리 저, 아사히 신문사
- '금화 속 조선과 중국' 이와나미 서점
- 「일본 근현대사 3 닛신·일러 전쟁」 이와나미 서점
- 나카츠카 아키라, 이노우에 카츠요시, 마키노스케 “동학 농민 전쟁과 일본” 고분켄, 2013년 ISBN 978-4-87498-516-8
관련 항목 [ 편집 ]
- 이씨 조선
- 독립협회
- 이용구
- 우치다 료헤이
-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 토지는 병을 삼키지 못하고 국사는 개혁 할 수 있습니다.
- 녹두꽃 - 이 투쟁을 바탕으로 한 2019년 TV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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