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5

남과 북의 ‘최고존엄’ / 이제훈 : 칼럼

[한겨레 프리즘] 남과 북의 ‘최고존엄’ / 이제훈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한겨레 프리즘] 남과 북의 ‘최고존엄’ / 이제훈

등록 :2016-09-25

이제훈
통일외교팀장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쌍생아다. 식민 강점과 전쟁과 분단이 빚어낸. 남과 북은 유엔에 따로 가입한 주권국가이되, 서로 ‘외국’이 아니다.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남북기본합의서 전문)로 여긴다. ‘따로 또 같이’, 하나가 아니되 둘도 아니다.

요즘 남과 북이 사이가 나쁘다. 북은 박근혜 대통령한테 “무지무능아, 청와대의 미친 노파”(20일 <노동신문> 5면) 따위의 천박한 욕설을 퍼붓고, 박 대통령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정신상태가 통제불능”(9일 안보상황 점검회의)이라며 광인 취급 한다.
그리고 8월29~31일 “두만강 연안에 해방 후 기상관측 이래 처음 보는 돌풍이 불고 무더기비가 쏟아져”(10일 노동당 중앙위 호소문), 함경북도 북부 주민이 사상 최악의 홍수 피해를 입었다. 북한에 상주하는 유엔 기구 6곳을 포함해 인도지원 기구 13곳은 16일 현지조사 보고서를 내고 국제사회에 긴급 지원을 호소했다.

김정은 위원장도 “200일 전투의 주타격 방향을 북부피해복구전투에로 전환”(10일 호소문)시켰다. 하지만 5차 핵실험 뒤에야 ‘호소문’을 발표하는 ‘정략적 늑장’을 부린데다, 그 핵심이 “경애하는 원수님(김정은)께서 하라고 하신 대로만 하면 뚫지 못할 난관이 없다. … 전화위복의 기적적 승리를 쟁취하자”(12일 <노동신문> 1면 사설)는 ‘정신승리법’이다. ‘최고존엄’만 따르면 다 된다.

북쪽은 유엔기구의 조사를 돕는 방식으로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하면서도, 남쪽엔 지원을 요청하지 않고 있다. 남쪽 당국도 평등하게 존엄한 “인류 가족”(세계인권선언 전문)인 북녘 동포의 고통에 모르쇠 한다. ‘지질한 쌍생아’다.

정부 방침 뒤엔 박 대통령이 있다. 추석 연휴 기간 북쪽의 수해 사실이 전해지고 방송 뉴스에 ‘정부 대북 지원 검토’란 자막이 뜨자, “청와대가 발칵 뒤집혔다”(정부 관계자). “(지원을 하면) 그 공이 독재자한테 다 돌아간다”는 통일부 대변인의 23일 ‘지원 거부’ 회견은, 국제 인도주의 원칙도 모르는 ‘최고존엄’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북한과 적대 관계인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과 진지한 대화 의지가 있다’는데도, ‘제재 다걸기’에 목을 매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 뒤에도 “지금 대화하는 것은 북한에 시간벌기만 되는 것”(12일 여야 대표 청와대 간담회)이라는 ‘최고존엄’의 교시가 버티고 있다. 윤 장관은 20일 뉴욕 ‘난민정상회의’에서 난민 문제 해결에 “3년간 2억3천만달러 이상”을 지원하겠다 약속했지만, 북녘 동포의 인도적 재앙은 외면했다. 민망한 이중 행태다.

이런 ‘혼연일체’ 뒤엔, 이견을 혐오하는 박 대통령이 있다. 대통령한테 ‘이견’은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22일 수석비서관회의)일 뿐이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며 한시도 사사로운 일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은”(24일 장차관 워크숍) 대통령의 ‘고독한 결단’에 딴지를 걸면?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나 이석수 특별감찰관처럼 목이 잘린다. ‘똑똑한’(?) 공무원들이 모를 리 없다. ‘최고존엄’과 ‘간신’은 상호의존한다.

정치학자 전인권은 박정희를 ‘민주주의가 뭔지 모르고 관계도 없다’는 뜻에서, “몰(沒)민주주의자”(<박정희 평전>)라고 규정했다. 니키타 흐루쇼프 옛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스탈린의 “철저한 무책임성과 타인에 대한 존경의 완벽한 결여”(존 루이스 개디스, <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를 비판했다. 어떤 ‘최고존엄’들을 연상케 하는 지적이다.
nomad@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2615.html#csidx2b617050c112ca0bed4ce1baefd2393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