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동원이란 국가총동원법(1938.4 공포)에 의거해 정책적·조직적·집단적·폭력적으로 동원된 각종 산업의 노무자를 의미한다. 동원된 지역은 한반도·일본·중국 관내 및 만주·남사할린·동남아시아·태평양(남양군도)이고, 직종별로 보면, 군수공장·군공사장·토목건축현장·석탄광산·금속광산·항만운수관계·집단 농장이다. 이 가운데 직종별로는 석탄광산이, 지역은 한반도와 일본이 다수를 차지했다.
일본이 실시한 노무동원은
- 할당모집(1938년 5월~1945년),
- 국민징용(1939년 7월~ 1945년),
- 관알선(1942년 2월~1945년) 등 세 종류로 구분된다.
세 종류는 모두 조선인을 고용하고자 하는 고용주(일본 기업)가 신청한 인원수를 일본정부가 조정·배당하고, 조선총독부와 조정을 거쳐 확정하는 방식으로써 국가권력이 강제력을 발동하여 동원하고 수탈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할당 모집(1938년 5월~1945년 4월까지)은
조선총독부가 노무자의 모집지역과 인원을 결정해 인허하고, 해당 지역의 행정기관(군청, 경찰서, 소방서 등)이 기업 모집담당자와 함께 노무자를 송출하는 방식으로 지역과 지역별 동원인원을 할당한다는 의미에서 ‘할당모집’이라 칭한다. 수송책임을 행정기관과 해당 기업이 함께 담당한다.
국민징용(1939년 10월~1945년 4월까지)은
일본정부가 국민징용령 및 국민직업능력신고령에 의거하여 등록한 자 중에서 선정하여 징용영장을 발령·교부하여 송출하는 방식이다. 일본정부가 선정에서 수송은 물론, 식량 조달과 인력 관리 등을 직접 담당하는 체제로써 수송책임은 행정기관이 전담했다. 초기에는 기술직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운용되었으나 1944년(국민징용령 3차 개정) 이후에는 일반 노무자로 확대되었다.
관알선(1942년 2월~1945년 4월까지)은
조선총독부가 작성·결정한 ‘조선인내지 이입알선요강’에 의해 실시된 동원 방식으로써 인력에 대한 관리·책임 소재는 할당모집과 국민징용의 중간 단계에 놓인 과도기적 체제이다. 조선인을 고용하고자 하는 사업자 혹은 대행단체가 신청을 하면 조선총독부가 모집지역, 인원을 허가·결정하고 조선총독부 및 지방행정기관과 경찰관헌, 조선노무협회, 직업소개소 등이 협력하여 노무자를 선정하여 송출하는 방식을 취했으므로 수송책임도 행정기관, 기업, 조선노무협회 등이 공동으로 담당했다.
한반도와 남양군도 등지와 달리 일본지역으로 노무자 송출은 1939년 7월 28일, 내무성과 후생성이 발표한 통첩 「조선인 노무자 내지(內地) 이주에 관한 건」을 계기로 실시되었으며, 세 가지 동원방식을 시행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각각 노무동원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부서를 설치했다.
중앙 조직은 조선총독부 소속 부서 가운데 노무 동원 전반에 관한 업무를 직접 전담한 부서와 그 외 관련 부서가 해당한다. 노무 동원을 포함한 총동원 계획의 수립 및 총동원 운동 업무를 담당한 부서, 노동자 단속 업무 담당 부서, 국민 연성 및 근로 교육 업무 담당 부서, 원호 관련 업무 담당 부서 등이다. 이 가운데 직접 노무 동원 송출 관련 업무를 전담한 중앙 행정기구는 1939년 2월 내무국 사회과 노무계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부서다. 중앙 행정기구는, ‘내무국 사회과 노무계(1939년 2월)→내무국 노무과(1941년 3월)→후생국 노무과(1941년 11월)→사정국 노무과(1942년 11월)→광공국 노무과(1943년 12월)→광공국 근로조정과, 광공국 근로동원과, 광공국 근로지도과, 근로동원본부(1944년 10월)→광공국 근로부 조정과, 광공국 근로부 동원과, 광공국 근로부 지도과(1945년 1월)→광공국 동원과, 광공국 근로부 근로제1과, 광공국 근로부 근로제2과(1945년 4월)’로 변천되었다.
지방 조직은 도 단위에서 지사관방, 내무부, 광공부가 담당했고, 그 이하 행정 조직인 부와 군, 도島의 노무 관련 업무는 서무과와 내무과, 그 하위의 서무계와 내무계가 각각 담당했다. 읍과 면에서는 노무계, 병사계, 권업계, 서무계, 사회계 등 지역의 사정에 따라 소속 부서가 달랐다.
병력동원은 일본정부의 법령(국가총동원법, 육군특별지원병령, 개정 병역법 등)에 의해 영장을 받고 일본군에 동원된 인력으로써 지원병과 징병으로 대별된다. 조선인을 병력으로 동원하는 문제는 민감해서 중일전쟁 발발 이전에 일본 정부와 군부는 의견 차이를 보였다. 일본 정부는 조선 청년의 징병이 불가피하다고 예상하고 황민화 교육의 강화와 교육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인데 반해 군부는 ‘조선인이 우리 등 뒤에서 총을 겨누게 하려는 것인가’ 하고 반발하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 전선이 확대되고 교착상태에 빠지자 병사가 필요했고, 식민지 청년들을 군인으로 동원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조선의 행정 체계 미비와 조선인의 권리 요구 예상 등으로 인해 대규모 인원의 징병 동원은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하고 전 단계로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기로 했다. 지원병은 육군특별지원병·해군특별지원병과 학도지원병으로 대별된다.
일본당국은 조선인을 징병제도에 포함하는 일에 주저했으나 급박한 전세로 인해 조선인 징병을 미룰 수 없었다. 따라서 각종 법령(해군징용공원규칙, 국민징용령, 육군군속선원취급요령, 군수회사징용규칙, 선원징용령, 의료관계자징용령 등)에 의한 동원과 현지 지휘관의 판단에 따른 차출 및 신분 전환의 방식이 적용되었다. 후방에서는 각종 법령에 의한 동원이 적용되었지만, 후방에서는 변수가 작용했으므로 동원 경로도 일관되지 않았다. 현재 일본정부가 공개한 자료에서는 국민징용령에 의해 동원된 피징용자와 혼용되어 있다.
군무원은 크게 군노무자와 기타 군요원(문관, 운전수, 간호부, 포로감시원)으로 구분된다. 군무원 가운데 다수는 군부(軍夫), 고원(雇員), 용인(傭人)이라 불리는 ‘군노무자’이다.
군노무자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업무종사자인 포로감시원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과 말레이 상륙을 필두로 일본군이 마닐라(1942년 1월)와 싱가포르(1942년 2월), 자바(3월), 필리핀(5월)을 점령하면서 만든 제도로, 이 시기 일본군의 포로가 된 연합국 병사 261,000여명에 대한 관리의 필요성에서 1941년 12월 육군성에 포로정보국을 설치하고 이듬해 5월부터 포로감시원을 모집했다.
포로감시원은 타이완인과 조선인을 대상으로 충당하였는데, 한반도에서는 1942년 6월에 모집했다. 조선총독부는 각 읍면에 인원수를 할당하여 면서기와 순사들을 앞세워 3,223명의 청년들을 동원해 노구치(野口)부대(부산 서면 소재)에서 2개월간 사격과 총검술 등 군사훈련을 받도록 한 후 한반도,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뉴기니아, 미얀마, 태국 등 각처 포로수용소에 배치해 말단 실무자로 사역했다. 기간은 2년 계약이었으나 기간이 만료된 이후에도 귀국은 불가능했고, 급료도 초기에 지급하다 중단했다. 이들은 패전 이후 연합군에 의해 포로에 대해 가혹행위를 한 혐의로 전범으로 기소되어 네덜란드와 싱가포르, 보르네오 등지에서 재판을 받았다. 조선청년들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지만 스스로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지 못하고 일본당국의 철저한 책임회피와 식민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재판부의 결정으로 인해 유죄가 확정된 20명이 처형되었다.
일본군위안부는 일본이 만주사변(1931.9.18)을 일으킨 이후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아래 일본군의 성병 예방이나 군기 누설 방지, 현지 여성 강간 방지 등을 목적으로 설치한 ‘위안소’에 동원되어 일본군의 성노예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의미한다.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수행하는데 ‘위안부’가 필요하다는 일본군의 요구에 따라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 1931년에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부터 한반도는 물론 일본군이 배치된 모든 지역에 위안소를 운영했다. 일본군위안부 외에 탄광과 군공사장 등지에 동원한 노무위안부도 있다.
일본군위안부는 문헌과 증언에서 작부(酌婦)·특수부녀·추업부(醜業婦)·예기·창기·여급 등으로 나타나고, 위안소도 육군오락소·구락부·군인회관·조선요리옥 등의 호칭으로 불렸다. 일본은 조선 여성은 물론 중국·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버마·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네덜란드인 여성들까지 위안부로 동원했으며, 그 형태는 취업사기, 협박 및 폭력에 의한 동원, 인신매매 및 유괴 등의 세 가지 방법이었고, 당국이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취업사기이다.
일본군 당국은 위안소를 경영할 업자를 선정하고, 일본군과 경찰이 동원과정에 협조했다. 업자들은 모집인을 이용하거나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여성들에게 접근해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취직이나 돈벌이를 미끼로 여성들을 끌어 모으거나 협박과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납치까지 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일어나기 전에는 도항증명서를 받아 국외 위안소로 이동했으나, 이후에는 군증명서를 발급받아 수송했다. 군증명서는 모집인이나 인솔자가 소지했으며, 일본군은 이동에 필요한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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