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0

[중앙시평]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중앙시평]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중앙시평]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2021.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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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나는 그렇지 않은 축에 속하는데, 오래전 『백범일지』를 처음 읽으며 받은 충격 때문인 것 같다. 감옥살이의 고통스러움을 한껏 토로하며 그는 적는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들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난다.”
 
지배수법에 악용되는 ‘반일감정’
중요한 건 친일 아닌 일제부역 여부
이젠 콤플렉스 민족주의 벗고
보편적 인류애의 개인으로 설 때

오늘 어느 정치인이 김구처럼 말했다면 어떻게 될까. 사회도 변하고 사람들의 의식도 변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김구의 말을 어떻게 여기든, 그의 말이 당시 사회와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건 사실이다. 그걸 인정하는 건 역사를 대하는 기본적 태도를 이룬다. 오늘 사회와 의식을 역사적 상황에 들씌우는 건 역사 해석이 아니라 각색 혹은 창작이다.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를 민족의 성녀라 추켜올리거나 자발적 매춘여성이라 깎아내리는 일도 그렇다. 위안부의 가장 주요한 정체성은 빈곤과 여성이다. 부유한 위안부도, 남성 위안부도 없다. 위안부는 ‘가난한 집 딸들’이었다. 딸을 파는 가난한 아버지들이 많았다. 김구의 말에서도 비치듯,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매매를 중계하는 조선인 업자들도 많았다.
 
팔려가는 딸들의 역사는 일본군 위안부로 끝나지 않았다. 해방 후 미군 위안부와 전쟁에서 한국군 위안부의 역사로 이어진다. 연구자들은 한국 정부가 미군 위안부와 한국군 위안부를 매우 적극 관리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팔려가는 딸들, 여성 인신매매는 그 후로도 매춘 산업의 주요한 공급 방식이 된다.
 
근래 많은 시민이 나눔의집과 정의연(정의기억연대)에 분노했다. 일본군 위안부 여성을 지원하고 그들과 함께 싸운다는 명분 하에, 사익을 추구했다 볼 만한 정황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앵벌이 집단’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으니 시민의 실망과 분노가 어떤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만일 그 정황들이 사실이라 해도, 그 단체들이 처음부터 그런 목적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들은 왜 변질했을까.
 
그 주요한 조건으로 콤플렉스 민족주의를 꼽을 수 있다. 한국인들이 반일 감정을 갖는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식민지 역사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 민족 전체와 일본 민족 전체 사이에서 일이 아니었다. 일본 지배계급(제국주의 세력)과 조선 민중 사이에서 일이었다. 대다수 일본 민중 역시 전쟁에 동원되고 착취당하는 피해자였으며, 조선의 지배계급은 일본 지배계급과 공조하며 안락을 유지했다.
 
해방 후 한국 지배계급은 그 역사를 민족 전체의 일로 만들어낸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부수면서도 반일 정책을 고수했고, 일본 군가를 즐겨 부르던 사무라이 박정희는 일본 문화를 엄격히 금지했다. 그들은 그런 정책 덕에 한국 내의 여러 모순적 상황들을 상당 부분 덮을 수 있었다. 반일 감정은 반세기에 걸쳐 극우 독재 세력의 손쉽고 효과적인 지배 수법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했음을 내세우는 현 정권이 이어받아 죽창가를 부르고 항일을 외친다.
 
‘친일파’는 그런 지배 수법에 최적화한 말이다. 우리가 문제 삼을 건 일본과 친했느냐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했는가이다. 이를테면 프랑스인들이 나치 부역자를 표현하는 말은 ‘콜라보’다. ‘친독파’에 해당하는 ‘제르마노필’은 단지 독일이나 독일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친일파가 아니라 ‘일제 부역자’라 고쳐 말해야 한다.
 
위안부 관련한 학문적 견해 때문에 정의연과 나눔의집과 갈등을 빚고 마녀사냥을 당했던 박유하 씨에 대해, 그 단체들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무너지고도 지식사회의 재평가가 없다는 건 인상적인 일이다. 박 씨의 재평가엔 자신들의 오류 인정이 수반되기 때문일 것이다. 논의는 사태의 구조가 아닌 개인 윤리 차원에 머물러야만 한다. 이제 윤미향이 새로운 마녀이며, 옛 마녀 박유하는 침묵으로 배제된다. 그들은 여전히 한나 아렌트에게 민족 배신자 낙인을 선사한 ‘악의 평범성’을 말한다.
 
콤플렉스 민족주의는 한국 남성 특유의 가부장적 피해의식과 관련이 있다. 일본에서 역사 관련 발언이라도 나오면 다짜고짜 발끈하기부터 하는, 일본과 스포츠 경기를 ‘전쟁’(대일전)으로 규정하며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피해의식 말이다. ‘가장 민족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괴테의 말도 의미가 바뀐다. 괴테의 말에서 ‘세계적’이란 인류 보편성을 뜻한다. 한국에서 그 말은 다른 민족과 비교와 우열을 표현한다.
 
민족은 실재하며 무시될 수 없다. 그러나 보편성을 잃은 민족주의는 언제나 예외 없이 악용된다. 콤플렉스 민족주의가 만연할 때, 지워지는 건 민족 내의 계급 현실이다. 그리고 계급 현실의 보편성에 기반을 둔 인류애다. 평범한 한국 노동자의 친구는 동족 이재용인가, 평범한 일본 노동자인가. 콤플렉스 민족주의를 벗고 보편적 인류애를 가진 개인들로 설 때도 되었다. 오늘 한국 시민은 당연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그게 진정한 역사 청산이며 회복이다.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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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활
김규항에 대하여 1
곰곰생각하는발  2021/07/07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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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1.aladin.co.kr/m/myperu/12753619


김규항에 대하여 1

피해자는 용서보다는 복수를 원합니다. 반면에 가해자는 복수보다는 용서를 원합니다. 비지니스 프랜들리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소비자의 " 니즈 " 가 서로 다른 겁니다. 그렇다면 피해자도 아니고 가해자도 아닌 관객(혹은 독자)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요 ? 당연히 피해자 손을 들어줘야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복수보다는 용서가 상위 개념'입니다. 그래서 종교 영화는 주제가 대부분 " 용서 " 이기에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합니다. 

신도여, 용서하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옵니다아. 할렐루야. 아멘.  옛 속담에도 때린 놈은 모로 자고 맞은 놈은 편히 잔다고 하죠 ?  정말 그럴까요. 오히려 맞은 놈은 분해서 잠 못 이루고 때린 놈은 발 뻗고 자는 것 아닐까요 ? 옛날에는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신분은 불변입니다. 주로 신분 높은 놈이 신분 낮은 놈을 때렸습니다. 복수의 기회따윈 없는 겁니다. 맞을 짓을 해서 맞으면 억울하지는 않죠.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조낸 맞는 겁니다. 그 시대는 맞짱이 불가능한 사회였죠. 그러다 보니 약자에게는 자기 위로의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때린 놈은 모로 자고 맞은 놈은 편히 잔다는 속담은 바로 자기 위로의 기술이 반영된 것이죠. 그래야 억울해서 분통이 터지는 2차 피해는 막을 수가 있었던 겁니다. 기독교에서 용서하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는 주장도 이와 비슷합니다. 일종의 방어 기제인 셈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해서 가해자가 지옥에 빠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피해자의 용서로 인하여 가해자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서사는 인간을 지나치게 순수한 시각으로 바라보거나 악인을 과소 평가하는 것입니다. 한 번 개새끼는 끝까지 개새끼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3자가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이를 보면 시속 167km의 속도로 등짝 스매싱 열 대를 날리고 싶습니다. 며칠 전, 중앙일보 [ 중앙시평 ] 에 실린 김규항의 <<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 란 글을 읽고 나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한때 안티조선일보 운동에 앞장섰던 b급 좌파 김규항이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그가 중앙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며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라고, 일베의 극우 논리를 그대로 베껴 쓰고 있다는 사실에 세 번 놀랐습니다. 칼럼의 시작은 << 백범일지 >> 를 읽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김구는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나는 그렇지 않은 축에 속하는데, 오래전 『백범일지』를 처음 읽으며 받은 충격 때문인 것 같다. 감옥살이의 고통스러움을 한껏 토로하며 그는 적는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들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난다.”

[중앙시평]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글을 읽다 보면 김구 선생은 마치 매춘부의 피를 빨아먹는 기둥서방 같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이 책을 읽지 않고 일베의 주장을 그대로 베껴쓰기 했거나 아니면 휘뚜루마뚜루 읽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하지만 인용한 문장이 나오는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다른 내용입니다. 내 기억으로는 김구는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고문으로 인하여 육체와 정신이 무너지자 정상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고백한 내용입니다(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 정확한 진술은 아닙니다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굶다 보면 사람도 잡아먹습니다. 그렇다면 김규항은 왜 이 문장만 짜집기해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일까요 ? 

그는 이 칼럼에서 김구와 같은 아버지 남성 세대들이 일본에 딸을 팔아서 굶주린 배를 채웠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항일 독립 투쟁의 상징적 인물을 폄훼하고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의 강제 동원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 참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고도의 기교입니다. 위안부 피해자는 한순간에 자발적 매춘부가 됩니다. 사실 왜곡으로 시작한 글은 억지 논리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일본 지배계급(제국주의 세력)과 조선 민중 사이에서 일이었다. 대다수 일본 민중 역시 전쟁에 동원되고 착취당하는 피해자였으며, 조선의 지배계급은 일본 지배계급과 공조하며 안락을 유지했다.
 
[중앙시평]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그는 전쟁 범죄를 일으킨 일본인 전체를 가해자라고 규정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소수의 가해자가 있을 뿐 대다수 일본인도 전쟁 피해자'라고 주장합니다. 전쟁에 동원되어 전쟁 범죄를 일으킨 일본 민중은 일본 지배계급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나치에 부역해서 처벌을 받은 수많은 독일인들도 피해자란 공식이 성립됩니다. 그들도 독일 지배계급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 말이죠. 하지만 그는 20년 넘게 글을 쓰면서 나치 부역자를 피해자라고 주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일로독불, 일본 국민이 하면 로맨스이고 독일 국민이 하면 불륜인가요 ? 

피해자와 가해자의 서사 중에서 가장 악질적인 서사는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것입니다. 가해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이야기보다 더 악질적인 방식이죠. 김규항의 이 칼럼은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 전형적인 곡학아세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순간, 위안부 피해자는 복수는커녕 그 알량한 용서(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을 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이 막장의 끝은 이렇게 끝납니다. 

민족은 실재하며 무시될 수 없다. 그러나 보편성을 잃은 민족주의는 언제나 예외 없이 악용된다. 콤플렉스 민족주의가 만연할 때, 지워지는 건 민족 내의 계급 현실이다. 그리고 계급 현실의 보편성에 기반을 둔 인류애다. 평범한 한국 노동자의 친구는 동족 이재용인가, 평범한 일본 노동자인가. 콤플렉스 민족주의를 벗고 보편적 인류애를 가진 개인들로 설 때도 되었다. 오늘 한국 시민은 당연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그게 진정한 역사 청산이며 회복이다.

[중앙시평]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그가 이 칼럼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 피해자와 일본 피해자의 피해자 연대'입니다. 일본 위안부 문제과 역사관에 대해 서술하던 그는 느닷없이 노동자'라는 이름을 거론합니다. 그리고는 보편적 인류애를 들먹이며 노동자 연대 (계급투표)를 역설합니다. 피해자라는 단어가 노동자로 바뀌었으니 노동자 연대는 곧 피해자 연대죠. 위안부도 피해자이고 일본 지배 계급에 의해 군에 동원된 일본군도 피해자이니 위안부와 일본군은 동지적 관계가 됩니다. 전쟁 범죄를 보편적 인류애로 전환하는 이 창발적 문장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칼럼을 읽고 육두문자를 남발하고 싶지만 참겠습니다. 그래요, 우리 김규항 씨, 팔뚝 참..... 굵어요, 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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