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15

【忘れられた独立英雄を探す(中)】「朝鮮人を差別するな」断食同盟休学…17歳の日本の少年が主導(1) | Joongang Ilbo | 中央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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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忘れられた独立英雄を探す(中)】「朝鮮人を差別するな」断食同盟休学…17歳の日本の少年が主導(1)
ⓒ 中央日報/中央日報日本語版
2025.08.1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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黄海道海州高等普通学校で発生した異例の『断食盟休(同盟休学)』を扱った東亜日報の報道(1931年12月13日付3面)。17歳の日本人学生、山崎仲英がこれを主導し、断食盟休というアイデアも考案した。青の表示部分が山崎仲英の名前。 ネイバーニュースライブラリー80年前の光復(解放)は多くの殉国烈士の犠牲によって現実になった。この中には金九(キム・グ)や安重根(アン・ジュングン)のようには広く知られず、見えないところで粘り強く日帝に抵抗してきた隠れた独立活動家が多いが、その大半は記録もまともに残っていない。中央日報は光復80周年を迎え、独立記念館傘下の「独立活動家資料発掘TFチーム」が見つけ出した「忘れられた独立英雄」の痕跡を照明した。2018年に発足したTFチームが今まで発掘した独立活動家は計3595人。存在さえも知られていなかった英雄を共に記憶することで完全な光を取り戻す道にたどってみる。

「海州(ヘジュ)高等普通学校が座り込みと絶食まで断行した盟休(同盟休学)事件の主謀者19人は2台の車で検事局に送検したが、これを聞いた学生の父兄が集まり海州地裁の前はまさに涙の光景となった。海州で取り調べを受けた学生は59人…今回の盟休事件を総指揮した学生は新しく転校してきた日本人学生の山崎仲英だ」。


1931年10月26日、日本人教師の民族差別に反発して黄海道(ファンヘド)海州高等普通学校で発生した、いわゆる「解雇盟休」事件を扱った当時の報道だ。山崎は17歳の学生であり、当時の新聞は日本人学生が盟休を主導したという点に注目した。


日帝時代の盟休とは、学校の不当な処置や民族的不義に抵抗するための学生による集団行動で、最も積極的な形態の学生運動と評価された。日帝の弾圧下でも盟休が可能だったのは、幼い学生が共有する社会的同質性を基盤に団結することができたからだ。これを日本の学生が主導したというのは、抗日独立運動が国籍を離れて人類の普遍的良心に訴える正当性を持つという意味と見ることができる。独立記念館傘下「独立活動家資料発掘TFチーム」が山崎をはじめ独立運動を支援した外国人346人を見つけ出したのが傍証だ。このうち日本人は26人だ。

山崎が主導した盟休は断食まで併行したという点で衝撃を与えたとみられる。東亜日報は「最初の断食盟休で世の中を驚かせた解雇事件」(1931年12月13日報道)と題した記事で公判の過程で出てきた学生たちの陳述などを詳細に扱った。

学生のチョ・ジンソンは盟休の直接的な発端となったのは学校が学生のための交友会基本金でピアノを購入したうえ、教師だけが使用して学生には使用禁止にしたことだと述べた。これは当時常習的に行われていた日本人教師の朝鮮人学生蔑視形態と無関係でないとみられる。

宮城県出身で盟休の約5カ月前に転校してきた山崎は裁判長の尋問に「先生の学生に対する態度が日本とはあまりにも違って不親切であり、学生の人格を全面的に無視することが多かった」と答えた。ピアノ事件についても「不満を抱いて先生に質問したことがあった」と話した。

断食盟休というアイデアも自身が考案したことを認めた。山崎は「『ヒント』は新聞で(報道された)東京商科大学が取った方法を真似た」と語った。

検察は盟休で逮捕した学生54人のうち42人は起訴せず、山崎を含む盟休を主導した学生は暴力行為違反、建造物破壊などの容疑で起訴した。彼らは盟休を計画して実行に移した事実は認めながらも、学校施設など建造物を破壊したという容疑は事実でないと否認した。しかし検事は学生の彼らに最高8カ月、最低6カ月の懲役を求刑した。

海州地裁は1931年12月12日、山崎に懲役8月、執行猶予5年を言い渡した。最も重刑が宣告された学生の一人だったが、山崎が日本人であり未成年者であることを考慮すると異例の措置だった。

盟休から宣告までは2カ月もかからなかった。メディアは「被告12人に対する審理を一瀉千里で進めた」と表現したが、日帝が日本人学生まで加担した初の断食盟休事件がもたらす社会的な波紋を懸念したのかもしれない。山崎は判決に従わず控訴したが、結局そのまま刑は確定した。この過程で拘束期間が長くなり、彼は反年近く獄中生活をした。


【忘れられた独立英雄を探す(中)】「朝鮮人を差別するな」断食同盟休学…17歳の日本の少年が主導(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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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해주고등 보통학교에서 발생한 이례적인 ‘단식맹휴(동맹휴학)’를 다룬 동아일보 보도(1931년 12월 13일자 3면). 17세 일본인 학생 야마자키 나카에이가 이를 주도해 단식맹휴라는 아이디어도 고안했다. 파랑의 표시 부분이 야마자키 나카에이의 이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80년 전 광복(해방)은 많은 순국열사의 희생으로 현실이 됐다. 이 중에는 김구나 안중근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끈질기게 일제에 저항해 온 숨겨진 독립 활동가가 많지만 그 대부분은 기록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중앙일보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 산하 ‘독립 활동가 자료 발굴 TF팀’이 찾아낸 ‘잊혀진 독립 영웅’의 흔적을 조명했다. 2018년 발족한 TF팀이 지금까지 발굴한 독립 활동가는 총 3595명. 존재조차도 알려지지 않았던 영웅을 함께 기억함으로써 완전한 빛을 되찾는 길을 따라간다.

“해주 고등 보통학교가 농성과 단식까지 단행한 맹휴(동맹 휴학) 사건의 주모자 19명은 2대의 차로 검사국에 송검했지만, 이를 들은 학생의 아버지가 모여 해주지법 앞은 바로 눈물의 광경이 됐다. 해주에서 조사를 받은 학생은 59명… 1931년 10월 26일 일본인 교사의 민족차별에 반발해 황해도 해주고등 보통학교에서 발생한 이른바 '해고맹휴' 사건을 다룬 당시 보도다. 야마자키는 17세의 학생이며, 당시 신문은 일본인 학생이 맹휴를 주도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일제시대의 맹휴란 학교의 부당한 처치나 민족적 불의에 저항하기 위한 학생에 의한 집단행동으로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학생운동으로 평가되었다. 일제의 탄압하에서도 맹휴가 가능했던 것은 어린 학생들이 공유하는 사회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단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일본 학생이 주도했다는 것은 항일독립운동이 국적을 떠나 인류의 보편적 양심에 호소하는 정당성을 가진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독립기념관 산하 ‘독립활동가 자료 발굴 TF팀’이 야마자키를 비롯해 독립운동을 지원한 외국인 346명을 찾아낸 것이 방증이다. 이 중 일본인은 26명이다. 야마자키가 주도한 맹휴는 금식까지 병행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는 ‘첫 단식맹휴로 세상을 놀라게 한 해고사건’(1931년 12월 13일 보도)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공판 과정에서 나온 학생들의 진술 등을 자세히 다뤘다. 학생 조진성은 맹휴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은 학교가 학생을 위한 교우회 기본금으로 피아노를 구입한 뒤 교사만이 사용해 학생에게는 사용금지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당시 상습적으로 행해졌던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 학생 멸시 형태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야기현 출신으로 맹휴 약 5개월 전에 전학해 온 야마자키는 재판장의 심문에 “선생님의 학생에 대한 태도가 일본과는 너무 달라 불친절했고, 학생의 인격을 전면적으로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답했다. 피아노 사건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고 선생님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단식맹휴라는 아이디어도 자신이 고안한 것을 인정했다. 야마자키는 “『힌트』는 신문에서 (보도된) 도쿄 상과대학이 취한 방법을 모방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맹휴로 체포한 학생 54명 중 42명은 기소하지 않고, 야마자키를 포함한 맹휴를 주도한 학생은 폭력 행위 위반, 건조물 파괴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이들은 맹휴를 계획하고 실행으로 옮긴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학교 시설 등 건조물을 파괴했다는 혐의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러나 검사는 학생들에게 최고 8개월, 최소 6개월의 징역을 구형했다. 해주지재는 1931년 12월 12일 야마자키에 징역 8월, 집행유예 5년을 전했다. 가장 중형이 선고된 학생 중 한 명이었지만 야마자키가 일본인이고 미성년자임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조치였다. 맹휴부터 선고까지는 2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언론은 “피고 12명에 대한 심리를 일사천리에서 진행했다”고 표현했지만 일제가 일본인 학생까지 가담한 첫 단식맹 휴사건이 초래하는 사회적 파문을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야마자키는 판결에 따르지 않고 항소했지만, 결국 그대로 형은 확정했다. 이 과정에서 구속기간이 길어지고 그는 반년 가까이 옥중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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