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통일의 역설과 냉전체제 종식 / 김누리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모바일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연이어 다가올 남북, 북-미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대전환의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
데 지난 3월21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하여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
을 했다.
“이번 회담들과 앞으로 이어질 회담들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 핵과 평화 문제를 완전
히 끝내야 한다. 남북이 함께 살든 따로 살든 서로 간섭하지 않고, 함께 번영하며 평
화롭게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언뜻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새삼 강조한 것처럼 보이는 이 발언 속에는 모종
의 역사적 전환이 암시되어 있다. 그것은 “남북이 함께 살든 따로 살든”이라는 대목
이다. 해방 이후 남한 대통령 중에서 ‘따로 살기’를 감수할 용의가 있다고 표명한, 즉
‘통일 포기’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대통령이 과연 있었던가.
평화를 위해서는 통일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대통령의 암시는 해방 이후 남한의 통
일정책에 비추어볼 때 분명 놀라운 파격이다. 문 대통령의 ‘평화우선론’은 물론 전쟁
의 위기가 코앞에 닥친 상황에 대한 현실적 대응의 차원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좀
더 근본적인 시각에서 보더라도 두 가지 점에서 시의성과 타당성을 갖는다.
첫째는
독일 통일에서 드러난 ‘통일의 역설’ 때문이고,
둘째는 냉전체제 종식의 시급성 때문
이다.
먼저 평화우선론의 기저에 흐르는, 남북이 ‘따로 살 수도 있다’는 유연한 입장은 남
북통일이라는 최종적 목표에 비추어볼 때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독일의 사
례는 통일을 포기함으로써 통일을 이룬 ‘통일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빌리
브란트의 ‘통일 정책’이라고 알고 있는 ‘동방정책’은 기실 ‘반통일 정책’이었다. 동독
을 국가로 인정함으로써 사실상 통일을 포기하고 ‘1민족 2국가 체제’를 승인했기 때
문이다. 아데나워의 ‘통일 추구 정책’이 냉전을 심화시킨 반면, 브란트의 ‘통일 포기
정책’이 오히려 통일을 성취했다는 역설에서 배우는 바가 있어야 한다.
통일 논의는 장기적 관점에서 서서히,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한반도에서 70
년간 지속되어온 냉전체제를 걷어내는 일은 가능한 한 신속히, 전면적으로 실천되
어야 한다. 냉전체제 종식이 절박한 이유는 그것이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로 나아가
는 첫걸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 ‘정상화’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냉
전체제 종식 없이는 한국 사회의 병리를 치유할 방도가 없다.
지난 70년간 한반도를 짓누른 냉전체제는 한국 사회를 기형화했고, 한국인을 불구
화했다. 한국 정치가 수구-보수 과두지배체제로 왜곡된 것도, 한국 경제가 재벌독재
체제로 일그러진 것도, 한국 문화가 폭력적 군사문화에 물든 것도, 한국인의 심성이
권위주의적 성격으로 병든 것도 그 뿌리를 추적하면 어김없이 냉전체제와 만난다.
냉전체제가 종식되어야 비로소 한국 사회가 정상 사회가 되고, 한국인이 정상인이
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지금도 여전히 냉전체제가 남긴 상처에 피 흘리고 있다. 감옥에 수감된
두 대통령을 배출한 자유한국당이 내보이는 파렴치한 행태는 냉전체제에 기생해 연
명해온 수구정치집단의 기형성을 적나라하게 증언하고, ‘미투’가 폭로한 남성문화의
폭력성과 권위주의는 냉전체제가 빚어낸 한국 남성의 불구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
는 것이다.
2018년이 해방 이후 쌓여온 적폐를 청산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됐으면 좋겠다. 박근
혜,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과 남북, 북-미 정상회담은 개발독재와 냉전의 잔재를 동시에 척결할 천재일우의 기회가 우리 목전에 와 있다는 신호다. 이 역사적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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