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jin Pak
10 October 2018 ·
[제3차 북한여행] 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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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명이 선양에서 모이기로 하고 나는 내일 아침에 애들레이드 출발하는데,
- 싼 비행기표라서 싱가폴에서 11시간기다린다.
- 우선 온도차를 생각해야 한다.
- 현재 애들레이드 오후 4시반, 한국 오후 3시.
애들레이드 18도
싱가폴 31도
선양 11도
평양 13도
- 얇게 입고 있다가 그 위에 끼어 입도록 해야겠다.
- 싱가포르에서는 오래된 옛 학생을 만 나기로 했다. 10년 이상 이메일로만 소통했는데 만나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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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까지 계속 한인회 일이 있었는데, 드라마가 따로 없다.
- 미스테리, 서스펜스.... 기가 막히다.
- 어쨋든 이제는 더 드려다 볼 수 없는 세계로 간다. 아내가 혼자 잘 해나갈 지 조금 걱정이나, 당분간 잊어버리기로 한다.
- 한인회 일로 텃밭을 정리하고 새 모종을 심어주고 가야한다고 한 것을 못하고 간다.
- 여행하면서 전자 책이나 잔뜩 읽어야지.
- 북한에서 싫어한다는 불루진 작업복을 입고가야할 지, 말아야할 지? 나의 일상의 복장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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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31 October 2018 ·
[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 (1) 서론 – 가기 전에 생각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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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포함한 호주 퀘이커 12명의 그룹이 7박8일의 북한여행을 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교적으로 (상당히?) 성공적인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그리 스무스하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또 호주 퀘이커의 북한여행이 있을 것이기에 이 첫번째 여행의 (알려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들을 기록해 놓으려고 한다.
-호주 퀘이커의 북한 여행이 있기 전에 물론 나의 북한 여행이 있었어야 했고, 또 나의 북한 여행은 북한과 관계가 있는 우리 가족사에서 부터 시작한다. 그 가족사에 대하여는 여기서는 말하지 않기로 한다. 또 나와 퀘이커의 만남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기로 한다. 여기서의 이야기는 2017년 6월 나의 2차 북한 방문 경부터 시작한다. 이 때는 나 자신이 북한 알기에 열심이었다. 한편으로는 책이나, 신문, 잡지, 인터넷의 글을 읽으며, 또 한편으로는 북한에 관한 다큐를 많이 보는 공부였다. 그러나 북한을 방문하여 여러가지를 보고, 또 북한 사람들과 직접 이야기를 많이 해 볼 기회를 가져보지 않으면, 북한에 대한 이해에 큰 구멍이 있다. 두차레, 총 3주간의 북한의 여행을 마첬을 때는 북한에 대한 나의 이해는 한편으로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긍정적이었고, 나는 그 긍정적인 면을 발전시키는데 어떤 역활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단계이었다.
- 내가 2차의 북한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 다음 달인 7월에는 마침 호주 퀘이커의 전국대회가 내가 살고 있는 애들레이드에서 열리게 되었다. 내가 호주 퀘이커 친우들에게 북한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고 싶어지는 것은 나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내가 호주 퀘이커 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알리고 싶은 것은 북한이라는 나라나, 그곳의 정부와 사람들이 서방 세계의 메디아가 전달하는 그런 괴물들이 아니고, 그 나라가 적대적인 국제환경에서 자주적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데서 나오는 정치문화와 행동에서 나오는 것인데, 서방 미디아가 괴물로서 다루어 왔기 때문에 북한은 계속 그렇게 보여왔다는 것이었다. 서방국가 중에서는 북한에 적대적인 미국 (그리고 한국)의 역활이 크다. 그 외로는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은 물론이고, 또 일본이나 호주의 역활도 적지 않다. 그런데 평화주의자들의 집단인 퀘이커 친우들은 미국의 군사주의적 대외정책에 대하여는 비판적이어서 중동에서의 전쟁이나 난민문제에 대해서는 열심이나, 어떻게 보면 동북아지역의 평화의 핵심이 되는 북한문제에 대하여는 충분한 지식과 인식이나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다. 물론 동북아의 평화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없지만 않으나, 그 숫자는 극히 소수 이상에 미치지 않고, 대부분의 친우들의 북한에 대한 이해는 메스미디아에 의해 형성이 된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평가였다.
- 그러나 3년 정도 퀘이커 모임에 다니고 난 나의 퀘이커 친우들에 대한 사회운동가로서의 평가는 매우 높다. 무었보다도 그들의 사회운동은 이데오르기적이 아니라 개인의 삶의 대한 자세에서 나오는 "영적인" 것이었다. 사회운동과 자기수행을 합친 것이기 때문에 그 방식이 나를 퀘이커로 끄는 것이었다. 그들의 방식은 20대의 나를 형성한 간디의 삶의 방식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동북아 지역의 평화문제에 퀘이커 친우들의 관심이 모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힘이 될까, 나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 것이 2차 북한 방문을 마친 나에게 애들레이드에서 개최된 퀘이커 전국대회에서 북한에 대한 발표를 하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괴물처럼 보지만, 전쟁을 끝나게 하면 북한을 보는 눈도 현재 서방 세계가 베트남이나 중국을 보는 눈처럼 될 것이라고. 북한은 자기네들이 바깥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꺼꾸로 외부 세계, 특히 미국과 동맹국들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나라를 군사적으로 조직하고 운영하게 된 것이라고도 설명했다. 북한도 군비에 들어가는 비용을 경제발전에 쓰고 싶어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위협을 받지 않게 느껴야하고, 그 기본 조건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적인 국제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또 북한에 가 보면 알게되겠지만, 북한 방문은 전혀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것. 북한 사람들도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북한의 소위 개인 숭배는 종교가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다른 종교를 존중해 주는 퀘이커에게는 힘든일이 아니라고. 북한의 수령제는 천황을 신으로 여긴 제국일본의 천황제와도 그리 다르지 않다고. 어떤이들은 북한이 개방하여 중국처럼 바뀌는 것을 기대하지만, 북한에서는 큐바에서 처럼 아직 사회주의의 꿈이 살아있다고. 그것은 가서 보아야 알게 된다고…
-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비판하기 위해 좋은 것 위주로 이야기 한 것도 있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로 시작한 나의 발표는 처음에는 많은 친우들의 호기심을 끌었고, 발표를 하자 마자 북한방문을 하고 싶다고 사인을 한 사람이 15명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호주 퀘이커 그룹의 북한방문을 추진 시켰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 한가지는 북한당국에서는 호주 퀘이커에 의한 평화사절단 방식의 방문에 관심이 있었으나, 북한 방문에 관심을 보인 호주 퀘이커 친우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퀘이커의 전국조직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의식이 강했다. 그러니 북한 방문을 호주 퀘이커의 평화사절단이라는 이름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호주 퀘이커라고 해도 단지 북한 관광을 알선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이번 방문을 호주 퀘이커가 하나의 NGO로서 북한과의 장기적인 신뢰관계를 맺는 준비단계의 방문으로 만들고 싶었다.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는 모르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하나의 모델로서 미국 퀘이커의 북한과의 관계였다. 미국 퀘이커 봉사활동부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는 약 15년 전부터 북한의 몇몇 협동농장과 관계를 맺고, 북미간에 정치적인 관계가 어쨌든 간, 꾸준히 농장 지원의 프로그람을 꾸려갔다. 호주 퀘이커 방문단 중에는 나와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도 있었으나, 단지 호기심에 북한에 가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북한과 관계맺기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미국 퀘이커 봉사단과 관계를 맺은 농장을 참고로 방문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호주 퀘이커가 반드시 농업 전문이나 농장과의 관계 만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나, 기부나 원조 중심에 제한된 관계가 아닌 협조적인 관계를 만들어 그 관계를 통하여 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말하자면 북한과 호주 NGO사이에 정부가 하려고 하지 않는 다리를 놓는 작업이다.
- 호주 퀘이커 그룹의 북한 방문의 계획은 느리게 진전되었다. 몇 달이고 북측에서 답이 없는 때도 있었고, 계획이 진전이 되지 않으니 처음에는 관심을 보인 호주 퀘이커 친우들 사이에서도 다른 계획이 생기면서, 가겠다는 사람들의 숫자가 하나 둘 줄어들어, 약 4명 정도 까지 되었다. 2017년에 호주 퀘이커 전국대회에서 내가 발표를 한지 일년이 지나, 2018년 7월에는 또 전국대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시드니 근방의 소도시에서 열렸다. 또 다시 북한에 대해 발표를 했다. 이번에는 북한 일반보다 방문계획에 대한 발표였는데, 그 결과로서 가겠다는 사람들이 불어 10명이 조금 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의 반대로 못가겠다는 사람도 나왔다. 그러나 결국 12명이 가게 되었다. 호주 전국에 퍼저 있는 북한에 가겠다는 친우들 사이에서는 나와 횟수를 샐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메일 문답이 있었다. 그리고 약 7번 정도의 비데오 컨퍼런스가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나의 첫번 북한방문이었던 호주한인교포의 관광단과 대조적이다. 나는 주로 시드니에서 온 그 한인 관광단과 선양비행장에서 처음 만났고, 북한 여행이 끝나고 나서는 한번도 서로 연락을 해 본적이 없다. 대조적으로 퀘이커 그룹의 경우는 앞으로 일을 같이 할 사람들을 찾는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그들 중에는 내가 퀘이커로서의 나이가 제일 적고, 다른 사람들은 수십년 간의 관계를 서로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난 일년간의 나의 발표와, 이메일과 비데오 컨퍼런스를 통한 소통은 전국에 퍼저 있는 퀘이커 친우들이 나를 더 잘 알게되는 과정이 되었다.
북한방문에 관심을 보이기 까지 한 퀘이커 친우들 사이에서는 평화운동에 열심인 사람들까지도 한가지 부정적인 공통점이 있다면 북한 정권에 대해 그들이 가진 두려움이다. 내가 아무리 북한이 여행하기에는 남한 만큼이나, 아니면 남한보다도 안전한 곳이라고 해도, 그걸 받아드리지 못한다. 그러니 북한 여행을 하겠다는 사람은 평화주의자 퀘이커 라도 상당한 마음의 장해물 넘기와 준비가 필요한 듯하다. 비데오 컨퍼렌스에서도 여행 중 위험에 처하면 어떤 행동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와 모두가 자기의 경향에 대해 답을 하는 쎄션을 가젔다. 정말로 위험한 곳에 간다면 그런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북한에 가는 것은 중국에 가는 것보다 여행으로의 위험은 적다. 그 이유는 북한 여행단은 안내동무들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의료 면에서도 북한에서는 최신식의 장비들을 기대할 수 없을 지라도, 기본 치료를 위해 있는 것은 다 있을 것라고 생각한다. 왠만한 발전도상국에 여행을 하는 것 보다는 의료치료에 면에서는 북한이 훨씬 안전한 곳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기본적인 상태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또 북한에서는 스마트 폰이나 랩톱을가저가면 그 내용까지도 다 조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여 쓰던 스마트폰을 두고 간다는 사람도 있다. 북한에 갔다가 인도에 가는 사람은 북한에 랩톱을 가지고 들어가기를 두려워한다. 랩톱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중국이나 인도에는 가지고 가도 북한에 가저가기는 무섭다? 랩톱의 내용에 문제가 있어 랩톱을 압수당할까봐? 아무리 설명을 해도 선양의 호텔에 맡기고 가면 어떨까 한다. 호텔이 그렇게 해 줄지는 나도 모르겠으니 가서 물을 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도 몇 일 후에 또 묻는다. 또 호텔 방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다 도청하고 있어서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나도 누나와 둘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는 매일 저녁 그날 보고 듣고, 일어난 일들에 대해 토론하는 긴 시간을 가젔는데, 비판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처음에는 그래서 문제가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몇일 지나고부터 그런 생각이 사라젔다. 나의 그런 경험을 퀘이커 여행 친우들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나의 중재 역할은 퀘이커 여행 친우들의 마음의 장벽을 어느 정도 낮게 해 주었지만, 그런 장벽이 전혀 없게 북한에 간 사람은 없는 듯했다. 결국 가서 자신이 경험하고 판단해야 할 일이었다. 이번 여행에 목적은 호주 퀘이커와 북한과의 좋은 관계를 만드는데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마음의 장벽이 낮아저야 한다. 그러므로 이 여행에서는 호주 퀘이커 친우들이 어떤 경험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나는 이미 북한 여행을 두번이나 했으니, 호주 퀘이커 친우들을 관찰하는 것이 나에게는 여행에서의 적지 않은 부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여행을 시작하였다.
Sejin Pak
31 October 2018 ·
[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 (2) 북한에 가기도 전의 위기 – 중국의 무비자 트랜짓 정책을 믿은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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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인이 북한에 가자면 보통 중국을 통해 가야 한다. 중국에 가자면 중국 방문 비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중국을 단지 경유하며 다른 나라에 가겠다는 여행객의 숫자가 늘어가자 중국에서는 72시간 비자 프리 트란짓이라는 정책을 시작하였다. 이 정책은 몇 개의 지정된 국제공항을 경유하는 경우에만 쓰인다. 선양, 베이징, 상해, 광죠우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72시간이라면 비자 없이 2박 3일의 관광도 가능하다. 우리의 경우에는 베이징이 아니라 선양에서 고려항공을 타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래서 호주 퀘이커 북한 여행단의 멤버들은 각각 자기가 사는 도시에서 출발하여 10월 13일 토요일에 선양 공항에서 모이기로 하되, 어떤이는 몇일 일찍 가서 관광도 하고, 어떤이는 마지막 날에 도착하여 호텔에 묵을 필요가 없게 계획하는 등, 각자가 72시간 무비자 트랜짓 정책을 활용하는 계획을 짰다. 나는 선양을 두번이나 돌아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선양의 관광에는 관심이 없어서, 선양에서 하루 밤 만을 자는 계획을 짜고, 싼 비행기 표를 샀는데, 그 비행 코스가 애들레이드에서 싱가폴로 가서, 또 선양으로 가고, 돌아올 때는 선양에서 광죠로 가서 호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물론 갈때나, 올때나, 72시간 무비자 트란짓을 하므로 중국 비자 신청은 하지 않았다.
- 그런데 애들레이드 공항 싱가폴에어 카운터에서 문제가 생겼다. 중국으로 가는데 왜 중국비자가 없냐는 것이다. 나는 비자 프리 트란짓이란 것이 생겼는데 모르냐고 물었다. 선양에는 얼마나 머믈지? 하루 밤, 총 시간은 하루 반. 그러면 어느나라로 가는지 비행기 표가 있어? 북한 평양에 가는데 이런 단체표가 있어. 이 표라는 것은 표같이 생기지 않았으나, 표로서 필요한 정보는 나타나 있는 것 같다. 한참 전화를 걸고 알아보더니, 표로서는 파스된 것 같다. 그런데 북한은 못가는 나라 아니냐고 묻는다. 아니, 언제나 원하는 사람이 관광으로 갈 수 있는 나라이다.고 답했다. 그래? 그런데 돌아 올때는 선양에도 가고 상해에도 가고 그런다고? 비자 프리 트란짓이라는 것은 한 도시에 같다가 중국을 떠날 때만 쓰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라고 말한다. 그래?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하여간 여행계획이 다 짜여 있고, 선양의 호텔까지 다 예약되어 있고, 다른 11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텐데…, 못가면 어떻게 되지? 인솔자인 내가 없으면 단체 여행이 되지않찬아!? 또 다른 사람을 불러오고, 약 20분 간 여기 저기 전화를 하고 그러더니, 오케이 갈 수 있다, 고 한다.
- 그래서 한숨을 쉬고 빨리 나오느라고 아침에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도 않고 나와서, 햄버거와 커피를 사서 먹으며 조금 숨을 돌리고 있는데, 멜번에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멜번 공항인데 멜번에서 출발하는 데일과 수가 나와 같은 비자 프리 트란짓에 문제가 있다고, 비자를 구하지 않으면 출발할 수 없다고 한다고 전화가 왔다. 데일과 수는 72시간 비자 프리 트란짓를 전제로하고, 선양에서 이박 3일을 머믈 계획을 하고 멜번을 출발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멜번에서 선양까지 가자면 광죠우을 경유해야 한다. 그래도 시간을 다 더하면 72시간 이내로 계획했을 것이다. 그래도 비자가 필요하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싱가폴 행 나의 비행기를 타러 가야되고 멜번쪽에서도 비자 문제에 대해 항공사 직원과 이야기를 해야 되어 전화는 끊었으나, 싱가폴에 가는 비행기 속에서도 계속 걱정이다. 싱가폴에 도착하여 인터넷을 연결하고 나니, 멜번 그룹이 어떻게 되었나를 찾아보았다. 몇 시간 뒤에 연락이 왔다. 그날 계획했던 비행기는 못타고, 중국 비자는 중국영사관에 가서 특별히 빨리 만들었고, 그 다음 비행기를 예약하여 하루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행기표를 새로 사야하고, 호텔에는 하루치를 캔슬하지 못하니, 손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렀게라도 갈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 그런데 시드니에서 출발하는 그룹도 72시간 비자프리 트란짓 건으로 문제를 격고 있다고 연락이 왔다. 비자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그룹도 선양에서 2박을 하며 선양관광을 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선양에서 관광을 하기는 커녕, 평양에 가는 비행기를 타는 시간 안에 선양에 도착할 지가 불확실하게 되었다. 갑자기 선양행 2일 후에 선양에 도착하는 비행기표를 사려고 하니 힘들어젔다고 한다. 그런데 비행기표가 있어도 비자가 비행기 출발전에 나올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뉴스를 듣고 나는 싱가폴에서 선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 선양에 도착하여 호텔에 찾아가니 멜번 그룹이 비자는 받았는데 선양에 도착시간이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 시간에 아주 가깝게 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만약 중국 국내 항공의 연착이 있으면 평야행 고려 항공을 놓히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를 생각하여 그 다음 비행기를 타게 준비를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계획은 간단하지 않다. 우선 평양행 비행기는 여러편이 있지가 않다. 몇시간 후에 다른 비행기를 타는 것이 아니라 몇일 후에 다음 비행기를 타게 된다. 그러면 북한에서의 단체여행의 계획이 깨어지게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 그룹의 단체여행은 각자가 미불 현금을 가지고 와서 선양공항에서 단체로 12명분의 돈을 내고 12명분의 표를 구하는 것을 전제로 짜 있는 것이었다. 만약에 시드니 그룹이 빠진다면 그룹여행용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게 되고 모두의 그룹여행의 계획이 깨지는 것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선양에 도착한 후로 그런 긴장의 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저녁이 되자 시드니 그룹이 비자를 받았고 비행기에 탔다는 연락이 왔다. 언제 선양에 도착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모두가 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의 두 시간 후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한다.
- 시드니 그룹 4명 말고도 또 호주의 서쪽 도시 퍼스에서 오는 사람도 72시간 비자 프리 트란짓의 문제로 걸렸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그 비자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타려던 비행기가가 갑자기 고장이 생겨 출발을 하지 않게 되고 새 항공편을 찾지 못해 북한 여행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소식이 왔다. 그러다가 또 타이랜드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되어 선양에는 평양으로 출발하는 날의 아침에 도착하게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 10월 13일 토요일 아침에 호텔에 머믈었던 일행이 함께 공항으로 갔더니 북한 영사관과 여행사에서 사람들이 나와있다. 그러면서 2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시드니 퍼스에서 오는 메드린이 도착하고, 시드니 그룹의 4명이 도착했다. 얼마 않되어 우리는 평양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모두가 무비자 트란짓 정책을 믿어서 격게된 고비와 최종적인 결과를 우연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기독교적 하나님이 아니라) 하늘 spirit이 우리에게 무언가 알려주려했다는 식의 의미을 갖게 되었다는데 동의하게 되었다.
- 평양에서 돌아 오면서 또 선양을 걸치게 되어 무비자 트랜짓이 문제가 되어 수속이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중국의 항공회사직원들도 무비자 트랜짓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은 것이 현재의 상황인 것이다. 앞으로는 알려지고 수속이 문제없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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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위의 이야기와 관계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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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3 November 2018
[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 (3) 퀘이커의 북한여행은 관광여행인가, 친선여행인가? 어디에를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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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북한관광여행은 평양과 판문점-개성방문이 그 중심에 있다. 거기에다 묘향산과 묘향산 가까히 있는 국제친선기념관이라는 곳이다. 평양에는 볼 곳이 많으니 선택을 해야 되므로 평양관광이라고 해도 달라질 수 있다.
- 이번 호주 퀘이커의 북한여행은 다른 일반적인 북한관광여행과 어떻게 다른가?
관광여행이라고 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나에게는 두가지 레퍼런스 포인트가 있다. 첫번 째는 호주교포의 7박8일 관광여행(밑의 사진 1) 이었다. 이 첫번 쩨 여행스케줄이 눈에 뜨이게 다른 관광과 다른 것은 금강산 관광이다. 금강산 관광은 한국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젔던 것 같다. 금강산 관광이 포함되다면, 원산이나 마식령 스키장을 집어넣어도 특별히 무리가 되지 않는다. 모두가 서해안이거나 서해안에서 평양으로 오는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 내가 알고 있는 두번째의 여행스케쥴은 미국의 노동조합의 소위 “평화사절단”의 2017년 9월의 여행의 스케줄 (사진 2)이 인데, 호주 퀘이커 그룹도 평화사절단으로 오면 이 스케줄로 하면 되지 않을까 해서 나에게 주어진 스케줄이었다. 이 스케줄에는 신천박물관이란 곳이 포함되어있다. 그런데 나는 호주 퀘이커 그룹의 여행 스케줄로서 우선 미국의 평화사절단의 스케줄에서 시작하여 신천박물관과 멀리가야하는 묘향산, 이 두군데를 빼고, 그 대신으로 미국의 NGO가 북한에서 관계를 맺은 농장 같은 곳을 두군데 집어넣은 스케줄을 신청했다. 그러면서 호주 퀘이커 그룹의 북한여행은 아직 전국조직을 대표할 수 없어서 평화사절단이 될 수가 없다고 했더니, 북측의 반응이 매우 느려젔다. 몇 달이 지났다. 그리고 돌아온 스케줄이 밑의 세번째 사진의 것이다. 거기에는 내가 빼려고 했던 신천박물관과 묘향산이 들어있었고, 내가 신청했던 미국 퀘이커 관계의 농장이 없었다. 그러다가 또 나중에는 미국 퀘이커 관계의 농장이 들어가게 되었다. 세번째 사진의 스케줄에는 이 변경을 그대로 나타나게 해 두었다.
- 그런데 우리 여행의 경우에는 북한에 도착하고 난 뒤에 또 바뀌었다. 네번째의 사진은 북한에 가 있는 동안 여행스케줄이 또 바뀌어 안내동무에게 적어달라고 했더니, 손으로 적어 준 것이다. 세번째 스케줄과는 몇가지가 바뀌었다. 우선 호텔이 평양호텔에서 고려호텔로 바뀌었고, 또 아주 특별하게, 농업성의 관료와 만나는 스케줄이 생겼다. 퀘이커 관계농장을 방문하는 것도 보통 관광여행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만, 농업성의 관료를 만나는 것은 더욱 특별한 어레인지먼트이다. 이것은 우리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가 미국 퀘이커 처럼 농장에 관심을 보였더니 북한의 농업성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게 된 모양이다.
- 또 한가지 기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포함된 것은 지금은 “빛나는 조국”이라고 이름이 바뀐, 과거의 “아리랑 마스게임”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건 우연히 우리가 평양에 머무는 동안 “빛나는 조국” 마스게임이 끝나지 않고 연장공연을 하고 있어서 그것을 참관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비용은 따로 더 내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모두가 보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최종 결정을 하자니 모두가 보고 싶다고 했다. 이걸 보러 북한 여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는 평양에 와 있으므로 그 기회를 놓지는 건 바보 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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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관광의 대상이 제일 많은 곳은 평양시이다. 밑의 [A]에 평양의 관광대상지의 리스트를 만들어 보았다. 약 3일 정도를 평양관광으로 보낸다고 해도 리스트의 모든 곳을 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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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평양 지역
# 려명 거리
김일성 대학
# 만수대 창작사
# 인민 대학습당 (국회도서관에 상당하는 곳)
# 탁아소
# 평양교예 (써커스)
# 평양 지하철
#@ “만경대 고향집” (김일성 주석 탄생의 집)
만경대혁명사적관
# 만경대 학생소년 궁전 + 공연관람
광복지역 상업중심 (슈퍼마켓)
# 김일성 광장
# 개선문
# 주체탑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
미래과학자 거리
과학기술전당
# 외국어서점
# 고려호텔 / 평양호텔 / 양각도호텔
# 김정숙 평양 제4공장
# 릉나도 경기장 – “빛나는 조국” (전 아리랑 마스게임)
평양가방공장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평양 청년운동사적관
# 평양친선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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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묘향산 방향
#@ 국제친선전람관 (외국에서 북의 수령에게 보낸 선물을 모은 곳)
# 보현사 팔만대장경
# 묘향산 비로봉, 만폭동 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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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금강산 방향 (호주교포관광단 스케쥴에 포함됨)
금강산
원산 – 송도원 국제소년단
원산 애육원
원산 양로원
마식령 스키장 –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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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판문점 방향
# DMZ, 판문점
# 개성 유내스코 세계유산 지역
# 개성 성균관 도서관, 왕건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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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신천 방향 (미국 평화사절단의 스케쥴에 포함 됨)
@신천박물관 (전쟁 때 미군의 북한 민간인 살해를 기록한 곳)
황해도 사리원 미곡협동농장 (이 곳은 평양에서 신천박물관에 간다면 오는 길에 있기에 들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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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농장
# 장천 남새전문 협동농장 (이곳은 모델 협동농장으로 관광코스에 자주들어가는 모양이다.)
## 류현농장 (퀘이커 농장) (호주 퀘이커 만의 스케줄)
# 남새과학연구소
F] 남포 방향
# 서해갑문
# 청산리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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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 농업성 관료들과의 만남(호주 퀘이커 만의 스케줄)
- 고려 호텔에서 약 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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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호주 퀘이커 여행 스케줄에서 신천박물관과 묘향산을 빼려 했는가?
- 그 이유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두 곳은 너무 북한의 자기 선전용이기 때문이었다. 북한광광에서는 금강산같이 자연을 보는 곳을 빼고는 자기 선전용이 아닌 곳은 없다고도 볼 수 있으나, 신천박물관은 매우 특별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1950년에 3만 5천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는데, 북한에서는 이 사건이 미군에 의한 학살이라고 되어있고, 신천 박물관은 미국을 증오하게 하는 국가적 교육기관이다. 문제는 북한 밖에서는 이 사건이 미군의 의한 직접적인 학살이 아니라는 이해가 설립되어있기 때문이다. 나 혼자라면 한번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으나 호주퀘이커 그룹을 이끌고 이곳을 방문한다면, 나는 북한의 해석이 틀렸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호주퀘이커가 북한과 좋은 관계를 만드려는데 좋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신천박물관의 방문을 빼려고 부탁했는데도 나에게 보내온 여행스케줄에는 그곳 방문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지”하고 받아드리려고 해쓴데, 북한으로 가기 직전에 신천박물관 방문을 빼었다는 통지를 받았다.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분위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북한에 관한 지난 몇 달의 기사들에서는 평양의 길거리에서 반미 슬로건이 대부분 사라젔다는 소식을 읽었으니 그 변경의 의도가 이해가 간다.
- 또 한군데, 묘향산 방문을 내가 빼려고 한 이유는 묘향산이 멀어서 하루가 걸리다는 것이고, 그 대신 퀘이커 관련농장 말고, 미국 NGO관련 사업이 있는 곳을 또 한군데 방문했으면 하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묘향산 방문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금강산과 같이 자연을 보는 것이 아니다 묘향산 가까이에 있는 <국제친선전람관>이란 곳이 북한 정부 당국에서는 더 보여주고 싶어하는 곳이다. <국제친선전람관>이란 곳은 세계각국의 국가수반들이 북한의 국가수반인 김일성 김정일 수령에게 보낸 선사품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북한에서는 조선의 수령이 얼마나 세계의 지도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교육 기관으로서 북한 주민들의 순례지이며, 외국인 방문객에게도 필수적인 코스로 들어가게 해 놓은 곳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번은 보아도 좋으나, 두번 볼만한 곳은 못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호주 퀘이커의 북한 방문의 대상지로는 정당치 않다고 보았다. 아무리 설명이 그럴 듯해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전람관은 개인 우상화의 도구라는 것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빼고 싶어한 이 전람관도 최종 스케쥴에는 포함되어있었다. 할 수 없지. 그런 곳이 또 있으니. 그 곳은 우리만이 아니라 아마도 모든 외국인 방문객의 방문 스케줄에 포함되었을 <만경대 고향집>이라고 불리우는 평양의 김일성 주석의 탄생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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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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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7 November 2018 ·
[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 (4) 안내동무들은 북한의 "보통 사람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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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들 북한을 방문하면 보통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고들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보통 사람들을 만날 기회는 많지 않다. 그 대신에 안내동무들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보통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안내동무들은 너무 특수한 사람들이라서 북한의 일반 사람들은 대변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안내원이라는 직무를 맡으려면 상당히 교육을 받아, 지식만이 아니라, 사상무장의 수준도 높아야 할 것이다. 사회적 지위를 따저본다면 짐작컨데 상층 20-30%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안내원들 사이에도 지위가 다른 것은 일반적으로 나이와 경험에 따르는 직위의 차이일 것 같다. 하여간 안내원들은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북한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도록 많은 노력을 한다. 대부분의 경우 상당히 성공적이라고 나에게는 보인다. 그들은 방문객에게 가까이서 볼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로서 북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이미지 형성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 그러나 북한 방문도 여러 번 하면 안내동무들도 여러 사람 경험하게 된다. 내가 경험한 안내동무들은 전부가 6명으로, 일차 여행에서 2명, 2차에서 명, 3차에서 3명이다. 그러면 그 사람들 사이에서도 차이를 보게 된다. 내가 만난 안내원들 사이에서의 차이를 말해보자면 가장 크고 뚜렸한 차이는 영어를 하고 북미를 포함한 유럽계통 서양인을 상대로 일한 경험이 있는 안내원들과 그런 경험이 없는 안내원들이다. 나의 이번 제 3차 북한 방문이 안내의 면에서 처음 두번의 방문과 크게 다른 것은 모두가 조선어를 하지 못하는 “서양인”의 그룹의 방문인데, 내가 그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인을 상대로 하는 안내원이 해외 교포들을 다루는 안내원들과 언행이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된다.
- 북한에서 보기에는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크게 두가지로 분류하는 것 같다. 한가지는 “해외동포”이고, 그 외로는 외국인들인데, 외국인들은 또 두 가지로 나눈다. 중국인, 일본인 같은 아시아 사람들과 유럽계의 백인들이다. 조선어를 하는 해외동포의 경우에는 해외동포위원회 (주려서 해동)가 맡아서 다루고 그 외의 외국인들은 국제관광여행사가 다루는 것 같다. 나의 첫번째와 두번째의 여행은 해동에서 다루어 해동에 속한 안내가 나오게 되었는데, 이번 여행은 외국인들의 그룹이어서 안내원이 동시에 통역인 국제관광여행사가 다루게 된 것 같다. 이번 호주 퀘이커 그룹을 맞이한 회사는 <금강산 국제려행사>라는 회사인데 이제까지는 주로 아시아 국가, 주로 중국에서의 관광객을 맞이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영어하는 외국인 그룹을 맞는다고 한다.
- 이번 여행에는 통역 역활을 하는 안내가 둘이 나온다고 미리 알고 갔는데, 영어를 하지 못하는 안내가 또 한명이 있다. (사진 1에 참조) 영어를 하는 안내가 Mr오 (약 35세)와 Miss 김 (약 25세)이고, 영어를 못하는 고 과장(약 40세)의 역활은 뭔지 잘 모를겠는데, 그는 지위가 과장이고 나이가 조금 위에라, 다른 두 안내원들을 감독하는 듯했다. 나는 호주퀘이커 그룹을 인솔하는 입장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면 고과장과 이야기해야 했다. 그도 뭔가 호주 그룹에게 할 말이 있으면 영어를 못하니 나에게 말한다. 그런데 영어를 못하는 Mr 고는 인격의 타입으로 보자면 해외 교포를 다루는 조선어 안내원의 타입이었는데 영어 통역를 하는 두 안내원들은 그들과 타입이 다르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차이에 대하여 말해보려고 한다.
- 영어 통역들은 서양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동, 말, 생각에 있어서 케주얼하고 쉽게 친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해외 교포들에서 처럼 “조국 방문”이나, “같은 민족”의 공통점 같은 이야기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아예하지도 않는다. 고과장 역시 그 면에서는 다르지 않겠지만, 영어 통역을 오래 해온 안내 동무들이 고과장과 다른 것은 그들 자신이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에서 조금, 또는 꽤, “서양화”되어있었다는 것이다. 북한사람에게서 기대하지 않을 만하게 개인주의의 면이 보였다. 오 안내 (Mr 오)의 경우에는 사람이 사는데 중요한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여러 번 한다. 자기 가족이야기, 5살 정도의 아들이야기, 고난의 행군 때 어려웠던 이야기, 그리고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고난의 행군 당시에 몇 백만이 죽었다는 이야기. 고난의 행군 때 몇 백만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한국이나 영어 세계에서도 반북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정도가 아니면 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북한에서 안내원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해프닝이었다. 그런 말은 버스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 나와 둘이 조선어로 이야기를 할 때 나온 말이었지만, 오히려 내가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 그를 위하여 걱정을 할 정도이었던 상황이었다. 사실 나의 개인적인 판단은 고난의 행군 때 죽은 사람들의 수는 몇 백만이 아니라 몇십만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서양인들과의 접촉에서 북한의 보통 사람들이 대부분 잘 모르는 것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아이폰이 유난히 크게 보이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나의 아이폰은 7플러스였는데, 전화 케이스용 파우워뱅크를 끼워서 전화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또 내가 가끔 cordless bluetooth headset을 귀에 꽂고 있으면 그건 뭐하는 건가, 등 전자 gadget에 호기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 미스 킴에 경우는 아직 25세 정도로 젊은 데, 영어는 유창하고 사람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북한의 모범생들 같은 안내원의 스타일이 아니다. 호주에서 보는 젊은 동양 여성 같은 분위기이다. 동시 통역을 하는데 그 스피드는 영어세계에서 오래 살아온 나도 딸아가지 못하는 스피드 였다. 퀘이커 여자들과 많이 이야기를 하느라고 나와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는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자기는 통역을 계속할 의사는 없고 앞으로는 비지네스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버스에서는 여러 번 영어 노래를 불렀는데, 나보다 영어노래를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미스킴의 경우에는 통역은 하되 관광객들에게 전혀 북한을 좋게 보이려게 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 과거에 보아온 안내원과는 다른 새로운 타입이었는데, 그것이 결국 영어 통역 안내를 오래하고 있는데서 생긴 것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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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Mr오, Miss 김, Mr 고, 버스운전기사 (이름은 잊었다.)
1] Miss 김, 마지막 날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 그 전날 가르처준 조선 말, 몇마디를 테스트하는 장면이다.
Sejin Pak
8 November 2018 ·
[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 (5) 북한여행에서의 드라마 (1) – 머리에서 피가 콸콸, 그런데 그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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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퀘이커 일행의 모두가 선양에 까지 와서 같이 평양에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은 (2)회의 글에서 쓴 것같이 우리 모두에게 숨이 넘어갈만한 드라마여서, 그런 드라마가 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런 일이 평양에 도착한 첫날 밤에 또 일어났다. 우선 선양에 비행기를 타는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 선양에서 평양까지의 항공시간은 약 1시간 조금 넘게 걸렸던가? 작년에 탔던 비행기보다 비행기가 더 커젔다. 작년에는 한 줄에 중앙의 복도를 중심으로 왼쪽에 2석, 오른 쪽에 2석으로, 총 4석인 작은 비행기였는데, 이번에는 총 6석이고 비행기도 더 길다. 좌석이 가득 찾다. 손님들은 북한 사람들이 제일 많고, 중국인들이 다음으로 많고 백인들이 조금 보인다. 고려항공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수속할 때 보인 장면에서는 북한 사람들은 모두 어마 어마한 양의 짐을 가지고 북한으로 돌아가는데 대부분 중국서 뭔가를 사기지고 가는 모양이다. 70-80년대의 북미행 대한항공에서처럼 보따리 장사를 하는 것 같이 보인다. 통제사회인 북한에서 비행기 여행를 통한 보따리 장사가 어떻게 성립되는지는 모르겠다. 정보가 충분하면 분석해 볼 만한 이야기꺼리이다.
- 평양 비행장에 도착하여 통관을 하는 것도 작은 드라마였다. 북한 사람들은 그 많은 짐을 문제없이 다 통과시키는가 본데, 우리 일행 중에는 노트북 컴퓨터를 가저 온 사람들이 몇 명 되는데, 그 컴푸터의 내용물이 북한 세관에서 통관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 세계 각국을 다니며 퍼마컬처에 대해 가르치며 다니는 로우는 자기 노트북안에 메모리에는 자기의 삶의 전부가 들어있는데 북한을 방문후에 인도에 가려기 때문에 노트북을 가저왔지만, 북한을 방문하려다가 노트북을 잃으면 어쩌나하고 대단히 걱정했는데, 전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어떤 책을 가저 온 어떤 이에게는 그 책을 공항에 맡기고 가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또 그냥 가저가라고 했다고 한다. 하여간 북한도 바뀌고 있어서 공항의 세관 직원들도 반드시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모르는 듯했다.
- 통관이 끝나고 공항의 바깥 쪽으로 나가니, 안내원 세명이 버스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호텔을 우리 여행 스케줄에 나온 평양호텔이 아니라 더 고급스러운 고려 호텔이었다. 고려 호텔은 북한으로 보아서는 최 고급 4스타 호텔일텐데, 시설의실제수준은 국제적으로 3스타 정도일 것이다. 방을 배당 받는데, 12명이니 방이 더블로 6개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더블이 다섯개이고, 싱글이 둘이라고 한다. 왜 그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서로 짝을 지으니 나와 윌마라는 여성이 남는다. 만약에 더블방이 여섯이었다면 나는 윌마라는 여성과 방을 같이 써야 될 번했다. 나는 그때까지 별로 생각을 해 보지 않았는데, 윌마는 싱글방을 얻어서 안도의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 덕분에 나도 싱글방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나의 방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은 모두 20몇층이상의 높이에 있는 자기들 방에 올라가고 나만 일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일층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안내동무가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금강산 국제여행사 사장이라고 한다. 그래서 호텔 일층의 커피 집에서 여행사 사장과 약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호주 퀘이커가 단지 관광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북한과 관계를 맺으러 온 것인데, 호주 퀘이커가 얼마 만큼 북한의 농장이나 농업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건가? 호주 퀘이커가 원하는 것이 무었인가? 등의 질문에 내가 답을 하는 것 이었다. 나는 이번의 호주 퀘이커 그룹은 북한하고 관계를 맺으러 온 것인데, 어떤 관계가 좋은지는 아직 찾고 있는 단계라고, 농장에 관심을 보인 것은 미국퀘이커가 북한의 협동농장의 몇과 협조관계에 있으므로 그 케이스를 한번 검토해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고, 그러나 농업아닌 다른 분야라도 좋다고 말했다. 그런데 오히려 북한 당국 측에서는 호주 퀘이커에게 북한의 어느 협동농장을 지정해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는 실은 평양에 오기 전에 들었으므로,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장은 나에게 대해서도 물었다. 나는 사회학이 전공이었고, 카나다에서 호주로 갔고, 호주 대학에서 가르치다고 은퇴했고, 외할아버지가 옛날에 북으로 가셨고, 애국열사능에 묻히어 있어 그 관계로 북을 방문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장은 그 외로 나에 신원에 대하여 여러가지를 물었다. 내가 호주 퀘이커 그룹을 대표하는 사람은 아닌데도, 그는 나를 대표로 취급하는 듯했다.
- 아직도 여행사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오 안내동무가 나에게 와서, 빨리 오라는 것이다.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일층 로비에 소파들이 있는 쪽으로 갔더니 윌마가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고, 피가 나는 자리에 덴 손수건 같은 것이 작아서 피가 흐른다. 나는 빨리 내 가방 속의 중간 사이즈 타올을 꺼내어 주었는데, 그런 수건도 빨리 빨게진다. 모두가 놀래 당황하고 있다. 호텔의 스타프는 호텔의 간호실로 데려가자고 하는데 퀘이커 여성들은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거의 다투고 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고 있다. 호텔 스타프는 호텔에도 의사가 있으니, 우선 호텔간호실로 가서 응급치료를 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그러기로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호텔간호실로 간다는데 투윈 타워의 다른 타워의 에레베타를 타고 20 몇층인가로 올라간다. 올라가 보니, 호텔간호실이라는 곳이 다른 호텔 방과 똑 같은 방이다 간호실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고급 호텔에 제대로 된 의 간호실이 없다는 것은 예상 외였다. 그러나 몇분 후에 의사라는 사람이 왔다. 머리에 상처를 조금 검사하더니 상처가 커서 병원에 가야하겠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내가 준 중형 사이즈 (100 x 30 cm)의 타올이 피로 다 젔어서, 호텔 타올을 쓰자고 했더니, 그 층의 호텔 스타프가 놀랍게도 주저한다. 호텔에 코스트가 생긴다는 것이다. 호텔의 스타프들이 코스트에 대한 의식이 강한 듯하다. 호주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이 사람들이 뭐가 중요한가에 대한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은 주게 되었다. 사람이, 더군다나, 호텔의 손님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타올 하나가 뭐가 문제인가?! 그래도 타올이 보이는데도 쓰게 하려 하지 않아서 내가 가지고 다니던 아주 작은 (25 x 25cm) 손타올을 또 꺼내주었다.
- 병원에 윌마를 대리고 가기로 하고 나와 오 안내동무, 그리고 퀘이커 여성 수가 같이 가기로 했다. 그런데 엠불란스 차가 아니라도, 택시 같은 차로 가는 줄 알았는데, 우리를 공항에서 태우고 온 약 50인 용 짜리 버스를 타고 간다. 어디를 가는지 모르겠지만 길도 않 좋고 버스라서 느리다. 때도 6시 반 정도인가 여서 평양의 일종의 러시아워이다 아마도 심적 상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처음으로 평양에 차가 많다는 느낌이었다. 윌마는 피로 젖은 수건으로 머리의 상처난 부분을 계속 누르고 있는데 힘이 들어 수에게 조금 대신 누르고 있어 달라고 한다. 수가 대신 누르려고 하는데, 남이므로 어느 정도 눌러야 되는지 모르니, 너무 눌러서 아프다는둥, 너무 적게 눌러서 피가 나온다는 둥, 윌마도 불평이 많다. 병원이 이데 길레 30분 정도 버스로 왔는데도 병원이 나올 만한 지역이 아닌 주택가 같으다. 운전 기사도 이데로 가는 건지 몰라 오동무가 계속 전화로 묻고 운전 기사 동무에게 설명을 한다. 누구나 아는 병원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나중에 들은 설명을 종합하여 설명해 보자면, 우리가 가고 있는 병원은 평양의 외교관 구역에 위치하여 있는 <평양친선병원>이라고 불리우는 외국인 병원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가본 적이 없어서 전화로만 물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버스를 여러 번 세우고 길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서 간다. 어떤 어느 정도 고급주택가 처럼 보이는 구역으로 들어가니, 길 입구에 군인인지 경찰인지 보초가 서 있다. 그 보초에게 오 동무가 신분증을 보이고, 친선병원이 어느 쪽이냐고 길을 묻는다, 그러자 보초는 맞는 곳을 찾아왔다고, 계속 이 길로 가다보면 뭐가 나오는데, 거기서 어디로 가라는 식의 설명을 한다. 버스가 다니기에는 충분히 큰 길이 아니다. 그러나 설명대로 한참 가더니, 아, 너무 온 것 같다, 해서 돌아가야겠다고 한다. 그런데 버스가 커서 돌릴 수가 없어서 버스를 같은 방향에 두고 꺼꾸로 몇 십 미터를 가서 나오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가끔 적십자 사인이 있는데 충분하지가 않다. 와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찾기가 힘들게 되어있다. 그리고 주택가 같은 지역이어서 전혀 병원이 있으리라고도 보이지 않는다.
- 그러나 결국 친선병원에 도착했다. 저녁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다. 건물은 약간 소련 스타일이고, 학교같이도 보인다. (사진) 약 50미터 정도의 길이로 크지도 않으나, 작지도 않다. 호주에 돌아와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보니, 세계뉴스에도 자주 나온 병원이었다. 그 유명한 미국인 청년 웜비어가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모양이다. 이 병원의 웜비어를 치료했던 의사들이 웜비어가 고문을 당했다는 미국 뉴스에 대해 항의를 하는 글이 나온다. 웜비어만이 아니라 미국구적의 한인 목사 케네스 배라는 사람도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나온다. 그러나 이 병원에 대해 인터넷에서 기사를 읽기 전에 이 병원에서 윌마를 치료한 것을 경험한 것 만으로 이 병원에 대해 평가를 하자면, 이 병원 (의사, 간호사, 치료 방법, 수준)은 믿을 만한 곳이었다.
- 나이 약 50이 되는 남자의사와 40대의 여자 간호사가 윌마를 치료했다. 윌마의 머리의 상처는 그 동안 수건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피가 나오던 것은 멈추어 있었다. 그런데 피가 흐르던 곳 주변에 피가 말라서 머리카락이 떡처럼 붙어있었다. 의사는 우선 소독액으로 상처 근처의 마른 피를 닦아내며, 필요한 곳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점점 머리가 찢어진 부분의 속까지 닦아냈다. 머리의 오른 쪽 뒤의 부분에 약 3센치의 길이가 찢어젔다고 한다. 상처 속에 고여 응고한 피도 씻어낼 수 있는 한 씼어내고 찟어짓 곳을 세바늘 꾸메기로 했다. 그런데 왜 그런지 마취제가 없이 꾸멨다. 약이 없어서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외국에서는 치과에서 치료를 할 때도 부분 마취를 간단히 하는데, 머리의 상처를 세 바늘 뀌메는데 마치를 하지 않고 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옆의 방으로 나가 있었는데, 윌마의 비명이 들려온다 마치 고문받는 소리를 듣는 듯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그날의 치료는 무사히 끝났다.
- 윌마라는 여성에 대하여도 한 마디 적어둔다. 윌마는 1947년 생인데, 아마도 수십년 전부터 퀘이커 였던 것 같다. 아직도 아주 여러 가지 일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데, 간단히 줄여서 말하자면 아동카운셀링, 마사지 테라피스트, 등의 일을 계속하고 있다. 어떻게 북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책일기 그룹에서 Captain North Korea인가? 라는 북한에 관한 소설을 읽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 만으로는 설명이 않되는 부분이 있는데, 뭐든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강하고, 아주 말을 하기를 좋아한다. 미리 소게에 있는 것을 뭐든지 말해버리는 타입인 것 같으다. 친선병원에서 치료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 말을 하려고 한다. 또 의사가 자기에게 뭐를 하고 있는가를 계속 묻는다. 그래야 마음이 안정이 되는 타입이다. 의사가 알아서 하겠지가 아니라, 의사가 뭐를 하는지 알아야 하고, 직접 의사가 설명을 못하니, 통여게게 물어, 통역이 의사에게 묻고, 의사가 답을 하면, 또 통역이 설명을 해야하고, 그러면 그 말을 듣고, 또 자기도 그 말에 대해 뭔가 자기 표현을 말로 하고 싶어한다. 그러자니 치료를 하고 있는데 머르를 자꾸 움직이게 된다. 그러자 의사는 계속 말을 하지 말고, 고개를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문화의 차이이다. 의사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치료하는 타입이고, 윌마는 소통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타입이다.
- 첫날의 병원에서의 치료는 이렇게 끝났고, 여러가지 약을 받아왔다. 그 중에는 호텔로 돌아가면 호텔의 의사로부터 닝겔주사를 매일 맞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 병원에 아침부터 오고 매일 오라 그런다. 그러자 윌마는 이제 치료보다 관광에서 빠지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나 만이 아니라 모두가 윌마의 사고로 그룹 전체의 여행계획에의 영향에 대하여 걱정이었는데, 첫날 치료는 비교적으로 성공이었고, 결과는 더 기다려 보아야 하겠지만 우선은 좋은 편이었다. 병원에서 호텔로 돌아가자 밤 11시 경이 되었는데, 윌마와 수는 같이 호텔의 방으로 식사를 가저와서 하기로 했다. 나는 돌아왔더니 남자 안내동무 둘이 식사를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둘 만이 아니라 여행사 사장도 나를 위해 저녁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넷은 밤 11시에 고려 호텔 제일 위의 층의 회전 식당에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였다. 그 첫날 밤에는 병원일의 충격으로 나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는데, 후에 생각해 보면 나와 식사를 같이 해 주기 위해 세분이 다 나를 기다려 준 것은 상당한 대우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식사를 하면서 또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 내용이 별로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 다음 날에는호주 퀘이커 그룹의 일정에는 판문점과 개성에 가기로 되여있었는데, 나는 윌마를 위해 병원에 가 주기로 했다. 영어를 하는 안내 동무 중 한 명이 같이 가는 것도 한 방법이었는데, 윌마를 정신적으로 안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내가 같이 가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러기로 했다. 그런데 여행사에서는 영어를 못하는 다른 안내를 나와 윌마를 병원에 동행하도록 보내어 같이 가게 되었다. 버스는 관광단을 태우고 판문점으로 가고, 우리는 택시로 병원에 갔다. 이날 병원에서의 치료는 전 날보다 훨씬 간단했다. 상처를 꿰맨 곳의 실을 푸는 것은 보통은 10일 정도 후에 하는 것인데, 꿰맨 의사가 푸는 것이 좋으니 일주일도 않되겠지만, 출국 하루 전인 금요일에 풀자고 하였다. 그런데 윌마는 이제는 계속 관광에서 빠지는 것이 걱정이다
- 병원에서 호텔로 돌아 오니 약 오전 11시 정도가 되었다. 윌마는 머리에 미이라 처럼 붕대를 감고 있어서 모든 눈들의 주목 거리였으나, 전혀 상관하지 않고 다녔다. 12시에는 나는 윌마와 둘 만이서 호텔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다. 둘 만이 있게 되니, 서로에 대하여 여러가지를 이야기 하게 되었다. 우리는 처음을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호텔 식당에서 두 시간 이상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니, 나중에는 식당 메네저가 와서 식당을 다음 코스를 위해 준비해야 되니 자리를 옮겨 달라고 한다. 윌마는 호텔 의사를 보러 가고 나는 할일이 없어 호텔 밖을 걷고 싶은데, 새로온 안내 동무에게 그래도 되냐했더니, “오늘은 방에서 푹 쉬십시요”라고 한다. 나는 다른 나라에서 돈을 들여 조선을 보러 왔는데 대낮에 방에서 쉬라구요? 내가 혼자 나가도 되니 주위를 좀 돌다 오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건 길을 잃거나 해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나는 세계의 다섯 나라에 오년 이상씩 살았고, 수십개의 도시를 여행했고, 중국어도 하지 못하면서 중국 도시들을 여러 곳 혼자서 여행했는데, 조선 말이 통하는 이 곳에서 호텔 밖에서 길을 잃는다고요? 라고 되물었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북에서는 여행객이 혼자 다닐 자유가 없다는 것이군요, 라고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니라며 당황해 한다. 나는 젊은 안내 동무를 더 힘들게 만들어 주게, 호주에 돌아가면 이런 대화에 대해서도 글을 다 써야겠다고 했다. 더욱 더 당황해 한다. 안내원 일은 자기 일이 아니란다. 오늘 갑자기 부탁이 와서 나오게 되었는데 내일 출장가는 것이 있어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한다. 나이가 약 27정도로 보이는 영화배우 같인 잘 생긴 남자이다. 그래서 지금은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답을 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학에서는 무슨 전공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역사를 전공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역사를 공부했냐고 다시 물었더니 조선 혁명사를 했다고 한다. 나는 또 다시 그 공부가 지금 하는 일에 도움이 되느냐고 물었더니, 물론 도움이 된다고 한다. 누구나 다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야기가 점점 서로에 대한 호감이 생기는 방향으로 진전이 된다. 내가 호주의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은퇴했디고 하니 자기 아버지도 대학에서 가르친다고 한다. 다음에 조국방문 하실 때는 꼭 자기를 불러달라고 했는데 이름을 적어놓은 종이를 잃어버렸다.
- 할 일이 없어 윌마의 방을 찾아가서 사고가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났는가 자세희 설명을 해 달라고 했다. 그 때 까지는 안내 동무의 말을 들으면 윌마가 호텔 방의 창문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다가 넘어저 탁자에 머리를 찌었다고도 하고, 한 배 늘려서 윌마가 “사진을 찍으려 탁자에 올라섰다가” 넘어저서 머리를 찌었다고도 들었다. 이런 설명은 하기에 따라 책임의 소지가 어디에 있는가가 완전히 달라진다. 오 안내의 설명에 의하면 잘못은 윌마에게 있다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나는 윌마에게 직접 듣기로 했다. 윌마에 의하면 탁자위에 올라선 것은 전혀 아니고, 사진 찍는 것는 것 과도 직접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라, 창문에서 밖의 사진을 찍은 후에 방안 쪽으로 걸어 오는데 방 바닥이 편편하지 않고 단이 있는 곳이 있었는데 그걸 보지 않고 밟고 미끌어저서 머리 뒷 부분을 뒤에 있던 탁자의 모스리에 찌었는데, 머리의 그 부분이 찟어젔다는 이야기였다. 윌마의 설명에 의하면 호텔 방 바닥이 편편하지 않고 단이 있는데 그걸 잘못 밟아서 미끌어 진 것이니 책임은 호텔에 있는 것이다. 호주에서라면 모든 책임이 완전히 호텔에 있는 것이 누구에게나 분명하나, 북한에서는 그런 안전의식이 업고, 거기에 따른 책임인식도 없다. 그 날 이후로 호텔에 다른 곳을 주의하여 관찰하니 호텔의 여기 저기에 작은 스텝이 있는 것이 보이는데 주의하라는 말이 쓰여있지 않다. 그 때부터 호주 퀘이커 그룹들 사이에서는 “저기 또 윌마가 있으니 조심해라”하는 말이 생겼다.
- 다음 날에는 나는 윌마와 병원에 가는 것은 오 안내동무에게 맞기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다녔다. 그런데 윌마가 관관의 단체행동에 빠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고 고 과장은 점점 우리의 스케줄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윌마의 병원 방문 시간을 가능한 한 일찍이 하고, 윌마가 병원에서 치료가 끝나는 시간에 모두가 함께 버스로 병원에 가서 윌마를 픽업하는 방식으로 하여 윌마가 전혀 빠지는 것이 없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전혀 생각도 못했던 flexibility였다. 퀘이커 그룹의 일원도 모두 불평없이 윌마를 위한 스케줄 개정을 환영했다. 윌마의 사고는 처음에는 위기처럼 보였고 그것 때문에 우리 모두의 여행 계획에 큰 타격이 있지 않을까도 생각하게 되었으나, 아무도 생각치 못했던 북한 사회에서의 융통성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 총 치료 비용은 미불 300불 미만이었다. 윌마의 상처는 빨리 나아 실을 일찍 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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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친선병원에서의 치료 관경 (2일 째)
2] 윌마 이틀째 병원에서 돌아와서 호텔 방에서 나에게 사고의 경위를 설명한다
3] 사고의 원인: 호텔방 바닥에 단이 있다.
4] 윌마가 호텔 메네저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있다. 메네저는 호텔에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5,6] 친선병원에 가는 길 - 거리 상으로는 그리 멀지도 않은데 첫날 버스를 타고 갈때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가는 길을 잘 몰라서 꽤나 멀게 느껴젔다. 호주로 돌아와서 구글맵으로 보니 더 잘 알게 된다.
7], 8] 친선병원 (인터넷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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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박정미, 회리 and 2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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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 (7) 평양친선병원의 영수증이 말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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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퀘이커 여성이 머리가 3센치 정도 째어저서 평양친선병원에서 나흘에 걸처 치료를 받고 약값을 포함한 치료비을 지불하고 영수증을 받았는데, 그 경험에서 나오는 정보를 분석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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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퀘이커 여성이 머리가 3센치 정도 째어저서 평양친선병원에서 나흘에 걸처 치료를 받고 약값을 포함한 치료비을 지불하고 영수증을 받았는데, 그 경험에서 나오는 정보를 분석해볼 수 있다.
1] 우선은 치료비의 액수
- 병원 방문은 총 4회, 미불로 지불: 35, 45, 10, 10, 32, 총 132불
- 첫번째 방문은 약 두시간 걸렸고, 약값이 포함되었다. 마지막 방문에는 상처를 꿰멘 실을 뽑는 작업이었다.
- 호주에서라면 총 비용이 4-5배 정도 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정부가 내는 부분이 있고, 의료보험이 내는 부분이 있어, 개인부담은 잘은 모르겠으나 약 20%정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 북한의 주민이라면 의료가 무료라고 하는데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겠다.
- 외국인의 경우는 외화로 지불하는데 외교관은 자기부담도 아니겠지만 괭장히 싼 것이다.
- 병원 방문은 총 4회, 미불로 지불: 35, 45, 10, 10, 32, 총 132불
- 첫번째 방문은 약 두시간 걸렸고, 약값이 포함되었다. 마지막 방문에는 상처를 꿰멘 실을 뽑는 작업이었다.
- 호주에서라면 총 비용이 4-5배 정도 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정부가 내는 부분이 있고, 의료보험이 내는 부분이 있어, 개인부담은 잘은 모르겠으나 약 20%정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 북한의 주민이라면 의료가 무료라고 하는데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겠다.
- 외국인의 경우는 외화로 지불하는데 외교관은 자기부담도 아니겠지만 괭장히 싼 것이다.
2] "외화 령수증"이란 것
- 재정성 발행
- 친선병원은 정부의 서비스기관으로 정부를 위해 외화를 모우는 한 단위이다.
- 이 령수증은 비록 손으로 쓰지만 그 관리가 전산화되어있을 뿐 아니라 영수증을 만든 종이가 지페를 만드는 방식을 택해 위조로 발행하지 못하게 종이안에 무늬를 만들어놓았다.
- 그런데 영수증을 그렇게 신중하게 만든 것을 그럴 필요가 있어서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보면 사기행위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지 궁금하다.
- 재정성 발행
- 친선병원은 정부의 서비스기관으로 정부를 위해 외화를 모우는 한 단위이다.
- 이 령수증은 비록 손으로 쓰지만 그 관리가 전산화되어있을 뿐 아니라 영수증을 만든 종이가 지페를 만드는 방식을 택해 위조로 발행하지 못하게 종이안에 무늬를 만들어놓았다.
- 그런데 영수증을 그렇게 신중하게 만든 것을 그럴 필요가 있어서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보면 사기행위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지 궁금하다.
Sejin Pak
8 November 2018 ·
[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6) 또 하나의 작은 드라마 (2) - 평양에 가서 안경이 부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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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안경의 도수가 높아서 안경을 벗으면 사람이 가까이 있어도 누군지 모른다. 몇년이고 여행을 할 때는 만약을 위해서 여분의 안경 (주로 헌 안경)을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한번도 내 안경에 무슨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가끔 여행 중에 침대에서 뭔가 읽다가 안경을 옆에 벗어놓았다가 눌러서 찌그러트리고 다시 피는적은 있어도 안경이 부러진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은퇴 후에는 그 만약을 위한 준비가 느슨해 지기 시작해서 여분의 안경을 가지고 다니지 않기 시작했다. 그런 것이 이번 퀘이커의 북한 여행중에 평양에서의 두쨋날에 안경 다리가 부러젔다.
- 처음에는 정말 당황했지만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곧 큰 감정이 없이 대처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런 저런방법을 생각하다가, 호텔 방의 경대 서랍에 바늘과 실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늘에 실을 꿰어 안경테의 틈을 지날 수 있다면 실을 두겹으로 하여 귀걸이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해 보니 그럴 듯하게 만들어젔다. 그래서 임기응변으로 한쪽이 실다리로 된 안경을 우선 쓰고 다니면서 좋은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 일행이 나의 안경 다리가 실로 된 것을 발견할 때까지 한참 걸렸다. 그걸 보면 최악의 경우에 일 주일 정도 이러고 조심해서 다니면 호주에 돌아가겠다는 생각에 조금 안심이 된다.
- 안경 다리를 고치는 방법을 찾으려고 나는 호텔의 카운터에도 묻고, 안내동무 고과장에게도 물어보았다. 호텔 카운터에서는 호텔 지하실의 구두수선방이 있으니 가보라고 하고, 고과장은 안경 잘고치는 곳이 평양에 있는데 좀 멀다고 한다. 그래서 방법을 좀 생각해 보겠다고 한다. 우리들의 여행일정의 코스와 멀면 쉽게 찾아가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우선 실다리 안경을 조심스럽게 쓰고 다녔다. 그런지 사흘 째가 되는 날, 갑자기 오늘은 다른 곳에 가기 전에 모두가 버스로 안경점에 가서 박선생님(나)의 안경을 수리한 다음, 그 다음 스케줄을 따라가기로 한다고 한다. 그렇게 간곳의 위치는 어딘지 모르나, 어느 안경점에 들어갔다. 수리공에게 안경을 보이고 고칠 수 있겠냐고 하니 고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고치면 메키가 벗어질 것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메키 정도는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약 10분 정도에 부러진 다리를 용접으로 부첬다. 메키가 좀 벗어지기는 했어도 잘 고첬다. 얼마를 줄가 했더니 미불 2달라를 달라고 한다. 나는 3달라를 주고 고맙다며 사진을 한장 찍어도 좋은가 묻고 사진을 찍어 왔다.
- 이 두번째의 "위기"를 모면하면서 나는 안내동무들이 손님들을 위해 보여준 융통성과 헌신을 새삼스럽게 음미하게 되었다.
- 그런데 애들레이드에 도착하여 2주 정도가 되자 수리한 안경다리가 같은 곳이 다시 부러젔다. 용접한 곳이 스트레스에 약한 듯하다. 나는 안그래도 시력이 조금 바뀌어 시력검사를 새로 하고 안경을 새로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나에게는 이 부러진 안경은 조금 버리기 힘들게 생겼다. 언제인가 손주가 할아버지 이 부러진 안경은 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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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26 November 2018 ·
[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 (7) 북한의 농장 – 장천농장 Changchon (Jangchon) Coop Fa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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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농장은 평양시의 남동쪽의 사동구역에 있다고 되어있는데, <평양시 사동구역 장천동>이라면 시내인 것 같은데, 가 보면 시외인 것도 같다. 시외라는 지표는 평양시에 들어가는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장천농장에 가는 것은 나에게는 이번에 퀘이커 그룹과 같이 가기 이전에, 작년에 누나 반아님과 둘이서 (안내원과 같이) 가 본적이 있어서, 이번이 두 번째이다. 이번에는 단체로 버스를 타고 가서 별로 검문소를 인식하지 않았는데, 작년에는 3명이 택시를 타고 갔는데, 검문소에서 통과를 빨리 시켜 주지 않고, 안내동무의 설명과 증빙서류만에 만족하지 않은 권총을 찬 보초가 어딘가 전화를 하여 확인하고 나서 통과가 되어 <평양시 출입통제>라는 그 인상이 나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장천농장은 북한의 모든 농장처럼 협동농장이나, 거기에다 <남새전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정식 이름이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이다. 평양에 가깝게 위치하여 평양에 남새(야채)를 공급하는 농장이다. 이 지역에는 아마도 옛날부터 협동농장이 있었겠지만, 그 협동농장이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이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모델농장>이 된 것은 불과 3년 전인 2015년이다. 모델농장이 되고 난 후로는 국내용만이 아니라 국외용 신문잡지에 자주 등장할 뿐 아니라, 외국인 관광코스에 까지 들어 있어서, 이건 순전히 선전을 위한 모형이 아닌가도 생각하게 되는데, 그건 아니다.
해외동포들을 향한 기사에는 장천농장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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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사람들도 부러워하는 희안한 농장도시>
수도의 교외에 있는 장천지구에 경사가 났다.
수도시민들에게 사철 신선한 남새를 먹이시려고 늘 마음 쓰시던 위대한수령님들의 사랑과 로고가 뜨겁게 어려있는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이 불과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경애하는원수님의 은정속에 로동당시대의 또 하나의 선경으로, 사회주의농촌문화건설의 본보기, 기준으로 천지개벽된것이다.
자연에네르기를 리용하여 생태환경온실로 전환된 수십정보의 토벽식박막온실들과 궁륭식련동온실들이 넓은 면적에 펼쳐지고 현대적인 콤퓨터들과 여러가지 분석설비들을 갖춘 과학기술보급실과 토양분석실, 병해충검사실들에서는 온실남새와 농작물비배관리를 더 과학화하기 위하여 농장원들이 탐구의 열정을 바쳐가고있다. 또한 세대마다 태양열물가열기와 태양빛전지판이 설치되고 메탄가스공급체계가 세워진 현대적인 문화주택창가들은 꿈만 같은 행복에 겨워 밤이 깊도록 불빛이 꺼질줄 모른다.
그뿐이 아니다.
종합적인 편의봉사기지인 장천원과 중앙의 예술극장 못지 않은 문화회관, 그네타기와 씨름, 널뛰기를 할수 있게 훌륭하게 꾸려진 민속놀이장이며 수영장, 로라스케트장, 배구장들에서는 도시사람들 부럽지 않는 문명한 생활을 누려가는 농장원들과 자녀들의 랑만에 넘친 웃음소리, 노래소리가 끝없이 울려퍼진다.
하기에 농장을 찾는 사람들은 천지개벽된 장천지구의 모습이 아름다운 농촌을 형상한 한폭의 대형전경화같다고, 볼수록 멋있는 별천지, 도시사람들도 부러워할 희한한 농장도시라고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 강성국가의 휘황한 미래와 사회주의문명국의 높이가 한눈에 안겨온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군 한다.
오늘 장천남새전문협동농장의 전체 농장원들은 경애하는원수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모두가 남새박사, 농산박사가 되고 남새생산의 과학화, 집약화수준을 더욱 높임으로써 남새재배관리와 생산에서도 전국의 본보기가 될 결의에 충만되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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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사의 키워드를 일열해 보면:
1] 자연 에너지 이용, 야채의 생태환경 온실재배
2] 컴퓨터를 이용한 과학적 관리
3] 세대마다 에너지 절약형 문화주택
4] 종합적인 편의봉사 기지, 문화 교육 스포츠 회관
5] 전국의 본보기, “농촌 현대화의 모범”
여기 적혀있지 않은 것은:
6] 보육원 시설
7] 가까이에 있는 장천 농업기술중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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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는:
약 400 새대, 1,300여 농장원
총 면적이 69정보, 68만4천 m2, 총 665동의 온실, 온실면적이 45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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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에 가깝게 다른 야채전문의 협동농장들이 많이 있다. (로동신문, 2018.1.19)
- 락랑구역의 중단남새전문협동농장
- 사동구역의 리현남새전문협동농장
- 력포구역의 류현남새전문협동농장
- 만경대구역의 칠골남내전문협동농장,
- 대성구역의 대성남새전문협동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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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장천농장은 모델농장으로서 북한에서는 정부가 투자를 많이 한 이상형이긴 하겠지만, 허수아비 같은 모델은 아니다. 지방에서도 같은 모델이 번저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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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장천농장을 방문하게 된 것은 내가 특별히 농장과 공장을 견학하고 싶다고 말하여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번에는 그런 주문도 없었는데 농장과 공장의 견학이 포함되어있었다. 그뿐 아니라 퀘이커 그룹이 장천농장을 방문하고 있는 동안에 중국인 관광단이 대형버스로 도착하여 같이 다니게 되었는데,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관심은 중국인 관광단의 관심보다는 더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농장측에서 보자면 중국인 관광단과 우리와의 차이가 보이지를 않았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중국인 관광단은 거의 매일 하루에도 몇번이고 찾아 오므로, 어떻게 보면 귀찮은 존재일 수도 있겠다. 매일 일상 생활로 농사짔고, 살아가고 있는데 수시로 수십명 그룹이 와서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사진 찍고 하는 것을 격는다면,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는 않을 상 싶다. 우리 그룹에게 농장에 대해 설명을 해준 60대 정도의 남성은 얼굴 표정부터, 짜증스럽고 귀찮은 일을 하는 것처럼 말을 하여, 우리 호주 퀘이커 일행중에 상대방의 심리분석을 잘하는 여성 수잔이 즉시, 저 사람은 귀찮아 죽겠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고 나에게 지적한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안내동무에게 가서 그 말을 한다. 그러니 안내동무가 그 농장의 강사 영감에게 가서 뭐라고 말을 했더니, 자기는 강사전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인데, 방문객들이 너무 많아서, 지금 다른 곳 어딘가에서 설명을 하고 있어서, 자기가 대신 나왔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말을 하고 나서는 죽을 상 같은 얼굴은 조금 피고 이야기를 한다.
내가 작년에 누나 반아님과 둘이서 방문했을 때는 약 3시간을 장천농장에서 보낸 것 같은데, 그 동안 다른 관광객은 전혀 없었다. 그리서 농장에 대하여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는 사람이 약 40대의 여성이였는데, 아마 농장일도 하지만 농장설명이 자기 전문이기도 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더군다나, 우리 안내동무가 아마도 우리 (나와 누나에) 대한 설명을 호감이 가게 정보를 준 것 같아서 강사동무는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친근하게 설명도하고, 이야기도 했는데, 이번 방문에서는 많은 관광객들로 형성된 방문단이 끊임없이 방문하는 상황이니 방문객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이 생길리가 만무하다. 역으로 마찬가지로 방문객도 강사동무와 가깝게 소통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또 조선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방문이기 때문에 모든 말을 통역을 통해서 해야하므로 소통의 양이 조선어로만 말하는 것은 1/3 미만이다.
단체방문객으로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밖에서 가지고 온 북한에 대한 이미지에 비해 근대화되어 있는 농촌마을이다. 우리 일행 중에는 농업전문가가 두명 (로스메리, 데비드) 이 있었는데 온실 안을 견학할 때 여러가지 질문을 했는데, 답이 시원치 않아서 조금 불만이었던 같다. ,토질에 관한 질문, 농약의 이용에 관한 질문, 등. 북한에서는 친환경 농법이라고 하는데 실태는 북한의 농장에서는 친환경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25
9Yisang Sohn, Paik Yonjae and 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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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26 November 2018 ·
[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 (8) 북한의 농장 – 장천농장 - 온실사진
+5
Sejin Pak
8 November 2018 ·
[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9) 어느 식당 - 사진에 굼주리시는 분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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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여행을 하면 반드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 노래하는 웨이트레스가 있는 식당이다. 나는 이런 식당의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우선 음악이 볼륨이 너무 높아서 불편하다. 그러나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한번은 경험해볼 만하다. 노래나 춤도 잘하는 경우라면 더욱 좋다. 이번 식당은 좋은 편에 들어간다.
- 그런데 이런 식당과 퀘이커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으면, 일반적으로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겠지만, 호주퀘이커의 경우에는 절대적인 채식주의자가 여러명이 있어서, 음식선택에서 주문이 까다로우니 그냥 모두가 채식으로하는 것이 준비하는 사람에게 간단하지 않을까 생각하여 그러자고 합의를 보고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 그래서 이 식당에서는 완전히 채식으로 나왔는데, 나는 채식으로 음식을 준비하자면 절의 음식이나 산채나물 중심의 음식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고 왔는데, 실제로는 휴전 푸드 같은 음식이 주였고, 대부분의 채식음식은 맛이 있었다.
- 나는 이런 종류의 북한 식당을 여러번 경험해서 새롭지 않지만 북한여행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시작한 퀘이커 친우들에게는 노래하는 웨이트레스나 쉐프는 조금 문화충격의 자극이 되었을 듯하다. 문화충격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저온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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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데오 3에는 일행 중에 생일을 맞은 사람이 있었다.
26 November 2018 ·
[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 (9) 평양 시외 길에서 보는 농장들
+2
-10] missing
Sejin Pak
2 December 2018 ·
[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 (11) 평양남새과학연구소 Pyongyang Vegetable Research Institute [영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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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d read about Pyongyang Vegetable Science Research Institute in an online article about a year ago as a place that North Korea was proud of. But the reason why we are visiting this place is not because we wanted to visit the place, but because we expressed a special interest in agriculture and farms. Perhaps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wanted to impress us with the place they pride in. This place is not included among the sites chosen for the mass tourism from China
Unlike other tourists in North Korea, the Australian Quakers are visiting North Korea to find a helpful role they can possibly play. If this fact is considered, the North Korea authorities need to show the areas of agriculture or farm are not doing well, thus requiring assistance. Showing what they think they are doing well is a bit contradictory to this a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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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새(야채)과학연구소에 대하여는 일년 전인가 인터넷에서 북한이 자랑하는 곳이라는 기사를 읽는 적이 있이 있었으나, 이곳을 방문하게 된 것은 우리가 부탁을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농업과 농장에 관심을 보였더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어서 참관지로 넣어 놓은 것 같다. 중국인들의 대량관광지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으나, 우리에게는 볼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다른 관광객들과는 달리 북한의 농장을 도와주고 싶어 우리의 역할을 찾고 있는 호주퀘이커 그룹에게는 한편으로는 도움이 필요한 측면을 보여주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는 이렇게 잘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니, 목적이 조금 충돌되는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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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order to write this post, I searched for and read the articles on Pyongyang Vegetable Research Institute. I summarise a couple of the key points about the institute that emerge in the articles:
1] PY Vegetable Research Institute was established in 2011. It has production facilities in hydroponic green houses and in non-hydroponic green houses, and a research institute with advanced bio-science research equipment. It is a gigantic production site of 1.43 million m2 in total area. About 80 agricultural science researchers and a large number of production workers work here.
2] Chairman Kim Jong Eun seems to give more emphasis on vegetable production than grain production. Thus, this institute seems receive a special attention and support from the Chairman Kim.
Some instructions from Chairman Kim:
a) Try to achieve a dramatic increase in vegetable production, then wwork work on spreading of the production knowledge to other production sites the country.
b) Establish regular yearly conferences for all greenhouse vegetable producers in the country to discuss the achievements and their experiences, and produce and distribute guidebook on greenhouse vegetable production throughout the country.
In other words, this institute is a key national centre for agricultural education on vegetable production in greenhouse. Chairman Kim even talks about the issue of housing not only for the resident researchers, but also that for the visiting experts from the whole country.
One interesting point that is observed by a foreign visitor to this research institute if s/he could read Korean is that there are a lot of political slogans posted throughout the greenhouses and the entrance halls. Though this place is supposed to be a scientific institute, there is a lot of emphasis on ideological (or spiritual) movement not only for production workers, but also for scientific researchers. (Please read the commentaries attached below the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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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을 쓰기 위해서는 평양남새과학연구소에 대한 여러 기사들을 찾아 다시 읽고 쓰는 것이다.
여러 기사의 요점을 요약하면:
1] 평양남새과학연구소는 2011년에 문을 열었는데, 수경온실, 박막온실, 첨단생물공학연구설비등이 갖추어있고, 총면적이 143만 m2로서, 거대한 생산기지이기도 하다. “연구사” (연구원)이 80여명, 그 외로 상당수의 생산노동자들이 여기서 일을 한다.
2] 김정은 위원장은 농업에서 알곡생산보다 야채생산을 중요시하는 듯하고, 이곳은 김위원장의 지지를 받고 있는 곳인 것 같다.
김 위원장의 지시:
a] “정보당 남새생산을 비약적으로 늘리는 것과 함께 이룩된 성과와 경험을 다른 단위들에 널리 보급하기 위한 사업도 짜고 들어 진행해야한다.”
b] “해마다 전국의 온실남새부문 일꾼들을 위한 과학연구 및 경험토론회를 진행하는 것을 정상화하며 해당부문과의 연계밑에 온실남새재배와 관련된 지도서들과 각종도서, 다 매체편집물들도 잘 만들어 배포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연구소는 전국의 농장의 온실 일꾼들을 위한 교육 기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집 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의 숙소도 지어야 한다고 말하는 만큼, 북한농업 전체에서 이 연구소의 위치는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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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기지이기도 한 이 연구소의 대형 온실들을 둘러보면 정치적인 슬로건들이 많이 붙어있다. 과학이나 기술만이 아니라 정신운동을 중요시한다. 연구노동도, 생산농동도 정신운동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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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uide person in the PY Vegetable Science Research Institute who received our group was a male researcher of 50ish age, and perhaps at a position equivalent to a section chief. I forgot his name, so I will call him Researcher Kim. The atmosphere of this guide researcher was rather like that of an college professor in South Korea. His jacket and shirt were not something common in North Korea, but stylish, close to that of an academic in South Korea or Japan, who are in general better dressed than those in Australia. Mostly he gave explanation of how the research institute is also run as a production centre. This part was not so interesting, but one particular point stayed with me. That the vegetables produced here regularly supply that old age home and orphanages in Pyongyang. The production in this place is not for profit as in a commercial operation, and it is not even like a collective farm which submit some portion of their produce to the government and keeps the other part.
평양남새과학연구소에서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아마도 과장급 정도가 되는 50대 연령의 남성 연구사 혼자였다. 녹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자기소개의 처음부분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어서 이름을 모르겠다. 그래서 김 연구사라고 해 두자. 이 안내연구사가 풍기는 분위기는 남한의 연구원과 다를 것 없는데, 입고 있는 양복이나, 셔츠가 북한에서는 흔히 보이는 공무원 스타일과는 달리 , 남쪽의 교수의 스타일이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녹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남는게 많지 않으나,. 사실 생산 기술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가지 머리에 남아 있는 말은 이 곳에서 생산하는 야채들은 평양의 노양원과 고아원들에 공급된다는 말이다. 이윤을 만들기 위한 생산공급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손”이란 시장과 거기서 형성되는 가격도 없으니, 어떻게 하나의 조직으로서 수지가 맞을까 생각하게 된다. 사회주의적 계획경제가 아직도 남아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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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st interesting and lively part of Researcher Kim’s talk was the exchange we had after he finished his role as a guide. The voice recording of this part was of a bearable quality so that I could figure out the content if I listened to many times. I transcribe this part because it is interesting. It is a free style transcription.
김 연구사와의 이야기들 중에 말하는 제일 생기가 있는 부분은 연구소의 생산시설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다음의 이야기였다. 이 부분의 녹음은 겨우 알아들을 만하게 되어있어서 여러 번 들으며 이곳에 기록을 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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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said that North Korea as a country needs 400 tons of vegetable production, but the current level of production is 300 tons. Chairman Kim Jong Eun has a great expectation of the role of this institute in developing better types of vegetable and increasing production. However the import of vegetable seeds that are needed in the institute is prevented by the UN economic sanctions imposed on North Korea. Researcher Kim passionately state that in the matter of health for humanity, the world should be open. Everyone in the Australian Quaker group loudly respond by saying that they agree. Researcher Kim says this institute would cooperate with the researchers in other countries to develop and produce better types of vegetables, for to feed people in North Korea, then to export to other countries. We all say we hope that will become a reality.
북한의 채소생산의 필요량이 400톤(?)인데 현재 생산량은 300톤이라고 한다. 김 위원장이 (좋은 품종의 개발이라는) 질적이며 (생산)양적인 면에서 이 연구소의 공헌을 크게 기대하고 있는데, 야채의 종자들의 씨앗이 경제제재에 의해 북한으로 들어오고 있지 않다고 한다. 김 연구사는 정열적으로 인류의 건강의 문제에 관련된 건에 한해서는 세계가 열려있어야 된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우리 일행은 모두 그렇다고 맞장구를 친다. 김 연구사는 이 연구소에서는 다른 나라들과도 협력하여, 야채의 더 좋은 종자들을 개발하고 생산하여 우리 인민들도 먹이고, 여러나라에 수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우리 일행도 일제히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One of our Quaker group members, Roger, asks what country would you collaborate with first. Then, surprisingly, researcher Kim says “Australia” without resitation. We ask why, and he says, he know that Australia achieved a high standard in producing vegetables by organic method without using artificial chemical fertiliser. Agricultural scientist among us, David, ask him whether the results of North Korean agricultural researches are reported in international journals. Researcher Kim says that some are. In addition, he says, international conferences are held in North Korea and foreign researchers are invited. North Korean agricultural scientists also go to other countries to attend international conferences or visit their research institutes. More commonly, they visit Asian countires like Taiwan, Thailand, or china, than the Western countries. However, some researchers in the institute visited Australia about ten years ago, and learned many things about treatment of plant diseases by organic methods, says he. David raises the issue of academic journal again: Do North Korean agricultural scientists have access to foreign academic journals in North Korea? Research Kim says yes, if you to certain special places, but then he also says specialised books are limited dur to the UN sanctions.
우리 일행 중의 한 사람인 로저가 어느 나라와 가장 협력하기를 바라냐고 물으니, 김 연구사가 주저하지 않고 오스트랄리아라고 답해서 우리 일행의 모두가 놀라기도 하고, 방갑게 웃으며, 왜 그렇게 생각하는냐고 물었다. 김 연구사는 오스트랄리아가 인공적인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자연농법으로 야채를 생산하는데 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 농업과학자인 데이비드가 북한에서의 연구 결과는 국제적인 잡지들에 실리는냐고 물으니 실리는 것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의 연구자들은 북한에서도 야채품종에 관한 학회를 열어 외국의 학자들이 오기도 하고, 북한의 학자들이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거나, 연구소를 방문하기도 한다고 한다 구미국가들에서 보다, 대만, 타이랜드, 중국 같은 아시아 국가에 간다고 한다. 오스트랄리아에도 이 연구소의 연구사가 10년전인가 간 적도 있다고 한다. 화학적이 아닌, 생물학적 비료등으로 식물의 병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워왔다고 한다. 대비드가 다시 학술지에 대하여 물어본다, 외국의 학술지를 북한에서 볼 수 있는가고. 김 연구사의 답은 한 편으로는 어딘가에 가면 볼 수 있다고도 하면서, 국제제재로 외국에서 들어오는 책들이 적다고도 한다.
Our talk was nearing the end, and Roger asks researcher Kim whether he has anything to ask us. Researcher Kim says, “would it be possible to send some vegetable seeds to the institute when you return to Australia?” We do not need a lot in quantity, but it would be great if you a small amount of a variety of good seeds so that we can use them for experiment. This small request animated the Australian Quaker group since that is something concrete that we can probably do. Yes, we must learn about the regulation of transporting seeds over national borders, and we must think about the best method of transfer. But this is something we can do. Researcher Kim says what he wants is the seeds for Tomato, cucumber, hot pepper, eggplant, watermelon, and melon. If we can deliver them to the Keumgang International Tourist Company, they will come to us. The permaculture specialist, Rosemary says, due to industrialisation of vegetable production the variety of kinds is greatly reduced now in Australia. Researcher Kim says “we do not need a lot of variety. What we need is the kind that are strong in cold weather. And we do not need a lot, if you bring in just one or two envelops, we cross with other kind to experiment. David thinks that as for transferring seeds, the best method may be between the breeders. Rosemarry thinks one has to be very careful about plant hygiene, whether there are genetically modified kinds or some with disease. Researcher Kim responds that most of common seeds would be regulated by the host countries’ laws, so that would be good enough for North Korea. Adrian says perhaps someone from North Korea could participate in a peace conference to be held in China next year, and some of us who will participate in that conference could pass on the seeds to that North Korean person.
마지막으로 로저가 김 연구사에게 우리 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냐고 했더니, 호주로 돌아가면 여러 가지 야채의 씨앗을 구해서 보내줄 수 있느냐고 한다. 양이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닌데, 실험용으로 여러 가지를 좋은 종자들을 조금씩 보내주면 좋겠다고 한다. 이 말 한마디에 우리 일행은 호주 퀘이커가 북한에 구체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알게 되어 방갑게 받아 드렸다. 여러나라를 거처 가야 하므로 씨앗의 수입에 관한 규제를 알아야 하고, 전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할 일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김 연구사는 “도마도, 오이, 고추, 가지, 수박, 참외, 등의 씨앗을 금강산국제관광회사에 전달하면 우리에게 올 것이”라고 한다. 퍼마컬처 전문가인 로즈메리의 말에 의하면 오스트랄리아에서도 야채의 산업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종자들의 가지 수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김 연구사는 여러가지는 필요없고 추운 지방에서 자랄 수 있는 것들이 필요하다고 한다. 많은 양도 필요없고 한 두 봉지만 들어오면, 다른 종류와 접하여 실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대비드는 이런 문제는 plant breed들 사이에서 하는 것이 좋을꺼라고 한다. 로즈메리는 genetically modified가 아닌 것이고 병이 없는 것을 구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김 연구사는 그런 문제는 크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씨앗은 그 해당 나라의 법에 의해 관리되고 있으니 믿을 만하다고 한다. 그러자 에드리안은 내년에 중국에서 평화에 관한 컨퍼런스가 있어서 거기에 참석하려고 하는데, 북한에서도 한 명이 참석하면 그에게 씨앗을 전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Another final question from researcher Kim was that whether Australia has the large scale hydroponic greenhouses somewhere. David says “not sure, may be in Victoria”. The real final question from researcher Kim was: “What is your impression of our institute from this visit?” Everyone says, “great” and “wonderful”. I added that we thought North Korea was a developing country, but North Korea is different in that there is a considerable investment in science. You can do this much despite the economic sanction, so we are sure you can do much better if there is no economic sanction. Researcher Kim, then responds, despite the fact that he talked about the problems caused by economic sanctions, “We always lived under economic sanctions, so we are not afraid of economic sanctions.”
김 연구사의 마지막 질문이 호주에도 이런 큰규모의 수경재배온실이 있느냐고 묻는다. 데이비드가 잘 모르겠는데 빅토리아주에 있지 않을까고 말한다. 또 김 연구사는 여기 우리 연구소에 와 보시니 어떻게 보이느냐고 묻는다. 모두가 훌륭하다고 한다. 나도 한마디 부첬다. 조선이 발전도상국으로 생각했는데 이런 면에서는 과학에 투자를 많이하고 있어 다른 것이 보인다고 했다. 경제제재가 있는데도 이렇게 하고 있으니 경제제재만 풀리면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 보인다고 했더니, 앞에서 경제제재 때문에 격는 여려움에 대해 말하던 김 연구사의 말이 이번에는 “우리는 언제나 경제제재 하에 살아왔기 때문에 경제제재가 무섭지 않다.”고 한다.
+17
Sejin Pak is in Pyongyang, Korea.
28 November 2018
[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 평양남새과학연구소 PY Vegetable Research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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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December 2018 ·
[호주퀘이커 북한알기여행] (12) 북한 농림성 관료들과의 회담 , 호주 퀘이커 “지정 농장”
- 호주퀘이커의 북한 방문이 단지 관광여행이 아니었다는 것은 우선 참관 장소에 농장과 공장들이 많이 들어가있다는 것에서 차이가 났지만, 아마도 가장 달랐던 것은 우리 그룹이 북한의 농림성의 관리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북한에 관광을 간 사람들이 그런데 이 만남은 우리가 청한 것이 아니라 “북한 측에서 원한 것”이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가 먼저 북한의 농장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으니 양측이 서로에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또 호주 퀘이커 그룹이 북한의 농장에 관심을 보인 것은 미국 퀘이커가 이미 북한의 농장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주 퀘이커는 북한과 관계를 맺는다면 이미 미국 퀘이커가 북한과 맺고 있는 관계를 호주 퀘이커도 실현할 수 있는 관계의 하나의 례로 삼기로 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이번 방문의 참관 대상에 꼭 미국 퀘이커와 관계가 있는 농장을 넣어달라고 하기는 했는데, 농림성의 관료들까지 만나게 되리라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그뿐아니라 농림성에서는 만약 호주 퀘이커 측에서 관심이 있다면 미국 퀘이커에게 한 것처럼 농장을 하나 지정하여 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우리 그룹은 한편으로는 북한과의 관계에 진전이 있어서 방갑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인가 조금 주저하기도 했다.
- 우리가 북한을 방문하는 중에 일어난 일은 농림성의 관료들과 고려 호텔의 회의실에서 한 시간 정도 만나 이야기를 한 것이나, 그 이야기에서 앞으로 어떻게 할까를 구체적으로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우리의 스케줄은 꽉 차 있어서, 호주 퀘이커에게 지정하겠다는 농장에도 방문할 시간이 없었다. 이 협동농장은 서해안 남포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농장이 간석지에 위치하여 있어 염분의 문제를 격고 있다고 한다.
- 호주로 돌아온 후, 우리 그룹은 북한의 농림성에서 지정하겠다는 농장과 관계를 맺는 것에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농장과 관계하여 호주 퀘이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가 더 알아보기 위해 나를 포함한 두 사람이 그 농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나의 생각은 호주 퀘이커는 북한의 이 협동농장과 농업기술적인 관계만을 맺을 것이 아니라 호주퀘이커가 캄보디아에 원조를 하는 프로젝트처럼 Community Development라는 이름으로 다원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Quaker Serivice Australia in Cambodia
https://qsa.org.au/where-we-work/cambodia.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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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평양 고려호텔 회의실, 농업성 관료들과 만남.
22Vana Kim Hansen, 박정미 and 2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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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퀘이커북한방문] (13) Facebook created this video in the memory of Oct 18, 2018. A day trip by an Australian Quaker group from Pyongyang to Myohyang Mountain. I did not give the title “Hiking in North Korea” to the video, but Facebook did. Facebook knows that it was North Korea and it was hi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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