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0

1911| ‘개벽’은 21세기 르네상스 운동이다.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개벽’은 21세기 르네상스 운동이다. - Daum 카페



‘개벽’은 21세기 르네상스 운동이다.| 자료실
남곡|조회 8|추천 0|2019.11.20. 11:23



‘개벽’은 21세기 르네상스 운동이다.

---공자가 현대에 보내는 메시지





사람은 우주 안에서 가장 뛰어난 ‘자유욕구’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지적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현대의 최대의 모순은 인간의 지적능력이 행위능력을 발전시키는데는 고도로 발전하였지만, 자신의 관념을 자유롭게 하는 방향으로는 그다지 발전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모든 고등종교의 지향은 사실 이 방향으로 사람의 지적능력을 최대한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특히 원불교와 저와의 만남은 제가 40대일 때 어느 벗님으로부터 원불교 교전을 선물받고 첫장을 열자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었습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구호였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그 이념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되었으나 어떤 사건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약 4년간 집중했던 고민이 이 한 문장 속에 담겨 있다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더구나 원불교가 탄생하던 시점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물질개벽을 느끼기 힘들었던 때라 그 선진성이 더욱 다가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저는 원불교에 입교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 후로도 이런 저런 인연으로 만남은 좀 있었습니다만, 제가 원불교의 개벽 사상을 이야기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서 오늘은 공자 이야기를 통해 공자가 현대에 던지는 메시지가 어쩌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의 사상과 통하는 점들에 대해 말씀드리고저 합니다.



‘논어(論語)’는 현대적으로 해석되고 기여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고전의 하나입니다.

공자(孔子)하면 보통 늙은 공자를 떠올립니다. 대부분 구부정하고 주름투성이인 늙은 공자를 프로필로 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의문이 생기면 밥 먹고 자는 것을 잊고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며칠이라도 전념했던 패기 넘치는 젊은 공자를 떠올리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도 공자의 나이 쯤 되면 알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겨우 나이 20대인데...”

하고 지나쳐 버립니다.

시대를 넘어 관통하는 인생과 사회의 본질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 것은 공자 스스로 밝히기를 15세였습니다.

지금의 경우 중3이나 고1의 나이입니다.

그리고 30에 정립되었고, 40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지금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기 위해 그 귀한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까?

어떤 교육제도와 교육 내용이 주가 되고 있습니까?

미래 사회에 과연 쓸모가 있는 내용들일까요?



공자를 노인으로 취급하는 착시보다 더 심한 것은 맹자에서 주자에 이르는 제자들에 의한 왜곡이 더 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자의 말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이용하거나 또는 배척한 권력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파묻혀버린 공자의 진면모를 발견하는 것은 유교(학)가 끼친 폐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이어져야할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를 살리는 것은 21세기 르네상스의 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대모화(事大慕華)의 깊은 뿌리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다보니 선진국을 따라잡는데는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 두 세력 간의 반목ㆍ갈등을 포함하여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진영이나 이념들은 낡으면 그야말로 장애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평면에서 입체로 뛰어올라야 합니다.

이 ‘뛰어오름’이 ’개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전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의미합니다.

이 때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배우기만 하고 창조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어둡고,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면서 온고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1. 물질적 자유



행복의 첫째 조건은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는 정신적 성숙으로 이어질 때만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행복을 위한 1차적 조건이지만, 그것은 필요조건이고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자는 2500여년 전 이것을 말했습니다.

<공자께서 위나라에 가실 때 염유가 수레를 몰고 따르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참 많구나.”

염유가 말씀드렸다.

“백성이 많아진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다시 여쭈었다.

“부유해지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교양을 길러야 한다.”

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子路 第十三)>



그러나 그 첫 째 조건 즉 물질적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채 오랜 세원을 보내야 했습니다.

부족한 재화를 둘러 싼 계급 간의 대립이 가장 기본적인 모순이 된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한 때 세상을 풍미한 것도 이것이 근본 배경으로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看過)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총수요를 넘어서는 총공급이 1970년대 후반에 이루어집니다.

사실 혁명적 변화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부족한 시대를 살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의 바탕입니다.

물질이 개벽되었는데, 정신이 개벽되지 못한 것입니다.



정신개벽의 방향에 대해서 공자는 두 방향을 제시합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난 지금이야말로 이 말은 21세기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자공子貢이 여쭈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學而 第一)>



두 방향의 정신적 성숙이 뒤따라야 진정한 행복이 온다는 것을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을 통해 확산해 가는 것이 개벽운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보다는 진정한 인간의 가치에 눈을 떠 물질에 대한 욕망이 자연스럽게 감소하는 것이 '빈이락(貧而樂)'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영성, 생태적 가치, 자연과의 조화 등에 대해 눈을 뜨고 그러한 삶을 깊게 할 때 ‘단순소박한 삶’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방향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 그 자기 몫을 충족시키고 남은 것을 '나누고 풀어놓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이호례(富而好禮)'입니다.
부자들, 대기업이나 재벌들에게도 그들과 후손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이런 의식의 전환을 기대하고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식(食)의(衣)주(住)를 해결하는 것이 1차적 생존 조건으로 됩니다.

인간은 그 지적 능력(도구 사용능력)으로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획득하는데서 다른 동물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능력 때문에 수단과 목적이 전도(顚倒)되어, 물질에 의해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특히 자본주의에 오면 ‘물신(物神)의 지배’가 모든 영역에 걸쳐 확산됩니다.

물질을 생존을 위한 1차적 조건으로 보면서, 항상 그 물질을 수단 이상의 가치로 보지 않을 때라야 진정한 진보 즉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게 되고, 이것이야말로 21세기 최대의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2. 사이좋음



우리는 사실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 인식할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틀림없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따라서 '누가 옳은가?'하고 서로 다투는 문화로부터,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탐구하는 문화로 진화시키는 것이 최근의 우리나라 실태를 보면서 가장 절실한 과제로 생각됩니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제4편 이인)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읽고 지나치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는 ‘정의’ 논의에 대해 정곡을 꿰뚫고 있는 말로 들립니다.

첫째, ‘이것이 정의다’라고 단정함이 없이 출발합니다.
둘째,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에 빠지지 않고 ‘오직 의(義)를 좇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둘의 사고방식의 중요함을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논어 해설서들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현실을 보면 이 둘이 함께 이루어지는 일이 드뭅니다.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를 여전히 따로 부르고 있습니다.
단정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정의를 추구하는 ‘결합’을 2500년 전 공자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지의 자각’이라는 인간 의식의 ‘개벽’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중학교 정도의 과학 실력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지만, 실제의 삶의 태도까지는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자 말하기를,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끝까지 밝혀 가겠다.” (제9편 자한)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인간은 실체를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 실체를 인식할 뿐이라는 자각입니다.
그래서 공자에게는 이른바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이단(異端)이라고 공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극단(極端)과 단정(斷定)을 벗어나 실체에 접근하자는 것입니다.



<공자 말하기를, “자기와 다른 것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 (제2편 위정)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그런데 이것을 ‘이단을 행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공자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유교(유학)가 국가 권력과 결합하여 사회의 정체를 가져온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자의 해석을 포함해서 맹자 이래의 제자들이 빠져든 함정입니다.

공자를 이 함정에서 해방하는 것이야말로 유교의 폐단으로부터 벗어나는 중요한 길이기도 합니다.

저는 ‘사이좋음’의 인문적 토대는 ‘무지(無知)의 자각’을 바탕으로 진정한 소통과 대화를 통하여 그 시점에서 가장 옳은 합의에 도달하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즐거움



'돈'을 벌기 위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일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결코 자유롭지도 않고 행복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시스템(자본주의)이 생산력을 증대시켜 왔기 때문에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전념(몰입)하여 그것이 기쁨으로 되는' 동기가 생산력의 원천으로 될 때 새로운 생산관계가 가능해질 것이다.
제가 협동(조합)운동이 뿌리내리게 하는 것에 인문운동가로서 큰 관심을 갖는 배경입니다.



즉 개별적인 깨달음의 추구가 자칫하면 벗어나기 힘든 함정이 결국 ‘자기 본위’에 그치기 쉽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협동운동가들의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를 소개드립니다.



<‘트라우마로부터의 해방’이 출발이라면 나아갈 방향은 어디일까?

나에게는 15세기 에크하르트가 이야기한 ‘거룩함’이 강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자발성• 전념(專念)• 기쁨’이 그 내용이다.

아마 이것이 동기(動機)로 보편화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중심이 될 때 자본주의를 넘어 새로운 인간•새로운 사회•새로운 문명으로 이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공자가 스스로 평생을 관통(一以貫之)했다고 하는 ‘서(恕)’와 ‘충(忠)’이라는 말이 에서도 깊은 감동이 있다.

‘트라우마로부터의 해방’이 ‘서(恕)’와 통하고 ‘에크하르트의 거룩함’이 ‘충(忠)’과 통한다는 느낌이다.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 경제 • 공동체운동 • 마을만들기 등은 새로운 인간•새로운 사회•새로운 문명을 향한 주요한 실험 무대이고,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다.>



각자도생의 이기주의와 경쟁을 넘어선 새로운 동기 즉 에크하르트의 거룩함이나 공자의 충(忠)과 같은 동기가 새로운 생산력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개벽된 정신으로 다시 물질을 개벽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인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제도개벽’을 이룩할 것입니다.



4. 한국 정치의 변혁을 위하여



공자의 정치에 대한 유명한 언급이 있습니다.



<자로가 여쭈었다.

“위나라 임금께서 선생님께 정치를 맡기신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명(名)을 바로 세울 것이다.”

자로가 말씀드렸다.

“현실과는 먼 말씀이 아니신지요. 어찌 명(名)을 먼저 세운다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로야, 너는 참 비속하구나.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입을 다무는 법이다. 명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불순해지고, 말이 불순해지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하게 집행되지 못하고, 형벌이 잘 집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 따라서 군자가 명을 바로 세우면 반드시 말이 서고, 말이 서면 반드시 행해지게 될 것이니, 군자는 말을 세움에 있어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제13편 자로)

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故 君子名之 必可言也 言之 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정명(正名)을 말할 때 ‘군군신신(君君臣臣)부부자자(父父子子)’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각자 또는 각 집단이 자기 정체성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도덕경 1장의 첫 단락입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를 도라고 할 수는 있지만, 항상 그 도일 수 없고,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가능하나, 항상 그 이름일 수 없다.

인식하고 탐구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물이나 현상에 이름을 붙입니다.
이것은 인간만의 탁월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치명적인 함정이 있는데, 사물과 현상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변하는데, 관념은 고정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공자는 정명(正名)을 이야기합니다. 이름을 바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고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정명’을 현대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시대정신의 구현을 위한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풀어야 할 난제가 많을수록 또 그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이 서로 모순되어 보일수록 먼저 ‘종합철학’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과거의 진보니 보수니 좌니 우니 하는 고정되고 편향된 시각으로는 지금의 시대적 요구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지금까지의 관점에서 보면 모순 되게 보이는 요소들이 이제 상호보완하고 인간 진화를 위한 길에서 함께 나가야 할 동반자라는 관점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종합철학이 아닐까요. 민주화와 물질적 생산력의 향상 등은 과거에 비해 이러한 종합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만들어 왔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의식이 이에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좌우, 보수와 진보, 자본계와 노동계 등의 고정관념들이 새로운 정치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역사발전 단계로 볼 때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 있는 과도기라 하겠습니다.

이 시기를 살아가는 당사자들에게는 극심한 혼돈으로 느껴지겠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새로운 시대정신이 출현하기 위한 필연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시대의 시급한 정치적 과제를 다음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남북이 ‘두 국가’로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입니다.

즉 ‘통일을 전제로 하는 특수관계’로부터 내정불간섭과 상호불가침을 내용으로 하는 일반국가관계로 되는 것입니다.

남북의 협력도 ‘민족 공조’로부터 ‘국가 공조’로 이행하는 것입니다.

‘민족주의’는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정이나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는 차원에서는 ‘동력’이 되지만, 지금 우리 현실에서는 ‘장애’로 되고 있다고 봅니다.

나는 누구 못지않게 이 땅과 이 땅의 역사와 이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행복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민족의 영광에 대해서도 열렬히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 즉 남북이 지난 70여년 동안 어떤 형태의 통일논의도 오히려 혼란이나 대립을 격화시킬 이질적인 체제를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볼 때, ‘단일 민족 단일 국가’나 ‘외세에 의한 분단을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주장은 오히려 민족의 생명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다른 하나는 ‘실질적 연정(聯政)’에 성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다음 세 가지 과제가 국무회의의 한 테이블 위에서 논의되고 합의되어 실행되어야 합니다.

① 총체적 생산력의 보장 즉 중심교역국가의 위상을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② 양극화 이중화를 해소할 수 있는 개혁에 성공해야 합니다.

③ 기후변화를 비롯한 인류의 위기에 대응하여 새로운 문명을 국가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과거에는 대립되거나 서로 투쟁하는 목표들이었습니다.

이제 이 세 가지는 조정되고 융합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만들어온 귀한 밑천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길이 ‘정치개벽’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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