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0

19 이우창 - 1. <지성사란 무엇인가?> 번역 1차 교정 완료

1911 이우창 - 1. <지성사란 무엇인가?> 번역 1차 교정 완료(사실은 원저의 미주&더 읽어보기Further...

1.
<지성사란 무엇인가?> 번역 1차 교정 완료(사실은 원저의 미주&더 읽어보기Further Reading 반영 작업이 아직 남아있다...). 며칠 내로 1교를 마무리 해서 감수해주시기로 한 분들께 보내드릴 예정이다. 매우 거친 직역투였던 초역을 적어도 내 기준에서 한국어처럼 읽힐 수 있는 문장으로 죄다 뜯어고치고, 그렇게 펜으로 가필한 수정내역을 파일에 반영하는 타이핑노동 작업의 경험은... "번역은 반역이다"란 말을 정말로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어느 선배가 단행본을 한 권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해봐야 알 수 있는 게 있다는 이야기를 지나가듯 해준 적이 있는데, 아직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씩은 깨닫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아직 감수자, 예비독자, 편집자 등등 코멘트를 받고 수정할 길이 한참 남아있고(내가 영어 원문의 의미를 틀리지 않게 옮긴 것인지 다시 체크하는 것도 필요하다), 역주와 역자해제 작업도 남아있는만큼 완성까지는 갈 길이 멀다. 처음의 형편없는 초역을 올릴 때 상상했던 지극히 나이브한 일정보다 꽤 늦어졌지만, 지금은 두 가지만 생각하고 있다. 내년 상반기, 가급적 3월 안팎에 출간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정치사상사·서양자 전공자들만이 아니라 문학, 철학, 한국사, (문학/문화)사회학 전공자들, 그리고 지적인 호기심을 가진 학부생들도 너무 낯설지 않게 읽을 수 있는 한국어판을 내는 것.
저자 왓모어가 보내준 한국어판 저자 서문의 일부를 살짝 올려둔다(다시 보니 만족스럽지 못한 대목이 또 눈에 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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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사란 무엇인가?』의 중심주제 중 하나는 사상사 연구가 현재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실천적인 의의를 지닌다는 것이다. 지성사가들이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켜 역사연구를 순수하게 골동품적인 취미생활로 만든다는 비판은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러한 공격이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지성사가들은 역사 속의 행위자들이 직면한 선택 중 다수가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를 강조한다. 에드워드 기번, 애덤 스미스, 그리고 함께 계몽주의 시대를 살았던 여러 동료 지성들의 눈부신 학문적 성취의 특징 중 하나가 사상사에서 본래 의도되지 않은 결과가 발생하는 과정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지성사가들은 바로 그러한 전통의 계승자들이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그처럼 사상사에서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초래된 예 중 오늘날에 바로 와닿는 실천적인 의의를 가진 사례를 하나 꼽는다면, 본래 상업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등장한 급진적인 농본주의 전통이 후대에 독재, 인종학살, 극단적인 형태의 민족주의로 이어졌다는 것이 있다. 프랑수아 페늘롱(François Fénelon)이 1690년대에 집필한 『텔레마코스의 모험』(Telemachus)에서 도시로부터 시골로 인구를 이주시키는 전략을 옹호했을 때, 이는 근대의 사람들을 상업사회의 사치와 이기주의가 초래하는 최악의 결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조심스러운 전략의 한 요소였다. 그러한 전략이 이후 마오쩌둥과 폴 포트의 체제를 특징짓게 되는 “반혁명분자들”과 지식인들을 잔인하게 탄압하는 계획의 청사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상기할 가치가 있다."
2.
일단은 이번 주 목요일 18세기 모임 세미나 발표를 위해 1690년대 잉글랜드에서 전개된 '고대인 대 근대인 논쟁' 문헌들을 몇 개 보는 중이다. 실제 과거 자료들을 직접 읽어보면 늘 그렇지만, 연구사에서 대충 정리된 이야기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복잡하다. 그 다음에는 번역원고 1교를 마치고, 다시 마감원고 하나를 하고...월말부터는 <클라리사>를 읽으면서 박사논문 첫 챕터 준비궤도에 다시 복귀하는 게 목표다.
3.
토드 필립스가 감독한 <조커>를 뒤늦게 보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는 거의 스트라우시안에 가까울 정도로 세계를 도덕화/비정치화시키는 텍스트였다. 놀란의 배트맨 3부작 중 <비긴스>와 <라이즈>는 노골적으로 비의적인 비밀결사가 등장하며, <다크나이트>에서 '대중들에게 세계의 진실을 숨기는' 배트맨의 결정은 비의적 집단의 계보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다크나이트>는 즐기기 위해서는 큰 화면과 충분한 음향기기가 필요하지만, 그것의 기묘한 도덕정치론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순수한 도덕적 결단의 세계로 끌어들이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시청각적 자극을 최대한 제거한 작고 볼품없는 화면으로 보는 게 더 유리한 영화였다. 그와 달리 필립스의 <조커>는 프랭크 밀러의 <다크나이트 리턴즈> 시리즈 못지 않게 정치적인 맥락과 얽혀있는 텍스트다. 물론 필립스와 밀러가 겨냥하는 바는 상당히 다르지만 말이다.
거칠게라도 맥락을 캐치하는 감상자라면 <조커>가 시작과 끝이 상당히 명확하게 주어져있는 텍스트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이 결국 어떠한 운명에 도달할지 알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필립스의 영화가 현재의 미국, "1 대 99"의 표어 하에 월 가를 점령하는 대규모 시위의 기운이 아직 남아있고, 좌우파 모두의 공격 하에 공적인 '체제'(establishment)에 대한 신뢰가 붕괴했으며, 어느날 갑자기 시민a가 총기난사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사회에 각인시키려 시도하는 일이 언제든 일어나는, 그러나 참사의 반복을 막아낼 능력이 없는 사회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나무위키의 영화평 란에는 <조커>와 '인셀'incel의 연관성을 강하게 부인하는, 그래서 더 흥미로운 코멘트가 달려있는데, 그 인셀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총기난사를 일으키고 있는 상황을 영화가 전혀 의식하지 않았으리라고 보는 게 더 부자연스럽다). 사회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조롱받고 외면받으며 살아가는 빈곤한 망상증환자 아서 플렉과 광기 어린 범죄자의 대명사와 같은 조커라는 두 점 사이를 잇는 서사적 직선을 떠올리기란 직관적으로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영화의 성패는 두 점 사이에 도대체 무엇을 채워넣을 것인가에 있다.
많은 비평가들은 또 감상자들은 시작과 결론이 정해졌으며 (굳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를 보지 않았더라도 금방 유추할 수 있는) 뻔한 플롯을 따라가기 쉬운 <조커>에 생기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를 꼽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다른 지점을 두 개 덧붙이고 싶다.
첫째, <조커>는 체제가 붕괴하고 있는 부패한 사회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반사회적 존재라는 문제를 생각보다 정교하게 다룬다. 영화가 인셀을 그리냐 아니냐는 그렇게 중요한 물음이 아니며, 더 흥미롭고 중요한 포인트는 영화가 '분노한 인셀 혹은 사회부적응자들'이 공동체와 사회 자체를 파괴하는 상황에 대한 기존의 담론과 어떠한 긴장을 유지하느냐를 살펴보는 것이다. 한편으로 영화는, 특히 '비극'이라 믿었던 자신의 인생이 실제로는 거의 망상에 가까운 '빌어먹을 코미디'였다는 걸 아서가 깨닫는 장면을 확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조커의 폭력을--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에 넘쳐흐르는 갖가지 '약자들의 폭력'을--사회부적응자/사회부조리의 정당한 폭발로 읽으면서 정당화하려는, 즉 폭력을 '시적 정의'에 포함시키려는 해석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 그러나 그와 함께, 특히 머레이의 TV쇼에 출연한 조커가 격분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비참함과 광기가 부자들과 사회체제가 만들어낸 것처럼 외칠 때, <조커>는 마치 이렇게 망가져가는 사회에서 이런 인간들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고 그건 이른바 '사회지도층'의 악덕의 결과물이라고, 따라서 조커가 정의롭지 않을지라도 '사회지도층'이 벌을 받는 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때 조커가 실제로 그러한 '응분의 폭력'의 대리수행자인가, 아니면 그러한 레토릭을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즉 현실의 수사를 활용하는 '수사적 행위자'인가는 따져볼 만한 질문이다.
둘째, 영화는 아서 플렉이 조커로 각성하는 서사와 함께, 고담 시에서 정치적 불안정이 증대하고 마침내 광대가면을 쓴 시위대가 폭발하는 데 이르는 서사를 동시에 진행시킨다(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조커'에만 집중하면서 명백한 정치적 메시지를 읽지 못하는 해석은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 '광대'가 시위대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자리잡는 것, 오만한 상류층 토마스 웨인이 아서 플렉만이 아니라 시위대의 적대자가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조커>는 두 서사를 교차시키면서 양자 모두에 더 풍부한 깊이를 부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연결의 끝에서, 특히 클라이막스의 스펙타클에서 영화가 조커를 일종의 '아나키Anarchy(무정부/무질서)의 신화적 상징'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놀란의 조커(히스 레저 분)가 추상화된 악과 혼돈의 화신이었다면, 필립스의 조커는 단순한 사회부적응자를 넘어 정치체의 붕괴, 질서의 붕괴 자체를 표상하는 아나키의 화신이 된다.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 조커라는 인물을 복잡하게 만들어놓은 덕에 영화는 아나키에 대해서도 좀 더 복잡한 코멘트를 할 수 있게 된다.
<조커>는 아나키를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광대가면을 쓴 시위대는 그 자체로 해방과 정치적 선을 추구하는 순수한 인민의 힘이라는 낭만적 관념의 대변자가 아니며, 살인범을 쫓는 경찰을 집어삼키고(지하철의 집단폭행 장면은 좀비영화와도 겹쳐진다) 국지적으로나마 문명과 체제를 파괴하여 혼돈으로 되돌리는 폭도들이다. 이들은 정말로, 그러니까 여기에서 계급투쟁이나 아나키즘을 읽어내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순진한 독자들의 상상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영화에서 그려내는 아나키가 여전히 '신화'라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조커>는 소외된 자들과 상류층/지배질서의 대립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여전히 차용하며 따라서 (누구보다도 트럼프 이후에 분명해진) 극우파 포퓰리스트들의 대두가 가르쳐준 교훈, 인민도, 약자도 결코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 서로 상충하는 지향으로 가득한 복수의 힘들이라는 것, 홉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다중은 하나가 아니'라는 교훈 이전의 시대에 있다. 진정한 아나키에는 모두가 조커와 같은 '상징'을 둘러싸고 환호하는 일 따위는 없다.
특히 두 번째 이유에서, 만약 내가 정치철학이나 사상을 가르치는 교사라면, <조커>는 아나키에 대해 가르칠 때 나쁘지 않은 부교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문명과 국가를 너무 자명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정치철학을 몇 가지 체제/사조 간의 경쟁과 상호비판 정도로 환원하고는 한다. 그러나 질서와 아나키의 문제는 체제/정부형태의 경쟁 이전에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음, 왜 정치가 존재하는가/존재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물음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근본적이다. 사회가 사회로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정치라면, 그 정치의 가장 오래된 적수는 아나키다('정치신학'은 본래 자유민주주의와 그 비판자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이 '신학'인 까닭은 주권자와 아나키가 곧 카테콘과 종말의 유비로 읽힐만큼 무시무시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조커>는 바로 그 문제를 다루며, 그것이 이 영화를 정치적 신화를 이야기하는 텍스트로 읽을 수 있는 이유다.
Comments
  • Joon Young Jung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저도 어찌저찌 번역 작업 중인지라 “한국어처럼 읽힐”이라는 과제가 가지는 무지막지함을 새삼 실감 중입니다. ^^; 그럼에도 쌤의 포스팅을 보니 출간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군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ㅋㅋ 여튼 힘 내시고 건강 조심하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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