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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아베가 금수저 정치인이 된 배경 - 오마이뉴스
'도련님' 아베가 금수저 정치인이 된 배경[리뷰] 아베의 가족사를 추적한 아오키 오사무의 <아베 삼대>
18.02.16 16:28l최종 업데이트 18.02.16 16:28l
글: 지유석(lukesw)
편집: 최은경(nuri78)
우익, 군국주의, 평화헌법 개정, 기시 노부스케.
눈밝은 독자라면 위 낱말들에서 얼른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떠올릴 것이다. 아베 총리는 전후 일본 정계의 거물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며, 그의 정치적 사고는 외조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에 그는 '전쟁할 수 있는 국가' 일본을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 일본 아베 총리의 가족사를 추적한 아오키 오사무의 <아베 삼대>
ⓒ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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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게 아베 총리를 설명하는 전부일까? 오히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베 총리의 다른 면모가 있지 않을까? 일본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의 책 <아베 삼대>는 이 같은 의문에 답을 제시해준다.
이 책은 아베 신조 총리의 가족사를 다룬 책이다. 저자 아오키 오사무는 아베 총리와 그의 선친인 아베 신타로 그리고 그의 조부인 아베 간에 이르기까지 3대의 가족사를 주변인들의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복원해 낸다.
여담이지만 일본인 저널리스트들은 인물을 주제로 한 탐사보도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야스다 고이치는 일본내 대표적인 혐한 단체인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의 본질을 파고들기 위해 설립자인 사쿠라이 마코토를 비롯해 그 주변 인물들을 탐사한다. 그 결과물이 한국에도 소개된 바 있는 <거리로 나온 넷우익>이다.
아오키 오사무 역시 아베 총리의 가족사를 끈질기게 파고들어간다. 아베 총리의 선친인 아베 신타로는 비교적 취재가 수월했을 것이다. 전후 일본의 거물 정치인 기시 노부스케가 그의 장인이었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외상을 역임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베 간에 이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베 간은 1894년 태어나 1946년 숨을 거뒀다. 19세기에 태어나 비교적 짧은 생을 살다 갔기에 그에 대한 기억을 가진 이들이 별로 없다. 혹 있어도 고령이라 기억이 희미하거나 왜곡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저자 아오키는 간의 정치적 근거지였던 야마구치현 헤키촌을 찾아 그의 체취를 더듬고 그와 얽힌 기억을 가진 이들의 증언을 채록해 낸다. 끈기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아베 간과 아베 신타로의 정치이력은 더욱 놀랍다. 아베 간은 1937년 처음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승리했다. 4년의 임기가 끝나고 1942년 치러진 총선에서 재차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의 특수한 시대상황으로 인해 선거운동은 순탄치 않았다.
중의원 임기는 4년이어서 예정대로라면 1941년 치러졌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을 벌였고, 1941년 미국과 전쟁에 돌입했다. 도조 히데키 내각은 비상시국을 이유로 1년 뒤인 1942년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
전쟁의 와중에 군부는 '원활한 전쟁수행'을 명분으로 일국일당제를 이루려고 했다. 이에 도조 내각은 '익찬정치체제협의회'(아래 익찬협의회)를 꾸리고 정부와 군부의 정책에 충실한 후보자를 내세웠다. 익찬협의회가 내세운 기준은 아래 세 가지였다.
1) 대동아공영권 확립을 위한 이상에 불타는 인물
2) 대정익찬, 거국체제 강화에 열의를 가진 인물
3) 옛 정당의 폐해인 지방적, 지역적 이해에서 벗어난 인물
익찬협의회는 이 세 가지 기준에 따라 후보를 '갑·을·병'으로 등급을 매기고 최하 등급인 병 등급을 받은 후보는 제외했다. '시국인식이 얕고 무익하게 구태를 굳게 지키며, 늘 반국책적·반정부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익찬협의회의 추천을 받지 않은 후보에 대해선 특별고등경찰과 헌병을 동원해 혹독하게 탄압했다.
평화주의자 아베 간
아베 간은 도조 내각의 방침에 반기를 들었다. 사실 이전부터 간은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에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에 익찬협의회가 그를 추천하지 않을 건 분명했고, 이에 간은 무소속으로 나선다. 당연히 경찰과 헌병의 탄압이 가해졌다.
그럼에도 아베 간은 굴하지 않았고, 놀랍게도 당선이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당국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발로 뛰어 얻어낸 결과였다. 그러나 저자 아오키 오사무는 간의 승리 요인이 후보자의 노력에만 있지 않다고 진단한다.
저자는 간이 지닌 정치철학에 주목한다. 먼저 아오키 오사무가 발굴한 아베 간의 선거공보를 살펴보자. 아베 간이 1937년 첫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출마의 변을 적은 문서인데, 그 내용이 지금 읽어보아도 참신하다.
"이번에 제국의회가 해산되 총선거를 실시합니다. 불초한 저는 중립을 표방하며 야마구치현 1선거구에서 입후보했습니다. (중략) 제국의 현재를 둘러보자면 밖으로는 중국·소련·영국 및 미국과 국제 정국에서 다툼이 있습니다. 내정을 보면 노사 대립, 국민 생활 불안정, 농산어촌의 황폐와 곤비, 중소상공업자의 급박한 상황 등 시급히 근본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여러 중대한 사안이 산적해 있습니다. 제가 이번 기회에 입후보한 것은 신흥정치 세력을 대표하는 전국의 동지와 연대해 진실로 국가 정세에 적합하고 시세에 적절하며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신흥정당을 만들어 국민 생활을 재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 본문 56쪽
무엇보다 눈에 띄는 덕목은 평화주의다. 앞서 저자는 간의 기억을 가진 이들을 발굴해 그들의 증언을 채록한다고 적었다. 그 중 한 명이 가미야마 스타에씨다. 그는 간의 정치활동을 목격했고, 전후엔 아들 신타로의 선거를 돕기도 했다. 그는 저자에게 아베 간이 국제정세를 보는 인식이 달랐다고 증언한다.
"확실히 전쟁 반대였죠. 자세한 내용까지는 모르겠지만, 도조와 대정익찬회에 반대했습니다. 전쟁을 시작해도 지고 만다고 생각하는 등 국제정세를 보는 시야가 좀 더 넓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당시 군부는 그런 얘기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죠." - 본문 85쪽
확실히 아베 간은 평화주의자였다. 그의 아들인 신타로 역시 평화주의 성향이 강했다. 그의 평화주의는 일정 부분 아버지 간의 영향 때문이었지만, 전쟁 당시의 경험도 사상형성에 기여했다. 저자 아오키 오사무에 따르면 신타로는 해군 시가항공대에 입대해 수중특공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수중특공이란 비행기를 몰고 미군 전함에 돌진하는 '카미카제'를 말한다. 만약 전쟁이 더 길어졌다면 아베 신타로의 운명은 또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전쟁 후 아베 신타로는 <마이니치> 신문사 기자를 거쳐 정계에 입문한다. 정계 입문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는 1985년 자신이 몸담았던 <마이니치> 신문에 정치입문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아버지는 1946년 1차 총선거에 용감하게 뛰어나가 출마했다. 그러나 선거운동 한가운데 아버지는 급사했고, 뒤를 잇듯 이모 요시도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일거에 가족을 잃었다. 대학에 돌아가 국제정치, 외교사, 정당 정치사를 배우며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는 결의를 굳혔다. 그를 위해 외교관이나 신문기자가 되어 살아 있는 정치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중략) '천애고아'의 몸이었지만 아버지는 내 가운데 계속 살아 있었다." - 본문 134쪽
아베 신타로·자이니치 사이의 유대관계
아베 신타로의 이력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은 재일한국인(자이니치)과의 관계였다. 그의 정치적 기반을 굳히는데 시모노세키의 자이니치 사회가 크게 기여했다는 재일조선인 2세의 증언이 특히 그렇다. 그의 증언 중 일부를 옮긴다.
"신조씨(아베 총리 - 글쓴이)는 우리(재일조선인)를 노골적으로 적시할 뿐 아니라 대립과 편견을 조장할 뿐이잖습니까. 그러나 아베 신타로씨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존경했고, 정치적 기반을 굳히는 과정에서도 자이니치 사회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부관페리가 상징하는 것처럼 한·일간 로비 문제에선 기시 노부스케씨와 사토 에이사쿠씨를 통하는 통로도 있었지만, 이곳의 지반은 신타로 씨가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본문 166쪽
아베 신타로가 외상을 지냈던 당시 한·일 관계는 원만했고, 이는 신타로 외상이 균형감각을 발휘한 결과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그가 자이니치 사회와 교분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아베 간과 아베 신타로의 이력은 현 아베 신조 총리와 확연히 결을 달리한다. 책을 읽으면서 아베 총리가 아베 간의 손자이자 아베 신타로의 아들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베 신조는 기시 노부스케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았다. 아베 간은 1946년 타계했고, 이 당시 아베 신타로는 22살에 불과했다. 또 결혼 전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할아버지 아베 간이 아베 신조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줄 여지는 애초에 없었다.
아베 신조, 질 떨어지는 기시의 복제물
▲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는 9일 오후 강원도 용평 블리스힐스테이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의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저자는 아베 신조가 선대와 다른 길을 가게 된 중요한 원인으로 '세습 정치'를 지목한다. 아베 간이나 아베 신타로는 땅에 발을 붙였던, 자수성가형 정치인이었다. 물론 아베 신타로가 전후 정치의 거물 기시 노부스케의 사위가 돼 장인 덕을 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아오키 오사무에 따르면 신타로는 노부스케의 사위가 아닌 아베 간의 아들로 기억되고 싶어했다.
이에 비해 아베 신조는 전형적인 '금수저' 정치인이다. 성장 과정에서 남다른 면모가 있었던 것도, 학업 기간 동안 명민한 지성을 함양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주변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아베 총리를 '뛰어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명문가 도련님' 정도의 기억만 갖고 있다.
아베 총리는 그저 단지 선대의 후광에 힘입어 정치에 발을 들였고, 급기야 총리에 올랐을 뿐이다. 그런 그가 전후 일본이 견지해오던 평화헌법을 개정해서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만들려 한다. 오사무는 사뭇 신랄한 어조로 일본 정가에 만연한 세습 정치가 아베 신조 같은 정치인을 만들어냈다고 일갈한다.
"신조가 기시 노부스케를 경애하며 모범으로 삼고 있다고 해도 솔직히 말해 신조는 상당히 질이 떨어지는 기시의 복제물이다. 친할아버지 간이나 신타로와 비교해 봐도 이 사실엔 변함이 없다. 땅에 발을 붙인 정치 경력의 면면에서도, 이를 지탱하는 지성의 면면에서도, 내부에서 용솟음치는 정치적 에너지와 정열이라는 점에서도 이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취재를 해 본 입장에서 보자면, 대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박력도 매력도 자력도 점점 퇴행하고 있다." - 본문 305쪽
여기에 지난 10년간 일본 정치의 난맥상은 아베 정권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이다.
"지난 10여 년간 일본 정계를 뒤돌아보면, 고양이 눈처럼 단기 정권이 잇따라 교체되는 상황이 이어져 '강한 정권'이라든가 '결단할 수 있는 정치' 같은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해진 상태다. 무엇보다 전후 처음으로 본격적인 정권 교체를 이뤄 낸 민주당의 실패에 대한 실망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다. 커다란 기대가 이뤄지지 못한 데 따른 반동현상이 사회 전체에 남아 있다. 실제 이 같은 여러 요소가 신조 정권을 떠받치는 최대 원군이 되었다." - 본문 303쪽
아베 총리는 2018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이 임박해오자 위안부 합의를 끄집어내며 올림픽 개막식 불참을 시사했다. 그러다 9일 한국에 와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아베 총리는 문 대통령의 면전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예정대로 진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참으로 무례한 행동이다. 문 대통령이 "우리의 주권의 문제이고 내정에 관한 문제"라고 일침을 가했으나, 주권 국가 국민으로서 불쾌감은 억누를 수 없다. 그러나 아베의 가족사를 생각해 볼 때, 어쩔 수 없는 금수저 정치인의 한계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 아베 총리는 무척 인기 없다. 게다가 평창에서 보여준 무례한 행동으로 그의 평판은 급전직하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막연한 편견이나 피상적인 지식으로 접근하는 건 금물이다. 그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총리로, 50~60%대를 넘나드는 지지율을 누리고 있으며 평화헌법 개정을 시도하고, 의회에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의석을 확보한 강력한 지도자다.
이런 이유로 아베 총리에 대한 감정적인 접근은 금물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아오키 오사무의 <아베 삼대>는 한국 독자들에게 큰 함의를 던져주리라고 생각한다. 책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다룬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아오키 오사무의 열정적이고 끈질긴 취재에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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