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내 삶은 내 말씀(메시지)이다’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내 삶은 내 말씀(메시지)이다’
금강일보
승인 2019.11.18 19:23
한남대 명예교수
나는 지난 11월 초 약 열흘간 인도에 갔었다. 델리(Delhi)에서 내가 속한 ‘종교친우회(퀘이커)’ 아시아 서태평양 지구(AWPS) 친우들이 만나는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평화를 사랑하고, 가능한 한 단순·소박하게 살며, 모든 생명체는 다 동등하다는 것이며, 삶은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고, 삶을 살아갈 때는 진정성을 가져야 하며,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들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활신조로 하는 그들의 전통이 좋아서 함께한다.
물론 나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하여 고민하고는 있지만.
이 모임의 빡빡한 일정 중에서 오후 휴식 시간에 잠깐 간디 기념관(Gandhi Smriti)에 갔었다. 입장료는 없었다.
델리의 거리나 광장이나 시장통에 몰려 있는 그 많은 인파와는 달리 사람이 별로 없었다. 찾는 사람들은 인도인들보다는 주로 외국에서 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고 조용하였다. 일단 맘을 경건하게 가지게 했다. 간디 선생이 마지막에 사셨다는 건물은 하얗게 돼 있었고, 건물 아래 층 첫 번째 방에서 주무셨단다.
그 건물은 간디가 일생동안 살아오면서 한 일들을의 사진과 기사들로 가득 채워졌다. 건물 한 가운데 현관에는 까맣게 된 조그마한 간디가 앉아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나를 첫 순간 사로잡은 문구가 간디의 침실 입구 벽에 표구되어 걸려 있었다. ‘내 삶은 내 메시지다’(My life is my message). 이 말이 나를 콱 채웠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깊게 내 쉬게 했다. 일종의 탄식 비슷한 것을 주는 문구였다.
간디에 대한 생각을 그 한 마디로 요약하도록 하여 주었다. 그렇다면 간디의 삶만이 간디의 메시지일까? 아니지. 모든 사람은 자기 삶을 통하여 자기 말씀을 한다. 도척은 도척의 삶으로, 공자는 공자의 삶으로 자기 메시지를 나타낸다. 나는 어떤 삶으로 나의 말씀을 나타낼까?
숙소에서 나와서 어린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공개하여 기도하던 곳으로 가던 길에는 발자국을 만들어 놓았다. 매일 기도 때가 되면 그 길을 통하여 그 기도터에 갔다는 것이다.
그가 기도하던 그 기도터는 곧 무수히 많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말을 전하던 곳이고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시간에 맞추어 오곤 하던 곳이다.
힌두를 향하여, 모슬렘을 향하여, 영국을 향하여, 인도를 향하여, 그리고 인류와 역사를 향하여 말을 하던 곳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인도의 힌두 청년이 쏜 세 발의 총알을 맞고 쓰러져 죽었다.
일생 동안 비폭력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살아온 그는 증오에 가득한 청년이 쏜 폭력의 상징인 총탄을 맞고 삶을 마감하였다. 비폭력의 삶은 비폭력과 평화와 화목함과 사랑으로 가득한 마감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참 겁이 많던 어린이였다. 수줍어하고, 남 앞에서 자신 있게 말을 하지 못하였다. 여러 주변의 사람들에게 골림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였다. 영국에 유학하려 할 때 가문으로부터 파문을 당했고, 유학시절에는 유색인에 대한 차별을 받아야 했고, 변호사가 되어서는 법정에서 의뢰인을 위하여 변론을 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쓴 변론문을 읽을 수도 없을 만큼 덜덜 떨렸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실패한 그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인도인 회사의 법률사무를 보기 위하여 갔지만, 백인에게 유색인종이라 하여 무차별 폭행을 당하고 인종차별을 받았다.
무서운 조직폭력과 제도폭력에 문화로 이미 정착된 편견 속에서 인도인이나 흑인같은 약한 자가 살아나갈 길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인간이기 위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정리했다.
톨스토이나 러스킨 또는 소로우를 좋아하였던 그는 국가를 위하여 국가를 초월하고, 인종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종족을 뛰어넘어야 하며, 종파간의 갈등을 없애기 위하여는 종파를 초월하는 자세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찍 깨닫는다.
힌두교의 경전인 바가밧기타를 매일 읽고 묵상하였지만, 신약성경의 예수의 말씀을 평생토록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처음 사람이나 나중 사람이나 모두가 다 똑같은 신의 자식이라는 관점에서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폭력을 쓰는 사람은 폭력으로 망한다는 진리를 잘 알기에 그 진리를 실현하는 길은 비폭력만이 유일하다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그것은 그에게는 진리였다. 바로 그 진리를 지키는 것, 그것을 꽉 잡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멋진 진리를 실현하는 삶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살았다. 그러기 위하여는 비겁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큰 악은 그에게 비겁함, 비굴함이었다. 어떤 거대한 세력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으려면 진리를 실현하여야 한다. 그 길은 수단과 목적이 일치하는 것이라야 했다.
그래서 동족의 무수히 많은 비난에도 끄떡하지 않고 꿋꿋이 비폭력과 화합의 길을 갈 수 있었고, 전 세계를 식민지화한 영국의 거대한 세력 앞에 단순한 복장 하나로 맞서서 싸울 수 있었다. 그에게 비폭력은 수단이 아니라, 진리 자체였고, 가장 오래갈 수 있고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나 그는 분열과 증오와 폭력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에게는 그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한 삶이었다. 가장 모순스럽게 죽는 것이 어쩌면 그에겐 신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을지 모른다.
그가 죽은 뒤 무수히 많은 폭력단체들이 스스로 해체하였고, 세계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흐름이 가득하게 되었다. 지금도 약소국이나 약한 민족들은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비폭력 생명투쟁으로 강력한 세력에 맞서는 것이 자기들이 살 길일 것이다. 남북관계, 한미관계, 한일관계도 이 정신으로 나갈 때 길을 더 쉽게 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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