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6

에큐메니안 모바일 사이트, 자아와 자유-자신에 대한 노예성과 개인주의의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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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칼럼
자아와 자유-자신에 대한 노예성과 개인주의의 매혹

기사승인 2021.08.15 
- 사유와 信學 10


▲ 인간의 노예화는 단순히 외부적인 힘이 그를 노예화하는 것이 아니다. ⓒGetty Image


1. 모든 인간 노예성의 내면적 뿌리로서의 자아에의 노예성

지금까지 ‘인격’과 ‘정신’이라는 대 전제 아래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대표적인 항목들을 살펴보았다. 존재, 신, 자연, 우주, 사회 등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베르댜예프는 그런 것들이 다가 아니라 그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바로 인간이 “자기 자신의 노예”라는 사실이라고 밝힌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노예성을 “인간 노예성에 대한 마지막 진리”라고 말하며 어떻게 이 자아에 대한 노예성이 바로 앞에서 말한 모든 노예성의 실존적 뿌리가 되어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 대한 노예성, ‘자아 중심주의(egocentricity)’, ‘이기성’은 “인간의 원죄(the original sin of man)”이며, 그것은 자아와 타자, 하느님, 세계 및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다시 말하면 ‘인격(personality)’과 ‘우주(the universe)’ 사이의 참된 관계를 왜곡시키고 침체시키는 것이라는 의미이다.(1)

오늘 우리 시대에 이 자아에의 노예성은 우리가 그렇게 크게 외치지 않아도 잘 안다. 주지하다시피 근대(모던) 이후 포스트모던은 ‘주체’의 해체를 말하고, ‘저자(책)’와 그의 ‘큰 이야기’가 더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주체와 자아는 강력하다. 마르크스나 프로이트 등도 인간 노예성이 인간 의식의 한 구조로서 의식의 객체적 구조임을 밝혔지만, 베르댜예프는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자아에의 노예성’은 이들이 주창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근본적인 의미에서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 ‘실존’의 구조 가운데서 드러나는 역동적인 “내면적인 정신적(영적) 투쟁(inward and spiritual struggle)”이기 때문에(2) “가장 의존적이며”, “영원한 노예성(eternal slavery)”이라고 강술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여러 가지 ‘우상의 종’인데, 즉 객체 세계의 노예에 빠져 사는데, 그 객체 세계의 우상은 인간 실존이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으로서 자유와 노예성 간의 투쟁이 외부적인 객체화된 외재화 세계 속에서 행해지지만, 그러나 그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투쟁’이라는 것이다. 베르댜예프는 이것을 인간이 그 인격성으로 인해서 “소우주(a microcosm)”라는 사실과 관계된다고 밝히면서 인간 실존 삶에서의 자유와 노예성 간의 싸움은 인격 속에 포함된 “보편적인 것(the universal)” 속에서 행해지고, 그 투쟁이 이차적으로 객체적 세계 속에 투영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노예화는 단순히 외부적인 힘이 그를 노예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확실해진다. 오히려 더욱 심각한 것은 인간 스스로가 그 노예가 되는 것을 승낙하는 것이며, 자신을 노예화하는 힘의 작용을 굴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객체적 세계에서 노예성은 인간의 사회적 지위로 특징지어지지만, 인간의 노예성은 인간 스스로가 노예화하는 힘의 작용을 굽실굽실 잘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노예성은 ‘의식(consciousness)’의 한 구조이고, ‘의식’이 ‘존재(being)’를 결정하고, 다시 그 존재의 예속에 의식이 빠지는 것처럼 그렇게 인간은 ‘환상(illusion)’의 지배하에 살고 있는데, 그 환상은 너무도 강력해서 마치 정상적인 의식처럼 보이는 관계이다.

2. 에고이스트의 사회 순응주의

인간은 ‘비아(non-I)’에 대한 관계를 노예적으로 규정하는데, 먼저 자기에 대한 관계를 노예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외부적인 사회적 노예성을 인내하면서 자기를 다만 내면적으로 해방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철학을 베르댜예프는 “노예적인 사회철학”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과의 관계를 잘못 해석한 것이고, 따라서 내면적인 해방은 외면적인 해방도 불가피하게 요구하는 것으로서 자유로운 인간은 사회적 예속에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3)

인간이 객체에서 나오는 외부적 노예성에 노예적으로 몸을 맡기는 것은 ‘이기심(egocentricity)’ 속의 자신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이야말로 진정 사회에서 “순응주의자(conformist)”인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노예적이고 불의한 세계와 사회적 예속에 대해서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가 자아에의 노예성 아래 살기 때문이고, 그래서 비아에서 나오는 노예성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국 사회에서도 잘 보이듯이 온갖 이유를 대면서 자신 앞에 놓여있는 사회적 불의와 예속으로부터 눈을 돌리며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자기에의 노예성에 빠져있는 이기주의적 순응주의자들이다.(4)

그런데 여기서 인간은 하등한 동물적 자기 보존의 욕구에 예속될 뿐 아니라 세련된 자아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즉 높은 이념이나 최고의 감정, 또는 재능 등의 노예가 되기도 하여서 앞의 여러 성찰에서 보아왔듯이 인간은 최고의 가치까지도 자기중심적인 자기 긍정의 도구로 변형시킨다. 여러 종류의 광신주의나 겸손이 극단의 자기 긍정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기독교 성경의 바리새인들처럼 선량과 순결의 높은 이념과 그에 대한 헌신도 자신을 이기적으로 내세우고 자기만족과 자기 긍정의 도구가 되는 경우를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에고이스트가 자기의 종이 되어 사는 것은 자신을 학대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인격은 노예성의 반정립이고, 이기성은 그 인격을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3. 개인주의의 노예성과 공포와 분열

베르댜예프는 그러나 인간 자아에의 노예성이 가장 빈번히 취하는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결코 간단히 평가할 수 없는 복잡한 현상이라는 것을 먼저 밝힌다. 그것이 종종 ‘인격주의’로 불리면서 혼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주의의 ‘개인(individual)’은 ‘인격(personality)’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개인은 앞에서 밝힌 대로 ‘전체(예를 들어 사회나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하나의 ‘부분’이 되기 때문에 전체가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종속적 속성이지만, 인격은 어떤 전체와의 관계에서도 결코 부분이 아니며 그 자체가 소우주이고 만유라는 관점에서 전혀 다른 차원이다. 즉 인격은 ‘정신적이고 영적인(spiritual)’ 범주이지만 개인은 ‘자연주의적(naturalistic)’ 범주라는 의미이다.

현대 문학에서 헨리 입센의 희곡 『페르긴트 Peer Gynt, 1867년』 등을 들면서 오늘 한국 사회에서도 이미 개별 지역의 문화적 특색으로 자리 잡은 엘리트주의적 개인주의 탐미주의가 어떻게 인격을 해체하고 분열시키는지를 밝혀주는데, 주인공 페르긴트는 진정 자기 자신일 것과 독창적인 개인일 것을 바랐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삶에서 어느 대상과도 하나 되지 못했고, 모든 것을 자신의 쾌락과 영욕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면서 가장 가까운 주위로부터도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다. 오직 자신의 노예였던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베르댜예프는 인격의 ‘내적 핵’이 빠진 인물로 이해한다. 인격이란 한 개인이 만나는 모든 감각적, 감정적, 지성적 경험을 통일시키는 “중심축(the inward centre)”으로서 내적인 완전이고, 통일이며, 온갖 자연주의적, 사회주의적 노예성에 대한 자기 통어를 가능하게 해주는 노예성에 대한 승리라고 밝힌다.(5) 그 내적 중심의 해체는 인간을 분해된 자기 긍정의 지성적, 감정적, 감각적 요소에 빠지게 하면서 노예성의 다양한 형태에 빠뜨린다.

내적 중심의 상실과 더불어 부분으로 분열된 인간은 쉽게 ‘공포’에 빠지고, 공포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노예성의 상태에 잘 가둔다. 그러나 그 분열과 공포의 극복은 결코 한 지성적, 감성적, 감각적 요소의 개별적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또한 예를 들어 니체가 선포한 것과 같은 강력한 생 의지나 권력의지 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통합되고 중심이 잡힌 인격과 자신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강한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의식의 개별적 요소가 아니라 전체로서 그 같은 객체화된 세계에 대치해 있는 인격의 일로서의 통합된 인격과 ‘정신적(spiritual)’ 중심을 찾는 일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베르댜예프는 니체의 권력의지를 가장 반 인격적인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모든 편집(偏執, possession)은 그것이 저열한 정열에 의한 것이든 높은 이념에 의해서든 인간 정신적 중심의 상실을 의미하고, 진리 인식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6) 편집은 권력을 잡기에 열중하는 자, 다시 말하면 지배, 권력, 성공, 영광, 생의 향락을 추구하는 자의 예종이기 때문에 그러한 예종과 노예화에 열중하는 자에게는 진리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오늘 곧 대선을 앞둔 한국 사회에서도 바로 그러한 권력에의 의지가 강한 사람일수록 진리에 관한 관심은커녕 역사적 사회적 상식에도 어긋나는 말들을 쏟아내며 종횡무진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자아에의 노예성인지를 말할 수 있다.

4. 인격주의와 보편적 사명

베르댜예프는 개인주의가 세계의 노예성에 대한 개개 인간의 저항이고 자유라고 믿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라고 일갈한다. 오히려 개인주의는 일종의 객체화이고 또한 사회화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노예성인데, 왜냐하면 개인주의가 아무리 전체에 대한 저항이라고 해도 그것은 ‘전체’에 대한 ‘부분’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부분으로 여기는 외재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을 고립시키면서 전체가 자신에게 가하는 강제성만을 보면서 자아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주의는 참된 인격의 실행이 아니라 집단주의의 반면일 따름이고, 그것이 개인주의의 역설이고,(7) 그가 있는 곳에는 항상 분열과 분해가 일어난다.

여기에 대해서 인격주의는 오히려 ‘공동적(communal)’ 경향을 보이고 사람들 사이에 동포적 관계를 수립하기 바란다. 개인주의는 그와는 달리 사람들 사이에 매우 탐욕스러운 관계를 설정하는데, 인격주의의 창조적 정신이 때로 고독하고, 잘 인정받지 못하고, 이미 세워진 집단적 견해나 환경적 판단과 격렬히 투쟁하지만, 그들은 ‘보편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베르댜예프는 그러한 창조적 인격의 내면적 보편주의의 고독은 객체화된 보편주의나 개인주의의 자기 황폐화와 무능, 순응주의의 고독과는 전혀 같지 않다고 강조한다.(8)

그에 따르면 객체 세계의 노예화하는 힘은 인격을 그 저항에서 ‘순교자’가 되게 할 수는 있어도 결코 ‘순응주의자’가 되게 할 수는 없다. 순응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또는 저런 핑계들을 대면서 자기 자아에의 노예성에 빠지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칼 융이 밝힌 인간 심리의 두 가지의 유형, 즉 ‘내향성(introversion)’과 ‘외향성(extroversion)’의 구분으로부터 베르댜예프는 왜곡된 내향성이란 인격성을 상실한 자아 중심주의이고, 왜곡된 외향성이란 소외이며 외래화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이 양자는 모두 주체적인 것과 객체적인 것이 서로 단절된 결과라고 밝히는데, 왜곡된 내향성조차도 ‘객체화’라고 부르고자 하는 이유는 그 속에서 자기의 자아에 의해서 삼킨 바 된 주체도 역시 노예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외향성에서 객체 속에 전체적으로 투입되어 버린 주체가 노예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현실에서의 누구도 이 두 가지 경향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그렇게 온전히 자유로운 인격은 그에 따르면 “세계의 생 속에서 흔치 않게 피는 꽃”이고, 인간 대다수가 인격적으로 그렇게 형성되지 못했다. 개인주의는 “자연주의적 철학”인데 반해서 인격주의는 “정신의 철학(a philosophy of the spirit)”이고, 세계에 대한 모든 노예성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자기를 노예화하는 세력으로부터의 해방, 즉 이기성에서의 해방인 것을 그는 다시 강조한다.(9)

5. 한국 信學의 마무리 성찰 1-‘통합성(誠)’과 ‘타자성(敬)’, ‘지속성(信)’의 인격을 지향하며

참으로 어려운 주제이다. 앞에서 밝힌 대로 베르댜예프는 이 자아에의 노예성을 단순한 신체나 심리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정신적)인’ 문제이고, 이것이 모든 노예성의 뿌리가 되며, 그래서 가장 어려운 ‘원죄’와 같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자아에의 노예성의 투사가 각종 사회적, 우주적 노예성의 문제로 드러나고, 그러므로 동전의 양면처럼 인간은 정신적으로 내향적이며 내재화해야 하고, 동시에 창조적 활동 가운데서는 세계와 사람들을 향해서 외향적인 존재여야 함을 그는 강조했다.

지난 19세기 후반기 조선 땅에서 국내외의 여러 어려운 요인으로 나라뿐 아니라 스스로도 심각한 개인적 실존적 위기 상황에 노출되어 있던 동학(東學)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水雲 崔濟愚, 1824-1864)은 1860년 큰 초월 경험을 했고(용담가), 그 경험에서 얻어진 가르침을 시대와 나라, 사회와 인간의 삶을 통체적으로 구하고 변화시킬 ‘다시 개벽’의 큰 가르침(무극대도無極大道)으로 선포했다(포덕문布德文). 더 나아가서 그는 그 가르침이 결국 그를 받는 사람의 내면적(인격적) ‘성(誠)’과 ‘경(敬)’의 문제라는 것을 밝혔고, 그래서 ‘성(誠)’, ‘경(敬)’, ‘신(信)’의 세 가지 덕이 동학 가르침의 핵심으로 자리하게 되었다.(10)

본인은 일찍이 한국 여성신학적 영성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한국 여성영성을 ‘통합성(聖)’, ‘타자성(性)’, ‘지속성(誠)’의 세 가지로 이름 지은 바 있다. 우리말과 글로는 모두 같이 발음되고 쓰이는 ‘성’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그것을 세 가지의 ‘한자어(聖·性·誠)’로 그 차이와 연결을 밝히면서, 오늘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한국 여성신학적 대안 영성과 종교성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11) 그 세 가지란 먼저 우리 존재와 삶의 온 영역을 ‘거룩(聖)’으로 파악하고 선포하는 ‘통합성’의 영성이었고, 이어서 그러나 그 거룩의 존재인 내가 다시 여기 지금의 몸과 기와 마음의 경계로 한정되는 자아적 경계를 넘어서 진정으로 나와 ‘다른(性)’ 타자를 받아들이는 ‘타자성’의 영성을 말했고, 세 번째로 그 통합과 경계 넘음의 사랑과 인내를 단번에, 한동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誠)’, 거기서 다시 새롭게 생명과 선함, 정의와 평화가 영글 때까지 고집하고 계속하는 ‘지속성’의 영성을 밝혔다.

당시 서세동점 해오던 ‘양학(洋學)’ 또는 ‘서학(西學)’에 응대하면서 그때까지 조선 땅에서 실행되던 유불도를 민중적 삶의 자리에서 통섭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사상과 영성의 시작이자 결정이라고 평가받는 ‘동학(東學)이 요사이 다시 주목받는다. 그 동학의 영성을 다시 접하면서 본인은 이미 ‘성성성(聖·性·誠)’으로 표현했던 한국적 여성영성을 다시 한 번 거기서의 ‘성경신(誠·敬·信)’의 영성과 연결하여 새롭게 의미 지어 보고 싶어졌다.

즉 그것이란, 올해 초 출간된 도올 김용옥 선생 『동경대전』 역해도 여러 번 지적했듯이 유교 『중용』이 이미 ‘하늘의 도(天之道)’로 천명한 ‘誠’이 이 세상 만물과 만사를 거룩의 현현으로 보는 큰 ‘통합성’을 드러내는 언어로도 손색이 없다는 것을 다시 보았고,(12) 이어서 최해월 선생이 ‘경물(敬物)·경인(敬人)·경천(敬天)’으로 다시 말한 ‘敬’이야말로 더 지극할 수 없이 타자와 세계에 대한 존숭과 인정을 표현하는 ‘타자성’의 언어로 훌륭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信’이야말로 이전 여러 성찰과 퇴계 『성학십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등에서도 본대로 통합성(誠)과 타자성(敬)의 영성을 지속적으로 자신의 몸과 인간적인 말을 통해서 드러내고 살아내는 일, 즉 진실한 말과 삶의 실천을 지속하는 ‘지속성’의 영성을 가리키는 언어로 적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믿음(信)’과 ‘성실(誠)’, ‘겸비·환대(敬)’가 우리 시대와 문명, 개인의 삶에서도 문제의 핵심이고, 더욱 축약해서 말해보면 지금 이 ‘사유와 信學’의 한국 ‘신학적(信學的)’ 성찰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와 같이 믿음과 신뢰, 진실과 성실의 ‘信’이야말로 각 개인의 삶뿐 아니라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역할을 위해서도 핵심 관건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그 信이 우리 언어와 문화, 정치와 교육, 삶과 종교에서 핵심 관건이 될 때 천지의 모든 생명과 삶의 자리가 편안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오늘 우주와 인간 삶이 다차원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각종 노예성을 돌파할 수 있는 근본 힘을 얻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며, 지금까지 함께 연결해서 살펴본 베르댜예프의 언어로 하면 다시 ‘인격’과 ‘정신’, 그의 창조성과 진실성, 지속적인 실천력의 ‘자유’가 관건이라는 말이다.

6. 한국 信學의 마무리 성찰 2: 우리의 ‘오래된 미래’를 살피며 자아에의 노예성 극복하기

며칠 전 보인회(輔仁會/사유하는집사람회)의 한 친우가 정토회 법륜스님의 하루 일정과 그 안에서의 정토회의 여러 일이 소개되는 ‘스님의하루’라는 유튜브를 보내주었다. 특히 이번 회 제목이 “자기 변화가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것이었는데, 거기에 정토회에서 실행하고 있는 진정한 자기변화와 사회변화, 세계변화를 염원하는 온라인 ‘만일결사(萬日結社)’ 이야기가 자세히 실려 있었다. 그 만일결사를 위해서 먼저 ‘천일(千日)결사’를 이루고자 하고, 다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백일씩 열 번으로 나누어서 백일기도가 수행되는데, 이번 이야기는 여섯 번째 ‘백일(百日)기도’를 시작하는 예배(입재식) 이야기와 더불어 그 수행을 함께 하는 한 해외 거주 수행자의 감동스러운 수행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코로나 사태 이후 이러한 수행이 전세계 각처를 유튜브 생방송으로 연결하여서 거의 만여 명이 각자가 처한 장소와 일과 처지가 달라도 한 몸으로 접속되어서 자기 변화의 일을 함께 해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13)

이날 자신의 수행담을 나눈 캐나다 이민자 장형원 씨는 캐나다와 미국을 오가며 장거리 트럭 운전을 하는 운전사였는데, 그는 두 평 남짓한 자신의 트럭을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는 움직이는 개인 정토법당”이라고 소개하며, 자신이 트럭을 타고 한 달에 20여 일 집을 떠나서 영하 40도 겨울 눈 덮인 캐나다 북쪽 설원에 있어도, 또 폭염 속의 애리조나 사막에 홀로 있을 때라도 WIFI로 연결되는 움직이는 법당에서 결사 도반들과의 서로 함께 기도하며 수행을 이어나가고, 이 연결로 그는 더 홀로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는 그와 같은 수행을 통해서 어린 시절 어려운 삶을 살았을 때의 상처와 고통도 치유하면서 깊은 만족과 평화 속에서 주변과 사회,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염원하는 사람으로 변화해간다가는 이야기였다.

스님의 하루 일정 모습과 유사하게 백일기도와 천일결사, 만일결사, 더 나아가서 앞으로의 인류의 미래를 위해 거의 30여 년의 삼만일 결사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어제의 삶에 대한 참회와 몸과 마음의 기를 풀기 위한 108배 절 기도를 하고, 다음으로 고요히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고, 이어서 각자 다른 처지와 일로 새 하루를 살기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 經 읽기를 하는 순서로 하루를 열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의 새벽기도도 그와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룻낮 동안의 시간에 한 가지씩 선행이 매우 강조되었고, 이와 더불어 지구상의 수많은 굶주리는 유아들, 교육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하루 1달러 이상 기부가 권고되었다.

만족할 줄 알기, 검소하게 겸손하게 살기를 강조하면서, “우리가 이 나라의 희망이고 빛이고, 인류의 미래를 선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셨으면 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가 얼마나 소중하고, 자기가 하는 일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지금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지구 밖에 나가봐야 알 수 있고,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지는 다른 나라에 가봐야 알 수 있듯이,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여러분들이 자기 밖으로 나가 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 속에 갇혀 살기 때문에 자기가 소중한 줄 모릅니다. 매일매일 정진해서 자신의 소중함을 알고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무더운 여름에도 백일 정진을 잘 해나가시기 바랍니다.”(14) 라는 언어로 스님은 어떻게 자아에의 노예성에서부터 해방하는 일이 세계를 품게 되는지를 밝힌다.

“혁명은 오로지 낙관할 수 있는 자의 것이다. 낙관은 신념의 지속이고, 신념의 지속은 오직 실력에서 생겨난다.”(15) 이 말은 동학 수운 최제우 선생이 1864년 대구에서 참수되기 전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시(영소暎宵)를 해석하면서 도올 선생이 발설했는데, 여기서 본인은 ‘낙관’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凡夫)이 바로 자신 속에 하늘의 뜻을 알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근거(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믿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러한 믿음과 실천을 성실히 해나가는 것이 ‘신념’이고, 그리고 그 신념을 지속하는 힘(信)은 다시 공부와 수행과 끊임없이 자기 밖으로 나가서 나와 다름과 새로움에 자신을 내어놓은 ‘실력’의 타자성(敬)에서 온다는 것을 지시해 주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오늘 한국 사회의 대선 정국은 특히 자아에의 노예성에 사로잡혀 자신을 무소불위의 유일자로 알고, 그 힘을 휘두르는 일에만 몰두하면서 지금까지 전혀 안중에도 없던 자신 밖의 세상이 변한 줄도 모르고 여전히 자신의 명령과 의도대로 세상이 좌우될 수 있는 줄 알고 종횡무진 분주히 다니는 사람들로 시끄럽다. 그들의 그러한 자아에의 노예성은 더 엄밀히 말하면 결국 지독한 ‘자아소외(self alienation)’인 것이며, 그 자아소외는 다시 ‘세계소외(world alienation)’를 불러온다. 오늘 한국 사회는 그 자아소외와 세계소외의 닫힌 구조 속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폭력과 완력, 거짓과 무지, 내로남불과 전체주의적 무소불위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

혹시 그러한 상황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근래에 서구로부터 전해 받은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서 더 가중되지나 않았는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기독교 신앙이 그렇게 강조하는 ‘믿음(信)’이 오해되고 잘못 해석되면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를 살피면서 이제 우리의 좁아진 자아로부터 나와서 우리의 오래된 미래인 ‘다시 개벽’을 외치는 동학이나 그보다 먼저의 불교 전통 등을 새롭게 돌아보면 어떨까 생각한다.(16)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깊은 자아에의 노예성을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찾는 분투이며, 그 길이 진정 어디에 있고,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미주
(미주 1)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이신 옮김, 늘봄, 2015, 176쪽.
(미주 2) 같은 책, 174쪽.
(미주 3) 같은 책, 175쪽.
(미주 4) 같은 책, 182쪽.
(미주 5) 같은 책, 178쪽.
(미주 6) 같은 책, 180쪽.
(미주 7) 같은 책, 181쪽.
(미주 8) 같은 책, 182쪽.
(미주 9) 같은 책, 184쪽.
(미주 10) 도올 김용옥 지음, 『동경대전-우리가 하느님이다』 2, 통나무, 2021, 92쪽, 185쪽.
(미주 11) 이은선, 『한국 여성조직신학 탐구-聖·性·誠의 여성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04, 37쪽 이하.
(미주 12) 도올 김용옥, 같은 책, 92쪽.
(미주 13) https://m.jungto.org/pomnyun/view/83353 2021.7.18. 제10-6차 백일기도 입재식.
(미주 14) 법륜스님, 같은 사이트 말.

(미주 15) 도올 김용옥, 같은 책, 303.
(미주 16) 이은선,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동학읽기」, 『동서 종교의 만남과 그 미래』, 변선환 아키브·동서종교신학연구소 편,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0, 287-316쪽.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한국信연구소)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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