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7

정용식 근대화의 역설, 대중은 박정희의 성공을 욕망했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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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식

ㆍ근대화의 역설, 대중은 박정희의 성공을 욕망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만큼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도 없다. 장장 18년 5개월 열흘이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있었다는 시간의 무게 말고도 그가 대통령으로 행한 모든 것이 우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이해하지 않고서 한국 사회를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박정희의 의미는 정치권이나 학계의 논쟁 대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무당의 몸주신이 된 몇 안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몸주신의 자격은 크게 원한과 힘, 두 가지로 압축된다. 몸주신 중에는 남이, 최영 장군이 유명하지만 왕신으로 불리는 단군, 태조, 사도세자, 단종도 있다. 이들은 위대한 힘을 가진 영웅, 억울하게 죽어 원한에 찬 영웅으로 구분된다. 원한은 비슷한 체험을 반복한 사람들에게 강렬한 동일시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강력한 힘이다. 보통사람들이 없는 거대한 힘과 위력으로 원한을 해결해줄 수 있는 절대적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비극적 죽음과 절대권력자였다는 점에서 두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 마오쩌둥이 중국 보통사람들의 수호신이 된 것처럼 박정희를 몸주신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일부 무당들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전근대적 민속신앙의 몸주신이 된 것은 근대화의 결과였다. 농촌근대화로 규정된 새마을 운동을 통해 미신 타파를 부르짖고 각종 민간신앙을 대대적으로 몰아냈음에도 그는 5000년 가난을 몰아낸 영웅으로 재현된다. 요컨대 박정희는 이미 현대의 신화가 되었고 그 한복판에 근대화가 놓여있다.
억울한 죽음으로 원한에 찬 영웅이자 보통 사람들이 넘보지 못하는 강력한 힘을 가졌던 박정희 대통령은 대다수 한국인에게 신적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박정희 신화의 처음과 끝, 수직적 근대화

사실 근대화는 박정희 이전부터 중요한 화두였다. 개항 이래 엘리트 지식인들의 오래된, 그러나 좌절된 욕망이었다. 그 좌절은 거의 모든 엘리트 지식인들이 서구 근대에 대한 강렬한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박정희 체제는 이 좌절된 욕망을 국가 프로젝트로 구성하고 강력한 추진력으로 실물화시켰다는 점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즉 근대화는 더 이상 소수 엘리트 지식인이나 제한된 영역에 국한된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전사회적 현상이 됨으로써 모든 주민집단의 삶과 의식을 뒤흔들어 놓았다.
박정희 신화의 핵심은 근대화, 다시 말해 경제개발이었다. 산업화는 경제적인 것을 특권화하는 과정이었다. 경제가 모든 영역을 압도하면서 가장 중요한 차원으로 상승했고, 이는 ‘경제적 욕망의 정치’가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전근대 사회가 신분제적 격벽과 토지긴박을 통해 ‘안정’에 치중했기에 ‘안분지족’과 ‘금욕’을 강조했다면, 근대사회는 만인평등의 자연상태를 가정하고 능력별 위계서열화를 내세웠기에 욕망의 경쟁을 통한 사회적 유동성을 강조했다. 이는 곧 수직적 승강운동이 새로운 원리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박정희 본인이 근대의 놀라운 성공사례였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지존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의 전형이었다. 그의 성공적인 근대 체험은 수많은 대중을 근대화로 이끌 강렬한 유혹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조건을 달고 태어난 박정희가 신화적 인물이 된 결정적 계기는 교육이다.
그의 학력은 구미보통학교(1926~1932), 대구사범학교(1932~1937), 만주군관학교(1940~1942), 일본 육사(1942~1944), 조선경비사관학교(1946) 등으로 정리된다. 이상의 교육과정을 보건대 박정희는 당대 최고 수준의 근대교육을 이수한 셈이었다. 요샛말로 화려한 스펙을 쌓은 셈이다. 박정희는 우수한 성적과 품행을 바탕으로 보통학교 시절부터 급장이라는 권력 정치를 익혀나갔다. 그의 급장 시절은 어린이로 보기 힘든 승부근성과 권력의지로 요약된다. 같은 반 동기생의 기억에 따르면 성품이 몹시 독한 데가 있었고 그로부터 맞아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 정도였다. 또한 박정희는 힘이 세고 말을 잘 들어먹지 않는 급우 한 놈을 산술 숙제를 도와 내 말이라면 무조건 굴복하게 만들 줄 아는 학생이었다.
무엇보다 급장 박정희는 급우를 수평적 벗이 아니라 수직적 통제대상으로 생각했다. 박정희는 평생 수평적 관계에 대단히 취약했는데, 보통학교 급장 이래 상하관계가 분명한 세계에 익숙했다. 수직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꼭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무한대의 상승운동을 반복하는 것이었고, 박정희는 그 동력을 힘과 능력으로 파악했다. 힘과 능력의 제도적 형태가 권력이라면 그는 대단한 권력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는 대구사범학교 시절의 우울과 군관학교행이라는 결단으로 이해 가능하다. 박정희의 사범학교 시절은 꼴찌를 맴돌았던 성적, 외톨이 생활 그리고 음울·불성실·불평 등으로 기록된 조행평가로 요약된다. 이 우울은 좌절된 욕망과 관련이 있다. 사범학교는 이민족 정복자 일본인과의 조우와 경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고, 박정희는 수직운동의 막다른 골목에서 식민지적 우울을 경험한 것이었다.
박정희의 선택은 만주군관학교행이었다. 군인의 길은 집안의 기둥이었던 셋째 형 박상희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된 박정희의 주체적 결단이었다. 이 단계에서 박정희는 이미 가족과 고향을 떠나 수직세계의 주체로 진입했다.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경구가 횡행하던 세계전쟁의 시대에, 폭력의 감수성을 갈고 닦았던 소년의 길이 군인으로 연결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만주군관학교에서 박정희의 성적은 사범학교 때와는 달리 최상이었고 모범적인 생도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성적이 그의 상승운동의 핵심 동력이 되었고, 최고 권위의 일본육사에 편입할 수 있었다.
수직의 질서를 통한 박정희의 근대 체험은 화려한 성공이었음이 분명했다. 이것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중요한 배경이자 근대화 프로젝트를 저돌적으로 추진하게 된 동력이다. 그것은 한때 거의 모든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대통령으로 수렴되었던 기억을 되살리게 만든다. 그의 개인적 성공은 국가적 성공담과 결합되어 양자를 아우르는 설득력 높은 서사 구조를 이루었다. 개발연대의 추억은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야만 했던 국민의 교육용으로 제격이었다.
고려대 창립 60주년(1965년)을 맞아 박정희 대통령이 쓴 휘호 ‘조국근대화’.

■ 국민에 복종 강요한 지식과 권력의 결합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의 놀라운 성공은 거대한 실패와 짝을 이루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성공적으로 체험한 근대는 주로 기술의 근대였으며 해방의 근대와는 별로 인연이 없었다. 그를 보고 “공기 대신 애국애족을 호흡하는 것 같았다”는 한때의 술친구 이병주의 회고는 박정희의 인식론적 뼈대를 확인시켜 준다. 이병주에 따르면 국수주의자들이 일본을 망쳤다는 황용주의 말에 박정희는 “천황 절대주의와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라고 반문하면서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일본 국민의 저변에 흐르고 있기에 오늘의 일본이 가능했다”고 반박했다.
이 얘기는 1950년대 말경의 일이었는데 박정희의 인식은 이미 식민시기에 그 기본 틀이 확립되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군 경력으로 일관한 그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전향적 태도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짧았던 남로당 경험도 철의 규율과 조직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강조하는 것이었기에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삶 속에는 식민시기에 체득한 일본의 파시즘적 경향을 역전시킬 만한 구체적 계기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가 구축한 체제는 중앙정보부를 위시한 폭력적 국가장치와 촘촘한 관료제, 냉전체제를 조건으로 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안보담론 그리고 개발주의와 민족주의를 통한 동원체제였다. 한마디로 기술의 근대를 집약한 체제였고 그 정점은 유신체제였다. 그리고 이 체제를 작동시키기 위해 집권 초기부터 ‘교수정치’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지식인들을 대거 동원해 말 그대로 지식과 권력의 결합을 추구했다.
이에 포퓰리즘적 대중정치가 덧붙여졌다. 그것은 특히 집권 초기에 두드러졌다. 1963년에 출간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박정희는 “1% 내외의 저 특권 지배층”에 대하여 “증오의 탄환을 발사”하자는 과격한 주장을 펼쳤다. 이런 대중정치는 그전까지 유례를 찾기 힘들었다. 이승만은 왕족 의식이 대단했고 윤보선은 명문 귀족출신이었다. 이에 반해 박정희는 빈농의 아들임을 강조하면서 서민으로 죽겠다고 공언했다. 밀짚모자를 쓴 그가 농민들과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이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물론 이런 대중정치는 정권 후기로 가면서 후퇴했다. 특히 유신체제 성립은 대통령 선거라는 대중정치 공간을 아예 없애버렸고 새마을 운동이라는 대중동원과 장발 단속이라는 대중통제가 등장했다. 대중정치의 실패는 쓰디쓴 원한을 남겼다. 10·26사건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해방의 근대를 호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한 김재규의 대의명분은 다름아닌 자유민주주의였다.
조갑제에 따르면 박정희는 ‘봉건과 싸우다 전사한 근대화 혁명가’였다. 앞서 보았듯이 그는 기술의 근대성을 개인적·국가적 차원에서 성공적으로 실천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를 근대화의 순교자라 부르는 게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근대화의 사도라면 그가 이끌고자 했던 어린 양들은 어떠했을까.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을 최대한 증폭시켜 거대한 수직 승강운동을 촉발시킨 경제개발은 시장의 자유가 난무하는 세상으로 연결되었다. 이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졌고,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혐오했던 박정희에게 그것은 체제를 위협하는 ‘서구적 타락’, ‘현대사회의 병폐’에 다름 아니었다. 박정희는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변했지만, 그렇게 순진한 국민적 주체는 현실에 존재하기 힘들었다. 대중은 박정희의 욕망보다 그의 성공을 욕망했다. 그것은 수많은 ‘박정희들’이 양산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 적자생존의 희생자이면서도 ‘정글’의 회복 열망

박정희는 우리시대의 어떤 욕망을 먹고 자란다. 박정희 체제기에 폭발적으로 높아진 사회적 유동성의 기억은 비록 퇴행적인 것이라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삶의 희망처럼 여겨진다. 생존과 출세를 위해 개인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상식이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적자생존을 법칙으로 승인하면서 자신이 적자생존의 희생자가 됨에도 불구하고 정글의 풀이 무성하기를 열망하는 경제적 초식동물을 양산했다. 박정희는 육식동물이 되고자 하는 모든 초식동물들의 불가능한 꿈일는지도 모른다. 그 꿈이 좌절되는 지점에서 박정희는 몸주신으로, 일그러진 영웅으로 다시 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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