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이석기, 이재용, 그리고 문재인 - 경향신문
정동칼럼
이석기, 이재용, 그리고 문재인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2021.07.26 03:00 입력
종종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운동하다 감옥에 갔다 온 사람들한테. 주먹질하다 들어온 깡패들도 정치범은 존경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자는 감옥에서도 다른 수감자들한테 우대받았다는 이야기. 감옥에서 제일 대접 못 받는 이들은 경제사범이고, 특히 사기범들은 천하의 ‘잡범’ 취급을 받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세상이 변해서 독재 정부 시절의 정치범 이력이 명예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다수당이 되어도 자신을 정치범으로 만들었던 악법은 폐지되지 않고, 독재자 아버지가 만든 국가보안법을 부활시켜 정치보복에 이용한 대통령이 촛불시위로 무너지고 사법적 심판을 받고도 그에 의해 정치사상범이 된 사람은 여전히 감옥에 있으며, 반대로 경제사기범은 이제 천하의 잡범이 아니라 ‘구국의 기업인’이 되어 감옥을 드나들며 ‘민주화 세력’의 파트너가 되어 함께 국정을 의논한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우리가 다 아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박근혜 정부의 적폐를 상징하는 두 사람은 지금 감옥에 있다. 한 사람은 정치사범, 한 사람은 경제사범, 한 사람은 전 정권의 피해자고, 한 사람은 공범이다. 광복절이 다가오자 감옥 밖에서는 사면 요구가 뜨겁다. 누구일까 그 사람은.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라면 사면을 청원하는 목소리는 이석기를 향해 터져나와야 한다. 그러나 정·재계, 법조·학계 등 각계 유력인사들이 연일 광복절 특사를 요청하는 대상은 국정농단 피해자 이석기가 아니라 공범이자 주범인 이재용이다. 언론은 그런 목소리를 집중 보도하면서 이재용 사면 여론을 증폭시키는 확성기 노릇을 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은 어떤가? 얼마 전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이재용 사면에 대해 묻는 질문에 ‘아는 바, 들은 바, 느끼는 바 없다’고 답했다. 집권 기간 내내 중대한 정치적 결정이 필요할 때마다 정치 철학보다는 그때그때의 표 계산과 여론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해왔던 정부답게 모호하고 비겁한 답변이다. 사면은 대통령과 정부·여당에도 정치적 부담이다. ‘이재용 석방하라’는 지난 4년간 ‘박근혜 무죄’를 외쳤던 태극기 부대의 외침과 공명하는 목소리고, 그것은 이 정권의 근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결정이 아니라 법무부 장관이 결정할 수 있는 가석방을 검토하는 것도 책임론을 회피하려는 전략이다. 그럴수록 재계는 향후 경영활동이 제한된다며 더 강력하게 사면을 촉구한다.
언론은 이석기 사면에 대해선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박근혜-양승태 사법농단 사건의 실체는 명백하게 드러났고, 관련자들도 사법적 판결을 받았다. 진보통합당에 대한 사상 초유의 정당해산 명령과 이석기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은 박근혜 정부의 가장 추악한 재판거래 중 하나였다. 시민사회·종교계 등에서 수년째 사면청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보도하는 언론은 소수일 뿐이다. ‘선진국’의 지위에 오른 것을 치적으로 삼고 G7정상회의에 초대받는 ‘국격’을 자랑하는 친정부 자유주의자들은 이 정치적 후진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진보적 지식인들도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언급을 회피한다. 그동안 이석기의 수감기간은 박근혜 정부에서보다 문재인 정부에서 더 길어져 8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배 권력에 반하는 생각을 갖고, 그런 생각을 대중 앞에서 공표하고 설득하는 행위가 죄가 된다면, ‘세상 바꾸자, 갈아엎자’라고 외치며 촛불을 들었던 이들도 전부 내란선동죄에 해당한다.
나는 이번 결정이 앞으로의 사회적 권력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의 기업은 과거 독재 정부에 부역하며 뇌물을 상납하고 특혜를 얻던 기업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국가 경영의 주체로서 공동권력을 구성하는 주요 정치행위자이다. 그런 자본의 독재 시대에 급진적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진보정치는 ‘삼성공화국’으로 상징되는 자본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중요한 세력이자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다. 정부는 이 힘들을 탄압하면서 지배계급 내부의 견제력까지 무력화하고 있다. 이번 결정은 정부가 외쳐온 ‘검찰개혁’이 어떤 검찰을 향하는지도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이석기를 내란음모죄로 기소한 검찰인가, 이재용을 횡령과 뇌물공여죄로 기소한 검찰인가. 광복절 특사를 결정할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 자신이다. 누구에게도 미루지 말고 결정권을 행사하라. 촛불시위로 터져나왔던 사회 개혁의 열망을 완전히 무화시켜 민주주의와 진보정치를 압살하고 자본독재의 재벌왕국을 만들겠다고 하면 이재용을 석방하라. 그게 아니라면, 이재용이 아니라 이석기를 사면하라. 그리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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