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1

대둔산에서 동학농민군 최후의 혈전

<미륵바위, 동학농민군 마지막 항전지>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은 게릴라식 전투를 전개하기 위한 안전한 근거지를 물색한 끝에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기동(基洞, 터골) 북서쪽 석도골의 대둔산(大芚山, 879m) 미륵바위 정상으로 정하고 11월 중순에 해발 715m의 미륵바위 꼭대기에 <산상도소(山上都所)>를 마련했다.
<70일 항전의 최후>
1895년 음력 1월 24일 아침, 일본군이 바위를 타고 올라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동학농민군은 뒤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에 저항하다 그대로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고 최공우 접주 등 일부는 바위 아래로 도망쳐 살아남았다. 일본군은 당시 임산부도 사격해 살해했고 소년 1명만 남기고 모조리 죽였다. 당시 접주 김석순은 한 살배기 딸을 안고 천 길 벼랑으로 뛰어내려 암벽에 부딪혀 즉사했는데 소년은 접주가 일본군에게 죽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며 딸을 안고 뛰어내렸다고 했다.
1894년 1월 10일 고부에서 기포한 동학농민군은 이듬해인 1895년 1월 27일 대둔산 동학농민군의 최후를 끝으로 1년간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대둔산에서 동학농민군 최후의 혈전



대둔산에서 동학농민군 최후의 혈전기획/특집 /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2019-06-14 11:15:31

해월 최시형 평전

동학농민군 금산에 들어온 일본군 야습

일본군 인천 병참사령관은 동학농민군 토멸(討滅)을 위해 입국한 후비보병제19대대를 동로(東路), 중로(中路), 서로(西路)의 세 길로 1개 중대씩 출동시켰다. 동로로 이동한 일본군은 이천(利川)에서 충주, 안보, 문경, 상주 등 서울-부산 간 일본군 병참로(兵站路) 상의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면서 남하했다. 중로를 택한 일본군은 죽산(竹山)에서 진천, 청주, 금산으로 남하하면서 괴산과 보은의 충청도 동학농민군을 섬멸하기 위해 한반도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중앙부의 청주가도(淸州街道)로 이동했다. 서로로 이동한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인 전봉준의 부대와 싸우기 위해 공주가도(公州街道)로 기동했다. 대대장 미나미 코시로(南小次郞)는 중로 분견대와 함께 이동하며 동학농민군 토벌 작전을 지휘했다.


시라키 세이타로(白木誠太郞)가 이끄는 중로 분진대는 11월 6일 옥천에 이르러 동학농민군이 금산에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수집하고 금산으로 방향을 돌렸다. 시라키 부대는 제원역에서 동쪽으로 10km 떨어진 양산마을에 진을 쳤다. 금산의 동학농민군 1천여 명은 일본군이 양산에 유숙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11월 8일 밤에 양산을 에워싸고 야습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민가를 빼앗아 야영하고 있었는데 동학농민군이 밤 10시경에 마을 보초선을 넘어 공격을 개시하자 전투가 시작됐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이 차지한 민가에 불을 질렀다. 불로 인해 사방이 환해지자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에게 조준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집중 사격으로 동학농민군은 1시간 만에 금산 방면으로 퇴각했다. 수적으로는 월등히 많았지만, 일본군의 화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날 전투로 동학농민군은 40명이 사망했다.

일본군, 동학농민군 지원한 진산 현감 문책

이튿날일 11월 9일 일본군이 금산읍 동쪽 1km 지점에 나타나자 길목 언덕에 매복해있던 동학농민군이 다시 기습을 감행했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스나이다 소총 6정으로 일본군에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부대를 나누어 동학농민군을 사방에서 공격했다. 동학농민군은 금산읍 북쪽에서 읍내로 진입하다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용담현으로 퇴각했다. 금산에 일본군이 들어오자 병석의 금산군수 이용덕은 소 한 마리와 담배 두 묶음을 일본군에 보내어 아첨했다.


일본군은 11월 12일 금산현을 떠나 진산현으로 향했다. 도중에 산발적인 동학농민군의 저항이 있었지만, 진산에 일본군이 도착하자 동학농민군은 흔적도 없이 숨었다. 진산현감 신협은 동학농민군을 지원했는데 일본군이 도착하자 산중으로 피신해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간신히 신협을 잡아 문초해 동학농민군을 지원한 사실을 밝혀냈다.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지원했다는 죄로 신협을 포박해 끌고 가려 하자 일본군과 동행하던 내무아문 관리가 포박은 혹독하다고 해 포승은 면했다.

대둔산 미륵바위에 산상도소(山上都所) 설치

일본군은 공주전투에 합류하기 위해 11월 13일 아침 연산으로 출발했다. 일본군이 물러나자 이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다시 나타나 활동했다. 먼저 일본군에 의해 살해돼 길가에 뒹굴어 까마귀의 밥이 된 동학농민군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관군이 쳐들어오면 숨었다가 떠나가면 다시 나타나 활동하는 게릴라식 전법을 구사하며 저항했다. 동학농민군은 게릴라식 전투를 전개하기 위한 안전한 근거지를 물색한 끝에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기동(基洞, 터골) 북서쪽 석도골의 대둔산(大芚山, 879m) 미륵바위 정상으로 정하고 11월 중순에 해발 715m의 미륵바위 꼭대기에 산상도소(山上都所)를 마련했다.



▲ 대둔산 미륵바위. 동학농민군 최후의 항전지다. 천연의 요새인 이곳에서 동학농민군은 1894년 11월 중순부터 1895년 1월 27일 일본군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70일간 끈질긴 항쟁을 전개했다.(출처: 약수의 산행스케치)



동학의 역사를 연구하던 표영삼은 1966년 이곳을 찾아 대둔산 약수터에서 휴게소를 운영하던 이규만으로부터 대둔산 동학농민군의 산상도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들었다.

대둔산 케이블카 정상 정류장에서 서쪽 계곡 아래에 있는 육각정으로 내려가서 서쪽 가파른 능선을 향해 다시 올라가서 가파른 고개를 넘어 석도골 골짜기로 다시 내려간다. 거대한 미륵바위를 좌측으로 끼고 계곡으로 올라가면 정상 능선에 이른다. 좌측에 바위 봉우리가 나타나는데 여기가 미륵바위이다. 정면은 사다리가 필요하나 좌측 옆을 돌아가면 기어오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위 위에 동학군들이 초막을 쳤던 자리가 있다. 말라죽은 나무가 많아 나무하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오른쪽 계곡에는 샘물도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바위꼭대기에 축대를 쌓아 제1 초막을 쳤다. 뒤에는 북풍을 막아주는 바위가 있고 주위는 낭떠러지 암벽으로 되어 있었다. 제1 초막에서 동쪽으로 조금 내려가 평평한 공간에 제2 초막을 만들었고, 제1 초막에서 동남쪽 계곡에 제3 초막을 쳤다. 금산의 동학농민군은 대둔산에 초막 세 곳을 지어 웅거했다. 이곳으로 들어간 동학농민군은 도금찰(都禁察) 최학연과 접주 최공우, 김재순, 김석순, 진주환, 그리고 교수 강태종을 비롯해 김치삼, 김태경, 정옥남, 고판광, 송인업 등 수십 명이었다. 이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후 수시로 내려가 진산의 동학농민군과 접속해 활동했다.



▲ 대둔산도립공원 안내도. 사진 가운데 삼선계단 왼쪽으로 ‘동학혁명최후항전유적지’라는 글이 보인다. 금산의 동학농민군은 이곳에 웅거해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관군의 공격에도 끄떡없어


대둔산 산상도소를 알게 된 충청감영에서는 1895년 1월 9일 양호소모사 문석봉을 출동시켜 소탕하려 했다. 양총(洋銃)으로 무장한 40명의 영군은 1월 10일 터골에 도착했다. 문석봉은 험준한 산세를 보고 기가 질렸으나 임무 수행을 위해 조방장 김학립을 시켜 미륵바위 서남쪽 100m 떨어진 계곡 너머 능선에서 신식총을 쏘게 했다. 하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이틀간 체류하던 문석봉은 소득 없이 진산으로 돌아갔다. 관군이 출동하자 금산 의병장 김진용이 3백 명을 이끌고 왔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들이 물러가자 동학농민군은 영군을 불러들인 진산 군관 하경석을 처단하고 금산군까지 진출, 수성군을 공격해 많은 병사를 죽였다. 이렇게 대둔산 동학농민군이 활동을 전개하자 충청감영에서는 1월 19일 다시 문석봉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방법을 찾지 못해 진산읍으로 물러났다. 문석봉은 최공우와 친한 김공지를 꾀어 산상으로 올려보내 동학농민군을 이간질하려 했으나 형제처럼 끈끈하게 맺어진 대둔산 동학농민군을 속이지는 못했다. 문석봉의 출동에 동참한 금산 보부상 김치홍은 용담현에서 대포를 끌고 와 산상도소를 포격하기 위해 포를 쏘았다. 그러나 포탄은 골짜기 중간에 떨어져 소리만 요란할 뿐이었다.



▲ 대둔산 동학농민군 최후의 항전지, 동학농민군은 이곳에 초막을 짓고 항쟁하다 1895년 1월 27일 일본군에 의해 섬멸됐다. 최공우는 이곳에 산상도소를 설치하고 끝까지 저항했고 김석순 접주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일본군에 의해 죽지 않겠다고 낭떠러지로 떨어져 한 살배기 딸과 함께 자결했다.(출처: 약수의 산행스케치)



일본군 인간 사다리를 만들어 산상도소 공략

관군이 대둔산 동학농민군을 공략하지 못하자 일본군이 나섰다. 1월 23일 일본군 3개 분대는 충청감영군과 함께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터골로 들어왔다. 일본군은 대둔산에 도착하자마자 관군의 도움을 받아 동학농민군의 은거지 일대를 정찰했다. 일본군의 등장에 대둔산의 동학농민군은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이튿날인 24일 새벽 일본군은 공격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안개가 끼고 비가 내려 날이 밝아서야 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의 <대둔산부근전투상보>에는 동학농민군 요새를 공격하기 위한 일본군의 작전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오전 9시 30분 배치를 마치니 적의 전방사면 왼쪽 2백 미터 지점 고지에는 한병(韓兵, 관군) 20명을 배치하고 나머지 한병과 일본군 1개 분대는 왼쪽 고지에 배치하였다. 배후에 올라간 고마쯔(小松直幹) 지대가 10시에 도착하자 뒤쪽 고지에 배치했다. 오전 11시 10분경 큰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히며 적의 소재를 볼 수 있었다. …… 1시 40분, 세 방향으로 맹렬히 엄호 사격을 가하게 하고 소관은 일본군 1개 분대와 한병 사관 두 명을 대동하고 산정에서 배후를 공격하기로 했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겨우 적의 소굴 뒤쪽 아래까지 돌진했다. 그런데 몇 길이나 되는 암석이 담벼락과 같이 서 있어 전진할 도리가 없었다. 갖고 오던 사다리를 중도에서 버렸으니 대책이 없었다. 사람 사다리를 만들어 한 사람씩 올라가게 하니 15분 만에 전 대원을 등반시켰다. 다행히 적은 산이 험준한 것만 믿고 배후는 고려하지 않고 전방의 한병을 향해 계속 발포하였다. 이 틈을 타서 불시에 소리를 지르며 돌격했다. 적도가 허둥지둥 당황하여 어떤 자는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내렸고 어떤 자는 바위 굴 속으로 숨었다.

일본군이 바위를 타고 올라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동학농민군은 뒤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에 저항하다 그대로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고 최공우 접주 등 일부는 바위 아래로 도망쳐 살아남았다. 일본군은 당시 임산부도 사격해 살해했고 소년 1명만 남기고 모조리 죽였다. 당시 접주 김석순은 한 살배기 딸을 안고 천 길 벼랑으로 뛰어내려 암벽에 부딪혀 즉사했는데 소년은 접주가 일본군에게 죽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며 딸을 안고 뛰어내렸다고 했다.

동학농민군의 대장정 마무리

대둔산에서 항쟁하던 최공우는 도망쳐 연산의 염정골로 들어왔다. 연산의 도장동 일대인 염정골에는 당시 4백 호가 살았는데 대둔산에서 살아남은 최사문과 최공우, 양양옥, 박중집, 이홍기, 깅치선 등이 이곳의 동학도 김세마의 집에 도소를 마련해 끝까지 항쟁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자 인근에 숨어 있던 수백 명의 동학농민군도 모여들었다. 도소가 설치된 김세마의 집은 마을 남쪽을 흐르는 실개천을 건너 수락으로 넘어가는 길 초엽 오른쪽에 있었다고 한다.


동학농민군이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는 소식을 연산현감 정대위로부터 보고받은 충청감사는 문석봉 양호소모사에게 초멸을 명령했다. 문석봉은 5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염정골 입구에서 나오는 사람을 잡아 동학농민군과 도소인 김세미의 집을 알아냈다. 그리고 오후에 폭설이 내리자 폭설을 뚫고 염정골로 들이닥쳤다. 밤 8시경에 김세미에 당도해 살펴보니 동학농민군은 안방에서 잠들어있었다. 폭설이 내리는 밤에 관군이 공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동학농민군을 덮친 문석봉은 쉽게 동학농민군을 제압했다. 당시 김세미의 집에는 50명의 동학농민군이 있었는데 관군은 접주를 포함해 21명을 살해했다. 이렇게 동학농민군 최후의 항전도 막을 내렸다.



▲ 학농민혁명 대둔산항쟁 전적비. 2001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완주지부에서 19세기 말 일제의 침략과 조선조의 부패한 관리를 몰아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넋을 기리고자 기념비를 세웠다. 기단에 동학농민군이 외친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이 새겨있다.



1894년 1월 10일 고부에서 기포한 동학농민군은 이듬해인 1895년 1월 27일 대둔산 동학농민군의 최후를 끝으로 1년간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인즉천(人卽天)의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동학농민군의 항쟁이 우리 민주항쟁 역사의 뿌리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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