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민지기 사] 이 정도의 사실은 이미 합의된 상식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李宇衍
rS46 33 M00 ay3a1:ma82ct ·
모르면 공부부터 하면 좋겠다.
1907년부터 통계가 남아있는 1942년까지 통감부와 총독부 조림정책에 의해 조선 임야면적의 15%에 해당하는 236만 정보에 82억 본의 묘목이 심어졌다.산림황폐가 심각했던 조선 남부가 조림사업의 주 대상이었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성공 사례,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 주도의 제1차, 2차 치산녹화사업을 통해 심은 묘목이 48억 본이다.
문제인 씨 지금 사는 청와대 뒷편 청운동(창의문 근처다)에 일본인 기술자와 노동자를 초빙해 한국 최초의 사방사업을 실시한 것도 통감부다. 지금 산림휴양지라는 곳 가봐라. 광릉 가봐라. 데이트 코스 좋다. 총독부 임업시험장(지금의 한국 산림과학원) 광릉 지청이었다. 변산반도도 유명하다. 그곳에서 수령 백 일이십 살 이상 본 적 있나? 그나마 보기 좋은 큰 나무는 모두 수령 80 이상 100살 조금 넘은 거, 모두 식민지기 때 심어 아직 살아 남은 거다.
당시 세계적으로 "논쟁의 여지 없이" 최고라던 지지 연구자 라우텐자흐(Hermann Lautensach)는 총독부의 녹화실적을 보고는 "깜짝 놀랄만 하다"고 했고, 1952년에 유엔 한국재건단(UNKRA) 임업당당자였던 하워드(H. Howard) 박사는 "한국의 해방은 많은 사람들에게 벌목허가증을 발부해준 결과를 낳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어 톱과 도끼를 들고 거리낌 없이 산의 나무를 족쳤다"고 썼다.
차명수 선생이 알려주신 미 후버 대통령의 기록도 있다. 그는 "1909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 35년간 조선을 지배하면서 일본인들은 숲을 재생시켰다"고 썼다. 1946년 한국을 다시 방문했을 때의 기록이다
하물며 "입산금지" 정책도 산림복구를 위한 고육책으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실시되었고, 조선인들에게 욕을 가장 많이 먹은 정책이다. 해방 후 산림녹화의 최일선 주체였던 산림계(山林契)는 총독부가 만든 유사공동체로 식민지기부터 조림과 산림보호의 주역이었다.
내 책 선전을 겸한다. 일조각, 2010 {한국의 산림소유제도와 정책의 역사 1600-1987}. 조선왕조 멸망, 경제적 위기의 근원은 산림황폐화라는 2003년 논문,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에도 발표한 [조선후기산림황폐화와 농업생산성]은 이책에도 들어 있다. 사실 수년 전부터 조선 산림황폐화를 자신의 독창적 주장인 듯 말하는 사람들이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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