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金宗三)
현대문학인물
해방 이후 『시인학교』, 『북치는 소년』,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등을 저술한 시인.
김종삼(1921-1984)
분야현대문학유형인물성격시인성별남출생일1921년사망일1984년본관안산(安山)저작십이음계, 시인학교, 북치는 소년,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경력국방부 정훈국 상임연출자, 현대시학상 수상시대현대성격시인성별남출생일1921년사망일1984년본관안산(安山)저작십이음계, 시인학교, 북치는 소년,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경력국방부 정훈국 상임연출자, 현대시학상 수상
정의
해방 이후 『시인학교』, 『북치는 소년』,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등을 저술한 시인.
키워드십이음계
시인학교
북치는 소년
김종삼전집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안산(安山)이며 황해도 은율 출신이다. 평양의 광성보통학교(光成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34년에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중단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요시마상업학교를 졸업, 당시 영화인과 접촉하면서 조감독 생활을 했다.
광복 후에는 유치진(柳致眞)을 사사하였고, 극예술협회 연출부에서 음악 효과를 맡아보았다. 6·25전쟁 때는 피난지인 대구에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서울 환도 후에는 군사다이제스트사 기자, 국방부 정훈국 방송실의 상임연출자로 10여 년간 근무하다가 1963년부터 동아방송국 제작부에서 근무했다.
처음으로 시 「돌각담」(1951)을 발표한 뒤 시작에 전념하였고, 1957년에는 전봉건(全鳳健)·김광림(金光林) 등 3인 공동시집 『전쟁(戰爭)과 음악(音樂)과 희망(希望)과』를 발간하였다.
이 시집에 「돌각담」·「개똥이」·「G.마이나」·「음악」 등 초기 시들이 실려 있고, 이 시들은 늘상 그의 세계를 음악과 연결 짓는 시적 환상의 세계였다. “늬 관(棺) 속에 넣었던 악기로다/넣어 주었던 늬 피리로다/잔잔한 온 누리/늬 어린 모습이로다/아비가 애통하는 늬 신비로다 아비로다.”(「음악에서」)와 같이 환상 창조의 작용이 있다.
그러나 이 시인의 삶에 대한 인식태도는, 어린이는 무죄한 순결의 존재인 반면 삶의 때가 묻은 어른은 죄 많은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죄의식은 후기 시에서 더욱 두드러지며, 시인이 겪는 삶의 참담함과 자신의 깊은 죄의식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다.
1967년에는 문덕수(文德守)·김광림과 함께 3인 공동 시집 『본적지(本籍地)』를 출간하였고, 1969년에는 한국시인협회 후원으로 첫 개인 시집 『십이음계(十二音階)』를 발간하였다.
그 외의 시집으로 『시인학교(詩人學校)』(1977)·『북치는 소년』(1979)·『누군가 나에게 물었다』(1982) 등이 있으며, 사후에 『김종삼전집』(1989)이 간행되었다. 1971년에는 시 「민간인(民間人)」으로 현대시학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김종삼의 시세계』(이숭원,한국국어교육연구회,1985)
「무의미의 의미: 김종삼론」(신규호,『시문학』,1989.3.)
「음악의 배경: 김종삼론」(김영태,『시문학』 13,1972.8.)
집필자
집필 (1996년)최원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종삼(金宗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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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 시인의 시 몇 편 감상 | 문학 산책
라라와복래 2018. 9. 4. 10:16
http://blog.daum.net/spdjcj/2959
김종삼 시인의 시 몇 편 감상
*시는 『金宗三 詩選 북치는 소년』(민음사 오늘의 시인총서, 1979)에서 옮겼습니다. 한자 표기는 한글로 바꾸었습니다.
묵화(墨畵)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시는 짧다. 짧고 군살이 없다. 그의 시는 여백을 충분히 사용해 언어가 잔상을 갖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다. 언어를 우겨넣거나 막무가내로 끌고 다닌 흔적이 없다. 사물과 세계를 대면하되 사물과 세계의 목소리를 나직하게 들려준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물안개가 막 걷히는 새벽 못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작은 여울에 누군가가 정성스레 놓아 둔 몇 개의 징검돌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묵화(墨畵)’의 목소리도 자분자분하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막 돌아와 쌀 씻은 쌀뜨물을 먹고 있는 소를 보여준다. 그의 시선은 소의 목덜미에 가 있다. 하루 종일 써레나 쟁기를 끌었을, 멍에가 얹혀 있었을 그 목덜미를 보여준다. 목덜미에는 굳은살이 박였을 것이다. 그리곤 소의 목덜미와 할머니의 손을 교차시킨다. 할머니도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소와 함께 날이 저무는 저녁을 맞고 있다. 할머니는 겹주름처럼 고랑이 나 있는 밭에 쪼그려 앉아 풀을 뽑고 돌을 캐내고 종일 호미질을 했을 것이다. 시인의 시선은 소와 할머니의 부은 발잔등으로 옮아간다. 부은 발잔등을 보여줄 뿐이지만, 우리는 소와 할머니의 하루가 얼마나 고단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이 눈여겨본 대목은 소와 할머니의 관계일 것이다. 소는 할머니를, 할머니는 소를 마주하고 있다. 이 둘 사이에 조용하고 평화롭고 안쓰러운 대화와 유대가 오가고 있다. 낮의 소란과 밤의 정적이 합수(合水)하는 성스러운 시간에 마치 삶이란 본래 비곤하고 외롭고 쓸쓸한 것이라는 듯 소와 할머니는 잠시 멈춰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하여 이 둘의 ‘서로 돌봄’은 훈훈하면서도 슬프다. (우리는 얼마나 이 ‘쓸쓸한 돌봄’을 자주 잊고 사는가.) 이 시를 다 읽고나면 우리는 얼굴 가득 흐뭇하게 피어나던 웃음이 천천히 묽어지는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된다. 본래 삶이란 웃음과 슬픔으로 꿰맨 두 겹의 옷감이라는 듯.
김종삼 시인은 등산모를 곧잘 썼고 파이프 담배를 자주 물었고 술을 좋아했고 고전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에게 삶은 ‘방대한/ 공해 속을 걷는’ 일처럼 여겨졌다. 그는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라산스카)라며 인간의 원죄를, 불구의 영혼을 아프게 노래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는’ 사람들과 세상을 좋아하고 동경했다. 그의 시는 말이 적었지만 정직했다. 언어의 낭비가 많고 외화(外華)에 골몰하는 시대를 살수록 언어를 지극히 아껴 쓴, 먹그림같이 실박하게 살다 간 김종삼 시인이 그립다. ―해설 문태준(시인)
북치는 소년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서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김종삼은 고도의 비약에 의한 어구의 연결과 시어가 울리는 음향의 효과를 살린 초현실주의 기법을 원용하여 동안(童眼)에 비친 이미지로써 순수 지향의 의식을 펼쳐 보인 시인이다. 초기에는 시행의 단절, 난삽한 한자어의 배치, 의미의 비약 등을 활용하여 기법의 실험성을 드러내다가, 후기에는 점차 평이한 진술을 바탕으로 인간의 체험을 드러내고 행간의 여운을 통하여 감추어진 의미를 암시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 시는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처럼’으로 묶인 세 개의 연에서 그 비교 대상이 생략됨으로써 완전한 문장을 갖추지 못한, 그야말로 ‘쓰다가 그만 둔 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끊어진 그 시상들을 ‘북치는 소년’이라는 제목을 중심으로 엮어보면, 시인이 의도하고 있는 통일된 시상(詩想)을 찾아낼 수 있다. 다시 말해, 각 연의 ‘처럼’ 뒤에 ‘북치는 소년’을 덧붙이면, 전체의 맥락이 완전하게 살아나 독자의 가슴 속에서 여운으로 완결됨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서양에서 우리나라의 어느 가난한 아이에게 아름다운 카드가 온다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김종삼 시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혼자이고 가난하며 비극적 존재로 나타난다. 이 시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2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가난한 아이로 비애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6·25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전쟁고아로도 볼 수 있겠다.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날, 그 아이는 서양 소년이 북을 치고 있는 그림의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는다. 그러나 카드 속에 담겨 있는 ‘북치는 소년’, ‘양떼’, ‘진눈깨비’ 등의 이국적 풍광(風光)들은 그에게 막연한 아름다움의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다. 아이는 그 환상적인 풍경에 도취되기도 하지만, 그는 곧 그것이 다만 화려한 장식에 불과한, ‘내용 없는 아름다움’임을 깨닫는다.
이렇듯 이 시는 눈에 비친 사상(事象)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시가 아니라, 그 사상 뒤에 배음(背音)으로 깔려 있는 이미지에 의해서 조형된 시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는 어떤 사상이나 의미 내용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다만 각 시어들이 구축해 놓은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느낄 수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해설 출처 불명
물통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땅 위에선
아름답다는 느낌과 동시에 당혹감을 받게 될 것이다. 완전한 문장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첫 연의 4행뿐이다. 2연과 3연은 합쳐져야 하나의 의미 단락을 이룰 것 같은데도 나뉘어 있다. 그리고 3연 끝머리는 동사의 출현을 강력히 요구하는 ‘… 준 일밖에 없다’라는 어미를 가지고 있다. 4연에는 동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려는 듯이 문장의 맥락이 흐트러져 있다. 물론 시에서 산문과 같은 정도의 넌리적인 맥락을 요구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밑도 끝도 없이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땅 위에선’이라는 끝맺음은 다른 시인의 작품과 다른 접근을 요구하는 신호로 볼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놀라운 언급을 이 시는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라는 극히 인간적인 행위를 보여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예외인가? 아니면 이 시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어떤 부족함이 개재되어 있는 것일까? ― 시선집 『金宗三 詩選 북치는 소년』 ‘잔상의 미학 ― 김종삼의 시세계’(황동규 해설)에서
시인학교
공고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잔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 내에 쌓인 두꺼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전봉래
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음.
교사(校舍)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이승이 아니라 저승의 풍경이다. 등장인물은 모두 작고한 이들이다. 상징주의 취향의 작곡가 라벨. 색채보다 구성을 중요시했던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 세잔. 미국의 이미지즘 운동의 선두자 에즈라 파운드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 시인들도 평범한 생을 보낸 시인이 아닌 것도 주목된다. 그의 철학과 취향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김소월은 20대에 요절하였으며, 김관식은 독설과 술로 일생을 살다가 술로 죽었으며, 김수영은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가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했고, 전봉래는 피난지 부산의 한 다방 구석에 앉아 세코닐을 먹고 자살했다. 이들이 없거나 있는 그 한 귀퉁이에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며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누고 있다는 표현에는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숙연함이 있다. 이쯤에서는 오히려 이승과 저승의 기묘한 조화와 배합이 느껴지는 터이다. ―해설 출처 불명
장편(掌篇) 2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균일상 밥집 문턱에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시 ‘묵화(墨畵)’처럼 이 시에도 시인의 감정은 일체 배제되어 있다. 다만 시인의 ‘시선(視線)’만이 있을 뿐이다. 거지소녀가 동냥을 해서 10전짜리 두 개 그러니까 20전을 벌었나보다. 그리곤 한 그릇에 10전 하는 밥집을 찾았다. 밥집 주인 영감은 어린 소녀의 행색을 보고 내쫓으려 한다. 그러나 소녀는 태연하다. 동냥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일이라 함께 국밥을 먹으려고 왔기 때문이다. 눈물이 나는 정경(情景)이다. ―라라와복래 감상
고향
예수는 어떻게 살아갔으며
어떻게 죽었을까
죽을 때에 뭐라고 했을까
흘러가는 요단의 물결과
하늘나라가 그의 고향이었을까 철따라
옮아다니는 고운 소릴 낼 줄 아는
새들이었을까
저물어가는 잔잔한 물결이었을까
*다음 시는 김종삼 시인의 마지막 시집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민음사, 1982)에서 옮긴 것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시가 뭐냐는 물음에 모른다고 대답한 화자는 고심에 빠져 여러 곳을 오래 배회한다. 그러다가는 이렇게 말한다. 고생스런 나날에 찌들지 않고 순하고 인정스레 사는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시는 바로 이 ‘고귀한’ 이들의 마음을 대신 적은 것이라고. 순진할 정도로 솔직한 이 목소리는 이상스레 뭉클하다. 선량이 결국 가장 깊은 지혜일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순진 말고 무엇이 시일까. ―이영광(시인․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
김종삼 시인
김종삼(1921-1984)은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평양 광성보통학교를 나와 숭실중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1938년 일본 도요시마상업학교에 편입해 졸업한다. 이후 일본 귀족들이 다니던 도쿄문화원 문학부에 입학하지만, 1944년 중퇴해 도쿄출판배급주식회사에 들어간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회사를 나와 한동안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내기도 한다. 해방 뒤 귀국해 1947년 월남한다. 김종삼은 고전 음악 마니아다. 명동의 ‘돌체’, ‘오아시스’, ‘라아뿌륌’ 같은 고전음악 감상실 단골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져 ‘돌체’가 부산역 앞으로 옮겨간 뒤에도 여전히 그곳을 제 집처럼 드나들 정도였다. 서울 환도 후에는 군사다이제스트사 기자, 국방부 정훈국 방송실의 상임연출자를 거쳐 1963년부터 1976년까지 동아방송국 제작부에서 근무했다. 김종삼은 1951년 시 ‘돌각담’으로 등단하지만 공식적인 문학 활동은 1953년에 종합잡지 「신세계」에 ‘원정’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김종삼은 세 권의 시집 『십이음계』(삼애사, 1969), 『시인학교』(신현실사, 1977),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민음사, 1982)와, 두 권의 시선집 『북치는 소년』(민음사, 1979), 『평화롭게』(고려원, 1984) 등 2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나남출판사에서 『김종삼 전집』(2005)을 펴냈다.
김종삼 시인 시비 경기도 포천 국립광릉수목원 인근 소흘읍 고모리 ‘수목원 고모 호수공원’에 있다. 소주와 설렁탕과 서양 고전음악 듣기를 유독 좋아했던 김종삼 시인의 마지막은 가난하고 외로웠습니다. 천주교 길음성당에서 거행된 그의 영결식에는 그 많은 문인들 중 시인 한 분과 그를 따랐던 문학청년 한 사람만이 마지막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올해(2018년) 한국 순수시의 지평을 넓힌 김종삼 시인을 기념하기 위해 ‘김종삼 시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1회 수상자로 심보선 시인이 선정되었습니다. 수상작은 심보선 시인의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문학과지성사, 2017)입니다.
정리 : 라라와복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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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의 문학으로] 자비와 평화의 시인 김종삼
등록 :2021-06-03
최재봉ㅣ책지성팀 선임기자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 독자적인 어조와 발성법으로 후배 시인들에게 추종과 모방의 대상이 되는 시인들. 백석과 김수영이 대표적이지만, 김수영과 마찬가지로 올해 탄생 100년을 맞은 김종삼 역시 ‘시인들의 시인’ 명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 자신은 “나는 시인이라고 자처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며 겸양을 표하기도 했지만, 그의 시는 후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정희성 시인은 “그의 마니아들이 확실히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고 쓴 바 있는데, 김종삼 시를 특히 아끼고 사랑하는 ‘마니아’ 중에는 현역 시인들이 유난히 많은 듯하다.
김종삼 시의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 동갑내기 시인 김수영과 비교해 보자면, 그의 시는 음성이 낮고 여백이 많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의 잘 알려진 시 중에 ‘묵화’라는 짧은 작품도 있거니와, 김종삼의 시는 먹으로 그린 그림처럼 담박하고 은은한 분위기를 풍긴다. 김수영이 자유와 사랑과 혁명을 소리 높여 외친다면, 김종삼은 슬픔과 자비와 평화를 “되풀이하여 조용히 조용히 말”(‘앞날을 향하여’)한다.
유고작으로 제목 없이 발표된 시에서 “나는 이 세상에/ 계속해 온 참상들을/ 보려고 온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김종삼은 그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세계의 참상을 고발한다고 할 수 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북치는 소년’ 전문)
‘묵화’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시의 첫 구절 “내용 없는 아름다움”은 김종삼 시의 미학을 담은 표현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김종삼의 시가 이념이나 현실 같은 ‘내용’을 배제한,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식의 오해다. 김수영의 시들에 보이는 4·19 혁명의 흥분과 5·16 쿠데타 뒤 좌절과 환멸을 김종삼에게서는 찾기 어렵다. 1984년에 졸한 그가 80년 광주 학살에 관해 언급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시 200여 편을 통독하면 그는 동료 인간들의 가난과 고통과 죽음에 그 누구보다 예민한 촉수를 뻗고 있음을 알게 된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장편 2’ 전문)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민간인’ 전문)
이 시들에서 김종삼이 식민 지배와 분단을 대놓고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상처받고 희생되는 작은 존재들의 아픔을 그는 외면하지 못한다. ‘민간인’에서 영아를 삼킨 바다의 수심이란 달리 말해 분단 역사의 부조리한 심연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북치는 소년’에서 서양 나라의 크리스마스 카드가 하필 “가난한” 아이에게 온다는 설정은 단지 무심한 수사나 클리셰라고만 볼 수는 없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나의 본적’)라는 그의 선언은 그대로 ‘짚신의 시학’이요 ‘맨발의 시학’이라 하겠다.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물통’ 부분)
목마른 인간에게 물 몇 통을 길어다 주는 일이란 결코 보잘것없는 행위가 아니다. “살다보면 자비한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으리”(‘유성기’)라고 시인은 다른 시에서 말하는데, 이런 자비행이야말로 삶의 기적과 기쁨을 가능하게 한다. 김종삼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평화와 위안을 얻고 마음이 깨끗해진다면 그것은 그의 시 세계를 관류하는 인류애와 연민, 그리고 개인적 불우와 사회적 비참에도 불구하고 그가 끝내 놓지 않은 근원적 낙관 때문일 것이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어부’) 그는 독자에게 나직하지만 끈질기게 속삭인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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