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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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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1
10월15
2020년 4월, 한 중국 어선에서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인신매매 및 강제노동에 해당하는 노동조건에서 일하다 총 4명이 사망하고 3명이 바다에 수장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다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한 이주노동자들의 취약성을 잘 보여주는 롱싱 629호 사건의 몽가베이 기사를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이 글은 Mongabay의 허가 하에 번역 후 공유되었음을 밝힙니다.
/ 원문링크: https://news.mongabay.com/2021/09/worked-to-death-how-a-chinese-tuna-juggernaut-crushed-its-indonesian-workers/amp/?__twitter_impression=true / 권이현, 윤소원, 김린지, 박지향 자원봉사자 번역 ).
원문의 기사가 길어 3편으로 나누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②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2
③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3
====
작년, 중국의 가장 큰 참치 낚시 회사 중 하나인 다롄 오션 피싱(Dalian Ocean Fishing)의 인도네시아 어선 중 한 척에서 네 명의 젊은 갑판원이 끔찍한 환경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지자 대서특필되었다.
현재 몽가베이, 탄사와 환경 보도 단체(Environmental reporting collective)의 조사에 따르면, 처음으로 그 선박에서 근로자들이 당한 학대(가장 일반적으로, 표준 이하의 음식을 먹이는 것, 위험할 수 있는 오염된 식수가 주어지고 과로하도록 만들어진 것 등)는 한 척의 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선사 함단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고 조직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많은 보트에 타고 있는 이주어선원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구타하겠다는 협박과 임금을 보류하겠다는 위협에 시달렸다. 많은 사람들이 급여를 전액 받지 못했거나 아예 급여를 받지 못했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원양어선 선단을 보유하고 있고,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노동력 공급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9년과 2020년에 인도네시아에서 온 적어도 30명의 어선원들이 종종 알려지지 않은 질병으로 중국 장거리 어선에서 사망했다.
프리가 자랄 때, 그의 마을에서의 생활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 남쪽에 있는 세르당 메낭 마을은 비옥한 논과 물고기로 가득한 강의 중심에 위치했다. 하지만 한 팜유 회사가 늪지대를 배수하고 파괴한 후, 홍수와 산불이 일상화되었고, 지역 생계를 해쳤다. 소작농인 세프리의 아버지는 경찰서에서 청소부로 새로운 일을 찾았다. 하지만 세프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의 다른 수백만 명과 마찬가지로 이민을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보았다.
중학교 교육만을 이수한 채로, 세프리는 수도 자카르타에 정착하려 시도했지만, 노후화된 쇼핑몰에서 받는 그의 월급은 그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그는 몇 년 후 낙담하며 귀향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을로 돌아온 후, 그는 그의 여동생 리카의 집에서 축구를 보면서, 많은 시간을 허송세월하며 보냈다. 그녀는 남동생을 걱정했다. 직업도 없이 남는 것이 시간뿐이었던 많은 젊은이들은 필로폰의 희생양이 되었다. 마을 경찰은 최근 지역의 마약 상인 한 명을 사살했고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남편과 함께 음식 노점을 운영했던 리카는 세프리에게 쉬운 일이라도 하면서 가정을 꾸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세프리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는 많은 돈을 벌기를 원했어요,”라고 리카는 마을에 위치한 본인의 집에서 우리에게 말했다. “그는 그의 사촌들과 제가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길 바랐어요. 그것이 그의 소원이었죠. 제가 직장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인도네시아의 2억 7천만 인구의 약 75%는 자바섬과 수마트라섬이 고향이다.
어느 날, 세프리는 외국 어선 갑판원 채용 광고를 하는 페이스북 게시물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일자리는 한 달에 350달러를 지불했는데, 이것은 남 수마트라 주의 최저 임금의 두 배이며, 경력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그 일자리는 너무나 매혹적으로 들렸기에 그의 친구들 중 6명이 함께 하고 싶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7명은 채용 회사에 등록하기 위해 이웃 섬인 자바 섬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그것은 엄청난 모험여행이어야 했다. 그러나 일년 후, 세프리와 그의 친구 아리는 죽은 채 돌아왔다.
네 명의 목격자들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세프리, 아리와 그들의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인도네시아인들은 구타당하기 일쑤였고 24시간 일했으며, 썩은 음식을 먹었고 더러운 물이 주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 중 일부는 신체부위가 붓는, 병명을 알 수 없는 증상을 겪어야했다. 부기는 다리부터 시작되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목과 얼굴까지 전이되었다. 2019년 12월, 세프리는 숨을 쉬기 위해 애쓰다가 배의 갑판에 쓰러져 사망했고, 바다에 묻혔다. 아리와 두 명의 다른 갑판원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문제의 배였던 룽싱 629호는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활동하는 중국 회사인 다롄 오션 피싱(이하 DOF)이 소유하고 운영하며, 일본으로 공급되는 참치회의 최대 공급처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롱싱 629호에서의 죽음은 독립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지난 한 해 동안, 몽가베이, 일본 조사 전문 매체 탄사, 그리고 12개국 이상의 기자 네트워크인 Environmental Reporting Collective로 구성된 우리 취재팀은 국방부 소속 8척의 보트에서 일하는 13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을 추적하여 인터뷰했다. 어업을 조사하는 런던에 본부를 둔 비영리 단체인 환경정의재단(The Environmental Justice Foundation)은 우리에게 같은 선사의 타선박 여섯 척에서 일하는 열한 명의 인도네시아인을 인터뷰한 녹취록을 제공해주었다.
이 인터뷰는 35척의 연승선(미끼가 달린 수천 개의 낚싯바늘이 물고기를 찾아 바다로 가르는 상업적 어업 기술을 활용하는 어선)으로 구성된 DOF의 알려진 선단 중 40%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모두 2018년과 2020년 사이에 DOF에서 일했다. 우리는 또한 수십 명의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서 그들의 증언을 맥락에 맞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조사를 통해 롱싱 629호에서 제공된 표준 이하의 음식, 위험한 식수 및 과도한 작업 시간 등은 그 선박에만 존재하는 예외적인 것이 아닌,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서 온 수백 명의 갑판원이 승선한 DOF 선단에서 거의 규정과도 같은 환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인터뷰한 거의 모든 갑판원들은 일주일에 7일, 하루에 적어도 18시간씩 힘든 육체 노동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물고기가 많이 잡힐 경우 이틀 동안 휴식 없이 계속 일하는 상황도 존재했다. 쌀과 국수 외에 참치 갈고리에 실을 꿰는 미끼 물고기가 주식으로 주어지기도 했다. 그들은 또한 종종 얇고 변색된 닭고기 조각과 빈약한 양의 오래되고 시든 야채를 먹기도 했다.
각 연승선에는 약 20명의 갑판원과 7, 8명의 선임 승무원이 있었다. 선임 승무원들은 항상 중국인으로, 이들은 더 많고 더 좋은 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갑판원들이 담수화된 바닷물(누런색을 띄며 녹슨 냄새가 나고 짠 것으로 묘사되는)을 마실 동안, 병에 담긴 생수를 마실 수 있었다. 21년 동안 동남아시아에서 석유 회사를 위한 지역 보건 프로그램을 조정하고 우리 리포팅 팀을 위해 갑판원들의 증언을 검토한 제임스 알렌 박사에 따르면, 갑판원들이 마신 물의 묘사는 담수화 장치나 저장 탱크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특징이라고 한다.
세프리(왼쪽)와 아리. 둘은 성 없이 세프리, 아리로만 불렸다
롱싱 629호가 어선원들이 병에 걸린 유일한 선박은 아니었다. 우리가 인터뷰한 8척의 어선 중 5척에서 일한 적어도 30명의 갑판원들이 세프리와 아리에 영향을 준 것과 유사한 증상을 경험했다고 갑판원들은 우리에게 말했다. 묘사된 증상으로는 부종과 같은 심한 부기가 있지만, 서있는 것과 걷는 것을 어렵게 할 정도인 다리의 약화와 고통을 겪었고 어지러움증과 공황, 그리고 가슴의 답답함 등 또한 동반됐다. 우리가 그들의 증언을 검토하도록 요청했던 다섯 명의 임상의에 따르면, 이것은 제한된 식단과 마셔야했던 물의 수질로 인해 일어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임상의들이 그들을 직접 검사하지 않고는 무엇이 갑판원들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말할 수 없었지만, 일부는 비타민 B1 결핍으로 인한 영양실조증인 각성병과 충분히 담수화되지 않은 바닷물을 장기간 섭취함으로써 야기되는 염분 과부하에서 비롯될 수 있는 신장 질환인 신장증후군을 가능한 병적 측면으로 제시했다.
“여러분은 부적절한 식이요법과 오염된 바닷물 섭취로 발생한 비타민과 미네랄 결핍에 대한 혼합된 그림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라고 프랑스 국립 지속가능 개발 연구소의 영양실조 전문가이자 수석 연구원인 프랭크 위링가 박사는 이메일에 썼다. 끔찍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부 갑판원들은 배를 떠날 수 없거나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 배들은 거의 해안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때로는 2년 이상 바다에 머물기도 했다.
원문의 기사가 길어 3편으로 나누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②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2
③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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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중국의 가장 큰 참치 낚시 회사 중 하나인 다롄 오션 피싱(Dalian Ocean Fishing)의 인도네시아 어선 중 한 척에서 네 명의 젊은 갑판원이 끔찍한 환경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지자 대서특필되었다.
현재 몽가베이, 탄사와 환경 보도 단체(Environmental reporting collective)의 조사에 따르면, 처음으로 그 선박에서 근로자들이 당한 학대(가장 일반적으로, 표준 이하의 음식을 먹이는 것, 위험할 수 있는 오염된 식수가 주어지고 과로하도록 만들어진 것 등)는 한 척의 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선사 함단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고 조직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많은 보트에 타고 있는 이주어선원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구타하겠다는 협박과 임금을 보류하겠다는 위협에 시달렸다. 많은 사람들이 급여를 전액 받지 못했거나 아예 급여를 받지 못했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원양어선 선단을 보유하고 있고,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노동력 공급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9년과 2020년에 인도네시아에서 온 적어도 30명의 어선원들이 종종 알려지지 않은 질병으로 중국 장거리 어선에서 사망했다.
프리가 자랄 때, 그의 마을에서의 생활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 남쪽에 있는 세르당 메낭 마을은 비옥한 논과 물고기로 가득한 강의 중심에 위치했다. 하지만 한 팜유 회사가 늪지대를 배수하고 파괴한 후, 홍수와 산불이 일상화되었고, 지역 생계를 해쳤다. 소작농인 세프리의 아버지는 경찰서에서 청소부로 새로운 일을 찾았다. 하지만 세프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의 다른 수백만 명과 마찬가지로 이민을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보았다.
중학교 교육만을 이수한 채로, 세프리는 수도 자카르타에 정착하려 시도했지만, 노후화된 쇼핑몰에서 받는 그의 월급은 그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그는 몇 년 후 낙담하며 귀향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을로 돌아온 후, 그는 그의 여동생 리카의 집에서 축구를 보면서, 많은 시간을 허송세월하며 보냈다. 그녀는 남동생을 걱정했다. 직업도 없이 남는 것이 시간뿐이었던 많은 젊은이들은 필로폰의 희생양이 되었다. 마을 경찰은 최근 지역의 마약 상인 한 명을 사살했고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남편과 함께 음식 노점을 운영했던 리카는 세프리에게 쉬운 일이라도 하면서 가정을 꾸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세프리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는 많은 돈을 벌기를 원했어요,”라고 리카는 마을에 위치한 본인의 집에서 우리에게 말했다. “그는 그의 사촌들과 제가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길 바랐어요. 그것이 그의 소원이었죠. 제가 직장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인도네시아의 2억 7천만 인구의 약 75%는 자바섬과 수마트라섬이 고향이다.
어느 날, 세프리는 외국 어선 갑판원 채용 광고를 하는 페이스북 게시물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일자리는 한 달에 350달러를 지불했는데, 이것은 남 수마트라 주의 최저 임금의 두 배이며, 경력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그 일자리는 너무나 매혹적으로 들렸기에 그의 친구들 중 6명이 함께 하고 싶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7명은 채용 회사에 등록하기 위해 이웃 섬인 자바 섬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그것은 엄청난 모험여행이어야 했다. 그러나 일년 후, 세프리와 그의 친구 아리는 죽은 채 돌아왔다.
네 명의 목격자들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세프리, 아리와 그들의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인도네시아인들은 구타당하기 일쑤였고 24시간 일했으며, 썩은 음식을 먹었고 더러운 물이 주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 중 일부는 신체부위가 붓는, 병명을 알 수 없는 증상을 겪어야했다. 부기는 다리부터 시작되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목과 얼굴까지 전이되었다. 2019년 12월, 세프리는 숨을 쉬기 위해 애쓰다가 배의 갑판에 쓰러져 사망했고, 바다에 묻혔다. 아리와 두 명의 다른 갑판원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문제의 배였던 룽싱 629호는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활동하는 중국 회사인 다롄 오션 피싱(이하 DOF)이 소유하고 운영하며, 일본으로 공급되는 참치회의 최대 공급처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롱싱 629호에서의 죽음은 독립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지난 한 해 동안, 몽가베이, 일본 조사 전문 매체 탄사, 그리고 12개국 이상의 기자 네트워크인 Environmental Reporting Collective로 구성된 우리 취재팀은 국방부 소속 8척의 보트에서 일하는 13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을 추적하여 인터뷰했다. 어업을 조사하는 런던에 본부를 둔 비영리 단체인 환경정의재단(The Environmental Justice Foundation)은 우리에게 같은 선사의 타선박 여섯 척에서 일하는 열한 명의 인도네시아인을 인터뷰한 녹취록을 제공해주었다.
이 인터뷰는 35척의 연승선(미끼가 달린 수천 개의 낚싯바늘이 물고기를 찾아 바다로 가르는 상업적 어업 기술을 활용하는 어선)으로 구성된 DOF의 알려진 선단 중 40%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모두 2018년과 2020년 사이에 DOF에서 일했다. 우리는 또한 수십 명의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서 그들의 증언을 맥락에 맞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조사를 통해 롱싱 629호에서 제공된 표준 이하의 음식, 위험한 식수 및 과도한 작업 시간 등은 그 선박에만 존재하는 예외적인 것이 아닌,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서 온 수백 명의 갑판원이 승선한 DOF 선단에서 거의 규정과도 같은 환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인터뷰한 거의 모든 갑판원들은 일주일에 7일, 하루에 적어도 18시간씩 힘든 육체 노동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물고기가 많이 잡힐 경우 이틀 동안 휴식 없이 계속 일하는 상황도 존재했다. 쌀과 국수 외에 참치 갈고리에 실을 꿰는 미끼 물고기가 주식으로 주어지기도 했다. 그들은 또한 종종 얇고 변색된 닭고기 조각과 빈약한 양의 오래되고 시든 야채를 먹기도 했다.
각 연승선에는 약 20명의 갑판원과 7, 8명의 선임 승무원이 있었다. 선임 승무원들은 항상 중국인으로, 이들은 더 많고 더 좋은 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갑판원들이 담수화된 바닷물(누런색을 띄며 녹슨 냄새가 나고 짠 것으로 묘사되는)을 마실 동안, 병에 담긴 생수를 마실 수 있었다. 21년 동안 동남아시아에서 석유 회사를 위한 지역 보건 프로그램을 조정하고 우리 리포팅 팀을 위해 갑판원들의 증언을 검토한 제임스 알렌 박사에 따르면, 갑판원들이 마신 물의 묘사는 담수화 장치나 저장 탱크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특징이라고 한다.
세프리(왼쪽)와 아리. 둘은 성 없이 세프리, 아리로만 불렸다
롱싱 629호가 어선원들이 병에 걸린 유일한 선박은 아니었다. 우리가 인터뷰한 8척의 어선 중 5척에서 일한 적어도 30명의 갑판원들이 세프리와 아리에 영향을 준 것과 유사한 증상을 경험했다고 갑판원들은 우리에게 말했다. 묘사된 증상으로는 부종과 같은 심한 부기가 있지만, 서있는 것과 걷는 것을 어렵게 할 정도인 다리의 약화와 고통을 겪었고 어지러움증과 공황, 그리고 가슴의 답답함 등 또한 동반됐다. 우리가 그들의 증언을 검토하도록 요청했던 다섯 명의 임상의에 따르면, 이것은 제한된 식단과 마셔야했던 물의 수질로 인해 일어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임상의들이 그들을 직접 검사하지 않고는 무엇이 갑판원들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말할 수 없었지만, 일부는 비타민 B1 결핍으로 인한 영양실조증인 각성병과 충분히 담수화되지 않은 바닷물을 장기간 섭취함으로써 야기되는 염분 과부하에서 비롯될 수 있는 신장 질환인 신장증후군을 가능한 병적 측면으로 제시했다.
“여러분은 부적절한 식이요법과 오염된 바닷물 섭취로 발생한 비타민과 미네랄 결핍에 대한 혼합된 그림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라고 프랑스 국립 지속가능 개발 연구소의 영양실조 전문가이자 수석 연구원인 프랭크 위링가 박사는 이메일에 썼다. 끔찍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부 갑판원들은 배를 떠날 수 없거나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 배들은 거의 해안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때로는 2년 이상 바다에 머물기도 했다.
중부 대서양에서 참치를 조업하는 연승선인 롱싱 621호에서 상어를 잡아 올리고 있다
대신, 그들은 어획물을 바다 한가운데서 운반선에 실었다. 환적이라고 알려진 이 관행은 장거리 조업에 필수적이 되었는데, 이는 선박이 한 번에 수 년 동안 바다에 남아 연료를 절약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관행은 유엔에 의해 강제 노동의 위험 요소로 널리 인식되고 있는데, 근로자들의 고립을 초래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제한시키기 때문이다. 한 갑판원은 그의 보트에 타고 있던 한 어부가 운반선으로 뛰어들어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은 그의 배에 타고 있던 중국 선원들만이 휴식을 위해 항구로 가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말했다.
한편, 채무의 위협은 머물러야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동기를 제공했다. 인도네시아의 이주어선원 모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갑판원들의 계약서에는 2년 근무 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향후 수입에서 지불하기로 합의한 송출 수수료 때문에 월급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되어, 그들을 본국에 있는 채무 추심자들의 표적으로 몰아넣게 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일부 갑판원들은 이 조항만 없었더라도 탈출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선임 승무원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임금을 유보하겠다고 종종 협박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입수한 증언에 따르면 14척의 보트 중 적어도 절반의 보트에서 물리적 폭행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주어선원들은 맞고, 발로 차이고, 뺨을 맞고, 밧줄과 쇠막대 같은 물건으로 두들겨 맞아야 했다. 갑판원들은 바다에 있는 동안 전화나 인터넷 신호 없이 지내야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2019년 말과 2020년 Long Xing 629호에서 사망한 4명 외에도, 우리는 그 기간 동안 5척의 DOF 선박에서 6명의 사망자를 추가로 발견했다.인도네시아인 루디 아르디안토 30세, 살레 아나코타 22세, 몽가베이에서 작년에 처음 보고된 사망자들
압둘라, 2019년 중반에 가슴 통증과 숨가쁨을 호소하면서 태평양으로 뛰어들음
2020년 중반에 피지로 돌아오기까지 몇개월 동안 시신이 생선 냉동고에 보관되었던 필리핀인
작업 현장에서 사고로 발을 다치고 병원에 입원하길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육지로 돌아오지 못한 중국 엔지니어
필리핀인 젤버트 두미낙, 네 명의 DOF 갑판원 중 한명으로 2020년 9월경에 세네갈 다카르에 있는 임상 카사후스에 입원할 예정.
지난 5월, 미 세관국경보호국(Customs and Border Protection, 이하 CBP)은 DOF로부터 해산물을 수입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것은 처음으로 단일 선박이 아닌 전체 선단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CBP는 자체 조사에 의해 나타난 강제노동 징후를 그 이유로 들었지만, 공개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중국 외교부는 “중국 기업들을 억압하기 위해 미국측이 꾸며낸 거짓말일 뿐”이라고 말하며 이 주장을 “조작”이라고 재빨리 일축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 왕 웬빈은 5월 31일 기자회견에서 DOF 선단의 강제노동 혐의에 대해 “전적으로 근거 없다”고 일축했다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 NGO Human Rights Watch의 아시아 담당 부국장인 필 로버트슨은 “이 선원들의 주장에는 매우 학대적인 강제 노동의 모든 특성이 포함되어 있다. 지나치게 긴 항해 기간과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의 노동, 언어와 신체적인 학대, 급여에서의 임의적인 공제, 빠져나갈 방법의 부재 등 말이다“ 라고 그들의 인터뷰 증언을 검토한 후 이메일을 통해 전했다. “선박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 선장부터 직원들까지 모두가 이러한 인권 유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강제 노동, 부상, 그리고 그들이 직면했던 다른 착취에 대해 제대로 보상해야 할 것이다.” 라고도 말했다. 중국 외교부는 베이징 본부와 자카르타 주재 대사관에 보낸 서한에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고, 전화로 그 부처에 연락하려는 시도 또한 불발됐다.
DOF가 강제 노동으로 고발된 최초의 어업 선사는 아니었다. 2011년, 32명의 이주어선원들이 뉴질랜드에 정박해 있는 동안 한국의 가장 큰 원양 선사인 사조 오양의 배에서 도망친 후, 해당 선사 소속 어선에서의 혐오스러운 상황이 폭로되며 양국의 개혁과 법 이행으로 이어졌다. 2015년, 태국 배에서 자행된 극단적인 폭력과 노예 생활(사람이 납치되어 우리에 갇힌 상황을 포함한)에 대한 일련의 폭로는 유럽으로부터의 무역 금지에 대한 위협을 촉발시켰고, 결국 태국 정부에 의한 새로운 통제 조치로 이어졌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어업 강국인 중국은 차순위 4개 상위국을 합친 것에 가까울 만큼 공해에서의 활동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종종 이주어선원들에게 최악의 작업장으로 묘사된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인도네시아에서 왔는데, 인도네시아는 확실한 데이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세계 원양어업을 위한 최고의 노동력 공급국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 13개월 동안 비정부기구인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연합(SBMI)에 진정이 접수된 35척의 어선 중 29척이 중국 어선이었다. 그리고 NGO인 파괴적 어업감시단(Destructive Fishing Watch)의 국가 조정자인 압디 수후판에 따르면 2019년 11월부터 2021년 3월 사이에 외국 어선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35명의 인도네시아인들 중 4/5 이상이 중국 어선에서 일했다고 한다. 중국 국적의 배들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선원들에게 최악의 대우를 한다”고 인도네시아 해양정의구상의 공동 설립자인 파딜라 옥타비아니는 이메일을 통해 썼다.
출처: Stimson Distant Water Fishing Report / 어획 노력량은 여러 방법으로 정의될 수 있는 조업양의 측정치이다
최근 Stimson Center 보고서에 따른 2016-2017 통계에 근거한 공해에서의 어획 노력량 분포
2000년에 설립된 이래로, DOF는 광범위한 투자자들의 지원을 받아왔다. 오늘날 중국의 가장 큰 국영 기업들과 상장 기업들 중 일부가 주주들이다. 세계 주요 해산물 무역업자 중 하나인 일본의 미쓰비시 재벌의 계열사는 롱싱 629 어부들의 죽음이 밝혀지기 한 달 전인 2020년 4월에 DOF와의 거래를 중단했다고 말했지만, 오랫동안 DOF 참치의 주요 구매자였다.
환경정의재단의 설립자이자 CEO인 스티브 트렌트는 2015년 경 극악무도한 남용행위로 표시된 태국 기업들이 DOF보다 훨씬 적고 작은 배들을 가지고 있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DOF는 주요 투자처를 가지며 막대한 수익을 얻는 대기업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그들 자신과 그들의 사업을 영위한다는 사실이 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츠키지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참치.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큰 해산물 소비국 중 하나이다. 사진 Dennis Tang/Flickr.
한 달에 300달러를 받고 DOF의 어선에서 일했던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은 그들의 봉급을 전부 받지 못했거나 전혀 받지 못했다. 노동자들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그들을 파견한 인도네시아 채용업자들이 일반적으로 그 청구서를 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는 돈을 빌리며 노동자들에게 돈을 지불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채 사라졌다.
5명의 인도네시아 송출업체가 롱싱 629와 관련하여 불법 채용이나 인신매매로 수감되었지만, DOF에서 소속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이 당한 처우에 대해 누군가가 책임을 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회사의 운영 상태 또한 불분명하다. 인터뷰 대상자들과 위성 사진에 따르면, 세프리가 죽기 3개월 전인 2019년 9월경에, 어선들은 정상 운항을 중단하고 참치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대신 수개월동안 그저 공해상을 포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지난해 말 DOF는 인도네시아 인력을 모두 본국으로 송환한 뒤 선사의 본사가 위치한 중국 북동부 다롄(大連)으로 선단 상당수를 돌려보냈다.
2019년 중반 이후 중국에서 이 회사를 상대로 수십 건의 미지급 대출과 청구서 소송이 제기되었다. 중국 법원은 2020년 중반부터 DOF 설립자인 리젠유에 대해 채무자들이 일등석 여행, 부동산 구입, 자녀들을 비싼 학교에 보내는 것과 같은 행위를 금지하는 최소 16건의 “소비 제한 명령”을 내렸다고 공공 기록에 나와 있다. 이 회사는 우리의 조사 결과를 상세히 요약한 서한에도, 전화와 이메일을 통한 여러 건의 의견 요청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인권 유린에 대한 주장 외에도, 입수한 갑판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어선들은 많은 수의 상어 지느러미를 자르고 시체를 다시 바다에 버리는 불법적인 행위(shark finning)에 관여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선박이 의도적으로 특수 장비를 사용하며 상어를 겨냥했다고 말했다. 이 문제와 기타 문제들은 이 조사의 일부로 발표될 후속 기사에서 다루어질 예정이다.
배송 기사부터 이주 어부까지
다롄 원양 어선에서 일하는 많은 갑판원들처럼,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외국 어선 송입업체에 의해 롱싱 629호로 보내졌다.
2013년, 리즈키는 그의 어린 시절 친구를 따라 송입업체 PT Lakemba Perkasa Bahari와 계약을 했다. 두 사람은 친구의 가족이 중부 자바주의 북부 해안 지역인 판투라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카르타의 위성도시에서 함께 자랐다. 판투라는 이주어선원 모집의 중심지가 되었다. 리스키의 친구는 스페인 연승선에서 일해 왔고, 20살의 실직자이고 바다에서의 삶에 호기심이 많은 리즈키가 비슷한 직업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인도네시아 어선원 송출업체 협회 회장인 델 아구스에 의하면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송입업체가 판투라 지역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리즈키는 어업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수도에서 회계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도에서 데이터 입력 담당자와 음식 배달 기사로 일했다. 하지만 그는 그가 한 번도 벌어보지 못했던 월 급여 300달러라는 금액에 결국 미숙련 선원 훈련 프로그램이 이루어지는 라켐바로 향했다.
라켐바는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동안 인도네시아의 디플레이션이 해외로의 이민을 급증시키면서 2000년 중반에 설립되었다. 남자들은 말레이시아의 팜유 농장과 외국 어선에 몰려들었고, 여성들은 사우디아라비아와 홍콩에서 가정부와 간호사가 되었다. 이주노동자가 보내오는 송금액은 10년 상반기에 4배 증가하여 2005년까지 매년 54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세계은행 수치의 2%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정부와 언론이 “외환의 영웅”이라 부르는 이주노동자들은 외화와 경제성장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2013년까지 라켐바는 대만 보트에 갑판을 공급하는 선두 업체였다. 자카르타에 있는 본사, 판투라 테갈에 있는 지사, 그리고 해외의 여러 항구에 걸쳐 24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었다. 리즈키가 테갈 지사에 나타났을 때, 그는 일자리를 찾아 온 수십 명의 다른 젊은이들과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사업은 번창하는 것 같았다.PT Lakemba Perkasa Bahari의 페이스북에 업로드된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낚싯줄 훈련하는 선원들; 자카르타의 위성도시인 베카시에 위치한 라켐바 사무실 표지판; 라켐바의 신입 선원들; 커피와 담배
리즈키의 한 달 훈련은 마치 신병 훈련소 같았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깎고 타이어를 뒤집고 밧줄을 당겨 힘을 주고 손에 굳은살이 박히게 했다. 주로 낚싯줄을 다루는 연습을 했다. 이 기관은 또한 그가 해외에서 합법적으로 근무하기 위해 필요한 여권, 선원들의 의무 신분증 서류와 같은 서류들을 얻는 것을 도왔다. 라켐바는 리즈키의 월급에서 일정금액을 매달 공제하여 갚는 조건으로 관련 수수료를 대신 지불했다. 선사로부터 라켐바가 임금을 지급받아 수수료를 공제하고 남은 금액을 리즈키 어머니의 계좌로 이체하기 때문에 이 비용을 회수하는 것은 라켐바에게 쉬운 일이다.
라켐바의 2019년 광고 영상. 젊은 선원들이 어구 다루는 훈련을 하고 있다
리즈키의 출발 예정일 3일 전, 라켐바는 그에게 계약을 제시했다. 그것을 검토해 본 그는 그 조건에 깜짝 놀랐다. 라켐바가 훈련비와 기타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600달러를 공제하고 “보증금”으로 2400달러를 공제하고 나면, 그는 1년 넘게 월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 됐다. 그가 2년 근무 기간을 다 채웠을 경우에만 이를 회수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어떤 이유로든 배를 일찍 떠난다면, 그는 라켐바에게 남은 빚에 대해 여전히 책임을 지면서 보증금과 월급의 나머지를 몰수당했을 것이다.
만약 리즈키가 발을 뺀다면, 그는 여전히 라켐바에게 훈련 비용과 서류 비용에 대해 물어줘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돌아갈 수 없었다. 그의 아내는 이미 둘째 아이를 임신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그는 돈을 벌기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정말 절박함을 느꼈어요”라고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리즈키는 약 20명의 라켐바 신입 선원들과 함께 카리브해의 트리니다드 섬으로 날아가 대만 연승선에 승선했다. 힘든 일이었지만, 선장은 그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주고, 음식을 잘 먹이고 항구에 정기적으로 들렀다. 어느 시점에 리즈키는 선주를 포함한 몇몇 라켐바 직원들이 수백 권의 선원수첩을 위조하려는 공모하여 수감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항구에 있는 라켐바의 대표들은 그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계약을 끝내고 돈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2년이 지난 후, 리즈키는 약속했던 임금을 받아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그는 그 임금으로 오토바이 한 대와 그가 떠나있는 동안 생긴 가족들의 채무를 갚는 데에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그의 여정이 순탄했다고 생각했고 다시 떠나고 싶은 열망까지 생겼다.
롱싱 629호의 선원 중 한 명인 리즈키 파우잔이 2021년 8월 18일 수요일, 동부 자카르타에서 코로나19 환자 시설에서 세탁 서비스로 일하기 시작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Mongabay/ Wienda Parwitasari
2018년에 리즈키는 다시 한 번 대만 연승선에서 2년 계약을 마치고 하선했고, 그의 임금을 전부 받았다. 몇 주 지나지 않아, 부인과 이혼했다. 그 후, 그는 라켐바에게 또 다른 일자리를 요구했다. 이번에는 더 많은 임금을 주는 유럽의 어선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라켐바는 알겠다고 했지만, 몇 달 후 계약이 체결되지 못했다고 전했다. 대신 중국 어선에 자리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자리가 바로 롱싱 629호였다.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큰 딸과 노모를 부양해야하는 입장이었던 리츠키는 일자리 선택에 있어 까다로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기회가 왔을 때 저는 잡아야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는 말했다. “그 일 아니면 빚을 져야했거든요.” 그가 계약서에 서명한 2019년 2월, 그는 그의 생활이 리듬을 찾아간다고 느꼈다: 2년 간의 항해, 6개월 간의 고향에서의 휴식, 2년 간의 항해, 6개월의 휴식…
‘나는 내 운명에 몸을 맡겼다.’
갑판원을 모집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많은 무허가 대행사와 달리, 라켐바는 사람들을 바다로 보내기 위해 필요한 서류를 가지고 있었다. 상선에서 10년을 일했던 36세의 베르나르두스 마투르봉스는 조니 카시얀토와 같은 불법 모집자들에게 붙잡힌 선원이었다.
20대 후반의 건장한 남성인 조니는 2010년대 중후반 전 세계적으로 원양어업이 확대되면서 급증한 인도네시아의 새로운 송입업체 사업자 중 한 명이었다. 인도네시아 송출업체 협회 회장인 델 아구스는 지난 10년 동안 업체 수가 수십 개에서 거의 600개로 증가했을 것이라 말한다. “모퉁이마다 하나씩 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수입/수출업에 종사하다 1990년대에 인력 모집업에 발을 들인 델 아구스는 2009년 인도네시아 어선원 송입업체 협회를 설립했다. 사진 델 아구스 제공
인도네시아 노동부와 교통부는 지난 수년간 이주어선원 모집을 위한 병행 허가 제도를 주관해 왔으며, 일부 지방 정부들조차 허가를 내주고 있다. 델을 포함한 많은 업계의 관찰자들은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점이 빨리 한몫 잡을 생각만 하는 송출업체들을 번성하게 해 이주노동자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불행히도, 현재의 법적 절차로 우리의 이주어선원들이 인신매매나 강제 노동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자카르타의 국제노동기구 프로그램 담당자인 이르함 알리 사이푸딘은 말했다.
대다수의 인도네시아 송출업자처럼, 조니는 선주들과 직접 거래하지 않았다. 그의 고객은 중국인이 운영하는 피지에 본부를 둔 송입업체로, DOF 및 다른 선사들과 자체적인 계약을 맺고 있었다. 스스로 개업하기 위해 판투라에 있는 한 에이전시에서 사퇴한 후, 조니는 피지에 본부를 둔 그 업체 사장의 스카이프 아이디를 얻었고, 그는 일주일 만에 인도네시아 노동자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조니는 자신의 노동자들이 바다에서 일할 때마다 매달 30달러를 받았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라켐바와 달리, 조니의 회사는 신입 선원들에게 연승선 훈련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연승 조업에 사용되는 주황색 딱딱한 부표 사진 제공 Jennifer/Flickr.
롱싱 629호의 선원 중 두명은 조니가 그들이 계약을 망설였을 때 그들을 위협했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들 중 한 명인 베르나르두스는 조니와 조건을 의논하기 위해 판투라를 방문했고, 기다리기 위해 자카르타 근처의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몇 주 후, 조니의 처남은 도시에서 베르나르두스를 만나 그에게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베르나르두스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급여는 처음에 들었던 것보다 훨씬 적었고, 특히 다른 종류의 어선보다 더 일이 고되다고 들은 연승선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고 이전에 말했었다. 그러나 조니의 처남은 당일 오후에 떠나는 비행기 표를 이미 샀다고 말했다. 베르나르두스는 아내에게 계약서를 보여주기 위해 집으로 갔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가 전화로 그녀에게 하는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조니와의 통화에서 협상을 시도했다.
“문제는 그가 이미 티켓을 구매했다는 것이었죠,” 베라나르두스가 우리에게 말했다. “’너가 티켓을 취소하면 경찰들이 너를 찾으려 할 거고, 너를 체포할거야. 그럼 넌 보상금으로 나에게 2000만 루피아(1,400달러)를 줘야 할거야’ 라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전 제 운명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어요. 제 부인도요. 가야하는 수밖에 없었죠.”
Category: 언론에 나온 어필, 연대활동, 인신매매2021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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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2
10월15
2020년 4월, 한 중국 어선에서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인신매매 및 강제노동에 해당하는 노동조건에서 일하다 총 4명이 사망하고 3명이 바다에 수장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다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한 이주노동자들의 취약성을 잘 보여주는 롱싱 629호 사건의 몽가베이 기사를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이 글은 Mongabay의 허가 하에 번역 후 공유되었음을 밝힙니다. / 원문링크: https://news.mongabay.com/2021/09/worked-to-death-how-a-chinese-tuna-juggernaut-crushed-its-indonesian-workers/amp/?__twitter_impression=true / 권이현, 윤소원, 김린지, 박지향 자원봉사자 번역).
원문의 기사가 길어 3편으로 나누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①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1
③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3
중국 거대 참치 기업의 탄생
세프리, 아리, 리즈키, 베르날두스는 몰랐겠지만, 그들은 롱싱 629호의 새 주인 아래 첫 항해의 선원이 되기로 계약한 것이었다. DOF는 그를 세계 최대의 참치 기업으로 만들어 주길 바라는 욕심으로 진행된 합병의 일부로 다른 회사에게서 이 배를 구입했었다.
2000년에 전에 HSBC은행 직원이었고 의류 수출업자였던 리 젠유가 세 척의 연승선으로 DOF를 설립했다. 곧 DOF는 7 척의 연승선을 갖게 되었고, 리는 이로 인한 수익을 DOF의 고향인 랴오닝 지역에 있는 요트 건조 사업과 조선소 벤쳐에 투자했다. 랴오닝 지역은 황해를 건너 한국을 바라보고 있는 항구 도시이다.
한 때 러시아와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다롄은 선박 건조와 금융의 중심이 되었다.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이곳에서 2012년 건조되었다.
일찍이 DOF는 중국의 값싼 노동력의 이익을 보았다. 일본은 한때 세계 최고의 원양어업 국가였지만 점점 바다에서 일하는 일본인들이 줄어들면서 선단을 축소하고 있었다. 중국은 아주 다른 상황에 있었다. 수만 명의 내륙 지역 출신 농부들이 부유한 동쪽 항구 도시의 산업 지구에서 일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그 때, 중국이 원양어업을 장려하는 이유가 바뀌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 중국은 원양어업을 안정적 식량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이유로 장려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원양어업은 중국에서 “주출거(走出去)” 산업 중 하나로 분류되었고 이는 회사들이 해외에서 새로운 시장을 찾는 것을 장려하게 되었다. 곧 정부에서 특히 연료를 위한 보조금 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0년대 말 상승세였던 중국은 자신의 어업에 대해서 더 커다란 야망을 갖고 있었다. 정부, 선사, 대학들과 연계된 12명의 프로젝트 팀이 2010년에 어업 확장을 주장하면서 “해양생물은 가장 커다란 단백질 자원이며 그래서 바다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은 미래를 지배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했다.
다랑어류 중 가장 귀한 참다랑어는 일본 츠키지 어시장의 연례 참치 경매에서 최고 수백만 달러에 팔린다. DOF는 눈다랑어와 황다랑어에 집중하는데, 이들 또한 꽤나 몸값이 높다. 사진제공 Rhett A. Butler, Mongabay.
DOF는 중국 정부의 세계 어업 제패 야망을 기회로 포착했다. 2012년과 2013년에 DOF는 해외 투자자들과 첫 계약을 했다. 세 계약 당사자들이 DOF의 소수 지분을 사고 3,800만 달러로 DOF 지분의 29퍼센트를 인수했다. 바이어들은 아틀랜타 혹스 농구 사업을 갖고 있는 토니 레슬러가 설립한 LA의 아레스 매니지먼트, 중국 농업 타이쿤 리우 용하오, 싱가포르의 펀드 테마섹이 주요 투자자로 있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비공개 기업투자 펀드, US 음식 사업 거대 기업 아처-다니엘 미드랜드, 일본의 미츠이 재벌, 그리고 세계 은행의 일부인 국제 금융 기업(International Finance Corporation)이었다. DOF는 그들의 돈으로 더 많은 선박을 구매했다. 2012년과 2014년 사이에 DOF는 회사의 선박 수를 24 척으로 세 배 늘렸다. 하지만 이는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리 젠유(오른쪽에서 두번째)는 다롄 해양 어업 협회의 해면 어업 지사 대표직을 지냈다고 알려졌다.
DOF는 2014년에 홍콩 증권 거래소에서 기업 공개를 함으로써 더 많은 연승선을 인수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DOF가 증권거래소에 제출한 문서 서류에 오래된 데이터를 인용함으로써 최근 정보에 의하면 남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눈다랑어와 황다랑어 수산 자원이 마치 건강한 것처럼 개체수 상황을 왜곡했다고 그린피스가 문제 제기를 하면서 불발되었다. DOF의 서류는 또한 중국이 국내 회사들이 국제 포획제한을 어겨도 그저 무시할 것이다고 암시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수산부는 DOF를 “투자자들과 국제 사회를 심각하게 속이고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꾸짖었다. 그 이후 DOF는 부정적인 여론 속에서 기업 공개 원서를 철회했다.
증권 거래소 낭패 이후 세 투자자들은 DOF 투자를 철회했다. 그들은 중국 내 가장 큰 복합 기업, 여러 사모펀드, 정부 소유 자산관리회사 등 중국 투자자들로 대체되었다.
2021년 1월경 DOF 사무실
2017년에 DOF는 매년 정부 보조금으로 780만 달러 이상을 받고 있었고 DOF의 투자자 중 하나의 서류에 따르면 정부가 보조하는 어선 현대화 프로그램으로 더 많은 보조금을 받기로 되어있었다. DOF는 2016년에 5,000만 달러의 이윤을 냈다고 하였고 2020년까지 “세계에서 최대 참치 기업”이 되려는 야망으로 56개의 연승선을 인수하면서 이윤을 두 배로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 해에 중국의 농림부는 DOF가 국내 최초로 유리 섬유 강화 플라스틱 초저온 연승선을 건조했다고 칭찬했다. 더 커다란 어선에 이 기술을 대입함은 어선이 연료와 유지비를 아끼고 더 많은 시간을 바다에서 보낼 수 있음을 의미했다.
DOF가 기업 공개를 하려고 하고 실패한 지 2년 후인 2018년에 중국에서 가장 큰 간장 회사인 지아지아 식품은 7억 4,300만 달러로 DOF를 인수하려는 의사를 밝혔다. 지아지아 식품는 셴젠 증권거래소에 등록되어있었고 이 합병은 지아지아 식품 보다 컸던 DOF가 또 다시 기업공개를 하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중국 내 언론은 이 계획을 “뱀이 코끼리를 삼킨다”라고 표현했다.출처: DOF의 실패한 2014년 홍콩 증권거래소 기업 공개, 2018년 Guoco Lawyers(상하이)의 법률 자문 및 감사, Equasis
가치 평가액은 당시 DOF의 소수 지분 매수가에 기반한 것이다.
DOF와 중국 원양어업의 빠른 성장은 정부 보조금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값싼 노동력 덕분이었다. 2010년대 중반에 중국 내 오르는 생활수준과 고령화는 중국 인구로는 점점 선사들이 선원을 모집하기 힘들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연합(SBMI)의 연구 및 대외관계의 코디네이터 디나 누리야티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에서 온 노동자는 중국 노동자의 반값으로 고용될 수 있었다.
동자바지역에서 온 노동자 중 한명이 저질의 음식과 19시간 내리 일을 해야 했던 것에 대해 SBMI에 진정을 접수한 서류에 따르면 DOF는 2015 이래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하지만 디나의 말에 따르면 특히 중국 배에서의 노동권 침해에 대한 리포트가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세프리와 같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지역의 젊은 인도네시아인들은 중국 배에서 일자리를 찾는다.
수마트라에 위치한 펄프재 농장의 배수로 근처에서 굴착기가 작업하고 있다. 사진 제공 Rhett A. Butler, Mongabay.
“예를 들어, 농지가 많은 지역 출신인데 갑자기 그 지역이 개발 되기 시작하는 거에요”라고 디나가 말했다. 이는 인도네시아인들이 바다로 가게 하는 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높은 연봉과 좋은 일의 환경에 대한 약속 또한 그들을 바다로 보낸다. 하지만 그녀는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많은 약속들이 사기라고 말한다.
‘이게 물이 아니었다면, 저는 도망갔을 것입니다.’
경험이 많은 갑판원,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이 처음 롱싱 629호를 보았을 때, 그는 설렘을 느꼈다. 한국 부산 항구에 정박해 있는 그 배는 그가 타봤던 그 어떤 배보다도 두 배는 길고 다섯배는 무거웠다. 몹시 추웠던 2019년 2월 14일 밤, 그는 같이 일할 사람들과 승선하러 가기 위해 탄 작은 보트에서 선박의 빨갛고 하얀 선체를 보면서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르는 리즈키 옆에 앉아 있었지만, 굉장히 다른 첫인상을 갖게 되었다. 당시 19살이던 그는 영하에 가까운 추위 속에서 연승선에 오르며 그가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지 느끼고는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지난 여름에, 그의 고향인 남 술라웨시 지역의 해양 아카데미에 있던 누르의 선생님이 그와 몇몇의 반 친구들에게 외국 어선에서 직업을 찾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졸업 후 6명은 송입업체에 등록하기 위해 자바로 여행했다. 하지만 롱싱 629호에 탑승한 22명의 인도네시아 선원의 대부분처럼 누르는 송입업체에서 그 어떤 트레이닝도 받지 못했다. 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은 선임 선원 8명이 모두 중국인이라서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 다는 것 때문에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그들은 오직 리즈키 핸드폰에서 그가 집을 떠나기 전 중국어-인도네시아어 사전을 다운 받아온 구글 번역기만으로 소통이 가능했다.
2018년 중반 누르의 해양 아카데미 SMK Pelayaran Lintas Nusantara Barru에서 열린 졸업식
어선이 서태평양으로 가는 2주 여행을 시작하자, 리즈키는 같이 일하게 된 이들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 그들의 주된 일은 “세팅”과 “당기기”가 될 것이다. “세팅”은 수십 킬로미터를 넘는 낚싯줄의 새끼줄마다 미끼를 붙이는 것이다. “당기기”는 그 새끼 낚싯줄에 잡힌 물고기와 부표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새로운 노동자들은 아직 효과적으로 일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팅과 당기기는 각각 12시간씩 걸릴 수도 있다.
우리가 인터뷰한 사람 중 두 명은 선임 선원들이 육체적인 학대를 시작한 건 오래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이 느리면 부감독이 그들을 때리거나 발로 찼고, 쇠막대기로 멍이 남을 정도로 세게 그들을 때리기도 했다. 남 수마트라 출신의 아리는 자주 타겟이 되었다. 대개 그는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 하지만 하루는 그가 부감독을 밀어버렸다. 아리는 엉켜버린 메인 낚싯줄의 새끼줄을 풀고 있는 중이었고 그래서 그는 가위를 들고 있었다. 부감독은 칼을 들고 있었다. 일이 커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리즈키는 바로 끼어들었다. “계약서에서는 만약에 우리가 그 누구와도 싸우면 계약이 해지되면서 아무것도 집에 갖고 갈 수 없다고 적혀있고, 가족들에게 창피해질 것”이라고 리즈키가 우리한테 말했다.
갑판원이 태평양이 다른 DOF 선박에서 낚싯줄을 다루고 있다. 영상제공 Raswin/롱싱601.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보통 일주일 내내 식사를 위한 10분 휴식시간 외에는 하루 18시간씩 내리 일했다. 6시간 정도의 휴식 시간에 그들은 샤워하고 세탁하고 잘 수 있었다.
그들은 대개 하루에 각각 30-40 kg 정도의 무게인 참치를 15-20마리 정도 잡았다. 하지만 한 달에 몇 번쯤 참치 떼를 보면 선장이 노동자들을 더 몰아쳐서 30시간 내리 일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에는 선장은 그들에게 메인 낚싯줄을 둘로 잘라서 세팅과 당기기 일을 동시에 할 수 있게 했다. 가끔 그들이 일하고 있을 때 선장은 위에서 밑에 일하고 있는 곳에 사탕들을 던지고는 했다. 리즈키는 말했다. “선장은 파라오 같았고 우리는 그의 노예 같았습니다.”
상어 지느러미가 롱싱 629호 갑판에 흩어져있다.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에 따르면 13개월의 항해 동안 갑판원들은 각각 40~50kg의 무게가 나가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 약 20개를 대략 1톤의 상어 지느러미로 채웠다. 사진은 승선해있던 인도네시아 선원 중 한 명이 촬영.
밥과 국수 외에는 노동자들에게 미끼 물고기와 변색된 닭고기, 오래된 채소가 주어졌다. 이제 21살이 된 또 한명의 해양 아카데미 졸업생 유드하 프라트마는 “밥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었지만 다른 것들은 부족할 때가 많았어요. 우리는 같이 힘들게 일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안 좋았어요”고 말했다.
(왼쪽부터) 무하마드 알파타, 알디 레날디, 이펜디 파사리부가 미끼 물고기를 주로 먹었던 롱싱 629호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국제운수노동조합연맹의 어업 코디네이터 로센 카라팟체브는 미끼 물고기는 “가축 사료”와 같다며, 주로 “항구나 어시장에서 누구도 먹거나 사고 싶지 않아 남은 물고기가 급속 냉동해 미끼로 쓰이도록 도매상에게 팔린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중국 선원들은 생수를 마셨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은 바닷물에서 증류된 물만 마실 수 있었다. 전에 어선 선원이었던 베르나르두스 마투르봉스는 “물에 소금기가 있었고 녹슨 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유드하에 따르면, 그 물을 마실 수록 갈증이 더 났다.
“롱싱 629호에 있던 모두가 참을 수 없었고 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이게 물이 아니었다면 도망갔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어요”라고 리즈키는 말했다.
여행이 시작된 지 6달만에 몇몇 선원들이 롱싱 629호가 연료를 채우는 동안 연료선의 와이파이에 연결하는 것을 성공했다. 청소년이었던 누르는 메세지 앱으로 어머니께 연락드렸고 어머니는 바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묻는 답장을 보내왔다. 이는 선원들이 승선한 후 처음으로 전화나 인터넷에 연결된 것이었다.
누르는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드리기 싫었다. 그는 끔찍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가 벌써 바다에 있다고만 말했다. 5분 후, 인터넷 연결이 끊겼다.
‘제가 살아남는다면, 저는 결혼하고 싶습니다’
2019년 12월, 세프리는 숨쉬기 힘들어졌다. 중국 선원들이 처음으로 그에게 생수를 주었지만 인터뷰한 이들에 따르면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그의 룸메이트들은 번갈아가면서 외운 쿠란 구절들을 암송하면서 세프리를 돌봤다.
12월 21일 해가 뜨기 바로 전 세프리는 화장실을 가려다가 쓰러졌다. 선원들이 그를 식사하는 곳으로 데려갔지만 그를 되살리지는 못했다. 아침 7시에 그는 죽었다.
베르나르두스 마투르봉스는 “그가 친동생같았다”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고 고백했다.
세프리는 롱싱 629호에서 사망한 첫번째 선원이었지만 질병에 걸린 첫번째도 마지막 사람도 아니었다
9월경 해양 아카데미 졸업생 유드하 프라트마는 자신의 다리가 팽창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친구들에게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가족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유드하 프라타마, 2021년 8월 촬영. 사진 제공 Febriansyah, Mongabay.
유드하는 건강해졌지만 선원 20명의 절반 가량(최초 승선했던 22명 중 2명은 다른 선박으로 환승했다)은 세프리가 쓰러진 달보다 한 달 전인 11월 쯤까지 모두 비슷한 증상을 경험했다.
이 증상을 가진 이들은 거의 서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다리가 부은 것은 몸 위로 퍼져 더이상 그들의 바지가 맞지 않았다. 선원 경력이 있던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은 이 질병에 대해서 소문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발이 붓더니 갑자기 사망한다고 들었어요.” 그가 전에 탔던 어선에서의 선원들은 영양실조로 인한 각기병이나 상피병 등을 이야기 했지만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소문이었어요.”
인터뷰 기록을 검토한 다섯 명의 의사에 따르면 롱싱 629호와 DOF의 다른 선박의 선원들은 음식과 수질 관련 여러 가지 질병을 겪었을 수 있다. 대부분은 각기병의 가능성을 꼽았다.
한때 각기병은 긴 여행을 하는 선원들에게는 항상 일어나는 질병이었지만 19세기에 일본의 한 항해의사가 단순한 식단 조절로 예방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드물어졌다.
하지만 각기병은 난민캠프, 외국인 보호소 등 다른 열악한 환경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또한 각기병은 원양어선에서도 발견되었다. 태국의 질병관리국은 캄보디아와 미얀마 선원들로 이루어진 태국 트롤어선에서 각기병이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이 사건을 조사한 그린피스는 2016년에 이 문제들이 안 좋은 영양, 과로, 그리고 항구로 돌아가지 않은 오랜 기간 때문에 일어났다고 결론 내렸다.
대서양 한가운데에서 대만 연승선 헝화 202호가 일본 도쿄 인근에서 활동하는 파나마 국적 냉장선 시앙 하오호로 냉동된 상어를 옮기고 있다.
각기병은 티아민 또는 B1 비타민 부족으로 일어난다. B1은 탄수화물을 에너지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과로와 불균형한 식단은 몸 속 티아민을 고갈시킨다. 100% 확실하게 각기병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실험실 시험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의료진은 위험 요인들과 선원들이 겪은 증상들이 “젖은” 각기병이라고 알려진 질병과 일치한다고 했다. 이 병은 부종, 호흡곤란, 그리고 심장 부전까지 일으킬 수 있다.
콜로라도-덴버 대학의 간병과 고혈압 부서를 이끄는 리차드 존슨은 “제 예상에는 그들이 여러 질병을 겪었지만 가장 큰 병은 각기병이었던 것” 같다고 전화로 이야기 했다.
미국에서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공중보건의 입장에서 대변하는 HEAL Trafficking이라는 그룹을 설립한 한니 스토크로사 또한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선원들이 겪은) 증상 패턴이 각기병과 어떤 면에서는 일치하고 어떤 면에서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의학적 문제가 복합적일 것(각기병+다른 질병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라고 이메일에 적었다.
의료진 중 둘은 그 질병이 증류기나 보류 탱크의 문제로 인해 독성이 있는 물을 마셔서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공중 위생 코디네이터 알렌 박사는 “증류기의 결함은 산화철(주황빛 노란색)이나 유화철(노란색) 등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보류 탱크의 결함 또한 중금속 오염의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고 그는 또한 이야기했다. “소금물을 그러한 보류 탱크에 오랜 기간 두면 녹슬 수도 있고 이상한 맛과 색깔이 날 수도 있습니다.” 중금속이 안 좋은 맛의 물에 있다면 이는 심한 부종과 심지어 죽음으로 가는 심근증의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미국과 아프리카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응급실 의사 노아 로젠베르는 충분히 증류되지 않은 물에서 온 염분 과다가 간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고 추측한다고 했다. “간은 충분한 담수가 있어야만 염분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바닷물로 살아남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롱싱 629호의 갑판원 중 한 명인 이펜디 파사리부는 병에 걸리기 전과 후에 극심한 부기와 호흡곤란을 경험했다. 사진 제공 공익법센터 어필
세프리의 죽음은 그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한 갈등을 롱싱 629호에 불러일으켰다. 이슬람에 따르면 최대한 빨리 제대로 된 장례식이 치뤄져야 한다. 그리고 선원들의 계약서에 따르면 한 선원이 죽으면 그 시신은 항구로 가져가야 한다. 세프리가 사망했을 때 선원이 말해준 것에 따르면 선장은 처음에는 항구로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위성 전화로 몇 번 통화를 한 다음에 선장은 인도네시아 선원들에게 세프리의 가족으로부터 세프리의 시신을 바다에 묻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세프리의 가족은 나중에 이 주장에 반대했다. 세프리의 여자형제 리카에 따르면 송입업체는 그 후 며칠 뒤에야 유족들에게 판투라에 위치한 사무실로 올 것을 요청했고, 그제서야 세프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리카와 그의 남편에게 알려주었다.
리즈키와 베르나르두스는 선장과 싸우려고 했으나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리즈키는 “싸우면 계약서가 파기 될 것이라고 걱정했어요.”라고 말했다. 세프리가 사망한 날에 시신은 임시 관에 넣어져 바다로 던져졌다. 바닥짐이 없는 관은 가라앉지 않았고 선원들은 관이 떠내려가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세프리가 사망한 후에 선장은 사모아로 항해했다. 이때쯤에 많은 다른 선원들이 심각하게 아팠다. 증상이 돌아온 유드하 프라타마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12월 26일, 롱싱 629호는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는 인도네시아인 선원을 다른 DOF 어선에서 태웠다. 그 다음날 롱싱 629호는 세 번째 연승선, 롱싱 802호를 만나 유드하와 새로 온 선원, 그리고 병에 걸린 두 명의 갑판원 – 남 술라웨시 해양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무하메드 알파타와 카르만 – 을 그 선박에 태웠다. 사모아의 수도인 아피아 항구에서 온 롱싱 802호는 다시 항구로 돌아갔고 롱싱 629호는 바다로 나아갔다.
이 즈음에 알파타는 숨 쉬기가 힘들어졌고, 그 날 밤 사망했다.
유드하는 알파타의 마지막 말이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가족한테 이야기해주세요. 하지만 제가 살아남는다면 저는 결혼할 것입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유드하.”였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저는 ‘그래요. 당신을 위해서 기도할게요.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마세요.’라고 말했어요.”
알파타 또한 바다에 묻혔다. 며칠 후 카르만, 유드하와 세번째 선원은 아피아 항구에 도착했다. 선장은 그들의 여권, 집에갈 비행기 표, 음식을 사먹고 공항까지 택시를 타고 갈 수 있도록 현지 돈을 건네주었다. 배는 선원들을 내리자마자 다시 공해로 돌아갔다.
롱싱 629호(파란색)이 롱싱 630호(빨간색)로부터 질병에 걸린 갑판원을 태운 후, 2019년 12월 말 롱싱 802호(노란색)과 만나는 모습을 위성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공항에서 부은 발을 끌고 세번째 선원이 타고 있는 휠체어를 밀면서 유드하는 비행기를 놓칠까봐 너무 걱정되었다. 다행히도 공항 직원들이 비행기를 탈 때까지 그들을 돌봐주었다. “그들이 친절해서 천만다행이었어요”라고 유드하는 말했다.
그들이 자카르타에서 내렸을 때 아무도 그들을 마중나와주지 않았다. 유드하는 도시에 친척이 아무도 없었다. 그의 고향은 나라 절반은 돌아야 하는 거리에 있었지만 DOF는 그에게 집에갈 돈을 주지 않았고 그는 본인의 체크카드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카르만의 송입업체에서 밤을 보냈고, 어머니께 전화하여 집으로 갈 비행기 표를 얻었다.
그는 “저는 정말 화가 났습니다. 저를 동물처럼 대했기 때문에요”라고 말했다.
Category: 언론에 나온 어필, 연대활동, 인신매매2021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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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3
10월15
2020년 4월, 공익법센터 어필은 한 중국 어선에서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인신매매 및 강제노동에 해당하는 노동조건에 2020년 4월, 한 중국 어선에서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인신매매 및 강제노동에 해당하는 노동조건에서 일하다 총 4명이 사망하고 3명이 바다에 수장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다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한 이주노동자들의 취약성을 잘 보여주는 롱싱 629호 사건의 몽가베이 기사를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이 글은 Mongabay의 허가 하에 번역 후 공유되었음을 밝힙니다. / 원문링크: https://news.mongabay.com/2021/09/worked-to-death-how-a-chinese-tuna-juggernaut-crushed-its-indonesian-workers/amp/?__twitter_impression=true / 권이현, 윤소원, 김린지, 박지향 자원봉사자 번역 ).
원문의 기사가 길어 3편으로 나누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①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1
②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2
보편적 관할권
2020년 4월 26일, 한국 변호사 김종철은 핸드폰으로 놀라운 비디오를 받게 되었다. 이날 오전 촬영된 영상에는 롱싱 629호의 또 다른 갑판원인 이펜디 파사리부씨가 부산의 한 병원으로 향하는 승합차 뒷좌석에서 심각하게 기침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러부터 몇 주 전, 남은 16명 중에 더 많은 선원들이 아프게 되었다. 이제 계약 파기보다는 죽음의 위험이 더 두려워진 선원들은 다 같이 육지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처음 선장은 오직 공허한 약속들만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이 선상 반란을 협박하자 선장은 드디어 그들을 항구로 가는 다른 DOF 연승선으로 환승하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아리는 항구에 도착하지 못했다. 숨을 쉬기 위해 헐떡이던, 부은 몸의 그는 중도에 사망했고 바다에 묻히게 되었다.
4월 24일, 드디어 선원들이 부산 항구에 내렸을 때, 그들은 세상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정복된 것을 알게 되었다. 마스크 등 개인 위생복을 입은 직원들은 입국 허가 검사를 하고 코로나 검사를 한 후 그들을 인도네시아로 가기 전 2주동안 자가 격리를 위해 라마다 호텔로 데려갔다.
김 변호사는 한국 어선에서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을 더 나아지게 할 것을 요구하는 데에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선원들을 도울 수 있는대로 돕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기회를 보았다. 계약 기간이 끝난 후 부산을 거쳐가는 이주어선원들은 많지만 보통은 하루나 이틀 후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때문에 롱싱 629호의 선원들은 그렇게 빨리 떠나지 못했다. 그의 노력이 한국에서 진짜 개선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험했던 김 변호사에게 이는 바다에서 죽음을 겨우 면한 선원들과 이야기 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가 2011년 설립한 비영리 법률사무소인 공익법센터 어필 사무실에서의 김종철. 그의 단체는 기부금으로 운영되는데, 한국에서 변호사가 그렇게 활동하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사진 제공 조진섭, Mongabay.
21살의 나이로 병원에 입원한 다음날 아침에 사망한 이펜디를 돕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그의 유족들은 부검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텔 와이파이로 김변호사는 다른 선원들과 영상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경험한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에 열정적이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세계가 들을 지에 대한 자신감은 없었어요,” 김 변호사가 회상했다.
그 다음 며칠 동안 선원들은 한국어-인도네시아어 통역사를 통해 김 변호사에게 그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충격적인 이야기에 김 변호사는 한국 해양경찰에 수사를 요청했지만, DOF의 어선들이 한국 수역을 이미 떠났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답을 받았다.
김변호사는 그래도 한국 정부가 행동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선원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그는 최근 한국 형법에 신설된 조항을 인용하며 ‘보편적 관할권’을 통해 인신매매 가해자들이 한국 국적 여부, 한국 영토에서 발생한 사건인지 여부와 관계 없이 법집행관들이 수사할 수 있으며, 선원들은 인신매매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김변호사는 원래 보편적 관할권을 성착취 목적 인신매매를 처벌하기 위한 도구로 보았지만 이제 그는 이 상황에도 보편적 관할권이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 변호사는 “그들은 인권 침해를 당했지만 어선을 벗어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사건이 노동 착취를 넘어선 인신매매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변호사는 또한 이 이야기를 MBC에 제보했다. 5월 5일, MBC는 이 보도를 아리의 시체가 바다로 던져지는 핸드폰 촬영 영상를 포함해서 주요 뉴스 프로그램에서 방영했습니다. 그 다음날 이 보도가 퍼지기 시작하며 인도네시아어를 하는 한 한국인 유투버가 그의 인도네시아 청중을 위해 이 사건을 소개했다. 25세의 이 유투버는 그의 영상에서 “노동 환경이 노예 제도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해당 유튜브 영상은 몇백만 조회수를 받았고, 인도네시아에서 이 사건이 유명해지고 몇몇 국회 의원들이 가해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는 데에 일조했다.
아리가 수장되는 모습을 다른 갑판원이 촬영한 영상을 MBC기자가 설명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헤드라인을 장식하자 한국 정부는 김 변호사의 리포트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안경찰이 아직 자가격리 중이었던 선원들과 독자적으로 인터뷰를 했고, 사건을 검찰에게 넘겼다. 하지만, 조사가 계속되기 위해서 인도네시아인들은 한국에 머물러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등하던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투표를 했다.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은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거의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가기로 투표했다. 5월 초에 그들은 부산에서 떠났고 한국 당국이 수사할 기회가 사라졌다.
갑판원들이 부산에 있는 동안 연락을 주고 받았던 인도네시아 어업 노동자 조합, SPPI의 한국지부장 아리 푸르보요는 그들이 “충격을 받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배에서 친구들이 죽는 것을 보았으며 한국에 머무르는 것이 심리적 부담으로 부담이 됐다”고 전했다.
(왼쪽부터) 롱싱 69호에 승선했던 M. 유세프, A. 페이살, 알디 르날디, 이펜디 파사리부, 유드하 프라타마, 아디트야 푸르노모. 이 중 일부는 승선 겨우 18세였다.
‘돈이 없다‘
부산에 도착한 선원들은 그들이 드디어 그들의 은행 잔고를 확인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 때에서야 그들은 그들이 계약서에서 공제를 합의한 금액을 제외하더라도 약속된 임금의 11%만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섯명은 13개월 일한 것에 대해 120 달러 밖에 받지 못했다. 송입업체와 연락이 닿은 이들은 모두 같은 설명을 들었다: DOF가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2019년에서 2020년까지 DOF에 대해 채권자, 서비스 제공자, 공급자가 제기한 수십개의 소송으로 미루어보아 DOF는 횟감 참치 수요가 급격하게 감소한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이미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DOF가 돈을 못 낸 것은 선원 뿐만 아니라 그들을 파견한 송출업체들에게 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었던 사뮤엘 판자이탄은 전직 선원들이 해양 산업에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송출업체를 최근에 개업한 전직 선원이었다. 그가 사업가로서 한 가장 첫 번째 일 중 하나는 DOF에게 노동자를 공급하는 피지의 송입업체를 운영하는 중국인 여성 후 줄리안과 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사뮤엘에 따르면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도, 전화통화한 적도 없고 메세지로만 연락했다. 그는 “나는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그녀와 전화를 해 본 적도 없다. 내가 전화를 할 때마다, 거절을 당했다”고 말했다.
후의 송입업체인 Orient Commercial and Trade는 세프리와 아리를 파견한 업체, 조니 카시얀토가 설립한 업체를 포함한 여러 인도네시아 송출업체로부터 선원들을 받아 DOF로 보냈다. Orient는 또한 DOF에게 미끼 물고기를 공급했고, 우리의 조사팀이 본 은행 기록에 따르면, 홍콩에 있는 통장으로 수고비를 지불받고 있었다.
북 자카르타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사뮤엘 판자이탄. 그의 송출업체 PT Samuel Maritim Jaya와 계약한 신입 선원들은 롱싱 629호는 아니지만 여러 DOF 선박에 승선하였다. 사진 제공 Wienda Parwitasari, Mongabay.
시작은 좋았지만 사뮤엘에 따르면 2019년 초, DOF에 선원을 공급하는 송출업체에게 지급되는 돈의 유통이 심각하게 감소했다. 그의 고객들은 DOF가 수고비를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항의하려고 했으나 자신의 영향력이 적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제 갓 시작한 그의 사업을 살리고자 여러 해외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DOF를 임금 사기로 고발하며 연락해보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답변을 받지 못했다. 중국에 있는 변호사는 그에게 중국에 있는 회사를 고소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세프리의 사망 한 달 전인 2019년 11월, 사뮤엘은 그의 선원 4명을 태우고 있는 세 척의 어선이 사모아에 정박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전화로 그는 그의 선원들에게 DOF가 그들의 임금을 안 주고 있다고 알렸고, 지역 정부가 가끔 임금을 주지 않는 경우에 그러하듯 어선들을 억류하리라는 희망에, 그들에게 경찰서에 알리라고 했다. 며칠 후에 어선들은 떠나기로 결정한 사뮤엘의 선원들을 두고 다시 바다로 나아갔다. 그 중 한명이었던 이반은 그가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여권을 달라고 선장에게 빌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 시점에 롱싱 629호를 포함한 DOF의 태평양과 대서양 선단 선원들은 그들의 어선의 행동이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2019년 9월 쯤 어선들은 참치들을 찾으러 다니지 않고 바다에서 가만히 있기 시작했다. 선원들에 따르면 거의 1년간 2020년 5월 롱싱 629호 선원들을 돌려보낸 후에도 계속 그랬다고 한다.
위성 사진 또한 선원들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태평양 DOF 어선 두 척에 대한 위성 사진은 2019년 초 전형적인 조업 패턴을 보였으나(위) 2020년에는 표류하는 듯한 패턴(아래)을 보여주고 있다. “두 척의 어선은 2019년 9월 경 정상적인 경로를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Global Fishing Watch의 대외협력 책임자 사라 블라덴은 말했다.
갑판원들은 배가 서태평양을 떠돌아다니면서 참치 낚시는 거의 하지 않았으나, 상어 낚싯줄을 던지며 많은 상어를 잡았다고 밝혔다. 선장들이 가끔 모여 술을 마실 때 인도네시아인들은 왜 그들이 정상 운행을 멈췄는지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중국인에게 설명을 요청했을 때 얻은 것은 보아하니 DOF가 일종의 혼란을 겪고 있음을 전하는 서툰 영어와 손짓뿐이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었지만, ‘돈이 없다’는 사실은 이해했습니다”라고 서 자바 출신인 러스나타(39세)가 말했다.
2020년 8월, 마셜 제도 영토 근처의 국제 해역 태평양에 모인 DOF의 배들이 중국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몇 주 만에 그들은 서해의 중국 산둥반도 끝에서 도착했다. 갑판원들은 몇 달 만에, 몇몇은 2년 만에 처음으로, 해안과 멀리 솟아오르는 산들을 볼 수 있었다.
배들은 거기서 입항하지 않은 채 열흘 동안 그곳에 정박했다. 유조선이 어선의 연료를 채우기 위해 왔을 때에서야 루스나타는 전세계를 휩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155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의 비퉁 항구로 가는 2 척의 DOF 연승선에 모여 탔다. 도착 후, 방역보호복으로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싸여져 있는 직원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루스나타는 그들이 DOF 어선 중 한 척에서 해안 경비선으로 2 개의 커다란 물체를 옮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보다가 문득 그것이 시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020년 11월 비퉁에서 시신 중 한 구가 하선되고 있다. 시신은 살레 아나코타와 루디 아르디안토의 것으로, 그들은 태평양에서 3개월 전 사망했다. 당시 인도네시아 외교부는 두 명의 사망자가 모두 불상에 질병에 걸렸었다고 밝혔다. 사진 제공 외교부
선원들을 만나기 위해 비퉁으로 날아간 사뮤엘 판자이탄 및 일부 송출업체들은 DOF가 급여를 지불할 때까지 인도네시아가 두 척의 주낙어선을 억류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사뮤엘의 말에 따르면 어선들이 도착하기 전에 인도네시아 외교부의 시민보호국장인 주드하 누그라하가 송출업체들에게 중국의 대사가 DOF가 2021년 2월 또는 3개월이 지나기 전에 임금을 지불할 것이라고 약속했으니 어선들을 억류하지 말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주드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코멘트해달라는 요청에 답을 하지 않았다.) 2020년 말 DOF의 대서양 선단에서 일했던 인도네시아 선원 88명의 송환을 도운 다카르 소재 국제운수노동조합연맹의 세디나 케이타 또한 현지 인도네시아 대사로부터 DOF가 임금을 2월 말까지 지불할 것이라고 중국이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사뮤엘은 아직 돈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지난주, 그는 후 줄리안의 회사 Orient Commercial and Trade을 포함한 총 3개 기관으로부터 총 10만 달러 이상의 돈을 돌려받아야하며 선원들에게 지불하기 위한 돈을 위해 빚을 져야만 했다고 밝혔다.
후는 이메일을 통해 사무엘의 에이전시에 약 10,000달러의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2018년부터 임금 지급을 중단한 DOF에 책임을 돌렸다. “지속해서 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미루고 있다.” DOF 가 2021년 6월에 결국 임금을 지불했으나 아직도 그의 송입업체에 90,000 달러 가량의 채무가 있다. 그는 이를 여러 파트너 인도네시아 송출업체에 분산했다. 후에 따르면, DOF는 그에게 모든 돈을 갚았다는 입장이라 그가 채무를 빠른 시일 내에 회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몇몇 롱싱 629호 선원들은 결국 그들의 송출업체들에게 배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많은 다른 선원들은 그들이 바다에서 일한 것에 대한 그 어떤 임금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루스나타는 그의 송출업체가 인도네시아에서 목돈인 11,000 달러 이상을 빚졌다고 했다. 전직 건설 노동자였던 루스나타는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서 돈을 모으려고 바다에 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후 코로나 사태 때문에 일을 찾을 수 없었고, 친척들과 어업 노동조합 SPPI에서 지원금을 받아 살 수 밖에 없었다. 어업 노동조합의 회장 일리아스 판게스투에 따르면 비퉁을 통해 송환된 선원 중 절반 정도만이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중국 정부와 정치적 협의를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들의 시민을 보호하지 못했어요,”라고 사뮤엘이 말했다.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지 못하게 해주세요‘
인도네시아에서 롱싱 629호의 비극은 특히나 중국 어선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공론화했다. 뉴스 기사 보도 통계에 따르면 2019년 3월부터 2020년 11월 사이 8개의 다른 중국 회사 소유의 19 척의 어선에서 적어도 30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이 사망했다. 그중 19명은 부종과 호흡곤란의 증상을 동반한 알려지지 않은 질병으로 사망했다.
롱싱 629호에서의 학대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행동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사태에 대한 이야기가 터진 2020년 5월, 일주일 만에 어선과 연관된 3-4개의 송출업체 사업자들이 체포되었다. 이는 고용 사기에 따른 인신매매로 4.5 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 조니 카시얀토, 선원들을 질 낮은 물과 음식, 과도한 노동시간 및 수장으로 그들의 계약에 위배되는 상황에 놓이게 한 혐의로 1년간 감옥에 가게된 PT Lakemba Perkasa Bahari의 CEO 무아파르 카다피를 포함한다. 지난 1년 반동안 다른 중국 어선에서의 사망 사건과 연관된 최소 7명의 송출업체 사업자들이 체포되었다. 어선원을 착취에서 보호하는 활동을 하는 SAFE Seas Project의 대표 노노 수마르소노에 따르면 이는 전례 없는 대대적인 인도네시아 송출업체 단속이다.
2020년 5월 22일, 센트럴 자바의 경찰 기자회견에서 송출업체 사업자 수스트리요노와 무하마드 호지가 카메라 앞에 서있는 모습이 담긴 Metro TV의 보도에 “노예가 된 어선원” 문구가 쓰여져 있다. 그들이 운영하는 PT Mandiri Tunggal Bahari는 롱싱 629호 사건 직후 알려진 여러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이 중 한 명은 그들의 선원들이 놓이는 선상 노동조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송출업체협회의 회장 델 아구스에 따르면 해외 어선들이 포함된 이 스캔들때문에 인도네시아 송출업체들이 악마화되었다고 한다. 그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2017년 이주민 보호법에서 요구하는 송출업체를 감시하기 위한 새로운 법의 제정을 주장하는 이들 중 하나이다. 인도네시아 해양 정의 계획의 파디알 옥타비아니에 따르면 이 법은 1년이 넘게 불확실한 상태로 있다고 한다. 국무장관 대변인 팔도 말디니에 따르면 이 법이 아직 대통령에게 보내지기 위해 몇몇 부서의 승인을 기다리고 했다.
자카르타의 국제 노동 기구 프로그램 담당자인 이르함 알리 사이푸딘은 UN의 2007년 어선원노동협약을 포함하는 이 법은 인도네시아가 중국과 소통할 때 더 커다란 외교력을 줄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선원을 학대하는“배의 기국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알맞은 법적 장치를 마련해두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고 말했다.
동남아시아 그린피스 활동가들과, 이주노동자연합(SBMI)을 포함한 여러 기관들은 인도네시아가 송출업체를 처벌한 것이 잘했다고 생각했다. SAFE Sea의 노노 “비공식적으로 이야기를 했을 때, 몇몇 송출업체들은 많은 송출업체들이 비슷한 관행으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체포된 이들은 그저 운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인도네시아 송출업체들을 처벌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원양어업은 결국 본질적으로 경계를 넘나들기 때문에 해외 송입업체와 선주들 또한 책임을 져야 한다.
어업노동조합의 대표 일리아스 판게스투는 롱싱 629호 사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죄를 지은 이들, 차별을 행한 이들은 우리 사람들이 증류된 물을 먹는 동안 본인은 생수를 마신 중국인들입니다. 죄를 지은 것은 DOF인데 처벌받는 것은 송출업체들입니다. 문제는 저기(중국)에 있는데 왜 저기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 것인가요?”
페이스북에 업로드된 이 사진에 따르면 DOF의 선박 세 척이 2020년 9월 말 다카르에서 육지로 인양된 상태이다.
2020년 말, 인도네시아의 외교부 장관이 중국측과 만나 중국 어선에서 발생하는 인도네시아인 사망 사건의 증가에 대해 대화를 나눈 후, 두 국가가 이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서 법 집행 관련 정보 공유 등을 포함한 법적 공조 협약을 맺었다고 외교부의 주드하는 말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송출업체들을 처벌한 것과 다르게 중국은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의 처우에 대해 혐의가 제기된 기업들을 수사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중국의 외교부와 자카르타의 대사관은 이에 대한 코멘트 요청에 대답하지 않았다. 동아시아 그린피스에 따르면 중국은 중국 어선에서의 인도네시아인들의 죽음에 대해서 그 어떤 공식 보고서도 발행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해양부 조정 차관, 바실리오 디아스 아라우조는 “롱싱 629호 사태와 관련된 관련자들과의 조정이 아직 더 필요한 상태”라고 지난주 우리에게 말했다.
바실리오에 따르면 그의 부서는 해양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지난 6월 중국의 외교부와 양해 각서를 체결했다. 그는 이 양해각서가 “중국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선원 및 어선원들을 보호할 정책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플랫폼”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행동의 문제라고 한다. “지금은 이 합의를 현실화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와 중국 정부가 밟아 나가야 하는 전략적 단계에 대해 협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2021년 5월 기자회견에서 중국 외교부 대변인 왕 웬빈
공식적으로 중국은 아직 DOF의 어선에서 이주민들이 학대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 5월 미국 관세국경보호청이 기업의 노동 관행에 대한 자체 조사를 인용하며 DOF로 부터의 수입을 금지한 후 중국 외교부 대변인 왕 웬빈은 베이징에서 기자들에게 “’선원들에 대한 학대’라고 부르는 것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롱싱 629호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작년 언론에서 이 문제가 과장되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해 관련 기업은 해당 선박에서 근무하는 인도네시아 선원들을 즉시 확인했으며, 그들은 모두 학대는커녕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롱싱 629호의 갑판원이었던 리지키 파우잔 알비안은 지난달 “다롄으로부터 연락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629명의 승무원 중 누구도 그들과 연락한 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부인할 거라고 예상할 수는 있죠. 다롄은 큰 회사니까요.”
2020년 12월, 합병이 진행될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1년 이상 지속한 후, 간장 제조업체인 Jiajia Food는 DOF 인수 계획이 종료되었다고 발표했다. 중국 법원은 2019년 11월부터 각종 소송으로 DOF 등 리 젠유 소유의 기업에 속한 수천만 달러의 자산을 동결한 것으로 밝혀져 여전히 법체계를 뒤흔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원고는 중국 최대 조선회사 주요 기업부터, 미지급 임금으로 회사를 고소하는 DOF 중국 승무원 수십 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롱싱 629호의 선장도 그들 중 한 명이다.
명백한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DOF는 아직 완전히 문을 닫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DOF의 다롄 사무실에 들른 한 관계자는 사무실이 아직 열려 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기업주 중 한 명이 올린 공지문에 따르면, DOF가 가까운 시일 내에 최대 10척의 보트를 더 인수할 생각이라며 다른 투자자들을 끌어모았다.
유다 프라타마와 누르를 포함한 롱싱 629호 갑판원 중 몇 명은 인도네시아 해역을 비행하는 화물선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들 중 누구도 외국 어선에서 다시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2021년 8월 동부 자바 수라바야에서의 유다 프라타마. 그는 “노동자을 고용할 때 자신이 그 위치에 있다면 어떨지 생각해한다”며 “열심히 일하는 건 상관없지만, 남에게 음식을 줄 때는 제대로 된 음식을 줘야한다”라고 말했다. 사진 제공: Febriansyah, Mongabay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은 동자카르타에 위치한 하숙집에 살고 있다. 그는 COVID-19 환자가 치료받는 시설에서 배달 서비스 및 저녁 청소를 하며 부모와 자녀에게 줄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고 있다.
그는 DOF의 배에서 겪었던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다시 외국 어선에서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는 그만큼 많은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적절한 기관, 적합한 배를 찾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8월의 어느 날 일하러 가는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 사진 제공: Wienda Parwitasari, Mongabay
세프리의 여동생 리카는 세프리의 마을, 세르당 메낭에서의 기회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롱싱 629호의 비극 이후 마을 사람들이 더 이상 외국 어선에 일자리를 얻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리가 함께 있었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프리의 사촌이 익명으로 말했다. 세프리, 아리와 함께 센트럴 자바에 있는 승무원 에이전시에 등록한 그는 결국 일자리를 얻지 않았다. “그들이 먼저 출항했고 나는 두 번째로 배치가 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갈 생각이 없다.”
가족은 세프리의 죽음에 대해 기관으로부터 약간의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리카는 보상은 동생을 다시 데려올 수는 없다며, “가능하면 세프리만이 희생자가 되게 해라. 또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놔두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Category: 언론에 나온 어필, 연대활동, 인신매매2021년 10월 15일
대신, 그들은 어획물을 바다 한가운데서 운반선에 실었다. 환적이라고 알려진 이 관행은 장거리 조업에 필수적이 되었는데, 이는 선박이 한 번에 수 년 동안 바다에 남아 연료를 절약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관행은 유엔에 의해 강제 노동의 위험 요소로 널리 인식되고 있는데, 근로자들의 고립을 초래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제한시키기 때문이다. 한 갑판원은 그의 보트에 타고 있던 한 어부가 운반선으로 뛰어들어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은 그의 배에 타고 있던 중국 선원들만이 휴식을 위해 항구로 가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말했다.
한편, 채무의 위협은 머물러야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동기를 제공했다. 인도네시아의 이주어선원 모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갑판원들의 계약서에는 2년 근무 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향후 수입에서 지불하기로 합의한 송출 수수료 때문에 월급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되어, 그들을 본국에 있는 채무 추심자들의 표적으로 몰아넣게 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일부 갑판원들은 이 조항만 없었더라도 탈출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선임 승무원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임금을 유보하겠다고 종종 협박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입수한 증언에 따르면 14척의 보트 중 적어도 절반의 보트에서 물리적 폭행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주어선원들은 맞고, 발로 차이고, 뺨을 맞고, 밧줄과 쇠막대 같은 물건으로 두들겨 맞아야 했다. 갑판원들은 바다에 있는 동안 전화나 인터넷 신호 없이 지내야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2019년 말과 2020년 Long Xing 629호에서 사망한 4명 외에도, 우리는 그 기간 동안 5척의 DOF 선박에서 6명의 사망자를 추가로 발견했다.인도네시아인 루디 아르디안토 30세, 살레 아나코타 22세, 몽가베이에서 작년에 처음 보고된 사망자들
압둘라, 2019년 중반에 가슴 통증과 숨가쁨을 호소하면서 태평양으로 뛰어들음
2020년 중반에 피지로 돌아오기까지 몇개월 동안 시신이 생선 냉동고에 보관되었던 필리핀인
작업 현장에서 사고로 발을 다치고 병원에 입원하길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육지로 돌아오지 못한 중국 엔지니어
필리핀인 젤버트 두미낙, 네 명의 DOF 갑판원 중 한명으로 2020년 9월경에 세네갈 다카르에 있는 임상 카사후스에 입원할 예정.
지난 5월, 미 세관국경보호국(Customs and Border Protection, 이하 CBP)은 DOF로부터 해산물을 수입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것은 처음으로 단일 선박이 아닌 전체 선단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CBP는 자체 조사에 의해 나타난 강제노동 징후를 그 이유로 들었지만, 공개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중국 외교부는 “중국 기업들을 억압하기 위해 미국측이 꾸며낸 거짓말일 뿐”이라고 말하며 이 주장을 “조작”이라고 재빨리 일축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 왕 웬빈은 5월 31일 기자회견에서 DOF 선단의 강제노동 혐의에 대해 “전적으로 근거 없다”고 일축했다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 NGO Human Rights Watch의 아시아 담당 부국장인 필 로버트슨은 “이 선원들의 주장에는 매우 학대적인 강제 노동의 모든 특성이 포함되어 있다. 지나치게 긴 항해 기간과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의 노동, 언어와 신체적인 학대, 급여에서의 임의적인 공제, 빠져나갈 방법의 부재 등 말이다“ 라고 그들의 인터뷰 증언을 검토한 후 이메일을 통해 전했다. “선박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 선장부터 직원들까지 모두가 이러한 인권 유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강제 노동, 부상, 그리고 그들이 직면했던 다른 착취에 대해 제대로 보상해야 할 것이다.” 라고도 말했다. 중국 외교부는 베이징 본부와 자카르타 주재 대사관에 보낸 서한에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고, 전화로 그 부처에 연락하려는 시도 또한 불발됐다.
DOF가 강제 노동으로 고발된 최초의 어업 선사는 아니었다. 2011년, 32명의 이주어선원들이 뉴질랜드에 정박해 있는 동안 한국의 가장 큰 원양 선사인 사조 오양의 배에서 도망친 후, 해당 선사 소속 어선에서의 혐오스러운 상황이 폭로되며 양국의 개혁과 법 이행으로 이어졌다. 2015년, 태국 배에서 자행된 극단적인 폭력과 노예 생활(사람이 납치되어 우리에 갇힌 상황을 포함한)에 대한 일련의 폭로는 유럽으로부터의 무역 금지에 대한 위협을 촉발시켰고, 결국 태국 정부에 의한 새로운 통제 조치로 이어졌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어업 강국인 중국은 차순위 4개 상위국을 합친 것에 가까울 만큼 공해에서의 활동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종종 이주어선원들에게 최악의 작업장으로 묘사된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인도네시아에서 왔는데, 인도네시아는 확실한 데이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세계 원양어업을 위한 최고의 노동력 공급국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 13개월 동안 비정부기구인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연합(SBMI)에 진정이 접수된 35척의 어선 중 29척이 중국 어선이었다. 그리고 NGO인 파괴적 어업감시단(Destructive Fishing Watch)의 국가 조정자인 압디 수후판에 따르면 2019년 11월부터 2021년 3월 사이에 외국 어선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35명의 인도네시아인들 중 4/5 이상이 중국 어선에서 일했다고 한다. 중국 국적의 배들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선원들에게 최악의 대우를 한다”고 인도네시아 해양정의구상의 공동 설립자인 파딜라 옥타비아니는 이메일을 통해 썼다.
출처: Stimson Distant Water Fishing Report / 어획 노력량은 여러 방법으로 정의될 수 있는 조업양의 측정치이다
최근 Stimson Center 보고서에 따른 2016-2017 통계에 근거한 공해에서의 어획 노력량 분포
2000년에 설립된 이래로, DOF는 광범위한 투자자들의 지원을 받아왔다. 오늘날 중국의 가장 큰 국영 기업들과 상장 기업들 중 일부가 주주들이다. 세계 주요 해산물 무역업자 중 하나인 일본의 미쓰비시 재벌의 계열사는 롱싱 629 어부들의 죽음이 밝혀지기 한 달 전인 2020년 4월에 DOF와의 거래를 중단했다고 말했지만, 오랫동안 DOF 참치의 주요 구매자였다.
환경정의재단의 설립자이자 CEO인 스티브 트렌트는 2015년 경 극악무도한 남용행위로 표시된 태국 기업들이 DOF보다 훨씬 적고 작은 배들을 가지고 있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DOF는 주요 투자처를 가지며 막대한 수익을 얻는 대기업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그들 자신과 그들의 사업을 영위한다는 사실이 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츠키지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참치.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큰 해산물 소비국 중 하나이다. 사진 Dennis Tang/Flickr.
한 달에 300달러를 받고 DOF의 어선에서 일했던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은 그들의 봉급을 전부 받지 못했거나 전혀 받지 못했다. 노동자들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그들을 파견한 인도네시아 채용업자들이 일반적으로 그 청구서를 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는 돈을 빌리며 노동자들에게 돈을 지불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채 사라졌다.
5명의 인도네시아 송출업체가 롱싱 629와 관련하여 불법 채용이나 인신매매로 수감되었지만, DOF에서 소속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이 당한 처우에 대해 누군가가 책임을 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회사의 운영 상태 또한 불분명하다. 인터뷰 대상자들과 위성 사진에 따르면, 세프리가 죽기 3개월 전인 2019년 9월경에, 어선들은 정상 운항을 중단하고 참치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대신 수개월동안 그저 공해상을 포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지난해 말 DOF는 인도네시아 인력을 모두 본국으로 송환한 뒤 선사의 본사가 위치한 중국 북동부 다롄(大連)으로 선단 상당수를 돌려보냈다.
2019년 중반 이후 중국에서 이 회사를 상대로 수십 건의 미지급 대출과 청구서 소송이 제기되었다. 중국 법원은 2020년 중반부터 DOF 설립자인 리젠유에 대해 채무자들이 일등석 여행, 부동산 구입, 자녀들을 비싼 학교에 보내는 것과 같은 행위를 금지하는 최소 16건의 “소비 제한 명령”을 내렸다고 공공 기록에 나와 있다. 이 회사는 우리의 조사 결과를 상세히 요약한 서한에도, 전화와 이메일을 통한 여러 건의 의견 요청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인권 유린에 대한 주장 외에도, 입수한 갑판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어선들은 많은 수의 상어 지느러미를 자르고 시체를 다시 바다에 버리는 불법적인 행위(shark finning)에 관여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선박이 의도적으로 특수 장비를 사용하며 상어를 겨냥했다고 말했다. 이 문제와 기타 문제들은 이 조사의 일부로 발표될 후속 기사에서 다루어질 예정이다.
배송 기사부터 이주 어부까지
다롄 원양 어선에서 일하는 많은 갑판원들처럼,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외국 어선 송입업체에 의해 롱싱 629호로 보내졌다.
2013년, 리즈키는 그의 어린 시절 친구를 따라 송입업체 PT Lakemba Perkasa Bahari와 계약을 했다. 두 사람은 친구의 가족이 중부 자바주의 북부 해안 지역인 판투라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카르타의 위성도시에서 함께 자랐다. 판투라는 이주어선원 모집의 중심지가 되었다. 리스키의 친구는 스페인 연승선에서 일해 왔고, 20살의 실직자이고 바다에서의 삶에 호기심이 많은 리즈키가 비슷한 직업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인도네시아 어선원 송출업체 협회 회장인 델 아구스에 의하면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송입업체가 판투라 지역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리즈키는 어업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수도에서 회계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도에서 데이터 입력 담당자와 음식 배달 기사로 일했다. 하지만 그는 그가 한 번도 벌어보지 못했던 월 급여 300달러라는 금액에 결국 미숙련 선원 훈련 프로그램이 이루어지는 라켐바로 향했다.
라켐바는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동안 인도네시아의 디플레이션이 해외로의 이민을 급증시키면서 2000년 중반에 설립되었다. 남자들은 말레이시아의 팜유 농장과 외국 어선에 몰려들었고, 여성들은 사우디아라비아와 홍콩에서 가정부와 간호사가 되었다. 이주노동자가 보내오는 송금액은 10년 상반기에 4배 증가하여 2005년까지 매년 54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세계은행 수치의 2%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정부와 언론이 “외환의 영웅”이라 부르는 이주노동자들은 외화와 경제성장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2013년까지 라켐바는 대만 보트에 갑판을 공급하는 선두 업체였다. 자카르타에 있는 본사, 판투라 테갈에 있는 지사, 그리고 해외의 여러 항구에 걸쳐 24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었다. 리즈키가 테갈 지사에 나타났을 때, 그는 일자리를 찾아 온 수십 명의 다른 젊은이들과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사업은 번창하는 것 같았다.PT Lakemba Perkasa Bahari의 페이스북에 업로드된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낚싯줄 훈련하는 선원들; 자카르타의 위성도시인 베카시에 위치한 라켐바 사무실 표지판; 라켐바의 신입 선원들; 커피와 담배
리즈키의 한 달 훈련은 마치 신병 훈련소 같았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깎고 타이어를 뒤집고 밧줄을 당겨 힘을 주고 손에 굳은살이 박히게 했다. 주로 낚싯줄을 다루는 연습을 했다. 이 기관은 또한 그가 해외에서 합법적으로 근무하기 위해 필요한 여권, 선원들의 의무 신분증 서류와 같은 서류들을 얻는 것을 도왔다. 라켐바는 리즈키의 월급에서 일정금액을 매달 공제하여 갚는 조건으로 관련 수수료를 대신 지불했다. 선사로부터 라켐바가 임금을 지급받아 수수료를 공제하고 남은 금액을 리즈키 어머니의 계좌로 이체하기 때문에 이 비용을 회수하는 것은 라켐바에게 쉬운 일이다.
라켐바의 2019년 광고 영상. 젊은 선원들이 어구 다루는 훈련을 하고 있다
리즈키의 출발 예정일 3일 전, 라켐바는 그에게 계약을 제시했다. 그것을 검토해 본 그는 그 조건에 깜짝 놀랐다. 라켐바가 훈련비와 기타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600달러를 공제하고 “보증금”으로 2400달러를 공제하고 나면, 그는 1년 넘게 월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 됐다. 그가 2년 근무 기간을 다 채웠을 경우에만 이를 회수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어떤 이유로든 배를 일찍 떠난다면, 그는 라켐바에게 남은 빚에 대해 여전히 책임을 지면서 보증금과 월급의 나머지를 몰수당했을 것이다.
만약 리즈키가 발을 뺀다면, 그는 여전히 라켐바에게 훈련 비용과 서류 비용에 대해 물어줘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돌아갈 수 없었다. 그의 아내는 이미 둘째 아이를 임신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그는 돈을 벌기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정말 절박함을 느꼈어요”라고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리즈키는 약 20명의 라켐바 신입 선원들과 함께 카리브해의 트리니다드 섬으로 날아가 대만 연승선에 승선했다. 힘든 일이었지만, 선장은 그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주고, 음식을 잘 먹이고 항구에 정기적으로 들렀다. 어느 시점에 리즈키는 선주를 포함한 몇몇 라켐바 직원들이 수백 권의 선원수첩을 위조하려는 공모하여 수감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항구에 있는 라켐바의 대표들은 그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계약을 끝내고 돈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2년이 지난 후, 리즈키는 약속했던 임금을 받아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그는 그 임금으로 오토바이 한 대와 그가 떠나있는 동안 생긴 가족들의 채무를 갚는 데에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그의 여정이 순탄했다고 생각했고 다시 떠나고 싶은 열망까지 생겼다.
롱싱 629호의 선원 중 한 명인 리즈키 파우잔이 2021년 8월 18일 수요일, 동부 자카르타에서 코로나19 환자 시설에서 세탁 서비스로 일하기 시작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Mongabay/ Wienda Parwitasari
2018년에 리즈키는 다시 한 번 대만 연승선에서 2년 계약을 마치고 하선했고, 그의 임금을 전부 받았다. 몇 주 지나지 않아, 부인과 이혼했다. 그 후, 그는 라켐바에게 또 다른 일자리를 요구했다. 이번에는 더 많은 임금을 주는 유럽의 어선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라켐바는 알겠다고 했지만, 몇 달 후 계약이 체결되지 못했다고 전했다. 대신 중국 어선에 자리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자리가 바로 롱싱 629호였다.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큰 딸과 노모를 부양해야하는 입장이었던 리츠키는 일자리 선택에 있어 까다로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기회가 왔을 때 저는 잡아야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는 말했다. “그 일 아니면 빚을 져야했거든요.” 그가 계약서에 서명한 2019년 2월, 그는 그의 생활이 리듬을 찾아간다고 느꼈다: 2년 간의 항해, 6개월 간의 고향에서의 휴식, 2년 간의 항해, 6개월의 휴식…
‘나는 내 운명에 몸을 맡겼다.’
갑판원을 모집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많은 무허가 대행사와 달리, 라켐바는 사람들을 바다로 보내기 위해 필요한 서류를 가지고 있었다. 상선에서 10년을 일했던 36세의 베르나르두스 마투르봉스는 조니 카시얀토와 같은 불법 모집자들에게 붙잡힌 선원이었다.
20대 후반의 건장한 남성인 조니는 2010년대 중후반 전 세계적으로 원양어업이 확대되면서 급증한 인도네시아의 새로운 송입업체 사업자 중 한 명이었다. 인도네시아 송출업체 협회 회장인 델 아구스는 지난 10년 동안 업체 수가 수십 개에서 거의 600개로 증가했을 것이라 말한다. “모퉁이마다 하나씩 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수입/수출업에 종사하다 1990년대에 인력 모집업에 발을 들인 델 아구스는 2009년 인도네시아 어선원 송입업체 협회를 설립했다. 사진 델 아구스 제공
인도네시아 노동부와 교통부는 지난 수년간 이주어선원 모집을 위한 병행 허가 제도를 주관해 왔으며, 일부 지방 정부들조차 허가를 내주고 있다. 델을 포함한 많은 업계의 관찰자들은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점이 빨리 한몫 잡을 생각만 하는 송출업체들을 번성하게 해 이주노동자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불행히도, 현재의 법적 절차로 우리의 이주어선원들이 인신매매나 강제 노동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자카르타의 국제노동기구 프로그램 담당자인 이르함 알리 사이푸딘은 말했다.
대다수의 인도네시아 송출업자처럼, 조니는 선주들과 직접 거래하지 않았다. 그의 고객은 중국인이 운영하는 피지에 본부를 둔 송입업체로, DOF 및 다른 선사들과 자체적인 계약을 맺고 있었다. 스스로 개업하기 위해 판투라에 있는 한 에이전시에서 사퇴한 후, 조니는 피지에 본부를 둔 그 업체 사장의 스카이프 아이디를 얻었고, 그는 일주일 만에 인도네시아 노동자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조니는 자신의 노동자들이 바다에서 일할 때마다 매달 30달러를 받았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라켐바와 달리, 조니의 회사는 신입 선원들에게 연승선 훈련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연승 조업에 사용되는 주황색 딱딱한 부표 사진 제공 Jennifer/Flickr.
롱싱 629호의 선원 중 두명은 조니가 그들이 계약을 망설였을 때 그들을 위협했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들 중 한 명인 베르나르두스는 조니와 조건을 의논하기 위해 판투라를 방문했고, 기다리기 위해 자카르타 근처의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몇 주 후, 조니의 처남은 도시에서 베르나르두스를 만나 그에게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베르나르두스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급여는 처음에 들었던 것보다 훨씬 적었고, 특히 다른 종류의 어선보다 더 일이 고되다고 들은 연승선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고 이전에 말했었다. 그러나 조니의 처남은 당일 오후에 떠나는 비행기 표를 이미 샀다고 말했다. 베르나르두스는 아내에게 계약서를 보여주기 위해 집으로 갔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가 전화로 그녀에게 하는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조니와의 통화에서 협상을 시도했다.
“문제는 그가 이미 티켓을 구매했다는 것이었죠,” 베라나르두스가 우리에게 말했다. “’너가 티켓을 취소하면 경찰들이 너를 찾으려 할 거고, 너를 체포할거야. 그럼 넌 보상금으로 나에게 2000만 루피아(1,400달러)를 줘야 할거야’ 라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전 제 운명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어요. 제 부인도요. 가야하는 수밖에 없었죠.”
Category: 언론에 나온 어필, 연대활동, 인신매매2021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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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2
10월15
2020년 4월, 한 중국 어선에서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인신매매 및 강제노동에 해당하는 노동조건에서 일하다 총 4명이 사망하고 3명이 바다에 수장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다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한 이주노동자들의 취약성을 잘 보여주는 롱싱 629호 사건의 몽가베이 기사를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이 글은 Mongabay의 허가 하에 번역 후 공유되었음을 밝힙니다. / 원문링크: https://news.mongabay.com/2021/09/worked-to-death-how-a-chinese-tuna-juggernaut-crushed-its-indonesian-workers/amp/?__twitter_impression=true / 권이현, 윤소원, 김린지, 박지향 자원봉사자 번역).
원문의 기사가 길어 3편으로 나누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①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1
③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3
중국 거대 참치 기업의 탄생
세프리, 아리, 리즈키, 베르날두스는 몰랐겠지만, 그들은 롱싱 629호의 새 주인 아래 첫 항해의 선원이 되기로 계약한 것이었다. DOF는 그를 세계 최대의 참치 기업으로 만들어 주길 바라는 욕심으로 진행된 합병의 일부로 다른 회사에게서 이 배를 구입했었다.
2000년에 전에 HSBC은행 직원이었고 의류 수출업자였던 리 젠유가 세 척의 연승선으로 DOF를 설립했다. 곧 DOF는 7 척의 연승선을 갖게 되었고, 리는 이로 인한 수익을 DOF의 고향인 랴오닝 지역에 있는 요트 건조 사업과 조선소 벤쳐에 투자했다. 랴오닝 지역은 황해를 건너 한국을 바라보고 있는 항구 도시이다.
한 때 러시아와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다롄은 선박 건조와 금융의 중심이 되었다.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이곳에서 2012년 건조되었다.
일찍이 DOF는 중국의 값싼 노동력의 이익을 보았다. 일본은 한때 세계 최고의 원양어업 국가였지만 점점 바다에서 일하는 일본인들이 줄어들면서 선단을 축소하고 있었다. 중국은 아주 다른 상황에 있었다. 수만 명의 내륙 지역 출신 농부들이 부유한 동쪽 항구 도시의 산업 지구에서 일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그 때, 중국이 원양어업을 장려하는 이유가 바뀌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 중국은 원양어업을 안정적 식량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이유로 장려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원양어업은 중국에서 “주출거(走出去)” 산업 중 하나로 분류되었고 이는 회사들이 해외에서 새로운 시장을 찾는 것을 장려하게 되었다. 곧 정부에서 특히 연료를 위한 보조금 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0년대 말 상승세였던 중국은 자신의 어업에 대해서 더 커다란 야망을 갖고 있었다. 정부, 선사, 대학들과 연계된 12명의 프로젝트 팀이 2010년에 어업 확장을 주장하면서 “해양생물은 가장 커다란 단백질 자원이며 그래서 바다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은 미래를 지배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했다.
다랑어류 중 가장 귀한 참다랑어는 일본 츠키지 어시장의 연례 참치 경매에서 최고 수백만 달러에 팔린다. DOF는 눈다랑어와 황다랑어에 집중하는데, 이들 또한 꽤나 몸값이 높다. 사진제공 Rhett A. Butler, Mongabay.
DOF는 중국 정부의 세계 어업 제패 야망을 기회로 포착했다. 2012년과 2013년에 DOF는 해외 투자자들과 첫 계약을 했다. 세 계약 당사자들이 DOF의 소수 지분을 사고 3,800만 달러로 DOF 지분의 29퍼센트를 인수했다. 바이어들은 아틀랜타 혹스 농구 사업을 갖고 있는 토니 레슬러가 설립한 LA의 아레스 매니지먼트, 중국 농업 타이쿤 리우 용하오, 싱가포르의 펀드 테마섹이 주요 투자자로 있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비공개 기업투자 펀드, US 음식 사업 거대 기업 아처-다니엘 미드랜드, 일본의 미츠이 재벌, 그리고 세계 은행의 일부인 국제 금융 기업(International Finance Corporation)이었다. DOF는 그들의 돈으로 더 많은 선박을 구매했다. 2012년과 2014년 사이에 DOF는 회사의 선박 수를 24 척으로 세 배 늘렸다. 하지만 이는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리 젠유(오른쪽에서 두번째)는 다롄 해양 어업 협회의 해면 어업 지사 대표직을 지냈다고 알려졌다.
DOF는 2014년에 홍콩 증권 거래소에서 기업 공개를 함으로써 더 많은 연승선을 인수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DOF가 증권거래소에 제출한 문서 서류에 오래된 데이터를 인용함으로써 최근 정보에 의하면 남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눈다랑어와 황다랑어 수산 자원이 마치 건강한 것처럼 개체수 상황을 왜곡했다고 그린피스가 문제 제기를 하면서 불발되었다. DOF의 서류는 또한 중국이 국내 회사들이 국제 포획제한을 어겨도 그저 무시할 것이다고 암시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수산부는 DOF를 “투자자들과 국제 사회를 심각하게 속이고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꾸짖었다. 그 이후 DOF는 부정적인 여론 속에서 기업 공개 원서를 철회했다.
증권 거래소 낭패 이후 세 투자자들은 DOF 투자를 철회했다. 그들은 중국 내 가장 큰 복합 기업, 여러 사모펀드, 정부 소유 자산관리회사 등 중국 투자자들로 대체되었다.
2021년 1월경 DOF 사무실
2017년에 DOF는 매년 정부 보조금으로 780만 달러 이상을 받고 있었고 DOF의 투자자 중 하나의 서류에 따르면 정부가 보조하는 어선 현대화 프로그램으로 더 많은 보조금을 받기로 되어있었다. DOF는 2016년에 5,000만 달러의 이윤을 냈다고 하였고 2020년까지 “세계에서 최대 참치 기업”이 되려는 야망으로 56개의 연승선을 인수하면서 이윤을 두 배로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 해에 중국의 농림부는 DOF가 국내 최초로 유리 섬유 강화 플라스틱 초저온 연승선을 건조했다고 칭찬했다. 더 커다란 어선에 이 기술을 대입함은 어선이 연료와 유지비를 아끼고 더 많은 시간을 바다에서 보낼 수 있음을 의미했다.
DOF가 기업 공개를 하려고 하고 실패한 지 2년 후인 2018년에 중국에서 가장 큰 간장 회사인 지아지아 식품은 7억 4,300만 달러로 DOF를 인수하려는 의사를 밝혔다. 지아지아 식품는 셴젠 증권거래소에 등록되어있었고 이 합병은 지아지아 식품 보다 컸던 DOF가 또 다시 기업공개를 하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중국 내 언론은 이 계획을 “뱀이 코끼리를 삼킨다”라고 표현했다.출처: DOF의 실패한 2014년 홍콩 증권거래소 기업 공개, 2018년 Guoco Lawyers(상하이)의 법률 자문 및 감사, Equasis
가치 평가액은 당시 DOF의 소수 지분 매수가에 기반한 것이다.
DOF와 중국 원양어업의 빠른 성장은 정부 보조금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값싼 노동력 덕분이었다. 2010년대 중반에 중국 내 오르는 생활수준과 고령화는 중국 인구로는 점점 선사들이 선원을 모집하기 힘들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연합(SBMI)의 연구 및 대외관계의 코디네이터 디나 누리야티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에서 온 노동자는 중국 노동자의 반값으로 고용될 수 있었다.
동자바지역에서 온 노동자 중 한명이 저질의 음식과 19시간 내리 일을 해야 했던 것에 대해 SBMI에 진정을 접수한 서류에 따르면 DOF는 2015 이래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하지만 디나의 말에 따르면 특히 중국 배에서의 노동권 침해에 대한 리포트가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세프리와 같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지역의 젊은 인도네시아인들은 중국 배에서 일자리를 찾는다.
수마트라에 위치한 펄프재 농장의 배수로 근처에서 굴착기가 작업하고 있다. 사진 제공 Rhett A. Butler, Mongabay.
“예를 들어, 농지가 많은 지역 출신인데 갑자기 그 지역이 개발 되기 시작하는 거에요”라고 디나가 말했다. 이는 인도네시아인들이 바다로 가게 하는 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높은 연봉과 좋은 일의 환경에 대한 약속 또한 그들을 바다로 보낸다. 하지만 그녀는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많은 약속들이 사기라고 말한다.
‘이게 물이 아니었다면, 저는 도망갔을 것입니다.’
경험이 많은 갑판원,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이 처음 롱싱 629호를 보았을 때, 그는 설렘을 느꼈다. 한국 부산 항구에 정박해 있는 그 배는 그가 타봤던 그 어떤 배보다도 두 배는 길고 다섯배는 무거웠다. 몹시 추웠던 2019년 2월 14일 밤, 그는 같이 일할 사람들과 승선하러 가기 위해 탄 작은 보트에서 선박의 빨갛고 하얀 선체를 보면서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르는 리즈키 옆에 앉아 있었지만, 굉장히 다른 첫인상을 갖게 되었다. 당시 19살이던 그는 영하에 가까운 추위 속에서 연승선에 오르며 그가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지 느끼고는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지난 여름에, 그의 고향인 남 술라웨시 지역의 해양 아카데미에 있던 누르의 선생님이 그와 몇몇의 반 친구들에게 외국 어선에서 직업을 찾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졸업 후 6명은 송입업체에 등록하기 위해 자바로 여행했다. 하지만 롱싱 629호에 탑승한 22명의 인도네시아 선원의 대부분처럼 누르는 송입업체에서 그 어떤 트레이닝도 받지 못했다. 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은 선임 선원 8명이 모두 중국인이라서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 다는 것 때문에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그들은 오직 리즈키 핸드폰에서 그가 집을 떠나기 전 중국어-인도네시아어 사전을 다운 받아온 구글 번역기만으로 소통이 가능했다.
2018년 중반 누르의 해양 아카데미 SMK Pelayaran Lintas Nusantara Barru에서 열린 졸업식
어선이 서태평양으로 가는 2주 여행을 시작하자, 리즈키는 같이 일하게 된 이들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 그들의 주된 일은 “세팅”과 “당기기”가 될 것이다. “세팅”은 수십 킬로미터를 넘는 낚싯줄의 새끼줄마다 미끼를 붙이는 것이다. “당기기”는 그 새끼 낚싯줄에 잡힌 물고기와 부표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새로운 노동자들은 아직 효과적으로 일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팅과 당기기는 각각 12시간씩 걸릴 수도 있다.
우리가 인터뷰한 사람 중 두 명은 선임 선원들이 육체적인 학대를 시작한 건 오래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이 느리면 부감독이 그들을 때리거나 발로 찼고, 쇠막대기로 멍이 남을 정도로 세게 그들을 때리기도 했다. 남 수마트라 출신의 아리는 자주 타겟이 되었다. 대개 그는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 하지만 하루는 그가 부감독을 밀어버렸다. 아리는 엉켜버린 메인 낚싯줄의 새끼줄을 풀고 있는 중이었고 그래서 그는 가위를 들고 있었다. 부감독은 칼을 들고 있었다. 일이 커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리즈키는 바로 끼어들었다. “계약서에서는 만약에 우리가 그 누구와도 싸우면 계약이 해지되면서 아무것도 집에 갖고 갈 수 없다고 적혀있고, 가족들에게 창피해질 것”이라고 리즈키가 우리한테 말했다.
갑판원이 태평양이 다른 DOF 선박에서 낚싯줄을 다루고 있다. 영상제공 Raswin/롱싱601.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보통 일주일 내내 식사를 위한 10분 휴식시간 외에는 하루 18시간씩 내리 일했다. 6시간 정도의 휴식 시간에 그들은 샤워하고 세탁하고 잘 수 있었다.
그들은 대개 하루에 각각 30-40 kg 정도의 무게인 참치를 15-20마리 정도 잡았다. 하지만 한 달에 몇 번쯤 참치 떼를 보면 선장이 노동자들을 더 몰아쳐서 30시간 내리 일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에는 선장은 그들에게 메인 낚싯줄을 둘로 잘라서 세팅과 당기기 일을 동시에 할 수 있게 했다. 가끔 그들이 일하고 있을 때 선장은 위에서 밑에 일하고 있는 곳에 사탕들을 던지고는 했다. 리즈키는 말했다. “선장은 파라오 같았고 우리는 그의 노예 같았습니다.”
상어 지느러미가 롱싱 629호 갑판에 흩어져있다.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에 따르면 13개월의 항해 동안 갑판원들은 각각 40~50kg의 무게가 나가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 약 20개를 대략 1톤의 상어 지느러미로 채웠다. 사진은 승선해있던 인도네시아 선원 중 한 명이 촬영.
밥과 국수 외에는 노동자들에게 미끼 물고기와 변색된 닭고기, 오래된 채소가 주어졌다. 이제 21살이 된 또 한명의 해양 아카데미 졸업생 유드하 프라트마는 “밥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었지만 다른 것들은 부족할 때가 많았어요. 우리는 같이 힘들게 일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안 좋았어요”고 말했다.
(왼쪽부터) 무하마드 알파타, 알디 레날디, 이펜디 파사리부가 미끼 물고기를 주로 먹었던 롱싱 629호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국제운수노동조합연맹의 어업 코디네이터 로센 카라팟체브는 미끼 물고기는 “가축 사료”와 같다며, 주로 “항구나 어시장에서 누구도 먹거나 사고 싶지 않아 남은 물고기가 급속 냉동해 미끼로 쓰이도록 도매상에게 팔린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중국 선원들은 생수를 마셨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은 바닷물에서 증류된 물만 마실 수 있었다. 전에 어선 선원이었던 베르나르두스 마투르봉스는 “물에 소금기가 있었고 녹슨 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유드하에 따르면, 그 물을 마실 수록 갈증이 더 났다.
“롱싱 629호에 있던 모두가 참을 수 없었고 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이게 물이 아니었다면 도망갔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어요”라고 리즈키는 말했다.
여행이 시작된 지 6달만에 몇몇 선원들이 롱싱 629호가 연료를 채우는 동안 연료선의 와이파이에 연결하는 것을 성공했다. 청소년이었던 누르는 메세지 앱으로 어머니께 연락드렸고 어머니는 바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묻는 답장을 보내왔다. 이는 선원들이 승선한 후 처음으로 전화나 인터넷에 연결된 것이었다.
누르는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드리기 싫었다. 그는 끔찍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가 벌써 바다에 있다고만 말했다. 5분 후, 인터넷 연결이 끊겼다.
‘제가 살아남는다면, 저는 결혼하고 싶습니다’
2019년 12월, 세프리는 숨쉬기 힘들어졌다. 중국 선원들이 처음으로 그에게 생수를 주었지만 인터뷰한 이들에 따르면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그의 룸메이트들은 번갈아가면서 외운 쿠란 구절들을 암송하면서 세프리를 돌봤다.
12월 21일 해가 뜨기 바로 전 세프리는 화장실을 가려다가 쓰러졌다. 선원들이 그를 식사하는 곳으로 데려갔지만 그를 되살리지는 못했다. 아침 7시에 그는 죽었다.
베르나르두스 마투르봉스는 “그가 친동생같았다”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고 고백했다.
세프리는 롱싱 629호에서 사망한 첫번째 선원이었지만 질병에 걸린 첫번째도 마지막 사람도 아니었다
9월경 해양 아카데미 졸업생 유드하 프라트마는 자신의 다리가 팽창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친구들에게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가족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유드하 프라타마, 2021년 8월 촬영. 사진 제공 Febriansyah, Mongabay.
유드하는 건강해졌지만 선원 20명의 절반 가량(최초 승선했던 22명 중 2명은 다른 선박으로 환승했다)은 세프리가 쓰러진 달보다 한 달 전인 11월 쯤까지 모두 비슷한 증상을 경험했다.
이 증상을 가진 이들은 거의 서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다리가 부은 것은 몸 위로 퍼져 더이상 그들의 바지가 맞지 않았다. 선원 경력이 있던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은 이 질병에 대해서 소문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발이 붓더니 갑자기 사망한다고 들었어요.” 그가 전에 탔던 어선에서의 선원들은 영양실조로 인한 각기병이나 상피병 등을 이야기 했지만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소문이었어요.”
인터뷰 기록을 검토한 다섯 명의 의사에 따르면 롱싱 629호와 DOF의 다른 선박의 선원들은 음식과 수질 관련 여러 가지 질병을 겪었을 수 있다. 대부분은 각기병의 가능성을 꼽았다.
한때 각기병은 긴 여행을 하는 선원들에게는 항상 일어나는 질병이었지만 19세기에 일본의 한 항해의사가 단순한 식단 조절로 예방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드물어졌다.
하지만 각기병은 난민캠프, 외국인 보호소 등 다른 열악한 환경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또한 각기병은 원양어선에서도 발견되었다. 태국의 질병관리국은 캄보디아와 미얀마 선원들로 이루어진 태국 트롤어선에서 각기병이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이 사건을 조사한 그린피스는 2016년에 이 문제들이 안 좋은 영양, 과로, 그리고 항구로 돌아가지 않은 오랜 기간 때문에 일어났다고 결론 내렸다.
대서양 한가운데에서 대만 연승선 헝화 202호가 일본 도쿄 인근에서 활동하는 파나마 국적 냉장선 시앙 하오호로 냉동된 상어를 옮기고 있다.
각기병은 티아민 또는 B1 비타민 부족으로 일어난다. B1은 탄수화물을 에너지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과로와 불균형한 식단은 몸 속 티아민을 고갈시킨다. 100% 확실하게 각기병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실험실 시험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의료진은 위험 요인들과 선원들이 겪은 증상들이 “젖은” 각기병이라고 알려진 질병과 일치한다고 했다. 이 병은 부종, 호흡곤란, 그리고 심장 부전까지 일으킬 수 있다.
콜로라도-덴버 대학의 간병과 고혈압 부서를 이끄는 리차드 존슨은 “제 예상에는 그들이 여러 질병을 겪었지만 가장 큰 병은 각기병이었던 것” 같다고 전화로 이야기 했다.
미국에서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공중보건의 입장에서 대변하는 HEAL Trafficking이라는 그룹을 설립한 한니 스토크로사 또한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선원들이 겪은) 증상 패턴이 각기병과 어떤 면에서는 일치하고 어떤 면에서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의학적 문제가 복합적일 것(각기병+다른 질병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라고 이메일에 적었다.
의료진 중 둘은 그 질병이 증류기나 보류 탱크의 문제로 인해 독성이 있는 물을 마셔서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공중 위생 코디네이터 알렌 박사는 “증류기의 결함은 산화철(주황빛 노란색)이나 유화철(노란색) 등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보류 탱크의 결함 또한 중금속 오염의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고 그는 또한 이야기했다. “소금물을 그러한 보류 탱크에 오랜 기간 두면 녹슬 수도 있고 이상한 맛과 색깔이 날 수도 있습니다.” 중금속이 안 좋은 맛의 물에 있다면 이는 심한 부종과 심지어 죽음으로 가는 심근증의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미국과 아프리카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응급실 의사 노아 로젠베르는 충분히 증류되지 않은 물에서 온 염분 과다가 간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고 추측한다고 했다. “간은 충분한 담수가 있어야만 염분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바닷물로 살아남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롱싱 629호의 갑판원 중 한 명인 이펜디 파사리부는 병에 걸리기 전과 후에 극심한 부기와 호흡곤란을 경험했다. 사진 제공 공익법센터 어필
세프리의 죽음은 그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한 갈등을 롱싱 629호에 불러일으켰다. 이슬람에 따르면 최대한 빨리 제대로 된 장례식이 치뤄져야 한다. 그리고 선원들의 계약서에 따르면 한 선원이 죽으면 그 시신은 항구로 가져가야 한다. 세프리가 사망했을 때 선원이 말해준 것에 따르면 선장은 처음에는 항구로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위성 전화로 몇 번 통화를 한 다음에 선장은 인도네시아 선원들에게 세프리의 가족으로부터 세프리의 시신을 바다에 묻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세프리의 가족은 나중에 이 주장에 반대했다. 세프리의 여자형제 리카에 따르면 송입업체는 그 후 며칠 뒤에야 유족들에게 판투라에 위치한 사무실로 올 것을 요청했고, 그제서야 세프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리카와 그의 남편에게 알려주었다.
리즈키와 베르나르두스는 선장과 싸우려고 했으나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리즈키는 “싸우면 계약서가 파기 될 것이라고 걱정했어요.”라고 말했다. 세프리가 사망한 날에 시신은 임시 관에 넣어져 바다로 던져졌다. 바닥짐이 없는 관은 가라앉지 않았고 선원들은 관이 떠내려가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세프리가 사망한 후에 선장은 사모아로 항해했다. 이때쯤에 많은 다른 선원들이 심각하게 아팠다. 증상이 돌아온 유드하 프라타마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12월 26일, 롱싱 629호는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는 인도네시아인 선원을 다른 DOF 어선에서 태웠다. 그 다음날 롱싱 629호는 세 번째 연승선, 롱싱 802호를 만나 유드하와 새로 온 선원, 그리고 병에 걸린 두 명의 갑판원 – 남 술라웨시 해양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무하메드 알파타와 카르만 – 을 그 선박에 태웠다. 사모아의 수도인 아피아 항구에서 온 롱싱 802호는 다시 항구로 돌아갔고 롱싱 629호는 바다로 나아갔다.
이 즈음에 알파타는 숨 쉬기가 힘들어졌고, 그 날 밤 사망했다.
유드하는 알파타의 마지막 말이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가족한테 이야기해주세요. 하지만 제가 살아남는다면 저는 결혼할 것입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유드하.”였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저는 ‘그래요. 당신을 위해서 기도할게요.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마세요.’라고 말했어요.”
알파타 또한 바다에 묻혔다. 며칠 후 카르만, 유드하와 세번째 선원은 아피아 항구에 도착했다. 선장은 그들의 여권, 집에갈 비행기 표, 음식을 사먹고 공항까지 택시를 타고 갈 수 있도록 현지 돈을 건네주었다. 배는 선원들을 내리자마자 다시 공해로 돌아갔다.
롱싱 629호(파란색)이 롱싱 630호(빨간색)로부터 질병에 걸린 갑판원을 태운 후, 2019년 12월 말 롱싱 802호(노란색)과 만나는 모습을 위성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공항에서 부은 발을 끌고 세번째 선원이 타고 있는 휠체어를 밀면서 유드하는 비행기를 놓칠까봐 너무 걱정되었다. 다행히도 공항 직원들이 비행기를 탈 때까지 그들을 돌봐주었다. “그들이 친절해서 천만다행이었어요”라고 유드하는 말했다.
그들이 자카르타에서 내렸을 때 아무도 그들을 마중나와주지 않았다. 유드하는 도시에 친척이 아무도 없었다. 그의 고향은 나라 절반은 돌아야 하는 거리에 있었지만 DOF는 그에게 집에갈 돈을 주지 않았고 그는 본인의 체크카드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카르만의 송입업체에서 밤을 보냈고, 어머니께 전화하여 집으로 갈 비행기 표를 얻었다.
그는 “저는 정말 화가 났습니다. 저를 동물처럼 대했기 때문에요”라고 말했다.
Category: 언론에 나온 어필, 연대활동, 인신매매2021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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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3
10월15
2020년 4월, 공익법센터 어필은 한 중국 어선에서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인신매매 및 강제노동에 해당하는 노동조건에 2020년 4월, 한 중국 어선에서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인신매매 및 강제노동에 해당하는 노동조건에서 일하다 총 4명이 사망하고 3명이 바다에 수장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다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한 이주노동자들의 취약성을 잘 보여주는 롱싱 629호 사건의 몽가베이 기사를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이 글은 Mongabay의 허가 하에 번역 후 공유되었음을 밝힙니다. / 원문링크: https://news.mongabay.com/2021/09/worked-to-death-how-a-chinese-tuna-juggernaut-crushed-its-indonesian-workers/amp/?__twitter_impression=true / 권이현, 윤소원, 김린지, 박지향 자원봉사자 번역 ).
원문의 기사가 길어 3편으로 나누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①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1
② [롱싱629호 사건 보도] 죽을만큼 일했다 : 중국의 거대 참치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짓밟았는가 – 2
보편적 관할권
2020년 4월 26일, 한국 변호사 김종철은 핸드폰으로 놀라운 비디오를 받게 되었다. 이날 오전 촬영된 영상에는 롱싱 629호의 또 다른 갑판원인 이펜디 파사리부씨가 부산의 한 병원으로 향하는 승합차 뒷좌석에서 심각하게 기침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러부터 몇 주 전, 남은 16명 중에 더 많은 선원들이 아프게 되었다. 이제 계약 파기보다는 죽음의 위험이 더 두려워진 선원들은 다 같이 육지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처음 선장은 오직 공허한 약속들만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이 선상 반란을 협박하자 선장은 드디어 그들을 항구로 가는 다른 DOF 연승선으로 환승하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아리는 항구에 도착하지 못했다. 숨을 쉬기 위해 헐떡이던, 부은 몸의 그는 중도에 사망했고 바다에 묻히게 되었다.
4월 24일, 드디어 선원들이 부산 항구에 내렸을 때, 그들은 세상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정복된 것을 알게 되었다. 마스크 등 개인 위생복을 입은 직원들은 입국 허가 검사를 하고 코로나 검사를 한 후 그들을 인도네시아로 가기 전 2주동안 자가 격리를 위해 라마다 호텔로 데려갔다.
김 변호사는 한국 어선에서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을 더 나아지게 할 것을 요구하는 데에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선원들을 도울 수 있는대로 돕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기회를 보았다. 계약 기간이 끝난 후 부산을 거쳐가는 이주어선원들은 많지만 보통은 하루나 이틀 후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때문에 롱싱 629호의 선원들은 그렇게 빨리 떠나지 못했다. 그의 노력이 한국에서 진짜 개선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험했던 김 변호사에게 이는 바다에서 죽음을 겨우 면한 선원들과 이야기 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가 2011년 설립한 비영리 법률사무소인 공익법센터 어필 사무실에서의 김종철. 그의 단체는 기부금으로 운영되는데, 한국에서 변호사가 그렇게 활동하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사진 제공 조진섭, Mongabay.
21살의 나이로 병원에 입원한 다음날 아침에 사망한 이펜디를 돕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그의 유족들은 부검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텔 와이파이로 김변호사는 다른 선원들과 영상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경험한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에 열정적이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세계가 들을 지에 대한 자신감은 없었어요,” 김 변호사가 회상했다.
그 다음 며칠 동안 선원들은 한국어-인도네시아어 통역사를 통해 김 변호사에게 그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충격적인 이야기에 김 변호사는 한국 해양경찰에 수사를 요청했지만, DOF의 어선들이 한국 수역을 이미 떠났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답을 받았다.
김변호사는 그래도 한국 정부가 행동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선원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그는 최근 한국 형법에 신설된 조항을 인용하며 ‘보편적 관할권’을 통해 인신매매 가해자들이 한국 국적 여부, 한국 영토에서 발생한 사건인지 여부와 관계 없이 법집행관들이 수사할 수 있으며, 선원들은 인신매매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김변호사는 원래 보편적 관할권을 성착취 목적 인신매매를 처벌하기 위한 도구로 보았지만 이제 그는 이 상황에도 보편적 관할권이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 변호사는 “그들은 인권 침해를 당했지만 어선을 벗어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사건이 노동 착취를 넘어선 인신매매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변호사는 또한 이 이야기를 MBC에 제보했다. 5월 5일, MBC는 이 보도를 아리의 시체가 바다로 던져지는 핸드폰 촬영 영상를 포함해서 주요 뉴스 프로그램에서 방영했습니다. 그 다음날 이 보도가 퍼지기 시작하며 인도네시아어를 하는 한 한국인 유투버가 그의 인도네시아 청중을 위해 이 사건을 소개했다. 25세의 이 유투버는 그의 영상에서 “노동 환경이 노예 제도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해당 유튜브 영상은 몇백만 조회수를 받았고, 인도네시아에서 이 사건이 유명해지고 몇몇 국회 의원들이 가해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는 데에 일조했다.
아리가 수장되는 모습을 다른 갑판원이 촬영한 영상을 MBC기자가 설명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헤드라인을 장식하자 한국 정부는 김 변호사의 리포트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안경찰이 아직 자가격리 중이었던 선원들과 독자적으로 인터뷰를 했고, 사건을 검찰에게 넘겼다. 하지만, 조사가 계속되기 위해서 인도네시아인들은 한국에 머물러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등하던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투표를 했다.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은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거의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가기로 투표했다. 5월 초에 그들은 부산에서 떠났고 한국 당국이 수사할 기회가 사라졌다.
갑판원들이 부산에 있는 동안 연락을 주고 받았던 인도네시아 어업 노동자 조합, SPPI의 한국지부장 아리 푸르보요는 그들이 “충격을 받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배에서 친구들이 죽는 것을 보았으며 한국에 머무르는 것이 심리적 부담으로 부담이 됐다”고 전했다.
(왼쪽부터) 롱싱 69호에 승선했던 M. 유세프, A. 페이살, 알디 르날디, 이펜디 파사리부, 유드하 프라타마, 아디트야 푸르노모. 이 중 일부는 승선 겨우 18세였다.
‘돈이 없다‘
부산에 도착한 선원들은 그들이 드디어 그들의 은행 잔고를 확인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 때에서야 그들은 그들이 계약서에서 공제를 합의한 금액을 제외하더라도 약속된 임금의 11%만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섯명은 13개월 일한 것에 대해 120 달러 밖에 받지 못했다. 송입업체와 연락이 닿은 이들은 모두 같은 설명을 들었다: DOF가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2019년에서 2020년까지 DOF에 대해 채권자, 서비스 제공자, 공급자가 제기한 수십개의 소송으로 미루어보아 DOF는 횟감 참치 수요가 급격하게 감소한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이미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DOF가 돈을 못 낸 것은 선원 뿐만 아니라 그들을 파견한 송출업체들에게 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었던 사뮤엘 판자이탄은 전직 선원들이 해양 산업에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송출업체를 최근에 개업한 전직 선원이었다. 그가 사업가로서 한 가장 첫 번째 일 중 하나는 DOF에게 노동자를 공급하는 피지의 송입업체를 운영하는 중국인 여성 후 줄리안과 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사뮤엘에 따르면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도, 전화통화한 적도 없고 메세지로만 연락했다. 그는 “나는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그녀와 전화를 해 본 적도 없다. 내가 전화를 할 때마다, 거절을 당했다”고 말했다.
후의 송입업체인 Orient Commercial and Trade는 세프리와 아리를 파견한 업체, 조니 카시얀토가 설립한 업체를 포함한 여러 인도네시아 송출업체로부터 선원들을 받아 DOF로 보냈다. Orient는 또한 DOF에게 미끼 물고기를 공급했고, 우리의 조사팀이 본 은행 기록에 따르면, 홍콩에 있는 통장으로 수고비를 지불받고 있었다.
북 자카르타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사뮤엘 판자이탄. 그의 송출업체 PT Samuel Maritim Jaya와 계약한 신입 선원들은 롱싱 629호는 아니지만 여러 DOF 선박에 승선하였다. 사진 제공 Wienda Parwitasari, Mongabay.
시작은 좋았지만 사뮤엘에 따르면 2019년 초, DOF에 선원을 공급하는 송출업체에게 지급되는 돈의 유통이 심각하게 감소했다. 그의 고객들은 DOF가 수고비를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항의하려고 했으나 자신의 영향력이 적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제 갓 시작한 그의 사업을 살리고자 여러 해외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DOF를 임금 사기로 고발하며 연락해보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답변을 받지 못했다. 중국에 있는 변호사는 그에게 중국에 있는 회사를 고소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세프리의 사망 한 달 전인 2019년 11월, 사뮤엘은 그의 선원 4명을 태우고 있는 세 척의 어선이 사모아에 정박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전화로 그는 그의 선원들에게 DOF가 그들의 임금을 안 주고 있다고 알렸고, 지역 정부가 가끔 임금을 주지 않는 경우에 그러하듯 어선들을 억류하리라는 희망에, 그들에게 경찰서에 알리라고 했다. 며칠 후에 어선들은 떠나기로 결정한 사뮤엘의 선원들을 두고 다시 바다로 나아갔다. 그 중 한명이었던 이반은 그가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여권을 달라고 선장에게 빌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 시점에 롱싱 629호를 포함한 DOF의 태평양과 대서양 선단 선원들은 그들의 어선의 행동이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2019년 9월 쯤 어선들은 참치들을 찾으러 다니지 않고 바다에서 가만히 있기 시작했다. 선원들에 따르면 거의 1년간 2020년 5월 롱싱 629호 선원들을 돌려보낸 후에도 계속 그랬다고 한다.
위성 사진 또한 선원들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태평양 DOF 어선 두 척에 대한 위성 사진은 2019년 초 전형적인 조업 패턴을 보였으나(위) 2020년에는 표류하는 듯한 패턴(아래)을 보여주고 있다. “두 척의 어선은 2019년 9월 경 정상적인 경로를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Global Fishing Watch의 대외협력 책임자 사라 블라덴은 말했다.
갑판원들은 배가 서태평양을 떠돌아다니면서 참치 낚시는 거의 하지 않았으나, 상어 낚싯줄을 던지며 많은 상어를 잡았다고 밝혔다. 선장들이 가끔 모여 술을 마실 때 인도네시아인들은 왜 그들이 정상 운행을 멈췄는지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중국인에게 설명을 요청했을 때 얻은 것은 보아하니 DOF가 일종의 혼란을 겪고 있음을 전하는 서툰 영어와 손짓뿐이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었지만, ‘돈이 없다’는 사실은 이해했습니다”라고 서 자바 출신인 러스나타(39세)가 말했다.
2020년 8월, 마셜 제도 영토 근처의 국제 해역 태평양에 모인 DOF의 배들이 중국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몇 주 만에 그들은 서해의 중국 산둥반도 끝에서 도착했다. 갑판원들은 몇 달 만에, 몇몇은 2년 만에 처음으로, 해안과 멀리 솟아오르는 산들을 볼 수 있었다.
배들은 거기서 입항하지 않은 채 열흘 동안 그곳에 정박했다. 유조선이 어선의 연료를 채우기 위해 왔을 때에서야 루스나타는 전세계를 휩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155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의 비퉁 항구로 가는 2 척의 DOF 연승선에 모여 탔다. 도착 후, 방역보호복으로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싸여져 있는 직원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루스나타는 그들이 DOF 어선 중 한 척에서 해안 경비선으로 2 개의 커다란 물체를 옮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보다가 문득 그것이 시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020년 11월 비퉁에서 시신 중 한 구가 하선되고 있다. 시신은 살레 아나코타와 루디 아르디안토의 것으로, 그들은 태평양에서 3개월 전 사망했다. 당시 인도네시아 외교부는 두 명의 사망자가 모두 불상에 질병에 걸렸었다고 밝혔다. 사진 제공 외교부
선원들을 만나기 위해 비퉁으로 날아간 사뮤엘 판자이탄 및 일부 송출업체들은 DOF가 급여를 지불할 때까지 인도네시아가 두 척의 주낙어선을 억류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사뮤엘의 말에 따르면 어선들이 도착하기 전에 인도네시아 외교부의 시민보호국장인 주드하 누그라하가 송출업체들에게 중국의 대사가 DOF가 2021년 2월 또는 3개월이 지나기 전에 임금을 지불할 것이라고 약속했으니 어선들을 억류하지 말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주드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코멘트해달라는 요청에 답을 하지 않았다.) 2020년 말 DOF의 대서양 선단에서 일했던 인도네시아 선원 88명의 송환을 도운 다카르 소재 국제운수노동조합연맹의 세디나 케이타 또한 현지 인도네시아 대사로부터 DOF가 임금을 2월 말까지 지불할 것이라고 중국이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사뮤엘은 아직 돈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지난주, 그는 후 줄리안의 회사 Orient Commercial and Trade을 포함한 총 3개 기관으로부터 총 10만 달러 이상의 돈을 돌려받아야하며 선원들에게 지불하기 위한 돈을 위해 빚을 져야만 했다고 밝혔다.
후는 이메일을 통해 사무엘의 에이전시에 약 10,000달러의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2018년부터 임금 지급을 중단한 DOF에 책임을 돌렸다. “지속해서 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미루고 있다.” DOF 가 2021년 6월에 결국 임금을 지불했으나 아직도 그의 송입업체에 90,000 달러 가량의 채무가 있다. 그는 이를 여러 파트너 인도네시아 송출업체에 분산했다. 후에 따르면, DOF는 그에게 모든 돈을 갚았다는 입장이라 그가 채무를 빠른 시일 내에 회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몇몇 롱싱 629호 선원들은 결국 그들의 송출업체들에게 배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많은 다른 선원들은 그들이 바다에서 일한 것에 대한 그 어떤 임금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루스나타는 그의 송출업체가 인도네시아에서 목돈인 11,000 달러 이상을 빚졌다고 했다. 전직 건설 노동자였던 루스나타는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서 돈을 모으려고 바다에 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후 코로나 사태 때문에 일을 찾을 수 없었고, 친척들과 어업 노동조합 SPPI에서 지원금을 받아 살 수 밖에 없었다. 어업 노동조합의 회장 일리아스 판게스투에 따르면 비퉁을 통해 송환된 선원 중 절반 정도만이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중국 정부와 정치적 협의를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들의 시민을 보호하지 못했어요,”라고 사뮤엘이 말했다.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지 못하게 해주세요‘
인도네시아에서 롱싱 629호의 비극은 특히나 중국 어선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공론화했다. 뉴스 기사 보도 통계에 따르면 2019년 3월부터 2020년 11월 사이 8개의 다른 중국 회사 소유의 19 척의 어선에서 적어도 30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이 사망했다. 그중 19명은 부종과 호흡곤란의 증상을 동반한 알려지지 않은 질병으로 사망했다.
롱싱 629호에서의 학대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행동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사태에 대한 이야기가 터진 2020년 5월, 일주일 만에 어선과 연관된 3-4개의 송출업체 사업자들이 체포되었다. 이는 고용 사기에 따른 인신매매로 4.5 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 조니 카시얀토, 선원들을 질 낮은 물과 음식, 과도한 노동시간 및 수장으로 그들의 계약에 위배되는 상황에 놓이게 한 혐의로 1년간 감옥에 가게된 PT Lakemba Perkasa Bahari의 CEO 무아파르 카다피를 포함한다. 지난 1년 반동안 다른 중국 어선에서의 사망 사건과 연관된 최소 7명의 송출업체 사업자들이 체포되었다. 어선원을 착취에서 보호하는 활동을 하는 SAFE Seas Project의 대표 노노 수마르소노에 따르면 이는 전례 없는 대대적인 인도네시아 송출업체 단속이다.
2020년 5월 22일, 센트럴 자바의 경찰 기자회견에서 송출업체 사업자 수스트리요노와 무하마드 호지가 카메라 앞에 서있는 모습이 담긴 Metro TV의 보도에 “노예가 된 어선원” 문구가 쓰여져 있다. 그들이 운영하는 PT Mandiri Tunggal Bahari는 롱싱 629호 사건 직후 알려진 여러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이 중 한 명은 그들의 선원들이 놓이는 선상 노동조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송출업체협회의 회장 델 아구스에 따르면 해외 어선들이 포함된 이 스캔들때문에 인도네시아 송출업체들이 악마화되었다고 한다. 그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2017년 이주민 보호법에서 요구하는 송출업체를 감시하기 위한 새로운 법의 제정을 주장하는 이들 중 하나이다. 인도네시아 해양 정의 계획의 파디알 옥타비아니에 따르면 이 법은 1년이 넘게 불확실한 상태로 있다고 한다. 국무장관 대변인 팔도 말디니에 따르면 이 법이 아직 대통령에게 보내지기 위해 몇몇 부서의 승인을 기다리고 했다.
자카르타의 국제 노동 기구 프로그램 담당자인 이르함 알리 사이푸딘은 UN의 2007년 어선원노동협약을 포함하는 이 법은 인도네시아가 중국과 소통할 때 더 커다란 외교력을 줄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선원을 학대하는“배의 기국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알맞은 법적 장치를 마련해두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고 말했다.
동남아시아 그린피스 활동가들과, 이주노동자연합(SBMI)을 포함한 여러 기관들은 인도네시아가 송출업체를 처벌한 것이 잘했다고 생각했다. SAFE Sea의 노노 “비공식적으로 이야기를 했을 때, 몇몇 송출업체들은 많은 송출업체들이 비슷한 관행으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체포된 이들은 그저 운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인도네시아 송출업체들을 처벌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원양어업은 결국 본질적으로 경계를 넘나들기 때문에 해외 송입업체와 선주들 또한 책임을 져야 한다.
어업노동조합의 대표 일리아스 판게스투는 롱싱 629호 사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죄를 지은 이들, 차별을 행한 이들은 우리 사람들이 증류된 물을 먹는 동안 본인은 생수를 마신 중국인들입니다. 죄를 지은 것은 DOF인데 처벌받는 것은 송출업체들입니다. 문제는 저기(중국)에 있는데 왜 저기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 것인가요?”
페이스북에 업로드된 이 사진에 따르면 DOF의 선박 세 척이 2020년 9월 말 다카르에서 육지로 인양된 상태이다.
2020년 말, 인도네시아의 외교부 장관이 중국측과 만나 중국 어선에서 발생하는 인도네시아인 사망 사건의 증가에 대해 대화를 나눈 후, 두 국가가 이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서 법 집행 관련 정보 공유 등을 포함한 법적 공조 협약을 맺었다고 외교부의 주드하는 말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송출업체들을 처벌한 것과 다르게 중국은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의 처우에 대해 혐의가 제기된 기업들을 수사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중국의 외교부와 자카르타의 대사관은 이에 대한 코멘트 요청에 대답하지 않았다. 동아시아 그린피스에 따르면 중국은 중국 어선에서의 인도네시아인들의 죽음에 대해서 그 어떤 공식 보고서도 발행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해양부 조정 차관, 바실리오 디아스 아라우조는 “롱싱 629호 사태와 관련된 관련자들과의 조정이 아직 더 필요한 상태”라고 지난주 우리에게 말했다.
바실리오에 따르면 그의 부서는 해양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지난 6월 중국의 외교부와 양해 각서를 체결했다. 그는 이 양해각서가 “중국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선원 및 어선원들을 보호할 정책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플랫폼”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행동의 문제라고 한다. “지금은 이 합의를 현실화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와 중국 정부가 밟아 나가야 하는 전략적 단계에 대해 협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2021년 5월 기자회견에서 중국 외교부 대변인 왕 웬빈
공식적으로 중국은 아직 DOF의 어선에서 이주민들이 학대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 5월 미국 관세국경보호청이 기업의 노동 관행에 대한 자체 조사를 인용하며 DOF로 부터의 수입을 금지한 후 중국 외교부 대변인 왕 웬빈은 베이징에서 기자들에게 “’선원들에 대한 학대’라고 부르는 것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롱싱 629호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작년 언론에서 이 문제가 과장되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해 관련 기업은 해당 선박에서 근무하는 인도네시아 선원들을 즉시 확인했으며, 그들은 모두 학대는커녕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롱싱 629호의 갑판원이었던 리지키 파우잔 알비안은 지난달 “다롄으로부터 연락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629명의 승무원 중 누구도 그들과 연락한 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부인할 거라고 예상할 수는 있죠. 다롄은 큰 회사니까요.”
2020년 12월, 합병이 진행될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1년 이상 지속한 후, 간장 제조업체인 Jiajia Food는 DOF 인수 계획이 종료되었다고 발표했다. 중국 법원은 2019년 11월부터 각종 소송으로 DOF 등 리 젠유 소유의 기업에 속한 수천만 달러의 자산을 동결한 것으로 밝혀져 여전히 법체계를 뒤흔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원고는 중국 최대 조선회사 주요 기업부터, 미지급 임금으로 회사를 고소하는 DOF 중국 승무원 수십 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롱싱 629호의 선장도 그들 중 한 명이다.
명백한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DOF는 아직 완전히 문을 닫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DOF의 다롄 사무실에 들른 한 관계자는 사무실이 아직 열려 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기업주 중 한 명이 올린 공지문에 따르면, DOF가 가까운 시일 내에 최대 10척의 보트를 더 인수할 생각이라며 다른 투자자들을 끌어모았다.
유다 프라타마와 누르를 포함한 롱싱 629호 갑판원 중 몇 명은 인도네시아 해역을 비행하는 화물선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들 중 누구도 외국 어선에서 다시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2021년 8월 동부 자바 수라바야에서의 유다 프라타마. 그는 “노동자을 고용할 때 자신이 그 위치에 있다면 어떨지 생각해한다”며 “열심히 일하는 건 상관없지만, 남에게 음식을 줄 때는 제대로 된 음식을 줘야한다”라고 말했다. 사진 제공: Febriansyah, Mongabay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은 동자카르타에 위치한 하숙집에 살고 있다. 그는 COVID-19 환자가 치료받는 시설에서 배달 서비스 및 저녁 청소를 하며 부모와 자녀에게 줄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고 있다.
그는 DOF의 배에서 겪었던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다시 외국 어선에서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는 그만큼 많은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적절한 기관, 적합한 배를 찾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8월의 어느 날 일하러 가는 리즈키 파우잔 알비안. 사진 제공: Wienda Parwitasari, Mongabay
세프리의 여동생 리카는 세프리의 마을, 세르당 메낭에서의 기회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롱싱 629호의 비극 이후 마을 사람들이 더 이상 외국 어선에 일자리를 얻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리가 함께 있었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프리의 사촌이 익명으로 말했다. 세프리, 아리와 함께 센트럴 자바에 있는 승무원 에이전시에 등록한 그는 결국 일자리를 얻지 않았다. “그들이 먼저 출항했고 나는 두 번째로 배치가 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갈 생각이 없다.”
가족은 세프리의 죽음에 대해 기관으로부터 약간의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리카는 보상은 동생을 다시 데려올 수는 없다며, “가능하면 세프리만이 희생자가 되게 해라. 또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놔두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Category: 언론에 나온 어필, 연대활동, 인신매매2021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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