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선생님이 설명하시는 동학혁명에 소농이 ‘동원'된 방식이 흥미롭다. 내 생각에 핵심은 평민지식인 (그람시가 말하는 유기적인 지식인 혹은 보다 전통적인 의미로 좋은 향신, 선비)이 소농을 혁명에 참여하도록 고무한 것이다. 소농이 죽음을 불사하고 초월적인 이상을 추구할 때, 외부에서 뚝떨어진 평등논리 (서학)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신뢰하는, 생활을 공유하는, 지역의 지식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를 받아들였고 내재적 각성(?)이 일어나서 행동에 참여하게 됐다.
인터넷을 통해 아이돌 대중문화와 팬덤정치의 우상에 쉽게 영향을 받는 시대에, 만일 주위에 내 삶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평민지식인들이 있다면 좋은 참조점이 될 것이다. 물론 자신이 독립적으로 사고할 능력을 갖춘다면, 더 좋은 일이다 (스스로 평민지식인이 되는 것).
그런데 내 질문은, 만일 이 ‘평민지식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삿된 믿음을 전파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이다? 나를 챙겨주고 보살피고 좋은 말을 해주는 내 주위의 누군가가 사이비 종교 (신천지)라든가, 사이비 종교와 구분이 안가는 다단계 마케팅이라든가 이런 믿음을 전파하고 있다면 대중은 어떻게 이를 판별할 수 있을까?
(‘방법으로서의 자기’)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에
교조신원 운동에 가장 앞장 선 것은 전라도를 비롯한 남부지방의 교도들이었어요. 평민지식인과 소농들이었지요.
그들 가운데서도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전봉준은 이미 서울에 올라와서 대원군의 집안에 문객이 되어 국내 정세를 관찰했어요. 적어도 한두 해를 서울에서 보냈던 것입니다.
그는 동학농민운동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장차 많은 소농을 이끌고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의 질서를 다시 짜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으니까요. 1880년대 후반부터 전봉준이 그런 계획을 차츰 구체화했다고 생각해요. 그때부터 전봉준은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단 말예요.
전봉준의 평소 직업은 ‘학구(學究)’ 곧 서당 훈장님이었어요. 떠돌이 선생이었으니, 요즘 말로 ‘비정규직 교사’였어요. 이 고을에 가도 제자가 있었고, 저 고을에 가도 제자가 있었어요. 전라북도 일원에 광범위한 인맥이 형성되어 있었고, 서울에도 대원군을 비롯해 적잖은 인사들과 안면을 튼 상태였어요.
전봉준만 그랬던 것은 아니란 이야기를 앞에서도 했어요. 그의 동료 김개남(金開南, 1853~1894)이나 손화중(孫華仲, 1861~1895)도 비슷한 처지였어요. 그들의 신분은 양반이었으나, 특권 엘리트라고 보기는 어려웠어요.
큰 틀에서 보면 도리어 평민지식인이라고 해야 옳았어요. 그들의 먼 조상은 혁혁한 양반이었을지라도 그들의 의식주는 평민과 다름없었어요. 게다가 그들은 소농 중심의 평민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 싸웠으니 말입니다.
동학농민이 짧은 기간 동안에 조직력을 폭발적으로 키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소농이 중심이었던 농촌사회의 특징을 활용한 때문이지요. 앞에서 말했듯, 소농은 어디서나 두레와 마을조직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그 조직과 동학이 일치되기만 하면 순식간에 조직력이 증폭되었어요. 가령 1894년 9월에 전봉준이, “이제 사생결단을 할 때가 되었네. 어서 서울로 올라가세!”라고 말했다고 칩시다. 그때 그 많은 소농이 왜 따라나섰을까를 생각해보자고요. 저는 두 가지 지점을 생각봅니다.
하나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작동방식이지요. ‘봉준이 형이 함께 가자는데 어떻게 안 갈 수 있느냐.’ 그런 것이었어요. 이른바 봉준이 형 밑에는 영수 형도 있고 태수 형도 있고 갑수형도 다 있었어요. 그들이 마을 조직의 중심이라면 그들이 움직일 적에 그들과 친형제처럼 굳게 결속돼 있던 마을사람들도 한꺼번에 움직인다는 것이죠. 영수 형이 가자는데 안 갈 수 있느냐는 소농사회의 끈끈한 연대와 협동의 관계가 있었어요. 그것이 죽음의 공포도 넘어서게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요.
이보다 더 중요한 점도 있었어요. 무엇이겠어요? 그들은 사람이 산다는 것이 어떤 점에서 의미가 있는가를 물었다고 봐요.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인생관 또는 세계관의 문제였어요. 이런 관점이 하루 이틀에 정해질 수야 없지요. 그런데 동학농민들에게는 가치관의 공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제 생각에는 그들이 동학에 입도한 뒤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품게 되었다고 봐요.
‘설사 우리가 이 번 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내 아들과 손자에게 새 세상을 열어주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망설일 이유가 무엇인가?’
현실적인 문제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지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에게는 오늘을 지배하는 무거운 세상의 공기가 있거든요. 현실을 지배하는 완강한 틀이 있단 말이에요. 이 무서운 존재를 나약한 한 인간 또는 보잘것없이 미약한 일개 집단이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적인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법이지요. 그들로서는 현실의 무게를 짊어지고 끙끙대며 순응하는 길밖에 다른 수가 없어요.
그러나 사람이 달라지면 삶의 방식도 바뀌어요. 동학농민은 현실을 괴로워했으나 그들은 이미 현실을 벗어나 있었어요.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려는 강한 신념이 있었던 거죠.
‘유무상자(有無相資,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에게 의지함)’의 새로운 경제공동체랄까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어요. 그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현실의 승패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그들은 이미 직접 또는 간접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어요. 1860년대부터 수많은 민란의 파도가 수십 번을 반복한 끝에, 1894년에 이르러 역사의 흐름을 바꿀만한 쓰나미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만약에 이 흐름으로 단번에 자신들의 소망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그 봇물의 함성을 터뜨려야만 머지않은 장래에 ‘개벽’이 현실로 등장할 수 있다는 그들은 굳게 믿었던 겁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에 잠시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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