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대한 종교적 관점의 리뷰 (feat 긴 글)
0. “잘못했습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다 보았다. 마지막 회가 끝나고 형언하기 힘든 여러 감정이 올라왔다. 막 득도를 한 부처가 해탈의 경지를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 전승을 망설였듯, 이 감정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지 머뭇거려진다. 그러나 성인의 깨달음과 달리 속인이 느낀 감정의 파고는 언어로 표현해볼 때 비로소 정리가 되는 측면이 있으니, 우선 큰소리로 (드라마 속 동훈의 부하직원이 그랬듯) “잘못했습니다!”를 10번 외치고 시작해볼까.
1. 불교와 기독교 세계관이 뒤엉킨 드라마
나는 사실 이 드라마를 보며 페이스북에 두 번 툴툴거린 적이 있다(재미없다 1번, 불편하다 1번).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단견이었다. (이 글은 사실 그 글 빚을 갚기 위한 것이다.) 드라마 속 삼형제의 막내 기훈(송새벽 분)이 만들었을 법한 영화 제목 <잘 알지도 못하면서>처럼, 우리는 잘 알지 못하면서 오해를 하고, 그 오해를 말로 전해 다시 구업口業을 짓는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 중 제일을 무지無知, 즉 치심癡心이라 했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니, 수상한 제목과 관련한 숱한 논란들에 가려진 이 드라마의 진가는 사실 종교적인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드라마가 인생드라마라며 수회를 거듭 보았다는 간증을 인터넷에서 많이 보았다. 이 간증의 행렬에는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구절로 유명한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도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은 과연 ‘그런’ 유의 작품이다.
이 드라마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겠다거나 500번을 환생해서 나이가 3만 살이라는 둥 윤회에 관한 통속적 관념에 기반한 대사가 반복되고, 아예 절과 스님이 직접 배경과 인물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대놓고 불교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지至, 편안할 안安 자를 쓴다는 ‘지안’(아이유 분)이라는 주인공 이름 자체도 사실 불교 깨달음의 궁극 경지인 ‘해탈解脫’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드라마는 500번이나 환생할 정도로 번뇌가 찐득한 지안이 마침내 ‘지안至安에’ 이르는 노정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또한 어쩌면 잘 알지 못한 단견일지 모른다.
이 작품의 극본을 쓴 박해영 작가의 종교는 기독교라고 한다. 그래서 작가의 종교가 불교가 아니라 기독교인 게 특이하다는 글이 종종 보이던데, 나는 작가의 종교가 기독교인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작품에는 비단 불교뿐 아니라 기독교적 세계관도 농후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2. 저 위에서 숨소리마저 다 듣고 있다
이 드라마는 사무실에 나타난 벌레를 요란스레 무서워하는 직원들과, 벌레를 잡아 살리려는 박동훈 부장(이선균 분), 그리고 벌레를 그냥 꾹 눌러 죽이는 파견직원 지안의 대비를 그린 장면으로 시작된다. 줄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선불교의 화두 같은 첫 장면이다.
이 장면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벌레가 불교의 번뇌煩惱를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평이한 해석일 게다. (심지어 '벌레'와 '번뇌'는 발음도 비슷하다.) 지안은 결국 번뇌를 꺼트리고 ‘지안’에 이를 것이니. 범인들은 번뇌를 그저 요란스럽게 두려워하니. 동훈은 번뇌를 자신의 두 손으로 그저 떠안으려 했으니.
또 단순하게는 ‘지안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이야말로 ‘지안’이 곧 기독교적 세계관에서의 신神이 될 것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보였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다른 존재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을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만이 생명을 거둬도 죄가 되지 않는다. (지안도 사람을 죽였지만 정당방위로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 존재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신이다.
신은 모든 걸 알고 있는 존재다. 도준영 대표(김영민 분)와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지안은 동훈의 일상을 낱낱이 내려다본다. 동훈을 회사에서 잘리게 만드는 것이 지안의 임무. 그러나 동훈을 죽이기 위한 지안의 도청은, 점점 동훈을 살리는 쪽으로 복무한다. 지안이 동훈의 이야기를, 심지어 숨소리(그리스신화의 프시케psyche의 어원은 '숨'이다. 프시케는 영혼을 상징한다)까지 매일 밤 들으며 그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일상을 내려다보고, 그 사람을 알게 되어,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은 흥미롭다.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 - 유홍준) 알면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신은 그 정의상 다 아는 존재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을 언제나 사랑한다. 한 인간의 숨소리마저 놓치지 않고 다 들으며, 그를 한없이 염려하고 순간순간 위기에서 구출해주는 자. 그를 괴롭게 하는 존재의 악행을 멈추게 하고,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자. 이는 정확하게 전지전능하며 상벌을 내리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신과 일치한다. 그래서 동훈에게 지안은 구원이다.
3. 정말로 착해지려면 바르게 알아야 한다
한편 동훈은 지안을 ‘지안’으로 인도하는 스승 같은 존재다. 동양의 전통에서는 스승이 제자를 먼저 알아보고 선택하기도 한다. 지안을 회사에 들인 이가 바로 동훈이다. 그리고 회사에서 유일하게 지안을 안쓰럽게 여기는 존재도 동훈이다. 밥과 술을 사주는 이 역시 동훈뿐이다.
홀로 장애가 있는 할머니를 모시는 지안에게 동훈은 “착하다”라고 한다. 동훈의 모든 말을 도청하는 지안은 홀로 남아 이 말을 반복해서 듣는다. “착하다. 착하다.” 이는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법문을 시작하기 전 수보리 존자에게 하신 말씀 “착하고 착하도다.”(산스크리트어로는 ‘사두 사두’)를 연상시킨다.
법문은 시작되었다. 동훈의 “착하다”는 한 마디는 지안에게 가 그대로 질문이 된다. ‘내가 “착하다”는 말을 들어도 될 사람인가요?’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인의 사랑이 자기에게 원인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는 자부심으로 기뻐한다. 그러나 타인의 사랑에 대해 자신이 어떤 원인을 제공한 바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는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 지안의 동훈을 향한 열병은 결국 자신이 정말로 착한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끝날 수 있다. 그래서 지안은 동훈을 계속 사랑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지안’에 이르러야 한다. 스승이 진정으로 바라는 게 무얼까?
그들은 서로를 차츰 알게 된다(“걔가 날 알아. 나도 걜 알 것 같고” - 동훈의 대사). 단 지안이 동훈을 도청으로 알게 되었다면, 동훈은 따뜻한 마음씨로 지안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 유홍준) 자신에게 네 번 이상 잘 해주는 사람은 없다고 믿는 지안에게, 자신의 치부를 들킨 지안에게 동훈은 “그 사람을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라고 안심시킨다.
서로를 알아가며 마음 쓰고 있지만 둘에게 세상은 여전히 고苦다(일체개고一切皆苦). 동훈은 ‘모른 척 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고 지안에게 고통에서 벗어나는 한 방법을 일러준다. 이는 방편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불교의 공空 사상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모른 척하는 것은 바른 앎이 아니다. 따라서 이 또한 근본적으로는 무지無知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제행무상諸行無常). 그러나 동훈은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못 견디겠다”고 고통스러워한다. 나라고 할 만한 자아의 실체는 없다(제법무아諸法無我) 그러나 동훈은 “나를 지탱하는 기둥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내 진정한 내력이 아닌 것 같다”며 힘들어한다. 그의 ‘모른 척하기’ 신공은 결국 자아를 지탱하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진정한 내력”도 진정한 공空도 아니다.
아내의 불륜과 함께 지안이 자신을 도청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모두 알게 된 동훈은 결국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현실을 모른 척 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한다. 지안에게 경찰에 가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라고 설득한다. 그래야 정말로 편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뒤의 일은 담백한 해피엔딩쯤으로 보인다. 있는 그대로를 바르게 알면, 편안함에 이를 수 있다. 스승과 제자 모두 그 정도면, 그대로 편안함에 이른 것으로 보였다.
4. 모든 인연은 귀하고 진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동훈과 지안의 인연은 나름의 역할을 다 한 것으로 보인다. 동훈은 지안이 자신을 살렸다고 했고, 지안은 아저씰 만나고 처음으로 살아봤다고 했다. 한 고비를 넘긴 그들은 이제 활짝 웃으며 악수하는 사이가 되었다. 깨달음 뒤에도 일상은 남는 것. 하지만 그 일상은 이전과 같은 듯 같지 않을 것이다. (산은 다시 산이고, 물은 다시 물이다.)
막내 기훈과 여배우 유라(권나라 분)의 인연도 그와 같다. 유라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기훈은 이제 그녀의 토를 치우는 신세가 되었다. (‘내가 네가 싼 똥 치워야 되냐’는 세속의 말처럼, 토를 치운다는 설정이 암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유라는 기훈을 다시 만나고 기훈에게서 얻은 병을 극복하고 재기에 성공한다. 기훈 역시 마지막 신scene에서 결국 시나리오를 다시 쓰기 위해 펜을 잡는다. 그 역시 유라를 만나 치유되고 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인연도 그것대로 나름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둘은 굳이 다시 만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다시 만나도 토를 치우거나 악을 쓰지 않아도 되지 싶다.
지안을 지독하게 괴롭히던 광일(장기용 분)은 어떤가. 미칠 광狂자가 연상되는 이름의 그도 사실은 “착했던 애”였다. 그는 지안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이후 달라졌다. 하지만 그런 광일도 마지막 순간에 지안을 살리는 선택을 한다. 그 역시 이제는 ‘지안’에 이르지 않았을까 어렵지 않게 추측해본다. (광일은 스승의 무고로 미쳐버려 무시무시한 살인자가 되었다가 부처를 만나 깨달음을 얻었다는 초기경전 속 앙굴리말라를 떠올리게 한다.)
신은, 그리고 스승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옆에 있는 이가 바로 지금 여기서 내가 풀어야 할 문제를 던져주는 신이요, 스승이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해본다.
5. 개인적인 이야기
자기연민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얘기를 해볼까. 7살 때 한글을 깨치고 내 눈으로 처음 읽은 책이 하필 <서유기>였다. 그 책에는 손오공이 다른 사람의 장례식장에 가서 펑펑 우는 장면이 나온다. 상주가 대성통곡하는 손오공에게 자신은 괜찮으니 그만 울라고 달랜다. 그러자 손오공이 하는 말이 걸작이다. “나는 당신 아버지의 죽음이 슬퍼서 우는 게 아니오. 나도 언젠가 죽을 거란 사실이 슬퍼서 우는 거요.”
이 장면은 나에게 너무나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아버지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죽으면 어떻게 되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불교와는 아무 상관없고 아들이 판검사가 되기만을 바랐던 세속적 성향의 아버지의 대답이 또 걸작이었다. “네가 태어나기 전을 생각해봐. 죽음은 그런 거야.”
그 이후 나는 제대로 살 수 없었다. 7살의 꼬마도 17살의 청소년도 27살의 청년도 37살의 장년도 모두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잊고 싶었지만 잊으려 노력하면 할수록 더 강하게 올라왔다. 까먹을 만하면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지구종말예언이니 ‘휴거’니 하는 세기말 종말론에 관한 정보들이 문제집이나 팜플렛을 타고 내 머리에 도달해 차례로 불을 지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통곡 중이다.
사실 내 아버지가 했던 저 말은 불교의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부모에게 태어나기 전 참나는 무엇인가?’)이라는 화두와 거의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대학 때 불교수업을 듣다 저 사실을 알게 되고 어찌나 놀랐던지. 아버지는 저 말을 알지도 못하고 그 말을 본인이 하셨단 걸 기억도 못하신다. 하지만 나는 그 분이 기억도 못하시는 저 화두에 7살 때 걸려 중년이 된 지금까지 옴짝달싹 못한 채 이렇게 오열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엉뚱하게도 <나의 아저씨>에서 큰 형 상훈(박호산 분)의 ‘나이 오십이 먹도록 먹고 싸고만 했지 이룬 게 없다’는 쓰잘머리 없던 대사가 마음에 걸렸다. 나는 어릴 때 인간이 천수를 누리면 그게 80살 정도라는 말을 아버지께 듣고 나도 그쯤 살겠거니 막연히 생각해왔는데, 그래선지 내 나이가 40살이 되었을 때는 상당한 조바심이 느껴졌다. 내 생의 절반이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갔는데, 아직도 죽음의 문제를 풀지 못했으니 어떡하나.
그래서 <나의 아저씨> 속 겸덕스님(박해준 분)의 ‘출가는 50살이 되기 전까지만 할 수 있다’는 말이 솔깃하게도 들렸다. 하지만 정희(오나라 분)의 “너 거기(절)서 절대 못 깨달아. 내려와!”라는 일갈이 보다 타당해보여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마지막회의 지안의 할머니 장례식 장면을 보면서는 나도 모르게 울음이 펑펑 쏟아졌다. 물론 지안의 할머니의 죽음이 슬퍼서 운 것은 아니었다.
올해는 불교에서 깨달음을 상징한다는 흰 소의 해라고 한다. 새해 초부터 이런 상서로운 드라마를 보고 크게 감명 받다니, 올해는 분명 한 소식 들을 수 있으려나ㅋㅋㅋ; 저 위에서 신이 내가 하는 말 내 숨소리 하나하나 낱낱이 다 듣고 있음을 잊지 말고, 다른 이들이 내게 하는 말을 날 살리러 온 스승의 음성이라 여겨 귀하게 듣고, 그동안 지은 과보를 하나하나 있는 그대로 담담히 다 받아내면, 무명無明에서 벗어나 편안함에 이르게 될까. 그 날까지, 파이팅!
27Min Fred and 2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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