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정치 권력, 그 끊을수 없는 로맨스 - NEWS M
교회와 정치 권력, 그 끊을수 없는 로맨스
Michael Oh 기자
승인 2022.02.24
"김장환 목사를 이제 놓아드리자" 칼럼 저자 설갑수 인터뷰
[뉴스M=마이클 오 기자] 윤석열 대선후보의 배우자 김건희 씨가 잇따라 종교계 인사를 만나는 행보로 이목을 끌고 있다. 식을 줄 모르는 무속 논란을 잠재우고, 대선 후보 배우자로서 역할을 시작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돌고 있다.
김건희 씨가 만난 종교계 인사 중에 김장환 목사와의 접견이 눈에 띈다. 비교적 짧은 기간 이루어진 4차례 만남은 주변의 이목을 더욱 집중시키고 있다.
관심의 초점은 김건희 씨 뿐만 아니라 김장환 목사에게도 쏠린다. 역대 권위주의 정권에서의 역할과 그의 성공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의혹 때문이다.
김장환 목사와 김건희 (오마이뉴스)
2년 전 인터넷 매체 [평화나무]에 기고된 칼럼 “김장환 목사를 이제 놓아드리자"가 대표적인 예다. 5.18 민주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영문판으로 번역하여 광주 항쟁의 실상을 세계 각지에 알렸던 번역가 설갑수 씨가 제기한 의혹과 비판이다.
검찰 권력을 등에 없고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부활을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불길한 우려가 사라지지 않는 오늘날, 다시 등장한 김장환 목사와 김건희 씨의 만남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설갑수 씨에게 물어보았다.
간단한 근황 부탁합니다.
모처럼 평온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별일 없이 삽니다. 다만 먹고사니즘에 치여 몇 가지 프로젝트가 지연되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2020년 평화나무를 통해 소개된 칼럼 “김장환 목사를 이제 놓아드리자”가 상당한 반향을 만들었다. 당시 상황과 문제의식을 간단히 소개 부탁합니다.
그 글은 반향을 일으켰다는 것은 많은 과장이고요.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하는 글이 있는데, 저 칼럼이 그런 글이었습니다. 글 쓸 당시 김장환 목사가 12-12 축하연에 전두환 앞에 앉아 있어서 공분을 낳고 있었습니다. 2018년에는 내가 쓴 518 관련 글을 문제 삼아 극동방송이 나를 고소하려 했는데, 그때 대응하려고 준비한 자료 일부를 사용해서 글을 썼습니다.
"미국인 목사 헌틀리의 말인 즉 슨, 그가 촬영한 광주 항쟁 희생자 사진들을 한국인 목사 김장환에게 보여주며 5.18의 참상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이런 사실을 한국인 김 목사가 전두환 측에 말했다는 것이다. 내친김에 더 조사해 봤더니, 이번에는 김 목사의 자서전에서 더욱 놀라운 대목을 발견했다. 김 목사가 5.18 당시 전두환의 부탁을 받고 광주에 가서, 병원 네 곳을 둘러보고, 자신이 설립한 선교단체인 YFC 성원들도 만나 광주 상황을 살펴봤다는 것이다." (칼럼 "김장환 목사를 이제 놓아드리자" 중에서)
구체적 계획은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김장환 목사, also known as Billy Kim 평전을 쓰고 싶습니다. 파도 파도 계속 뭔가 나오는 삶을 사셨더군요.
최근 김건희 씨가 김장환 목사를 4차례 연이어 만났다고 한다. 앞선 칼럼에 나온 우려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 하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
김건희가 김장환 목사를 만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김장환 목사는 그런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목회자라기보다, 일종의 거간꾼입니다. 미국과 인맥 그리고 한국 보수계와 보수 교계의 인너서클에 권력 욕망이 있는 사람들과 연결해주고, 정치 경제적 영향권을 비싼 거간비로 받는 사람. 일종의 중계업자입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 번역자 설갑수 (평화나무)
칼럼에서 김장환 목사를 ‘놓아주어’야 하는 이유는 결국 정치와 종교의 거래 관계 때문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무속 논란도 결국 같은 맥락일 것 같구요.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정치권에 가까이 있는 한국 대형교회 목사들의 행보를 평가한다면?
김장환을 놓아주자는 의미는 그런 중간업자 거치지 말고, 한미 관계 좀 잘 해보자는 의미였습니다. 김장환 같은 사람 거치지 않고, 미국 조야와 직통할 수 있었던 대통령은 디제이가 유일할 겁니다. 망명 시절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부단히 미국 조야, 보수 진보 모두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인맥을 쌓았기 때문이죠. 모르는 사람들이 디제이의 영어를 비웃던데, 알고 있는 단어와 문장을 모조리 사용하는 가용성 높은 영어를 구사했어요. 독학이지만 독서로 다져진 영어라 문법도 거의 완벽했는데 그런 화술과 특유의 친화력과 지식으로 미국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마음을 얻었던 거죠. 원래 나는 디제이를 싫어했는데, 볼수록 다시 보이는 인물입니다.
"김목사는 한미 관계의 중계인이다. 어쩌면 중간상인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수도 있겠다. 거래선 하나가 절매하면, 비즈니스를 접을 수 밖에 없는 중간상인 말이다. 김목사 교회의 장로 하나가 총리 하마평에 올랐다는 얼마전 소식은 김목사의 정치적 청구서처럼 내게는 느껴졌다. 그 하마평이 미국의 깊은 뜻인지, 김목사의 심오한 의도인지 고민하다가, 모멸감에 곧 화가 났다." (칼럼 "김장환 목사를 이제 놓아드리자" 중에서)
그 후 소위 진보정권 모두 김장환을 통해 미국에 접근했어요.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편하고 빠른 길이라 김장환 을 청와대에 불러다가 밥 먹이며 부탁하는 거죠. 결국 글에서 설명했지만, 김장환 사업 기간만 연장해 주는 꼴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찾아보면 경로가 왜 없겠어요. 정권 초 급한 마음을 일말 이해하나, 김장환은 한미관계의 아편 같은 사람입니다. 맞으면 일단 마음은 편해지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진통제 같은 존재죠.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차기 대선에 누가 승리하더라도 정권 초 대미 관계에 관한 한 김장환의 영향력은 계속될 듯 하고, 이제 그의 아들이 세습할 것도 같습니다. 한심스런 일이죠.
대형교회 목사들에게 대해 별로 할 말이 없고요. 무슨 말이라도 별로 소용이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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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칼럼은 필자의 허락을 받고 다시 게재한다.)
“김장환 목사를 이제 놓아드리자”
5.18 광주 항쟁을 읽다 보면, 많은 목사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 목사 대부분은 이름조차 알 길이 없다. 그래서 가끔 궁금해진다. 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 작전 직전, 도청에 남아있는 여성 노동자들을 자신의 교회로 피신 시켰다는 동명동의 교회 목사는 누구였고, 그리고 26일 아침 시내 중심부까지 밀고 들어온 탱크를 몸으로 막아 돌려보낸 목사들은 어떤 이들이었는지. 그들의 당시 심정이 어땠고, 그 후 세상을 어떻게 살아 냈는지 말이다.
찾고 싶은 목사, 알려진 목사, 찾아낸 목사
세상에 제법 알려진 목사들도 있다. 당시 광주에 살면서 호남지역 침례교회를 책임졌던 아놀드 피터슨(Arnold Peterson)과 광주 기독병원 원목인 장로교 목사 베츠 헌틀리(Betts Huntley) 두 사람은 지금은 비록 소천 했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5.18의 사진과 기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나는 두 사람 생전에 직접 만난 적은 없다. 그러나 헌틀리 목사와는 그가 소천하기 직전 6개월 정도 수많은 이메일을 통해 난생처음으로 영적 만남이라고 할 만 할 교류를 했다. 또한, 헌틀리와 피터슨 사모와 여전히 교류하고 있는 것을 매우 행복하게 생각한다.
광주 항쟁과 관련, 이렇듯 알려진 목사도, 찾고 싶은 목사도 있지만, 우연히 찾은 목사도 한 사람 있다.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다. 나는 이 유명한 목사의 이름을 헌틀리 목사의 기록을 갈무리하다 조우했다. 헌틀리 목사가 그의 회고록에서 한 김장환 목사에 관한 언급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미국인 목사 헌틀리의 말인 즉 슨, 그가 촬영한 광주 항쟁 희생자 사진들을 한국인 목사 김장환에게 보여주며 5.18의 참상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이런 사실을 한국인 김 목사가 전두환 측에 말했다는 것이다. 내친김에 더 조사해 봤더니, 이번에는 김 목사의 자서전에서 더욱 놀라운 대목을 발견했다. 김 목사가 5.18 당시 전두환의 부탁을 받고 광주에 가서, 병원 네 곳을 둘러보고, 자신이 설립한 선교단체인 YFC 성원들도 만나 광주 상황을 살펴봤다는 것이다.
5.18때 전두환 심부름 한 일은 자뻑하다가 자복하는 셈인데, 김 목사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고 있디. 헌틀리 목사 회고록 내용에 대해서는 완강히 부정한다.
여의도 광장의 목사들
이렇게 김 목사는 5.18에서도 만날 수 있고, 12/12사태 40주년 오찬 모임에서도 볼 수 있다. 중년층 이상 한국인에게 김 목사의 존재가 각인된 첫 계기는 여의도광장에 모인 100만 청중 앞에 미국의 보수적 복음주의자 목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의 설교를 완벽하게 순차 통역하던 39세 젊은 목사 김장환의 모습이었다.
1973년 5월 30일에서 6월 3일 사이의 일이었다. 사실상 모든 종류의 옥외 집회가 금지된 엄혹한 유신 시절, 박정희는 연인원 300만이 하루 인원 1백십만이 모였던 5일간의 대중 집회를 허가하는 것은 물론, 버스 노선도 늘려주고, 통금시간도 신축성 있게 적용하는 듯 당시로서는 파격적 편의를 제공했다. 당시에는 관변신문에 불과했던 경향신문을 사설까지 실어 빌리 그레이엄을 환영했고, MBC는 그 해 성탄 특집으로 그레이엄의 여의도 설교를 3부작으로 편집, 방영했다.
김 목사는 단순히 영어 잘하는 통역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대정부 창구였다. 2012년 빌리 그레이엄 기념 도서관의 김 목사 인터뷰 일부는 조금 길더라도 인용해 볼만 하다. “나는 한국 정부 안에 훌륭한 선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누구인지 잘 몰랐다. 구할 수 있는 [그레이엄 목사에 관한] 신문 잡지 기사와 서적을 모두 구해 정부 관리를 통해 박정희에게 전달했다. 정부는 그레이엄 목사 방문이 좋은 일이라는 결정을 했다.”
그레이엄 목사의 집회는 박정권에게는 대단히 좋은 일이었다. 그레이엄의 보수적 신앙과 반공 냉전 주의적 설교는 유신정권의 이해와 완전히 부합했다. 사회적 불평등을 외면한 채, 누구라도 예수 믿고 “노오력”하면 부자 될 수 있고, 냉전을 정치체제의 대결이 아닌 기독교와 무신론 사이의 사생결단으로 보는 미국 보수복음주의가 이렇게 직수입되어, 서울 한복판에서 5일간의 로드쇼를 했다. 이 로드쑈는 그레이엄 목사가 헬리콥터를 타고 여의도 광장을 순회하자, 광장을 메운 수십만의 한국인이 그에게 환호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모두 유신 정권의 적극적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여의도 집회는 한국 교회사와 정치사에서 재조명해야 할 분수령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보수 기독교의 정치적 가치를 박정희는 적극 활용하게 됐고, 보수 교단은 유신체제와 유착하고, 미국 복음주의의 가치를 좇아 공격적 전도에 의한 성장에 치중하게 된다. 위에 인용된 인터뷰에서 김 목사는 말한다. “1973년 이전에는 한국에는 대형교회(megachurch)가 없었다…. [여의도 집회 이후] 사람들이 복음주의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든 문제가 1973년에 기원하지 않았겠지만, 적잖은 적폐들은 이때부터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여의도 집회는 빌리 그레이엄과 김 목사 개인에게도 빛나는 순간이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공식 전기는 여의도 집회가 그가 이끈 가장 큰 집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집회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김 목사는 한국의 교단과 정계에서 위상을 굳혔고, 미국의 보수 교단의 주목을 받게 됐다. 그가 자랑하는 한국과 미국의 정계와 교계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인맥은 이렇게 엮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지미 카터와 김 목사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김 목사의 영향력은 한미관계가 소원해진 지미 카터 (Jimmy Carter)행정부 시절 더욱 커졌다. 한국의 대중 인식과는 달리, 카터는 편협한 냉전주의자였다. 그의 주한 미군 철수 공약은 당시 중국을 끌어들여 소련을 봉쇄하려는 냉전 정책의 소산이었다. 그의 인권외교는 소련을 압박하는 수단이었을 뿐, 아시아와 중남미의 친미 독재국가에 적용한 적은 없다. 이 모순을 광주 시민들은 80년 5월, 피로써 확인했다.
카터는 박정희를 개인적으로 얕잡아 보고, 정치적으로 경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박정희는 미국의 끊임없는 경제 군사적 후원에도 불구하고, 미국식 민주주의의 실현하기는 커녕 폭력적 탄압이나 남발하여 소란이나 일으키고, 자력 국방력도 갖추려 못하고 주한미군 철수에 불안해하는 천덕꾸러기 였다.
카터의 멸시의 배경에는 독실한 남부침례교인으로서 그가 가진 기독교 근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1979년 6월 30일-7월 2일 카터의 방한은 몇 개월에 걸친 어려운 조율 끝에 이뤄줬다. 7월 1일 밤, 카터는 종교계 인사들과 만났다고 보도됐지만, 말이 종교계 인사들이지 신구교계 인사들만 초청된 자리였다. 당시 주한 대사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 모임에서 김 목사가 카터와의 대화를 독차지하자(monopolize), 불쾌해진 김수환 추기경이 중간에 자리를 떴다고 한다.
79년 8월 5일 AP 통신은 김 목사의 제안으로 카터가 박정희를 전도하려고 했다고 보도했다. 카터는 박정희에게 김 목사를 만나 침례교 교리를 들어보라고 제안했고, 박정희는 김 목사를 안다고 하면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고 카터는 그가 다니는 워싱턴 퍼스트 침례교회에서 간증했다고 AP는 보도했다.
예수 안 믿어서 박정희가 독재한다고 믿는 듯 한 카터의 기독근본주의적 세계관은 조소와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으로서 이러한 편견을 중동이나 아시아에게 적용했다고 생각하면, 끔찍할 따름이다. 여하튼 김 목사는 한미관계의 질곡의 틈에서, 한 편은 카터 앞에서 박정희를 두둔하면서, 또 다른 한편은 박정희에게 자신과 카터의 관계를 과시하면서, 이렇게 스스로의 영향력을 무럭무럭 키워 나갔다.
김 목사의 간증
80년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는 시기는 김 목사에게는 일종의 팽창기와 안정기였을 터였다. 그는 전두환과 친밀한 사이였고,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노태우의 집권을 도왔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보수기독교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커져갔고. 그 뒷심으로 두 명의 장로 대통령이 집권했다. 한미 관계의 국면국면에서 김 목사는 막후 조정자로 서서히 그리고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김 목사의 미국 인맥을 그의 영향력의 원천으로 여긴다. 그것은 일면적 이해에 불과하다. 김 목사의 미국인맥은 그의 한국인맥으로 말미암아 넓혀졌고, 그의 한국인맥은 미국인맥 덕분에 높아졌다. 두 인맥이 상호 의존적이고 따라서 그의 영향력은 유동적이다.
실제로 김 목사는 미국 보수교단 내에 인맥을 넓히고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데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기적으로 극동방송의 어린이합창단과 함께 복음주의 교회와 대학을 순회하고 강연한다. 그의 강론 일부에서, 이중명 에머슨 퍼시픽 회장이나, 라정찬 네이처셀 회장이 기부자로 언급되는 것으로 봐서는 한국 기업과 개인들에게 돈을 받아,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나 대학 등에 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규모나 빈번도, 그리고 합법성 여부에 대해서는 공시된 정보가 없으니 확인하기 힘들다.
Kpop이 세계를 휩쓰는 세태에, 이런 행사장에 한복 곱게 차려입고 나온 극동 방송 어린이 합창단이<God Bless America>나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을 부르는 모습은 남사스럽지만, 김 목사가 행하는 연설의 내용은 더욱 당혹스럽다.
김 목사가 2010-2014년에 걸쳐 미국의 복음주의 대학들에서 한 연설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이 토씨 하나 거의 다르지 않고 똑같아 이상스럽다. 김 목사는 이 동일한 연설들을 간혹 간증이라고 칭하는데, 분위기 좀 띄우려고 농담도 곁들이곤 한다. 그런 농담 중 하나는 1950-6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악명높은 농담도 있다. 컬럼버스보다 먼저 중국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했는데, 세탁소 할 게 없어서 그냥 떠났다는 인종차별적 농담이 바로 그것이다. 2차대전 전후 아시아 이민자들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업이 손세탁에 의존한 노동집약적 세탁 사업이었다. 이를 비웃는 해묵은 이 농담을 21세기에 아시아인 목사가 버젓이 미국 대학과 교회에서 반복해서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차이나맨(China men)이라는 아시아인에 대한 인정주의적 멸칭을 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일반 미국 대학에서 그런 것을 농담이라고 말했다가는 연사는 야유 속에 쫓겨나고, 총장의 공식 사과나 심지어 사퇴로 비화될 문제이지만, 김 목사는 복음주의 청중들의 어색한 웃음 속에 인종차별적 농담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어색한 웃음은 김 목사의 영향력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인종주의적 속내의 반증일 것이다.
이제 그를 놓아주자
다시 꽉 막혀버린 4강 외교와 남북관계를 보고 있노라면,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안쓰러워지는 요즘이다. 개인적으로는 정권 초기에, (왜) 촛불혁명의 도덕적 정치적 자산을 외교적 자산으로 활용하지 못했는지 안타깝다. 민주투사로서 스스로의 경력을 외교에 적극 활용하여, 큰 성과를 거둔 김대중과 크게 대비된다.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와의 첫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데 김목사의 도움을 받았다는 소식에 나는 정말 실망했었다. 쉽고 빠른 길이였는지 모르지만, 옮은 방법은 결코 아니었다. 반기업정서로 충만한 나조차도 차라리 대기업의 도움을 받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미국의 비싼 로비회사를 고용하는게 옮은 길로 보였다.
김목사는 한미 관계의 중계인이다. 어쩌면 중간상인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수도 있겠다. 거래선 하나가 절매하면, 비즈니스를 접을 수 밖에 없는 중간상인 말이다. 김목사 교회의 장로 하나가 총리 하마평에 올랐다는 얼마전 소식은 김목사의 정치적 청구서처럼 내게는 느껴졌다. 그 하마평이 미국의 깊은 뜻인지, 김목사의 심오한 의도인지 고민하다가, 모멸감에 곧 화가 났다. 촛불정부가 김목사와 절매하고, 조금 어렵더라도 스스로의 정치 자산을 외교에 적극 투입하는 방법을 강구했다면, 느낄 필요가 없는 굴욕감이었다.
촛불 정부의 외교전략이 김목사의 정치사회적 이익과 어느 한 곳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제 박정희의 유신과 미국의 복음주의가 맺어 준 중계인과의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 이제 김목사를 놓아 줘야 한다.
(원문출처: https://www.logos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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