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6

Park Yuha 李昇燁선생의 문옥주 논문

(1) Facebook: Park Yuha 

 지난번에 잠깐 “위안부 문제 주류학계에서도 큰 의미를 갖게 될 논문”이 나왔다고 쓴 적이 있다. 그중 하나는 교토에 있는 불교대학에 계시는 李昇燁 선생의 논문이다. 이주일 후에 그 이승엽 선생을 모시고 줌 세미나를 연다.
위안부문제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위안부는 돈을 받았다, 돈을 벌었다”는 얘길 강조해 왔다. 그 대표격으로 늘 거론되던 인물이 문옥주 할머니다. 문할머니는 버마(먄마)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던 분. 1992년에 당시 돈으로 2만엔이 넘는 우편저금 반환소송을 일본 정부 상대로 제기해서 화제가 됐다.
그에 대해서 일본의 이른바 제1인자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버마의 인플레가 극심했기 때문에 많아 보일 뿐 실제로는 대단한 금액이 아니다”라는 말로 방어해 왔다. 그리고 그런 주장에 대한 반론은 내가 알기로 이 30년 동안 없었다.
중요한 건 돈을 받았는지 여부가 아니다. 위안부 생활이 고통스러운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사실 파악은 중요하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30년 혼란은, 그 부분을 대충 처리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른바 ‘양심’적 일본학자들, 그리고 이들과 연대해 온 한국인 학자와 운동가들의 “정설”에 대한 도전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오고 있어 기쁘다. 이번 모임은 그에 주목하는 제1탄.
물론,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안부문제를 제대로 알고 위안부 할머니들과 진정한 의미에서 마주 하기 위한 문제제기다.
慰安婦問題を否定する人たちは、早くから「慰安婦はお金をもらった、お金を稼いだ」との話を強調してきている。その代表格として取り上げられてきたのがムン・オクジュさんだった。ムンさんはビルマ(ミャンマー)で慰安婦生活をした方で、1992年、当時のお金で2万円を超える郵便貯金返還訴訟を日本政府相手に起こして話題にもなった。
それに対して,日本の第1人者と言われる吉見義明さんをはじめとする研究者たちは「ビルマのインフレーションが極端だったため、金額が大きいように見えるだけで、実際には大した金額ではない」との言葉で防御してきた。 そして、そのような主張に対する反論は、私が知る限りこの30年間なかった。
重要なのはお金を受け取ったかどうかではない。 慰安婦生活が苦痛な体験だったことは間違いないのだから。
それでも事実確認は必要だ。慰安婦問題をめぐる30年の混乱は、そこをおろそかにしてきたゆえのことと私は考えている.
いわゆる「良心」的日本の研究者たち、そしてその研究者たちと連帯してきた韓国人学者と運動家たちの“定説”に対する挑戦が、ここのところ同時多発的に出ている。今回の会はそのことに注目する第1弾の催しである。
もちろん、慰安婦問題を否定するための会ではない。慰安婦問題を正しく知ってはじめて、元慰安婦の方たちと本気で向き合えると考えての会である。
You, 崔明淑, 希修 and 28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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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昇燁
    엇 이렇게 대대적으로 광고를 해 주셔서 감사한 반면, 부담이 막 커지는 걸 느낍니다.
    변변찮은 이야기에 관심 가져 주시고, 발표할 기회를 주셔서 다시금 감사 말씀 올립니다. 온라인상이긴 합니다만, 다다음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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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k Yuha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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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동식
    1992년에 당시 돈으로 2만엔이 넘는 우편저금 반환소송을 일본 정부 상대로 제기해서 화제가 됐다. ---> 1992년 당시 기준으로 2만엔이라는 의미는 아니겠죠? 기준연도를 정확히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게 1992년 당시 기준으로는 어느 정도의 금액인지도 말씀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 Park Yuha
      주동식 물론 1940년대 기준입니다. 그 금액에 대한 관점이 인플레이션여부라 “어느 정도 금액”인지를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을 듯 합니다. 천엔이면 작은 집을 샀단 얘기도 있지만, 인플레이션으로 본토에서의 가치는 대충 2000 분의 1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 주동식
      박유하 무엇의 2천분의 1이라는 건가요? 그러니까 문옥주 씨가 받았다는 2만엔이 실제로는 10엔이었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저 10엔이라는 가치는 어디에 기준을 두고 판단해야 하는지... 기준점을 명확히 해야 하지 않나요?
    • Park Yuha
      주동식 40년대초에 30배정도이던 일본돈 가치가 패전무렵엔 버마에 비해 1800배로 올랐다는 것이고 그걸 거꾸로 대충 2000분의1이라고 썼습니다. 일본물가도 1.5배 올라서 실제로는 1200배.
      그래서 20엔정도 가치밖에 안 되었다는 게 기존 주류 연구자들 주장입니다. 여기에 한국어로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2-8 문옥주 할머니는 버마에서 부자가 되었다? | Fight for Justice 日本軍「慰安婦」―忘却への抵抗・未来の責任
      FIGHTFORJUSTICE.INFO
      2-8 문옥주 할머니는 버마에서 부자가 되었다? | Fight for Justice 日本軍「慰安婦」―忘却への抵抗・未来の責任
      2-8 문옥주 할머니는 버마에서 부자가 되었다? | Fight for Justice 日本軍「慰安婦」―忘却への抵抗・未来の責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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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동식
      박유하 링크를 읽어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네요. 하지만 선생님 글은 정말 개념 사용이 부정확한 것 같습니다. [일본물가가 패전무렵엔 버마에 비해 1800배로 올랐다는 것이고] 이 말은 일본의 엔화 가치가 버마에서 통용되던 군표의 가치의 1800분의1이 됐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데, 실제 사실은 그것과 반대잖아요? 게다가 그 뒤의 문장에서는 또 [일본물가도 1.5배 올라서] 이렇게 쓰고 계시네요. 물가가 오른다는 표현의 의미가 이렇게 완전히 정반대로 쓰여서야 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인문학의 용어는 어차피 칼로 자르듯 그 의미의 외연과 내포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숫자의 경우는 그 내포하는 의미가 너무 분명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분명하게 표현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문옥주 씨가 자기 우편저금 반환소송을 했으면 소송 당시의 가치로 얼마를 내놓으라고 했을 텐데, 그렇게 문옥주 씨가 요구한 금액도 밝혀주시는 것이 학문적인 객관성의 담보에 필요하다고 봅니다.
    • 주동식
      박유하 1800분의 1을 2천분의 1이라 쓴 것은 페북 포스팅의 특성상 뭉뚱그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 건 문제삼지 않은 것이구요. 그런데 물가가 올랐다는 표현은 하나의 댓글에서 정반대의 의미로 쓰셔서 지적을 한 것입니다. 본인이 쓴 댓글을 다시 읽어보세요. 기분나쁘셨다면 죄송한데, 학자라면 정식 논문이 아니라도 최소한의 표현의 엄밀성은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걸 지적한 걸 갖고 비난이라고 오히려 비난을 하시네요. 비난과 비판도 구분 못하시는 분이 학문하신다고 그러시는 게 창피하지 않습니까?
    • Park Yuha
      주동식 별 교류도 없었던 관계인 분이 이런 문제에만 댓글을 달면서 ”학자라고 할 수 있나”라고 한 말이 비난인지 비판인지, 그게 온당한 것인지 여부는 제가 판단합니다. 특히 언어나 개념 사용에 관해서 선생님께 무슨 말을 들을 이유도 없고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별로 내키지 않는 질문이었지만 답변을 했고 더 잘 알 수 있도록 자세히 쓰여 있는 정보까지 제공했습니다. 이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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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rk Yuha
      주동식 “일본 돈 가치”를 물가라고 잘 못 썼네요. 개념 사용문제가 아니라 단어를 잘못 썼을 뿐입니다. 
    • SeHan Kim
      박유하 아이고 ㅠㅠ 선생님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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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rk Yuha
      김세한 원래도 그랬지만 양극단이 공격하는 구도. 이 분은 소녀상철거운동을 거드는 분인데 저한테 불만이 많은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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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식 (지은이)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1985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김근태 의장 당시의 ‘민주화운동청년연합’ 회원으로 활동했다. 『주간노동자신문』과 『제3의 길』 편집인을 거쳐 현재는 국민의힘 광주광역시 서구갑 당협위원장으로서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작 : <숨결이 혁명 될 때 : 박정희정신의 모든 것>,<호남과 친노> … 총 2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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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문옥주 할머니는 버마에서 부자가 되었다?

“위안부”는 돈을 벌었다는 식의 주장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버마의 위안소로 끌려간 문옥주 할머니가 2만엔 이상 저금했다는 사실이 거론됩니다. 2만 몇 천엔은 현재의 가치로 치자면 수 억엔에 해당한다고 떠들어대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전시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OWI)의 리포트 제49호(1944.10.1)와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SEATIC의 리포트(1944.11.30)에 위안부의 수입이 월 300엔에서 1500엔 정도였다고 쓰여 있는 점도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문옥주 할머니의 사례를 검증해 보겠습니다.

 

1 버마에 있었던 “위안부”가 번 돈

버마에서 얻은 수입이니까 그 화폐는 일본국내의 엔이 아니라 버마에서 유통되는 군표 또는 남방개발금고권(남발권)입니다. 남발권은 엄밀히 말하자면 군표는 아니지만 사실상 군표와 다를 바 없었고 일본인도 현지 사람들도 군표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マレー半島で使われていた軍票

 

2 위안부의 월수입이 1500엔 정도였다 하더라도 주인에게 월 750엔을 줘야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주인들은 식료 그 외 물품 대금으로 위안부들에게 많은 돈을 청구했기 때문에 그녀들은 생활난에 빠져 있었다”라고 합니다. 즉 위안부의 생활은 “큰” 수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편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업자들의 수탈이 원인의 하나였는데 이뿐만은 아니었습니다.

 

3 물가표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 12월을 100으로 할 경우 물가지수는 다음과 같이 변화했습니다.

 
도쿄랑군싱가폴바타비아
1944.61213,6354,4691,279
1945.8156185,64835,0003,197

(일본은행통계, 安藤良雄編『近代日本経済史要覧』、岩武照彦『南方軍政下の経済施策』下)

 

2-1-13c 本2 圧縮1942년 군표발행단계에서는 1루피(버마)=1달러(말라야)=1엔(국내)으로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즉 버마와 일본의 엔은 등가였습니다.

 그러나 OWI리포트에 쓰여 있는 “위안부”들이 체포된 것은 1944년 8월 10일인데 그 직전 시점(1944.6)의 인플레는 도쿄와 비교했을 때 버마는 약 30배였습니다.

 따라서 “위안부”들의 월수입이 1500엔이었다 하더라도 화폐가치는 도쿄에서는 1500엔÷30=50엔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하사관 급의 수입). 그러니까 1500엔의 수입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반은 주인에게 뺐기고 나머지 액수에서도 식료 등 명목으로 많은 돈이 청구되었으니 생활난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4. 문옥주 할머니의 경우

 문옥주 할머니가 2만엔 이상 저금했다고 하는데 그 내역을 보면 1945년 4월에 10,560엔, 1945년 5월에 10,000엔 등 대부분이 1945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패전 때 도쿄의 물가가 1.5배 상승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버마는 1800배, 즉 도쿄에 비해 1200배의 인플레였습니다. 그러니까 버마에서 모은 2만 몇 천엔은 그 1200분의 1, 즉 20엔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버마는 일본의 점령지 중에서도 가장 인플레가 심한 지역이었습니다.

2-1-13a グラフ

“대동아공영권”하의 물가지수(1941년 12월을 100으로 함)
(『日本金融史資料昭和編』제30권에서 작성)

 

5 物の値段

참고로 당시 현지에서의 물건의 가격을 예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버마에서 1945년 초 시점의 물건의 가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커피5루피
정장 한 벌10,000루피
셔츠 한 장300-400루피
비단 론지(버마의 스커트-역자주) 하나7,000-8,000루피

(太田常蔵『ビルマにおける日本軍政史の研究』吉川弘文館)

 

게다가 이 때부터 인플레는 더욱 심해졌으니 2만엔으로는 정장 한 벌도 못 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타(太田) 씨는 “20년〔1945년〕3월 만달레이 함락 후에는 군표의 가치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라고 합니다. 문옥주 할머니의 저금 대부분은 군표의 가치가 없어진 시기에 장교들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다른 지역의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단 인플레가 버마만큼 심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인플레는 상당히 심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점령했던 동남아시아 각지의 경제가 파괴되었다는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쌀 6kg1942.12    $51945.8     $750
손목시계1942.12  $851945.8  $10,000

  싱가폴의 물가(싱가폴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작성)

 

2-1-13b 本1 圧縮

(出典)小林英夫『日本軍政下のアジア』岩波新書、p179

한 장교의 회상에 따르면 스마트라에서는 장교의 한 달 월급으로 라면 한 그릇밖에 먹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즉 100엔 혹은 그 이상).
(小林英夫『日本軍政下のアジア』岩波新書, 1993、『証言集―日本占領下のインドネシア』竜渓書舎, 1991)

 

6 버마에서 저금한 돈은?

처음에는 점령지의 통화가 엔과 등가로 설정되었지만 동남아시아 등 인플레가 심해진 지역의 돈을 같은 가치의 엔으로 바꾸면 환전차액으로 큰 돈을 벌기 때문에 이를 규제하기 위해 1945년 2월 외자금고를 설립하여 동남아시아의 인플레가 일본 국내로 파급되지 않도록 조치되었습니다. 즉 버마에서 저금해서 액면으로는 많은 액수의 돈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일본의 엔으로 교환할 수 없었으며 게다가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군표도 남발권도 종이쪼가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7 따라서 버마에서의 사례를 들어 “위안부”는 돈을 벌었다, 문옥주 할머니는 현재의 가치로 치면 수 억엔이나 되는 큰 돈을 벌었다고 하는 것은 점령지의 경제상황을 무시한, 허무맹랑한 논의에 불과합니다. 점령지의 극심한 인플레는 조금만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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