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는 돈을 벌었다는 식의 주장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버마의 위안소로 끌려간 문옥주 할머니가 2만엔 이상 저금했다는 사실이 거론됩니다. 2만 몇 천엔은 현재의 가치로 치자면 수 억엔에 해당한다고 떠들어대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전시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OWI)의 리포트 제49호(1944.10.1)와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SEATIC의 리포트(1944.11.30)에 위안부의 수입이 월 300엔에서 1500엔 정도였다고 쓰여 있는 점도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문옥주 할머니의 사례를 검증해 보겠습니다.
1 버마에 있었던 “위안부”가 번 돈
버마에서 얻은 수입이니까 그 화폐는 일본국내의 엔이 아니라 버마에서 유통되는 군표 또는 남방개발금고권(남발권)입니다. 남발권은 엄밀히 말하자면 군표는 아니지만 사실상 군표와 다를 바 없었고 일본인도 현지 사람들도 군표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マレー半島で使われていた軍票
2 위안부의 월수입이 1500엔 정도였다 하더라도 주인에게 월 750엔을 줘야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주인들은 식료 그 외 물품 대금으로 위안부들에게 많은 돈을 청구했기 때문에 그녀들은 생활난에 빠져 있었다”라고 합니다. 즉 위안부의 생활은 “큰” 수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편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업자들의 수탈이 원인의 하나였는데 이뿐만은 아니었습니다.
3 물가표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 12월을 100으로 할 경우 물가지수는 다음과 같이 변화했습니다.
| 도쿄 | 랑군 | 싱가폴 | 바타비아 |
1944.6 | 121 | 3,635 | 4,469 | 1,279 |
1945.8 | 156 | 185,648 | 35,000 | 3,197 |
(일본은행통계, 安藤良雄編『近代日本経済史要覧』、岩武照彦『南方軍政下の経済施策』下)
1942년 군표발행단계에서는 1루피(버마)=1달러(말라야)=1엔(국내)으로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즉 버마와 일본의 엔은 등가였습니다.
그러나 OWI리포트에 쓰여 있는 “위안부”들이 체포된 것은 1944년 8월 10일인데 그 직전 시점(1944.6)의 인플레는 도쿄와 비교했을 때 버마는 약 30배였습니다.
따라서 “위안부”들의 월수입이 1500엔이었다 하더라도 화폐가치는 도쿄에서는 1500엔÷30=50엔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하사관 급의 수입). 그러니까 1500엔의 수입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반은 주인에게 뺐기고 나머지 액수에서도 식료 등 명목으로 많은 돈이 청구되었으니 생활난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4. 문옥주 할머니의 경우
문옥주 할머니가 2만엔 이상 저금했다고 하는데 그 내역을 보면 1945년 4월에 10,560엔, 1945년 5월에 10,000엔 등 대부분이 1945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패전 때 도쿄의 물가가 1.5배 상승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버마는 1800배, 즉 도쿄에 비해 1200배의 인플레였습니다. 그러니까 버마에서 모은 2만 몇 천엔은 그 1200분의 1, 즉 20엔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버마는 일본의 점령지 중에서도 가장 인플레가 심한 지역이었습니다.
“대동아공영권”하의 물가지수(1941년 12월을 100으로 함)
(『日本金融史資料昭和編』제30권에서 작성)
5 物の値段
참고로 당시 현지에서의 물건의 가격을 예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버마에서 1945년 초 시점의 물건의 가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커피 | 5루피 |
정장 한 벌 | 10,000루피 |
셔츠 한 장 | 300-400루피 |
비단 론지(버마의 스커트-역자주) 하나 | 7,000-8,000루피 |
(太田常蔵『ビルマにおける日本軍政史の研究』吉川弘文館)
게다가 이 때부터 인플레는 더욱 심해졌으니 2만엔으로는 정장 한 벌도 못 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타(太田) 씨는 “20년〔1945년〕3월 만달레이 함락 후에는 군표의 가치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라고 합니다. 문옥주 할머니의 저금 대부분은 군표의 가치가 없어진 시기에 장교들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다른 지역의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단 인플레가 버마만큼 심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인플레는 상당히 심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점령했던 동남아시아 각지의 경제가 파괴되었다는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쌀 6kg | 1942.12 $5 | → | 1945.8 $750 |
손목시계 | 1942.12 $85 | → | 1945.8 $10,000 |
싱가폴의 물가(싱가폴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작성)
(出典)小林英夫『日本軍政下のアジア』岩波新書、p179
한 장교의 회상에 따르면 스마트라에서는 장교의 한 달 월급으로 라면 한 그릇밖에 먹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즉 100엔 혹은 그 이상).
(小林英夫『日本軍政下のアジア』岩波新書, 1993、『証言集―日本占領下のインドネシア』竜渓書舎, 1991)
6 버마에서 저금한 돈은?
처음에는 점령지의 통화가 엔과 등가로 설정되었지만 동남아시아 등 인플레가 심해진 지역의 돈을 같은 가치의 엔으로 바꾸면 환전차액으로 큰 돈을 벌기 때문에 이를 규제하기 위해 1945년 2월 외자금고를 설립하여 동남아시아의 인플레가 일본 국내로 파급되지 않도록 조치되었습니다. 즉 버마에서 저금해서 액면으로는 많은 액수의 돈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일본의 엔으로 교환할 수 없었으며 게다가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군표도 남발권도 종이쪼가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7 따라서 버마에서의 사례를 들어 “위안부”는 돈을 벌었다, 문옥주 할머니는 현재의 가치로 치면 수 억엔이나 되는 큰 돈을 벌었다고 하는 것은 점령지의 경제상황을 무시한, 허무맹랑한 논의에 불과합니다. 점령지의 극심한 인플레는 조금만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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