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5

이재명이나 윤석열이나 하는 '좌파'들에게 - NEWS M

이재명이나 윤석열이나 하는 '좌파'들에게 - NEWS M

이재명이나 윤석열이나 하는 '좌파'들에게
김기대
승인 2021.12.07 

정의당의 지혜로운 선택을 기다린다
이재명후보와 윤석열 후보의 어릴 때 사진(이재명 캠프)

인구는 줄어가는데다가 자기를 치장하는 데 관심이 많은 플렉스 세대는 부동산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토건세력의 배만 불려줄 것 같은 부동산 공급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는 것이 깨끗한 ‘좌파’ 정부의 사명인 줄 알았다. 공급을 늘렸다가는 투기 세력이 달려들어 가격이나 올려 놓을 것이 뻔할 터, 그래서 손놓고 있다가 이 사달이 났다.

차별과 갈등의 근본 원인인 한국의 교육 과열은 분명히 큰 문제다. 그래서 자립형 사립고니 특수 목적고니 외고니 하는 것들을 손봐서 교육평등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진보’정권의 사명이었다.

이런 접근에는 하나도 틀린 말이 없다. 이런 것들을 개혁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토착왜구’와 수구 기득권 세력과 장렬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명분에 있어서는 한국의 ‘진보’세력이 분명 옳은 길을 제시하는데 차기 대선 정국에서 고전 중이다. 여기서 ‘고전중’이라는 말은 패색이 짙다는 말이 아니라 비교가 안되는 싸움이어야 할 정황이 박빙으로 나타나는게 이해가 안된다는 의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386에서 출발해서 어느새 586이 되어 버린 현재 ‘진보’진영의 리더들은 그들이 젊음을 바쳐 이룩한 민주주의 덕분에 ‘까방권’이 있었지만 이제는 공공의 적 수준으로 쇠락했다. 젊은 시절 꿈꾸던 세상을 아직 만들지 못해 분명 노력을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가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매트릭스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실제 세계는 이미 신자유주의가 포획했는데 그들만 꿈을 꾸고 있다.

이 체제를 완전히 뒤엎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안에서 대안을 찾아야 했는데 이들이 짜는 프레임은 나라를 빼앗긴 이들이 하는 '독립운동’ 수준이었다. 여기서 모든 모순이 발생한다. 그들은 독립운동 수준의 프레임을 짜놓았지만 그들의 삶에는 이시영, 이회영 선생처럼 모든 재산을 바쳐서 중국으로 떠났던 결기가 없다. 문익환 목사나 장준하 선생같은 청빈의 용기도 없었다. 차디찬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어가던 20대 윤동주의 슬픔도 없었다. 의회 권력도 장악한 집권 여당이면서 그들의 방법론은 차디찬 아스팔트 정치 수준이었다.

게다가 부와 신분상승의 욕망을 제어하는 정책을 펴 나가면서 그들 자신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렇다. 분명 고속철이 아니라 느린 전차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국의 진보 세력이 도덕성이나 모든 면에서 수구세력보다 훨씬 깨끗하다고 확신한다. 또한 진보는 무조건 가난해야 하고 자녀 교육에 무관심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그들이 짜 놓은 개혁의 거대 담론과 그들의 삶 사이에서 오는 작은 균열이 젊은이들, 아니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큰 모순으로 보였다는 의미다. 다같이 걷자고 해 놓고서는 전차를 타고 가는 그들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는데 "저들(보수 우파)은 택시나 고속열차를 타고 가는데 왜 우리만 갖고 그러느냐"는 볼맨 소리에는 설득력이 없다.

반면 더 큰 욕망의 지점에 도달해도 우파 세력에게 비난이 적은 이유는 부스러기 욕망이라도 주워 먹을 수 있다고 유혹하는 정책을 펴기 때문이다. 진보 보수 예외 없이 욕망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시대를 살아가면서 굳이 진보에게 ‘계몽’을 당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도 언젠가는 종부세를 낼만한 집에 살 수 있다는 헛된 꿈을 자극해서 종부세 폭탄 여론에 편승하라는 목소리가 훨씬 더 매혹적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한국에 진보 세력이 어디있는가? 유럽식 기준으로 따지면 더불어 민주당은 중도 우파 수준이고 국민의 힘은 극우 정당이다. 좌파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정의당은 노회찬이 주장하던 ‘사회민주주의’도 내걸지 못한 채 사민주의를 개량주의로 비판하면서 정통 사회주의 정당도 아니고 사민주의도 아닌 어정쩡한 스탠스에 머물러 있다. 그 대안으로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을 내 걸었지만 이 의제들은 ‘계급’의 문제보다 파급력이 약하기 때문에 착종(錯綜)되지 못하고 정통 진보세력의 요구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 진보의 또 다른 축인 북한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정의당과 국민의 힘이 우열을 다툴 정도인 것도 한계다. 난데없이 심상정과 안철수가 만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짜(?)’ 진보를 주장하는 세력 일부에서 이재명이나 윤석열이나 거기가 거기라며 윤석열이 이재명보다 못할 게 뭐 있냐고 비아냥대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에는 겉으로는 진보를 표방하면서 내용은 전혀 ‘진보’하지 못한 더불어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집권 세력에 대한 불만이 담겨있다. ‘진짜’ 진보세력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는 한가지 큰 맹점이 있다. 윤석열도 ‘잘할 수 있다’라는 말은 개량주의다. 자칭 정통 사회주의자들이 그토록 비난하던 개량적 사민주의만도 못한 보수 적 개량주의 세력을 소환하는 이율배반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선인가?

그들이 정말 정통 사회주의자라면 윤석열이 되어서 도래할 ‘파국(破局)’을 이야기 하는 것이 그들의 이념에 맞다. 20세기 초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적 폭력에서 촉발된 파국논쟁은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같은 좌파 정치철학자들에게 와서 꽃을 피웠다. 신자유주의가 파국을 맞지 않고서는, 학자들의 책에 나오는 언어가 아니라 아스팔트의 언어를 빌려 말하면 갈 데까지 가서 한 번 망해보지 않고서는 해결책이 없다는 학문적 주장인데 그 이면에는 그만큼 신자유주의가 강고하다는 자조가 있다.

때문에 좌파 세력들이 이재명이나 윤석열이나 하면서 윤석열의 손을 들어 줄 때는 그로 인해 파국적 상황을 맞게 된다는 기대감에서 말한다면 모를까, 윤석열이 더 낫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로 접근하는 것은 그야말로 개량주의의 끝판 왕이다. 오히려 윤석열로 인한 파국은 우파 유투버인 정규재가 주장하고 있는 코미디 같은 상황도 일어나고 있다.

정치학자 셰리 버먼은 ‘정치가 우선한다’(김유진 옮김, 후마니타스)에서 "사회민주주의란, 정치를 통해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내건 적극적 민주주의자들의 비전이며" 그것이 전후 복지국가체제를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민주의마저 어려운 한국 현실에서 버먼의 다음과같은 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민주의자들은) “정치의 우선성을 받아들였으며, 정치권력을 사용해 사회와 경제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열망을 강하게 드러냈다. 또한 공동체적 연대와 집단적 선에 호소했으며, 현대적 대중 정치조직을 만들었다.”

한국의 사민주의(에도 못미친)자들은 정치의 우선성과 대중 정치조직 건설의 실패를 자인하고 일단은 중도우파 세력인 더불어 민주당과 연대해야 그들의 미래도 담보된다. 게다가 386 세력의 적자도 못되고 인텔리 세력의 적자도 아닌 이재명의 등장은 또 다른 의미의 파국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파국의 시대가 오면 ‘진짜 진보’의 공간도 넓어진다.

노무현 정부 하에서 치러진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13%의 득표율로 10석을 차지했었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노회찬도 심상정도 바로 그 때 첫 배지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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