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2

[인터뷰] 평양과기대 박찬모 명예총장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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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평양과기대 박찬모 명예총장

278 views  Sep 4, 2024  #평양과기대 #남북교류 #북한관광
조선 평양과기대에 한국인 총장..?
"성공적인 남북교류를 위해서는 인내는 필수이고 지키지 못할 약속은 삼가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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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카이스 대에서도 가르쳤고 그다음에 공대에서도 가르쳤고 또 서울
대학은 공대를 다녔고 거기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열성은 북한 학생들이 제일 성이에요
그건 왜 그러냐면 자기네들이 그 나라 경제적으로
뒤떨어지는 알기 때문에 자기네들이 분발을 그러니까지가 예를 들어서
프로젝트를 하면 [음악]
제 이름은 박찬모 그요 저는 뭐 어렸을 때 아주 유교 과정에 태어나
가지고 할아버님이 조상 숭대 해서 일제 시대에 성실을 안 바꿨어요 그래
가지고 저희 아버님은 경기도청 공무원인데 그 창시를 안 했기 때문에
아주 고통이 많으셨죠 그게 집에 와서는 할아버지한테 그 우리도 창시를 해야지
경기도청에서 승진도 안 되고 고통이 많다 그랬더니 야 이놈아 조상이 준
성을 누가 바꾸냐 네가 성을 바꾸려면 애비를 바꿔라
그래가지고 국민학교 제가 들어갈 때는 이제 일제시 됐데 박찬모 그해서 저도
많은 고통을 당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전
뭐 시 아는 것이 오히려 딴 사람들이 볼 때 어 저
가정은 민족인가 그렇게 했는데 그런 건 아니고 저는 고향은
서울입니다 그런데 키는 1935년 4월 달에 천안에 가서
났어요 천안에 외가 계셨거든요 그래가지고 요즘에 제가
북한을 좀 많이 관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 하는데 그거는 아니었고 그저
독일에 한 1년 살았었어요 85년에 86년 그때에 그 서독과
동덕이 많은 서로 과학 기술 분야에서는 협력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부러워 했거든요 그리고 저는 서독에서 기차를 타고 동덕을 거쳐서
서베를린에가 가지고 버스를 타고 동 베를린에 가서 거기서 서에 있는
와이프한테 전화 하니까는 그 전화도 됐고 미국에 있는
친구들한테도 그 그림 요서를 보내니까 그게 다 들어갔어요 그게 굉장히
부러워 가지고 나중에 1990년에 포항공대에 온 단부터 어떻 보면은
남북 화학기술 교류를 해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그 뭐라 그럴까 과학
기술 분야에 교류 협력을 할 수가 있 있을까 그래 가지고 북한에 관심을
갖게 된 겁니다 학교 다닌 거는 아 국민 학교는 매동 국민학교 다녔고요
어 그 매동 국민 학교는 서울의 그 사직공원 옆에 아 배화 고녀 근처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제가 배화 6천으로 다녀서 그때 종교 교회를
나가 가지고 할아버지가 교라 교회에 못 나간다고
그랬는데도 유치원에서 보내니까 그거는 허가로 하셨어요 그 종교 교회에 가서
유튜 바를 다녔고 그리고 그 국민학교
가서부터 이제 교회는 못 나갔고요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625가
났어요 그래 가지고 1부때 때 이제 피랑 갔다가 혼자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혼자 아 그야말로 가출을 해 가지고 부산에 가서 아 고등학교를
마치고 다시 그때 부산에서 있을 때에 가정
교사를 하면서 제 학비를 벌었습니다 그러고서는 어 고등학교
졸업 보고서는 서울대학교 공대 그때 제가 칠남매 장남이라 많은 분들이
의과대학을 가라 그랬는데 저는 아무래도 우리나라가 그 유교 때문에
경제가 굉장히 나빠졌고서 를해야 국가에 도움이 되겠다 이제
그런 생각으로 해서 그리고 의사가 되려면 뭐 가정에 돈이 있어야 된다는
말도 있고 그래서 공대를가 가지고 다행히 이승만정권 때
1년만 군 복부를 하면 유학 기라 그래가지고 외국을 갈 수가 있었어요
그 제가 58년 2월에 졸업하고 58년
10월에 자원입대 해 가지고 아 군대에서 1년 복무한 다음에 59년
12월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국이 왔습니다네 그래가지고 미국에 와서는
메리랜드 대학에서 석사 학기 하고 처음에는
아 박사 학기는로 갈 생각을 했었는데 제가 석사 하기 할 때
컴퓨터 접하게 됐어요 그래서 컴퓨터 가져와서 미르랜드 있었고 또
석사학 그 시험 통과할 때 박사까지 통과가 되는 바람에 아휴 그냥
메릴랜드에서 박사까지 한다 그것이 아주 잘된 것이 제가 컴퓨터 쪽으로
박사 하기는 석사 박사 하기는 화공 쪽이지만
아 나중에 전공은 컴퓨터로 하다 했기
때문에 그 메리랜드 대학에 1967년에 처음 컴퓨터 학과가
생겼어요 그때지가 조교수로 발령이 되는 바람에 딴데 같질 않고 보통 그
대학에서 박사이 하면 2년을 딴데 갔다 와야 되거든요 근데 저는 화공에
박사이 했기 때문에 컴퓨터 학과에 그냥 그
69년 부터 조교수로 일을 하다가 한국의 과학원이 카이스트가
생기면서 그 과기 그때는 과기처
과기처 그 유치 과학자라고 그래 가지고 뭐 한국의 과학자가 죽으니까
특히 컴퓨터 계통은 없었잖아요 그 제가 73년에 과학원에 가서 한 3년
반 가르치고 그리고서는 다시 미국에 와서 캐톨릭 대학에서 아 아 10년을
복무하다가 포항 공대로 갔습니다 1990년에 국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면 독일에서 그렇게 서독과 동덕이 공동 융공 걸 받고
그다음에 1990년에 제가 그 캐톨릭 대학에 있을 때 중국 어
교육성 저를 초청을 했대요 중국 사람들 중국 정부가 그
그러니깐 그 뭐라 그럴까 지방대학 육성 프로그램을 일찍부터 시작을
했어요 그래 가지고 그 중국에 있는 저기 연변 연변 과기대가 아니라
연변 대학이 연변 대학이 지방 대학인데 그거를 육성하기 위해서 그
세계 은행에서 돈을 받아 가지고 그 연변 대학의
과학자 수학 물리 화학 컴퓨터 분야 과학자를 저기 초청을 하고
그랬다고요 그랬는데 그 수학이나 물리 화학
분야는 1번 조청에 있는 그
과학자들이 많아 가지고 초청을 할 수가 있었는데 컴퓨터 분야는 그때 없었거든요 근데
마침 89년에 저를 갖다가 그 중국의
그 과학원 이양 컴퓨터 기술 연구서에서 저를 특별히 초청해 가지고 2주 동안
강의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천안문 사건이 일어나 가지고 심양 다음에는
북경로 가야 될 텐데 북경을 못 가고 제가 절 어디로 갔냐 하면 연기를
갔어요 그래서 연변 대학에 갔더니 거기 그 대학에 컴퓨터 학과는 없고
컴퓨터 연구소가 있었는데 거기 김숙자 교수님이라고
그분이 저를 당기시면 아 우리가이 세계은행에서 돈을 받아 가지고 컴퓨터
과학자를 초청해서 한 달 동안 강의를 하고 연변 대학에 컴퓨터 학과가
있는게 좋으냐 없는게 없어도 되느냐 그거를 연구해야 달라고 부탁을 해
되는데 마침 저한테 할도 있냐고 그래가지고 제가 전 90년 7월에 갔습니다 대학에 그 한 달
동안 가르치러 근데 마침 그때 그 재이 한국 물리학회 거기에 강경식
회장하고 또 한국의 물리학회 그다음에 중국에 있는 조선적 물리학회 그런
분들이 연변 대학에서 세계 물리학 그 워크샵을 했어요
그러니까 저는 그냥 컴퓨터 가르치러 갔지만은 그 물리학에 온 북한에서
오신 다섯 분이 왔는데 남쪽에서는 20명 미국에서도 20명이
갔는데 그 북한에서 여철기 선생님이라는 분이
오셨어요 그분이 고려대학교의 여석기 선생님
동생인데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의 대학원에 있다가 북로 오신 분이거든요
그래가지고 고 그 학술대 온 한국에서 온 과학자
미국에서 온 과학자들은 다 거기 백산 호텔이라고 존데 있었는데 그 북에서
온 다섯 분하고 이제 저는 분명 중국 정부에서 조청을 했으니까 그 저기
연변 대학의 초대소에 있었다고요 그게 이제 아침 먹으 내려가면 그분들
만나고 그래가지고 여철기 선생님한테 제가 연세가 저어도 우이니 인사를
했더니 그 어디서 왔냐고 미국에서 왔다고 그 혹시 그 한국에 안
살았냐고 그 한국에 최부동 이는데 살았다 더니 아 그 최부동 종로 그만
나는 정동에 살았는데 같은 그러면서 저거 좀 친해졌어요 그래가지고 제가
북한의 그 컴퓨터 분야 그걸 좀 쭤 봤다고요 그 니 여철기 선생님은 물리
학자인데 그 아주 유명한 책도 수식 그런 분이에요 자기가 컴퓨터는 잘
모르지만 자기는 아직 참 많이 떨어졌다고 프로그래밍 언어도 지금
베이식 하고 포틀랜 그때 우리들은 베이식 포트에는 지나서 이제 파스칼
그렇지 않으면은 C 그거를 저 가르치고 있을 때거든요
그래가지고 제가 속기로 이러다가는 [음악] 남북이 저기 통일될 때도 문제가
많겠다 그리고 독일에서도 자기네들 그렇게 협력을 했는데도 통일된 다음에
기술 분야에서 저게 많았다고 한국은 통일되기 전에 기술 격차를 될 순대로
줄이는게 좋겠다 그래서 제가 포항공대에 가자마자 한국의 과학
기술부에 1990년에 남북 과학기술 교류 협력에 대한 그 방안이라 그래 가지고
프로젝트를 냈어요 그랬더니 그때 과기부에서 승인을 해 줘 가지고 그래서 이제 한 10년 동안을 서리
색으로만 그러니깐 중국에서 북한에 갔던 조성 과학자 또 일본의 조청
계통에서 갔다 제가 미국 시민이 그 사람들 만났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거든요 그분들한테 자료를 얻어
가지고 연구를 해 보니까 정말 이러다가는 안 되겠어요
그래 가지고 10년 동안 연구를 하면서 그 서류로만 또 책으로만
연구를 하니까 이게 진짜 맞는 건지 안 맞는 건지 가봐야 되잖아요
그래서 저기 북한을가 보려고 굉장히 애를 썼습니다 그 우리 민족 서로
도기 그 사무총장이 그러더니 뭐 아 자기가 보내 주겠다고 중국 대로가
가지고 북에서 온 사람들 같이 식사도 해주고 했는데 안 됐어요 그러다가 그
김대중 대통령하고 김정일 위원장고 이전
2000년 6월 15일에 만나신 후에 2000 년 9월에 김책공대 김책
공대라고 북한의 MIT 아고 통 불러요 그 거기에서 저를 초청을
했대요 뭐에 대해서 특강을 해 달라면 가상 현실 요즘에 가당 현실 많이 그
2000년대에 가당 현실 한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제 저가 김책 공대에 가서 그 가당
현실에 대해서 특강을 했는데 아니 저는 솔직히 말해서 학생들을 놓고 좀
강연 하라오 더는데 학생은 하나도 없고 전부 교수들만 앉았어요 40명이
그 왜 이러냐 러니까 아 오늘은 학생들이 노동하는 날이라고 그 그래
가지고 제가 굉장히 그 뭐라 그럴까 불만이
많았죠 그 그러고
교수분석 자라는 데가 평양 정보 센터라는 데가
있다라고 그건 내가 어떻게 하냐면 그 싱가포르에서 컴덱스 할 때 거기에서
나와서 저 전시계 있었거든요 1987년에 그래서 거기에 가서 내가
좀 강의를 해 달라고 그랬더니 지에는 안 된대요 그 미리 그런데 제가 그
김채 공대에서 한 강의가 상당히 좋았던 모양이에요 소문이 그러니깐 아
그 평양 정보 센터에 간 원대로 갈 수 있으면 가게 하라 그래서 그 사람이 그 스케줄을
단군릉 평양에 당군은 스케줄이 지금부터 있었거든요 자기네들이 그
가는 날 단군릉을 9시에 가기도 했는데 그걸 새벽 6시에 가고
9시에 그 평양 정보 센터를 갈 수 있겠냐 해서 아이 좋다고 어 새벽
6시 아니라 뭐 새벽 3시에도 내가 가겠다고 그래 가지고 평양 정보 센터에 갔더니 160명의 젊은
과학자들이 모였는데요 야 눈은 반짝반짝하고 그냥 그 질문도 아주
좋고 그 제가 물어봤어요 도대체 평균 연령이 얼마쯤 되냐 그니까 26
달이네요 그렇다면 군대를 안 간 그 사람들은 군대 10년이든 안 간 인재들이다 그요
그래서 제가 그 평양 정보 센터 하고 포항공대
그때 이제 포항공대 제가 갈 때니 갔으니까요 그 공동연구를 하자고 그
최 일에는 그 소장한테 말씀드리니까 최주식 소장이
자기 맘대로 할도 없다 하고 싶지만 그래서 저보고 그 제안서만 좀 써
놓고 가라 그 2000년 9월에 제안서를 썼는데 써놨는데 그 공동영
하자고 아무 소식이 없어서 아 이것 또 뭐 허탕 쳤나보다 했더니 아니
그게 아니었어요 2001년 4월 달에 어
저쪽에서 허가가 나와서 사인 하자고 근데 평양이 오기 오려니 단동에 가서
거기서 같이 사인 하자고 그래 가지고 7년 동안을 평양 정부 센터고 공동
연구를 했어요 그 가상 현실이니 그런데 어우 근데 그 학
연구원들이 너무너무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고 그 당시에는 그래서 보통
1년에 두 세 번씩 내 연구원들을 데리고 한 1주 내지 2주를 평양을
방문하는데 그 연구실에 그 저 책장 후에 다 담들이 있어요 그 담요
무덤도 왜 이렇게 접는요 같은 거 있잖아요 그 이게 뭐냐 그니까 자기네들 집에 안 가고
밤에 여기서 잔대요 그리고 주말에만 집에 간대요 그만큼 열심히 하고
그리고 2001년 그 당시에는이 증기가 하두
잘 나가고 그게 하루는 있었더니이 사이렌 소리가나요 그래서 이거 어디
불 났냐 그랬더니 아니 불난게 아니라 30분 후에 정전이 될테니까 그
컴퓨터 내용물 다 어 저기 저장해 두라고 그러든 평인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죠 그래 그래 가지고 7년 동안을 제가
포항공대 그러니까 은퇴할 때까지 했기 때문에 북에서는 저에 대해서 잘
알았죠 그리고 7년 구할 때에도 그
과기부에서 공동 연금은 상대방의 연구비를 제가 맘대로 그쪽에 줄 수가
있대요 그 평양관 평양 정보센터의 그 최주식
소장한테 이만큼 당신들이 쓸 수 있는 돈을 주려 하니까
그분이요 네들이 연금으로 받으면은 다 연구에 쓰기 어려우니까 연구에 필요한
자료 또 회의할 때 단동에 하게 되면은 거기까지의 자기네 그 여비
그런 거를 내가 돈 가지고 해 달라 거예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북한하고 무슨 연구를 하고 하면은 꼭 돈을 줘야 된다고만 생각을 하는데
그런게 아니더라고요 그러니깐 현금은 하나도 안 주고 그렇게 공동 연구를 하니까 아주
저로서는 굉장히 좋은 거죠 그 다 연구해 그리고 그 그분들이 어떻게
열심했던 2년 후에 자기나라에서 매년 소프트웨어
경진대회가 있는데 거기서 1등상을 받았대요 그 우리가 같이 그 개발한게
뭐냐하면 건축사가 집짓는 걸 설계를 하 면은 그거를 집을 진 다음에 뭐가
잘못된게 발하게 되면은 다 뜯어고쳐야 되니까 돈이 많이 들고 시간이 걸리잖아요 그러기 전에 컴퓨터로 가상
탐방 그러니깐 그 우리는 워크인이 그러는데 워크스루 컴퓨터로 들어가서 설계한대로
거기다 지어 놓고 보고 아 이게 잘못됐다 하면 고쳐온 다음에 나중에
집을 짓는 거거든요 그게 1등상을 받았어요 그래가지고 그 북에서 나오는
조선이라는 잡지가 있는데 매달 거기에 그 1등 했던 그 사진도 나오고 그 정구
1이라는 자기네 연구원이 그 건축사 앞에서 설명하는게 나왔는데 제가
이렇게 보니까 제 이름도 없고 포항공대 이름도 없고 국제 공동연구를
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 국세 공동연구로 했다는 것만도 고맙다 그랬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북에서 이제 전 어 나름대로 신임을 얻고 하는데
2001년에 그 연길에서 어떤 회의가 있었냐면 남북 컴퓨터 그 분야에
학술대회가 있었어요 그제 1994년에 제가 시작을 한 건데 거기에 삼석
저 김경 총장님이 그 아 잘 왔다고
그게 2001년 2월 말이었 그든 내가 내일모래 3월 초에 북에 전
평양 과기대 세우는 프로포절을 가지고 가는데 좀 나보고 봐 달래요 그리고
처음에는 평양관 기대가 정복 기술 쪽만 한다고 그랬었거든요 근데 제가
이제 정복 기술 쪽이니까 그 본인 는 그 역시 그 연병 광기에 있는
교수들이 북의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거 이렇게 보니까 이거 뭐
북에서 보면이 우리를 어떻게 뭐 어린 내로 보는 거냐 그럴 정도로 너무 그
프로포셜 쓴게 저쪽을 갖다가 좀 뭐라 그럴까요 그 잘 몰랐다 라고요 그
제가 밤새도록 그걸 다 고쳐드렸어요 그랬더니 그거 가지고가서
저쪽에서 저기 통과가 됐고 그리고 한국에 이제 그게 이제 3월 달에
통과가 됐고 한국에는 그외 5월 달에 통일부에 또 허가를 받아 가지고 그래
가지고 평안 과기대를 세우기로 한 거죠 그랬는데 그 집 짓고 하는데
돈이 많이 들잖아요 그 이제 곽선희 목사님이랑 저 그 소망 교에서 많이
대주고 해서 결국은 2009년에 우리가 열었지만
2005년부터 저를 김준경 총장이 공동 설립
위원장으로 지명을 하셨대요 왜냐면 그동안에는 그 김진경 청장이 내내
하다가 2005년부터 이제 커리큐럼을 해야 되는데 김진경 총장님은 과학 분야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더군다나
it 분야의 커리큘럼은 제가 60년 했으니까 그 커리큘럼 하는데 좀
도와달라 해가지고 어 공동 설립 위원장이 그때 저뿐만 아니라
고려대학교 총장 있던 분도 했고 또 미국에 저 라이스대학교 총장 있던 분
그렇게 시서 공동위원장이 돼서 해가지고
2009년에 그 2009년 9월에 평양 과기대에
그 개교를 한 거죠 개교를 하고 개학은 아닙니다 계약은 이제 학생에
들어와야 계약인데 그러고서 그때부터 이제 학생을 뽑아가지고
2010년 10월부터 우리가 학생을 가르치기 했어요이 처음에는 대학원만
하려고 그랬는데 대학원만 하니까는 그 학생 모집도 힘들고 그래서 학부도
하고 대학원도 하고해서 2010년 10월에 대학원 학생들 한
어 그때 40명 그리고 이제 학부 학생들 100명 그렇게 또 가지
시작을 한 거예요 그제 그때부터 저는 어 뭐 저 직책은 명예총장 찬트라 
러지만 아무래도 컴퓨터를 가르쳐야 되니까
그래서 컴퓨터 학과 교수도 있으면서 봄학기에 한 과목 대학원
학생들 그다음에 가을학기에 한과목 해서 6개월 동안을 평양에 가서 그
평에 대해서 가르쳤죠 그래가지고 광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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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들은 외국에서 온 분들 한 20개국에서 온 분들이이 전부 학과목은 영어로
가르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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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토요일 날은 그 자기네 사회과학 그거를 가르치는데, 그거는 북한 사람이죠. 사회과학 이런 거,
아시다시피 뭐 주체 사상이니 그런 거, 그게 전 우리 학생들이 그 토요일마다
그 사회과학 하는데 시간을 많이 뺏기기 때문에, 제가 그 대회 사업 부장 있거든요. 대회 사업 부장한테 아니 우리 학생들이 본 공부하는데도 힘드는데, 그 유치원 때부터 배운 주최 사장은 왜 해야 되냐 그러니까, 그 사람이 뭐라 그러냐면, 당신들은 왜 성경을 자꾸 읽어요? 왜 주일마다 교회일 가요? 그 한 번 가던지 한번 읽으면 되는거.  제가 할말이 없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아 알겠다고 그래가지고.

 평양과기대는 제가 그야말로 어 그 학생들을 가르쳐 보니까지가, 카이스 대에서도 가르쳤고
그 다음에 공대에서도 가르쳤고 또 서울 대학은 공대를 다녔고, 거기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다
우수한데, 열성은 북한 학생들이 제일이에요.  그건 왜 그러냐면, 자기네들이 그 나라 제일 뒤떨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네들이 분발을,  
그러니까 지가 예를 들어서 프로젝트를면 그 힙합 댄서의 애니메이션 같은 거 
허그 거기에다 보고서를 쓰면서 이런 걸 가르쳐줘서,
고맙다 이걸 갖다 자기네 경제 부흥을 위해서 자산이 되게 해라.
아, 교수님의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하겠다 
우리는 그런 소리 듣는게 제일 좋은 거거든요 
학생들이 교수의 기대에 어나지 않게 열심히 하겠 때문 그거 이상 더 기쁜게 없죠
그래 가지고 참 학생들 친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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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뭐 우리는 기독교인이 때문에 뭐 거기서 전도는 못 하지만은 그저 예수님의 사랑
그거를 학생들한테 보여 줘 가지고, 그 사람들이 그 말로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학생들이 기독교인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거는 그 그렇게 얘기를 해요 저한테도 
뭐냐면 그 당신 같은 사람은 한국 피가 있으니까 이해가 되는데 
요새 젊은 백인들이 많이 오거든요. 그 사람들이 우리처럼 월급을 안 받고 하니까 
한 학기는 딴데 가서 가르쳐서 돈 벌어 가지고, 평양과기대에 와서 거저 그렇게 가르친단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왜 정말 정전도 자주 되고 목욕하다 물도 자주 끊어지고, 그런 고생을 하면서 
자기네들을 와서 가르치는지, 자기네들이 무만 생각해봐도 역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그게 맞느냐? 그래,  아, 그게 맞다고, 그 사람들은 참 사랑으로 너희들을 대하는 거고, 
자기네들이 희생하고 고생하고 하는 거에 대해서는 그렇게 어 저걸 안 한다고 그러니깐,
 기독교인에 대해서 고마워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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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평양과기대가 변화기에 있어요 왜 그러냐면 남만 어찌됐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하는 이제 같지 못한다 그러니까 여태까지의 그 평양과기대 후원회가
남한의 동부가 교육문화 재단이 든요 그거는 안 된다 그거예요
그래서 지금 평양에 대해서는 그 처음에는 주인은 아주 없어지는 줄
알았어요 평에대 그러잖아도 박재규 전 통일부장관은 우리가 건물 다 짓고
나니깐 이제 조금 쓰면 북한이 저 인수 올 거라 그래서 내가 박규 그
경남대학교 총장 아니 그 사람들이 왜 거물이 없어서 린 예요 그사람들이 바라는
거는 외국 교수의 브레인이 이제 절대로 그 그 사람들의 목적은 뭐냐면
학생들을 유학 보내는 대신에 교수들을 대하려고 와서 그 많은 학생들이 다
유학한거나 마찬가지로 우리가 커리 크면 다 그거니까 거기 위한
거지 그게 나중에 우리 학생들 들어 그러니까 박정 이건 기적입니다
기적입니다 이제 그랬듯이 그
북한에서는 평안 과기대를 놓고 적고를 했던 모양이에요 저
고민들을 그래 가지고 지금 삼대 총장이 이승률 총장이 북한을 못가
우리가 미국 시민들이나 한국 사람 못 가니까 그 저 브라지 보스도 글루
평양과기대 부 중에 하나가 가서 저쪽 북에서 온 사람하고 같이 은원을 해서
그 한 다섯 가지 장인 네들이 저한게 있대요 과연 청양에
대해서 그렇게 영어를 가르치는게 효과적이냐 또 그 학생들이 물들지는
않았느냐 그래가지고 전부 패스해 가지고 그 딱 한가지만 패던게 뭐냐면
왜 과대학 은는다 그러고 안 되나 그건 지금 생션 때문에 못는 거니까
아니까 그래 가지고서는 평양관 대는 전속을 하되
그 후원에는 제삼국 한국이 아닌 하라 그래서
처음에 중국 얘기가 나왔다나 봐요 중국에 그 후원회를 두자 근데 그거는
또 평 교수들이 대요 왜냐면 중국이 지금 평이가 기독교인들을 적는데
그러면 우리가 그 세운 목적은 기독교 베이스드 학교인데 기독교가
없어지는거다 그리고 지금 중국은 공자학 적려 그러거든요
그래서 천생 유럽에서 유럽에서 나와야 된다 근데 영국 교수들이 많다고요
우리 그래서 아마 영국 교수들이 주동이 돼 가지고 그쪽에 후원 를
만들어 가지고 그 한국에서는 간접적으로는 도와줄 수가
있겠죠 그 그러나 직접 뭐 저걸 보내거나 그러지 못하고 그러니깐 지금
현재로는 온라인으로 수업은 하고 졸업생도 매 나오고 그다음에 우리가
졸업시킨 학생들이 교수들을 해요 50 60명이 교수를 해요
그러니까 그 박사 학기는 지금 외국에서 받아오는 학생들은 있어요
옥스포드에서 둘 받았고 저기 웁살라 스웨덴에서도 받았고 또 중국에서도 또
받았고 그 그래서 박사이 받은 사람은 대학원 학생을 가르칠 수 있고 석사
하기 받은 사람은 학교들은 가르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 그 학생들이 졸업생들이 와서 가르치고
있고 어 곧 아마 내 학기부터는
내년 글쎄 금년 가을학기는 모르겠는데 최소한도 내년 봄학기부터
외국인 미국 시민을 빼놓은 외국인들이 들어갈 것 같아요 북한하고 무슨 일을
같이 한다면은 절대로 그 오버
프로미스 너무 과대하게 약속을 하지 말아야 돼요 그리고 인내심이 있어야
됩 인내심이 없으면 북한하고 같이 할 생각 말아야 돼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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