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1

최덕효 - #상대방_입장_경청하기 조선에서의 #종군위안부 (1) / by 무명씨 (日 작가, 전직 파일럿) *이 문제에... | Facebook

최덕효 - #상대방_입장_경청하기 조선에서의 #종군위안부 (1) / by 무명씨 (日 작가, 전직 파일럿) *이 문제에... | Facebook

#상대방_입장_경청하기
조선에서의 #종군위안부 (1) / by 무명씨 (日 작가, 전직 파일럿)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주장:
"군인을 상대로 한 조선인 매춘부는 존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나 국가가 물리적 강제력(소위 노예사냥)을 통해 위안부로 만든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근거는]
소위 노예사냥(강제적인)으로 인해 종군위안부가 되었다는 주장을 좌익 언론이나 반일주의자, 재일교포들이 했으나, 그들이 주장하는 위안부를 둘러싼 재판에서는, 한국 측 주장에 따르면 피해자가 7만에서 20만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인척을 포함해 노예사냥을 목격한 증인이 오늘날까지 한 명도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목격 증인의 부재]
왜 목격 증인이 출석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노예사냥이라는 범죄 자체가 본래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목격 증인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노예사냥 이야기는 일본과 일본인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한 날조된 이야기였다.
7만에서 20만 명이나 되는 피해자가 있었다는데, 목격자가 한 명도 없는 범죄를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전혀 합리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믿지 않는다.
추가로 크림전쟁(1853년) 당시 전장에서 부상병을 돌보며 이후 적십자의 기초를 세운 영국의 나이팅게일 같은 종군 간호사라는 명칭이나 말은 있었으나, 종군 위안부라는 말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반일 좌익주의자들에 의해 그 말이 창작된 것은 1973년(쇼와 48년)의 일이며, 그 후 요시다 세이지가 쓴 "엉터리 책"이 편향된 언론에 의해 선전된 것은 1983년(쇼와 58년)의 일이었다. 전전부터 패전까지의 일본에 왜 그 말이 없었을까? 그 직업에 종사한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 군인을 상대로 한 창녀(매춘부)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노예사냥의 체험담을 언론에 증언한 남자의 거짓과 기만에 가득 찬 이야기나, 반일 좌익주의자들에게 이용되어 종군 위안부 재판의 원고 1호로 억지로 만들어진 여성의 이야기를 종군위안부교(敎)의 신자들은 그 신앙심을 잠시 접어두고, 이하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며 읽어주기 바란다.

[1: 요시다 세이지라는 거짓말쟁이]
요시다 세이지의 얼굴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종군 위안부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한때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의 "동원부장"으로서 종군위안부를 모으는 노예사냥을 제주도에서 직접 했다고 고백했고, 언론에도 다뤄져 보도되었으며, TV에도 자주 출연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쇼와 52년 간행)과 "나의 전쟁 범죄, 조선인 강제연행"(쇼와 58년 간행)이라는 두 권의 책을 출판했고, 자신이 강제 연행한 여성은 950명에 달한다고 말했다. 사건 현장(?)인 제주도가 아니라 한국 본토를 방문해 소위 종군 위안부(?)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등 언론의 화제가 되었으며, 한때 종군 위안부 문제의 "키맨,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2: 제주도에서의 위안부 노예사냥]
“나의 전쟁 범죄, 조선인 강제연행”에서 단 한 곳, 시기와 장소를 특정할 수 있는 제주도에서 있었던 1943년(쇼와 18년) 5월에 205명의 젊은 여성을 종군위안부로 만들기 위해 노예사냥을 했던 당시의 기술을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즉시 마을 내의 사냥을 명령했다. 골목길을 따라 돌담으로 둘러싸인 집들은 문이 닫혀 있었고, 나무검을 든 병사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 여성을 찾기 시작했다. (노무보국회) 대원들과 병사들은 두 명씩 한 조가 되어 울부짖는 여성을 양쪽에서 둘러싸고 차례로 골목으로 끌어냈다. 젊은 여성들만 8명을 붙잡았다. (이하 생략)"

종군위안부의 노예사냥에 대해 가해자 측의 생생한 증언자(?)의 등장에 아사히 신문은 대단한 성과라도 올린 듯 기뻐했다. 그리고:
· 헤이세이 2년(1990년) 6월 19일 아침 사회면에서 큰 제목으로 보도했으며,
· 그 후 헤이세이 3년 5월 22일,
· 같은 해 10월 10일,
· 헤이세이 4년 1월 23일 (저녁판, 기타바타케 논설위원의 칼럼 「창」의 에세이),
· 같은 해 5월 24일.
아사히 신문은 요시다의 증언에 근거한 「노예사냥」을 사실로서 다섯 차례나 보도하고, TV 아사히에도 출연시켰다. <계속>


▦ 출처: サンデー毎日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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