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2

김일영, 그는 누구보다 대한민국을 사랑했으며,.. : 네이버블로그

김일영, 그는 누구보다 대한민국을 사랑했으며,.. : 네이버블로그

고김일영교수기념 53개의 글고김일영교수기념목록열기


김일영, 그는 누구보다 대한민국을 사랑했으며, 가장 숭고한 가치인 자유를 위해 싸우다 간 역사가였다(언론의 부고 기사 모음) 고김일영교수기념

2009. 11. 25. 5:15



https://blog.naver.com/ysgoodfriend/110074593140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일영 성균관대학교 교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미국 연수 중에 이 소식을 듣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교수님의 영혼을 받아주시고 교수님이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게 해 주시며, 하나님께서 그 유족과 함께 하시고 늘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09년 11월 24일 미국 시애틀 근교 한 아파트에서 심양섭 -

<중앙일보 2009년 10월 26일>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학과 교수는 “박정희 연구는 ‘체험의 굴레’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자신의 체험에 따라 극단적으로 미화하거나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간암 투병 중에도 강의실 지킨 제자 사랑
2009-11-24 03:00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별세







“이 제자 몹쓸 병마와 싸우느라 선생님께서 가시는 마지막 길을 지키지 못한 죄 매우 큽니다.”

성균관대 총동창회가 발간하는 월간지 ‘성균회보’ 8월 5일자(제359호)에 한 추모사가 실렸다. 간암으로 투병 중인 김일영 정치외교학과 교수(사진)가 작고한 스승 장을병 전 총장에게 보내는 글이었다. 그 뒤 꼭 140일 만에 제자는 스승의 뒤를 따랐다. 23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김 교수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정치사 전문가로 보수적인 성향의 시민단체 ‘뉴라이트전국연합’의 창립멤버였던 김 교수는 본보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보수진영의 대표적인 논객이었다.

평소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김 교수이기에 주변 사람들의 충격은 컸다. 김 교수는 올해 초 간암 판정을 받았지만 2009학년도 1학기에도 학부와 대학원 수업을 계속했다. 병세가 악화된 2학기에도 홍천에 있는 요양원과 서울을 왕복하며 수업에 나섰다. 학생들에게 투병 사실이 알려진 뒤부터는 듬성듬성 빠진 머리칼을 가리려 검은 중절모를 썼다. 하지만 악재가 겹쳤다. 7월 5일 그가 ‘하늘같이 모셨던’ 스승인 장 전 총장이 작고한 것. 김 교수는 요양 중이라 스승의 마지막도 지키지 못했다.

김 교수의 마지막 수업인 ‘남북한 관계론’을 수강한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생 전은지 씨(22·여)는 “수업 중에 몇 번을 뛰쳐나가 구토를 하시면서도 우리에게는 되레 ‘미안하다. 곧 나을 거니 걱정 말라’고 하셨다”며 안타까워했다. 유족으로는 아내 조인진 씨(48)와 1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25일 오전 8시. 02-3410-6914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조선일보>

[부음] '좌(左)편향 현대사' 바로잡기 힘쓴 중견 정치학자 김일영 교수 별세 외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
입력 : 2009.11.24 00:17
중견 정치학자인 김일영(49)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22일 밤 11시 34분 서울대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승만 통치기 정치체제의 성격에 관한 연구'로 성균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교과서포럼' 상임운영위원 겸 기획위원장, 지식인모임인 '뉴라이트 싱크넷' 주요 멤버로 활동하면서 한국현대사 인식의 좌(左)편향을 바로잡기 위해 힘써왔다. '한국현대사의 허구와 진실'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등의 저술에 참여했고, 386세대의 이념적 교과서였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맞서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김 교수는 또 활발한 신문 칼럼 집필을 통해 자유주의적 가치의 확산에 앞장선 중도보수 지식인이었다. 2007년 대선 직후 보수의 창조적 혁신을 요구하는 '성찰적 보수가 필요하다'는 칼럼을 통해 반향을 일으켰다. 김 교수는 전공인 한국현대정치사 분야에서도 '건국과 부국' '주한미군' 등 주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인진(48) 총신대 교수와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고, 발인은 25일 오전 8시. (02)3410-6914

<서울신문>

부고]뉴라이트계 김일영 성대교수



뉴라이트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 온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 학과 교수가 23일 새벽 지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50세. 한국정치사를 전공한 고인은 2008년 ‘한국 보수에게 미래는 있는가’라는 논문을 통해 뉴라이트의 공과를 지적하면서 한국 보수가 지속가능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정치공학적 보수에서 벗어나 사상·이념적 토대를 갖춘 새로운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5월 간암을 처음 발견하고  항암치료를 시작한 고인은 투병생활 중에도  대학 강의를 쉬지 않는 열정을 보여줬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인진 총신대 교수와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25일 오전 8시.(02)3410-6914.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한국일보>
'뉴라이트 이론가' 김일영 교수 별세



김현우 기자 h091556@hk.co.kr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23일 새벽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50세.

고인은 <해방전후의 재인식>, <대한민국 건국 60년의 재인식> 등을 집필하는 등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정치사적 관점에서 보수 진영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중경제론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 논문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인진(총신대 교수)씨와 1남1녀가.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25일 오전8시. (02)3410-6914

<경향신문>
‘소통하는 보수’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타계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23일 새벽 1시34분 지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50세.


박정희 시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정치사를 전공한 김 교수는 보수적 성향에 서서 진보진영의 논리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보수와 진보간 논쟁과 소통을 주도해온 지식인이다.

김 교수는 지난 5월 간암을 처음 발견하고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그는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대학 강의를 쉬지 않았다. 하지만 이달 초 몸 상태가 악화되어 강의를 중단하고 치료에 전념해 왔다.

고인은 2006년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2008년 <대한민국 건국60년의 재인식> 등의 집필에 참여하며 정치사의 관점에서 뉴라이트의 이론적 토대를 왕성하게 제공해 왔다. 특히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이라는 논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중경제론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한국현대사)는 “김 교수는 보수적 입장에서 진보적인 주장을 구체적으로 적시해 비판함으로써 논쟁을 만드는 등 한국 학계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인진 총신대 교수와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25일 오전 8시. (02)3410-6914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데일리NK>

현대사 바로세우기 앞장선 김일영 교수 타계

지병 간암으로 23일 별세…'해방전후사재인식' 공저


정재성 기자 | 2009-11-23 18:44


br {line-height:20px}


한국 현대사 바로세우기에 앞장서온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23일 새벽 1시34분 지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50세의 젊은 지식인의 타개 소식에 제자들을 비롯해 동료 지식인들도 안타까워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정치사를 전공한 김 교수는 소위 진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건국과 산업화시대에 대한 '역사왜곡'에 일침을 가해왔다.

고인은 2006년 『해방전후사의 재인식』,2008년 『대한민국 건국60년의 재인식』등의 집필에 참여해 대한민국 교과서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하고, 정치사의 관점에서 뉴라이트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 왔다.

특히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이라는 논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중경제론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2008년 11월엔 '한국 보수에게 미래는 있는가'라는 논문을 통해 뉴라이트의 공과 과에 대해 지적하면서 "한국 보수가 이명박 정부 5년을 넘어서 지속가능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뉴라이트를 벗어나 프로그램을 지닌 전문적 보수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정치공학적 보수에서 벗어나 사상·이념적 토대를 갖춘 새로운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는 역설이었다.

김 교수가 생전에 존경했던 인물은 '토지'를 저술한 소설가 고 박경리 씨다. 그는 2008년 자신의 홈페이지에 "스승이 없는 시대에 마지막 남은 스승 중 한 분이 가신 것 같아 못내 아쉽다"며 그리워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를 좋아했다.

김 교수는 지난 5월 간암을 처음 발견하고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그는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대학 강의를 쉬지 않았다. 하지만 이달 초 몸 상태가 악화되어 강의를 중단하고 치료에 전념해 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인진 총신대 교수와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25일 오전 8시다.function textSizeLoad() { contentSize.style.fontSize=Math.ceil(fontSize) + "px"; contentSize.style.lineHeight=(Math.ceil(fontSize)+9) + "px"; } textSizeLoad();

<데일리안>
"그는 ´품격있는 보수´를 만들려다 갔다"

23일 간암으로 타계한 고 김일영 교수에 동료학자들 안타까움 토로
변윤재 기자 (2009.11.24 16:33:04
“우리 사회에서 보수가 품위있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온 몸과 마음을 바쳐 매진했던 연구자였습니다. 티끌만큼의 사심 없이 한결같던 그 모습을 볼 수 없던 분이었는데, (품격있는 보수에 대한) 꿈이 미처 이뤄지기 전에 유명을 달리한 것에 대해 뭐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아픕니다.”

동료 학자들의 눈에 비친 23일 새벽 지병으로 별세한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결 같은 사람’ ‘해맑은 사람’이었다.

향년 50세. 한창 일할 나이에 눈을 감은 김 교수에 대해 동료 학자들은 “매사 꼼꼼하고 성을 다했었다”며 “좋은 학자를 잃었다”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김 교수는 지난 5월 간암을 처음 발견하고 항암치료를 시작한 이후로도 학부와 대학원 수업을 쉬지 않았다. 보수우파 진영의 대표적인 논객이었던 만큼, 자신을 부르는 토론회나 심포지엄 등도 마다하지 않고 참석했다. 병세가 악화된 2학기에도 홍천에 있는 요양원과 서울을 왕복하며 수업을 하는 등 열정을 보여줬다. 이달 초 몸 상태가 악화되어 강의를 중단하고 치료에 전념할 때까지, 김 교수의 발걸음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괜찮다” “곧 낫는다”고 안심시키며 자신의 일을 묵묵히 했었다. “몸을 돌보라고, 적당히 요령껏 하라고 말릴 틈조차 없었다”며 김 교수의 갑작스런 부음을 접한 동료 학자들과 지인들은 더욱 미안하고 아픈 마음을 내비쳤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조그마한 일이라도 ‘올인’해서 하곤 했었다. 그 모습이 아직 뇌리에 생생한데 믿겨지지 않는다”고 말을 흐렸다.

김 교수와 박 교수는 교과서포럼의 멤버로 진보좌파 진영의 편파적인 역사관에 일침을 가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진보좌파 진영으로부터 “우편향” “식민지사관” 등 비난을 받았지만, ‘역사 연구는 공과를 균형있게 다뤄야 한다’며 활발한 집필 활동을 펼쳤다.

때문에 박 교수가 느끼는 안타까움을 더하다. “좁게는 한국 현대사 인식의, 넓게는 우리 사회의 좌편향을 바로 잡는 일에 혼신의 정력을 쏟다보니 힘이 소진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운을 뗀 그는 “‘지속가능한 보수’ ‘품격있는 보수’ ‘전문화된 보수’가 살아있는 사회를 꿈꿨었는데 그 꿈이 미처 이뤄지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데 뭐라 말할 수 없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고인에 대해 “참 해맑은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사석에서 편하게 농담을 할 때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일 정도 였다. 일을 할 때도 사심이랄까 욕심같은 것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면서 “언제나 흐트러진 없던 모습, 그 분의 맑은 마음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이 아프다”고 다시 한번 슬픈 마음을 전했다.

김 교수는 교과서포럼 상임운영위원 겸 기획위원장, ‘뉴라이트싱크넷’ 주요 멤버로 활동하면서 뉴라이트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왔다. ‘해방전후의 재인식’ ‘대한민국 건국 60년의 재인식’ 등의 집필에 참여해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역사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고, ‘한국현대사의 허구와 진실’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등을 통해 한국 역사학계, 특히 현대사 연구의 좌편향 풍조를 정면 비판했다.

김 교수는 그동안 과소평가됐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재평가해 주목을 받았다. ‘체험의 연구’에서 벗어나자는 그의 이론은 진보좌파 진영에 논쟁과 소통의 단초를 열어주기도 했다. 특히 ‘조국근대화론 대 대중경제론: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 논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중경제론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것을 평가받는다.

그러나 김 교수는 보수우파에 대하서도 관대하지만은 않았다. 2007년 대선 직후부터 보수의 창조적 혁신에 목소리를 높이면서 “집권 후의 프로그램을 마련하는데 게을렀던 ‘무개념’ 보수가 위기를 자초했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뉴라이트에 관련해서도 공과를 분명히 했다. “보수가 진보에 맞설 뚜렷한 이념적 토대가 없던 상황에서 뉴라이트는 자유주의를 내세움으로써 체계적이고 통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됐다”고 평가하면서도 “뉴라이트의 일부가 정치권력과 밀착돼 순수성을 잃고 말았고, 스스로의 행동반경을 좁혀놓았다. 뉴라이트는 죽었다”고 신랄히 비판하기도 했다.

김 교수가 마지막까지 역설했던 것은 새로운 보수, 그리고 성숙하고 믿음이 밑바닥에 깔린 사회였다. ‘권력이 아니라 전문성과 사상·이념적 토대를 갖춰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고 역설했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인진 총신대 교수와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25일 오전 8시다.
태그#사회·정치


[출처] 김일영, 그는 누구보다 대한민국을 사랑했으며, 가장 숭고한 가치인 자유를 위해 싸우다 간 역사가였다(언론의 부고 기사 모음)|작성자 심양섭인문사회자료실






===

https://biz.newdaily.co.kr/site/data/html/2013/03/04/2013030410006.html


<건국과 부국>-대한민국 질풍노도의 역사 이야기
지우려해도 지울 수 없는 '역사의 아버지'들
관리자
입력 2013-03-04 
대한민국 질풍노도 시기 다룬 고전 반열의 책

- <건국과 부국>김일영 著

고진석 /독서 컨설턴트


“아들에 의한 아버지 지우기와 찾기 작업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운명. 이것이고대의 오이디푸스 왕 신화부터 최근의 <시인>까지 수천 년 이어지는 수 천년 인류 역사의 지적 축적이 주는 교훈”이 책에서 나오는 시인은 소설가 이문열의 소설 주인공 시인 김삿갓을 말한다. 이 책 <건국과 부국>(기파랑 펴냄) 의 저자인 고(故)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는 "역사는 앞선 세대의 삶의 발자취이며 '아버지'를 부정하고 지우려고만 해서는 발전이 없다"고 독자들에게 충고한다.

“역사란 좀 더 살갑게 정의하자면 앞선 세대의 삶의 발자취이며, 현대사는 부모나 조부모의 삶의 궤적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즉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자식(후속 세대)이 부모(앞선 세대)를 어떻게 보고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건국과 부국>이 개정본으로 선보인 게 2010년인데, 빠른 속도로 이 분야 저술의 핵심이자 대중적 저작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문장 역시 흔치 않게 매끄럽고, 균형 잡힌 시각 역시 돋보이는 이 책은 건국과 부국을 이룬 아버지들을 다룬다. 고인에 의해 이 책에 쓰인 2005년은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역사적 평가 작업이 이루어진 때였음을 감안한다면, 더욱 경이롭다. 즉 건국의 아버지들의 역사를 부정하는 시기에 이 책은 쓰여 졌다. 이 책의 무대는 1945년 해방부터 1972년 유신체제가 성립할 때까지의 30여 년이다.

철지난 지 오래인 수정주의 시각의 '대청소'


이 시기는 국가건설과 산업화, 즉 건국과 부국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수정주의적인 시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우선 분단을 미제국주의자들의 음모(?)라는 수정주의적인 시각을 거부하고 분단을 냉전의 세계사적 전개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을 국가형성 및 국민형성의 관점에서 분석하면서 1945년부터 1960년대 이후의 발전을 국민국가 형성의 시기로 바라본다. 사실 이승만 박정희를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의 시작은 수정주의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수정주의 역사학자 브루스커밍스는 그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에서‘6•25전쟁 이전 남한에선 농지개혁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승만은 지주계급의 압력 때문에 농지개혁에 미온적이었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농민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이승만은 농지문제 해결이 급선무라는 것을 알고 농지개혁을 서둘렀다. 1950년 3∼5월 적어도 전체 농지의 70∼80%에 대한 분배가 단행됐다. 전쟁 발발 후 남한을 점령한 북한군이토지 재분배를 했지만 이미 농지를 분배받아 소농(小農)화된 대다수 농민들은 큰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

수정주의의 대표주자 커밍스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45년까지의 일제강점기를 6•25전쟁의 주요 원인으로 본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지주, 양반계급들은 식민지 국가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산업자본가로의 전환이 미약했고 이에 반발하는 소작농이 지주, 양반 계급과 갈등하고 대립이 결국 한국전쟁의 기원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계급적 대립은 오늘날 까지도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남한의 근대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제공하는 논리적인 기원이 되었다.

커밍스의 중요한 오류 중의 하나는 그가 생각한 것처럼 한국 내 지주세력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는 농업정책을 포기하고 식민지 내 일본인들이 주가 된 산업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남한의 건국은 잘못된 것이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의 건국은 정통성을 상실한 행위일 것이며 그 결과로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 정도에 지나지 않는 나라가 되는 역사해석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남한의 역사를 무능하게 보는 오류를 지닌 것이 수정주의 사관이다. 저자는 수정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려는 정직한 지식인 중에 한명이었고 이 책은 그의 충정에서 비롯된 저작이다.

지우려 했던 '역사적 아버지' 박정희의 재등장

2012년 대선에서 박정희의 딸이 당선 되면서 박정희는 현실 정치에 다시 등장한다. 박정희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던 이 시대 50대는 젊어서 지우려했던 역사적 아버지를 찾아 복권시켰다. 한국의 현대사는 마치 김삿갓이 자신의 아버지를 지우고 찾고를 반복하는 운명과 비슷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되면서 체제 경쟁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한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체제 비교는 현실로 나타난 결과가 실험을 대신해줄 수밖에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은 <건국과 부국>이다. ‘건국’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건국은 썩어빠진 조선왕조의 계승이나 상징적 의미를 가진 임시정부의 계승을 말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새로운 국가 탄생을 의미한다. 단독 정부론이 최선이 아닌 전략적 차선이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역사적 결과를 놓고 본다면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런 사고의 이면에는 통일 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민족주의적 회한이 깔려 있다. 그러나 체제를 불문하는 통일지상주의나 사회주의적 통일을 아쉬워하는 사고에는 단호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 당시 냉전의 세계사적 전개 속에서 이승만의 단정(單政) 노선은 냉전의 양대 세력 중 미국에 편승해 먼저 정부를 세우고, 이를 토대로 북한을 통일하자는 2단계 전략의 일환이었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냉전이 끝난 현 시점에서 볼 때 단정은 최선은 아니지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차선의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정체성이 모호한 통합노선 보다는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고 서방의 동맹국이 되는 단정노선이 옳았다는 것이다. 해석의 다양성이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주장은 타당하다는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말해 주고 있다.

부국을 이룬 지도자 박정희! 한국근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는 항상 박정희가 있었다. 2012년 선거가 노무현 대 박정희 패러다임으로 진행된 것 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지만 만만치 않은 절반의 반대 세력이 있음도 확인한 선거였다. 현실 정치에 영향력은 박정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려는 시도를 방해하는 것이 분명하다.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정파적 야합 또는 민주세력의 배신으로 매도되는 현실에서 더욱 그렇다. 또한 박정희에 대한 반대가 심지어 종복으로 비판당하는 현실에서 객관적이고 통합적 관점은 사라지고 악의적인 논쟁이 재생산될 위험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서는 박정희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는 좋은 책이라 말할 수 있다.

건국과 부국의 공과를 제대로 읽자

“물론 미국의 묵인이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군통수권자 중 한 사람인 장면 총리는 수도원으로 잠적해 3일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장 총리는 미 대사관에 세 차례 연락해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대응조치를 물었다. 또 다른 통수권자인 윤보선 대통령은 ‘어떤 불상사와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친서를 일선 군 지휘관에 보내 쿠데타에 내응하는 듯한 태도까지 보였다. 이런 한국 정치인들의 유약하고도 근시안적 태도가 미국의 묵인을 가져왔다.”

저자는 우선 미국이 박정희의 군사정권을 묵인하고 방조했다는 시각에 반대한다. 5.16은 어디까지나 한국인들의 선택의 문제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군인 통치하에서 정치적 파쇼화의 경향을 걱정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구악舊惡’이 매질당하는 것에 대한 후련함이 뒤섞인 평가 때문에 흔들리고 있었다....군인정권이 18년이나 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그렇게까지 부패하리라고 예측하기도 어려웠다. (335p)

이영희의 회고를 보면 5.16을 대하는 당시 지식인들의 태도를 발견 할 수 있다. 당시 지식인들이 무기력하고 답답한 사회를 혁신 할 그 무엇을 갈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16 직후 지식인들의 침묵에는 제2공화국에 대한 근원적 실망감이 있었다. 5.16초기 군정에 대한 희망을 가졌던 지식인들의 희망은 곧 실망으로 변했고 민주화 세력은 끝까지 저항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현재도 진행 중인 셈이다. 무엇이 이승만 박정희에 대한 불만의 핵심일까? 장면 내각이 5.16이 아니었다면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추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불만의 이유 중 하나이다.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병행 추진한 예는 역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 박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이라는 두 가지 선택 중 경제 발전을 택했다. 그것은 산업화 초기에 민주화를 이룬 경험적 사례가 없었고, ‘빵’ 없는 민주주의는 지탱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산업화가 성숙된 현 시점에서나 적용 가능한 병행발전론으로 박정희 정권을 단죄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대립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박정희 비판의 핵심이다. 역사적으로 유럽 중 특히 영국을 민주화의 이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 그럴까? “산업화가 성숙된 현 시점에서나 적용 가능한 병행발전론(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루야 한다)으로 박정희 정권을 단죄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실제로 영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나라가 아니라 한국처럼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가 된 대표적인 나라이다. 이 후 대부분의 국가들도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성공한 나라는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은 국가들은 권위주의 체제로 경제를 성장 시킨 것이 사실이다. 또한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도 다르지 않다. 아무도 이루지 못한 역사적 성취를 박정희에게만 강요하는 것은 지나치다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물론 비판을 넘어선 비난의 목소리도 크다. ‘이 책은 민주화 운동에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던 김교수가 반개혁 세력과 야합(?)하면서 자신의 과오를 씻기 위해 기존 보수세력 보다 더 극단적인 전향을 보인 불편한 사례이다‘ 필자의 지인이 저자에 대해 비판한 내용이다. 보수세력을 옹호하기 위해 진보진영을 격하하고 매도했다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일리가 있을 수 있지만 지나치다. 부정적인 점도 많았으나 경제성장의 물적 토대 없이 민주화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은 이제는 진보진영이 받아들여야 할 불편한 진실 아닐까? 산업화와 민주화 양자는 대립적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보자는 것이 김 교수의 진실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수정주의자들과 386세대는 한국 현대사 전체를 그들의 눈으로 재해석하려들었다. 그들에게 한국 현대사는 반민중, 반민족, 반민주의 역사였다. 그들에게 우리 현대사는 오욕의 역사이고, 지우고 싶은 대상이며 다시 쓰고 싶은 대상이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지운다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극단적 대립을 지양하고 현대사의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분석 연구하여 그 교훈을 다음세대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건국과 부국>은 좌파에 편향되었던 현대사를 객관적인 관점에서 재해석을 시도한 책이다. 좋은 술과 책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가치를 더 인정받는다고 한다. 쓰여진 지 8년이 된 이 책,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을 받는 이 책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
[추모의 글] 金一榮 교수를 떠나보내며
그대들, 그 사람을 가졌는가?
강규형   
“우리 사회가 金一榮 같은 학자를 키워 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지…”(김도종 명지대 교수)

⊙ <건국과 부국>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등 秀作 펴낸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큰 별,
    간암으로 세상 떠나
⊙ ‘품격 있는 사회’ 추구했던 학자. 수준 낮은 좌파들이 날뛸 때 준엄한 비판을 했고,
    저질스런 우파가 잘못된 길을 갈 때도 통렬하게 꾸짖어

金一榮(1960~2009)
⊙ 1960년 강원 동해 출생.
⊙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
⊙ 성균관대 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운영위원, 성균관대 사회과학연구소장,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 조선일보 아침논단 필진 역임.
⊙ 저서: <건국과 부국> <주한미군-역사, 쟁점, 전망>(공저), <1960년대의
    정치사회의 변동>(공저) <1950년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공저) 등.

姜圭炯
⊙ 서울 출생.
⊙ 연세대 사학과 졸업. 美 인디애나대 역사학 석사, 오하이오대 역사학 박사.
⊙ 現 명지대 기록대학원 교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전 KBS교향악단 운영위원.
⊙ 저서: <21세기 첫 십년의 기록> <21세기에서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다>.

김일영 교수는 2005년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재평가하는 <건국과 부국>을 펴냈다.
  金一榮(김일영)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가 2009년 11월 23일 영면했다. 향년 만 49세. 故人(고인)은 1960년 1월 강원도 동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의 어린 나이에 서울로 유학 와 성균관대에서 윤근식 교수님과 張乙炳(장을병) 교수님의 지도로 학사·석사·박사(1991)를 받고, 母校(모교)에서 1992년 9월부터 교수 생활을 했다.
 
  교수 생활 중에 성균관대 사회과학연구소장, 미국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방문학자(visiting scholar), 일본 규슈(九州)대 법학부 방문학자를 역임했고, 재직 중 여러 번 최우수 연구교수, 우수 강의교수로 선정됐다.
 
  2007년에는 성균관대 총동창회와 성균경영인포럼에서 공동으로 주는 ‘성균학술상’을 수상했다. 한국정치학회·한국국제정치학회·한국국제정치사학회의 임원으로 활발한 학회 활동을 했고, 여러 정부·사회기관의 자문, 바른사회시민회의·교과서포럼·<시대정신> 등의 사회참여, 그리고 여러 언론매체에의 활발한 기고 활동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고인은 학생들에게는 자상하고 성실한 스승이었다. 교수의 3대 책무를 교육·연구·(사회)봉사라고 했을 때, 이 세 분야에서 모두 빼어난 활동을 한 분이었다.
 
  2009년 초 간암 확진을 받고 투병 중이긴 했지만 젊고, 워낙 회복의지가 강해서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줄 몰랐다. 돌아가기 며칠 전 병원으로 찾아뵀을 때도 비교적 건강했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면서 같이 웃었다. 일요일날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보니 의식이 없고, 그날을 못 넘긴단 말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고인은 돌아가기 사흘 전 병문안 오신 연세대 金世中(김세중) 교수에게 “선생님, 염려 마세요. 저 일어납니다”라고 말했다. 이철우 교수와 내가 “저 알아보시겠어요?”라고 물으니 눈을 번쩍 뜨고 뭔가를 얘기하려 안간힘을 쓰기에 “말씀 안 하셔도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그때 무슨 말을 하려고 그리도 노력을 했는지….
 
  고인은 일요일 자정 무렵에 사랑하는 가족(조인진 총신대 교수와 1남1녀)과 평소에 좋아하던 趙全赫(조전혁) 의원의 손을 잡고 세상을 떠났다. 빈소에 있는 그의 영정은 평소의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금방이라도 예전처럼 “강 교수~ 오늘 나랑 얘기 좀 나눠요”라고 얘기하며 밖으로 나올 것처럼 보였다.
 
 
  닮고 싶었던 완벽한 롤 모델
 
  빈소에는 평소 고인을 좋아했던 분들의 조문행렬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학자로서 훌륭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따듯했던 분이기에 조문객들의 슬픔 또한 컸다.
 
  영결식을 마치고 당신께서 거의 일평생을 보낸 성균관대의 연구실에 가족이 모셔온 고인의 영정과 함께 들어갔었다.
 
  고인이 “이전 쓰던 연구실이 좁았었는데, 요번에 나온 연구실이 넓고 깨끗해서 좋다”며 “꼭 놀러오라”고 한 것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그리고 “많은 책을 소장할 수 있게 이중으로 된 책장을 마련했다”고 좋아했는데…. 고인이 자랑하던 이중책장을 어루만지며 마음이 아팠다.
 
  고인을 처음 만난 것은 국제정치학회의 외교사분과 모임에서였다. 하얀 얼굴에 초롱초롱한 눈빛, 해맑은 성품, 젠틀한 몸가짐, 그리고 유려한 언변이 인상 깊었다. 이후 고인과는 學緣(학연)·血緣(혈연)·地緣(지연) 등 어느 부분에서도 겹치는 곳이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받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 마음 터놓고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인생 선배이자 선배 학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필자에게 행운이었다. 서로의 고민도 스스럼없이 털어놓고, 학문적인 대화를 나누고, 고인의 군더더기 없는 성격과 외모를 꼭 닮은 고인의 명쾌한 글을 읽으며 행복했고 많은 것을 배웠다.
 
  고인과 대화를 나누면 언제나 배우는 것이 있어서 좋았다. 진지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유쾌했던 것은 고인의 온화한 인품 덕이었다. 필자에겐 진지함과 열정, 냉철한 논리와 뜨거운 가슴을 적절한 비율로 가진, 그래서 닮고 싶은 완벽한 롤 모델(role model)이었다.
 
  많은 학업과 일을 하시면서도 언제나 평상심을 잃지 않는 것에 대해선 경이의 마음으로 바라봤다. 필자 같으면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짜증이 났을 법한데도 언제나 한결같은 표정과 말투로 세상을 살았다. 필자보다 불과 몇 살 위였지만, 고인은 필자에게 마음의 스승이었고, 선비의 상징이었고, 인생의 벗이었다.
 
  고인은 현대한국정치사, 한국외교사, 동아시아 정치경제발전모델, 국제관계론의 젊은 碩學(석학)이었고, 법정치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젊은 나이에 이미 많은 업적을 내고 大家(대가)로의 자리에 한발짝 한발짝 다가서고 있었으며, 한국정치학계와 한국현대사학계를 이끌 차세대 리더였다.
 
  명지대 김도종 교수의 말처럼 “우리 사회가 김일영 같은 학자를 키워 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지를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다. 실로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큰 손실이라 아니할 수 없고, 한국사회 자체의 불운이라 할 수밖에 없다.
 
 
  ‘품격 있는 사회’ 추구
 
  고인의 학문적 성향은 언제나 합리적이고 학구적이었다. 우리 세대 대부분의 학자가 그렇듯이 학창시절 진보좌파의 길을 모색하다가, 학문이 무르익으면서 이성적인 보수의 길을 가며 한국사회의 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고인은 파당적인 이데올로그가 아닌 균형 잡힌 이론가이자 역사가였다. 학자가 성실함과 총명함을 공히 갖기란 매우 어렵지만, 고인은 두 가지를 겸비한 드문 예였다. 2008년에만 12편의 논문을 발표한 것만 봐도 고인의 성실성과 생산성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국내에서만 공부하신 분들이 자칫 가질 수 있는 식견의 협소함도 고인에게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어떤 유학파보다 더 넓은 통찰력을 갖고 있고, 최신 이론에 해박했다. 고인은 정치학자들이 1차사료에 대해 등한시하는 것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고 성실히 1차사료를 섭렵했다.
 
  그 결과는 이론과 史實(사실)의 조화 속에서 탄생하는 독창적인 논리였다. 그래서 무작정적인 찬미가 아닌 학구적 분석을 통해 李承晩(이승만) 시기와 朴正熙(박정희) 시기에 대한 再(재)평가를 시도했다. 방일영문화재단에서 펴낸 <건국과 부국>은 이승만·박정희 시기에 대한 그의 연구결과를 집대성한 책이다.
 
  고인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편집출간을 통해 한국사회에 대한 인식을 한 단계 더 높였다. 이외에도 수많은 연구와 저술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편향되지 않게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했고, 앞으로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끊임없이 제시했다.
 
  고인이 추구했던 사회는 한마디로 ‘품격 있는 사회’였다. 그래서 수준 낮은 좌파들이 날뛸 때도 준엄한 비판을 했고, 저질스런 우파가 잘못된 길을 갈 때도 통렬하게 꾸짖었다. 자유주의와 책임에 기반한 성숙한 시민사회를 갈구했기에, 생전에 좌건 우건 정치권력화를 추구하는 또는 정치권력과 밀착하려는 시민단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고인은 투병 생활에 들어가기 전까지 기존 저서인 <건국과 부국>을 수정보완해서 학술적으로 더 탄탄한 책으로 만드는 한편, 그 책을 읽기 쉬운 대중용으로도 출간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국제정치경제학 이론, 만주국에 대한 연구, 냉전사에 대한 연구·번역 등을 심화해 나가고 있었다.
 
  全相仁(전상인) 서울대 교수는 영결식 조사에서 “반백년을 채 못 살았어도, 업적으로는 100년 이상을 산 사람”이라고 고인을 평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고인의 애송시는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였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고인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


==


==


==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