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6

[전후 최고 문제작가 ‘손창섭 살아있다’] (中) 마침내 밝혀진 은둔 30년 - 국민일보

[전후 최고 문제작가 ‘손창섭 살아있다’] (中) 마침내 밝혀진 은둔 30년 - 국민일보



[전후 최고 문제작가 ‘손창섭 살아있다’] (中) 마침내 밝혀진 은둔 30년
입력 2009-02-19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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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작가티 안내고 궁핍에도 꼿꼿… 奇人의 삶”

지난 14일 오후 2시쯤, 일본 도쿄 인근 히가시구루메시의 한 서민 아파트. 문패는 '손창섭'이 아니라 '上野'(우에노)로 붙어 있었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연 순간 낯선 방문객과 맞닥뜨린 손창섭의 부인 우에노 지즈코(84) 여사는 "한국에서 찾아왔다"는 말에 헝클어진 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창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한국 사람이 집을 찾아온 건 거주한 지 33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라면서도 "옆집 사람이 들을지 모르니 한국말을 쓰지마라"고 당부했다. 일본 사회에서 한국인과 결혼해 산다는 게 간단치 않은 일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자칫하면 이웃주민들로부터 이지매(따돌림)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 선생님은 어디 계시냐"는 질문에 그는 "폐에 물이 고여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고비는 넘긴 것 같은데 의식이 왔다갔다 해요. 입원한 지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 어떤 때는 문병 간 나도 못 알아봐요. 아무래도 회복될 기미는 없는 것 같아요."

집이래 봤자 좁디좁은 두 칸짜리 방이 전부였다. 거실 겸 안방인 6조 다다미방엔 밥상이 있었다. 그는 밥상에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다다미방의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손 선생은 이곳에 웅크리고 앉아 온종일 글을 쓰곤 했지요. 밥도 이 자리에서 먹고, 책도 이 자리에서 읽었지요."

겨우 궁둥이를 붙일까 말까 한 다다미 한 장에서 30년 세월이었다. 처절한 작가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흔히 무슨 무슨 문학상을 받으려고 구걸에 가까운 작태를 보이는 게 작금의 한국 문단의 현실이라 할 때 손창섭의 은둔은 이 시대에 문학인의 옷고름을 다시 한 번 여미게 하기에 충분했다. 도일 이후 한국일보에 원고지를 우편 송고해 연재하던 장편 '유맹'(1976년 1∼10월)과 '봉술랑'(1977년 6월∼1978년 10월)도 이 자리에서 쓰여진 것이었다. '유맹'은 재일 한국인 문제를 주제화한 것이고, '봉술랑'은 원나라 지배 하의 고려시대를 다룬 것이다. 이는 손창섭이 도일 이후 민족 정체성 문제에 관심을 보여주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연재 소설을 끝으로 한국과 소식을 끊었으니 그의 단절은 31년에 이른다.

"참으로 별난 사람이지요. 평생 작가티를 내지 않았어요. 내가 한국에서 올 때 왜 그 많은 책을 버리고 왔냐고 속상해 했지만 별난 사람이려거니 하고 이해할 수밖에요. 참으로 기인다운 삶을 살았지요."


욕망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통제한 작가가 손창섭이었다. "궁핍한 생활에도 선생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어요. 이주 초기엔 내가 한국에서 오는 약간의 인세와 서울 흑석동 집을 판 돈을 은행에 맡겨 그 이자로 꾸려나갔지요. 그나마 10여년 전에 인세마저 끊겼는데 선생은 일본에서 활동하지 않은 까닭에 연금이 나오지 않아 병원에 입원시킬 때도 애를 먹었지요."

우에노 여사는 "허리가 아파 일주일에 두어 번 수영장에 다니고 있다"면서 "아직 눈도 밝고 귀도 밝은 게 손 선생을 앞세워 묻고 갈 수 있을 것 같다"며 허망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 끝에 천장이 내려앉아 장롱 위에 군데군데 받침대를 세워둘 만큼 궁핍한 생활의 배반 같은 게 묻어 나왔다. 그나마 손창섭이 기거하는 옆방은 붙박이장을 빼면 다다미가 겨우 4장이었다. 가난이 찍찍 흐르는 공간. 인생이 참으로 공허할 만한데도 웅크리고 앉아 원고지를 메웠으니 손창섭의 천직은 작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돈도 명예도 심지어 글에서마저도 초연한 채 인간 존재 하나만을 껴안고 살아왔던 것이다. 과연 그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지식인도 문화인도 지워버렸던 것일까. 가족 관계에 대해 묻자 우에노 여사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6·25전쟁 때 부산에서 고아 아이를 수양딸로 들였지요. 그때는 고아가 차고 넘쳐서 선생하고 나하고 의견일치를 본 것인데 이름은 영자(가명)라고 서울서 중학교 2학년까지 다녔지요. 일본에 건너와 일어 때문에 다시 1학년을 다녔는지, 지금은 결혼해 살고 있지요. 영자도 환갑 가까운 나이예요."

우에노 여사는 딸과 오가며 지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제가 일본 닝하다에 사둔 땅이 있는데 그곳에 집을 지으려고 하자 선생이 닝하다는 너무 추워 가기 싫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지요. 사위가 닝하다 사람인데, 선생은 닝하다에 가기 싫어하고…."

우에노 여사는 이 대목에서 "영자 아버지가∼"라고 한국어로 말하는 등 옛 시절이 주마등같이 스쳐가는 듯 가끔 울컥거렸다. "지금 소원은 내가 건강할 때 선생을 먼저 묻고 가는 것인데 그렇게만 된다면 선생의 복이지요. 내가 살아있을 때 죽었으면 좋겠는데…. 병원에 갈 때마다 난 혼자 눈물을 흘리지요. 그런데 선생은 슬픔을 몰라요. 눈물도 없지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난 다시 눈물을 흘리고…. 고베 대지진 때 오빠가 죽고 내 친정은 엉망이 되어 연락까지 두절되었으니 선생과 나는 고아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살았어요."

손창섭 옆에 우에노 여사가 있었던 게 아니라 우에노 안에 손창섭이 있었다. 도일의 이유는 문학보다 인생을 택한 순애보적 부부애에 있었다.

도쿄=글·사진 정철훈 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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