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2

“역사학자 90%좌파” 발언의 뿌리 < 시사IN 천관율 기자 2015

“역사학자 90%좌파” 발언의 뿌리 < 사회 < 기사본문 - 시사IN

“역사학자 90%좌파” 발언의 뿌리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학계의 반발이 거세다. 정부는 ‘올바른 역사관 확립’을 내세우지만 그에 앞서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올바른 역사가 무엇인지 국가가 결정하겠다는 발상이 과연 올바른가?

천관율 기자

입력 2015.10.26
 
호수 423

커버 스토리

2006년 2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라는 책이 세상에 나왔다. 식민지 시기와 해방 후를 다룬 논문 28편을 모은 초대형 프로젝트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출간 때부터 ‘뉴라이트의 현대사 교과서’로 불리며 논란을 일으켰다. 분량만 1500쪽에 이르는 전문 연구서이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보수층에서 “좌익의 역사 왜곡을 물리치기 위한” 필독서로 꼽힌다. 연세대 김철 교수(국문학)는 이 ‘재인식’의 편집자 4인 중 한 명이다.

2015년 9월21일, 연세대 인문·사회 분야 교수 132명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연세대 교수 성명’을 냈다. 성명서는 “국정화를 추진하는 것은 학계 다수의 해석을 부정하고 권력의 해석을 강요하려는 시도”라는 단호한 표현을 썼다. 132명 명단 중에 김철 교수가 있다. 그저 이름을 올린 정도가 아니라 준비 단계부터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뉴라이트 교과서’의 편집자가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이름을 걸고 반대한다? 논란을 진영 대결(‘친일 독재 미화 교과서’ 대 ‘주체사상 찬양 교과서’)로 이해하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전향’이라도 한 걸까.

김철 교수는 학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전향’과 같은 표현을 납득하지 못한다. 애초에 ‘재인식’을 뉴라이트 교과서라고 부르는 이들에게도 단호히 항의하던 그다. 연세대 연구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저 제자리에 서 있었는데, 2006년이나 지금이나 방향만 바뀐 채로 똑같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질문은 무엇이 ‘올바른 역사’인지 국가가 결정하도록 두어도 되느냐다.”



ⓒ시사IN 신선영10월12일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교과서 국정화 방안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는 “올바른 역사관 확립을 위한 교과서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문구가 걸려 있었다.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여론 전선은 대체로 이념 지형을 따라 늘어서는 추세다. 
진보는 교과서 국정화로 박근혜 정부가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를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버지 제사상에 올릴 교과서”라는 야유도 등장했다. 
보수는 현재 교과서 대부분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가르치는 등 친북 색채가 강하고, 대한민국의 성취를 제대로 소개하지 않는 자학사관에 빠져 있다고 주장한다.

난제가 있다. 진보 처지에서 보면, 국정 역사 교과서가 출판은커녕 집필진도 확정되지 않았다. 2017년 도입 목표를 맞추려면 부실 집필이 예상된다는 비판은 유력하지만, 내용 논란은 현 시점에서 넘겨짚기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다. 역사 교과서가 보수적이면 미래 세대가 보수적이 된다는 암묵적인 전제도 깔려 있는데, 증명이 불가능한 가설 수준의 얘기다.

진보·보수 떠나 ‘국정화 논쟁’의 핵심 맥은…

보수의 처지에서 보면, 현행 교과서가 친북 색채가 강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취약하다. 정부와 새누리당이 파상 공세를 펴는 ‘교과서 왜곡 사례’를 실제로 살펴보면 앞뒤 문맥을 잘라낸 자의적인 해석이 대부분이다(교과서에 주체사상? 실제로 살펴보니 참조). 보수도 ‘좌편향 교과서 때문에 청소년이 좌편향되고 있다’라는, 역시 검증 불가능한 주장에 기댄다. 생산적인 논의가 될 리 없는 구도다. “무엇이 ‘올바른 역사’인지 국가가 결정하도록 두어도 되느냐”라는 김철 교수의 질문은 그래서 시의적절하다. 넘겨짚기와 자의적 오독을 걸러내고도 교과서 국정화 논쟁의 핵심 맥을 짚는다.

‘올바른 교과서.’ 교육부가 내놓은 역사 국정교과서 공식 명칭이다. 10월12일 교과서 국정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교육부는 기자회견 제목을 “올바른 역사관 확립을 위한 교과서를 만들겠습니다”라고 뽑았다.

‘올바른 역사관’의 정의가 뭘까? 황우여 교육부 장관의 발표문을 보면, 크게 두 축이다. 첫째, 객관적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둘째, 헌법 가치에 충실해야 한다. 교육부의 국정화 추진 보도자료도 비슷하다. “역사 교과서가 검정제 도입 이후 국민을 통합하고 헌법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건전한 국가관과 균형 있는 역사 인식을 기르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각종 사실 오류와 편향성을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기 위한 교과서를 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검정제로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했다.”

정론처럼 보이지만 동어반복이다. 교육부의 논리에서는 ‘무엇이 객관적 사실인가’와 ‘헌법 가치에 맞는 역사 해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남는다. 무엇이 올바른가를 판단할 권한을 결국 누군가는 갖게 된다. 교과서 국정화라는 발상은 ‘올바른 역사’가 무엇인지를 국가가 판단하겠다는 선언이다.

학문의 영역에서 ‘무엇이 올바른가’를 판단하는 방법은 이와는 정반대다. 경쟁하는 이론과 가설이 자유롭게 부딪치고, 사실과 논리에 따른 토론이 벌어지며, 학문공동체가 합의하는 정론이 등장한다. 국가의 개입은 ‘경쟁하는 이론과 가설’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국가 공인 이론 하나만 남기기 때문에, 무엇이 올바른가를 판단하는 데 방해가 된다. 교육부가 ‘경쟁하는 가설이 있으면 병기하겠다’라고는 밝혔지만, 학문 공론장에서의 경쟁과 정부의 편집을 거친 병기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다른 분야 학자들도 ‘국정화’에 분노하는 이유

역사학계를 넘어 다른 분야의 학자들도 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관심을 갖고 분노하는 대목이 여기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이근 교수(국제정치학)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발상은 ‘무오류성’을 지향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기타큐슈 대학 이동준 교수(국제관계학)는 〈한국일보〉 칼럼에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정부의 태도를 ‘반(反)지성주의’로 규정했다.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자면서도 무엇이 올바른지에 대한 그 어떤 지적인 토론도 불허하겠다는 것이다. (…) 권력자들은 모든 쟁점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 결정을 내린다.”



ⓒ연합뉴스현행 고교 한국사 검정교과서(위)에는 2013년 교육부가 내린 수정명령이 모두 반영된 상태다.

이 ‘정답을 알고 있다’는 태도를 박근혜 대통령이 정확히 보여주었다. 10월13일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올바른 역사 교육을 통해서 우리 아이들이 우리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올바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고 자라나도록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바르다’는 표현이 한 문장에만 세 번 등장한다.

지식의 ‘정본’을 국가가 정할 수 있다는 발상을 누구보다 혐오했던 사상가가 있다. 보수 인사들이 사상적 원조로 즐겨 인용하는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다. 주저 〈노예의 길〉에서 하이에크는 전체주의 사회를 이렇게 야유한다. “사실과 이론은 당연히 ‘공식적 교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지식을 전파하는 모든 기관은 당국이 정한 결정이 올바르다는 믿음을 확산시킬 것이다. (…) 전체주의에서는 정치적 견해에 직접 영향을 주는 역사, 법, 경제학과 같은 학문에서 단지 공식 견해에 대한 옹호만이 유일하게 허용될 뿐이다. 이 분야에서는 진리의 탐색조차 불가능하며, 당국이 어떤 교리를 가르치고 출판할지 결정한다.” 하이에크의 눈에 국가가 지식의 ‘정본’을 정한다는 발상은 전체주의와 동의어였다.

김철 교수는 좌우 모두에 좌절한 경험이 있다. 2006년 ‘재인식’을 출간하면서 ‘뉴라이트 교과서’라는 동의할 수 없는 딱지 붙이기에 시달렸다. 2015년에는 교과서 국정화라는 퇴행을 지켜봐야 했다. “역사가 ‘이야기’라고 한다면, 자기가 원하는 버전의 이야기만 옳고 정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진보·보수 양쪽에 다 있다. 한쪽은 무조건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 반대쪽은 또 무조건 ‘북한 찬양 교과서’…. 이건 학문적 대화가 아니다. 그냥 종교전쟁이다.”

국정교과서 집필 보이콧 선언이 역사학계에 번져 나가는 가운데,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근현대사는 역사가만이 아니라 정치사·경제사·사회·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분들을 초빙해서 구성할 것이다.” 정치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한 사회과학자들도 필진으로 참여시키겠다는 얘기다.

이 발언은 한국의 보수 블록이 역사학계를 보는 시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좀 더 노골적인 속내는 ‘재인식’ 2권 편집자 4인의 대담에서 드러난다. 이 대담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정치외교학)는 “한국의 역사 연구와 서술에 스탈린주의적 편향이 아직도 남아 있다. 역사 연구가 현실 과제를 해결하는 전략·전술에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평가가 얼마나 적절한지를 떠나서, 이런 정서가 보수 블록에 폭넓게 퍼져 있다. ‘재인식’에 필진으로 참여한 연구자 28명 중 역사학 전공자는 열 명도 되지 않는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나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내놓은 “역사학자의 90%가 좌파다”와 같은 발언은 거친 데다가 사실도 아니지만, 뿌리를 더듬어 내려가 보면 이런 정서에 기대고 있다. 언론인 류근일씨는 10월13일자 〈조선일보〉 칼럼에서 특유의 노골적인 표현으로 “관련 학계와 연구자들 등 1만5000명이 그런 쪽(자학사관)으로 한 패거리가 돼 돌아가고 있다”라고 썼다. 보수 일각의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국정화란 비상시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극약처방이다. 다시 류근일 칼럼의 한 대목이다. “자율의 시장을 열었더니 자율을 파괴하는 세력이 그 공간을 독차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대목에서 ‘국정화를 지지하는 강경파’와 반대 블록의 결이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한국 역사학계가 폐쇄적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동의하는 사람조차도 국정화 반대 전선에 설 수 있다. 국정화는 극약처방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합리적이라는 평을 받는 보수 인사들에게는 “대안적인 검정교과서를 내실 있게 만들어서 보급하면 될 일을 왜 이렇게 무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이야기를 정본으로 만들겠다는 종교전쟁에, 이번에는 국가가 직접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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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 가르치는 금성 교과서 뜯어보기

새누리당은 국사 교과서와 관련해 아이들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배운다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또한 현행 교과서가 좌편향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교과서에 어떤 내용이 실려 있는지 교과서 논란의 핵심을 짚어보았다.전혜원 기자
 2015.10.26 12:03
호수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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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이 여의도에 내건 현수막 내용이다. 김정훈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은 현행 교과서가 좌편향됐다며 “친북 사상을 퍼뜨리는 숙주”라고 했다. 반면 야당은 정부·여당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목적을 ‘친일·독재 미화’로 규정했다. 실제로 교과서에 어떤 내용이 실려 있는지, 양쪽 주장이 어디서 갈리는지 논란의 핵심을 짚었다.

교과서에서 주체사상을 가르치나?

현재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 모두 주체사상을 싣고 있다. 보수색이 짙은 교학사 교과서도 비중 있게 다룬다. 북한이 김일성 독재 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다. 비판적인 맥락으로 쓰지 않은 교과서는 하나도 없다. 이는 ‘북한 사회의 변화와 오늘날의 실상’을 살펴보라는 2009년 교육과정 개정과, ‘분단 이후 북한의 변화 과정을 서술’하라는 교과서 집필 기준에 따른 것이다. 이들 교과서에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9월에 발표된 2015년 교육과정 개정은 아예 북한의 변화와 관련된 학습 요소로 ‘주체사상과 세습 체제’를 명시했다.







보수가 주체사상을 가르친다며 가장 많이 언급하는 교과서는 금성출판사판 407쪽 ‘더 알아보기-주체사상의 성립과 그 역할’(〈그림 1〉)이다. 이는 ‘북한, 세습 체제를 구축하다’라는 단원의 ‘김일성 유일 지배 체제의 성립’이라는 소주제에 딸린 자료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김일성주의’로 천명되면서 반대파를 숙청하는 구실 및 북한 주민을 통제하고 동원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을 포함한 대목 전체가 2013년 11월 교육부가 내린 수정명령을 반영해 2014년 1월 교육부의 최종 승인을 받은 내용이다.



6·25 전쟁의 책임이 남북한 모두에게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

논란이 되는 대목은 미래엔 317쪽 ‘탐구 활동’에 실린 역사학자 김성칠의 증언(〈그림 2〉)이다. 이 자료 중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동기로 본다면 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들은 피차에 서로 남침과 북벌을 위하여 그 가냘픈 주먹을 들먹이고 있지 아니하였는가.” 교육부는 이 자료가 6·25 전쟁의 책임이 남북 모두에게 있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북한의 남침을 직접 보여주는 자료로 교체할 것을 명령했다. 현재 미래엔 교과서는 이 자료를 ‘북한군의 전투 명령’으로 대체했다.

교육부가 문제 삼는 문장 바로 뒤에 “인민공화국에서의 끊임없는 남침의 기획과 선전은 이미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고 또, 이미 실천을 통하여 분명히 되고 말았으니 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라는 표현이 있다. 남한에도 전쟁을 부르짖은 이들이 있었음을 증언하는 내용도 이어진다. 집필자인 한철호 동국대 교수(역사교육과)는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라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실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바로 앞쪽에 김일성과 스탈린이 남침을 논의하는 사료가 이미 실려 있어서 ‘오해할 소지’도 크지 않다. 한국전쟁에 대해 남침이라 쓰지 않은 교과서는 하나도 없다.






북한은 국가 수립, 남한은 정부 수립으로 가르친다는 건 무슨 얘긴가?

현행 8종 교과서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아닌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쓴 교과서는 하나도 없다. 집필 기준이 그랬다. ‘2009년 교육과정 개정’에 따른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보면, “8·15 광복 이후 전개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파악한다”라고 되어 있다.



오히려 교육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표현하지 않도록 수정을 권고한 적이 있다. ‘교학사’ 교과서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건국의 출발을 하게 되었다”(307쪽)라고 쓴 채 2013년 8월 검정을 통과했다. 이에 대해 2013년 10월 교육부는 “대한민국은 제헌 헌법에도 명시하고 있듯이 3·1운동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수립되었음. 따라서 건국이란 용어는 적절하지 않음. 집필 기준 등에 의거하여 ‘건국’이 아닌 ‘정부 수립’ 등으로 수정 필요”라고 권고했다.

그런 교육부의 방침이 바뀌었다. 10월2일 교육부는 “북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남한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서술하여, 마치 북한은 ‘국가’를 수립하고 남한은 온전한 국가가 아닌 ‘정부’를 수립했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9월 발표된 2015년 교육과정 개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모두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바꿨다. ‘정부 수립’에서 ‘건국’으로 한 발짝 이동한 셈이다.

건국이 언제인가를 두고 현재 두 가지 해석이 대립하고 있다. 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라고 되어 있는 만큼 대한민국이 세워진 시점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이라는 관점이 하나다. 다른 하나는 1948년 8월15일을 ‘건국일’로 명확히 해야 북한에 대한 남한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대체로 전자가 진보, 후자가 보수의 주장으로 논란이 계속돼왔다.





수정명령을 내려도 집필진이 소송을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교육부가 호소하는데?


현재 교과서는 교육부가 2013년 11월 내린 수정명령을 반영해 2014년 1월 최종 승인을 받은 버전이다. ‘교학사’ 교과서가 오류가 너무 많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교육부는 2013년 10월 ‘교학사’ 251건을 포함해 검정을 통과한 8종 교과서 서술 829건에 대해 수정·보완을 권고했고, 이에 따라 발행사가 제출한 수정·보완 내용 중 41건에 대해 수정명령을 내렸다. 일부 저자들이 수정을 받아들이지 않자 교과서 발행사들이 저자 동의 없이 교육부 명령에 따랐다. 그해 12월 교학사, 리베르스쿨을 제외한 6개 출판사(금성출판사, 두산동아, 미래엔, 비상교육, 지학사, 천재교육) 집필진 11명이 33건 수정명령 취소 청구 소송을 냈다.

집필진은 수정명령이 적법하지도 정당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수정명령이 실질적인 내용 변경을 가져오는 경우에는 심의에 준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 이번 수정명령은 기간도 짧고 심의 과정도 투명하지 않아 절차를 거쳤다고 보기 어려우며, 내용도 사실상 특정 관점을 강제해 재량을 일탈한다는 주장이다. 미래엔 집필에 참여한 원고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8개월 검정 과정에서 전혀 문제 삼지 않았던 부분을, 교학사 교과서가 문제가 되니까 전체 교과서를 일괄해 수정명령을 내렸다. 심의에 누가 참여했는지도 공개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1, 2심 재판부는 절차와 내용 모두 교육부의 재량권 안에 있다고 봤다. 10월1일 집필진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교육부는 집필진이 소송을 반복하는 것이 검정제의 ‘근본적인 한계’라며 국정화의 논거로 든다. 그러나 소송 제기는 시민의 권리다. 집필진이 대법원에서도 패소하면 교육부의 수정명령은 그대로 인정된다. 집필진이 승소한다면 수정명령이 부당했다고 사법부가 확인하는 것이 된다. 국정화 도입이 필요한 이유와는 관련이 없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인데, 교육부의 수정명령을 따르는 편이 낫지 않나?


교육부가 수정명령을 내린 내용을 보면 “오해할 소지가 있으므로”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북한 토지개혁의 한계를 ‘무상 몰수, 무상 분배’라고만 하지 말고 좀 더 상세히 서술하라는 요구(〈그림 3〉)가 대표적이다. 교과서의 특수성을 감안한 인식이다. 하지만 특정 사관을 강제하거나 사상 검증 성격이 있는 요구 등(“김일성이 활동한 동북항일연군 분량이 많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 서술을 추가하라” “북한 인권 문제를 사례를 들어 상세히 써라”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의 주체를 명확히 하라”)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혼재돼 있다.





금성출판사 407쪽 ‘더 알아보기-주체사상의 성립과 그 역할’의 경우, 수정 전부터도 “1970년대 이후 주체사상은 ‘김일성주의’로 천명되면서 김일성 유일 지배 체제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라는 서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 학계의 주장에 따르면, 주체사상은~”이라는 표현은 “북한 학계에서는 주체사상을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라고 수정했다.

기존에 문제 삼지 않은 대목을 거론하며 국정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수정명령에서는 문제 삼지 않은 ‘보천보 전투’ 대목(두산동아 247쪽)을 국정화 논란 과정에서 뒤늦게 문제 삼았다. 교육부는 “‘보천보 전투’에 대해 신문 호외와 함께 ‘김일성 이름도 국내에 알려졌다’는 등의 서술을 해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보천보 전투’ 확대·과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라고 색깔론을 제기했다. ‘이름이 알려졌다’라는 사실 기술을 ‘김일성 우상화’라는 가치판단과 뒤섞어버렸다.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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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과 확 달라진 대통령의 역사인식

김동인 기자 2015.10.26
호수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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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해온 이들의 말 바꾸기가 화제다. 가장 극단적으로 바뀐 이는 교과서 주무부처인 교육부의 김재춘 차관이다. 김 차관은 과거 민주주의 발전에 따라 교과서 발행 제도가 국정-검인정-자유발행 순서로 발전해 나간다고 주장했다. 2004년 ‘교과서 자유발행제의 의미 탐색’ 논문에서는 주요 과목의 교과서가 약한 정도의 자유발행제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2011년 ‘개정 교육과정 및 교과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용도서 구분 연구’에서는 인정제도의 확대를 주장했다. 학자로서 쌓아올린 연구 실적을 단번에 뒤집는 선택을 내린 것이다.

ⓒ연합뉴스박근혜 대통령은 2005년 “어떠한 경우든 역사에 관한 것은 정권이 재단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은 40년간 고수해온 원칙을 바꿨다. 유신 정권이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기 직전인 1973년, 김 위원장은 〈동아일보〉에 “소수 저자에 의한 교과서는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라고 기고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10월12일 기자회견에서 “나는 1970년대에 검인정을 외쳤다. 그러나 역사학의 이념 문제가 논란이 되는 걸 보며 일단 숨을 고른다는 차원에서라도 통합 교과서를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며 직접 변화의 이유를 설명했다.

새누리당 정책 연구기관인 여의도연구원은 2013년 11월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과 해법’이라는 정책 리포트를 통해 “국정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권위주의 내지 독재국가다. 우리나라도 검정제로 발행한 교과서가 국정제로 만든 교과서보다 질적 수준이 제고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이 리포트는 특히 ‘국정제의 단점’으로 “특정 정권의 치적을 미화할 수 있으며, 역사 교육의 국가주의적 편향이 심화될 수 있음”을 지적했는데, 이는 지금 새누리당의 당론과는 정반대되는 견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대통령의 변화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 시절이던 2005년 1월19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역사에 관한 일은 역사학자가 판단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든 역사에 관한 것은 정권이 재단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한 것에 대한 일침이었다. 그러나 10년 후, 박 대통령은 당시 자신의 말과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다.


김동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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