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7

알라딘: 내 마음의 망명지 유종호 2004

알라딘: 내 마음의 망명지

내 마음의 망명지
유종호 (지은이)문학동네2004
-03-22








Sales Point : 211

7.5 100자평(0)리뷰(4)

356쪽
책소개
우리 평단의 거목 유종호 교수가 쓴 산문집. '책 읽기와 세상 보기'라는 부제에 따라 짧게는 2페이지, 많으면 4~5페이지를 넘지 않는 글 속에는 필요 이상 넘치지 않되 부지런히 읽고 쓰고, 세상을 바라보며 감식안을 갈고 닦는, 문학을 향한 저자의 자세가 잘 드러나 있다.

산문집 속에는 오늘의 평론가 유종호를 있게 한 책들이 있고, 이국 땅에서 반딧불이를 보고 감상에 젖어 시를 쓰고 망명하듯 음악에 빠져들고, 스쳐 지나가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사내 유종호가 있고, 때로 우리를 답답하게 만드는 세상에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는 어른 유종호도 있다.

총 4부로 나누어진 책의 1부에는 저자가 읽은 책에 관한 짧은 글들, 2부에는 사사로운 이야기와 비평적인 단문, 3부에는 일상의 단상들이 실려있다. 4부에는 시사에 관해 쓴 글들을 모았으며 끝자락에 발표 시기를 달아놓았다.


목차


책머리에

제1부 첫사랑과 메밀꽃 - 나의 책 읽기
첫사랑과 메밀꽃 / 버림받는 청춘소설에 부쳐 / <마의 산> 가는 길 / 김동석과 토마스 만 / 숨어 있는 신의 침묵 / 왕따와 불리와 이지메 / 문체와 인물 조형 / 교실에서 보인 눈물 / 유나와 수나와 김동석 / 김동인과 한양 방화 / 문체의 옹호 / 불행은 우리의 거처 / '낭만적 망명자' 게르첸 / 정치적 인간의 초상 /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 바흐친의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 냉혹한 생존법칙, 이솝 우화집 / 아이자이어 벌린의 <칼 마르크스> / 레스터 C. 서로의 <자본주의의 미래> / <동주 열국지(東周 列國志)> /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 이태준의 <소련 기행> / 서기원의 <광화문> / 이상옥의 <이효석 - 작품과 생애> / 故 이문구 형을 보내며 / 문학 쇠퇴와 포르노토피아 / 나의 애장본

제2부 내 정신의 망명처
내 정신의 망명처 / 이 한 장의 사진 / 반딧불이 - 생산적 나태 / 뛰어남에 대한 경의 / 정지용과 채동선 - 시와 서정 가곡의 만남 / 서리병아리와 서리가마귀 / 의심의 자발적 정치 - 서정시 쓰기가 힘든 시대는 곧 서정시가 필요한 시대이다 / 문학 교육에 대한 소견 - 지도자부터 공부해야 / 영원한 마음의 고향 - 문학 속의 산 / 꾀와 힘 - 옛 이야기가 시사하는 것 / 내 삶의 소롯길에서 - 시집에 얽힌 이야기 / 눈물 젖은 두만강 / 내 글이 걸어온 길

제3부 행복의 얼굴
행복의 슬픈 얼굴 - 내가 읽은 가장 짤막한 행복론 / 명일 만들기 -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 쇠잔해가는 덕목 / 우리 모두 단벌 신사 / 조그만 행복 / 내가 지금 사십대라면 / 민들레 이야기 / 생각나는 일 / 일상에서의 도망 / 세 사람 있는 곳에 / 광야의 셰익스피어 / 일본에 와서 / 바깥에서 들은 얘기 / 시간에 대하여 / 잊지 않기 / 세 살 적 버릇 / 담배 끊기의 비결 / 앉아서 당할 사람 없다 / 산행을 하면서

제4부 철새를 보는 열세 가지 방식 - 나의 세상 보기
칼과 저울 / 초급행과 초완행 / 열려 있는 사고를 위하여 / 열린 마음과 사회 / 비극 판정의 수수께끼 - 고전 고대의 관행에 붙이는 자유연상 / 집단적 기억상실을 넘어서 / 철새를 보는 열세 가지 방식 / 첫번째 숙제 / 위기불감증은 아닌지 / 아마추어의 미덕과 한계 / 권력자의 나팔 / 성공한 대통령을 보고 싶다 - 취임 삼 개월에 부쳐 / 바깥에서 보고 느낀 것들 / 보고 싶은 텔레비전 프로 / 심리적 공황의 한 해를 보내며 / '새천년' 맞이를 보면서 / 무엇이 중요한가 / 함부르크를 다녀와서 / 내가 보는 세기말 - 불확실성에 대한 반응 / 전문가가 대우받는 사회 / 속 시원한 소식 - 직업윤리와 책임의 수용 / 자구책을 위하여 / 교사는 따로 없다 / 장엄한 노인들


책속에서


문학인의 책무는 특정 이념에 대한 충실이 아니라 이념의 그물을 빠져나가는 홀대받는 진실에 대한 경의를 유지하는 일이다. 시인이나 예술가들에게는 고유의 영광과 간난이 따른다. 자기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를 베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을 전한다는 열정 없이 진실은 재현되지 않는다. '리얼리즘의 승리'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저자 및 역자소개
유종호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공주사범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쳤고,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서 석좌교수로 퇴임하면서 교직 생활을 마감했다. 저서로 『유종호 전집』(5권), 『시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한국근대시사』, 『나의 해방 전후』, 『그 겨울 그리고 가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아이리스 머독의 『그물을 헤치고』, 윌리엄 워즈워스의 『하늘의 무지개를 볼... 더보기

수상 : 2023년 정지용문학상, 200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95년 대산문학상, 1995년 편운문학상, 1988년 대한민국 문학상, 1959년 현대문학상
최근작 : <사라지는 말들>,<작은 것이 아름답다>,<그 이름 안티고네> … 총 70종 (모두보기)
유종호(지은이)의 말
장르의 서열을 믿지 않는다. 가장 많은 독자를 당기고 있다고 해서 소설의 장르적 우월성이 보증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김기림, 이상, 김수영의 빼어난 산문은 이들이 쓴 대부분의 시보다 훨씬 매혹적이요 윗길이다. 높낮이가 드러나는 것은 개개 작품의 구체를 통해서이다. 짤막한 산문이라고 해서 업수이 여길 수는 없다. 짤막한 글에서일수록 '제자리에 놓인 적절한 말'이라는 문체적 요청이 커진다는 것이 내 경험이다.


평점
분포

7.5

마이리뷰
구매자 (0)
전체 (4)
리뷰쓰기
공감순




텍스트주의자의 책읽기

시인 고은은 문학평론가 유종호에 대해 이런 시를 남겨 두고 있다. “그런데 그의 공부는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착실했다/젊은 날/토마스 만을 다 익혀/조심스레/루카치를 익혀/… (중략)…/시 음악 그리고 산에 깊이 귀의해/책에 귀의해/여기 조선의 중도(中道) 지식인 있다/나이 들수록 자신만만과 허망이 번갈아가며.” 유종호는 어린시절인 일제 말기부터 일흔을 바라보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쉼없이 책을 읽어온 독서가이자 지금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현역’ 비평가다. 그의 산문집 ‘내 마음의 망명지’는 한국 인문주의가 다... + 더보기
모든사이 2009-12-30 공감(3) 댓글(0)
Thanks to
공감



단단한 산문

번역글이나 일반 사람들이 쓴 쉬엄쉬엄 읽히는 글을 읽다보면 단단하고 탄탄하게 잘 짜여진 글이 그리울 때가 있다. 대개 수필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지만, 서점에서 유종호 선생님의 산문집을 집어들었을 때는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한 것도 사실이다.

그간 신문에 실었던 글들, 서평들 여러가지 잡문들이 뒤섞여 있어서 뒤로 가다보면 중복되는 부분도 여럿보이고 성의없어보이기도 하지만, 유종호라는 사람의 책경험과 사고의 깊이가 단순이 이 책하나 보고 분석할 정도는 아니기에 읽을만한 책이다. 문장이다.

수업시간에 본 선생님은 글은 정말 잘 쓰시고 '문학이란 무엇인가?' , ' 시란 무엇인가?' 등의 저작들도 탄탄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하지만 수업은 본인의 훌륭한 저작을 지루하게 읽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 답답한 공기가 가득한 강의실에서 책 보는 흉내를 내면서 꾸벅거린적도 여러번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한 이야기지만 그때도 역시 세상은 공평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또한 영문학을 한 선생님이 왜 국문학 교수일까에 대한 의문도 제기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선생님이 살아간 시기가 영어책만 한다고 영문학을 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아우름과 깊이 있는 독서와 연구가 당연스레 병행되었던 것. 그리고 본인 스스로 학문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이 있었던 것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도 나이드신 선생님의 문장은 녹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을 발한다는 것을 깨닫고 새삼 스승이란 존재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피차간에 시퍼런 청춘이었다"
라며 젊은 시절 찍었던 한 장의 사진 속의 젊은 날을 회상하는 대목이라던가.

"그리하여 내면적 행복의 권유자들이 즐겨 시사하는 것의 하나는 어떤 사람들을 열심히 좋아하라는 것이다. 속된 말로 하면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
라는 대목에서 시작해서 나름 소시민적 삶을 옹호하는,

" 열심히 좋아할 수 있는 사람과 산행을 한다든지 감동적인 음악을 듣는다든지 하는 세목의 구상으로 우리의 행복은 축소된다. 이른 바 소시민적 행복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빼고 남아나는 것에 무엇이 있는가. 삶은 조그마한 나날의 연속인 것이다" 라는 문장으로 맺는 생각의 흐름이 좋다.

대학시절은 나름으로 행복했고, 지금은 지금대로 그시절과는 다른 경험을 해서 좋다고 생각했던 나는
문득 이 책을 읽고나서는 선생님이 저 멀리서 마이크에 대고 강독을 하던 느낌이 되살이나
강의실에서 꾸벅거리던 그때가 불현듯 그립다는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 접기
슈가소울 2004-05-30 공감(3) 댓글(0)
Thanks to
공감



비평가의 정치적 입장
이만한 아픔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명료히 드러나진 않지만 많이 아팠던 모양이다.
유종호는 살아있는 비평가 가운데 누구보다 작가를 깊이 이해한다.
그의 글은 그래 정확하다.
물론 그의 정치적 입장은 싫지만 말이다.
파고세운닥나무 2009-05-21 공감(2) 댓글(0)




구태의연하지만 취할 대목도 있다
유종호의 글은 한없이 고즈넉하고 유순한 데다 늙기까지 했다. 그래, 그의 글은 늙었다. 좋게 늙은 할아버지의 글 같은 느낌.

서문에 나와 있듯 그가 여기저기 쓴 조각글을 두루뭉실한 카테고리에 집어넣고 묶었다.
그래서 좀 성의 없어 보인다. 노 교수고 뭐 따로 글을 많이 써서 책을 묶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역시 성의 없다.
그가 쓴 글 전체를 관통하는 구절은 이것이다.
"작은 것이 소중하고 아름답다."
첫 장이 그의 책읽기에 대한 단상을 적은 것인데 이 장은 무척 유익하면서도 재밌다. 요즘 젊은이에게서는 쉽게 듣기 힘든 이름들이 등장한다. 물론 그가 지향하는 것은 고전처럼 보인다. 서머싯 몸이나 김동인, 레비 스트로스 같은 이름이 그렇다. 개중에는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름도 있다. 아이자이어 벌린이나 서기원 같은 작가. 서기원이 설마 무협 작가인 서기원은 아니겠지? 그리고 좌파 평론가였다는 김동석이라는 이름도 처음 들었다. 궁금했다.
유럽문학을 영문으로 읽기를 권하는 것은 시도해볼 만한 독서법이라고 생각했다. 쌓인 한글로 된 책들도 제대로 못 읽고 있는 주제에..-.-"

가끔 날카롭고 공리를 꿰뚫는 시각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부분이다.

--가령 현대인의 교양 체험에서 가장 큰 영향력으로 떠오르는 마르크스 니체 혹은 프로이트가 모두 '의심의 대가들'이다. 우리가 자연스러운 소여라고 받아들였던 모든 것이 실은 개인들이나 공동체가 혹은 선택하고 결정한 것의 결과이고 구성물이란 것을 그들은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폭로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작동을 폭로하고 프로이트는 성의 작동을 폭로한다.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의 기원과 그 작동을 폭로한다. 한 사회학자가 사회학의 기본충동으로 거론한 폭로의 모티프는 모든 인간과학의 기본적 충동이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관과 실상이 다르다는 것을 간단없이 설파하는 폭로의 모티프에 향도되는 교양 체험에 감염된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일단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적실하게 이해되면서도 눈이 확 트이는 느낌을 줬던 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일부 눈에 뜨이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글은 그냥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얘기다. 그리고 비슷한 대목이 여러 글들에서 중복된다. 유종호가 지은 다른 글을 보지 못해서 내가 이 글에서 느낀 것이라곤 그 정도다. 본격 문학평론은 좀더 괜찮을 것 같다.


- 접기
다오얀 2004-04-19 공감(1) 댓글(0)


내 마음의 망명지


제목은 문학비평가 유종호 선생(1935- )의 최근 산문집에서 가져왔다. <내 마음의 망명지>(문학동네, 2004). 얼마전 구내서점에서 우연히 눈에 띈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고 있다. 몇몇 비평가들의 산문집을 한때 즐겨 읽었던 듯하다. 책을 읽으며 문득 그런 감각이 되살아옴을 느낀다. 일간지 지면에 실린 칼럼 등을 모은 이런 책들은 자투리 시간에 읽기에 가장 적합한데(1부에 실린 글 여러 편을 나는 한 일간지에서 이미 읽었었다), 길지 않은 글들에 박혀 있는 적절한 사유들을 해바라기씨 파내먹듯이 따라가보는 재미가 있다. 이른바 맛은 좋지만 칼로리는 낮은 책, 그래서 군것질로는 아주 유익한.

해서 현재로선 책을 2/3쯤 읽었는데, 이미 연이어 읽을 책들의 목록도 정해두었다. 역시나 '문체의 옹호'란 글에서 저자가 은근히 추천하고 있는 책들이다. 정명환 선생의 <이성의 언어를 위하여>(현대문학, 2003)와 곽광수 선생의 <가난과 사랑의 상실을 찾아서>(작가, 2002)가 그것들이다. 나는 거기에 이 참에 읽어볼 요량으로 이미 갖고 있는 책 두 권, 유종호,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민음사, 2001)와 정명환, <문학을 생각하다>(문학과지성사, 2003)를 더 얹었다. 이 가을이 뒤늦게 풍족해진다.

책을 읽으며 새삼 깨달은 거지만 나는 유종호 선생의 책들을 꽤나 많이 읽었다. 더러 꼼꼼하게 공들여 읽지는 않았어도 대부분의 책들이 낯설지 않은 것. 가령, 저자가 '책머리에'에서 "이번 산문집은 십오 년만에 내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 나는 이 책이 에세이집 <함부로 쏜 화살>(문이당, 1989)에 이어지는 것이란 걸 대번에 눈치챌 수 있다. 그 책을 (이제는 십육 년전) 내가 자주 드나들던 지방도시의 한 서점에서 구해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문에 정지용의 시에서 따온 제목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다는 기억도. 문학평론가로서 내가 가장 즐겨읽은 이들은 김현, 김윤식 선생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읽은 평론가도 따로 있었던 것. 이번 산문집을 읽으며 그 이유도 대충 챙겨볼 수 있었다.

지금은 과거지사가 됐지만 70-80년대 한국문학 평단을 주름잡던 이들로 주로 '문지'와 '창비' 계열의 평론가들을 꼽는다. 전자의 4인방이 김현, 김주연, 김병익, 김치수이고 그리고 후자의 양 거두가 백낙청, 염무웅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제3의 길을 내던 이들이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을 오래 역임한 김우창, 유종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각각 몸담고 있던 잡지/출판사(=물적 토대)를 근거로 하여 한국문학의 지형도를 주도적으로 그려냈었다. 물론 각 진영의 문학적 입장/태도에는 얼마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암시해주는 것은 각각 간판으로 내세운 책들이다.

















가령 '창작과 비평'의 얼굴은 아놀드 하우저의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였으며, 내가 얼른 떠올리게 되는 '문학과지성'의 책은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 혹은 김현/김주연 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이다(80년대에 나온 이론서 <소설과 사회>나 <구조시학>은 생각만큼의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지나치게 서구문학(론) 지향적이란 비판도 들었던 문지의 경우, 확실한 외국 이론가를 거명할 수 없는 건 일견 아이러니컬하다. 거기에 대하여 '세계의 문학' 곧 민음사 진영에서 내세운 건 아우얼바하의 <미메시스>였다. 이번 산문집에 실린 '내 글이 걸어온 길'에서 그 내막을 잠시 엿볼 수 있는데, 삼십대 후반에, 그러니까 1970년대 초반에 2년간 미국유학("내 평생의 유일한 학생 생활")을 가게 된 저자가 이때 주로 접하고 읽은 이들이 벤야민, 곰브리치, 아우어르바흐, 피터 버거 등등이었다. 김우창 교수와의 공역으로 <미메시스>가 처음 나온 것이 1979년쯤인바 이 유학경험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음미해볼 만한 것은 아우얼바하(아우어르바흐)의 저작이 2차 대전의 포화를 피해 떠난 '망명지' 터키에서 씌어진 책이라는 점. 저자의 베스트셀러였던 <문학이란 무엇인가>나 <시란 무엇인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회역사적 상상력을 강조하면서도 문학만의 독자적인 질서와 규범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유종호의 태도는 '망명문학적 태도'로 가장 잘 특징지어질 수 있다. 산문집의 제목을 정하는 데 일조한 글이 '내 정신의 망명처'인바, 거기서 저자가 '망명처'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클래식 음악(아트음악)이다. 특히 저자는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경배하는데, 한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은 최근에 간행된 대화집에서 조금 별나게 피아노 협주곡 9번을 가리켜 '세계의 경이의 하나'라고 부르고 있다. 21세에 작곡한 이 작품이 모차르트 최초의 걸작이라며 덧붙인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 자신과 그의 음악 모두가 '세계의 경이'라고 해야 마땅하리라."(116쪽)

그러한 예찬을 배경으로 하여 정의하자면, 망명문학적 태도란 문학의 표준을 예컨대 음악에 두는 태도, 예술로서의 문학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하여야 한다'고 믿는 태도이다(예술로서 음악이 갖는 특장은 아무런 적극적 지시성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음악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바, 김종삼의 시구를 빌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다). 비평가로서 유종호가 가장 음악적인 장르로서의 서정시에 유난히 애정을 보이는 이유는 대략 그러한 태도와 상관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그는 우리시의 가장 '눈 밝은', 아니 가장 '귀 밝은' 독자에 속한다). 사실, 그러한 태도는 한편으로 작가/비평가의 사회적 책무가 유난히 강조되어온 우리 현대사와는 궁합이 잘 맞지 않는데, 중학교 시절부터 "소설은 김동리를 좋아하고 평론을 김동석을 좋아했던" 자신의 취향을 '자기 분열증적인 버릇'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그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좌파 비평가였던 에드먼드 윌슨의 경우를 예로 들어) "그것이 정직한 것(태도)"이다. 해서, <비순수의 선언>(1962)으로 평론가로서 첫발을 떼었지만, <문학의 즐거움>(1995)에 탐닉하기를 한순간도 그치지 않았던 것.

그런 그에게 애로는 없었을까? 우리말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식안과 짝을 이루는 것은 주제넘는 거대담론에 대한 거부감인데, 그러한 거부감은 이론이나 학문(과학)에 대한 회의로도 이어진다(특히 그가 미심쩍어하는 것은 문학/예술에 대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이다): "고전연구는 별개지만 문학연구가 과연 학문인가 하는 점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이다. 문체 없는 소설이나 무슨 소리인지 분명치 않은 산문을 읽지 않는다." 그의 현재: "내 삶을 정당화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때로 속이 쓰리기도 하지만 열받게 마련인 난세에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젊은 학생들과 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다. 늙어가는 징조이다. 모차르트도 상전에게 발길질을 당했다는 고사를 상기하면서 삶이 안겨주는 강제를 견디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179쪽, 강조는 나의 것)

때로 상전(=권력)에게 발길질을 당하기도 했던 게 천재 모차르트의 운명이었으며, 이 운명은 곧바로 예술로서의 문학이 처한 운명이자 비평가 유종호의 운명이기도 했다. 1980년대를 보내면서 낸 <사회역사적 상상력>(1987)의 머리말에 그가 쓴 대목: "그 어느 때보다도 글쓰기에 곤혹스러운 시기였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처지에서 민족의 좌절과 인간에 대한 믿음의 흔들림은 계속적인 충격이었다. '캄캄한 밤에도 노래는 있는가? 아무렴, 캄캄한 밤에는 어둠의 노래가 있지 않은가'라고 스스로 번안한 시구로 겨우 노여운 무력감을 달래었다."(177쪽) 그가 간혹 굴욕 속에서도, '노여운 무력감' 속에서도 삶의 강제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문학이란 '망명정부'를 현실의 정치권력과는 다른 자리에 놓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어둠의 노래'의 소속은 '어둠'이 아니라 '노래'이다). 내가 평론가 유종호를 즐겨 읽었던 것은 아무래도 이러한 과정이 그에게서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잘난 선인(善人)들보다는 못나고 소심했기에 살아남은 자들을 더 신뢰하는 버릇이 있다...

05. 11. 07.

P.S. 유종호 선생과는 30년이 넘는 연배의 차이를 갖고 있지만 나는 요즘 작가/비평가들보다 오히려 더 친숙함을 느끼는데, 그건 시대적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비슷한 독서체험의 결과인 듯싶다. 그건 내가 선생만큼 책을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그가 읽은 책들의 상당수가 러시아 문학작품이어서이다. 유명한 번역가 콘스탄스 가넷 여사의 번역으로 영역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대학 초년생 때 읽은 걸 계기로 해서, 그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고, 연이어 체호프와 투르게네프의 거의 모든 작품을 영역으로 읽었다(요즘에 누가 그렇게 읽는가?). 황동규 선생도 유사한 고백을 한 걸로 보아 아마도 당시의 '풍습'이었을 법한데(영국작가 그레이엄 그린이나 서머셋 모옴에 대한 독서도 그렇다), 이 산문집은 애당초 투르게네프의 <첫사랑>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고, '낭만적 망명자' 게르첸에 대한 이야기도 한 꼭지 포함하고 있다(영어명 'Herzen'을 '게르첸'이라고 러시아식으로 정확하게 읽는 이는 많지 않다).

게르첸과 관련한 대목은 사실 전공자들을 부끄럽게 하는데, 그의 자서전이 아직 국내에는 번역/소개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나도 작년에 즐겨 찾았었던) '참새고지'(흔하게 부르기론 '참새언덕')에서 저자가 떠올리는 이름이 E. H. 카아의 <낭만적 망명자>를 통해서 알게 된 게르첸. 벨린스키 등과 함께 '아버지 세대'(1840년대 인텔리겐챠)의 거두인 게르첸은 <누구의 죄인가>(열린책들, 1991) 외에도 <과거와 사상>(영역본은 'My past and thought')이라는 걸작 자서전을 남기고 있다:"사상사가인 아이자이어 벌린은 정치적 교리에 매이지 않은 그의 <나의 과거와 사색>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등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자서전의 걸작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참으로 좋은 책이 읽히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이 책은 물론 번역되지 않았다."(54쪽) 작년에서야 비로소 방대한 분량의 원서를 모스크바에서 구했지만(나는 영역본만 갖고 있었다), 그리고 나로선 번역의 적임자도 아니지만 좀 찔리는 건 어찌할 수 없다.

한편, 게르첸은 73쪽에도 등장하는데, 그때 '지상 최고의 회고록'이라고 지칭되면서 홑따옴표가 아닌 (도서명을 나타내는) 겹낫쇠가 쓰이고 있다. 교정상의 실수일 것이다. 또다른 실수는 144쪽에서 '돈후안'의 원어를 'Don Huan'으로 잘못 병기한 것('Don Juan'이 맞다). 또 "외관과 실상이 다르다는 것을 간단없이 설파하는 폭로의 모티브에 향도되는 교양 체험에 감염된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일단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본다."(142쪽) 같이 수식어구가 너무 장황한 문장은 다른 저자들의 글에서라면 흔히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간명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유종호답지 않은 문장이어서 눈길을 끈다.

그의 문장들은 튀거나 화려하지 않기에 독자를 전혀 놀라게 하지 않지만(물론 꽤 오래전에 도서관에서 초판을 빌려다 읽은 <비순수의 선언>은 20대 신참 비평가의 문장으로선 너무 정연하여 나를 기죽인 바 있다) 제 몫의 쓰임을 충실히 수행한다. 주제넘는(오버하는!) 것들에 대한 혐오는 그에게서 특징적이지만, 저자는 문장에 있어서도 '오버'를 경계한다. 그것이 그의 온건한 균형감각을 이룬다. 그 균형감각은 따로 현실감각이기도 하다. 앞에 인용한 대목에서 "내 삶을 정당화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저자는 토로하기도 했는데, 작년에 그가 낸 책 <나의 해방 전후>(민음사, 2004)는 그러한 '정당화'의 시도로 여겨진다.










'내 삶의 소롯길에서'란 글에서 임화의 시집 <현해탄>을 건네주었던 소년시절의 한 친구를 회상하며 그가 내리는 결론: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의 하나는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참으로 진실 육박적으로 상상하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요즘 생각하고 있다... 그 점 상상의 나래를 펴서 살아보지 않은 과거를 적는 것은 문자 그대로 창작이요 왜곡이지 재현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 점 우리는 모두 살아온 과거를 될수록 정직하게 기록해둘 의무가 있다고 생각된다. 해방전후를 다룬 대부분의 소설이나 실록이 내게는 모두 황당한 '창작'으로 여겨진다."(166쪽) <나의 해방전후>가 나오게 된 소이연이겠다. 더불어, (육박적)'진실'은 유종호 비평의 또다른 축이다. 그의 비평은 시(=즐거움)와 진실 사이에 있다.

책에는 난생 처음으로 저자가 경험한 '한가하고 자유로운 방학'(막내딸이 머물고 있던 미국의 엠즈라는 대학촌 체류기)의 부산물로 얻은 시 한편이 소개돼 있는데(127-8쪽), 제목이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이다. 알고 보니, 작년에 나온 시집의 표제시이다. 6연으로 된 시의 5연은 이렇다.
시끌시끌 막가는 아침의 나라에서/ 시새워 죽을 쑤는 동강난 산하(山河)에서
터벅터벅 육십 년/ 무슨 반딧불을 보자고/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 숨가뻐온 것인가

서산이는 서산나귀로서 청노새처럼 사람들의 짐이나 나르는 짐승이라 한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란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서산이'와 '청노새'의 삶을 위로하고 ('알게 뭐냐며')초극하는 '반딧불이'에 다름 아니겠다. 그리고 그것의 다른 이름이 '내 마음의 망명지'일 것은 물론이다...
- 접기
로쟈 2005-11-07 공감 (33) 댓글 (1)
Thanks to
공감
찜하기


문학적 교양과 문학 엘리트의 종언



몇 주 전 기사이긴 한데,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얼마전 예술원상 문학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그의 대담을 여럿 읽어본 나로선 새로운 내용과 접할 수 없었지만, '압축'의 의미는 있어 보인다.



국민일보(06. 07. 25) “우리사회 교양없는 걸 부끄러워 안해” 유종호 문학평론가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71) 전 연세대 교수가 최근 예술원상 문학부문 수상자로 결정됐다. 영문학자이면서 한국문학을 편향 없이 공정하게 논평해온 것으로 정평 있는 유 교수의 평생 공적을 평가한 상이다. 유 교수는 올해 46년에 걸친 강단 생활을 접었다. 1959년 청주사범을 시작으로 이화여대에서 20년을 보내고 1996년부터 10년간 재직한 연세대에서 문과대 특임교수직을 마지막으로 지난 2월 퇴임식을 가진 것(*지난 2월에 이를 기념하여 <유종호 깊이 읽기>가 출간됐다). 신망받는 심판이 퇴장함으로써 문단이 얼마쯤 쓸쓸해진 것도 사실이다. 수상 소식을 계기로 근황을 물었다.











-예술원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을 축하합니다. 교단에서 내려온 후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아주 편하게,아주 즐겁게 소일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니까 서운하지 않으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 홀가분하고 한가해서 진작 그만둘 것을 괜히 남보다 5년이나 더 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러면서 사두기만 하고 읽지는 못한 책들을 골라 읽고 있다며 요즘 듣고 있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이 녹음된 영어 오디오북을 보여주었다. 또 책을 고를 때는 페이퍼백 대신 비싸더라도 양장본을 사야 오래 볼 수 있다고 했다. 매일 집 근처를 산책하는 것이 운동이며, 외출은 가끔 있는 친구들 모임과 문학상 심사 모임에 나가는 정도라고.

-학교에서는 영문학자로, 대학 밖에서는 한국문학의 명 평론가로 활약했습니다. 어느 쪽에 본업이라는 의식이 있었는지요.

“광복 직후 3년간 활발한 비평활동을 했던 김동석이라는 평론가와 시인 정지용을 어려서 좋아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영문과 출신입니다. 이들처럼 글을 잘 쓰려면 영문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특히 ‘문학을 하기 위해 영문학을 택했다’는 김동석의 말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외국문학과 한국문학을 별개로 의식하지는 않았고 외국문학에서 무언가를 얻어서 한국문학에 기여하자는 생각이었지요.”

-김동석(1913∼?)은 경성제대 영문과 출신으로 1947년부터 1950년 월북할 때까지 좌우 문단간 논쟁을 주도하며, 유 교수의 표현으로는 ‘사납게’ 비평활동을 했다.

-계간지 세계의문학 편집위원으로 장기간 활동했던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겠군요.

“한국문학이 세계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외국문학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또 사회와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잡지 편집에 임했습니다. 1976년 창간 때부터 1985년까지 한 10년간은 김우창 고려대 교수와 함께 실질적으로 주도했고 그 뒤에는 이남호 고려대 교수가 책임을 이어 받았지요.”

-당시는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같은 계간지의 전성시대였는데 그 사이에서 입지는 어떠했습니까.

“창비와 문지는 동인들이 동시에 경영자였지만 세계의 문학은 민음사라는 출판사가 경영주체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지요. 독자와 부수 면에서는 두 잡지에는 못 미쳤지만 함께 잘 됐던 것으로 압니다.”

-유 교수는 몇몇 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요즘도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 요즘 작가들의 단편집은 2000∼3000부 판매가 고작이라고 전한다.

-한국문학의 부진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1980년대에 번창했던 리얼리즘 문학이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는 스스로 열기를 상실했고 독자들의 관심도 잃었지요. 그 시대의 문학이 사회운동의 기운과 맞물려서 독자의 호응은 받았지만 문학으로서의 매력이 부족했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뒤에 젊은 사람들의 생활과 스타일을 드러내는 감각파 문학이 나오고 있는데 깊이가 별로 없지요.그렇다고 작품의 질이 저하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도 잘 쓴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이 있게 마련이고 문제는 무엇을 쓰든 잘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지고 보면 문학작품이 안 팔린다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작품은 지금도 꾸준히 잘 팔리고 있지요.”

-요즘 소설 시장은 일본소설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영화 드라마는 한류(韓流)지만 소설은 일류(日流)인 셈인데요.

“일본문학도 과거에 비해 취향이 떨어졌습니다. 소설도 오에 겐자부로를 마지막으로 깊이가 사라졌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는 TV 영화 스포츠와 경쟁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문학이 위엄을 잃은 것이지요.”(*유종호 교수의 하루키 문학 비판에 대해서는 이전에 소개한 바 있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작가는 더 이상 엘리트가 아니지 않습니까.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과거 교수 문인 기자 등 소수가 지면을 독점하던 체제가 붕괴된 뒤로 작가들의 위상 저하가 두드러져 보입니다.

“톨스토이나 토마스 만 시대의 독자들은 이들 작가에게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진지한 고민의 해답이나 암시를 구했습니다. 작가는 동시에 삶의 교사였던 것이지요. 일본에서도 나쓰메 소세키 같은 작가가 그런 경우였고요. 그러나 전자민주주의 시대가 되면서 모든 계층이 평등해지고 나는 나대로 산다는 생각이 팽배해졌습니다. 지금의 작가는 엘리트도 아니고 사회도 작가에게 엘리트가 되기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대중사회는 엘리트에 거부감이 있어요.”(*근대 문학의 종언은 문학-엘리트의 종언이기도 하다.)

-엘리트에의 거부감과 함께 반(反) 교양현상도 두드러집니다. 특히 정치권에서 심한 것 같고요.

“과거에도 정치인들이 교양이 높았던 것은 아니지만 교양 없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은 알았지요. 그런데 지금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아요. 기자회견에서도 막말을 하잖아요. 외국에 나가본 일이 없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까지 있는 세상입니다.”

-요즘 한국영화 중에는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 영화가 적지 않습니다. 조폭과 형사들만 욕을 하는 게 아니라 점잖은 검사도 상욕을 합니다.

“점잖은 척 해봐야 별 수 있느냐라는 거지요. 권위의 붕괴를 노리는 겁니다. 심한 욕 다음에는 폭력이 따릅니다. 욕설이 폭력의 예고 지표가 되는 거지요. 미국영화를 보니 대통령의 부인도 상욕을 하더군요. 욕설과 폭력이 창궐하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칼 포퍼 같은 철학자는 큰 폭력의 근원은 TV라며 TV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TV를 통해 폭력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어린이들까지 감염시킨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회는 노인들의 걱정을 흘려듣고 있다. 늙은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미래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며 투표장에 나오지 말라고 한 정치인도 있는 현실이다.

-노년의 지혜를 경청해야 할 텐데요.

“미국 방송의 뉴스 앵커는 노인이 많습니다. 한 사람이 30년 이상 하지요. 그렇지만 우리나라 방송은 40대가 한계입니다. 젊음을 숭배하는 현상이지요. 사회 변화의 규모와 속도가 크고 빠른 근대 이후에 노인들은 과거 농경사회에서 누렸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노인의 권위 상실은 앞으로도 가속될 것이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청해야 할 노년의 지혜가 있다면 젊은이들이 살아보지 않은 시대에 대해 직접적인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유 교수가 재작년 펴낸 <나의 해방 전후 1940∼1949>은 당시의 경험과 지식을 과장된 해석 없이 전하고 있다. 일제 시대 국민학교 때부터 광복을 거쳐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의 기록이다. 우리 사회에 문필가가 대필한 정치가나 기업인의 자서전은 많지만 지식인의 회고록은 희귀하다.

“자기가 산 시대에 대해 객관적이고 정확한 지식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쓴 책입니다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썼다고 지적하는 기자도 있어 놀랐습니다. 사회사란 원래 미시적인,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쌓여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유 교수는 마지막으로 과거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해 국내외 지식인들이 잘못된 인식으로 일반인을 오도한 것을 예로 들며 우리 사회의 지적 풍토에 관해 충고했다.

“우리 사회가 늘 한쪽으로 편향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파가 승할 때는 좌파는 말도 꺼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좌쪽으로 승한 세상이지요. 이런 풍토에서는 정보와 지식의 편식이 일어나기 쉬운데, 명망가의 말이라고 해서 곧이 듣지 말고 검토하고 확인하는 지적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문일 편집위원)

06. 08. 17.
- 접기
로쟈 2006-08-17 공감 (1) 댓글 (3)
Thanks to
공감
찜하기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