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3

16 [주성하] 김일성평전과 대한민국 2016년 |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김일성평전과 대한민국 2016년 |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김일성평전과 대한민국 2016년 (143)

by 주성하기자 2016-12-30 9:50 am




30부만 가까스로 출판된 ‘김일성평전’. 오른쪽 사진은 1930년대 초반 김일성 장군으로 활동했던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군사위 서기 양림이다.

국정 역사교과서로 시끄러운 요즘 또 다른 논란이 될 수 있는 저서 하나를 알게 됐다.



‘김일성평전(상·하편)’. 상편만 700페이지가 넘는다. 저자 유순호는 중국 연변에서 나서 자랐고 오래전부터 항일투쟁사에 천착했다.북항일연군 군장 조상지의 전기 ‘비운의 장군’(1998년)을 쓴 지 3년 뒤 중국에서 “사회주의 문화시장을 교란한다”는 죄목으로 활동금지를 당해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이후 조상지의 후임인 허형식 군장의 전기 ‘만주 항일 파르티잔’(2009년)을 출판했고 이번에 김일성평전을 마무리했다.



난 김일성 연구의 한 획을 그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서대숙)’,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와다 하루키)’은 물론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까지 다 정독했다. 이중 유순호의 김일성평전은 과거 모든 김일성 연구서를 뛰어넘는 ‘끝판왕’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저서들이 광복 이전의 기록물 중심인데 반해 김일성평전은 항일 연고자들의 회고, 중국 공산당의 비밀자료실에 보관된 문헌들과 수백 장의 진귀한 사진 등 과거 김일성 연구자들이 접할 수 없었던 생생한 중국측 자료들로 채워져 있다. 동북의 항일투쟁사를 논함에 있어서 중국측 자료의 중요성은 거의 절대적인데 그게 드디어 빗장이 풀린 것이다.

저자는 1980년대부터 20년 넘게 관련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했다. 당시엔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인물들이 중국에 많이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이 거의 다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인터뷰를 할 수 없다.



김일성평전은 ‘김일성 신화’의 거품을 공정하게 걷어내고 있다. 혁명 모금을 한다며 부자들을 협박하던 10대의 김성주도, 만주에 퍼진 김일성 신화를 이용하려 이름을 개명한 20대의 김성주도 당시 함께 했던 이들의 증언으로 까밝히고 있다.



앞서 만주에서 김일성으로 활동했던 인물들이 누구였는지도 책은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북한이 크게 선전하는 ‘북만원정’도 사형 당할 위기에 처하자 야반도주한 것이며 1938년에 김일성이 일제에게 항복하려 했다는 증언도 있다.



또한 달변으로 중국인 간부들의 환심을 샀던 능력도, 민생단 누명을 벗으려 작탄대 평대원으로 자원해 두 번 씩이나 선두에서 포대로 돌격했다는 등 김일성이 두드러졌다는 증언들도 가감없이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1920~30년대 만주는 거대한 항일의 바다였고, 김일성은 작은 실개천이었다. 김일성의 가장 큰 업적은 죽거나 사로잡히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김일성은 수많은 항일선배들의 업적을 가로채 실개천을 바다로 둔갑시켰다. 이런 신화 조작은 지금도 3대 세습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 중국인 연고자는 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이 자기가 하지 않은 일, 남이 한 일도 자기가 한 일이라고 거짓말 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 이것은 도적질과 같은 행위가 아니고 뭐겠는가.”  나는 통일 후 북한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이 김일성 신화를 벗겨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옛날 반공교육 시대에 만들어진 김일성 가짜설로는 어림도 없다.김일성과 함께 했던 이들의 증언은 빼고, 그냥 ‘카더라’식 위주로 채워진 주장은 북한 역사보관소의 원본 문헌들만 공개돼도 즉시 생명력을 잃을 것이다.

김일성평전은 통일 후 북한에서 밀리언셀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책은 보지 못했다. 김일성평전의 출판을 막기 위해 북한은 원고를 사겠다는 등 각종 회유를 했고, 사료를 갖고 뉴욕까지 날아와 이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는 진실이어야 한다는 신념 하에 원고를 갖고 서울로 왔다. 그러나 100여개의 출판사와 접촉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보수단체가 고소하면 변호사비로 큰 돈 날릴 것”이란 이유였다. 자비로 우여곡절 끝에 겨우 상편 30부만 찍었지만 이대로라면 이 책은 출판사를 찾지 못해 묻힐 처지다.

한국에선 1980~90년대에 벌써 김일성의 항일투쟁사를 담은 책들이 출판됐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2016년의 대한민국에선 김일성 신화를 무너뜨릴 저서가 김일성의 항일활동을 다뤘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있다. 이걸 보며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우리는 진보한 것인가, 퇴보한 것인가. 역사 앞에 정직할 자세와 준비는 돼 있는 것인가. 북한의 역사 왜곡을 당당히 단죄할 수 있을까. 김일성평전 하나 찍을 아량조차 사라진 곳에서 공정한 역사교과서가 나올 수 있을까.

난 김일성평전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믿는다. 통일 후 북한 사람들은 한때의 공산주의자가 어떻게 인민을 철저히 배신했는지를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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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반공서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다 읽어보곤 실망해서 빨갱이 책이라고 욕하실 분들이 많을 겁니다.

이 책의 의미는 신화적 김일성을 팩트에 기반해 인간 김일성으로 끌어내린데 있지만, 중국 공산당의 자료에는 김일성이 용감하고 임기응변과 화술이 능한 빨치산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전설적 김일성 장군이 아닌 조선인 빨치산 지휘관 중 한 명인 김일성의 활동을 그린 것입니다. 책에 김일성이 1대, 2대, 3대 등이 자세히 설명돼 있지만, 3대쯤 되는 북한의 김일성이 사실 제일 활동 많이했고, 우리가 김일성 장군 소행이라고 알고 있는 전투 대부분이 3대 김일성이 한 것이라는 것이 중국의 자료들입니다.

다만 저는 김일성이 빨치산을 했던 것이 그의 이후 죄를 사해준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자도 1945년 이후의 김일성은 극악한 독재자로 변했다고 비판합니다.

여러 차례 말했지만 김일성은 공 10% 정도로 시작해 과가 90%쯤 되고, 반대로 박정희는 과로 시작해 평생을 공 80% 이상으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한때엔 항일투사일수도, 일본군 장교일 수도 있지만, 거기서 끝나고 죽었으면 모를까, 이후 국가 지도자로 살았던 사람들에겐 한때의 경력이 그가 민족 앞에 남긴 업적이 될 순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 부연한다면 태영호 공사의 기자회견을 들으면서 든 생각인데, 저렇게 외교관들이나 해외 북한 주민들이 다 본다면 저에게 탈출 방법을 언제든지 문의해도 됩니다.

우측에 배너를 띄우긴 했지만, 스마트폰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보니 모르시는 것 같아 이렇게 텍스트로 다시 글을 남깁니다.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109840



윗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또한 nkfuturefed08@gmail.com 여기로 연락 주십시오. 안전한 계정입니다. 단, 이 메일로 북한 주민이 아닌 분이 메일 주시는 경우가 많은데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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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영호 공사 ‘주성하 기사 100%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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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

가짜 김일성설은 당시 북한에서부터 있었던 일입니다…1945년 해방당시 평안남도에 살던 저의 작고하신 부친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에 새파란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돌았다고 합니다..
당시의 평안도 지역은 조만식선생의 인기가 절대적이었는데 김일성이 조만식을 처음 만난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는 후문도있어요..하여간 그책 함 읽어보고 싶네요….

그리고 북한에서 여기블로그에 오시는 분들 그리고 해외에 계신 북한 외교관님들 외화벌이 일꾼님들 모두 건강하시고 내년엔 북한에 김정은 새끼돼지가 제거되고 김일성주의가 완전폐기되어 진정한 개방과 남북교류가 시작되었으면 합니다..모두들 힘내세요….그리고 주기자말대로 언제든지 원하시면 탈북하세요…대한민국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2016-12-30 10:48:17



mikeryu

저의 부친은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아예 교과서에 당당히 본명은 김성주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권력을 잡기 전에는 많은 공산주의자 중의 하나였을 뿐이죠.

2016-12-30 11:48:37



팩트사랑



http://www.nykca.com

(발췌) 만주벌 눈사람아 이야기하라.

저자 유슌호 씨가 직접 올려 놓은 내용과 상당히 다르네요.
저자는 김일성 가짜설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보천보 전투 현장에 북한 김일성은 없었다.”는 내용을 비롯해서
김일성을 파고 들수록 존경심이 사라졌다는 고백입니다.

국가보안법 드립이 왜 나왔는지 궁금하네요.

2016-12-31 01:24:37



팩트사랑



저자가 출판 기획자와 협의 과정에서 재편집했다는 생각도 드네요.

상기 싸이트에 2013/06/16 일자로 올린 내용과 주성하 기자의 포스팅은 너무 다릅니까요.

2016-12-31 01:34:05



재미한국인

나는 항일전선에서 총 한발 쏘지 않은 나의 할아버지와 총폭탄 쏘며 항일운동했던 김일성이를 비교해봅니다. 나의 할아버지는 일본 군인 한명도 죽이지 않았지만, 한국 사람 또한 한사람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은 일본 군인 여럿 죽였다지만, 한국 사람 수천을 죽였으니, 나의 할아버지가 김일성보다 열배나 더 낫습니다. 내 이웃의 할아버지도, 그 이웃의 할아버지도 김일성 보다는 훌륭합니다.

2016-12-30 10:54:47

..

김성주(일성)는 일본 군인을 죽인적이 없슴

2016-12-30 01:08:50



GarryInsight

서울에도 김일성 장군의 옛 집터가 있죠.
김일성 장군은 당시 여렀이 공유하는 프렌차이즈(연쇄점) 개념이였나 봅니다 ㅎ

‘진짜 김일성’ 김경천 장군 집터 표지석 설치
http://www.mbn.co.kr/pages/vod/programView.mbn?bcastSeqNo=1107062

2016-12-30 11:35:54



서울사람



태영호 공사께서 이곳 불로그 북한 사람들이 많이 본다고 하더군요..
오늘이 벌써 12월30일…. 2016년도 오늘 그리고 내일이면 저뭅니다.
이곳 불로그를 찻는 남과북의 모든 7천만 동포 여러분..2017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고있는 우리 모두 역사에 부끄럽지않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세월이 흘러 후손들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지..
북한 동포 여러분…. 김정은 그 머저리 사기꾼놈 좀 어찌하세요..
도대체가 7천만 민족이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기에 그 머저리 독재자 일가들때문에
70년을 넘게 이리 살고 있어야하는지…..
그래도 희망적인건 우리는 5천년을 함께 살다 고작 70년 떨어져 살뿐인겁니다…
2017년 새해에는 김정은 그 머저리가 사라지고 남북이 하나되는 새해가 되길 바래봅니다…
7천만 동포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서울사는 20대 청년 -

2016-12-30 11:44:03



달래강



진실이면 받아들여야지요. 진실인데 가치에 반한다고 보수진영에서 출판사를 고발할 것같지는 않고, 만약 그렇게 한다면 보수자격이 없습니다.

진실은 어떠한 가치와 정의보다 우선입니다.

2016-12-30 12:48:48



달래강



주기자는 보수의 고발을 우려했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식의 고발을 남발하는 쪽은 진보들입니다. 박유하도 그랬고.

2016-12-30 12:56:56



감찰관



동감입니다. 좌빨들이 장악한 출판계에서 이미 무력화된 국보법을 핑계로 출판을 거부하는게 진실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2016-12-30 01:40:55



rinyang



좌빨이 파렴치하긴 하지만…
유순호의 “김일성 평전” 출판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돈이 안되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누가 뭐라해도 돈이되면 출판합니다.

2017-01-02 12:51:23



오성



그러고 보니 종북좌파들이 폐지를 외쳐대고 있는
국보법이 여전히 이 자들에게 효용가치가 있는 것이네요.

자유대한민국 내의 귀태인 종북좌파들은 김가왕조의 영국 공사 출신으로
자유를 찾아 탈북하신 태영호씨의 발언,
‘유럽에서도 한국은 선망의 대상이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 집니다.

대한민국 내에서 자신들의 입으로 아무리 ‘헬 조선’을 외쳐대 본 들
그 ‘헬 조선’이 실상은 ‘헬 북조선’을 의미한다는 것 조차
깨닫지 못하니 이 자들은 하릴 없이 종북이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2017-01-02 01:11:57



james2



달래강님 /// 동감 입니다.

2016-12-31 05:47:28



달래강



제임스님 오랜만입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16-12-31 09:21:36



zenerkant



보수들이 그렇게 무식한 짓은 거의 안하죠. 자칭진보라는 사람들이 그런짓 좋아하죠.
법을 밥먹듯 어겨놔서 법을 지들 유리할때만 주장하죠.

2017-01-01 03:50:34



gma



만주 조선족의 입장에서 쓴 또하나의 김일성 평전일 뿐이지 끝판왕이라고 불릴 정도는 못되고, 참고할 점도 있지만, 오류도 있고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일제시대 기록들이 전산화 된 이후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전사했다는 기록이 엄청 많아 나왔습니다. 죽었다는 후대의 증언도 많고요.

김일성 회고록의 해당 부분을 봐도 실제 당사자가 아닌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이 조작해서 쓴 거라는 게 드러납니다. 보천보 사건을 전후하여 간삼봉 전투 등에 6사장 김일성은 중국인인 2사장 조국안과 늘 같이 전투를 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 회고록에는 조국안이 1936년 11월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실제 조국안은 1937년말 6사장 김일성과 비슷한 때 죽었습니다.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다면 같이 전투한 동료가 언제 죽었는지 모를 리가 없죠. 전투 상대방도 조선인 일본육사출신 김석원이라고 나옵니다. 6.25때 국군이된 김석원과 맞서 싸울 때도 그 일과 연결시켜 엄청 욕을 해댔죠. 그런데 실제로는 김석원과 일본 육사 동기인 김인욱 소좌와 싸운 거고, 김인욱은 평양근교출신으로 해방후 북한에 있다 소련에 끌려갔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당시 김석원은 서울 용산 부대에 있었는데 아무 관계없는 김석원을 끌어들여 욕하고 있는 거죠. 같이 전투한 동료도 모르고, 상대방 이름도 잘못 안다면 북한 김일성은 6사장 김일성이 아닌 겁니다. 이건 조선족들의 증언으로도 뒤집을 수 없는 팩트입니다.

또 중국측 기록이 일제나 한국의 기록보다 훨씬 더 믿을만하다는 근거는 없지요. 상호 보완해서 검토되어야 할 겁니다. 또 당시로부터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뒤에 채록한 증언들은 신뢰도도 상당히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의 기억은 30년 정도까지는 그런대로 실제에 가깝게 유지되지만, 50~60년 후면 노쇠해서 기억력에도 문제가 생기고, 혼란도 일어납니다. 가족에게 전해진 말은 당연히 왜곡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정확하고 어느 것이 잘못인지 다른 증언이나 기록과 비교하여 엄격한 검증을 통과해야만 사실로 믿을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보이겠습니다.

김일성 평전: p.101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손인실의 딸 문성자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김성주에 대하여 어머니에게 물어봤는데 어렸을 때 그런 사람을 본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 그때 오빠 또래의 학생들이 우리 집에 많이 놀러왔었는데 만약 김성주가 어머니를 알고 있었다면 아마 김성주 역시 그때의 학생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 손인실씨가 남긴 생전 증언은 전혀 다릅니다.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4)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3) 1972.01.20 동아일보 4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2012000209204003&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2-01-20&officeId=00020&pageNo=4&printNo=15474&publishType=00020

▲손인실(孫仁實)씨(五四(오사)·이대부총장(梨大副總長) 문병기(文炳基) 박사 부인)
= 임정(臨政)에 관계하시던 아버님(손정도(孫貞道)목사,·상해임정임시의정원의장(上海臨政臨時議政院議長))이 만주(滿州) 길림(吉林)에 한인학교(韓人學校)와 교회(教會)를 세우고 우리 가족들이 거기에 살 때였읍니다. 열살도 못됐던 나는 무슨 소년단인가 하는 대원들을 따라서 길림(吉林) 북산(山)에 올라 병정놀이나 숨바꼭질등 게임을 했던것이 지금도 기억(記憶)에 남아있읍니다. 그때 이 소년단에 김성주(金成柱)라는 이름의 소년이 있었읍니다. 열두살 되던 一九二八(일구이팔)년경 길림(吉林)을 떠났기 때문에 그후 이 소년단의 일은 차차 잊혀졌는데 해방 후 만포진의 병원을 팔고 평양(平壤)에 와서 얼마 안된 때입니다. 아마 四五(사오)년十(십)월 하순쯤 일까요. 아이를 업고 평양(平壤) 거리를 걷고 있는데 무슨 공산당(共産黨) 사무실인가 어디에 김일성(金日成)의 큼직한 사진이 걸려 있는걸 보았읍니다. 그무렵 사람들 사이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이가 진짜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개명(改名)을 해서 들어왔으며 만주(滿州) 길림(吉林)에서도 산 일이 있다는걸 들어왔었는데 그 사진을 보니 옛날 길림(吉林)의「그 소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들더군요. 그래 자세히 보니 어렸을적 모습이 약간은 남아있는듯 했으나, 그때도 살이 약간 찌기 시작해서 호리호리했던 옛날과는 달라 확실한 판단이 안됐지만 그가 어릴 때 보았던 김성주(金成柱)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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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30 02:20:16



gma



그리고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은 독립운동사 입장에서 보면 비주류입니다. 요행히 북한의 정권을 잡아 자신들만 주류로 부각시켜 놓은 것은 독립운동사의 큰 왜곡입니다.

만주 조선족은 빨치산 항일 투쟁이 중국을 위한 것이든 조선을 위한 것이든 구분할 필요도 없이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그 투쟁이 만주 실지회복을 위한 건지 조선독립을 위한 건지 애매한 성격이라면 평가를 달리할 수 있습니다.

1930년대에 중국서 독립운동하던 그룹은 임시정부 (장개석과 연대), 독립동맹(조선의용군, 모택동과 연대, 연안파) 등과 만주의 국민부(조선혁명군), 동북항일연군(김일성)입니다. 이중 조선혁명군은 1938년 경 완전 소멸하고, 동북항일연군도 1940~41년경 완전궤멸되고 잔존 세력은 소련으로 도주합니다.

해방될 때까지 살아남아 투쟁하던 조직인 임정과 조선의용군이 우파와 좌파 독립운동의 주류라고 봐야 합니다. 해방후 임정은 대한민국 건국 세력이 되었지만, 북한은 패주한 빨치산들이 소련군의 옹호로 집권하여 인민들의 지지가 높던 조만식 선생, 좌파독립운동의 주류 세력 연안파와 국내 기반이 강했던 남로당파 죄다 숙청해 버리죠.

만주 조선족들은 자신들이 참여했던 항일연군의 투쟁을 가장 높이 평가하지만, 거기 소속했던 조선 사람들은 대부분 만주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약하고, 중국에 반쯤 동화된 사람들입니다. 항일투쟁을 했더라도 그게 조선독립운동이냐가 애매한 거죠. 그 사람들 상당수가 해방후에 중국에 남아 조선족이 됐습니다. 그 사람들이 조선독립운동을 한 거라면 일본군과 싸운 중국인들도 전부 조선독립운동 한 겁니다. 김일성등 일부 빨치산 세력도 소련이 북한으로 데려와 최고 권력을 쥐어주지 않았더라면 대부분 만주 조선족이 되었거나 소련의 고려인이 되었을 겁니다. 국내에 연고나 기반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이을설도 김일성이 죽고난 다음부터 강연 다닐 때 김일성은 소련 있을 때 평소에 소련서 살고싶어 했고, 조선으로 올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어느 탈북자분이 말하더군요. 해방당시 김일성은 중국말은 능하지만 조선말은 무지 더듬거렸습니다. 조선에 대한 지식도 별로 없었고, 조선독립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게 확실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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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30 02:29:31



감찰관



거대한 사기극일 뿐 입니다.

2016-12-30 02:35:14



gma



김일성 가짜설은 남한의 반공교육이 만들어 낸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말은 해방후 평양에 온 김일성이 대중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1945년 10월 14일의 대중집회에서부터 퍼져 나온 것이고, 월남민들이 남한에 퍼뜨린 말입니다.

남한에는 소련군이 데려온 김일성이 어디서 뭐하던 사람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습니다. 김일성이 일제시대 뭘 했는지는 그 후 조금씩 밝혀지기는 했지만 전모는 아직도 잘 모릅니다. 그러니 반공교육 시간에도 김일성이 가짜라기보다 소련의 꼭둑각시인 것과 수백만 동족을 죽인 6.25 전범이라는 점에 주안점이 주어 가르쳤던 거죠. 오늘날 남한 학계에서 김일성을 진짜로 둔갑시켜 놓은 사람들도 김일성이 인민들의 지지가 아니라 소련군 무력과 정치공작으로 지도자가 된 것에는 일체 언급을 회피하고 있죠.

김일성 장군의 전설은 이미 1910년대부터 퍼지기 시작했고, 평양의 집회에 참석한 김일성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들어왔기 때문에, 33세의 젊은 친구가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니 가짜라고 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문제는 소련군이 데려온 김성주(김일성) 대위가 어디서 뭘 하던 사람인지 국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국내 지지세력도 전무했다는 거죠. 당시 평양은 조만식 선생의 판이었고, 남한처럼 국민들의 지지로 지도자를 뽑았다면 당연히 조만식 선생이 지도자가 되었어야 합니다. 소련군이 데려온 김일성은 대중들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니 지도자가 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생각해낸 방법이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사칭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중들이 가짜라고 하니 온갖 정치공작을 통해 진짜가 맞다고 선전하고, 조만식 선생을 구금한 다음 억지로 지도자로 만든 것이지요. 북한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했냐, 김일성이란 이름을 썼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어디서 뭐하던 누군인지 모르는 사람이 소련군 무력을 등에 업고 지도자가 된 게 문제죠.

해방 당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김일성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당시 신문들이 인터넷 검색이 가능해진 근래에 다 밝혀졌습니다.
8.15 해방 다음날 8월 16일경부터 서울시내에 벽보가 나붙었는데, 곧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 수립되고 대통령 누구, 각료 누구 하며 정체불명의 벽보가 여러 곳에 나붙기 시작했는데, 단골로 거명된 사람이 이승만, 김구와 함께 김일성이 있었습니다. 김성주 대위는 아직 하바로프스크 88여단에 있을 때이고, 국내 누구도 소련에 그런 사람이 있는 줄 모를 때입니다. 이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가 아니라 전설의 김일성 장군인 것이 1945년 10월달 신문들에 해외의 독립운동 지사들을 소개하면서 이승만, 김구 등과 함께 김일성 장군을 소개한 기사에도 나와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평양에 온 무명인사 소련군 김성주 대위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김일성 장군 이름을 사칭하며 유명인사의 명성을 자신의 것으로 조작해 나간 거죠.

민중일보에 이승만, 김구 다음에 5번째로 소개된 독립지사 김일성 기사입니다. 아래 기사가 나간 날은 공교롭게도 평양의 진지첸 대위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선 날인데, 서울에서는 물론 모르고 있었습니다.

———————————–

名士의 片影(其五), 金日成氏. : 민중일보 1945.10.14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63301047

金일성氏는 有名한 將軍이다. 그 雄勇한 氣像은 乙支文德 追憶하게 되고 그 知謀의 縱橫은 李忠武公을 聯想하게 된다.

金將軍은 靑年에 笈을 負하고 兵學을 修하였다. 그러나 그는 帝國主義時代의 將校되기는 실허하였다. 그는 片身으로 飛走하야 豆滿江을 건너갔다. 當時는 韓國이 日本에게 合倂되야 日本人의 虐焰은 三千里 江山을 덮었고 日本軍의 堅鋒은 豆滿江北까지 進出하야 當時 北滿에 있는 朝鮮의 獨立黨을 剿滅하야 그 慘酷殘忍이 極하였더니라. 이때이었다. 金일성 將軍은 義勇兵을 募集하야 日本과 抗戰하였다. 그의 寡少한 兵衆으로도 日本兵의 가슴을 서늘케한 일이 자조 있었다.

當時 朝鮮 와있던 日本人 總督 某는 朝鮮의 國境을 巡視키 爲하야 惠山鎭 方面을 向하였다. 日本人 總督이 鴨綠江 上流 南岸으로 내려갈 때에 鴨綠江 北便에서 날아오는 彈丸은 總督 某의 心膽을 놀래기 極하였다. 總督 某는 惶怯하야 旅行을 中止하고 도라왔다. 그런데 그 彈丸은 金일성 將軍 麾下 勇士의 彈丸이라 한다.

滿洲事變이 이러나고 世界戰爭이 열리매 金將軍은 蘇聯大軍과 一致行動하야 多數한 朝鮮兵士를 거느리고 勇敢히 戰鬪하였다. 그는 맛침내 勝利의 月桂冠을 取하고 지금 蘇聯 沿海州 方面에 있어 早晩에 歸國한다는 말이 傳해 온다.

笈을 負하다 : 책상자를 짊어지다.
笈 : 책 상자 급,길마 겁 1. 책 상자(箱子) a. 길마(소나 말 따위의 등에 얹는 안장) (겁)
虐焰(학염) : 사나운 불길
堅鋒(?) : 강한 선봉 쯤의 의미인 듯.
剿滅(초멸) : 외적이나 도적의 무리를 무찔러 없앰.

————————————

한자가 많아서 말이 어렵습니다만, 이 김일성 장군은 일본군 장교가 되는 과정(일본육사)을 이수했고, 김일성 장군의 부하가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는 총독을 저격했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1924년 5월 19일 사이토(齋藤實) 총독의 압록강 일대 순시 때 실제로 있은 사건이고, 주동자는 다른 사람인데, 민간에는 김일성 장군이 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겁니다. 어쨌던 김일성 장군 전설이 1924년에도 있었고, 김일성 이름이 1937년 보천보 사건 때문에 유명해졌다고 우기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증거이죠. 해방 당시 각료 하마평에 오르던 김일성도 누군지 실체는 불분명하지만 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지 소련군 김일성(김성주) 대위가 아닙니다. 북한 김일성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 이름 가지고 장난을 쳐서 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겁니다.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공작 책임자였던 소련군정의 레베데프 소장도 생전에 인민들이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그 이름을 사칭하기로 결정했다고 증언했습니다.

2016-12-30 02:36:36



gma



만주 조선족과 국내 사람들의 김일성 이름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다를 수 있습니다.
조선족들은 북한 김일성과 빨치산 활동을 같이 한 사람이 다수 있으니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수 있으나, 국내에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은 아닙니다.

국내 사람들은 항일운동 하던 사람들 중 이승만, 김구, 김일성 장군 등의 이름은 많이 들어서 잘 알지만 만주의 항일연군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습니다.

항일연군의 김일성이 해방후 국내에 들어와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했으니 조선족들은 진짜가 맞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국내사름들은 가짜라고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죠.

2016-12-30 04:05:30



ㅇㅇ



엄지척 세우고갑니다 정말 보통분이아니시네요. 주성하기자가 반성해야겠습니다.

2017-01-02 02:56:11



후훗



저는 미래한국 기자 김용삼 씨가 쓴 ‘김일성 신화의 진실’을 한 달 전에 사서 조금씩 읽고 있는데, 유순호 씨의 ‘김일성 평전’과 비교 검증할 생각으로 구입할 생각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두 책의 가격이 55000원으로 같다는 겁니다.

2016-12-30 02:36:18



유경열



이완용도 히틀러도 국내에 평전 출시되었는데요.
꼭 출시 되었으면 합니다.

2016-12-30 05:35:47



북한동포에꿈을



김일성에 의한 김일성 우상화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그로인해 객관적이라고 볼 수가 없다
즉 김일성 정권에 의해서 만들어진 김일성 역사는 한반도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을 한다

한반도의 역사는 한일합방전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는 식민지된 한반도 그리고 중국의 각지에서 일어났던 많은 독립운동들이 반드시 정립되어야 한다

독립운동의 역사가 김일성에 의해서 분명히 오염되었을 것으로 본다
독립운동의 역사가 친일파 정권이 수립된 대한민국에 의해서도 많이 오염되었을 것으로 본다

한일합방전 역사 – 일제 식민지 그리고 독립운동 역사 – 해방후 한반도 역사를 이제 객관적 관점에서 다시 재 정립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일제 강점기 때의 독립운동이 객관적으로 온전히 정립되어야 김일성의 역사 또한 그 일부로서 검증이 가능하다고 본다 즉 아직 우리는 갬일성의 역사를 검증할 준비가 되어있지를 않다 우선은 독립운동 그리고 1945년 전후 그리고 1948년 1950년의 역사가 객관적으로 정립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준비가 되어있지를 못하다

시간이 약이겠지요
우리가 건들여서 오히려 역사가 오염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조심을 해야한다

2016-12-30 06:21:37



북한동포에꿈을



누가 역사를 오염시킨 것인가 …

1910년 – 1945년의 한반도의 역사 그리고 한반도 중국등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역사
1945년 – 1950년 남과 북의 정부 출범 전후의 역사
1950년 이후 전쟁으로 시작된 남과 북의 역사

2016-12-30 06:31:33



프랭크



태영호 같은 인간이나 좀 안왔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와서 조용히 지낼것이지 탈북자들보고 더 오라고 선동 하고 있네요
그러면 먹여살리는 세금은 대체 누가 냅니까? 다 골골 거리는 환자들인데?
국력에 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똑똑한 인간들은 옜날에 다 건너 왔습니다.
무려 6.25전쟁때 수백만이 이미 북한에서 남한으로 다 건너 왔습니다.

2016-12-30 07:23:49



keyman1965



단순한 생각입니다…마니오면 올수록 좋아요

2016-12-30 08:10:31



달래강



세금이나 제대로 내는 인간이 이러면 이해할 여지가 있지만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전혀 안드는 것은 왜일까?

2016-12-30 09:23:52



rinyang



세금 몇푼이나 낸다고…ㅉㅉㅉ

경상흑자국인 대한민국은 캐쉬플로우가 가장 중요한 것이지.
쉽게 말해서 돈을 벌고 쓰는 사람이 많을 수록 좋은 거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태영호씨는 보탬이 되는 사람이다.

2017-01-02 12:04:12



시나리오



사지육신 멀쩡하고서도 꼴에 4년제 나왔다고 듣보잡대까지..눈만 높은 구직자 대열에 껴서.부모 등꼴 빼먹으면서 노후자금 축내는 나라에선..앞으로 “복지지출” 수요는 급증할터..”세수”확충도 더 중요할듯.

2017-01-02 12:06:59



ㅇㅇ



오는건 반대하지않아요 어차피 배운것도없어서 인력부족한 밑바닥직업으로 가니까. 근데 걔들에대한 지원은 좀 줄였음하네요………우리도 먹을거없는데 외부유입인원을 더 먹여살리니. 실제로 탈북자애들은 명문대진학도 훨씬쉬워요 말들어보니 3개월공부하고 고려대갔다더군요 ㅋㅋㅋㅋ

2017-01-02 02:57:23



라이팅 클럽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연히 이 블로그에서 놀다보니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만나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내가 느끼기에 북한출신들은 적어도 김일성에 대해서는 애틋한 것이 있는 것 같다. 남한과의 경쟁에서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북한을 세운 김일성만은 후하게 자리매김하고 싶은 심리가 있어 보인다.

그 때는 그래도 너들보다 그렇게 나쁘지 않았쥐… 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젠 책은커녕 신문도 잘 보지 않는 세상으로 들어간 지 오래다. 저 책이 팔릴 것 같으면 좌빨 우빨 따질 것도 없이 누구라도 책을 낸다. 요즘엔 1인 출판사까지 있는 마당에 도대체 무슨 말씀들 하시는 건가.

한 번 생각해 보자… 김일성이 잘 한 것이 10이라고 하면 잘 못한 것이 90이라고 이야기를 흘린다. 물론 속생각과는 달리, 이 정도도 공보다 과를 더 쳤으니 객관적이라 자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내가 보기엔 공이 10이라면 과은 1억 정도는 된다. 김일성이 무슨 대단한 일을 했고, 그 일이 한반도 독립에 무슨 영향을 끼쳤나? 그런데 그 해악은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 그 몇 마리의 김일성 후손들 때문에.

그런데 그 개털 같은 공 10을 놓고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중요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과가 이미 1억은 넘었는데 공이 12나, 13 쯤 된다고 달라질 게 있나? 공이 20 쯤 되면 만족하시려나?

그래서 뭐????

2016-12-30 10:05:50



달래강



오! 내가 동감할 수 있는 얘기를 하시다니! 놀랠놀자로군!

2016-12-30 10:18:54



시나리오



아마북한이 개혁개방되도 당분간 김일성에 대한 존경은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탈북자들이 남한에 오자마자 김정일 욕해도 김일성 욕하기 까지는 한 3년 넘게 걸리죠.
구소련이 무너져도 아직도 스탈린 존경하는 러시아 인들이 많으닌깐요. 물론 그렇다고 과거 구소련과 같은 배급경제.집단농장이 부활을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그 시대를 이끌었던 “업적”이나 치적에 대해선 기념하는 거죠. 개혁개방이후 중국인들이 모택동에 대해 가지는 감정과도 비슷할 겁니다.

물론 6.25 전쟁 발발과정 부터 김일성의 통치기간 치적의 실상이 낱낱이 공개되면 생각이 바뀌겠지만..갑자기 바뀌긴 힘들겁니다.
반면 김정일.김정은에 대해선..”xx”하고 바로 욕 하고 다닐꺼구요. ..

일단 김씨왕가는 일본 천왕제와 다릴 “전제군주”구요. 절대권력을 가진 왕이 잘못하면 반란을하고 저항을 해야 정상입니다.북한에서그런 반란이 안일어나는건 “감시와 공포”가 철저이 심해서지요..
그리고 주체사상이나 우리시기 사회주의는 이슬람과 같은 .사후세계를 기약하는 종교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규율하는 “빵”에관한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현실 통치에 실패했슴이 역사적으로 증명되면…바로 anti가 일어 날수밖에 없지요.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에서 배고프다고 알라신이나 최고종교지도자에 대한 반란이나 저항이 일어나진 않치만…바트당 처럼 “세속주의” 독재 세력에 대해선 “아랍의 봄”처럼..배고프면 반란이 일어납니다.
북한에서 반란이 아니 일어나는 이유는..”공포와 감시” 그 뿐입니다.

2016-12-30 10:40:41



감찰관



공포 조성과 감시에는 돈이 듭니다. 그걸 말려버리는 게 우리의 대북 정책이어야 합니다.

2016-12-30 10:54:03



rinyang



정확히 팩트를 집었군요.
좌빨종북이 틀린 이유의 핵심입니다.

2017-01-02 12:16:15



북한동포에꿈을



김일성이 통치했던 시기가 북한에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신바람나게 일하면서 그 지긋지긋한 삶에 굶주림에서 벗어나게된 시기로 사회분 위기가 대한민국의 1970년대 1980년대와 같은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북한 인민들이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해준 좋은 지도자로 김일성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는 사이 김일성 역사도 자연스럽게 신격화 되었을 것이구요

2016-12-30 11:06:39



시나리오



“김일성이 통치했던 시기가 북한에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신바람나게 일하면서 그 지긋지긋한 삶에 굶주림에서 벗어나게된 시기로 사회분 위기가 대한민국의 1970년대 1980년대와 같은 시기가 아니었을까 “——– 1970년대 80년대 한국에 안 살아 보셨군요..”신바람”이라는게 “사유재산”의 축적이 핵심인데..북한이 경제성장은했어도 1인당 육류소비랑.생필품 소비량을 어디 감히 동시대 남한과 비교합니까? 동구권 공산권 국가들과의 교역 말고는 패쇄된 경제체제에서 모든 생산력을 중공업에 쏟아 붇는데 소비재 산업은 발달할 리가 만무하고요.
그냥 90년대 대량아사하던 때와 달리 밥은 먹고 살던 시기인거죠.

그리고 “산업혁명?” ㅋ 북한에 있는 생산설비는 일제시대때 이미 일어났는걸 어캐요?. ㅋ

2016-12-31 01:13:03



북한동포에꿈을



북한은 1970년대 말에 남과 북의 경제 규모가 역전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가 아닌가요
혹은 1970년대 중반 ?

대외 국가이미지도 결코 대한민국이 북한에 비하여 우월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특히 1970년대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상황을 보면 끔찍하기도 합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을 했던 국민들이 그러고 보니 지금 60세 이후의 연령대의 국민들이 대한민국을 주도하며 참으로 우리도 할 수있다는 분위기의 역동적인 사회였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꼰대들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향수를 느끼는 것에 사실 연민도 느껴집니다

북한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김일성 시대 였다는 것이구요 (대한민국 국민이 느끼는 감정이 아닌 북한 인민이 느끼는 감정이겠지요) 그래서 대한민국 꼰대들이 박정희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북한 인민 중에 일부도 김일성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추측이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꼰대를 보면 북한인민의 그런 언행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북한 인민들은 김일성에게 속은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같은 변화가 없었던 북한인민들은 아마 대를 이어가며 속으면서 나아가 충성하면서 살아가겠지요

지금 남과 북의 차이를 나게 한 것은 대한민국은 민주화가 되었고 북한은 민주화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2016-12-31 12:18:40



시나리오



70년대 그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열심이 공부하고 열심이 일할수 있는 동력은 바로..”공부해서 남주나~..일해서 남주나? ..저축해서 남주나~”..같은 사유재산의 축적과…공정한 경쟁입니다..6.25 전쟁전 토지개혁을 통해서 지주들이 땅이 아니라 “채권”만 가지게 되었고..종전이후..살인적인 인플레로 채권은 휴짓조각이 되닌까 그야말로 모두가 “그지”가 된 세상인거죠.

그러니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도 공부만 열심이 하면 왕년 ..지주.양반.상전의 자식보다 더 “상전”이 될수 있는 세상..이게 바로 대한민국인겁니다.

싸잡아서 60.70년대.북한이나 남한이나 나름 열심이 일하고 공부했다고 하느 근본적인 동력의 “질”이 틀린겁니다..
남한은 “지속가능한 노력”..북한은 고작 “이밥에 고깃국~”.그 뿐입니다.그이상 보상은 신분질서에 따럿 나뉘는데 결코 “지속가능”하지 가 않치요..

한국에 안사시고 외국에서 남.북한을 양비론적으로만 관찰하시다 보니.그런 되도안한 해괴한 시각을 가지게 되신것 같은데…님 같은 분에게 해드릴 만은 똑같은 1970년대라도 북한에서 한번 살아 보십시요.
남한에서 1970년대를 산 세대가 결국.유신반대..80년대 서울의 봄..87년 6..29 항쟁을 통해서 직선제 민주화를 이끌었습니다..그만큼 “개인의 권리.개인의 행복에서 “…”수준”이 틀린겁니다..

그냥 북한은 60년대 남한 보다 밥 좀 잘먹었다 수준에서 만족해세요..”개꿈. 북한”..님..

2017-01-01 03:54:11



감찰관



한번 잘 못 박혀 버린 관념은 사실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부꾸마.. 북한은 대한 민국의 72년도 이상 발전해 본 적이 없단다.

2016-12-31 02:47:04



북한동포에꿈을



감찰관 할배
대한민국에 1970년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회가 역동적으로 변했는지도 고민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건 그렇고…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감찰관 꼰대의 글을 일으면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그래도 건강한 꼰대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 신앙적인 아니 비 이성적인 사고가 결국 대한민국을 2016년과 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비판하고 싶은 대한민국의 아줌마 파워가 있습니다
약간은 비판으로 받지만 대한민국의 꼰대들의 힘이 국민으로 부터 사랑받으며 거듭나는 2017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냄새나는 꼰대보다는 사랑받는 꼰대가 됩시다

2016-12-31 12:30:33



시나리오



오타를 치셨군요.님이 말하는 북한의 우위는 1970년대가 아니라 1960년대 입니다. 1970년대 되서야 남한이 중화학공업에 투자한 만큼 공업생산력에선 70년대 부터 따라잡았으니.70년대 까지는 어거지로 총량을 가지고 북한이 앞섰다는 논리도 가능하지만..1인당 삶의 질에선 60년대를 거쳐서 70년대 부터는 ..이미 따라잡습니다..왜냐?.국내총생산량만 늘면 뭐합니까? 그걸 통해서 1인당 국민의 삶의 질이 바뀌어야죠. 그래서 유력한 “경제사학”관점에서 비교 대상이 바로 1인당 육류소비랑.생필품 소비량.에너지 소비량입니다. 북한에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70년대 80년대가 남한과 같았다?…ㅋㅋ 오타 치신겁니다..북한이 아니라 “남한”이라고 쓰셔야죠. 님이 원하는 북한의 모습은..”존재”하질 않는걸 어떻케요?.
북한의 대외교여이라고 해봤자..집단농장에서 쌔빠지게 생산한 곡물을 동구권에 수출하고 무기 만드는 원자재 수입했는데.국민 1인당 “신바람”이라…님아 한번 그렇케 살아 보세용~?.

2017-01-01 03:40:16



rinyang



대한민국의 1970년대 초엔 이미 서민들도 돼지고기나 닭고기, 달걀 정도는 어렵지 않게 먹었지요.

2017-01-02 12:20:51



kevinshin



1974년 남한은 1인당국민소득 588달러로 북한의 521
달러보다 처음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2017-01-04 06:03:50



9715



라이팅님이 시원하게 정리해주십니다.
그저 개인 영달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민폐를 끼친 혹부리.
선한 것은 숨쉬는 것밖에 없읍니다.숨쉬는 것은 거짓을 할 수가 없거든요.

2016-12-30 10:28:22



toady



균형감각을 유지하려는 주기자님의 생각을 지지합니다.

다만, 김일성의 공:과 는 10 : 90 이 아니라 10 : 990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김일성의 가장 큰 잘못 두가지는 북한을 세계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의 조밀하고 가혹한 감시체계를 만든 것, 그리고 자기 권력을 만만찮게 포악한 독재자인 김정일에게 물려 준 것입니다.

북한이라는 아비규환의 상태를 만든 것 보다도, 그 상태가 70년 넘게 지속되고 앞으로도 그 끝을 가늠하기 힘든 상태로 만든 것이 더 큰 죄라는 생각입니다.

그로 인해 무수한 인명이 학살, 아사, 동사, 익사 되고 인신매매 인권유린 되는 것을 국제사회가 어찌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것을 생각하면 10 : 990의 10도 너무나 커 보입니다..

2016-12-30 11:15:13



포근한데



북한 김일성은 공이 전혀 없다

일제시대에도 마적단 생활을 했고 쌀 안주면 귀자르고 죽이고 했을뿐이다

보천보전투라는것도 면소재지 우체국 민간인하고 어린아이 3명죽이고 식량뺏앗아서 달아났을뿐이다……그걸 지서 일본인 경찰들이 추격했고….김일성이는 쏘련으로 달아나 쏘련군에서 군복무했을뿐이다

2016-12-31 12:15:44



rinyang



보천보전투에 혹부리 김성주가 있기는 했었나? 아닐텐데…

2017-01-02 12:23:51



포근한데



일제시대는 거주이전의 자유도 있었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도 않았고
통제하지도 않았고
말도 마음대로 할수 있었고
누굴 숭배하지도 않았고
아오지탄광이나 정치범 수용소도 없었고……..

일제시대보다 북한이 백배 천배는 힘들거다

그리고 한반도와 중국을 일제로 부터 독립시킨것은

미국이 개발한 원자폭탄이었다

2016-12-31 12:19:48



시나리오



그러게 ..공.과가 90대 10이라는 표현도 조금 어폐가 있네요. 김일성이 한민족 절반의 수준을 이렇게 후퇴시킨데 대한 과오는 너무 엄청난 것이기에 그 10분의 1에 해당하는 만큼 “공”이 있다면..아주 커야 할것입니다. 항일 투쟁했다는것 만으로도 대체 무슨 공이 그렇게 크길래…딱1억 대 10이 적당하군요.

2016-12-31 05:28:52



james2



한번 읽어 보고 싶군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명예훼손 소송으로 진실의 입을 막으려는 사람은 좌파들이지 우파가 아닙니다. 우파는 보다 진실에 담대한 태도를 보입니다. 주기자가 아직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아요. 아마 지만원 같은 꼴통에게 이 서적의 출간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보더라도 출간에는 반대하지만 방해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일제 시대 일제에 변절하지 않고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는 것 때문에 그에게 공이 “1″이라도 있다고 평가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현재의 처절한 북한 사회를 구성했다는 것 이외에도 그는 전쟁을 일으켜서 수 많은 인명을 살상한 자 입니다. 전체적으로 따지면 0.0001쯤 공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김일성의 실체와 관련해서는 최근에 출간 된 김용삼 기자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는데, 과거 김일성의 실체를 부정하는 이영명 교수의 책과 그의 실체를 인정하는 서대숙 교수의 책을 모두 읽어 보았습니다. 그 책들을 모두 읽어보고 내린 결론은 실체가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외국에 살고 있다보니 한국 책을 읽기가 쉽지가 않은데, 김용삼 기자의 책을 한번 읽어 보고 싶네요.

2016-12-31 05:46:41



rmfTpdy



일제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독립운동했냐 친일했냐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것은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은연중에 이런 풍조가 70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유는 북한과 남한좌파들이 한국역대정부를 친일이라고 몰아 공격하기 위해 조작해낸 프레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해방후 70년에 남북의 현실이 엄청난 격차를 보이는 오늘날에도 그 프레임이 맹위를 떨치는 것은 처절하게 실패한 북한을 옹호할 마땅한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종북화된 남한 역사학계도 남한을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로 몰아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고 우겨대는 것이다. 실제 내막은 북한도 친일파 많이 등용했고,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한 적도 없이 정적들을 친일파로 몰아 인민재판해서 처형하는 도구로만 이용했을 뿐이다.

박정희가 일제시대 만주군관학교 나오고 만주군 소위 1년 남짓 한 것을 엄청난 친일행위로 몰아붙이는 것도 웃기고 사실관계도 틀리는 일본군 장교출신으로 아는 사람들이 다수다. 만주국이 일본의 간섭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일본군과 만주군은 엄연히 다른 군대다.

항일 친일 프레임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짓이냐 하면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진 김광서 장군은 그야 말로 친일의 본진 일본 육사 나오고 1911년에 임관해서 3.1운동이 나던 해 1919년까지 무려 8년간 일본군으로 친일 행위를 했다. 그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연해주로 간 것이다,

박정희는 만주군 소위 1년 밖에 안 했으니 좌파식으로 따지면 김광서 장군이 박정희보다 친일행위를 8배나 더 많이 했다. 박정희도 해방이 되지 않았더라면 어느 시점에서 만주군을 박차고 나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 주어진 운명은 독립운동하는데 있지 않았고, 해방된 조국에서 큰 역할을 하는 방향으로 주어졌을 뿐이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등에서 실력을 기르지 않고, 김일성처럼 제대로 받은 교육도 없이 항일투쟁한답시고 만주 산야를 누비고 다녔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대한민국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평균 학력이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인 무식한 빨치산 출신들이 최고 권력을 잡아 세습까지 했기 때문에 저 꼴이 난 것이다. 나라 없던 시절 항일 투쟁하는 것과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일이다. 국가운영에는 전분야에 걸쳐 상당한 전문 지식과 능력이 필요하지만 무장 투쟁 경력은 국방분야 외에는 별로 쓸모가 없다.

항일투쟁했다는 사람들이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죽이고 전국을 초토화 시켜 민족에게 일제보다 더 큰 피해를 줘도 무죄인가? 한국전 특수로 일본 경제가 비상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에 대해 일본은 김일성에게 가장 감사할 것이다. 그러니 와다 하루키 같은 부류의 일본 사람들이 김일성 찬양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일본 경제를 부흥시켜 준 고마운 사람이니까.

2016-12-31 07:46:06



달래강



옳은 말씀입니다.

2016-12-31 09:30:58



후훗



지금은 유학하면 미국 유학을 당연시하지만, 구한말 이후 해방 전까지 일본으로 유학가는 것이 선진문명을 접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죠.
만주는 일본 관동군의 영향력과 세력권에 있었지만 식민지 조선과는 다른 세계였죠. 조선총독부는 있었지만 만주에도 총독부가 있어 일본인 총독이 주재했던가요? 일본은 만주까지 행정적으로 장악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물론 러시아 영국 미국의 보이지 않는 견제도 있었죠.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일단 물러나긴 했지만 만주의 지정학적 조건은 일본의 일방적인 지배를 불허했고 만주족 정부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존심 갖고 일본 정부를 대했다고 합니다.
만주에는 두 개의 고등교육기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건국대학 또 하나는 만주 육사였는데. 이 대학들은 동북아의 야심있는 청년들을 끌어들이는 블랙홀이었습니다. 공식적인 교육용어는 일본어였지만 중국어 만주어 몽골어도 통용되어 만주육사에 들어간 박정희는 중국어도 알아듣는 수준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대중이 1971년 대선에 나왔을 때 학력사항에 건국대학 중퇴라는 게 있는데 그게 서울 성동구에 있는 건국대가 아니라 만주 건국대라는 건 알만한 이들은 다 알죠. 김대중조차 만주 건국대에 입학한 적 있었노라고 뻐기고 싶을 정도로 일제시대 매력 있는 교육기관이고 거기 들어갔다는 것은 수재 중의 수재였음을 인증하는 것입니다. 김대중은 1987년 대선에 나왔을 때 만주건국대 중퇴라는 경력을 삭제합니다. 친일논란을 의식해서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수시로 거짓말을 둘러대었던 김대중의 전력으로 보아 증명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빼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박정희는 식민지 청년 중에서도 특별히 공부를 잘해야 들어갈 수 있는 대구사범을 나와 소학교 선생을 하다 24세에 만주육사에 입학합니다. 만주육사는 학비가 들지 않으므로 가난한 집 출신인 박정희로서는 건국대학보다 더 끌렸을 겁니다. 박정희 자신은 칼 차고 말을 탄 장교가 되고싶어 만주로 갔다고 하지만, 이를 두고 친일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선진문물을 배우러 유학하는 것을 반민족행위로 규탄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봅니다.
만주육사 나와 임관하면 식민지 조선에서 동족들을 탄압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아니라 춥고 사나운 만주땅에서 비적들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민해방군을 상대로 전투하는 게 소임이었습니다. 지금 와서보면 그게 어찌 반민족입니까? 소련 중공과 싸운 게 매국일까요? 2차대전 때 일본 유학을 하다가 학병으로 징병된 이들 중에는 장교로 임관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동남아와 태평양에서 미군 영국군 인도군을 상대로 전투했고 그들의 체험은 6.25 때도 보았듯 국군 전력 유지에 요긴하게 작용했음이 사실이죠. 참전 군인들의 전투경험은 국가안보의 핵심적인 자원입니다. 그걸 친일이라는 잣대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박정희가 만주육사를 졸업하고 일본육사에 입교한 것에 대해 이제는 시비를 걸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가 만주육사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두었기에 일본육사에 유학한 것이지 그가 철저한 친일분자라서 일본 정부가 데려간 것이 아니죠. 박정희는 전형적인 용(用)일주의자였습니다. 그의 탁월한 경영능력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한국경제는 일본 산업기술의 정수를 뽑아들여 지금 일본보다 나은 제품을 생산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일부의 제품이긴 하지만, 이것이 후진국이 선진국을 따라잡는 유일한 방법임을 부인할 수 없죠. 박정희가 친일파라서 만주육사 일본육사에 간 게 아니라 범인보다 탁월한 자질과 능력이 그로 하여금 출세하고 싶어하게 했고 그는 선진문명을 직접 배우기 위해 식민지 조선을 떠나 만주육사로 방향을 잡았던 것입니다. 박정희가 노덕술 이종형처럼 한국인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데 앞장섰다면 저부터 열렬한 친일분자 숙청 주장의 대열에 섰을 것이지만, 친일파로 통칭되는 인물들에 대해 제 나름대로 알아본 결과 일제시대에 유학을 갔다는 걸 근거로 민족반역자 낙인을 찍는 것은 어리석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016-12-31 10:00:36



GarryInsight



박정희 자신도 살아 생전 변호하지 않은 친일 경력을 옹호하는 것 보세요.

징용으로 끌려간 것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민주군 장교가 됬으면 친일파가 맞아요.

당시 항일운동한 김일성에게 여전히 컴플렉스를 느껴서 이러나 봅니다 ㅎ

2016-12-31 10:27:13



감찰관



당시 비적질로 먹고 산 김성주 보다는 낫지 않냐?
김성주는 말이다.. 밤새워 보고서 만들어 놓으면 아침에 나타나서 지가 들고 가서 보고하는 얌생이 상사같은 놈인 거야.

2016-12-31 11:03:46



새벽종이울렸네



김성주 김일성보다 나은 정도가 아니라, 박정희같이 똑똑한 사람이 일본 육사에 유학해 우리 군의 전술을 미군 교리에만 따라가지 않고 국가안보에 부합하도록 조절한 것은 우리에게 행운이었습니다. 우리는 미군처럼 물량 위주로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인데, 이것은 박정희 때나 여건이 좀 나아진 지금이나 큰 차이 없습니다. 내가 아는 한 한국군은 3개월 이상 전투할 수 있는 탄약이 없습니다. 소총 실탄조차 미군의 보유량에 비해 1인당 lot가 적습니다. 야포도 그러합니다.
이 나라는 미군 전력에 국방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대신 그 재원을 경제개발에 돌림으로써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부국이 되었습니다. 박정희는 그래야만 했던 시대의 국가지도자였고 그는 김일성의 유생역량(병력) 위주 전투 교범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공수전략을 매우 유기적으로 결합해 지금의 국군 전투력을 향상시킨 장본인입니다. 그 중요한 계기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월남 파병이었죠. 월남 파병으로 우리가 얻은 소득 중 하나가 군의 재교육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한국군은 미군과 전략 전술적 협력이 강화되고 현대화된 장비로 무장할 수 있었습니다. 월남전에서 얻은 달러는 고속도로를 비롯한 인프라 구축에 투자되었고 미국으로부터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지원받아 중화학공업 입국을 가능케하는 에너지를 자급할 수 있게 되었던 겁니다. 미국은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정책을 마땅치않게 여겼지만 박정희는 밀어붙였고 이로 인한 군수공업의 발전으로 이제 미군은 한국군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는 수준에 와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비군인데, 이는 북의 노농적위대를 무력화할 수 있는 세계 최고수준의 훈련된 예비 자원이죠. 이 역시 월남전을 계기로 장비가 개선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구가 북의 2배이니 가능한 국방 정책이었습니다.
박정희가 군 출신이 아니었다면 이상의 국방정책은 불가능했거나 상당 부분 실현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박정희가 친일파라고요? 그래서 이제 와서 박정희를 부관참시라도 해야할까요? 그렇지 않죠. 친일파라도 우리나라 건설에 유용했던 자, 공을 세운 자는 그것대로 평가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해석인 것입니다. 박정희는 위엣분 말씀처럼 일제시대에 태어나 일본군 장교를 선망하여 만주육사에 자진해서 들어갔지만, 그는 동족을 해치는 데 그가 배운 지식을 쓰지않았고 6.25 전쟁 때는 김일성의 남침에 대항에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데 일조했던 군인입니다. 그가 해방된 나라에서 만주국 장교였던 것에 자괴감을 느꼈던 것 때문에 우리가 그를 친일파로 몰아세워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역사의 평가는 늘 오늘의 시각으로 과거를 다시 보는 것이므로, 박정희의 공을 주목해야지 일제시대 친일을 근거로 그가 몹쓸놈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맹목입니다.

2016-12-31 07:52:21



rinyang



박정희가 태어났을 때… 조선이나 대한민국이 있었나?
박정희는 야심이 있었을 뿐이다.
박정희를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제 조상을 매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또한 박정희가 한때 남로당원이었지만 명백히 전향을 했다.
박정희를 친일 또는 배신자로 모는 좌빨종북의 행태가
참으로 한심스럽다.

2017-01-02 12:33:18



시나리오



일본군.만주군 장교들의 친일여부에 대한 평가는 비호고 자시고 할것도없이..딱 그시대 독립운동한 “임시정부”세력들이 해방후 이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처우했는지..보면 답 나옵니다.

해방되자 말자..박정희는 광복군에 들어가서 중대장 합니다..백선엽도 조만식 선생 비서까지하구요. 그리고 청산리전투의 영웅 이범석 장군이 국방부 장관하면서도..일본군 장교출신들을 대거 받아들입니다.

악질 헌병이나 고등계 형사가 아닌 일반 장교들은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처우했던게 그시대..좌익과 대적해야 하는..우익 민족주의자들 입장에서도 보편적인 정서죠..

그시대 독립운동하신 분들도 받아들인 일본군장교경력을..21세기에 키보드로 나라걱정하는 세대가..왈가왈부하는것 자체가 개 같짢은 수작인거죠…

가령 그시대 선박사업 하면서..일본에 전쟁물자까지 조달한 “X요다다이쥬”..슨상님도..그시대 좌익들 기준에서야..친일 자본가였지만..누구도 왈가왈부 하질 않쵸.

2017-01-01 01:23:25



파도



출판거절 사유에 대한 뭔가 오해 혹은 이해를 잘못하고 계신 듯. 출판사가 거절 사유를 그렇게 얘기했다고 이를 믿다니 참으로 순진하십니다. 이를 진보 혹은 퇴보와 연관 짓는것도 한참이나 생뚱맞는 거구요.

출판사는 책이 팔릴 것 같으면 기를 쓰고 계약할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관심이 없습니다, 몇 십부 팔고 말것이 확실해 보이는 책에 돈과 인력을 낭비할 출판사가 한국에 없다는게 아쉬울 수는 있을 겁니다. 한국에는 출판의 자유가 없는게 아니라 출판의 돈의 없는 겁니다.

2016-12-31 07:48:41



오뚜기



정답입니다

2016-12-31 09:14:55



후훗



지금은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이 국면이 지나면 반드시 김일성의 실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 때가 되면 어떤 저술이 더 신빙성이 있을지 호기심을 유발할 것입니다. 출판사들도 경영전략이 필요하겠죠.

2016-12-31 09:19:46



달래강



보수우익의 소송이 겁나서 출판을 거절했다는 의견을 기사로 싣는다는 것은 주기자가 오도된 프레임에 갖혀있다는 증거입니다. 라이팅클럽도 위에서 얘기했지만 1인출판도 하는 시대입니다. 만약 출판사가 거절했다면 아마 돈이 안될 것 같으니까 그랬을겁니다.

더구나 출판계건 문화계건 언론계건 좌파들이 장악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실제로 이문열 책 장례식 사건이라든가 박유하 고발 사건을 보더라도 오히려 책발간할 때 눈치를 봐야 하는 쪽은 보수우익 진영입니다. 이걸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요?

이거 뭐 완전히 주객전도이고 누명씌우기입니다.

2016-12-31 09:29:29



라이팅 클럽



달래강/ 웬만하면 그냥 지나가려 했지만… 박유하 교수를 지금 보수우익이라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박 교수 본인 스스로가 자신은 ‘신 친일파’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자칭 친일파가 대한민국의 보수우익이란 이야기는 뭔가 사리에 맞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2016-12-31 11:27:16



달래강



웬만하면 그냥 지나가실 것이지… 누가 박유하를 보수우익이라고 주장했나요? 내가? 어디요? ㅋㅋㅋ

박유하를 고소고발한 주체가 좌파라는 얘기였는데 오독을 하셨네요. 리딩클럽 가입~~

2016-12-31 12:51:22



라이팅 클럽



이런 식으로 빠져 나가겠다는 거죠? 계속 박유하 박유하 하다가 말이죠. 참 구질구질 합니다.

2016-12-31 01:00:01



달래강



아니, 라이팅이 용감무식하게 또 댓글 달았군. ㅎㅎ

박유하를 고소한 주체가 진보냐 보수냐 하는 논점에서 이탈했다가 한 방 먹으니까, 이제는 홍두깨처럼 “이런 식으로 빠져나간다”고? ㅋㅋㅋㅋ

이런 식이 어떤 식인데요? ㅋㅋㅋ 논점이 뭐였는데요? ㅋㅋㅋ 하여튼 병신년에는 못했지만 정유년에는 제발 좀 리딩클럽 좀 가입해서 열심히 공부하세욧.

2017-01-01 02:46:51



라이팅 클럽



또 신년부터 말장난. 올해는 정신 차리세요.

2017-01-01 03:57:20



달래강



이런 식이 무엇인지, 애초 라이팅님이 주장했던 것이 무엇인지 간단히 말하세요. 그럼 간단히 해결됨.ㅋ

2017-01-01 04:38:26



라이팅 클럽



달래강/ 님은 너무 무식해요. 지금 하필 박유하 이야기를 하며 보수우익은 그런 짓을 안 한다고 했는데 뭘 알고 이야기하세요.

내가 누굴 편드는 것이 아니고… 위의 주 기자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게 아닙니다. 단지 요즘에는 책 출간이 이념보다는 상업적 측면에서 많이 고려된다는 측면에서 이야기한 겁니다. 출판계의 생리도 자본의 논리가 우선된다는 것이죠.

보수우익은 저런 일을 안한다는 말은 그다지 옳은 말이 아니죠. 이 블로그의 질을 떨어뜨리는 무식한 발언입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봐도… 남정현의 ‘분지 사건’을 아시나요? 김지하의 ‘오적 사건’은 들어봤습니까? 조정래의 태백산맥 고소고발 사건은요. 양성우의 ‘겨울공화국 사건’은… 한수산-박정만 사건, 이범선 등등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건이 있었지요.

보수는 진실을 추구한다면서요. 무식하니 좋겠습니다. 아무 말이나 아무렇게나 하고도 자신이 옳은 줄 아니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습니다. 물론 님을 보수로 보지도 않지만… 신년에는 제발 자신이 아는 이야기만 합시다. 무식한 아구리로 보수 망신 다 시키지 말고요.

2017-01-01 05:04:24



丙申年아 잘가



라이팅님이 새해부터 욕보십니다.

2017-01-01 05:31:24



달래강



라이팅표 화제 돌리기. ㅋ

님은 애초에 “달래강이 박유하를 보수우익으로 간주했다”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난 그런적 없다고 반박한 것이고요.

위에 다시 읽어보아요. 그럼 새해에는 리딩클럽 가입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길겁니당. ㅋㅋㅋㅋㅋㅋㅋㅋ

2017-01-01 05:41:05



丙申年아 잘가



달래님아.설마 님이 게리일리는 없겠지요? 그동안에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장선군이를 어떤이가 언급해서 오늘 새록새록 떠오릅니다.그런데요.장선군이는 왜 장씨성으로 했을까요?김선군 이선군 최선군 하다못해 위씨성의 위선군도 있는데 말입니다.혹시 짚이는데가 없으신지요?장선군이 장씨성으로 한 이유가요.

2017-01-01 05:47:59



라이팅 클럽



흠, 충격이 커겠죠. 팩트에서 할 말이 없으니 말꼬리 붙잡는 신공을 또 펼치겠군요. 재미로 위의 대화를 다시 한번 볼까요.

달래강; 박유하 고발 사건을 보더라도 오히려 책발간할 때 눈치를 봐야 하는 쪽은 보수우익 진영입니다.

라이팅; 박유하 교수를 지금 보수우익이라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같이 말장난 하자면 라이팅의 말 뒤에 물음표(?)가 있죠. 라이팅이 달래강을 향해 묻고 있잖아요. 달래강이 그런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없다면 라이팅도 같은 거죠.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나.

2017-01-01 05:51:29



丙申年아 잘가



달래님아.아수라백작이라고 저 어릴적에 만화영화에 자주등장하는 캐릭터가 있었죠.한몸에서 두개의 상반된 캐릭터가 존재하는 인물이지요. 몸을 반으로 나눠서 우는 정상의성격을 좌는 파탄의 성격을 나타내는 두인물이 한몸으로 형성되지요. 혹시 그만화영화가 기억나시는지요? 참고로 70년대에 유행했던 만화영화입니다.

2017-01-01 05:53:05



라이팅 클럽



달래강/ 남의 글을 시리즈로 베껴오면서 원 저자가 누군지 물어도 묵묵부답인 파렴치하고 수준 이하의 님과 이런 토론을 하고 싶지도 않지만…

달래강의 “주기자는 보수의 고발을 우려했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식의 고발을 남발하는 쪽은 진보들입니다. 박유하도 그랬고.”라는 말을 조금 지적하자면.

박유하 교수의 형사처벌에 대해 반대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면 이런 이야기를 못할 겁니다. 진보쪽의 유시민 김병익 홍세화 장정일 고종석 임옥상 등등 문화 출판계 인사들이 박유하 교수의 형사 처벌에 대해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는 사실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017-01-01 05:56:48



달래강



그 질문 뒤의 문장은 라이팅님이 “달래강이 박유하를 보수우익으로 보고 있다”라고 생각한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왜 인용할 때 그 문장은 빼셨나요, ㅋㅋㅋ

2017-01-01 06:20:39



라이팅 클럽



여기 보수 논객들까지 달래강을 개처럼 보는 것은… 거짓말을 입에 달고 있는 그 태도 때문이죠. 자신이 ‘일뽕 중의 일뽕’임을 스스로 밝히면, 달래강님이라고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일본을 좋아하고 일본의 의견을 존중한다는데 뭘 어쩌겠습니까?

뱀처럼 끝이 갈라진 혀로 두 이야기를 하니 경멸하는 거죠. 어제 달래강에 대해 한 말씀 하신 보수분의 대화를 잠시 가져옵니다. 새해에는 솔직하게 살면 욕먹는 일이 반으로 줄어 들 겁니다.

“나는 계명산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 자가 위안부 이슈로 본인과 논쟁했을 때 방금 했던 말도 인정 안하며 접시 홱홱 돌려대는 것 보고 이 자는 말 섞을 종자가 영 아니다 싶어 끊었다.”

2017-01-01 06:38:34



라이팅 클럽



내가 박유하 교수라고 지칭하며 존중하는 것은… 박 교수는 적어도 자신의 정체성을 속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친일파라고 당당하게 밝혔죠. 친일파일 수도 있고, 친미파 친중파일 수도 있는 거죠.

달래강/ 그냥 솔직하게 ‘일뽕 중의 일뽕’인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세요. 박유하 교수처럼 말이죠. 이런 말장난을 해봐야 점점 더 라이어로 몰리며 님의 상처만 더 깊어집니다.

2017-01-01 06:43:20



달래강



새해에 할 일이 또 하나 있네요. 새해에는 지는 게임에는 참가하지 마세요. 용기는 가상하지만. ㅋㅋ큭!

2017-01-01 06:53:26



달래강



참, 한가지 빼먹었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7-01-01 06:56:24



라이팅 클럽



주군인 아베의 ‘한국은 멍청하다’의 말로 시리즈를 하고, 조선의 역사를 대형 기획으로 능멸하고, 일본과 대척점에 섰던 한국의 대통령들을 줄줄이 씹고, 일본을 공격했다고 한국 언론사를 기레기로 몰고… 하다못해 후쿠시마 원전 미담기사까지 생중계 방송하는 핵이빨이 달래강의 본질이죠.

사실 대한민국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박유하 교수는 아무 것도 아니죠.

달래강은 아직도 “위안부는 지금의 윤락녀와 다름없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간 증거도 없고, 일본 정부가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박박 우기고 있나요?(여기도 물음표가 있으니 잘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게 맞다면) 그 말에 대해 입도 벙긋 안 하면서도 자신이 일뽕 아니라고 방방 뜨면 욕만 더 잡수시는 거죠. (요 문단 구조를 이해하면 위 말장난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역사는 물론 문장구조론에 대해서도 공부 좀 하세요.)

2017-01-01 07:10:06



라이팅 클럽



달래강도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엔 욕 적게 잡수시고요.

2017-01-01 07:12:06



달래강



또 줄 바꿨네요.
새해부터는주제 돌리기, 줄바꾸며 도망댕기기도 하지 맙시당. ㅋ

2017-01-01 08:32:03



라이팅 클럽



다시 읽어보니 라이팅의 위 댓글들이 찰지군요. 비위가 약하거나 위장이 안 좋으신 분들은 건너뛰기를 권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달래강이 자신이 이겼다고 정신승리를 하고 있다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고 새해를 잘 시작하길 바랍니다. 서로 윈윈한 것이까요.^^

2017-01-01 10:24:45



쳐리



정말 아전이수식 해석이군요. 엄연히 문화계블랙리스트가 존재하는 이마당에.. ㅋㅋ

2016-12-31 09:35:14



감찰관



문화계 블랙 리스트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사사건건 정주 정책에 반대하고 시위에나 나와서 나대면서 디원은 정부에게 바라는 쓰레가들을 왜 세금으로 지원해 줘야 하나?
지 예술이 안 팔리면 세상이나 탓하는 것들이 왜 돈은 정부에게 달라고 하는 거냐고..
그들돞미칠 것 같기는 하겠다만…

돈은 정부가 주고 출연은 좌파검열단이 쥐고 있으니…

2016-12-31 10:51:54



rinyang



블랙리스트가 무슨 문제가 있나?
만일 불법적으로 공권력을 동원해 탄압했다면
그것은 처벌받을 문제다.
다만,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것은 잘한 것이다.
사회혼란을 야기할 위험성이 있는 인물을 관리해야 하는 것은
정부가 해야할 일 중의 하나일 뿐이다.

2017-01-02 12:37:41



GarryInsight



책 몇백권 판 돈과 소송비용 몇천만원 중에 어느 쪽이 큰 돈인지 모르는 늙은 바보분들이 많군요.

2016-12-31 10:32:23



감찰관



고 것이 바로 진보 법쟁이들이 노리는 점이지.

2016-12-31 10:48:30



파도



수학좋아하는 경제존문가님.

니말대로 책 팔아봤자 수 백만원 벌고 그거 내는데 수 천만원, 소송 패소하면 또 수천. 소송은 이길 가능성도 많고 이슈가 되면 책장사 대박칠 것이니 오히려 소송 걸어주길 기대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것도 안 될것 같으니 거절하는거란다. 사문화된 국보법으로 소송당한 출판사라, 누구 명예훼손도 아닌데 소송이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구속이라도 되면 이거 훈장아닌가? 출판사장은 좌파의 스피커 역할 인식으로 평생 먹고살 길이 열리는데 말이다.

누가 이런책 가지고 국정원 신고하고 소송걸면 신문에 한 줄은 나오겠지 소송에 이긴다는 기대를 할까?

개리도 늙나보다.

2016-12-31 10:52:40



라이팅 클럽



박유하 교수는 민/형사 사건이 동시에 걸린 거죠. 민사에서는 위안부 할머니의 명예훼손이 인정되어 9,000만원의 배상이 선고됐죠. 형사사건은 지금 진행 중이고요.

김일성 관련 책이 이제 와서 재판이 걸린다고요? 명예훼손하고는 관계없으니 재판까지 갈 것 같지도 않지만, 만약 보수우익에서 딴지를 걸어… 형사건으로 넘어가면 민변에 부탁하면 되죠.

가난한 출판사에 가난한 저자. 모처럼 이슈가 되어 돈 좀 만져볼 수 있겠죠. 그런데 그런 일도 없을 것 같으니 출판사들이 기피한다고 봅니다.

요즘 같은 불황기에 출판사 대표는 자기 회사를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은 못할 것 같습니까? 책 내봐야 돈만 들고 팔릴 것 같지도 않으니 기피한다고 봐야 하죠.

2016-12-31 11:51:35



울루스



박유하 교수에 대하여 라이팅클럽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김일성 평전은 요즘에는 돈이 안 됩니다. 게다가 애초부터 전자책으로 만들 만한 저서가 아닙니다. 저 책을 사줄 곳은 대학교수와 도서관 뿐인데…..채산성이 있을 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리고…..민변은 저런 책과 관련된 소송을 잘 안 해 줍니다. 왜냐하면 뉴스거리용 부각사례가 아니거든요.

예전에 제가 온라인으로 남극세종기지 폭행피해자(남극가고 싶어 동업한 식당을 어렵게 그만둔 조리사였음)를 부족한 지식으로 법률지원(아무도 그를 돕는 사람이 없었죠)해 줬습니다. 그런데 그분 말씀에 따르면 민변을 방문했는데, 민변에서는 안해준답니다. 왜냐하면 조금전에 언급한 이유 때문이죠. 오히려 군법무관 출신 변호사(빈곤층 법률자문 많이 해줬음)나 다우코닝 소송맡았던 유명 국제변호사(한미양국 변호사자격증 보유)가 그나마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2016-12-31 01:16:38



GarryInsight



소련 사람들은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나치 독일의 침공을 큰 희생을 치뤄가면서 격퇴한 것을 여전히 높이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연합국측에도 큰 도움이 되어 2차 대전의 종전에 기여해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김일성은 오판으로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명을 죽게 만들고 패전했을 뿐입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아니라 도리어 히틀러였던 셈이지요.

젊어서 항일 무장투쟁을 조금 한 것은 맞으나, 우리나라는 그와 아무 상관없이 해방되었고, 그럼에도 그는 북에 진주한 소련의 간택으로 북의 지도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 뒤 수 많은 인권 유린을 저지르고 수백만을 굶겨 죽이고 3대까지 세습시키는, 아시아의 최빈국이자 오로지 자기 일가만을 위한 봉건 노예제 사회를 건설했죠.

결국 진실을 다 알게 되면 북 주민들이 김일성을 존경할 타당해 보일만한 근거는 거의 모두 없어지게 됩니다.

2016-12-31 08:02:09



달래강



개리 말이 맞다.

2016-12-31 09:32:22



시나리오



ㅋ 스탈린의 독소전 항쟁은..”스탈린이 있었슴에도 이겼다”는데서 오히려 러시아인들의 저력을 칭찬해야 할겁니다. 스탈린이 그 이전부터 군인들 작작 숙청했으면 훨씬 더 강한 소련군이 됬을 테지요.
60년대 북한의 발전도.김일성 이었슴에도 그만큼 발전한게..기특한거죠. 만일 소련파.연안파 주장대로 “경공업우선”.”기계에서 쌀이 아오냐”는

스탈린의 독소전..”대조국전쟁”업적은..”스탈린 이었슴에도” 그정도 방어해 냈다는걸 오히려 칭찬해야 합니다. . 일인독재 구축하는 과정에서 하도 군인들을 숙청하니..제대로도니 지휘체계가 있을리 만무함에도 그정도 방어해 낸건 한마디로 인민들의 피와 땀인거죠.
끝대 없이찍어내는 탱크..그리고 뒤에서 후퇴병들 학살하는 독전대를 등에 엎고 죽어간 러시아 병사들의 공로입니다..

박정희 시대를 향해서 “박정희 였슴에도 경제가발전했다”라는 식으로 비하하하는 한국의 좌파들은 스탈린의 독소전 업적은 꼭.빼 놓치 않고 인정하죠..여기도 딱 “스탈린 이었슴에도 이겼다”라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

.

2017-01-01 03:28:41



시나리오



글이 두번 클릭되서 이상하게 됬네요.두 단락은 따로 입니다.

이어서 얘기하자면. 60년대 북한의 발전도.김일성 이었슴에도 그만큼 발전한게..기특한거죠. 만일 소련파.연안파 주장대로 “경공업우선”.”기계에서 쌀이 아오냐”는 민생우선 정책을 폈다면..김일성시대보다 북한 인민들은 훨씬더 잘 먹고 잘살았을 겁니다.

2017-01-01 03:30:48



1943jp



책을 구입 하고 싶습니다. 방법을 알려 주시면 고맙겠 습니다.

2016-12-31 09:43:50







김일성 왕조 북한의 정통성이 제로인 이유는 많다. 남한 깡통 진보들의 주장과는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만주서 빨치산하다 일본군에 쫓겨 소련으로 도망가서 해방전 5년간 신나게 잘 놀던 김성주(김일성)가 스탈린의 간택을 받아 해방후 소련군 등에 업혀 들어와 인민들의 지지가 아닌 소련군 무력과 정치공작의 도움으로 지도자가 됐다.

그런 자가 국내서 독립운동하다 감옥살이한 인민들의 지지가 높던 조만식 선생이나 남로당파, 중국서 끝까지 항일투쟁하던 연안파 등을 모조리 처형하고 세습왕조를 꾸렸다.

소련군이 데려온 진지첸(김일성) 대위는 만주서는 좀 알려졌는지 모르나, 국내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 자가 어디서 뭐하던 인간인지 몰랐다. 그러니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 이름은 유명하나 누구인지 불분명한 점을 이용하여 그 이름을 사칭하며 항일영웅 행세를 하여 국민들을 우롱하고 역사를 제맘대로 조작해 놓았다.

김성주는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별로 대단할 것도 없지만 전사한 빨치산 선배 6사장 김일성이 한 보천보 사건의 전공조차 훔쳐서 자기가 한 걸로 조작하여 엄청난 항일업적으로 만들었다. 보천보 사건 빼면 김성주가 한 항일 업적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반면에 남한은 해방될 때까지 끝까지 살아남아 독립운동하던 임시정부 세력이 건국의 중추세력이 되었고, 민의로 지도자로 선출되어 자유민주 국가를 세우고, 후속 세대가 번영하는 국가를 만들었으니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가짜 김일성 장군이 세운 세습전제왕조 북한에 비할 바가 아니다.

2017-01-02 08:22:07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 활동은 국내서도 오랫동안 연구해왔고, 책도 많이 출간되고 논란은 많았지만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 새로운 책 하나 더 낸다고 해서 국가보안법에 걸릴 이유도 거의 없다고 본다.

김일성을 일방적으로 찬양 옹호한 것도, 대한민국을 비방한 것도 아닌 책인데 국가보안법에 걸릴 이유가 없다. 출판사가 도서 판매 전망이 밝지 않으니까 거절하는 방편으로 국가보안법을 들먹였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김일성에 대한 책은 이미 출판된 게 많으니 더 정확하게 밝힌 책이 나온다고 해도 인기를 끌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다. 작년 6월에 김용삼씨가 펴낸 좀 다른 시각으로 쓴 김일성 책도 별로 많이 팔리지 않은 것 같다.

한홍구는 노골적으로 김일성 찬양하고 대한민국과 박정희를 까내리는 책을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숱하게 냈는데도 고정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어 많이도 팔아먹었다. 출판 시장에서 국가 보안법은 거의 사문화 됐다.

다만 김일성 회고록 같은 북한 원전은 국내 유통이 금지되어 있으나, 도서관 같은데서는 소장할 수 있고, 일반인은 열람불가이나 전문 연구자들은 볼 수 있다.

2017-01-02 08:27:24



감찰관



기왕 사문화된 거 세기와덜불어 한생애 뻥치다..같은 끄레기들은 풀어도 된다고 봅니다. 고딩 때 읽던 무협지 수준인데 푸는게 더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만주에서 비적질하던 사파 김씨 문파가 북쪽 곰파와 뛔넘 모파의 지원으로 강호를 통일하려다가 전세계 문파들의 협동 방어에 내상을 입고 서도 내부의 다른 문파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제압하고 3대에 걸쳐 사특한 독재를 펼친다는 내용입니다.

2017-01-02 08:45:35



바람처럼



꿑 부분에서 십분 공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도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과 얘기할 때에 하는 말인데
박정희는 과로 출발해 공을 80%, 김일성은 10%의 공으로 출발해 과가 80%.
대한민국의 좌파 운동권들은 출발시점의 선명성경쟁을 주창하였었습니다.
북한식 주장을 그대로 뻬긴 것인데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리고, 미국이 싫어서 친북을 주장합니다. 반미와 친북은 동의어가 아닌데도 말이죠.
이게 바로 진영논리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입니다.
좌파운동권이 왜 정신이 없는 사람들인가 하면
초등학교 때 첫 시험에서 1등을 한 사람이면 늙어 죽을 때까지 1등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과
똑같은 논리를 펴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땅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피흘린 사람들이 일군 나라입니다.
똑똑한 좌파는 박헌영처럼 지금 북으로 가서 김정은과 함께 피땀 흘려 나라를 가꾸면 됩니다.
물론, 보수파들도 양보를 해야 합니다.
해방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의 공적을 지금도 지나치게 강조하면 안 됩니다.
선열들이 좌파들한테 사죄 못 받으면 어떻습니까?
그 분들은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피 흘렸지. 우파들이 좌파 몰아내고 좌파가 뉘우치치 않는다고
타도하라고 나라를 지키신 것 아니잖습니까?
박정희대통령이나 이승만대통령 같은 분들도 애국자이시니까
반대편에서 아무리 욕을 해도 그냥 속 상하지만 웃어 넘기실 겁니다.
그야말로 “오냐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대신 좌우 나누어서 싸우지 말고
통일 대한민국의 번영을 위해서 힘을 합치면 춤을 추리라”하지 않겠습니까?

2017-01-02 11:12:28



gma



8.15 해방후 김일성 이름이 최초로 나오는 기록입니다. 남북한, 일본, 중국을 통털어 최로로 나오는 겁니다.

경기도 용인에 살았던 정관해(鄭觀海 : 1873~1949)라는 유학자가 쓴 한문일기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입니다. 乙酉年은 해방되던 해 1945년입니다.

———————–
http://db.history.go.kr/id/sa_081_0010_0260_0070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 : 한국사료총서 제44집 국사편찬위원회
1945년 8월 17일(음력 7월 10일)
쇼와(昭和) 천황은 초7일(初七日, 양력 8월 14일)에 항복 깃발을 세우고 모두 철퇴(撤退)하기로 하여, 조선이 독립국이 되었다. 국호는 동진공화국(東振共和國), 연호(年號)는 영세(永世)라 하며, 대통령은 안모(安某)라 하는데 곧 전일(前日)의 안중근(安重根)의 아들이라 한다. 내무대신(內大)은 여운형(呂運亨), 외무대신(外大)은 김일성(金日成)이라 한다.

昭和於初七日, 乃竪降幡, □□盡爲撤退, 朝鮮爲獨立國, 國號東振共和國 年號永世, 大統領 安某, 安某 卽前日安重根之子, 內大 呂運亨, 外大 金日成云

8월 26일(음력 7월 19일)
김일성군(金日成軍)은 하루에 500리를 말타고 달리며, 그 정예(精銳)하기가 비할데 없다(無比)고 한다.
金日成軍, 一日能驅五百里, 其精銳無比云

驅 몰 구 : 1. (말을 타고)몰다 2. 빨리 달리다
————————————

이 김일성이 당시 소련 하바롭스크 88여단에 있던 진지첸(김일성) 대위일까요? 전설의 김일성 장군인 것이 분명합니다.

전설의 김일성 장군은 일본 육사 나왔다거나, 백마를 탄다거나 하는 전언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 육사 기병과 출신 김광서 장군이 모델로 제시됩니다. 실제로 김일성이란 이름을 썼다는 증언과 기록도 있습니다.

8.15 해방직후 동진공화국 벽보는 여러 군데 나붙었고, 거명되는 이름도 조금씩 다릅니다.

2017-01-02 12:12:16



gma



일본인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朝鮮終戰の記錄 :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에도 8.15 당시 벽보로 나붙은 동진공화국 각료 명단에 대해 나옵니다.

이즈음(8.16일경) 어디선지 모르게「東震共和國(동진공화국)」의 수립이 전해지고 “大統領(대통령) 李承晩(이승만) 總理大臣(총리대신) 金九(김구) 陸軍大臣(육군대신) 金日成(김일성) 外務大臣(외무대신) 呂運亨(여운형) 기타 미정”의 각료 명단이 시내 요소에 나붙었다. 터무니없는 데마였지만 군중속엔 그 성립을 믿는 이조차 적지 않았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081500209204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08-15&officeId=00020&pageNo=4&printNo=14101&publishType=00020

2017-01-02 12:14:54



gma



주한미군사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 한국현대사 사료총서2

천황의 항복 선언 직후의 며칠 동안, 전단과 벽보가 나타났다. 이들 중 작은 전단 하나는 공산주의자나 아니면 아마 소련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인다.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조선의 독립을 축하하며:
동방 민주주의의 새벽
대통령 - 김구(金九)
수상 - 이승만(李承晩)
외무장관 - 여운형(呂運亨)
국방장관 - 김일성(金日成, Kim, Il Sawng)
총참모장 - 황운(黃雲, Hwang, Wun)

http://db.history.go.kr/id/husa_001r_0030_0040

2017-01-02 12:18:07



후훗



동진공화국이라는 명칭이 흥미롭군요. 그만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5.8 당시 조선의 민초들에게는 잊혀진 존재라는 걸 시사합니다. 여운형이 미군 진입 전에 선포한 국가의 명칭은 조선인민공화국이었습니다. 어쨌든 왕조국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회적 합의가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김일성을 점지한 소련군도 국가의 명칭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했겠죠. 그랬는데, 다시 조선왕조로 돌아가버렸으니 퇴행한 거죠. 성리학적 정치철학에 의해서만 가능한 역성혁명에 불과한 것이 지금의 북한입니다. 태어나선 안 될, 전제왕조체제입니다.

2017-01-04 08:12:56



gma



일제시대에는 사람들이 독립운동하는 단체 이름은 거의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임정이 잊혀진게 아니라 그런게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거죠. 대신 독립운동하던 사람들 이승만, 김구, 김좌진, ..김일성 장군 등등의 개인적 명성이 많이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승만, 김구는 임정 요인들이니 결국 그게 그거죠.

동진공화국 벽보나 삐라는 상당히 많이 뿌려졌던 모양인데, 금방 잊혀져서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운형의 인민공화국 선포 때 전국인민위원 명단에 이승만, 김구 등과 함께 김일성(金日成)도 들어 있었는데, 당시는 북한 김일성은 소련에 있을 때라 국내 아무도 그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를 때이니 이 김일성이 누구냐는 논란이 있어왔는데 답을 몰랐죠. 근래와서 동진공화국 벽보 내용이 재발견되어 알려지면서 이 김일성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게됐습니다.
저때는 해외에 있던 사람들이 귀국도 하기 전이라 본인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이름 집어넣은 겁니다.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06_0010
건준(建國準備委員會),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개최, ‘인공’ 임시조직법안 상정 통과 : 1945년 09월 06일
위원장 呂運亨 부위원장 許憲
◊ 全國人民委員
李承晩 呂運亨 許憲 金奎植 李觀述 金九 金性洙 金元鳳 李容卨 洪南杓 金炳魯 申翼熙 安在鴻 … 曺晩植…金日成

2017-01-05 07:38:58



gma



소련군 88여단의 빨치산들도 해방 직후 이승만, 김구의 집권이 유력하다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이라는 만주군 출신 인사가 귀국길에 오른 김일성 일행을 만주의 무단장역에서 우연히 만나 누군지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국내사정을 이야기 하다 이승만이나 김구가 집권할 것인지 묻더랍니다…. 나중에 북한가서 보니 그 사람들이 김일성과 측근들이었다고 했습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2012500209204002&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2-01-25&officeId=00020&pageNo=4&printNo=15478&publishType=00020

2017-01-05 07:48:37



후훗



그렇군요. 당시 한반도의 대중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조작보다는 독립투사 개인에 대한 인식과 기대를 품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 11명이 한 팀으로 뛰는 축구경기에서 골 넣는 선수 이름만 아는 축구무식쟁이같은 존재들이었죠.
몽양 여운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정부 조직을 소련식으로 구성할 것을 꿈꾸었던 모양이군요. 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을 인민위원이라고 한 걸 보면…여운형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는 삼권분립에 근거한 민주주의의 실현보다는 모스크바에서 추진하던 소위 민주주의민족전선(통일전선)의 선봉이 되기로 작심했던 모양입니다. 그 때까지는 1당독재가 최종목표인 공산당의 수법을 식자들조차 몰랐을 테니까요. 6.25가 터지고 나서야 공산당의 본질을 알게되었으니 댓가가 컸습니다.

2017-01-05 09:19:45



gma



소속팀 이름은 모르고 스타 플레이어 이름만 아는 그런 상황이었던 거죠.
여운형은 공산주의자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활동은 서울에서 했지만 딸들은 북한으로 보냈죠. 북한 김일성과도 연락이 닿는 유일한 남한내 유력인물이었으니까요.

2017-01-05 11:22:18



대한남아



대한민국은 김일성 개들와조가 아무리 떠들어도 먹히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은 반공을 국시로하는 것에 절대 찬성한다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누구든지 전향하여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이다

2017-01-02 02:55:36



gma



해방 당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동진공화국 벽보에서 보다시피 이승만, 김구 급으로 유명했다.
이 정도 반열에 오르려면 수십년간 이름이 구전으로 퍼져 전국에 알려져야 가능하다.

일제시대 당시 신문은 독자도 몇명 안 되고 언론이라는 게 없다시피 했다. 전국민 80~90%가 문맹이고, 80% 이상이 농어촌에서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살 때이다. 해방 때도 8.15 당일날은 서울시민들도 해방된 줄도 몰라 시내가 조용했고 이튿날부터 거리에 사람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해방이 뭐냐고 묻는 사람도 많았다고 할 정도로 민도도 낮았다. 신문에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몇번 난다고 전국에 알려지던 시절이 아니다.

이름이 학교나 장터를 통해 오랜 시간 구전으로 퍼져 나가야 저 정도로 전국적으로 알려진다. 그러니 당연히 김일성 장군도 이승만, 김구 급 연배의 사람이어야 한다.

만주 산야를 숨어 다니다 소련 시골 마을에 콕 쳐박혀 있었던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해방 당시 과연 저 정도급 인사였던가?

그리고 저 정도급 인사라면 해방후 당연히 공개적으로 만인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는게 정상이다. 이승만, 김구는 실제로 그랬다. 그런데 김일성 장군은?

진지첸 대위는 소련군함 얻어타고 쥐새끼처럼 몰래 원산항으로 잠입하여 비밀리에 평양으로 왔다.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으로 1달 동안 민심을 살피며 숨어다녔다. 그러다 김일성 장군을 사칭하는 묘안을 찾아내고 10월 14일에야 비로소 평양의 대중들앞에 김일성 장군이라며 나선 것이다.

소련군 문서에 적힌 김일성의 이름은 1945년 10월 1일 까지는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이고,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 이날이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공식 둔갑한 날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61700209202007&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92-06-17&officeId=00020&pageNo=2&printNo=21856&publishType=00020

소련 군정 인사들의 후일 증언도 당시 소련군은 진지첸 대위가 국내에는 완전 무명인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지도자로 만들기 위한 첫번째 정치 공작이 그를 항일영웅으로 조작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 방안이 실체가 불분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 이름을 사칭하는 것이었다. 조만식 선생 같은 진짜 독립운동 지도자는 친일파로 몰아서 감금하고.

김일성에 대해서는 그가 만주서 무슨 항일 활동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해방 당시 국내에는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던 그가 소련군의 어떤 공작을 통해 어떤 과정을 거쳐 북한 지도자로 만들어졌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더 본질에 다가가는 길이다. 항일 경력은 지도자로 만들기 위한 치장 거리에 지나지 않는 부수적인 것이다.

2017-01-03 08:37:37



감찰관



본인 나이가 딱 30살 즈음인 3대 돼지가 젤루 잘안다. 과연 30대 초반에 그 것도 지난 몇년간은 쏘련의 개로 사육 되던 돼지가 항일 영웅인지 아닌지는 말이다.

정은아.. 니 나이에 그게 가능했을 거 같냐? ㅋㅋ

2017-01-03 09:24:51



gma



김성주가 항일투쟁의 업적으로 인민들의 지지를 받아 자기힘으로 지도자가 됐다면 무슨 항일 활동을 했는지 정확히 아는 것도 의미가 있죠. 정말 그런게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알려고 고민 하기 전에 알려졌을 것이고, 아니라면 자기가 스스로 정확히 밝혔겠죠.

그런데 항일투쟁 업적이 아니라 소련의 개로 사육된 덕에 스탈린의 발탁을 받아 지도자가 됐으니 그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정확히 알아봐야 별 의미도 없죠.

자격이 안 되는 인간이 지도자가 됐으니 없는 업적도 만들어 내어 조작해서 자기 합리화를 시켜야 하니까 온갖 역사를 다 조작한 거죠. 조작하기 전의 김성주의 빨치산 활동을 정확히 알아봐야 별로 대단한 게 나올 것도 없고 의미도 없는거죠.

2017-01-03 11:04:01



gma



역사책에는 김성주가 이런 저런 항일 활동의 공으로 자도자가 됐다고 쓰면 안 되고, 소련군에서 상관들에 잘 보여 스탈린의 발탁을 받아 지도자가 됐다고 정확히 써야죠.

2017-01-03 11:09:05



감찰관



그리고 양심이 있는 학자놈들이라면 그 동안 김성주가 쏘련의 앞잡이였다는 부분을 교과서에서 빼느라고 애써온 놈들이 교수질하고 있었다라고 교과서에 박아 버려야지요.

2017-01-03 11:22:11



닭장군



여기 댓글 보면서 다시한번 주기자님이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블로그 시작하신 이래 거의 매일매일 빨갱이타령하는 이 꼴통댓글들을 보실텐데, 멘탈유지를 어떻게 하시는지 ㅎㅎ. 뭐 이쯤 되면 이미 해탈의 경지에 오르신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ㅎㅎ.

2017-01-03 08:50:19



감찰관



약 치는거 보소…쫑북을 종북이라 못하는 세상이 더러운거지..

2017-01-03 09:12:01



닭장군



응, 너 종북.

2017-01-04 07:17:15



감찰관



피아 구분은 좀 하고 삽시다. 너가 아니고 나 아니것소.

2017-01-04 07:59:02



gma



botw
2017/01/04 07:32
botw.egloos.com/11246298
덧글수 : 0

기막힌 반전 :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김일성이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된 실제 내막을 알면 기겁을 할 겁니다. 김일성은 빨치산 항일 투쟁의 공이 아니라 동료 빨치산들을 배신한 공으로 북한 지도자로 선택됐습니다.

1로군 제2방면 군장으로 있던 김일성은 일본군 토벌에 쫓겨 상관인 1로군 총사령 대행 위증민의 허락도 없이 1940년 10월 23일에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망갑니다. 월경 후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주보중의 보증으로 풀려나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톡 중간 쯤의 하마탄(지금의 Razdolnoye) 마을에 있던 남야영에 수용됩니다. 여기서 1941년 2월 16일 김정일이 태어납니다. 김정일이 태어난 집 건물은 지금도 남아있어 연해주 관광객들의 관광코스로 되어 있습니다.

김일성은 1942년 7월에 만주 빨치산들을 수용하는 88여단이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 km 정도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에(Vyatskoye) 마을에 창설되면서 거기로 이주합니다. 88여단에서 김일성은 표면적으로는 1대대 대대장이었지만, 실제로는 빨치산 동료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상관인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Naum Sorkin (1899 – 1980) 소장에게 보고하는 NKVD (KGB 전신) 밀정이었습니다. 소르킨은 왕신림(王新林)이라는 중국식 암호명으로 만주 빨치산들과 소련 망명시 처우 문제를 협상하던 사람인데, 1941년 3월에 극동으로 부임해 왔으므로 그 전임 왕신림에 이은 2대 왕신림입니다. 이 사람은 악명 높던 NKVD 총수 베리아의 심복이었습니다. 88여단도 원소속은 국방성 아닌 NKVD 산하 부대였는데, 편의상 소련 극동전선군 사령관 Maksim Purkayev (1893-1953) 대장 아래 소속되어 통제를 받았습니다.

김일성은 NKVD 비밀 요원 노릇을 하면서 소르킨과 푸르카예프의 신임을 얻은 것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는 결정적 요인입니다. 소르킨은 스탈린 아래 비밀경찰 총수 베리아의 심복이었으니, 김일성은 소르킨이 베리아에게 추천하고 베리아가 스탈린을 움직여 북한 지도자로 낙점을 받은 겁니다.

이같은 과정은 인민군 소장으로 있다 숙청되어 10년간 감옥살이 한 후 중국으로 탈출한 강수봉씨가 여정(呂政)이라는 필명으로 쓴 “붉게 물든 대동강 (동아일보사, 1990)”이란 책에 나와 있습니다. 강수봉은 숙청되어 감옥에 있을 때 6.25 때 인민군 정찰국장 했던 최원(崔元) 소장과 같은 감방에 있으면서 들은 이야기 입니다. 최원은 소련의 고려인 출신으로 88여단의 소르킨 소장 아래서 정보업무를 담당했던 사람이므로, 당시 김일성의 역할을 환하게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이 내용은 1992년 동아일보에도 연재되었습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42200209103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90-04-22&officeId=00020&pageNo=3&printNo=21096&publishType=00010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정치위원呂政(여정) 手記(수기) (1) 1990.04.22 동아일보
金(김)은 蘇(소)KGB 情報員(정보원)이었다
抗日(항일)유격대 시절 隊員(대원) 고작 20여명 지휘
平壤入城(평양입성) 연설문 蘇將軍(소장군)이 써준것 읽어

2017-01-04 07:55:26



gma



북한 김일성이 가짜인줄 분명히 알고 있었던 월남민 1세대들이 세상을 떠날 무렵부터 공작을 시작해 오늘날 학계에서 진짜로 둔갑시켜 놓은 종북 어용학자들은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주기자도 과거 남한 정부가 반공 교육을 위해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었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합니다.
탈북해서 남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자유를 지켜낸 반공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무슨 심뽀입니까?

강력한 반공 정책이 아니었더라면 북한과 공산 강대국들에 둘러쌓인 엄혹한 환경에서 나라를 지켜내지 못하고 월남처럼 일찌감치 공산화 되고도 남았을 겁니다.

2017-01-04 08:25:43



gma



김일성이 88여단에서 빨치산 동료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상관에게 밀고하는 KGB 비밀요원있다는 KGB 문서도 공개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조선독립이나 이념이나 동료간의 의리 같은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자신이 살아남아 권력의 향방을 쫓아 출세하는 것을 최고로 여기던 인간입니다.

1985년에 영국으로 망명한 KGB 요원 Oleg Gordievsky (1938~ )가 펴낸 책에 나옵니다.

More Instructions from the Centre: Top Secret Files on KGB Global Operations 1975-1985
Christopher M. Andrew, ‎Oleg Gordievsky / Psychology Press, 1992
이 책 pp. 78~79 에 나옵니다.

본부가 정보활동을 하기 힘든 세 공산국가는 알바니아, 중국, 북한이었다. 김일성이 다스리는 新스탈린 경찰국가의 치밀한 보안은 평양의 KGB 지부의 활동을 북경처럼 어렵게 만들었다. 1970년대 김일성이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강화하자 모스크바는 경계심을 갖고 관찰을 하였다. 1973년 소련은 북한에 대한 무기 수송을 중단시켰으므로 중국은 주된 무기 공급국이 되었다. 2년 뒤 김일성은 북경과 부카레스트를 방문하면서 모스크바를 빠뜨렸다. KGB는 이런 김일성을 배신감과 경멸감으로 대하였다. 김일성은 영명한 빨치산 작전으로 1945년 8월에 그의 조국을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 저항전쟁의 영웅으로 행세하였다. KGB 본부는, 그러나, 김이 1945년 8월엔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북한지역이 소련군에 의하여 해방되고 있을 때 김은 러시아에서 赤軍의 대위 겸 NKVD(KGB의 前身)의 요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While Korea was being liberated by Soviet troops, Kim had been serving in Russia as both a lieutenant in the Red Army and an agent of the NKVD(the predecessor of the KGB.)

원문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uN1TU0vrsr0C&pg=PA78&lpg=PA78&dq=kim+il+sung+kgb&source=bl&ots=CZkRqKGTEn&sig=7b0sdETYMpYxoySveazjkDvsEL0&hl=ko&sa=X&ved=0ahUKEwiQoZTonOfJAhVGK6YKHYQOB04Q6AEITjAL#v=onepage&q=kim%20il%20sung%20kgb&f=false

2017-01-04 11:48:17



오성



김일성 (본명 김성주)는 사기꾼에 매국노일 뿐 아니라
밀고자라는 감투도 하나 더 써야 할 것 같네요.

2017-01-04 02:19:08



감찰관



보수를 친일 친미로 몰고 매국노로 몰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본인이 쏘련의 주구 였던 과거 때문인 겁니다.

공산주의자들의 고전적 수법 중의 하나가 나의 약점을 상대에게 뒤집어 쒸어라..라는 것이 있지요.

2017-01-04 02:30:10



오성



한국 내의 (종북)좌파들이야 김가왕조로부터
이런 ‘공산주의자들의 고전적 수법’을 잘 전수받고
있겠지요.

이제는 한국 내 (종북)좌파들도 일취월장하여
종종 이들 (종북)좌파들의 선동적 구호를
김가왕조가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을 보면서
청출어람(靑出於藍)도 가지가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17-01-04 02:45:13



감찰관



만약네 만약에 적화통일이 되어 버린다면 남한의 종북이들이 북한 멍청이들 다 잡아먹을 겁니다.

2017-01-06 08:50:53



gma



앞으로 나올 김일성 평전의 핵심은 항일투쟁보다는 어떻게 해서 스탈린의 낙점을 받아 북한 지도자가 되었는가에 맞춰져야 한다고 본다.

그 자가 북한 지도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 정도 투쟁이 역사 책에 크게 들어올만한 것도 못된다. 그 자가 남북한 역사를 요동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북한 지도자로 스탈린의 발탁을 받은 때문이지 그 자의 항일 투쟁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자의 항일투쟁 역사는 자세히 잘 알아낸다고 해도 큰 의미도 없다.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만주 빨치산들의 투쟁은 중국을 위한 것인지 조선독립을 위한 것인지도 모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수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2017-01-05 11:31:23



달래강



동감입니다. 김일성이 일제와 얼마나 싸웠는지는 몰라도, 그게 조선민중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싸운 것도 아니고, 또 그 정도의 저항과 투쟁은 세계사에 널리고 널렸습니다.

무엇보다도 김일성의 일생을 보면 공이라고는 제로에 가까우며, 과는 수 천, 수 만이나 되는 악마입니다. 이걸 부인하면 X신 인증이지요.

이 악마의 항일도 알아볼 필요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악마가 어떻게 정권을 잡았고, 무슨 악마짓을 했는지를 제대로 밝히고 연구하는 것이 백만배나 더 중요합니다.

2017-01-05 12:39:33



gma



근래에 많은 자료들이 전산화 되어 인터넷 검색이 가능해지면서 해방 직후 북한 김일성이 평양에 출현하기 직전의 김일성 관련 기록이 다수 발견되어 수십년간 논란이 되어온 북한 김일성의 진짜 가짜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해방 직후 각료 물망에 오르내리던 이승만, 김구 급으로 유명했던 김일성은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지 소련군이 데려온 33세의 진지첸 대위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국내 누구도 어디서 뭐 하던 자인지 몰랐던 소련군 진지첸 대위는 누군지 불분명했던 김일성 장군을 사칭하여 그 명성을 훔쳐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 명백해졌으므로 김일성 진위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논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수많은 월남민들이 김일성이 가짜라고 한데는 이유가 있었는데도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가짜 김일성을 진짜로 둔갑시켜 놓은 종북 어용학자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탈북자들 중에도 자신들이 어떻게 하여 김가 왕조의 노예가 되었는지의 핵심적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우리 주인이 일제 시대에 어떤 훌륭한 항일투쟁을 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일성의 노예가 된 것은 문제가 없으니 그 과정은 알 필요가 없고, 훌륭한 우리 주인을 왜 가짜로 만들었냐고는 투정이나 하는 노예근성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다.

이제와서 과거의 김일성 연구들을 돌아보면 기념비적인 대작은 맥을 잘못짚은 서대숙이나 와다 하루키의 저서들이 아니라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었다고 온갖 욕을 다 들어먹는 이명영의 “김일성 열전(1974)”이다. 이명영은 수많은 월남민들을 찾아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다양한 증언들을 들을 듣고 관련 기록들을 찾아내어 비교 정리하고, 만주시절 유격대 투신 전의 북한 김일성을 알았던 사람들을 만나 당시 일에 대한 증언도 들었다. 또 일제시대에 항일연군의 6사장 김일성이나 제2방면군장 김일성과 직접 관련되었던 당시 일을 잘 아는 많은 일본인들을 찾아서 증언을 들었다.

그의 업적은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증언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유격대 투신 전까지 만주에서의 북한 김일성의 행적을 자세히 밝힌 것,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해당되는 인물로 김창희, 김광서 두 분을 발굴한 것, 보천보 사건의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을 밝힌 것 등 많다.

다만 제2방면군장 김일성도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오판한 것은 실수이다. 그렇게 판단할 만한 근거도 몇 가지 있었지만 당시는 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지금은 자료 전산화 덕에 노조에(野副) 토벌대 문서가 많이 발굴되어 제2방면군장은 북한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또 자료 부족으로 유격대 투신 후의 북한 김일성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밝힌 것이 없다는 것도 흠이다. 빨치산 출신 중에는 남한으로 온 사람이 아무도 없고, 자료들을 찾기도 어려울 때이니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서대숙이나 와다 하루키는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틀린 주장이고, 그가 1937년 11월에 전사했다는 기록과 증언이 숱하게 발굴되어 사실인 것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다. 김일성 회고록을 봐도 6사장 김일성 관련 부분은 당사자가 아니니 당시 일을 정확히 몰라 사실과 맞지 않는 명백한 거짓말들을 하고 있는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2017-01-06 08:43:29



gma



빨치산들이 조선독립운동 했나?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자 김일성(金一星)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朴尙實)이 암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일성은 사건 직후 이붕해(李鵬海, 1899~1950)에 의해 살해 당하고, 박상실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그런데, 나중에 동북항일연군 3로군 총사령 조상지가 가장 신임하는 수하였던 이복림(李福林, 본명 公道轸, 1907-1937)으로 밝혀졌다.

http://news.joins.com/article/3102507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7] 김좌진(金佐鎭) 장군 암살 밝혀지는 배후 [중앙일보] 1995.07.25 종합 10면

2017-01-07 12:43:32



gma



김일성도 조선혁명군 10여명을 살해하고 무기를 훔쳐 달아난 전력이 있다.

김일성이 무송에서 패거리 지어 못된 짓 하고 돌아다니자 중국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해지니, 보다 못한 조선인들이 저런 인간 놔두면 조선인들 전부가 중국인들에게 욕먹는다면서 양세봉 장군에게 저 일당을 제압해서 막아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양세봉 장군이 휘하의 고동뢰(高東雷) 소대장등 10명을 파견하여 제압하려 했는데 일행이 무송에 도착해 피곤하여 잠든사이 미리 정보를 들은 김일성 일당이 잠든 일행 10명을 전부 살해하고 무기를 훔쳐 도망갔다고 한다. 이 일은 이명영의 김일성 열전(1974년)에 당시 현지에서 그 일을 보고 들은 사람들의 증언이 실려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유순호의 “김일성 평전(2017년)”에는 고동뢰 소대장이 살해 당한 사건을 전혀 다르게 서술하고 있는데 살해 당한 사람은 고동뢰 소대장 1명 이고, 범인도 김일성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다른 사람의 증언을 싣고 있다.

고동뢰 소대장이 살해 당했다는 것만 같을 뿐 두 증언은 상당히 다르다. 어느 쪽이 맞느냐 체크할 필요가 있는데, 김일성 열전에 나오는 상황은 고동뢰 소대장과 함께 살해 당한 사람의 친구가 한 증언이고, 증언에 나오는 당시 상황과 인물들도 다른 기록들과 일치한다. 반면에 김일성 평전에 나오는 증언은 다른 기록들과 맞지 않는 것이 많아 신뢰도가 상당히 떨어진다.

저 사건이 일어난 해는 열전에는 1932년 2월이지만 평전에는 1931년 9월 이전 어느 때이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 고동뢰 소대장이 1932년 2월초까지 생존해 있는 것이 확인되므로 평전이 틀린 것이다. 또 평전에는 고동뢰 소대장이 죽고 그 후임으로 심용준이라는 분이 새 소대장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당시 조선혁명군 편제표를 찾아 확인해보면 제3중대 중대장 심용준(沈龍俊) 아래 제1소대 소대장이 고동뢰이다. 평전의 증언은 다른 기록과 맞지 않는 것이 많아 신뢰하기 어렵다.

이명영의 김일성 열전의 증언이 40년이나 더 일찍 나온데다 신빙성도 더 높으므로, 김일성은 1932년 2월에 조선 혁명군 고동뢰 소대 10명을 잠든 틈에 살해하고 무기를 빼앗아 도주한 것이 맞는 것으로 본다.

또 만주에서 간행되던 조선어 신문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04/18 일자 6면의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二)”에 보면 김일성은 조선혁명군 심용준(沈龍俊) 중대의 무기를 약탈해 도주한 일도 있었다고 했다.

김일성은 양세봉 장군 휘하 조선혁명군에는 엄청난 피해를 입혀 조선인들이 하는 독립운동은 방해만 했고, 중국인들이 주도하는 유격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은 좀 했는지 모르지만 그게 조선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김일성은 중국말은 능하고 조선말은 심하게 더듬거렸고, 이름도 조선 발음 김일성(金日成) 아닌 중국 발음 진지첸(金日成)으로 한 것이 소련군 문서에서 밝혀진다. 이런 자가 무슨 조선독립에 관심이 있었다는 건지?

김일성 평전에 나오는 증언들은 너무 후대의 것이라, 거기에 실린 손정도 목사의 외손녀의 증언은 어머니 손인실여사가 생전에 남긴 증언과 전혀 다르고, 고동뢰 소대장 피살 사건의 증언도 다른 기록과 맞지 않는 것이 많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우선 체크해 본 것만으로도 이런 문제가 있다면 “김일성 평전”의 다른 증언들도 면밀한 검증을 거쳐야만 믿을 수 있을 것이다.

2017-01-07 12:45:02



gma



장백현에 김일성의 초등학교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고 하네요.

http://db.history.go.kr/id/fs_009_0030_0010_0010

長白縣 檔案館 所藏 韓國史 關聯 檔案資料 槪況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

공개 불허라니 지금 볼 수는 없겠지만 김일성의 본명이 金成柱 / 金聖柱 어느 쪽인가도 논란되는 사안인데,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가 되겠군요. 둘 중 하나일텐데, 현재 알려진 자료에는 두 가지가 다 나와서 어느 것이 맞는지 결론을 내기 어렵습니다.

2017-01-08 01:47:58



gma



연변 당안관에도 만주국의 김일성 관련 자료가 꽤 있을 듯합니다만 국사편찬위가 조사해서 밝힌 것으로 김일성 중대원 귀순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이건 공개하는 자료같으니 연변 분들 중 누가 찾아보고 공개해 줬으면 좋겠습니다만….

http://db.history.go.kr/id/fs_009_0030_0010_0010

延邊檔案館에 소장되어 있는 僞間島省公署 檔案資料(大同1年~昭和20年)

현재 延邊檔案館에 소장되어 있는 僞間島省 檔案資料는 도합 142권에 달한다. 그중 한국사와 관련된 일부 당안목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2) 「金日成匪等一中隊員歸順之件」(3장), 全宗:19號, 目錄:1號, 案卷號:137, 文件日期:大正 8年~昭和 20年.

2017-01-08 01:53:22



gma



김일성은 이승만처럼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국민들의 지지로 지도자로 선출된 사람이 아니다.
국민들이 어디서 뭐 하던 사람인지도 모르는 자가 스탈린의 발탁으로 소련군 무력과 정치공작의 전적인 지원을 받아 권좌에 오른 국민 주권 강탈자이자 소련 앞잡이일 뿐이다. 그런 인간이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는 무한 권력을 휘둘러 수백만 동족을 죽이고 세습전제왕조를 꾸려 전국민을 노예로 만든 것이다. 소위 김일성의 항일 업적이란 것은 김씨 일가 권력의 부당성을 감춰주는 가장 효과적인 가림막이다.

그의 항일투쟁이란 것은 자격없는 인간이 억지로 지도자가 된 것을 합리화시켜 국민들을 세뇌하는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바늘만한 것을 소만하게 부풀려 조작한 것이 거의 전부이다. 어릴 때 만주로 가 반쯤 중국에 동화된 사람이 중국인들 틈에 섞여 빨치산 활동 좀 한 것은 아무리 잘 봐줘도 결코 조선독립운동의 주류가 될 수 없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그런 왕조의 노예 생활이 싫어 탈북해온 북한 인텔리라는 사람이 김일성이 어떻게 최고 권력을 잡고 국민을 노예로 만들었는지 핵심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왜 그런 짓을 합리화시켜주는 도구로 이용한 빨치산 투쟁의 위대성(?)을 옹호하는 일에만 집착하는 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봐라, 김일성이 대단한 항일 투쟁을 한 것이 사실아니냐, 우리를 노예로 삼을만한 자격이 있었지 않느냐, 그런데 남한사람들은 왜 이런 위대한 인물을 가짜로 만들었느냐고 투정하는 것을 보면 한번 노예는 대대로 노예가 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인텔리라는 사람이 그 자가 민족에 저지른 온갖 무지막지한 악행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무시하고, 그 자의 항일 업적만 애타게 찾아 정당화시켜주려고 애쓰는 판이니 북한 주민들이 언제 김가 일족의 사슬에서 풀려날 날이 오겠는가?

남한에 와서 기록을 뒤져보니 해방 직후 지도자나 각료급으로 거론되던 사람들 중에 북한 김일성이 나오기라도 하던가? 그렇게 위대한 항일 업적을 가진 사람에 대해 왜 남한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고, 어디서 뭐 하던 자인지도 몰라 가짜라는 소문이 날 수 밖에 없었는지 상황 파악이 그렇게도 안 되는가?

탈북자들은 김일성의 포장지인 항일투쟁만 보고 훌륭하다고 감탄할 게 아니라, 그것을 뜯어내고 속에 감추어진 북한 권력 획득 과정의 부당함을 보아야 하고, 그 권력을 제멋대로 사용하여 민족에 범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보아야 한다.

이승만, 박정희는 친일과 독재의 포장지로 싸고, 김일성은 항일의 포장지로 싸 놓으면 그 사람들이 지도자로서 한 일이 만들어낸 차이를 어떻게 제대로 볼 수 있겠는가?

2017-01-09 07:32:47



gma



유순호 김일성 평전의 김일성 진짜 주장은 잘못입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1/09/0200000000AKR20170109144900014.HTML?from=search

유순호씨가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은 사실무근이라고 했다고 하는군요.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은 해방직후 소련군이 데려온 진지첸 대위가 평양에서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며 대중앞에 처음 나설때부터 나온 주장입니다. 만주의 항일연군 관련자들은 해방직후 조선내의 사정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므로 그의 진위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지요. 그들은 한때 만주에서 金日成이라 칭하며 빨치산 활동을 했던 진지첸 대위를 알고 있었으므로 해방후 평양에 나타난 그가 김일성 장군을 칭했으니 진짜가 맞다고 잘못 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대로 해방직후 국내서 각료급 인사로 거명되던 이승만 김구 급으로 유명했던 김일성은 항일연군의 金日成이 아닌 오래전부터 유명했지만 누군지는 불분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인 것으로 명백히 밝혀졌지요.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는 진지첸 대위를 처음 본 평양의 대중들은 태반이 진지첸 대위보다 연상이었을텐데 새파란 젊은이가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익히 이름을 들어온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니 가짜라고 한 것은 당연한 것이죠.

만주에서 그가 金日成 이름을 쓰며 빨치산 투쟁을 한 것도 사실로 밝혀졌지만, 국내서는 아무도 그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만주 산야를 숨어다니다 소련으로 도망가서 5년간 소련의 시골에 들어박혀 숨어지낸 사람을 국내 사람들이 무슨 수로 알았겠습니까? 해방 당시 소련군이 데려온 무명인사 진지첸 대위가 지도자가 되기 위해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것은 더 이상 논란할 여지가 없습니다.

국내서 해방직후 지도자급 인물로 거론되던 사람들 중에 항일연군 출신 소련군 진지첸 대위는 전혀 보이지 않고, 누군지 불분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만 보일 뿐이지요. 동북항일연군 내 조선인들의 활동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고, 동북항일연군이란 조직이 있는 줄도 거의 몰랐고, 그들이 일본군에 쫓겨 5년간 소련으로 피난가 있은 줄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김일성 진위 논란에 대해서는 해방직후 국내사정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을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서대숙이나 와다 하루키처럼 해방당시 가짜설이 나오게 된 국내 사정은 도외시하고, 북한 김일성의 항일연군 내 활동만 조사하해서 판단하면 엉터리 결론이 나오는 겁니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사람들은 과연 그가 해방직후 국내에서 지도자급 인사로 거명되고 있었는지만 확인해보면 됩니다. 흔히 “선구”라는 잡지의 여론조사에 김일성에 대한 지지가 높게 나오는 걸 그가 진짜인 근거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 여론조사 기간은 1945년 10월초에서 11월초에 걸친 것으로 그 기간 중에 북한 김일성이 대중앞에 나타났지만 남한에서는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아는 사람이 있었다 해도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돌아온 정도로 밖에 이해할 수 없었던 시기이므로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여론조사로 봐야 합니다. 8.15 해방부터 북한 김일성이 대중앞에 출현한 10월 14일 이전의 김일성 이름이 나오는 기록만 봐도 판단 가능한 겁니다.

2017-01-10 01:40:08



hoot



김성주가 진짜 김일성이건 아니건, 이런 가정을 한번 해보죠.
2차대전 후 유고는 왕국에서 연방공화국으로 국체가 달라졌는데, 요셉 브로즈 티토가 나치와 전쟁 중이던 1943년 네레트바 강 전투에서 나치독일의 지원을 받은 체트닉을 박살낸 후 선포한 남슬라브연방공화국이 그것입니다. 티토는 빨치산대를 조직해 나치에 저항하기 전에는 노동자로서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건설에 일익을 담당했던, 혁명가 그룹의 일원이었습니다. 유고 국내에 그의 단단한 지지층이 있었기 때문에 상비병력 7만명의 빨치산 부대를 조직 지휘할 수 있었던 거죠. 1942년 티토는 유럽 반나치세력의 지도자 윈스턴 처칠과 회동함으로써 자타 공인 유고 독립투쟁의 지도자가 됩니다.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 건국과정에 스탈린이 준 도움은 없죠.
김성주가 티토처럼 국내에 강력한 지지기반이 있었다면 과연 그가 소련 극동군의 간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김성주가 김영환이라는 가명으로 1945.9 원산에 입항해 평양에 잠입했을 때, 그가 티토처럼 국내에 지지기반을 갖고있었다면, 소련군복을 입고 돌아왔던들 김성주의 환국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겠죠. 당시의 항일투쟁가들은 여러개의 이름을 쓰는 게 당연했고 김일성이라는 이름도 문제가 안 되었을 테니까요.
보천보 사건과 별개로 문제의 핵심은 김성주의 지지기반이 해방 직후 북한에 전무했다는 겁니다. 1940년 소련땅으로 들어갈 때 1912년 출생한 김성주의 나이가 만 28세인데, 그가 동북항일연군에서가 아니라 현준혁이나 김용범처럼 북한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평양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존재였다면, 굳이 나 김일성이오 하고 나설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김일성이 진짜냐 아니냐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김일성이가 진정으로 조선 해방을 위해 헌신하였던 자였느냐는 것을 규명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합니다. 동북공정은 동북항일연군이라는 조직이 중국공산당의 외곽조직이라는 데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즉 북한이 자랑하는 김일성의 독립투쟁조차 중국공산당의 영향 하에 있는 것이니, 조선인들이 자치할 수 없을 때 중국이 조선땅을 접수해 통치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죠. 중국의 속국을 원치않는 무장독립투쟁은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이라는 엄연한 군사조직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결국 일본제국으로부터 만주를 중국의 영토로 회복해야한다는 중국적 이데올로기에 근거를 두고있다면, 우리로선 딱 거기까지만 인정하고, 1943.11.27 카이로 선언이 일본 패망 후 만주와 별개로 독립을 인정허기로 한은 식민지 조선과는 하등의 연결점도 없다는 것을 역사학적으로 정리할 때, 김성주 김일성이라는 찌끄러기도 정리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2017-01-10 03:22:47







해방 당시 소련군이 데려온 김성주가 국내에서 지지세력이 전무한 완전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다는 건 얼마든지 확인이 가능하지요. 국내에 이름이 널리 알려질만한 일을 한 것도 없고요. 그런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한 첫번째 정치 공작이 항일영웅으로 조작하는 거고, 그래서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겁니다.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만주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간 사람들로 조선인이라는 의식도 약하고 중국에 반쯤 동화된 사람들입니다. 민생단 투쟁을 거치며 조선인 수백명이 처형 당하고, 살아 남은 조선인들은 완전히 중국인들에 종속되게 되는 거죠. 더구나 항일연군은 조선독립과 아무 관계도 없는 중공당 만주성위와 연해주 코민테른 극동 지부의 지시 감독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끝까지 살아남은 조선인 빨치산들 대부분은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죠. 소련으로 도망간 사람들은 소련군이 북한의 최고권력을 쥐어주는 바람에 북한으로 들어온 거지만, 그러지 않았더라면 소련의 고려인이 되었거나 만주 조선족이 되었을 사람들이죠. 국내에 연고도 기반도 거의 없었으니까요.

소련군 기록에 나오는 그 사람들 이름은 진지첸(金日成)처럼 한자명을 조선 음 아닌 중국 음으로 기재했습니다. 해방 당시 김일성도 중국말은 능했지만 조선말은 심하게 더듬거렸지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도 거의 없는 사람들이 조선독립을 간절히 원해서 조선독립운동을 했다면 웃을 수 밖에 없지요. 그 사람들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는 말석의 한 자리도 주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김성주가 피난간 소련은 일본에 못지 않게 독립운동을 탄압한 적국이나 마찬가지죠. 자유시 참변을 일으켜 항일투사 수백명을 몰살시켜 1920년대 항일투쟁의 맥을 끊어놓고, 1937년에는 연해주 항일운동 지도자 수천명을 처형하고 17만명을 한겨울에 중앙아시아로 끌고가 패대기쳐 해외 독립운동의 한 축을 완전히 무너뜨리죠. 그런 소련이 자신들에게 이용가치가 높은 빨치산들을 받아서 자기들의 개로 사육하여 북한 최고 권력을 쥐어 주죠. 김일성은 소련군 무력과 정치공작의 도움으로 지도자가 된, 국민의 주권을 강탈해간 이완용 뺨치는 매국노죠.

김일성은 조선인들을 위한 독립운동을 한게 아니라 자기 출세를 위한 투쟁을 한 겁니다. 그 결과로 엄청난 땅과 수천만의 노비를 얻었으니 대박친 거고요. 그 자 때문에 인민들은 쪽박을 찼지만 아직도 주권 강탈범이자 자신들을 노예로 만든 인간을 항일영웅이라며 찬양하는 사람들을 보면 남한에 와서 몸은 자유로워도 뿌리깊은 노예근성은 죽어도 못 버리는 거죠.

이승만이 무장투쟁을 안 했다고 무슨 독립운동을 했느냐며 비난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의 독립운동을 했죠. 실질적으로 독립에 큰 도움이 될 수 없는 무장투쟁보다는 일본을 꺾을 힘을 가진 미국의 조야를 움직여 카이로 선언에서 조선독립 약속을 받아내는데 큰 역할을 한 거죠. 영국은 식민지를 많이 거느리고 있어 처칠은 조선독립을 반대했는데 루즈벨트가 설득해서 집어넣은 거죠. 장개석은 중국문제 챙기기에 바빠 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승만이 미국 정치인들을 설득하는데는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거라고 예언한 영문 저서도 한 역할을 했습니다.

‘JAPAN INSIDE OUT(일본을 벗긴다, 일본 내막기)’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http://www.cfe.org/20160114_142166

이 책에서 이승만은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는데, 나치 독일, 무솔리니 이탈리아, 천황군국주의 일본, 스탈린 체제의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로 규정합니다. 스탈린 체제의 변종인 김일성 체제도 여기에 들어가는 거죠.

위키피디아에서 Totalitarianism을 찾으면 이승만의 저 책 이야기도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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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1 07:17:34







일제시대 빨치산 김일성의 활동이 조선, 동아 등 국내 언론에 좀 보도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1937년 6월 동아일보의 보천보 사건 호외 보도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은 넌센스입니다. 당시는 문맹률이 80~90%를 넘나들고, 교통 통신 사정도 열악해 신문 보급망이 지극히 제한적이라 구독자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동아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한 손기정 선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 보도하여 9개월 정간을 당해 독자 배달망이 와해된 상태에서 1937년 6월 3일 복간호를 간행한 다음날 보천보 사건이 터졌으니 호외를 냈다해도 복간 홍보용 전단지 성격이 강하고 받아본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해방 후 김일성이 집권하여 보천보 사건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이전에는 김일성 이름과 관련하여 보천보 사건을 이야기 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보천보 사건 자체가 선전대로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거창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신문들을 검색해 보면 빨치산 김일성 관련 보도는 1936년 가을부터 1940년 여름까지 주로 국경 근처에서 사단을 일으켰을 때 다수 나오는데, 1937년 11월 보천보 사건 당사자 6사장 김일성 전사 보도후 1938년 1년간은 김일성에 대한 보도가 거의 없습니다. 1939년 부터 다시 나타나죠. 이것은 6사장 김일성이 보도대로 전사한 것이 맞다는 증거입니다. 그가 생존해 있었다면 유독 1938년 1년간 갑자기 활동을 중단할 이유가 없지요. 1939년부터 다시 보도되는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이었던 북한 김일성일 것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다시 나타났으니 죽지 않은 것으로 오인한 것이 1939년 9월 1일자 사상휘보의 기록에 6사장 김일성의 출생지가 북한 김일성의 것과 일치하는 이유입니다.

국내신문에 1937년 보천보 사건을 전후하여 간삼봉 전투 등에 2사장 조국안과 6사장 김일성은 늘 함께 행동하는 것으로 보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김일성 회고록에는 2사장 조국안이 그 전해인 1936년 11월에 죽었다고 했으니 중요한 전투에서 같이 싸운 동료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당사자인 6사장 김일성이 될 수는 없는 거지요. 일제의 기록에는 2사장 조국안이 6사장 김일성과 비슷한 때인 1937년 11월께 죽은 것으로 나옵니다.

어찌되었건 빨치산 김일성 이름이 한때 신문에 자주 났다고 해도 신문 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건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로 전국적 명성을 가졌던 이승만, 김구, 전설의 김일성 장군 등은 이름이 신문에 자주 보도 되어서가 아니라 학교와 장터 등을 통해 구전으로 소문이 오랫동안 퍼졌기 때문에 유명해진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주요활동은 일제 첩보 자료에는 기록되었겠지만 신문에 보도될 일은 없었습니다.

빨치산들의 국경 부근에서의 활동이 신문에 자주 난 것은 비적들에 의한 양민의 피해 보도 형식이었지 독립운동 성격으로 보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빨치산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지도 않았고, 해방직후 국내에서 지도자 급으로 거명된 적도 없으니 신문보도가 사람을 유명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죠. 또 신문에는 김일성이 양민을 약탈하는 비적 두목으로 주로 보도되었는데, 실제로 양민들의 피해도 컸으니 신문 기사를 본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을 독립운동 지도자로 인식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2017-01-11 01:31:41



호야



-북한 김일성 주석 이전에 존재했던 4명의 김일성-

아시아투데이 2015,3,25 일자 보면,1939년 제2 방면군장도 북한 김성주가 아닌 걸로 말하네요./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320010012709&ref=search

북한 김일성 주석 이전에 존재했던 4명의 김일성

최영재의 기사 더보기▼ | 기사승인 2015. 03. 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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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3편] 의병장, 일본 육사 출신, 보천보 주역, 김좌진 암살 김일성, 북한 김일성과 달라…4인의 업적 조합해 본인 투쟁사로 날조

아시아투데이 최영재 기자 =

일제 강점기 한인들 사이에는 김일성 장군에 대한 전설이 있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인 까닭에 주인공 ‘김일성’의 이름자가 金日成인지 金一成인지 또 아니면 金一星인지 또는 金日星인지 확실치 않았다.

다만 한인들이 알고 있기론 일본이 대한제국 주권을 약탈하던 그 때부터 ‘김일성 장군’이란 용맹한 항일투사가 있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한만 국경에서 일본 군경과의 숱한 전투에서 백전백승하는 신출귀몰한 군략가며 애국자로 알려졌었다.

이런 김일성 장군은 기록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4명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 이전에 4명의 김일성이 실제로 일제를 상대로 무장독립투쟁을 벌인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이런 4명의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모두 조합해서 본인의 투쟁으로 바꿔치기해서 1945년 평양에 등장하게 된다.

◇의병장 김일성

최초의 김일성은 의병장 김일성이었다. 그는 1908년 경 일본군국주의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할 무렵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당시 인민의 무장투쟁을 의병투쟁이라 불렀다.

이 때 의병부대의 한 지휘자 김창희(金昌希·함경남도 단천 출생)가 자신의 출생신분을 숨기기 위해 ‘김일성(金一成) 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이 의병장 김일성은 단천 뒷산인 오봉산에 근거지를 두었다가 이후 더 험준한 검덕산으로 옮겼다. 이 지대는 단천·풍산·갑산 등지 고산지대로 그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바로 백두산으로 닿는다. 의병장 김일성은 그 주변을 활동무대로 삼았다. 이 김일성 부대의 신기한 용병술과 일화는 오래도록 함경도 지대 민중들의 신나는 이야깃거리였다.

백두산 일대에서 김일성 장군은 신출귀몰하는 전법으로 일본 군대와 싸운다는 소문이 계속됐으나 독립군 활동이 퇴조할 무렵인 1924∼25년 경에는 소식이 점점 뜸해지다가 1926년에는 그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전설의 김일성 장군(일본 육사 출신, 본명은 김광서), 기병 장교 출신인 김광서 장군은 항일 투쟁시 백마를 타고 전투를 지휘했다. 국가보훈처는 그를 2003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발표하기도 했다. 김광서 장군은 독립군 양성기관인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교관 생활을 했다.

◇일본 육사 출신 김광서

뒤이어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한 사람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제23기 기병과를 졸업한 김광서(金光瑞·1888년 생)였다. 김광서는 도쿄(東京) 아사부(麻布)연대의 기병 중위로 근무하고 있을 때 1919년 3월 1일 전 조선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와 투쟁에 자극돼 그 해 6월 일본군에서 탈출했다. 그는 만주로 망명해 한국독립군의 전열에 참가했다.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싸웠는데 그 때 김경천(金警天 또는 ‘김일성’)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이 김일성 장군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민족주의 독립운동 노선을 지켰던 사람이다. 그래서 스탈린 치하에서 투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의 항일무장투쟁은 1926년 이후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이후 소련에 체포돼 1945년 봄에 독소(獨蘇)전선에서 전사했다는 소문이 있다. 수인(囚人) 부대의 사령관이었다고 하니 아마도 옥중생활 중에 지원입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위 두 사람은 민족주의자 김일성 장군이다.

그러나 이후 공산계 무장독립부대의 대장이 이 ‘김일성’이라는 전통 있고 용맹스런 이름을 계승하고 차용했다. ‘김일성’이란 이름은 그래서 더욱 유명해졌다. 일본의 탄압이 심하면 심할수록 한국 민중들은 김일성 장군 이름을 더욱 강력하게 기억하게 됐다.

김광서 장군은 기병장교 출신이라 항상 백마를 타고 전투를 지휘했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은 김광서 장군의 전설을 김일성 주석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북한의 김성주가 백마를 타고 항일유격대를 지휘했다고 주장하고 그런 그림을 평양의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1937년 보천보 사건의 주역 김일성

최초의 공산계 김일성은 1901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본명을 김성주(金成柱)라고 했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만주의 동간도 지방에 이주했으나 독립투쟁에 참가해 시베리아에 갔고 이후 모스크바의 공산대학에서 공부했다.

이후 소련의 붉은 군대에도 입대해 군사적 경험을 쌓은 후 1934년께 만주의 동북인민혁명군에 파견됐다. 그는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장이 됐다.

그가 일약 유명하게 된 것은 1937년 6월 4일 밤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잠입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를 습격하면서였다. 이 보천보 습격사건은 김일성부대의 존재를 확연하게 세상에 알렸다.

이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은 같은 해 11월 13일 양목정자(楊木頂子)에서 일·만군과 교전하다 전사하고 말았다. 쓰러진 김일성의 시체를 거두어가기 위해 항일연군 측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5시간에 걸친 교전이 있었으나 끝내 시체를 수용해 가지 못했다.

이후 만주군에서 인근 주민들을 불러 얼굴을 확인한 결과 제6사장 김일성의 시체였음을 확인했다. 당시 검시자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35∼6세로 보이는 얼굴이 작은 장년의 사내였다. 이 김일성의 죽음은 조선총독부에도 통보됐다. 이에 국내에서는 ‘매일신보(每日申報)’와 ‘경성일보(京城日報)’가 1937년 11월 18일자로 그의 죽음을 사실 보도했다.

◇백야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김일성

보천보 사건의 주역 김일성이 전사하자 국제공산당 지휘부인 코민테른은 1906년생인 김일성(金一星)을 1938년에 만주에 파견해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단장으로 임명했다. 이 김일성은 그전인 1930년 1월에 민족진영의 김좌진(金佐鎭) 장군을 암살해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이 김일성은 간도에 있는 대성중학을 졸업한 후 5·30 간도폭동사건에 행동대장으로 참가해 일본의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탈출, 소련에 들어가 적군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김일성의 아내는 제2방면군의 여자 청년부장 김혜순(金惠順)이었다. 그녀는 1940년 4월에 부상한 몸으로 체포돼 남편에 대해 털어 놓았다. 그 기사가 조선일보 1940년 7월 5일자 제1석간 2면에 실려 있다.

그는 1939년에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 군장이 되고 1940년 3월 25일에는 일본군 마에다(前田) 부대와 교전해 마에다 부대장 이하 63명을 전사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점차 일·만군에게 쫓겨 1940년 12월에는 소련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소만(蘇滿) 국경에 있는 오케스카야 야영학교(만주에서 활동하는 빨치산의 교육훈련기관)에서 그의 부하들을 모아 제1지대를 조직해 1941년 봄에 다시 만주에 잠입했으나 다시 오케얀스크에 돌아가 다음 해인 1942년 오케얀스카야 야영학교 책임자 겸 군사정치과의 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후방교란, 파괴공작을 가르쳤으나 병사했다.

이 4명의 김일성 모두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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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ong@asiatoday.co.kr

2017-02-27 09:16:04



rinyang



가끔은…
주성하씨가 베트콩인가 싶을 때가 있지요.
그렇지만… 김일성 평전 출판 문제는
돈이 안되기 때문일 뿐…이고
주성하씨의 생각은
아직도 대한민국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 생각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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