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김낙중 선생 89세 일기로 별세 - 민중의소리
통일운동가 김낙중 선생 89세 일기로 별세
권종술 기자 epoque@vop.co.kr
발행 2020-07-30 19:39:24
수정 2020-07-30 19:3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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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며 통일운동가로 활동해온 김낙중 전 민중당 공동대표가 지난 29일 새벽 향년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31년 경기도 파주시에서 태어난 김낙중은 경성농업중학교와 서울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1955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면서 젊은이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는 취지로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만들어 이승만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에 헌법상 청원의 권리로서 청원서를 보냈지만 치안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고 김낙중 선생ⓒ민중의소리
1957년엔 자신의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가지고 북을 방문해 논의하려했지만, 북에서도 간첩으로 의심받아 북한당국에 의해 평양의 예심처라는 감옥에 들어갔다. “치안국 중앙분실장이 보내서 여기에 왔다”는 거짓으로 쓴 자술서를 쓰고 풀려났다. 이때의 월북으로 인해 김낙중 선생은 간첩죄 등을 적용받아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상고심에서 간첩죄 부분은 무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거쳐 대학원을 다닌 김낙중 선생은 5·16쿠데타 직후 이른바 ‘김낙중 남파간첩 사건’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를 시작으로 73년 ‘간첩예비죄’ 등 다섯 차례의 사형선고를 받았고, 18년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1992년 ‘조선노동당 간첩사건’으로 구속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로 1998년 8월 출소했다. 당시 국제앰네스티는 김낙중 선생을 양심수로 지정하고 석방을 요구했다.
2006년 국가정보원 발전위원회의는 이러한 김낙중 선생의 간첩 혐의와 관련해 “1957년과 1963년 사건 당시에는 김낙중이 ‘북한의 간첩으로 남파되었다’는 내용과 관련해 실형을 선고 받은 사실이 없고 김낙중이 월북했던 때로부터 무려 16년이 지난 1973년 사건 당시의 수사결과와 판결내용을 별도 조사 없이 그대로 인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비록 김낙중이 1990년 공작원을 접선하고 공작금 210만 달러와 공작장비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36년간 고정간첩으로 암약했다는 안기부 발표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밝힌 바 있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원 및 사무국장으로 일했고, 민족통일촉진회 통일정책심의회 의장, 민중당 공동대표, 평화통일시민연대 상임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김남기 씨와 아들 김선혁 고려대 교수, 딸 김선주·김선결 씨가 있다.
빈소는 경기 일산장례식장이고, 발인은 31일 오전 9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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